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글은 우리가 읽어보고 생각을 많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교회에 주님의 은혜가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주안에서

서성필.

 

 

16, 거짓 선지자에 대한 경고(고후11: 1-15)

 

1. 사도의 역할 (1, 2)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완벽하게 지혜로운 자로 내세우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자신이 상당히 어리석은 자임을 고백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그의 겸손한 자세를 드러내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바울은 자신이 타락한 아담의 속성을 지닌 부족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인간들 중에 완벽한 자가 없을 뿐 더러 자신을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할 정도로 지혜로운 자는 아무도 없다. 따라서 자기가 최고인 듯 주장하며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발로일 따름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 가운데 자기 혹은 자기 무리가 하나님 앞에서 최고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일 그런 자가 있다면 극도로 교만한 태도를 드러내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 보다 더욱 미련한 자 일수 있다. 그런 자들은 주변의 잘못된 사람들을 적절히 비교하면서 자신의 상대적 우위를 살피며 교만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점은 타락한 기독교 시대에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믿고 섬기려는 자들 가운데도 그런 교만한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 시대에 개혁주의, 복음주의, 보수주의를 부르짖는 교인들에게 조차도 그런 경향성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말씀을 왜곡하는 비 진리에 대해 저항해야 할 사람들이 자기의 주관에 따라 연약한 하나님의 교회를 폄하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런 왜곡된 사조에 물들게 되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백성들에 대한 관심보다 자신의 눈에 띄는 자들을 동류로 만들어 그 범주를 중심으로 하여 스스로 최고의 평가를 내리는 잘못된 종교적 사색에 빠지게 된다. 성숙한 성도들이라면 그런 인본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러므로 사도바울 자신은 하나님의 열심으로써 교회를 위한 열심을 낸다고 말했다. 이는 인간적인 자기 열심에 기초한 열심이 아님을 의미한다. 자기의 종교이성적 판단에 따른 열심을 내게 되면 천박한 공적주의(功績主義)로 흐르기 십상이다. 타락한 인간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그에 대해 민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사도들의 겸손한 신앙자세를 삶 가운데서 배워 익히도록 해야 한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자기의 열성과 우월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과 그의 몸 된 교회를 온전히 세우는데 있었다. 나아가 그들은 종교적인 자랑거리를 만들고자 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숨은 성도들을 찾아 저들에게 영원한 진리를 전파하고자 애쓰셨다.

그와 연관하여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와 그의 순결한 교회를 중매하여 정혼시키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도들이 감당했던 중요한 역할은 거룩한 신랑인 예수 그리스도와 순결한 신부인 교회를 중매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그 일이 진행되고 있다.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은 사도들의 교훈을 좇아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신부가 된 자들이다. 신랑과 신부의 관계란 온전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신랑은 신부로 말미암아 기쁨을 취하게 되며 신부 또한 신랑의 기쁨에 참여하게 된다. 성경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설명하면서 궁극적으로 도래하게 될 혼인잔치에 관해 언급한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을 통해 그에 대한 선명한 묘사를 하고 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21:2);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21:9-11)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의 온전한 결합에 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그에 대한 비밀을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드러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가 말갛게 씻긴 성도들의 무리인 교회의 모습은 순결하고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이다. 종말이 되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아름다운 단장을 하고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로서 그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과 직접 연관된다.

따라서 지상의 교회는 궁극적으로 있게 될 혼인잔치를 기억하며 세상 가운데서 순결을 유지하도록 애써야 한다. 이 일을 위해 교회 가운데는 직분을 통한 말씀사역과 성례, 그리고 권징사역이 지속되고 있다. 그것을 신령한 방편으로 하여 지상의 교회가 역사 속에서 상속을 이루어가게 되는 것이다.

 

 

2. 아담 (Adam) 이 아니라 하와 (Eve) 가 먼저 미혹 당함 (3)

 

창조로부터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를 구분되게 창조하셨다. 이는 남녀 간에 신분상의 높고 낮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남녀를 서로 다르게 지음으로써 혼인을 통한 결합과 세상에 존재하게 인간들에 대한 작정을 보이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남녀의 차이를 보면서 하나님의 섭리와 창조에 연관된 그의 놀라운 뜻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도로 타락한 우리시대에는 남녀의 성적구분이 모호한 시대가 되어 버렸다. 생물학적 차이를 제외하고는 사회적 역할이나 기능상의 차이는 거의 사라졌다.

