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말세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교회(고후6: 1-18)

 

1. 하나님의 은혜 받을 때구원의 날 (1, 2)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 소개하고 있다. 이는 사도적 언어이다. 즉 이 말은 아무나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용어가 아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완벽하게 교회에 전달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역시 사도들의 말을 절대적인 교훈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입장에서 고린도 교회를 향해 특별한 권면을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받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말 가운데는 고린도 지역에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받은 자들이 다수 있었다는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을 마치 은혜인 양 착각하고 있는 자들의 사고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올바르게 누리지 못하고 자신의 목적에 따라 변형하여 적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성숙한 성도들은 타락한 인간들의 속성을 제대로 깨달아 하나님의 은혜를 올바르게 받아 적용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구약성경에는 그에 관련된 예언이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메시아를 보내 사탄의 세력에 의해 멸시를 당하고 억눌려 살던 이스라엘 백성을 일으켜 세우고자 하셨다. 성경에는 그 백성 가운데 오시는 메시아가 이방의 빛이 되어 땅 끝까지 이르러 하나님의 구원을 베풀게 되리라는 사실이 예언되었다(49: 6,7).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그 내용을 다시금 인용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49:8)

 

이사야 선지자는 이 말씀 가운데서 은혜의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 확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응답하고 그들을 도와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장래 이 땅에 메시아를 보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허락된 언약을 성취하며 영원한 나라를 일으켜 세우시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아 상속하게 된다.

사도바울은 이사야서를 통해 예언된 말씀을 인용하며 지금이 곧 그 언약이 이루어지고 있는 때라는 사실을 밝혔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 사역을 이룩하셨으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다(고후6: 2). 그 은혜의 때를 알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진정으로 복된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구원을 약속해 오셨던 것이다.

 

 

2. 하나님의 일군으로서의 직책 (3-10)

                                   

사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직책을 부여 받은 자들이다. 나아가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나름대로의 직책을 부여 받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그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한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그 동안 하나님의 복음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아무에게도 거리낌이 없이 일하고자 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바울은 자신뿐 아니라 함께 사역하는 형제들 역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참고 견디는 일군으로 추천하고자 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군들은 이 세상에서 심한 환란과 핍박을 견뎌내야만 한다. 그들은 대적하는 자들로부터 매를 맞기도 했으며 감옥에 갇혀 고통을 겪는 경우도 있었다. 나아가 항상 수고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풍족하게 먹고 살아가는 편안한 생활을 자유롭게 유지할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일군들은 저들이 처한 열악한 형편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으며 육신적인 유익을 얻고자 세상의 악한 것들과 타협하지 않았다. 그들은 순결함과 참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오래 참음과 친절함과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일했다. 그들은 또한 오른 손과 왼 손에 의의 무기들을 들고 영광과 모욕, 비난과 칭찬을 동시에 겪으며 하나님을 섬겼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항상 의의 병기를 지니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악한 세력에 맞서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삶으로 말미암아 때로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이름을 얻기도 했지만 악한 자들로부터 비난의 소리를 듣고 심한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이는 성도들이 타락한 세상에 살아가면서 온전한 신앙자세를 가지고 행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군들은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 보기에 속이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성도들에게는 진실하며 또 그들은 무명한 것 같으나 유명한 자들이며 죽은 자 같으나 살아있는 자들이다. 또한 그들은 무서운 징벌을 받는 자처럼 힘든 상황에 있으나 결코 죽임을 당하지 않으며 근심에 놓인 것 같으나 항상 기뻐한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부요하게 한다. 나아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것을 소유한 자들이다.

 

