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기억하는 성도의 삶(고후5: 1-10)

 

 

1. 땅에 있는 장막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1-3)

 

모든 인간들은 생존하는 동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살아가게 된다. 따라서 교회에 속한 성도들 역시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소중한 삶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나그네와 같은 인생이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영역일 뿐 영원한 삶의 터전이 될 수 없다. 사도바울은 편지 가운데서 그에 연관해 지상의 장막 집(earthly tent)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울의 그 말은 넓은 의미로 보아 두 가지 의미(dual meanings)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하나는 성도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의 육신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와 달리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an eternal house in heaven)이란 세상에 한시적으로 존재하는 장막과 완전히 대비되는 말이다. 인간들은 지상의 거처에서 많은 노력들을 기울여 나름대로 그럴듯한 공간을 꾸미며 더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자 하지만 그곳은 잠시 머무르는 일시적인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천상의 나라에는 성도들이 영원토록 살아갈 아름다운 집이 예비 되어 있다. 그 집은 인간들의 두뇌와 손에 의해 건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집이다. 만일 인간들의 기술력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면 완벽하지 않겠지만,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은 집은 그렇지 않다.

또한 장막에 관련된 바울의 말 가운데는 인간의 몸에 관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인간의 몸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쇠약해져 갈 수밖에 없으며 결국은 죽어 썩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완벽한 부활의 몸이 제공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사건은 그의 자녀인 우리에게 주어질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성경본문 가운데서, 성도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기를 사모한다고 한 말은 그에 연관된 의미이다. 이는 인간의 몸이 본질적으로 변화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즉 앞에 언급된 지상의 장막이 한정적이고 일시적인 세상에서 영원한 천상의 세계로의 이동을 전제하고 있다면, 나중에 언급된 것은 인간의 썩어질 육신으로부터 부활을 통한 영원한 몸으로의 변화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유념해야 할 바는 하나님의 성도들은 이 땅에서 그 의미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직 완벽한 부활의 몸을 입고 있지는 않지만 이미 부활을 소유한 성도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으려 한다고 한 말은 바로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의 장막 집을 벗을지라도 새로운 몸을 입을 것이기 때문에 벌거벗은 몸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또한 성도들이 타락한 이 세상에 살면서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탄식하고 있음을 언급했다. 이는 세상에서 신음하고 있는 성도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타락한 세상은 결코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냥 두지 않는다. 사탄이 지배하는 죄의 영역과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 사이에는 본질적인 측면에서 상호 조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교회는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해 전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악한 세력과의 싸움을 위해 잠시도 방관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그 선한 싸움을 위해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요구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6:10-17)

 

이 싸움은 생명을 건 전투와도 같다. 나아가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일어나고 있다. 그 싸움을 위해 성도들은 온 몸에 전신갑주를 입고 악한 세력에 대항하는 전투에 임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거룩한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공격적이거나 파괴적이지 않다. 이에 반해 사탄의 영역이 가진 속성은 공격적이며 파괴적이다.

따라서 세상과 상이한 가치관을 소유하고 있는 교회와 성도들은 세상에서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핍박은 형식적 세력을 동반한 물리적인 핍박이 될 수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성도들이 악한 세상이 추구하는 일에 동조하지 않으며 그들의 가치관을 배척할 때 상당한 핍박이 따르게 된다.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에서 탄식하며 신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교인들은 전투중인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총성이 터지고 주변에 지뢰가 가득 깔려 있는데도 그 위태로움에 둔감한 것이다. 따라서 성숙한 성도들은 항상 그들을 일깨우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의 장막은 멀지 않은 장래에 완전히 파괴되어 버려야만 할 임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성도들은 종말의 때가 이르게 되면 천상으로부터 임하는 영원한 처소로 덧입게 된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에 속한 참된 성도들은 타락한 세상에 소망을 두는 대신 영원한 집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는 자들이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상의 장막에 살 동안 어떤 신앙자세로 살아가야 할지 교훈하고 있다. 잠시 지나가는 임시적인 과정에 지나지 않는 타락한 세상에 살아가면서 그곳에 궁극적인 소망을 두지 말고 영원한 세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살게 될 것에 대한 소망을 간직하라는 것이다.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벧후1: 12-14)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미 영원한 진리에 서 있는 자들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여전히 연약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실패와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참된 소망을 갈구하는 방편이 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항상 그에 연관하여 어린 성도들을 일깨워주고자 애썼다.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 때 임시로 세워진 장막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장막이란 정착된 것이 아니라 조립과 해체를 되풀이하는 이동식 집을 의미한다. 이는 타락한 세상에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이 지나가는 나그네 인생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여 안정된 삶을 살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한다.