문제는 현대의 타락한 시대적 특성이 마땅히 구분되어야 할 중요한 성적인 구별에 대한 원래의 의미마저도 사라지게 했다는 사실이다. 세상에서의 분위기가 그렇게 되자 성도들의 가정과 하나님의 교회마저 그런 잘못된 풍조에 편승하는 안타까움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연약한 교회에서는 남녀의 구별된 의미를 등한시 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바는 타락한 세상은 어떠할지라도 하나님의 몸 된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의 가정 가운데서는 남녀의 성적인 구별이 드러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가정의 질서와 더불어 교회의 질서를 지탱하는 섭리적인 교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지상에서 온전히 보존되고 상속되기 위해서는 창조질서에 관한 근본적인 의미를 소중하게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대해서는 교회의 직분사역에 있어서 특별히 요구되고 있다. 성경은 그 사실에 관해 명시적인 기록을 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남녀 간의 엄연한 차이와 그에 따른 엄격한 질서가 존재함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딤전2: 11-14)

 

사도바울은 여기서 남녀의 관계를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연관 지어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결코 시대적인 배경이나 사회적인 형편을 고려한 것이 아니었다. 나아가 단순히 질서유지를 권면하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강한 어조로 명령하듯이 말하고 있다.

성경이 교훈하고 있는 바는 교회 안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거나 가르치는 것을 허락 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남녀 사이의 차별적인 지식이나 재능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인간들이 사탄에 의해 죄에 빠지게 된 과정을 통해 교회가 마땅히 받아들여야만 할 교훈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의 근본적인 질서에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의 교회는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 존재한다 할지라도 항상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인간들의 처음 죄를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깨달아야만 할 본질적인 내용이다.

위 본문에 언급된 바울의 가르침은 교회의 직분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직분제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에 허락하신 특별한 은혜의 방편으로서 인간들의 편의에 따라 제정된 것이 아니다. 나아가 인간들이 지상교회를 위해 추구하는 효율성을 기초로 한 것도 아니다. 타락한 세상 가운데 올바른 교회를 세워나가고 상속해가는 방편으로서 직분은 절대로 중요한 것이다.

건전한 교회와 성숙한 성도들은 그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곧 성도들의 가정과 개인적인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남녀의 성적인 역할이 혼탁하게 된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말씀을 통해 원리를 좇지 않으면 안 된다.

나아가 이에 대해서는 교회에 속한 어린 성도들 곧 교회의 자녀들에게 잘 교육되어야 한다. 그들이 대를 이어 교회를 상속받음으로써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사탄의 세력과 대치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순결을 보존해야 할 것이다. 지금 이미 걷잡을 수 없는 형편이 되어버렸지만, 남녀평등과 여권주의(feminism)에 대한 위험한 사고는 앞으로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장성한 성인들이 자녀들을 올바르게 양육하지 않는다면 건전한 다음 세대를 기대하기 어렵다. 거룩해야 할 하나님의 교회가 순결한 신부의 모습에서 멀어지게 된다면 결국 부패해져 갈 수밖에 없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바로 그 점을 우려하며 경고했던 것이다.

 

 

3.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 (4)

 

타락한 인간들은 원래부터 존재하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자기 취향에 맞는 신을 끊임없이 창출해 내려고 한다. 인간들은 성경에 계시된 거룩한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는 인위적인 신을 만듦으로써 그 거짓 신과 교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악한 인간들은 성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예수 만들기를 시도한다.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의 이성과 경험에 따라 인간의 개인적 혹은 사회적 집단 두뇌 안에 정형화된 예수를 조작하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변형된 예수를 만들어 두고 그에게 저들이 원하는 종교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졸렬한 사고 속에 진입해 들어간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종교성에 익숙해진 입술을 통해 형식상으로는 복음을 되풀이 언급하고 있을지라도 실제로는 거짓으로 위장된 종교적 욕망을 발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숙한 성도들은 항상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주의 깊게 살피고 그것을 폭로해야만 한다. 그것을 통해 어린 성도들이 거짓을 방어하고 피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성경에 계시된 진리를 떠난 교활한 인간들의 종교화 작업은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종교적인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예수의 이름을 들먹이며 거짓 영들을 내세워 어린 성도들을 미혹하게 된다. 하나님께 속한 성도들은 종교인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들을 아무런 분별없이 무조건 수용하려 해서는 안 된다.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그에 대한 구체적인 교훈을 주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4:1-3)

 

하나님의 모든 진리는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해 지상 교회 가운데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성경의 교훈에 반하는 예수는 이름만 동일할 뿐 참된 예수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다른 존재이다. 그리고 사도들이 증거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은 영은 성령이 아니라 귀신과 연관된 악령일 따름이다.

