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바울의 교회를 위한 염려(고후11: 16-33)

 

1. 바울의 자랑 (16-18)

 

인간들은 항상 자신을 내세우며 남에게 무엇인가 자랑하려고 한다. 좀 더 약삭빠른 자들은 떠벌리지 않은 채 은근슬쩍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러한 성향은 인간의 일반적인 생리라 할 수 있다. 남이 가지지 않은 것을 좀 더 많이 가지게 되면 우쭐거리며, 없는 사람은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게 된다. 그것이 결국 자랑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불신자와 구별되는 무엇인가 다른 면이 있어야 한다. 과연 타락한 인간들에게 자랑할 만한 궁극적인 요소가 있기는 한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들에게는 진정한 자랑거리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남의 부러움을 사는 어떤 대상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욕망과 연관되어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의 굴절된 가치관에 빠진 어리석은 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성도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참된 지혜를 소유한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도록 당부했다. 설령 다른 사람들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고 할지라도 자기에게는 진정으로 자랑할 만한 것이 있음을 말했다. 그가 자랑하고자 한 것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복음에 연관된 것이었다.

바울은 주님의 이름과 권위를 핑계 삼아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비록 자신에 대해 온전하다고 생각지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확신에 찬 신앙을 자랑하고자 했다. 그는 개인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려 한 것이 아니라 복음에 참여하는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것을 드러내며 자랑하고 있는 것처럼, 바울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신의 삶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최선을 다해 섬겨 온 바울이었지만 자신의 삶을 사람들 앞에서 세상의 자랑거리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앙을 자랑 하려 했던 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성도들이 진정한 신앙의 삶을 본받을 수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2.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지상의 교회 (19-21)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지러운 세상 가운데 살아가면서 항상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한다. 주변에는 항상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 교회 안으로 이단 사상을 끌어들이기 위해 부단히 애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을 핑계 삼아 호색(好色) 즉 음란한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자기의 목적추구와 함께 세상에 대한 탐심을 드러내게 된다.

어리석은 지도자들은 교회의 본질적인 면을 지키려 하기보다 항상 종교적인 형식을 치장하기에 급급하다. 그들은 영적인 면과 인간의 정신내면이 위험한 사상으로 인해 부패해 들어가도 그 절박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 사도 베드로는 자신의 편지에서 그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다. 이는 신앙이 어린 교인들이 저들의 잘못된 사상에 미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 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벧후2: 1-3)

 

어리석은 교인들은 매 주일 교회에 출석하면서도 저들의 악한 행위를 뒤따라가며 세상을 즐기려 할 것이 틀림없다. 신앙이 없거나 어린 교인들은 겉보기에 유능해 보이는 종교 지도자들의 세속적인 행태를 거의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 특히 눈앞에 보이는 그럴듯한 현상들을 통해 세상에서의 성공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듯이 선전하면 쉽게 그에 편승하게 되는 것이다.

죄에 물든 이기적인 인간들은 강한 자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반면 약한 자에게는 강한 면모를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기심과 자기 보존 열망에 익숙한 인간들은 자기중심적인 대처를 통해 개인적인 안도감을 획득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서는 타락한 아담의 속성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여전히 그 속성이 남아 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 역시 그런 조악(粗惡)한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소유한 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로워야 했지만 양의 가면을 쓴 늑대인 거짓 교사들을 쉽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교회 가운데 악한 누룩을 용납하면서도 그것이 마치 교회를 위한 것인 양 주장했다. 하나님의 참된 지혜를 가져야 할 교인들이 도리어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지혜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사악한 자들은 항상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적절히 이용하려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핑계 대는 종교인들은 교회라는 이름을 앞세워 자기의 속셈을 채우기에 급급하다. 그런 자들은 달콤한 언술로써 어리석은 교인들을 미혹하여 저들을 이용하며 하인처럼 부리거나 집어 삼키고자 한다. 심지어 그들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강압적인 폭행마저 서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자들은 그들과 그들의 위험한 사상을 세속적 가치와 융화시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도바울은 배도에 빠진 악한 자들과 달리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진지한 자세로 임했다. 그는 결코 자기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용하거나 부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바울에게는 거짓 교사들이 스스로를 위해 조작한 논리대로 자랑하는 것 이상의 진정한 자랑거리가 있었다. 바울은 그것이 자신에게 어리석은 자랑인 줄 알지만,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의 악한 태도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라도 자기를 자랑해 보이겠노라고 말했다.

