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글 중 이광호 목사님은 이리 말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에 물들어 타락한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항상 사탄의 세력과 맞서 싸우는 전투 중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상의 교회를 일컬어 전투하는 교회라는 표현을 하게 된다. 전투 중에 있는 교회와 성도들은 자신이 처한 긴박한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하며 적군과 아군에 대한 선명한 분별력을 가져야만 한다.

전쟁터에 나가 있는 사람이 긴박한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해이한 태도로 살아간다면 더 큰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또한 적군과 아군을 분명하게 식별하지 못한다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다. 나아가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지상 교회와 우리 주변에는 무수한 첩자들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다. “

 

여러분은 적군과 아군을 식별할 있게 준비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교회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형제라 생각 합니까?

 

여러분의 교회에 주님의 은혜가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주안에서

서성필.

 

 

 

 

15, 사도 바울의 영적인 권위(고후10: 1-18)

 

1. 항상 성실해야 할 성도들 (1, 2)

 

성실한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렇게 살아가고자 노력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언제나 온전한 신앙의 자세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은 주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며 종교적인 생활을 하려는 습성을 가지게 된다.

누군가 자기를 보고 있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만한 일로 여겨지면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처럼 행동하다가 아무도 보지 않고 외부로 드러나지 않을 것 같으면 신앙적 최선을 다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 형태의 종교적 행위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을 속이는 잘못된 신앙으로 말미암는다.

하나님의 역사적 보편교회의 기초가 놓이던 사도시대에도 그런 자들이 많이 있었다. 사도들을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이 보는 앞에서는 열심히 행하는 척하다가 그들의 눈에서 벗어나게 되면 맘대로 신앙생활을 하던 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고린도교회 내에도 그런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자들은 바울이 함께 있을 때는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하는 듯이 행동했다. 그러나 그가 다른 먼 지역으로 떠나가고 가까이 있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제 멋대로 살아갔다. 그런 사람들은 살아계신 하나님 보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신앙생활을 하는 어리석은 교인들이었던 것이다.

바울은 저들의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을 때는 항상 유순하게 말했다. 이는 그들이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이 저들로부터 멀리 떠나 있을 때는 그들에게 단호한 언사(言辭)를 아끼지 않았다. 그 사람들은 바울이 없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기보다 도리어 주관적인 판단에 따른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심과 관대하심을 힘입어 그들에게 간청했다. 사도들이 저들과 함께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항상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일관성 있는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이었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늘 그런 온전한 신앙을 이어간다면, 사도들이 저들에게 강경한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바울은 주님의 말씀을 벗어나 방자하게 행하는 자들에게 결코 부드러운 자세로 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했다. 인간의 종교적인 욕망에 따라 처신하는 자들은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개인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을 속일 뿐 아니라 남을 헐뜯게 된다. 사도바울은 그런 신앙태도를 가진 자들에게 강경한 자세를 취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오늘날 우리 역시 그와 동일한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우리는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일관성 있는 겸손한 신앙자세를 유지해야만 한다.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가운데 온전한 처신을 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시대 교회와 직분자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겸손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부드러운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그런 성도들에게 굳이 강경한 자세를 취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의 종교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오만한 태도를 가진 자들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취해야만 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저들을 강하게 책망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개별적인 권면을 통해 드러날 수도 있지만 공 예배 시간에 선포되는 말씀 속에서 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2. 우리의 병기 (3-6)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에 물들어 타락한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항상 사탄의 세력과 맞서 싸우는 전투 중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상의 교회를 일컬어 전투하는 교회라는 표현을 하게 된다. 전투 중에 있는 교회와 성도들은 자신이 처한 긴박한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하며 적군과 아군에 대한 선명한 분별력을 가져야만 한다.

전쟁터에 나가 있는 사람이 긴박한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해이한 태도로 살아간다면 더 큰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또한 적군과 아군을 분명하게 식별하지 못한다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다. 나아가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지상 교회와 우리 주변에는 무수한 첩자들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 주변으로 침투한 악한 세력의 첩자들은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기기 위해 그럴듯한 기독교인으로 가장하여 행세한다. 그들은 남 보기에 더욱 세련된 모습을 지니고 기독교의 형식적인 면들에 익숙해 있지만 근본적으로 잘못된 본질을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성숙한 교회와 성도들은 항상 주변 상황을 민감하게 살펴 첩자들이 어린 성도들을 미혹하지 못하도록 경계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며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성도들은 이 세상을 즐기며 살아가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생을 누리며 호사롭게 살아가려는 욕망을 버리게 된다. 지상 교회의 주변에는 항상 약삭빠른 첩자들이 어린 교인들을 미혹하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며, 세상은 마치 위험한 지뢰밭과 같아서 여간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은 항상 어둠의 세력과 맞서 싸우는 일을 지속하게 된다. 하지만 성도들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있다고 해서 육체적인 방법으로 전투에 임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사용하는 무기는 육체의 무기가 아니라 이 세상의 것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강력한 하나님의 무기이다.

