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평균케 하는 삶의 원리(고후8: 1-15)

 

1. 환난 중에 넘치는 기쁨과 풍성한 연보(1,2)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마게도니아 교회에 허락된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언급을 했다. 당시 마게도니아 지역에서는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심한 핍박이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배도자들에 의해 많은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마게도니아의 성도들에게는 기쁨이 넘쳐났다. 그것은 이 땅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허락된 것이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교회를 통해 경험하는 특별한 기쁨은 세상 사람들이 맛볼 수 있는 일반적인 기쁨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나아가 당시 마게도니아 교회의 성도들은 평화롭고 풍요로운 여건 가운데서 기쁨을 누렸던 것이 아니다. 그들의 외적인 형편은 환난에 처해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매우 궁핍한 상태였다. 따라서 저들의 일상적인 생활은 극도로 힘들었으며 물질적 풍요로움과는 거리가 먼 형편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바울은 마게도니아의 가난한 성도들이 힘든 환경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했음을 증거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풍성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생활 형편을 고려해서 이해해야 할 말이다. 바울은 그들의 연보를 하나님의 은혜와 직접 연관 짓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게도니아 교회들에게 은혜를 주셨다고 하는 바울의 말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즉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그 은혜란 환난과 핍박뿐 아니라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교회와 이웃을 위해 넉넉한 마음으로 연보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남으로부터 무엇인가 받는 것을 복으로 생각하고 있다. 신앙이 어린 성도들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누군가가 나누어주거나 채워주면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남에게 베푸는 것이 더 복된 것이라 말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나중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밀레도에 들렀다. 그 때 그는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만나(20:7)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그에 대한 언급을 한 적이 있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20: 35)

 

사도바울은 복음사역을 하는 중 어디를 가든지 항상 연약한 성도들을 도우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질을 나누어주기를 좋아했다. 그것은 사도시대를 비롯한 역사상 모든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일이다. 바울은 그에 관한 말을 하면서 그것은 자신의 성품으로 인한 사사로운 판단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하셨다.

이처럼 마게도니아 교회에 속한 성도들도 극한 가난 가운데서 연보를 통해 저들의 것을 나누어 주기를 원했다. 그들은 경제적인 여유로움으로 인해 성실하게 연보했던 것이 아니다. 도리어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그들에게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넘치는 기쁨이 있었으며, 극한 가난이 도리어 풍성한 연보를 하도록 했던 것이다(고후8: 2).

이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경제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에 오히려 넘치는 연보를 했다는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마게도니아 교회 성도들은 고통의 의미를 알고 있었으므로 고통에 빠진 다른 형제들을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말은 또한 저들의 극한 환난과 가난이 이 세상에 필요 이상의 소망을 두지 않게 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서 풍요롭게 살아가는 삶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려운 환경을 경험하여 영원한 천국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천국복음이 세상에서 증거 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것이다. 그것이 곧 저들에게 특별히 허락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힘에 넘치도록 연보 한 것은 경제적으로 저들보다 더 어려운 형편에 처한 다른 성도들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사도들의 복음 선포사역에 연관된다. 당시 사도들은 장기간 집을 떠나 먼 지역을 여행했기 때문에 상당한 액수의 경비가 필요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은행에 돈을 넣어두었다가 다른 지역에 가서 쉽게 찾아 사용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따라서 복음 선포를 위해 다른 지역을 여행하는 성도들은 방문하는 지역의 교회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아 그것으로 생활하며 또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즉 그들은 항상 방문하는 지역의 교회의 재정적 후원을 받았던 것이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그에 연관된 내용을 시사하고 있다.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15:23,24)

 

바울은 고린도 지역에 머물고 있을 때 로마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나중 로마를 방문했다가 서바나(스페인)로 가고자 하는 데 그 때 재정적 후원을 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물론 복음사역 자들은 교회를 통해 거두어진 연보를 자기들만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다른 지역을 방문하면서 현지 교회의 성도들의 궁핍함을 보면 저들이 가진 돈을 나누어 주었을 것이다.

이는 교회와 사도들을 비롯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복음사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바울은 혼자 다닌 것이 아니라 여러 형제들이 일행을 이루어 다녔기 때문에 경비가 많이 들었을 것이 틀림없다. 이에 대해서는 바울뿐 아니라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사도들 역시 여러 지역을 여행하면서 동일한 형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보편교회의 원리를 보게 된다. 즉 세상에 흩어진 교회들이 개교회주의적이지 않고, 다양한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한 교회임을 알 수 있다. 사도교회 시대의 성숙한 성도들은 인간적인 친소(親疎)관계에 따라 연보를 통해 지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으로 인해 그렇게 했다. 지상 교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이 온 세상에 온전히 선포되고 증거 되는 것이었다.