사도 베드로는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지상에서의 장막을 완전히 벗어나게 될 때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자신의 지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성숙한 성도들이 소유해야 할 참된 지혜는 세상에서의 장막을 벗어날 때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는 영원한 천상의 세계의 도래와 인간의 죽음을 동시에 의미한다.

 

 

2. 이 땅의 장막에서의 탄식 (4, 5)

 

하나님의 자녀들은 육신적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성도들은 영원한 천국시민권의 신분을 소유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사망이 지배하고 있지만 영원한 천국에는 참된 생명이 존재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천국에 속했다는 사실은 세상에서의 어떤 환난과 핍박도 능히 이길 수 있음을 말해준다.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에 편지하면서 성도들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3: 20,21)

 

우리의 시민권이 이 땅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 있다는 사실은 지상 교회와 연관 지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여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교회는 이 땅 위에 존재하지만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날마다 먹고 마시며 숨을 쉬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함께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외관상 동일한 모습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세상에 속한 자와 천국에 속한 자로 크게 나눠진다. 그 양자는 영원한 삶에 대해 서로 간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들 사이에는 항상 근본적인 갈등이 존재하며 본질적으로 융화될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런 힘든 형편 가운데서 탄식하며 살아간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죄악이 지배하는 세상에서의 삶은 마치 무거운 짐을 진 듯 힘이 들 것이며, 빨리 그 짐을 내려놓고 싶을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성도들은 신음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도피를 주된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세상의 것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생명을 덧입고자 하는 것이 진정한 소망이 되어 있다. 이는 그것을 통해 사망에 승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승리의 함성은 전적으로 천상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자녀들 가운데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한 보증으로 교회와 성도들에게 자신의 성령을 보내주셨다.

또한 사망이 생명에게 삼킨바 된다(고후5: 4)는 사실에 대해서는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통해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는 모든 성도들이 그와 동일한 은혜에 참여하게 된다.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전15: 53,54)

 

타락한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의 몸은 후패하고 썩을 수밖에 없다. 무서운 죄에 빠져 지상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점차 육신이 후패해져 가게 된다.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역사 가운데는 수많은 인간들이 죽음을 미루고 수명을 연장하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여 왔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들은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아닌 일시적인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에게는 죽음을 막을 만한 아무런 방도가 없는 것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만이 안전한 보장을 약속할 수 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영원히 썩지 않을 부활의 몸으로 변화하게 된다는 사실은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된 그 약속에 대한 최종적인 성취가 이루어질 때 생명은 사탄에 의해 세상에 들어온 사망위에 궁극적인 승리를 선포하게 되는 것이다.

 

 

3. 믿음으로 행하는 삶(6-8)

 

하나님의 자녀들은 타락한 세상에 살아가면서 항상 담대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어떤 엄청난 환난과 핍박을 당한다 해도 결코 위축되거나 기죽을 필요가 없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난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며 세상에서 병약하거나 남 보기에 그럴듯한 형편에 있지 않다고 해서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는다.