그 무기는 아무리 견고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라 할지라도 능히 무너뜨릴 수 있다. 우리는 그 특별한 무기를 소유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악한 자들의 모든 교만을 쳐부수게 되며 저들의 어리석은 이론들을 파괴하여 예수 그리스도 앞에 굴복시킨다. 그 일은 세상이 완전히 끝나는 날 까지 진행될 것이며, 마지막까지 하나님께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임하게 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그 싸움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그 점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세상의 악한 세력과 맞서 싸우는 전투에 임하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진리와 말씀으로 완전군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사 안일한 태도를 버리고 항상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6:11-17)

 

사도바울은, 성도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이 피를 흘리며 싸워야 하는 전쟁터와 같다는 사실을 강조해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악한 세력의 편에 선 인간들은 하나님의 편에 선 교회와 성도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호시탐탐 노린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교회를 공격하기 위한 치밀한 작전을 세워두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경건한 요소들로서 완전군장을 해야만 한다. 만일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긴박한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고 방심한다면 신앙이 어린 성도들은 엄청난 상처를 입게 될 것이 분명하다. 나아가 전쟁을 치루기 위해 영원한 진리와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지 않고는 저들의 세력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따라서 성경이 요구하는 바대로 진리로써 완전무장을 한 채 경계의 끈을 잠시도 늦추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 역시 그와 동일한 형편에 놓여 있다. 따라서 단순히 세상에 대해 경계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전투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전투 중에 있으면서 긴박한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있다면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시대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는, 연약한 교회와 거짓 교회들이 피아(彼我)가 없는 세상으로 만들어 가려는 허망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에는 하나님의 편에 서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생명을 걸고 맞서 싸워야 할 원수인 악한 세력을 도리어 끌어안으려는 이상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그런 자들은 거룩한 영적 전쟁이 아니라 타락한 세상과 부당한 화해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원수들을 교회의 이름으로 끌어안으려 하는 어처구니없는 위험한 타협에 지나지 않는다.

배도에 빠진 우리 시대에는 안타깝게도 교회가 마땅히 지녀야 할 신령한 전투의 개념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지상의 곳곳에 위험한 지뢰들이 널려 있고 사악한 첩자와 적군들이 설쳐대고 있지만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철부지 어린아이들이 지뢰밭 위에서 맘대로 뛰놀며 즐거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한 주변에 사탕을 손에 들고 삼킬 자를 찾아 눈을 번들거리는 유괴범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데도 어린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놀기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것과도 같다.

그러는 사이 원수로부터 흉기가 모습을 드러내고 지뢰가 터지면 저들에게 심각한 상처를 입히게 된다. 위험한 상황을 방치하게 될 경우 사악한 자들에 의해 어린 자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될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이 상황을 착각하고 있다면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성숙한 성도들은 이에 더욱 민감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도바울은 교회에 속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와 성도들을 악한 세력으로부터 지켜낼 것이었기 때문이다. 최종심판의 날이 이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을 통해 허락하신 진리의 말씀으로써 그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궁극적인 심판을 내리시게 될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성도들 (7, 8)

 