 

 

3. 바울의 자신에 대한 변증 (22-27)

 

거짓 교사들은 항상 자기 속의 거짓을 감추기 위해 온갖 노력들을 다 기울인다. 그들은 본질을 벗어난 형식을 자랑하며 그것이 마치 대단한 의()라도 되는 양 내세워 어리석은 자들로 하여금 안도하게 한다. 특히 종교적인 열정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그런 성향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고린도교회를 어지럽히는 악한 자들은 자신을 가장하기 위해 스스로 정통성을 주장하며 히브리인으로서 아브라함의 혈통을 지닌 것을 자랑 삼아 말했다. 그리고 마치 자기가 그리스도의 충성스런 일군이라도 되는 양 주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통 이스라엘 민족의 혈통을 가진 자로서 그리스도를 위해 엄청난 수고를 한 듯이 떠벌리고 다녔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자신의 태생적 신분과 형편을 언급하며 그런 정도라면 저들과 똑 같은 식으로 비교한다고 해도 저들보다 부족할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해 말했다. 유대인의 혈통을 보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한 내용을 보든지 저들에게 뒤질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정통 히브리인의 혈통을 지니고 있으면서, 저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심한 고생과 수고를 했음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그는 결코 자신의 영예로운 삶을 추구하기 위한 인생을 살지 않았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사도로서 복음을 전파하는 동안 얼마나 힘겨운 삶을 살았는지 고백적으로 말했다. 바울의 고통스런 삶은 고린도교회 성도들뿐 아니라 일반 성도들의 삶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내용이었다. 어리석은 자들은 바울이 살아왔던 어려운 삶을 보며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자신의 삶에 대한 힘든 과정을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세상에서 그가 당한 삶은 어느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을 고통스런 삶의 연속이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했다는 이유만으로 악한 자들에 의해 수없이 많은 매를 맞았으며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란 서른아홉 번의 매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는 죽지 않을 만큼 매질하는 무서운 형벌이었다. 바울은 그런 매를 한 두 번이 아니라 다섯 번씩이나 맞았던 것이다.

그리고 세 번의 태장(笞杖) 곧 채찍으로 맞는 형벌을 받았으며 돌에 맞아 죽을 고비를 넘긴 사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첫 번째 이방 지역을 위한 복음전파 사역 동안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게 되었으나 다시 살아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두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14: 19).

또한 배를 타고 깊은 바다를 항해하다가 세 번이나 파선을 당해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던 적이 있으며 밤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서 헤매기도 했다. 그는 무자비한 강도들로부터 위협을 당하기도 했으며 자기를 시기하는 사람들로부터 생명에 대한 협박을 당하기도 했다. 배도에 빠진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을 대적하기도 했으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도 저들의 이익추구에 방해가 되는 바울을 위협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붐비는 도시들에서의 위험과 황량한 광야에서의 위험, 바다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형태의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거기다가 복음을 가장한 거짓 형제들의 저항과 모함도 많았다. 그들은 자신의 원래 모습을 감추고 슬며시 교회 안으로 들어와 진리를 허물며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기 위해 온갖 계략을 다 꾸미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항상 교회와 성도들을 말씀으로 온전히 지키기 위해 힘을 다해 수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삶 가운데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편안함과 안락함이란 찾아보기 힘들었다. 거기다가 마음 편히 잠을 자지도 못했으며 굶주리고 목마름으로 인한 심한 고충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는 또한 매서운 추위에 떨면서 의복이 충분치 못해 헐벗은 채 살아가야 할 때가 많았다. 그에게 있어서 풍요로운 삶은 항상 먼 거리에 존재했던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런 끔찍한 고통들은 가끔씩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항상 도사리고 있는 일상생활과 같은 것이었다. 바울은 그 후에도,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마감하는 날 까지 위에서 언급한 것들보다 훨씬 심하고 많은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우리 가운데 누가 과연 바울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겪고 있는가? 바울은 많은 경우에 사람들로부터 인간적인 대우조차 받지 못했으며 조직적인 음해세력에 의해 심한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 나아가 자연적인 재해나 위험으로 인해 엄청난 고생을 하기도 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도 그에 대한 분명한 기록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고전4: 9-13)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말로는 이루 형언하기조차 어려운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오죽 했으면 남들이 보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이기로 작정한 것으로 보일 만큼 심한 고통을 당한다고 말했을까! 사도뿐 아니라 그와 함께하는 성도들은 모든 사람들의 맨 마지막에 서 있는 하찮은 인간처럼 보였으며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다. 그런 모습을 보는 많은 사람들은 사도들에 대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냐며 손가락질 했을 것이 분명하다.

