제18장, 바울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특별 계시(고후12: 1-10)

 

 

1. 바울의 체험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해 (1-3)

 

(1) 바울의 특별한 체험

 

사도바울은 보통 사람들이 겪을 수 없는 매우 특이한 천상의 체험을 했다. 그것은 일반 종교적인 경험이 아니라 사도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였다. 이는 사도 이외에 어느 누구도 체험할 수 없는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바울은 그에 대한 자신의 체험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랑 삼아 드러내는 것이 무익하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체험을 기록하게 된 것은 스스로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영역에 관한 교훈을 주고자 한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시대의 어떤 사람이 바울과 유사한 천국을 체험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엉터리일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이 천상에 다녀왔다든지 하나님의 비밀스런 영역을 직접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말이거나 종교적인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나아가 바울과 같은 신비한 체험을 하기 위해 기도에 몰입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위이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를 쓸 당시로부터 14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갔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는 자신에 대해 3인칭을 사용하면서 객관적인 표현을 했다. 바울은 자기가 갔던 그곳이 매우 아름다운 낙원이었음을 밝혔다. 이는 그가 보았던 셋째 하늘이 이 세상에서는 전혀 경험할 수 없는 아름다운 영역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영원한 낙원인 셋째 하늘에 올라간 바울은, 그 때 자신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존재했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는 것이었다. 이는 바울의 몸이 실제로 셋째 하늘로 올라갔다가 내려왔는지 아니면 그의 몸은 땅에 있는 채 특별한 계시의 방법으로 그곳을 체험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바울은 그 때 셋째 하늘을 방문하여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놀라운 말을 들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는 것을 직접 들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바울은 천상에 계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시의 말씀을 듣고 진리에 대한 구체적인 깨달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지상의 어디에 머물고 있을 때 그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을까? 물론 그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닐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구체적인 사건이었다는 점에서는 생각해 볼만한 문제이다. 바울이 마게도니아 지역에서 고린도후서를 쓸 때로부터 14년 전이라면 과연 어디서였을까?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를 기록한 연대가 대략 AD55-56년경이라면 그로부터 14년 전이란 41-42년경이 된다. 그 때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을 한 후, 삼 년간 아라비아에 갔다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다음 고향 다소에 와 있던 시기와 일치한다. 바울의 공 사역의 시작이 예루살렘 공의회로부터 공적인 인정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안디옥에서의 사역으로 이해한다면 당시는 바울이 아직 공 사역을 시작하기 전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바울을 셋째 하늘로 불러 올리신 사건에는 고향 다소에 내려와 있던 바울에게 사도권을 부여하셨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아마 그 때부터 바울은 사도로서의 자기의 공적인 지위를 깨달아 알았을 것이다. 이는 바울의 사도직 시행의 근원이 되는 사건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나중 예루살렘 공의회가 바울을 사도로 인정해 안디옥으로 초청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공인하는 것과 연관된다.

또한 우리가 분명히 이해해야 할 점은 바울의 체험이 오늘날 우리 시대의 성도들이 체험할 수 있는 보편적 성격을 지닌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아가 그것은 바울이 원해서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이 바울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사도로 부르셨던 것이다.

 

(2) 셋째 하늘(the third heaven)과 낙원(paradise)

 

바울이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 올라갔던 셋째 하늘은 과연 어디였을까? 물론 우리는 그곳을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물리적인 우주 공간만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이는 그에 넘어서는 신령한 장소적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곳은 아마도 에녹과 엘리야가 살아있는 몸으로 올라가 있는 영역일 것이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승천하여 올라가 계신 곳일 것이다.

에녹과 엘리야는 그곳에 올라가 지금까지 머물고 있다. 그에 반해 사도바울의 몸은 그곳에 잠시 올라갔다가 지상으로 다시 내려왔을 수 있다. 바울이 그 때 자기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른다(고후12:2,3)고 한 말은 그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 영역은 나중 사도요한이 천상으로 이끌려 올라가 열린 하늘 문을 통해 직접 목격한 곳(4:1)과 일치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3) ‘원상(原狀)의 나라’, ‘천상(天上)의 나라’, ‘천국’(天國), ‘하늘과 땅’, ‘새 하늘과 새 땅’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한시적인 영역이다.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거룩한 영역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단일 영역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우리로서는 그에 대해 완벽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단지 기록된 말씀을 통해 조심스런 짐작을 함으로써 무한하신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우선 하나님의 거룩한 영역인 원상의 나라의 존재를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원래 계시던 영역이 곧 원상의 나라이다. 우리는 그곳에 대해 구체적인 지식을 가질 수 없다. 성경은 그에 관하여 완전히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그곳이 처음부터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원래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는 분이다. 삼위가 아닌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들을 죄악 세상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목적으로 삼위 하나님으로 변화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에도 원상의 나라에서 삼위 하나님 상호간에 무한한 영광을 돌리는 신비한 분으로 존재하셨던 것이다.