지상교회 주변에는 항상 자칭 사도라 주장하는 거짓 교사들이 분주하게 활동하고 있다. 사탄은 복음으로 덧칠하여 외견상 그럴듯하게 보이는 거짓 복음을 퍼뜨림으로써 하나님의 교회를 허물고자 애쓴다. 그러므로 성숙한 성도들은 거짓 교사들을 찾아내어 교회 가운데 용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상에 존재하는 건전한 교회라면 어느 시대 어디에 있든지 그에 민감하게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자칫 잘못하면 저들의 유화적인 태도에 넘어가 그들을 용납하게 된다. 사도요한은 계시록 가운데서 에베소 교회를 향해 그에 관한 말을 하고 있다. 그는 악한 거짓 교사들을 시험하여 저들의 거짓을 폭로한 점에 대해 칭찬하고 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2: 2,3)

 

교회가 세속화된 시대에는 개인의 주장을 성경적 확인 없이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목사라 주장하면 어리석은 자들은 아무런 판단 없이 저를 받아들이게 된다. 즉 교회가 공적으로 세운 성경교사인지 아니면 자칭 그렇게 주장하는 것인지 확인하는 과정을 등한시 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더욱 어려운 현실은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 문제이다. 만일 어떤 자가 목사가 되고자 할 때 신학교에 입학하여 몇 년 간의 과정을 마치고 나면 별 문제없이 목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입학하고자 한다면 개인의 종교적 결단이 아니라 교회의 공적인 요청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는 자기가 신학교에 입학하고 싶은데 교회의 추천서를 써달라고 요구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본인의 종교적인 열망보다 교사를 필요로 하는 교회의 의사가 더욱 소중하다. 교회의 공적인 요청이 있을 때 비로소 추천 받은 형제가 전문적인 말씀훈련을 받기 위해 목회자 양성기관인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과 온전한 절차 없이 신학교를 졸업한 후, 교회의 분명한 보증과 청빙이 없는 상태에서 목사가 된다면 그는 교회와 상관없는 자칭 목사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개인 당사자들보다 무분별하게 목사안수를 하는 종교 단체와 잘못된 기독교 지도자들이 문제이다. 그런 자들은 저들이 원하는 종교적인 활동을 위해 개체교회의 보증과 청빙이 없는 상태에서 목사임직을 시행하고 있다.

정당한 절차 없이 목사 안수를 받는 당사자들은 아직 그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손 치더라도 기독교 지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배도의 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도의 시대에 살면서 항상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 모든 것을 면밀히 살피며 지속적인 검증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바울 자신의 사도성에 대한 증언 (5-7)

 

하나님께서는 세상 가운데 자신의 몸 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특별히 사도들을 선택하여 부르셨다. 사도들은 구약성경을 통해 이 땅에 오신 메시아를 증거 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성도들에게 영원한 진리를 가르쳤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도들 중 일부를 선택해 보편교회를 위한 기록된 말씀들을 계시하셨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깨달아야 할 바는 사도들의 절대적 특이성에 관한 문제이다. 그들은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교회를 위한 공적인 사역에 있어서는 완벽한 자들이었다. 즉 평소의 일상생활에서는 완벽하지 않았으나 당시 회당과 교회 등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곳에서 선포하며 가르쳤던 모든 말씀들은 완전한 진리였다.

이는 사도교회 시대가 끝난 보편교회 시대에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배타적 개념이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교회 가운데 목회를 하며 성경을 풀어 가르치는 목사들의 언어와 사역은 결코 완전할 수 없다. 그 가운데는 항상 인간의 부족함으로 인한 해석상 오류가 따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교회의 목회자와 설교자들은 성경에 계시된 진리를 온전하게 선포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자세를 유지해야만 한다.