세상적인 안락을 추구하며 그에 듬뿍 취해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 바울과 같이 그런 끔찍한 환난이 닥친다면 과연 그 상황을 능히 대처하며 이겨낼 수 있을까? 예수를 열심히 믿어 이 세상에서의 복락을 누리려 하는 사람들이라면 바울이 당했던 핍박이 임하게 될 때 어떻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

누가 예수를 열심히 잘 믿으면 타락한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여 잘 먹고 잘 사는 축복을 받는다면서 잘못된 선전을 하고 있는가? 만일 그런 달콤한 논리를 내세워 주장한다면 복음으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당해야만 했던 사도들을 욕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바울을 비롯한 주님의 사도들은 결코 이 세상에서 복락을 누리는 그런 삶을 제공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4. 교회를 위한 바울의 염려 (28)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은 나름대로 다양한 염려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세상의 염려는 차라리 살아있는 존재라는 표식이 될지도 모를 만큼 인간과 밀착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명심해야 할 바는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한 바람직한 건설적인 염려가 있는가 하면 인간 본성으로 인한 무가치한 염려도 없지 않다는 사실이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진리에 무지한 불신자들과 다른 관점에서 그에 대한 선명한 이해를 해야만 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살아갈 문제에 관한 염려를 하고 있지만 천상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의 염려와 하나님께 속한 성도들의 염려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그는 지상에 세워질 교회의 기초가 되는 제자들에게 한시적인 세상에서 살아가는 문제로 인한 염려를 하지 말도록 요구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 31-33)

 

타락한 세상에 뜻을 두고 살아가는 자들은 자기의 인생 자체가 곧 삶의 목적이 된다. 그들에게는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게 잘 먹고 잘 입음으로써 풍족하게 살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을 추구한 결과 원하는 것들을 소유하게 되면 삶의 만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오염된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 세상에서의 풍족한 의식주(衣食住) 생활을 영위하고자 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을뿐더러 먹을 양식이 부족하고 남 보기에 그럴듯하게 입을 만한 옷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 자체를 얻기 위해 하나님께 매어 달리며 기도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미 잘 알고 계신다. 따라서 굳이 그런 것들을 달라며 적극적으로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성실하게 살아가는 자기 자녀들을 위해 필요에 따라 일용하실 양식을 허락하시게 된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염려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욕망의 발산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지나가는 세상살이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도록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교회에 속한 성숙한 성도들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6:33).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뜻과 그에 대한 관심을 요구하고 있다. 성도들이 천상의 나라를 바라보며 온전한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교만하지 않은 적절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신다.