타락한 인간으로서 원상의 나라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분명한 사실은 그 곳은 인간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놀라운 영광과 위엄이 넘치는 영역이라는 점이다. 그 나라는 거룩한 하나님의 속성과 그의 영화로움이 충만한 곳으로서 피조물인 인간들이 감히 넘볼 수 없다.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바는 원상의 나라와 구별되는 천상의 나라(heaven)이다. 인간들은 천상의 나라에 대해서도 성경의 계시에 따라 지극히 부분적인 내용만 알고 있을 따름이다. 그 곳은 원상의 나라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서로 간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분명한 사실은 천상의 나라에는 살아 승천한 몇몇 성도들과 이 세상에서의 생애를 마감하고 죽은 여러 성도들이 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곳에는 에녹과 엘리야처럼 살아있는 채로 올라간 성도들과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을 비롯한 구약시대의 많은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가 있다. 또한 베드로와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과 신약교회 시대에 살았던 모든 믿음의 선배들이 그곳에 가있다.

사도바울이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 올라갔던 셋째 하늘은 바로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천상의 나라일 것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 가운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6:9) 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하늘은 곧 천상의 나라로 이해된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원상의 나라천상의 나라사이의 구별과 연관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성경에는 천국(Kingdom of God)에 관한 기록을 하고 있다.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천국복음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천국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좁은 의미에서의 천국은 성도들이 죽어서 가게 될 왕국이 아니라 이 세상에 강림하신 메시아와 연관되는 개념이다.

세례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 사역을 앞두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3: 2)고 외치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강림하신 참 메시아에게로 돌아설 것을 촉구했다. 그에 뒤이어 예수님께서도 동일한 선포를 하셨다(4: 17).

세례요한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천국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죽어서 가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이 세상에 침투해 들어오는 세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사탄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에 대한 전투적 개념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창세기315절에 약속된 그 여자의 후손이 세상에 강림하심으로써 아담을 파멸에 빠뜨린 사탄을 응징하는 천국 세력이 임했다는 것이다. 여자의 후손은 때가 되어 왕으로서 나라를 이끌고 이 세상에 침투해 들어오게 되었음을 선포하고 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3: 15);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11: 12)

 

하나님께서 파멸에 빠진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여자의 후손’에 연관된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인해 성취되었다. 이 세상에서 펼쳐지는 천국은 메시아의 도래와 직접 연관되며 그 천국이 세상에 침투해 들어옴으로써 하나님의 몸 된 교회로 세워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상교회를 사탄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전투하는 교회로 이해한다. 이는 곧 천국이 지상의 교회를 통해 구속(救贖)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게 됨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처음부터 인간들에게는 삶의 터전으로서 하늘과 땅이 주어졌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창조하셨다(1). 타락한 인간들이 현재 살고 있는 하늘과 땅은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영역이다.

물론 죄로 인해 오염되기 전의 우주만물은 깨끗한 영역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께 범죄함으로써 오염된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주하는 이 세상은 거룩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마지막 심판 날이 이르게 되면 처음 하늘과 땅은 범죄한 인간과 더불어 심판을 받아 종언을 고하게 된다.

그러므로 창세전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들에게는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약속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창조하셨던 하늘과 땅 대신 자기 자녀들을 위해 새 하늘과 새 땅을 예비하신다. 그 곳은 의미상 처음 세상과 연관성이 있으면서도 영역은 단절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을 받은 백성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그 새로운 세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원히 거할 아름다운 영역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회복한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지으셨을 때와 같이 영원토록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며 성도들의 교제를 나누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지게 되는 궁극적인 소망이다.

 

 

2. 주의해야 할 지나친 사색 (4-6)

 

사도바울은 하나님에 의해 셋째 하늘인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사람들이 형언하기조차 어려운 놀라운 말을 들었다는 사실을 말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바울이 특별히 체험했던 하나님의 은총은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것이었다. 그는 그에 대한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따라서 자기가 셋째 하늘에서 목격하고 들었던 사실에 관한 것을 사람들 앞에서 자랑 삼아 떠벌려 이야기 하지 않았다.