사도교회 시대에는 많은 사도들이 생존해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따라다녔던 제자들이 있었던가 하면 나중에 특별한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된 자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개별적인 배경으로 말미암아 사도들 사이에 계급상 높고 낮음이 구분되지는 않았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함께 생활했던 사도들이라 해서 나중 부르심을 받은 바울보다 더 큰 권위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안디옥에서 율법에 연관하여 외식을 취하던 베드로를 향해 심한 책망을 하기도 했다. 예수님을 삼 년간 따라 다녔을 뿐 아니라 열두 제자들에 대한 대표성을 띠고 있던 베드로를 바울이 직접 책망했던 것은 사도 직에 관한 많은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2: 11-14)

 

모든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신 자들이다. 그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인간적인 판단에 따라 사도가 되고자 지원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주님께 속해 있으면서 그가 시키는 일에 순종했을 따름이며 저들 가운데 계급적 높낮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한 사역자들이었던 것이다.

사도들 사이에 아무런 차등이 없었다는 사실에 대한 교훈은 오늘날 교회의 직분에 있어서도 그 정신을 그대로 적용해야 함을 말해준다. 즉 교회에 세워진 다양한 직분자들 사이에는 어떤 경우에도 계급상 높고 낮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교회 안에서 직분으로 인해 종교적 지배구조가 형성된다면 그것은 인간들의 타락한 속성의 잔재라 할 수밖에 없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높이기 위해 자신을 낮추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교회를 온전히 세우고자 하는 것이 사역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따라서 바울은 결코 교회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동시에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위한 사역을 하면서 저들로부터 자기를 위한 급료를 받지 않았음을 언급했다. 그는 저들에게 그 점을 상기시키면서, 복음을 위한 순수한 마음으로 아무 대가를 받지 않고 복음을 전한 것이 잘못되었느냐며 반문하고 있다. 어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고 적절한 액수의 물질적 지원을 받았지만 바울 자신은 저들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 그가 물질적인 대가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복음 사역이 다른 사도들에 비해 열등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목회자들을 비롯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설교를 하거나 강의를 하면서 돈을 주고받는 것이 마치 관행처럼 되어 있다. 우리는 이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원칙적으로 생각해 볼 때, 설교를 하고 돈을 받는 행위는 잘못이다. 그러나 강의를 하고 강사료를 받을 수는 있다. 이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시간에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는 신성한 예배참여인데 반해 일반적인 강의는 지적인 노동행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어떤 목사가 다른 교회에서 예배 시간에 설교를 하도록 초대받았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교회와 교회 사이의 공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설교를 하기 위해 다른 교회를 방문하기 위해 드는 실제적인 소요경비는 양쪽 교회 가운데 어느 한 교회가 부담해도 상관이 없다. 만일 설교자를 초대하는 교회가 재정적으로 힘든 형편이라면 설교자를 보내는 교회에서 그 경비를 부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에 반해 강의는 강사를 초청하는 교회와 강사 개인의 문제이다. 따라서 강사료는 그를 초대하는 쪽에서 부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물론 가난한 교회가 있어서 강사료를 감당하기 어려운 형편이라면 강사 자신이 필요경비를 부담하거나 그가 속한 교회나 주변 교회들이 공동으로 경비를 부담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에 연관된 강의를 하면서 반드시 강사료를 지급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서로 간 원만한 대화를 할 수 있다면 강사료에 관한 부담 없이 훌륭한 강의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강의는 하나님의 몸 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신령한 목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질화된 타락한 교회 시대에는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교회 가운데 행해지는 설교와 강의에 있어서도 책이나 특산품 등을 통한 감사의 표시가 아니라 거의 돈으로 그 대가가 지급되고 있다. 더구나 목사와 강사의 인지도에 따른 등급이 있어서 그 액수가 차등적으로 지급되는 것이 보통이다. 동일한 분량의 설교나 강의를 했는데도 어떤 사람에게는 고액의 돈을 지급하는가 하면 또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소액을 지급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실정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10:8)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의 직분자들인 목사, 장로, 집사 직분 사이에는 높고 낮음이 없으며 지배구조를 가지지 않는다. 직분자들 사이에서는 결코 상하계급에 따라 명령하고 복종하는 관계에 놓여 있지 않다. 모든 직분자들은 돈을 목적으로 하지 말아야 하며 오직 주님의 계시된 말씀에 귀 기울이며 그에 순종해야 할 따름이다.

 

 

5. 교회와 복음사역을 위한 재정적 협력 (7-9)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복음을 증거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 나아가 그것이 종교적인 성공과 출세를 위한 삶의 방편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직분자로서의 모든 성도들은 오로지 하나님과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한 복음 사역자들일 따름이다.