사도바울은 항상 그런 마음을 가지고 성숙한 신앙인의 삶을 이어갔었다. 그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문제로 인해 지나친 염려를 하지 않았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의 성경 본문에 언급된 다양한 형태의 고난과 함께 엄청난 위협을 당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본질적인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에게는 항상 하나님의 몸 된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진정한 염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당하는 힘든 고통과는 별도로, 날마다 지상의 모든 교회를 위한 염려가 자신을 억누르고 있음을 고백했다. 그는 한 두 교회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한다고 말했다(고후11: 28). 이는 보편교회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지상에 세워지는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에 대한 그의 간절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과연 어떤가? 이 세상에서의 개인적인 영달(榮達)을 위해 인생을 허비하지는 않는가? 자신의 종교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감히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이용하려고 하지는 않는가? 혹은 지상에 존재하는 보편교회를 의식하지 않고 자기가 속한 교회만을 내세우고자 하는 개 교회주의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사도바울이 날마다 염려한다고 하는 보편교회에 대한 올바른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5.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진심 (29-33)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을 살지 말아야 한다. 그 대신 이웃들을 위해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들을 적절하게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이 처한 현실적인 문제에 집착하기보다 다른 성도들의 문제를 염려하며 그 어려움에 동참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주변 성도들의 아픔에 진정으로 동참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이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심한 고통을 당하게 되면 자기도 그에 대해 아픈 마음을 가졌다. 그것은 단지 정신적인 동정에 그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르신 교회의 탁월한 지도자였지만 결코 교만하거나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도들 가운데 누가 실족이라도 하게 되면 그것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가졌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자신의 그런 삶의 자세를 자랑하노라고 말했다. 교회가 경배하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그러한 삶과 언어에 대한 증인이 된다는 사실도 밝혔다. 이는 다른 성도들도 자신과 같이 주변의 이웃을 기억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독려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가운데 다른 이웃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교만한 태도로 아무렇게나 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를 믿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자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라도 실족케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18: 6,7)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를 타락한 인간들이 감히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배도자들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것과 크게 대비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자들이 과연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니면 위선된 거짓 교사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우리는 사람의 외모를 보고 그것을 정확하게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더욱 신중한 자세로써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을 실족케 하는 자는 엄한 심판을 받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은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안타까운 점은 타락한 세상 가운데서 그런 일이 항상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통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면 성도들은 교회 주변을 맴도는 위험한 인물들에 대해 여간 민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녀로 하여금 실족케 하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저주가 임하게 될 따름이다.

바울은 그에 관한 언급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음을 온전히 깨달은 후 다메섹에서 당했던 위협과 고통에 대한 말을 했다. 그가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주님을 만나고 나서 그 도시에 잠시 머물렀었다. 그 때 아레다(Aretas) 왕의 신하들이 복음전파의 전면에 서게 된 바울을 체포하기 위해 다메섹 성을 경비하고 있었다.

이처럼 사도바울은 복음을 깨달은 후 처음부터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세력에 갇히게 되었다. 즉 유대인과 이방인이 공조체제를 구축해 바울을 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 위급한 정황 중에 바울은 들창문을 열고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내려가 탈출했었다.

바울이 여기서 이 말을 한 것은 세상의 공격 가운데서 교회를 위해 자기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고백하기 위해서였다. 바울의 그런 행동은 생명에 연관된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위험한 탈출을 시도했던 것은 지상에 세워지는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한 사도의 역할과 그것을 위한 담대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항상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교회와 이웃을 기억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오늘날 우리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 속한 참된 성도들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사역을 마음 속 깊이 새기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모든 백성들에 대해 겸손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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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제7장,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기억하는 성도의 삶(고후5: 1-10) 서성필 2017.03.17 409
270 제6장,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의 회복(고후4: 1-18) 서성필 2017.03.10 378
269 제5장, 모세의 수건과 신약교회(고후3: 12-18) 서성필 2017.03.03 479
268 제4장,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와 새 언약(고후3: 1-11) 서성필 2017.03.03 402
267 제3장,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교회(고후2: 1-17) 서성필 2017.02.17 497
266 제2장,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고후1: 12-24) 서성필 2017.02.10 493
265 제 1장,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문안과 감사(고후1:1-11) 서성필 2017.02.03 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