바울은 자신을 객관적인 인물로 묘사하면서, 그런 사람의 체험을 교회 가운데 드러내 널리 알릴 만 하지만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말했다. 그는 자기의 약한 것들 외에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음을 고백했다. 바울이 자신의 연약한 부분을 자랑한다는 말은, 교회를 위해 당하는 모든 어려움과 성도들 가운데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것 밖에는 자랑할 내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설령 자기가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점을 자랑한다고 해도 그것이 결코 헛된 자랑은 아니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는 그의 자랑이 거짓이거나 과장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말을 듣고 어린 교인들이 그에 대한 지나친 상상을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범위를 넘어서려는 오류에 빠질까 봐 염려했다.

죄에 빠진 인간들 스스로는 결코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세계에 대해 올바른 지식을 가질 수 없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그 지식을 완벽하게 가지지 못한다. 단지 하나님께서 기록된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만큼 알아갈 수 있을 따름이다.

그렇지만 타락한 인간들은 자신의 종교에 연관된 지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애쓰는 경향이 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뜻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을 상상함으로써 우상을 만들어 낸다. 이에 대해서는 기독교인들 또한 유사한 유혹을 받게 된다. 그들은 기록된 성경의 교훈을 넘어 마음대로 추론하며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정확한 지식이 아니라 인간들의 종교적 욕망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3. ‘육체의 가시’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 (7, 8)

 

사도바울은 자기에게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가시가 있음을 고백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신앙이 어린 교인들은, 하나님을 성실하게 믿는 성도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허락되는 하나님의 가시적(可視的)인 축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에게는 인생을 괴롭히는 부정적인 요소들이 사라지게 되리라 믿는 것이다.

이런 잘못된 생각은 초기 교회시대에도 널리 퍼져있었다.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평안하게 지키는 능력이 있으므로 하나님에 의해 세상의 만족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믿으셨다. 더구나 하나님의 특별한 사도인 바울에게는 더욱 큰 하나님의 물질적인 공급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보통 사람들이 가지지 않은 육체의 가시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바울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을 지속적으로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말씀을 맡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바울이 너무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바울이 언급한 육체의 가시란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었을까?

바울의 말 가운데는 우리가 추론해 볼 수 있는 분명한 두 가지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그 중에 하나는 그것이 사탄의 사자로 칭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그것이 바울에게서 즉시 떠나갈 수 있는 성질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었으므로 매우 힘든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에게 존재하는 사탄의 사자로 칭해진 그 가시가 떠나가도록 세 번 기도했음을 밝혔다. 그가 세 번 기도했다는 말은 그것을 위해 하나님에게 간절히 기도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간청을 들어주시지 않자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바울은 이제 그것이 자기의 몸에서 떠나가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하지 않겠노라는 말을 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육체의 가시사탄의 사자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몇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우선 바울의 주변을 맴도는 거짓교사들을 지칭하는 것일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을 괴롭히는 유대인 거짓교사들을 육체의 가시사탄의 사자로 묘사하며 그것이 떠나기를 간구했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신체적인 질병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바울의 몸에 어떤 질병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학자들은 그것이 안질(眼疾)이거나 간질(肝蛭)일 것이라 짐작하기도 한다.

물론 우리는 그 사탄의 사자가 유대인 거짓교사인지 신체적 질병 인지 단정적으로 확정 짓기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경우에 따라 그것이 바울에게서 완전히 떠나갈 수 있는 성격을 지녔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울을 심하게 괴롭혔지만 그로부터 즉시 떠나갈 수도 있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사탄의 사자육체의 가시가 자기의 유익을 위해 허락된 것으로 바울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자기를 괴롭히는 육체의 가시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특별한 은총의 방편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바울은 자기에게 존재하는 육체의 가시사탄의 사자로 인해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을 겪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엄청난 고난을 주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고난은 복음을 증거 하는 바울에게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는 또한 복음을 증거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명분에 연관되어 있다.

만일 바울이 복음전파와 연관된 고통을 겪었다면 많은 성도들로부터 존경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몸에 있는 심각한 질병으로 인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당했다면 그것 자체로 인해 존경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도리어 신앙이 어린 자들 가운데는 그것을 두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튼 우리는 바울이 가졌던 고통스런 ‘육체의 가시’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의 표시였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고통의 요소를 두셨던 것은 그로 하여금 자고(自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바울은 그것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의 표시라는 사실을 잘 깨닫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오늘날 우리 역시 중요한 깨달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에게 견디기 어려운 핍박이나 치유하기 어려운 질병이 존재한다면 무조건 그것을 제거해 달라는 기도만 해서 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자들 가운데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숙한 성도들은 바울에게 주어진 육체의 가시사탄의 사자와 연관된 의미를 통해 소중한 교훈을 얻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견고하게 훈련시키시는 방편으로서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시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단순히 육신의 고통으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이해하는 것이 성숙한 성도의 바람직한 자세임에 틀림없다.