혼탁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우리시대에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을 가져야만 한다. 지상의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은 타락한 세상에서 결코 세상적인 복락을 추구하거나 그것을 마음대로 누리는 자들이 될 수 없다. 신앙이 어린 자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잘 믿으면 이 세상에서 커다란 축복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도리어 성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참된 신앙으로 인해 도리어 극심한 환난과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런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도 천상에서 허락되는 기쁨으로 인해 감사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제공된 복락을 누리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섬김으로써 얻게 되는 축복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 전혀 축복으로 보이지 않으며 도리어 어리석은 행위로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천국으로부터 허락된 그 놀라운 비밀을 깨달아 알고 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삶을 예로 들면서 지상에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의 삶에 관한 의미를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3. 교회와 성도들의 심령 (11-13)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저들은 이미 입술을 열어 모든 것을 숨김없이 다 말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리고 성도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저들의 마음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는 사실을 말했다. 이는 바울이 아직 나약함 가운데 처해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는 아직까지 바울을 비롯해 그와 함께하는 자들에게 마음 문을 열지 않고 있는 자들이 다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바울과 함께하는 성도들이 저들에게 마음 문을 닫아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들이 마음 문을 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바울은 마음 문을 열지 못하고 있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저들을 자신의 친 자식처럼 생각하고 간청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것은 바울이 저들에게 마음 문을 활짝 열었듯이 저들의 마음 문도 열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었다. 진정한 신뢰와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는 결코 올바른 교제를 나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로 간에 마음 문을 활짝 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기적인 교인들 가운데는 자신의 마음 문을 적절히 닫아 잠그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열린 마음을 바라는 경우가 종종 있다. 때로는 자신의 감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상대방에게 그것을 은근히 강요하기도 한다.

그런데 조심스러운 것은 실제로 자신의 마음 문을 온전히 열지 않으면서도 자기는 마음 문을 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일은 주로 감성에 의존할 때 발생하는 문제이다. 그런 자들은 자신의 기분여하에 따라 마음 문을 여닫기를 되풀이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진정으로 마음 문을 열게 되면 쉽게 닫혀 지지 않는다.

따라서 성도들의 마음 문은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항상 열려있어야 하며 그것은 이성과 경험을 배경으로 하는 개인적인 판단과 주장을 보류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신앙이 성장해감에 따라 마음 문을 열고 다른 성도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신앙 자세가 필요하다.

 

 

4.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 (14-16)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다.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은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그 안에 존재 하게 된다. 하지만 교회는 오염된 세상 가운데 존재하고 있으므로 모든 성도들은 정신을 바짝 차려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몸 된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성결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자신을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담의 타락한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보통 사람들과 오염된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함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사탄의 세력과 그 통치 아래 있는 인간존재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을 가지도록 요구했다. 그는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죄를 주도하는 어두움의 세력과 소통할 수 없으며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하셨느니라(고후6: 14-16)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을 회복하여 그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 더러운 세상과 구별되어 성결한 삶을 유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사도바울은 모세가 기록한 레위기 2612절을 인용하며 그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며 작정하신 사역을 이루어 가신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에 왕과 백성의 관계가 확정되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에 빠진 일반 인간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거룩한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녀들 가운데 거하신다. 따라서 지상의 교회와 성도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므로 죄로 인해 오염된 세상과 확연히 구별되어야 한다. 이는 교회와 세상은 본질적으로 분리되어야 하는 영역이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즉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은 세상의 것들로부터 상이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서로 간 조화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노아홍수 이전의 상황을 통해 그에 관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당시의 하나님의 자녀들은 겉보기에 그럴듯한 세상의 인간들을 부러워하며 저들과 화합하고 뒤섞이기를 좋아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저들의 삶 가운데 세상의 것들을 끌어들여왔던 것이다.

그런 삶이 저들에게 일시적인 만족과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역겨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대홍수 이전의 사람들의 세상에 대한 탐욕과 수용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자초하게 되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 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 함이었더라(6: 1,2,12)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 세상에 대한 탐심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께 저항하는 행위가 된다. 타락한 세상에는 궁극적인 부러움의 대상이 없으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의 것을 부러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아 그것이 설령 아름답고 우아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죄 가운데 발생한 것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자들은 세상의 것을 부러워하여 그들과 짝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세속화하게 되고 오염시키게 될 따름이다. 노아홍수 이전의 사람들도 그렇게 함으로써 타락한 세상에 빠지게 되어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시내광야에서도 그에 대한 분명한 명령을 하셨다. 이방인들의 어떠한 것도 수용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태도를 버리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들이 너희 중에 올무가 될까 하노라 너희는 도리어 그들의 단들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을찌어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너는 삼가 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찌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히 섬기며 그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희생을 먹을까 함이며 또 네가 그들의 딸들로 네 아들들의 아내를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 신들을 음란히 섬기며 네 아들로 그들의 신들을 음란히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34: 12-16)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자기 자녀들이 타락한 세상과 다시금 화합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셨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에 있는 이방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대적관계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성경은 이 말씀을 통해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타협과 화해의 몸짓을 해오리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것을 단호하게 거부할 수 있어야만 했다.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결국 그들의 세속적인 가치관을 수용하도록 하게 될 따름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그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도 세속화하는 오류에 빠져들게 된다. 즉 그들은 이방인들의 생활양식을 보며 새롭고 참신한 방식으로 착각하여 그것을 저들의 신앙에 받아들일 위험성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저들과 아무런 언약도 맺지 말고 도리어 저들이 섬기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하셨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다, 이 말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는 배타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주장하면서 그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세상의 것들을 기웃거리며 저들의 방법을 동원하기를 시도한다면 결국 그것들이 올무가 되어 쓰러지게 될 것이다.