 

 

2. 헌신적인 섬김 (3-5)

 

마게도니아 교회의 성도들은 힘이 닿는 대로 연보 했을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는 마음으로 연보 했다. 그것은 결코 사도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깨닫게 된 성도들은 자발적인 자세로 교회적 연보에 참여했다.

마게도니아 교회에 비추어 볼 때 우리 시대의 일부 조직교회와 지도자들이 성도들에게 연보를 강요하는 것은 적잖은 문제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연보를 강요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인해 정작 있어야 할 자발적인 마음마저 사라지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그러한 잘못된 분위기는 성도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연보 하는 자세가 아니라 경직된 의무감을 가지게 한다. 즉 연보에 대한 종교적인 의무를 감당하려 함으로써 자원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교회 가운데서 아무도 연보를 강요하거나 강조하지 않지만 자발적인 마음이 생겨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것은 자신의 종교적인 임무나 공로를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당하는 다른 성도들과 하나님의 복음사역을 바라보게 한다. 이는 물론 하나님의 뜻 안에서 형성되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마게도니아의 성도들은 교회를 섬기기 위한 연보에 참여하기 위해 사도들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자발적인 연보를 할 수 있도록 간곡하게 당부했던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문맥을 살펴 보건데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은 환난 가운데서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는 저들에게 연보하는 일에 대해 어느 정도 만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단순히 물질로 연보하는 것을 신앙에 대한 최선의 표현이라 생각지 않았다. 사도들은 결코 마게도니아 교회의 성도들로부터 과분한 연보를 기대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요구하지 않았으나 성도들은 스스로 헌신적인 자세를 가졌다. 그들은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렸으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물심양면으로 사도들을 성실하게 섬겼던 것이다.

성도들의 교회를 통한 연보는 단순한 물질적인 기부행위가 아니다. 특히 공 예배시간에 연보를 하는 것은 삶에 대한 고백적 의미를 동반하고 있다.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진정한 믿음의 고백이 없는 상태에서 돈을 내는 행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은 연보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고백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날마다 음식을 먹으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의식주 생활과 더불어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건강과 일할 수 있는 능력과 기회를 통해 물질을 얻어 생활해 나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유한 물질 가운데 일부를 연보 하는 것은 그에 연관된 고백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3. 은혜의 성취 (6-8)

 

사도바울은 그전에 디도를 고린도교회에 보내면서 그곳 성도들로 하여금 은혜의 연보에 참여하도록 권면하게 했었는데 이제 그에 대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회를 기억하며 연보 하는 일이 성도들에게 베풀어진 은혜의 사역(the act of grace)이라고 표현한 바울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바울은 디도를 통해 그 은혜의 연보에 참여한 성도들로 하여금 그 일을 끝까지 잘 마무리하도록 권면했다. 이는 당시의 연보가 특별한 목적에 연관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여준다. 거기에는 아마도 사도들의 복음전파 사역과 더불어 예루살렘 교회의 기근문제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고전16:1-3, 참조).

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믿음과 말씀, 지식, 열심, 그리고 사도들에 대한 사랑 등 모든 일에 풍성한 자들이었다. 그런 성도들인 만큼 복음사역과 이웃을 위한 연보에 참여하는 일에도 성실하게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저들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단지 다른 지역의 교회 즉 지금 그가 머무르고 있는 마게도니아 교회 성도들의 연보에 대한 열성을 전함으로써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가진 사랑의 진실함을 드러내 보이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도 항상 세상에 흩어져 존재하는 보편교회를 기억해야 한다. 어느 지역에 존재하는 교회이든지 다른 지역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만일 그들이 환난과 궁핍에 처하게 되어 형제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그들에게 적절한 도움을 줄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신체적이며 물질적인 문제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즉 연약한 교회들의 영적인 문제와 말씀의 기근을 위해서 더욱 깊은 신경을 써야 한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성도들 또한 지상에 흩어진 보편교회 가운데 속해 있으면서 어려운 여건에 처한 성도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에 대처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어지러운 교회 시대에 살아가면서 어느 교회가 진실로 하나님의 보편교회에 속한 참된 교회와 성도들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의 기근에 처한 마지막 시대에, 개 교회주의를 탈피하고 전 세계에 흩어진 성도들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그 형제들을 위해 관심을 가지고 연보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 이는 우리사대의 각 교회의 재정 가운데는 흩어진 다른 형제들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분량이 포함되어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과 그의 몸 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낮아지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9)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소유한 공동체이다. 우리는 그 은혜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을 가져야만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교회란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은혜가 교회의 본질이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원래부터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다. 창세전부터 계시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는 모든 것에 풍부하시기 때문에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이신 예수님께서는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만유의 주인이 되신다.