하나님의 몸 된 교회와 그에 속한 모든 성도들은 눈앞에 펼쳐져 있는 긴박한 현실을 정확하게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상황을 오판하게 되면 그에 대응하는 기본적인 개념 자체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어린 성도들이나 어리석은 교인들 가운데는 세상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자녀라 말하면서 패망하는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간다면 어리석은 행위일 수밖에 없다. 겉으로 그럴 듯하고 탐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세상의 것들이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위험한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지혜로운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모든 것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성숙한 성도라면 거룩한 하나님께 속한 자의 신분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나아가 그런 자들은,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그리스도께 온전히 속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이는 저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부르심을 통해 사명을 받은 사도들의 권세를 분명히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도들이 전하는 말을 듣지 않고 거스르는 것은 그들을 교회 가운데로 보내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통상적인 방법이나 일상생활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사도들을 통해 거룩한 뜻을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가 설령 주님께서 허락하신 특별한 권세에 대해 강조하여 주장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 권세는 하나님의 교회를 넘어뜨리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도리어 지상의 교회를 더욱 견고히 세우도록 주신 은혜의 방편이므로 그것으로 인해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시대에는 사도들의 권위가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이 말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들이 넘쳐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성주의와 경험주의가 만연한 현대에 이르러서는 사악한 인간들이 스스로 성경 위에 군림하려는 오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런 자들은 성경을 인간의 이성과 경험의 잣대로 아무렇게나 분해하며 난자 질 하면서도 그에 대한 죄책감이 전혀 없다.

그러나 참된 교회에 속한 온전한 성도들은 계시된 말씀을 통해 거룩한 하나님을 알아가며 그에 온전히 순종하고자 한다. 이는 사도들이 기록한 성경을 절대 표준으로 삼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현대교회는 이에 대해 더욱 분명하고 민감한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원수인 사탄의 세력은 지금 이 시간에도 그런 악한 주장을 통해 교회를 향한 공격을 잠시도 쉬지 않고 있다.

 

 

4. 일관성 있는 신앙과 삶 (9-11)

 

사도바울은 편지를 통한 자신의 강경한 어조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는 위협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교인들을 겁주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인들 가운데 일부는 바울의 강경한 말을 그런 식으로 왜곡하여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린도교회에는 진리를 위해 강경한 언어를 사용하는 바울에 대해 부정적인 판단을 하는 자들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단순히 생각으로만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바울을 공공연하게 비난하는 자들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바울이 편지를 쓸 때는 매우 분명하고 무게 있는 말을 하면서도, 함께 생활하며 직접 대면할 때는 언사가 명확하지 않은 나약한 자라고 폄하(貶下)하는 소문을 퍼뜨렸다.

바울은 자기에 대해 그런 주장을 하는 자들이 악의에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문제는, 바울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당사자들이 아니라 악의에 찬 그들의 말을 듣고 바울을 오해하는 성도들이 생겨날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바울을 비롯해 그와 함께하는 형제들은 항상 저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기록된 내용대로 사고하며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 말했던 것이다.

 

 

5. 성도의 삶에 대한 정체성 (12)

 

타락한 인간은 본성적으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내세우며 과시하기를 좋아한다. 실상은 그런 외부적 조건을 전혀 가지지 못한 자들조차도 그와 같은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런 자들은 세속적으로 성공해 보이고 주변의 평판이 괜찮은 사람들 축에 스스로 끼워 넣어 은근히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항상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비교하는 가운데 주변에 있는 이웃들을 서로 간 비교하기를 되풀이 하게 된다. 그들은 자기보다 못한 것으로 판단되는 사람들 앞에서는 우월감을 가지고 저들을 멸시하기도 한다. 또한 자기보다 월등하게 낫다고 판단되는 사람들 앞에서는 불필요한 열등감을 가지고 비굴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절대로 그런 잘못된 자세를 가져서는 안 된다. 바울을 비롯한 성숙한 성도들은 결코 그렇게 처신하지 않았다. 성숙한 교인들이라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내세우며 과시하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소위 세상에서 성공한 자들이나 자기보다 괜찮아 보이는 자들을 찾아 자기를 그 대열에 끼워 넣으려는 미련한 태도를 가지게 된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스스로 만든 척도로 자신을 평가하며 자기가 세운 표준에 따라 저들을 견주어 보면서 나름대로의 점수를 매기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정한 기준에 자기를 맞추기 위해 온갖 방법들을 동원하게 된다. 그러나 저들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서 반드시 그 기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대다수 사람들은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에 미달할 수밖에 없다.

인간들은 자기가 원하는 기준에 미치지 못할 때 엉뚱한 곳에서 다른 방도를 찾아 나서게 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자기 주변의 소위 성공한 자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자기를 그들의 축에 끼워 넣어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효과를 노리며 남에게 자랑하기를 좋아한다. 이는 자기도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물이지만 여러 가지 여건상 그렇게 되지 못했을 뿐 그들과 동류라는 뜻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교에 익숙한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더욱 심하게 일어나고 있다. 연약한 사람들일수록 그런 것을 통해 자신의 열등감을 해소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인간들 스스로 승인하는 그런 어리석은 행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뿐더러 복음의 본질에서 더욱 멀어지게 할 따름이다.