 

5. 하나님의 약속과 성별 (17,18)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로 하여금 세상의 부정한 것들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명령하셨다. 참된 성도들은 약속에 따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성결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 앉게 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아버지가 되셨다. 하나님의 이 약속은 항상 교회 가운데 보증으로 남아 있다. 이는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는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에 속해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상관이 없는 교회라면 형식적인 이름과는 달리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없다. 십자가를 멀리한 채 입술로 하나님을 되풀이 해 부른다고 해서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도들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로써 정결하게 될 때 비로소 참된 교회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시대의 많은 교회들은 주님의 거룩한 피를 멀리하고 세속주의를 추구함으로써 극도로 혼탁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 중에는 교회와 세상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는 것이 마치 지상교회의 과업이라도 되는 듯 생각하는 자들이 득세하고 있다. 그들은 세상에 대해 관용하고 타협함으로써 모든 것을 수용하는 것을 교회가 행해야 할 덕목인 양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위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교회를 어지럽히는 행위이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핑계 대고 예수님의 이름을 내세워 교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그들은 참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목적을 추구하는 인본주의적 종교행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마치 종교적 취미활동을 하는 것처럼 인식되기 십상이다. 그것은 일상적인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21세기의 첨단 과학문명 시대에 살아가는 성도로서 현실적인 문제들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거룩한 하나님께 속한 성도들은 타락한 세상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일들에 대해 어느 정도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흔히 가치중립(adiaphora)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것은 어떤 사실이나 행동에 대해 좋고 나쁨의 구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드러남 이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받아들여 행한다고 해서 잘하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서 잘못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 중에 항상 우리 주변을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 현대인들이 푹 빠져있는 예술과 스포츠, 영상문화 등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보며 심취하여 열광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은 과연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분명한 점은 그에 대한 판단을 인간들의 다양한 형편에 예속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즉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며 환호하며 열광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렇게 따라 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모든 문제들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다. 물론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에 대한 올바른 입장을 소유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우리는 성경의 교훈을 좇아 그에 대한 분명한 자세를 가지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 시대에는 각종 스포츠가 우상화되어 있을 만큼 열광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스포츠 경기에 있어서 우리나라가 매우 좋은 성적을 거두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여유롭게 보는 가운데 객관적인 관심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성도들은 필요이상으로 그에 심취하거나 열광해서는 안 된다.

이는 경계를 짓기에 매우 애매모호한 면이 있으나 원리적으로는 그렇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 한국이 올림픽 경기나 월드컵 축구경기에서 우승을 했다고 치자. 그것을 보는 성도들은 한국의 스포츠 실력이 상당히 향상되었다는 정도의 객관성 있는 냉담한 생각을 하면 된다. 그러나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이 그것으로 인해 지나친 만족과 자부심 혹은 즐거움에 취해서는 곤란하다. 이에 대해서는 운동경기에서 형편없는 성적을 냈을 때도 그와 동일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이 올림픽 경기나 월드컵 축구경기에서 우승한 것을 기뻐하실 것인가 하는 점을 냉철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것을 크게 기뻐하신다면 우리도 그에 동참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닌 일을 두고 지나치게 기뻐할 이유가 없다.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께서 염려하시는 일을 두고 우리가 지나치게 기뻐할 우려가 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는 우리도 기뻐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무관심하게 여기시는 일에 대해서는 우리도 무관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우리도 싫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기뻐하시는지 혹은 무엇에 대해 염려하시며 분노하시는지 말씀의 교훈을 좇아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만 한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항상 거룩한 하나님이 저들의 아버지라는 사실과 저들이 그의 신실한 자녀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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