그 성자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타락한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면에 있어서 가난한 자처럼 되셨다. 그분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인간의 연약함을 체휼 하시며 비천한 자의 자리에 두셨던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에 대한 기록을 하고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5-8)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이면서 인간들의 눈에 하나님과 동등한 자로 비쳐지지 않으셨으며 도리어 인간의 몸을 입고 종의 형체로 보이셨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비천하시고 가난한 자리에 까지 낮추셨던 것이다. 결국은 가장 처참한 십자가 위에서 악한 인간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다.

예수님께서 비천하게 되신 것은 자기 자녀들을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다. 이는 또한 그가 가난하게 되심으로 교회에 속한 자기 백성들을 부요케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은 영원한 천국을 상속받을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지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교회는 천상의 나라를 상속받게 될 성도들이 모인 매우 특별한 공동체이다. 교회에 속한 우리가 부요하게 된 것은 인간적인 능력과 재주로 세상의 것들을 많이 끌어 모았기 때문이 아니다. 도리어 교회는 앞으로 있게 될 것에 대한 상속의 보증으로 인해 부요한 자가 되어 있다.

이는 마치 현재 초라한 옷을 입고 값비싼 음식을 먹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엄청난 값어치의 보증수표를 소유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영원한 천상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보증수표를 허락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낮추어 인간의 몸을 입으심으로써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가난한 자가 되었듯이 우리 역시 그 의미를 알고 겸손한 자세로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 속한 성도는 세상의 것을 좀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한 욕망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자신의 것을 다른 이웃들을 위해 베풀며 내어주는 가운데 자신을 가난한 자리에 놓을 때 진정으로 부요 하게 되는 것이다.

 

 

5. 고린도교회를 향한 요청 (10-12)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삶을 언급하며 그에게 속한 모든 성도들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야 함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님처럼 남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줄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는 성도들의 인생은 자기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님을 의미하고 있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이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도들에게 자신의 뜻을 드러내 보이며 그에 대한 권면을 하고 있다. 그것은 복음전파와 궁핍한 이웃의 삶을 기억하는 것과 관련된다. 이는 성도들의 연보와 연관되는데 성실하게 연보에 참여하는 것이 저들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울이 이 편지를 쓰기 일 년 전부터 저들이 스스로 자원해서 시행해온 일이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원해서 시작한 그 일을 성실하게 잘 마무리 짓도록 권면하고 있다. 하지만 사도는, 그들이 자신의 형편을 생각지 않고 무리하게 연보 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소유한 물질 가운데서 분별 있는 연보를 할 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겠지만, 있지도 않은 것을 만용을 부려 바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어리석은 인간들 가운데는 아직 있지도 않은 것을 미리 바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나타내 보이려는 자들이 있다. 예를 들어, 앞으로 엄청난 부자가 될 것을 기대하고 미리 거액의 연보를 약정한다든지, 장래 자신이 얼마나 많은 수의 교회당을 짓겠다고 약속하는 것 등이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종교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것일 뿐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한 은혜의 연보가 되지 않는다.

 

 

6. 평균케 하는 삶의 원리(13-15)

 

하나님의 자녀들이 교회를 위해 연보 하는 것은 지상에 존재하는 전체 교회를 위한 보편적인 성격을 지니는 동시에 개체 교회의 공동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가까이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지상에 흩어져 살아가는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성도들 역시 그 범주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자신의 재물 가운데 일부를 연보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어느 정도 평안케 해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연보 하는 성도들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더욱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성도들이 이웃을 기억하여 연보 하는 것은 도움을 받는 성도들뿐 아니라 연보를 하는 성도들을 비롯한 모든 성도들이 그것을 통해 다 같이 유익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바는 연보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성도들의 삶을 평균케 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일상적인 의식주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으로서 어떤 성도들은 형편이 좋아 날마다 배불리 먹고 살지만 그렇지 못한 다른 성도들은 가난에 처해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 당한다면 온당한 일이 될 수 없다.