 

 

6. 인간의 한계와 분수 (13-15)

 

피조물인 인간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무능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가 특별히 허락하시는 신령한 능력이 없다면, 죄에 빠진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지상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은 그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한계와 분수를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는 그것을 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한 자들은 결코 그 사실에 접근하지 못한다. 설령 겉보기에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가 있다고 할지라도 참 성도가 아니라면 그것은 진리와 상관없는 윤리적인 사고와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연관된 올바른 지식을 가진 성숙한 성도들이라면 마땅한 정도 이상의 것을 자기를 위해 자랑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일상적인 신앙생활에서뿐 아니라 복음전파 사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하는 근본적인 주체는 하나님 자신이시며 인간들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의 소중한 도구가 되어 순종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그 전에 저들을 방문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한 것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한계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따라서 바울 일행이 고린도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파한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저들에게 행했던 모든 사역은 하나님 안에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할 때 일반적인 이성과 경험에 따라 아무렇게나 판단하거나 행동하지 않았다. 그 대신 과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는지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는 결코 자신의 종교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역에 매진하는 행위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에 관한 분명한 기록이 사도행전에 나타나고 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16: 6,7)

 

사도바울은 그 전에 아시아 지역으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고자 했지만 성령께서 그 길을 막으셨다. 그래서 다음에는 비두니아 지역으로 가려고 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그는 나중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마게도니아 지역으로 건너가 복음을 증거 하게 되었던 것이다(16:10).

우리가 여기서 주의 깊게 이해해야 할 바는 복음전파를 위한 이런 구체적인 과정은 사도인 바울에게 특별히 적용된 내용이었다는 사실이다. 즉 그는 사도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완벽한 인도를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울이 자신의 느낌이나 감정으로써 그렇게 판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시에 의한 것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우리 시대에 있어서 복음전파 과정에 연관된 기본적인 원리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복음은 인간들의 이성적인 판단에 따라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 지상에서의 복음전파 사역은 원천적으로 성령 하나님과 그의 몸 된 교회에 맡겨진 거룩한 사역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종교적인 감정이나 상황에 따라 아무렇게나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우리시대의 어떤 교인이 자기가 처한 형편을 나름대로 분석하면서 하나님께서 특정 지역으로 가지 못하게 하셨거나 가도록 하셨다는 말을 쉽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바울의 경우를 통해, 복음전파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역이라는 사실과 우리는 그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만 한다는 원리적인 교훈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또한 사도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수고한 결실을 가지고 자신의 자랑거리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혔다. 다만 복음을 영접한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해 감에 따라 자기를 비롯한 사도들의 활동 범위가 더욱 넓게 확장되었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그것을 통해 지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교회가 더욱 풍성하게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오늘날 우리 또한 매우 주의 깊은 이해를 해야만 한다. 최첨단 과학문명이 발달하고 인간 문화가 절대화 된 현대인들은 이성과 경험을 배경으로 한 자기 판단에 따라 모든 것을 마음대로 생각하고 단정 짓고자 하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 세속적인 사상은 하나님의 몸 된 교회 안에 까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있다.

특히 선교나 봉사에 있어서는 신앙이 어린 교인들일수록 앞뒤를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경향이 있다. 어리석은 교인들은 그것을 믿음이라 여기며 무조건 많이 선교하고 무조건 많이 봉사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인 양 착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의 교훈을 통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도바울조차도 복음전파를 위해 자의(自意)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한계를 벗어나지 않았음을 밝힌 의도를 기억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숙한 교회는 그런 선한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신중한 교회적 결의에 따라 행해야 한다. 선교와 봉사라 할지라도 결코 인간의 종교적 욕망을 이룩하려는 것이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나아가 그런 것들이 인간들의 공로가 되거나 자랑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7. 주안에서 자랑하라 (16-18)

 