사도바울은 본문 가운데서 고린도교회를 섬기는 일을 위해 다른 지역에 있는 교회들로부터 재정적인 후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는 고린도의 성도들 때문에 여러 교회들의 돈을 강탈했다(robbed)는 표현까지 사용하고 있다(고후11:8). 그것은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고린도교회를 위한 것이었으며 그들에 대한 바울의 관심이 얼마나 간절했던가 하는 점을 보여준다.

바울을 비롯한 믿음의 형제들에게 절실한 것은 돈이 아니라 지상의 교회를 온전히 보호하는 일과 하나님의 복음을 올바르게 증거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재정이 부족했을지라도 고린도 지역의 형제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았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모든 형편을 잘 아는 마게도니아 출신의 형제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부족분을 채워주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울은 자기로 말미암아 다른 형제들이 지나친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조심했다. 그는 그 사실을 언급하면서 앞으로도 재정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극히 조심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이에 대해서는 오늘날 우리 역시 그와 동일한 자세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복음사역에 임하면서 자비량(自備糧)하려고 애썼다. 이는 자기로 인해 다른 형제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우리는 이에 대해 매우 주의 깊은 생각을 해야만 한다. 우선 바울이 자비량하는 것을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완벽한 사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시대에 자비량하여 복음전파 사역에 참여하겠다는 것은 충분한 검토가 뒤따라야 한다. 바울이 자비량했기 때문에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 쉽게 말할 수는 없다. 특히 교회의 목회 사역자에게는 더욱 그렇다.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은 매우 연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으므로 사역자들은 교회의 건전한 간섭아래 놓여있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 재정을 확충하며 자비량하여 사역하게 되면 다른 성도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제 맘대로 하려는 유혹을 받기 쉽다. 교회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지 않기 때문에 자기의 판단에 부합하지 않는 다른 성도들의 권면을 거부함으로써 자기중심적인 종교체제를 구축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기 쉬운 것이다. 특히 교회의 교사로 세워진 목사와 전담 사역자로서 선교사역에 참여하는 성도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사도바울은 디모데후서와 고린도전서에서 복음 사역자와 연관된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군인의 실상을 예로 들고 있다. 군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 생활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를 모병한 국가를 위해 생명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가 된 자들도 그와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2:3,4);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고전9:7)

 

사도바울이 이 본문들 가운데서 말하는 군사란 특별히 하나님의 복음사역을 감당하는 성도들을 지칭하고 있다. 그들은 개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군인으로서 자기의 생명을 내어놓고 신령한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자들이다. 그런 성도들은 특별한 사역을 위해 자기를 부르신 주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군사로 모병한 자는 그 일을 감당하게 된 자들을 위해 식량을 공급한다. 군대에 간 사람이 자기 먹을 것을 스스로 준비한다면 군인으로서 자기 지위를 유지하기 어렵다. 그렇게 되면 세상적인 능력에 따라 계층이 생겨나게 될 것이며 병사로서 지위를 온전히 지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바울 자신에 대한 변증을 포함하고 있지만 교회 시대의 모든 복음 사역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다.

 

 

6. 그리스도의 진리를 담고 있는 사도와 교회 (10-12)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는 단순한 허상이나 상징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진리의 내용은 사도들 가운데 실제로 존재한다. 따라서 바울은 사도인 자기 속에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바울이 자신을 자랑스러워했던 까닭은 자기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가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사랑하는 까닭은 자기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진리 때문이라는 사실을 고백했다. 이는 그 사랑이 인간적인 결단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바울은 다른 성도들을 위해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 말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에서도 그와 연관된 고백을 하며 자신의 삶을 본받도록 요구하고 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3)

 

사도바울은 모든 복음사역을 행함에 있어서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몸 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신앙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구했던 이유는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대해서는 오늘날 우리 역시 그와 동일한 신앙자세를 가져야만 한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자신의 인생을 꾸미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을 최상의 삶이라 여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삶을 살지 않고 다른 이웃을 위해 살 때 진정한 삶의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성도 개인이 지닌 건강, 지식, 물질, 재능 등 모든 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물을 부여 받은 것으로서 자신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여러 이웃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나누게 될 때 하나님의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참된 삶의 의미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기심에 가득 찬 악한 인간들은 그에 대한 아무런 인식이 없다. 복음에서 멀리 떨어진 종교인들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면서도 저들도 사도들과 똑 같은 일을 행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항상 그것을 이용해 자랑거리로 만들고자 기회를 엿보고 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런 자들의 기회를 끊어버리는 것이 합당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는 저들의 거짓된 종교적 활동이 어린 성도들을 미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적절히 이용하거나 그의 이름을 핑계 삼아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은 매우 악한 행위이다. 그런 자들은 스스로 자신을 교회를 위해 일하는 유능한 사역자나 일군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종교적인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교회를 이용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7.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 거짓 사도들 (13-15)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의 주변에는 항상 거짓 교사들이 득실거린다. 그런데 그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충성된 사역자로 내세우고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에게는 남 보기에 그럴듯한 나름대로의 종교적인 열성이 넘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런 자들이 숱하게 많이 있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양의 탈을 쓴 거짓 선지자들을 경계하도록 당부하셨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7:15)