 

 

4.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8, 9)

 

어리석은 교인들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추구한다. 그들은 타락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특별한 방편으로서의 축복을 최고의 값어치로 여긴다. 그러나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영원한 은혜만으로 더 이상 부족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사도바울은 사탄의 사자로 묘사한 육체의 가시를 자기에게서 제거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간구하는 바대로 응답하지 않으셨다. 즉 그의 고통을 제거해주심으로써 응답하신 것이 아니라 그대로 고통 가운데 살아가도록 응답하셨다. 성숙한 신앙인이자 특별한 사도였지만 그에게는 육체의 고통을 끌어안은 채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도리어 유익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베풀어진 자신의 은혜가 풍족하다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고통을 제거해주시기를 바라는 바울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허락지 않으셨다. 오히려 바울로 하여금 그 고통을 육체 속에 두고 살아가도록 요구하셨다. 그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지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그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을 가졌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 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 8,9)

 

우리는 여기서 성숙한 바울의 신앙자세를 보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후 자신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 필요이상으로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았다. 바울은 아마도 자기보다 훨씬 어려운 형편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 자신에게 있는 가시를 통해 얻게 되는 진정한 유익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기를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행위가 아니라 도리어 불신앙 행위를 되풀이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고통 가운데 두시는 하나님에 대해 전혀 원망하지 않았다. 원망은커녕 도리어 그로 말미암아 더욱 기뻐했다. 육체의 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그것을 통해 더욱 하나님을 의존하게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감사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연약한 부분으로 인해 더욱 자랑스러워 할 수 있었다.

이는 연약한 인간으로서 자기 스스로는 도저히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없지만 그에게 머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로 하여금 감사하게 살아가도록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신중하게 깨달아야 할 사실은 성도의 기쁨은 자신이 처한 형편이나 주변의 환경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어려운 고통 중에 놓여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으로 인한 참된 기쁨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설령 현실적으로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외형적으로 즐거운 형편에 처하게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것 때문에 지나치게 기뻐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것들은 일시적인 현상으로서 잠시 존재하다가 곧 소멸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이 처한 형편에 상관없이 항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게 된다. 바울은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고통 가운데 살았지만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그는 환난 중에 있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향해 항상 기뻐하라(살전5:17)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5. 성도의 진정한 기쁨 (10)

 

인간들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풍요를 누리며 즐겁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일시적이나마 그것이 상당한 만족과 기쁨을 제공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도가 된 자들 역시 그와 같은 속성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신앙이 어린 교인들은 자기의 삶을 즐겁게 누리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그렇게 열심히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응답해 주시리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욕망에 기인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뿐 아니라 참된 믿음의 선배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린 성도들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거기에 종교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면 그것이 마치 하나님을 위한 것인 양 착각하게 된다.

하지만 성숙한 성도들은 그런 이기적인 신앙 자세가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하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교회가 올바른 신앙을 소유하여 보존하기 위해서는 사도들이 가졌던 성숙한 삶을 본받을 준비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신앙은 결코 타락한 인간의 속성에서 정립될 수 없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들의 상식적인 시각을 통해 신앙적인 삶과 그에 대하여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 사도바울은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는 중에도 항상 기뻐하며 살았다. 몸에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가시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의 참된 기쁨은 항상 충만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소유하거나 어떤 목적을 성취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바울을 비롯한 믿음의 선배들은 결코 타락한 세상에서 복락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 나아가 자기의 멋진 인생을 꾸리기 위해 다양한 종교적인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하나님을 섬기며 복음을 선포하는 사역을 감당할 때 개인적인 인생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그렇게 드러났을 따름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으로 인해 자기에게 돌아올 공로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한다는 사실을 말했다. 세상에서의 모든 것이 형통해 잘 될 때가 아니라 도리어 연약하여 힘들 때 더욱 기뻐한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안목으로 볼 때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그에 대한 분명한 설명을 했다. 그가 그런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면서도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일을 겪을 때 무능하고 나약한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더욱 의존하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두고 바울은,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 10)는 고백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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