사도바울은, 다른 형제들이 그 지역에서 이미 이루어 놓은 일을 두고 자기를 위해 자랑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다. 단지 저들의 복음전파 사역의 지경(地境)을 넘어 복음을 증거 하려고 했다. 이는 앞선 사역자들이 행한 일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자 하는 그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공간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앞서 수고한 형제들의 사역을 통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잘 깨닫게 되었다면, 바울은 저들의 사역을 바탕으로 하여 더 넓은 지역에 까지 복음이 증거 되기를 원했다. 모든 참된 복음 사역자들은 개인의 실적을 내세우고자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가 세상 가운데 선포되기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이 앞선 사역자들로 말미암아 복음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면, 바울은 저들에게 더욱 깊은 진리의 가르침을 베풀고자 했다. 그것을 통해 성도들의 신앙이 더욱 성장해 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하나님의 교회가 지상에서 더욱 견고히 세워져 가게 된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자신의 공적을 쌓고 자랑거리를 만들기 위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했다. 만일 무엇인가 자랑하게 된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해야 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랑을 늘어놓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온전하게 행하여 자랑할 수 있는 모든 복음사역의 내용들은 그리스도 안에 존재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성숙한 성도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자랑할 만한 것이 이 땅에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아야 한다. 교회로부터 참으로 인정받을 만한 성도가 있다면, 그는 결코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지 않는다. 진정으로 성숙한 성도라면 스스로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워주시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과연 누구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가? 어리석은 자들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만족스러워 한다. 또한 어떤 어리석은 자들은 역사 가운데 자기 이름을 남기고 후세의 사람들에게 기억되며 좋은 평가를 받고자 한다. 그런 자들은 마치 세상의 역사가 영원히 존속될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모든 욕망들이 부질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올바르게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며 사도들의 가르침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들이 인정받고자 노력하고 애씀으로써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허락되는 선물이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고린도후서. 이광호 목사. 머 리 말, 차 례 서성필 2017.01.27 1848
공지 고린도전서 - 머 리 말, 차 례. 이광호 목사. 서성필 2016.06.24 2532
공지 중국 신학교 강의록 - 정진국 목사 서성필 2016.03.11 3820
공지 [야고보서] 머리말, 차례. 이광호 목사 서성필 2015.10.09 4372
공지 '에세이 산상수훈', 서문, [권두언]-“아프리카, 아쉬움이 남아있는 대륙’, [목차]. 이광호 목사 서성필 2015.02.13 5754
공지 '교회와 신앙'. 서 문, 머 리 말, 송영찬 목사 서성필 2014.10.11 5465
공지 ‘교회와 사명’ - 서 문, 머리말, 프롤로그. 송영찬 목사 [2] 서성필 2014.06.21 5023
공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머리글과 목차. 이광호 목사 [5] 서성필 2013.08.25 9964
283 오늘 공부는 제19장, 바울의 사랑과 호소(고후12: 11-21) 서성필 2017.09.08 119
282 제18장, 바울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특별 계시(고후12: 1-10) 서성필 2017.08.19 173
281 제17장, 바울의 교회를 위한 염려(고후11: 16-33) 서성필 2017.08.04 227
280 제16장, 거짓 선지자에 대한 경고(고후11: 1-15) 서성필 2017.07.28 218
» 제15장, 사도 바울의 영적인 권위(고후10: 1-18) 서성필 2017.07.14 210
278 제14장, 교회와 복음사역을 위한 신실한 연보(고후9: 1-15) 서성필 2017.07.07 287
277 제13장, 복음을 위한 신실한 동역자들(고후8: 16-24) 서성필 2017.06.30 280
276 제12장, 평균케 하는 삶의 원리(고후8: 1-15) 서성필 2017.06.22 321
275 제11장, 참된 기쁨과 진정한 회개(고후7:9-16) 서성필 2017.06.09 307
274 제10장, 하나님의 약속과 순결한 교회(고후7:1-8) 서성필 2017.05.12 314
273 제9장, 말세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교회(고후6: 1-18) 서성필 2017.05.08 345
272 제8장,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피조물(고후5: 11-21) 서성필 2017.04.28 391
271 제7장,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기억하는 성도의 삶(고후5: 1-10) 서성필 2017.03.17 408
270 제6장,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의 회복(고후4: 1-18) 서성필 2017.03.10 377
269 제5장, 모세의 수건과 신약교회(고후3: 12-18) 서성필 2017.03.03 478
268 제4장,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와 새 언약(고후3: 1-11) 서성필 2017.03.03 402
267 제3장,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교회(고후2: 1-17) 서성필 2017.02.17 496
266 제2장,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고후1: 12-24) 서성필 2017.02.10 493
265 제 1장,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문안과 감사(고후1:1-11) 서성필 2017.02.03 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