 

우리가 명심해야 할 바는 가짜가 오히려 더 진짜 같이 행세한다는 사실이다. 거짓 교사들은 세련된 종교인의 행세를 하며 청산유수(靑山流水)와 같은 입담을 자랑할지도 모른다.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으며 윤리적인 실천에 상당한 힘을 기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본 모습을 은폐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한다. 신앙이 어린 성도들이나 어리석은 교인들은 저들의 겉모습으로 인해 진가(眞假)를 식별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숙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참된 교사와 거짓 교사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양의 탈을 쓴 이리들이 어린 교인들을 미혹하기 위해 위선적인 행동을 할 때 그것을 경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에 충실한 참된 교사들은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삶을 진솔하게 보여주려 하지만 거짓 교사들은 본질을 속이기 위해 더욱 그럴듯한 모습을 보이려 애쓰게 된다.

예수님 당시와 사도교회 시대에도 사악한 종교지도자들 가운데 그런 자들이 많이 있었다. 하나님을 대적하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수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러했다. 어리석은 백성들은 그들의 종교적인 행위를 보고 하나님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사역자들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고 있었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짓 선지자들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및 부활 승천 사건이 있은 후, 사도들을 통해 교회가 온 세상으로 전파되어 갈 때 역시 거짓 사도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런 주장을 하며 순진한 교인들을 농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리석고 순진한 성도들은 그에 대한 확실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속이며 진리를 어지럽히는 자들임을 밝히 말했다. 입술을 통한 저들의 미사여구(美辭麗句)와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인 행동을 믿지 말고 그들이 참 하나님의 사도인지 말씀을 통해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자들은 사탄에게 속한 자들이면서 하나님의 일군으로 가장해 성도들을 미혹하려 했던 것이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11: 13-15)

 

타락한 사탄과 거룩한 하나님의 천사는 정반대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지상에서 행하는 저들의 역할도 전혀 다르다. 천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사역하지만 사탄과 그의 세력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께 저항하며 지상의 교회를 훼방하기 위해 온갖 계략을 다 꾸민다.

어쩌면 사탄의 손에는 달콤한 사탕이 가득 들려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천사들의 손에는 매서운 채찍이 들려 있을 수 있다. 사탄은 온유하고 화사한 모습을 띠고 있는데 반해 천사는 냉정하고 엄격한 모습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이는 사탄에게 속한 거짓 교사들은 사람들이 보기에 화사한 종교인으로 나타나는 반면, 진정한 교사들은 천사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사람들의 취향이나 구미에 맞는 말을 골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날이 임하게 되면 선악간의 모든 것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핑계 대어 자기의 유익을 도모했던 자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저들은 자신의 종교적인 행위를 내세워 잘했다고 항변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추호의 여지도 없이 그들을 엄하게 심판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에 관한 분명한 교훈을 주셨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7: 22,23)

 

하나님의 진리를 어지럽히는 자들은 예수님 당시뿐 아니라 기독교 역사 가운데 항상 있어왔다. 이는 우리 시대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 지금도 세계에 흩어진 교회 주변에는, 사악한 이리떼들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먹이며 순진한 성도들을 미혹하기 위해 온갖 계략을 다 꾸미며 부지런히 활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를 살아가는 성숙한 성도들은 그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어리석은 자들은 종교인들의 외형을 보고 판단하거나 평가하기를 좋아하지만 그것은 매우 위험하다. 인간들의 잘못된 종교적 열성이 도리어 하나님 보시기에 무서운 불법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 교회 가운데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되어야 하며 참된 성례와 더불어 권징사역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지상 교회에 권징사역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그런 거짓 교사들과 저들의 악한 사상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교회와 장로들은 그에 대해 민감한 자세를 가짐으로써 하나님의 교회가 지상에서 온전히 성장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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