타락한 인간들은 본성상 무엇이든지 비교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상호 비교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확인하며 유치한 자만심을 느끼며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이 어리거나 잘못된 사람들이 가진 어리석은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외모와 저들의 현실적 형편은 언제 어떤 식으로 변하게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우리 가운데 자신과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인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금처럼 여유롭게 생활하며 먹고 살아갈 수 있다는 보장을 받은 자는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왔던 과거의 세상 역사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지금 연보를 할 수 있을 때 이웃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라고 권면했다. 그러면 나중 자신이 궁핍한 형편에 처하게 될 때 여유로운 형제들에 의해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은혜를 입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성도들이 서로 간의 삶을 돌아보며 상호 물질적 보충이 이루어지므로 평균케 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고후8:14). 바울은 그 일에 대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교훈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공평하게 먹고 살아가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 특별한 형편 가운데 있었던 실제적인 삶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애굽에서 탈출한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바다를 건너 시내광야에 머물면서 40년 간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살았다. 모세는 그에 대한 분명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16:11-18)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고 마시며 생활하는 문제에 있어서 서로 간 아무런 차등이 없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따로 있지 않았다. 젊은이, 노인, 어린이, 건강한 자, 병약한 자. 과부 등에 차이 없이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의식주 생활을 했다. 시내광야의 모든 백성들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장막에서 생활하며 살아갔던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바는 시내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들의 노력에 의해 식량을 생산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들의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얻은 물질을 통해 먹고 살았었다. 그것은 개인적인 능력에 따라 차등적인 음식을 먹고 살았음을 말해준다. 건강하고 능력이 있어 수입이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생활 정도가 차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내광야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인간들의 능력이나 노력에 따라 식량이 차등 공급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양식이 공급되었다. 따라서 모든 백성들은 동일한 음식을 먹었으며 날마다 거두는 만나와 메추라기의 분량에 아무런 차등이 없었다. 그 날 먹을 양식을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았으며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았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차별 없는 식생활을 할 수 있었다. 적어도 먹을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성도의 삶에 있어서 기본 원리적인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시내광야에서의 삶을 특별히 인용하며 교회에 속한 성도들 역시 그러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16:18). 동일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개별적인 형편에 차이가 날 수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교회 안에 먹을 음식이 없어 굶주리는 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교회는 성도들 가운데 먹는 음식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자가 있지 않은지 항상 살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직분자들에게 맡겨진 중요한 사역이다. 또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성도들은 가난한 이웃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즉 언제든지 기회가 닿으면 자신의 것을 지혜롭게 나눌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교회 안에서는 전체적으로 평균케 하는 삶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7. 교회와 구제의 의미의 그 한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구제란 가난한 이웃들에게 물질을 나누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즉 구제는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자들이 생활에 궁핍한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과 연관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개체 교회 안에서는 일반적인 의미의 구제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보다 한 단계 위에서 이해되는 나눔의 의미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가정을 예로 들어 생각해 볼 수 있다. 한 가족인 부모와 자식 사이, 형제 사이에서는 구제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 그것은 구제가 아니라 당연히 행해야 할 의무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정에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하는 부모나 형제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을 구제라 말하지 않는다. 이처럼 교회에서 가난한 성도들에게 물질적 도움을 제공하는 것은 일반적인 구제의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당연히 나누어야만 할 소중한 삶의 방편인 것이다.

일반적인 의미의 구제는 남에게 물질로 도와주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당연한 의무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없다. 즉 개인의 형편에 따라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것을 선행이라 말한다. 그러나 가정과 교회에서 남이 아닌 자기 식구들을 위해 물질을 나누는 것을 구제나 선행이라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은 게으르고 나태하여 성실한 삶을 살지 않는 어리석은 자들에 대한 문제이다. 어떤 일이든 나름대로 성실하게 일하는데도 불구하고 생활이 어려운 교인이 있다면 교회는 당연히 그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성도들 가운데 병약하거나 노동을 할 수 없는 형편에 놓인 자가 있을 경우에는 교회가 함께 그 짐을 나누어 져야 한다.

하지만 게으르거나 나태하기 때문에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그들에게는 물질적인 도움을 줄 것이 아니라 도리어 권징을 시행하고 책망해야만 한다. 그런 자들을 위해 물질적으로 도와준다는 것은 그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따름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도로서 항상 그런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단호한 말을 했다. 그것은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매우 엄격한 명령이었다. 그는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 점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살전3: 10-12)

 

사도바울이 편지를 쓸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규모 없이 행하는 자들이 다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사람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부당하게 참견하면서 도리어 일만 만드는 자들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자들뿐 아니라 부자들도 없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나름대로 배불리 먹고 부유하게 살아갈만한 여건이 되는 사람들이 다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즉 부모로부터 많은 재산을 상속받았다든지, 구태여 힘든 일을 하지 않고 놀아도 안락한 삶을 살만한 사람들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위의 본문에서 노동력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성실하게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간에 어떤 형태의 일이든 노동하지 않아도 좋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러할진대 나태함으로 인해 일하지 않는 게으른 교인들에게는 교회가 도움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런 자들에게 물질적 도움을 주는 것은 형제들로 하여금 더욱 나태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따라서 교회는 말씀의 교훈과 권면을 통해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은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함으로써 성실하게 일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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