나아가 많이 세상적인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하고 설령 무능한 것처럼 보여 다른 사람들에 의해 멸시를 당하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지나친 분노의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현실적으로 처한 열악한 환경에 상관없이 악한 세상을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은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교회의 성숙한 성도들은 세상에서 부유하며 건강하다고 해서 그것을 대단한 자랑거리로 여기지 않는다. 많이 배워 지식이 넘쳐 여러 사람들에 의해 칭찬과 명예를 얻는다 해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교만한 마음을 먹지 않는다. 이는 저들의 그런 삶이 이 세상에서 영원토록 지속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육신이 천상에 계시는 주님과 떨어진 상태로 존재한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신체적으로 그리스도와 분리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신앙적인 삶의 자세는 분명해야 한다.

천국시민으로서 영원한 천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주변에 널려있는 가시적인 조건들에 의존하여 살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믿음에 따라 행하며 살아간다. 성도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는 이 세상이 아니라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천국에 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숙한 성도들은 지나가는 이 세상에 강한 집착을 보이지 않으며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으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입고 있다. 히브리서를 기록한 믿음의 선배는 그에 대한 분명한 언급을 하고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11: 1,2)

 

성도들이 소유한 믿음은 단순한 이론이나 상징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이며 실상이다. 하나님께서 교회 가운데 허락하신 참된 믿음은 육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이지만 영원한 것들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된다. 이전의 모든 믿음의 선배들은 그 믿음을 통해 참된 증거를 얻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소유한 성도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최종적인 분리가 이루어지는 죽음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며 이 세상에서 좀 더 살고자 하는 욕망과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렇지만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의 자세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최선의 삶은 이 세상에서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다. 천국에는 타락한 세상과는 달리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만 존재하며 하나님에 대한 완벽한 찬송과 경배만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로 얼룩진 복잡한 세상을 떠나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4. 그리스도의 심판대와 하나님의 자녀들 (9, 10)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은 때가 되면 죽을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서는 어떤 예외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자들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인생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서의 욕망을 위해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지혜로운 성도들은 제한적인 인생의 의미를 잘 깨달아 알고 있다. 이 땅에 태어난 죄에 물든 인간이 죽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렇지만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따르게 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인간의 죽음에 연관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기록을 하고 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9: 27,28)

 

인간은 이 땅에서의 생애를 마감하고 죽게 됨으로써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화론자들과 유물론자들은 불멸의 존재로서 인간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원시 상태의 미물(微物)로부터 진화한 인간은 그 근본을 단세포 물질에 두기 때문에 인간들 역시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즉 인간들은 다른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진화된 단백질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이 살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완전히 끝나는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그들이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인생이 나름대로 의미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 세상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 자체의 영원성에 관한 의미가 아니라, 유기체로 존재하는 인간사회에서 개별 인간들이 어떤 역할을 하며 인생을 살아가는가에 대한 현상에 그 의미를 두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상이자 행위이다. 그런 자들은 삶의 본질을 무시한 엉터리 주장을 하면서도 이 세상에 살면서 가시적인 업적을 남기고 자신의 이름을 남기면 그것이 마치 영원히 갈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그들은 인간의 본질적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므로 가시적인 현상에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영원한 천상의 세계에 대한 참된 깨달음이 없는 불신자들에게는 진정한 소망이 있을 수 없다. 그에 반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구원에 참여한 성도들에게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참된 소망이 있다. 신자든 불신자든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반드시 죽게 되므로 그 너머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그 기준은 세상에서의 윤리적 삶과 역사가들이 평가하는 공적이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던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인간의 모든 고통을 체휼하셨으며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 따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는 죄가 전혀 없는 분이었지만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셨다. 그것은 물론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지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 사역을 통해 거룩한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속죄와 화목을 위한 제물로 바치셨다.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깜깜한 무덤에 묻히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그 후 여러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천상의 나라로 승천하셨다. 그 때 그는 멀지 않은 장래에 올라가신 그대로 재림하시라고 약속하셨다. 그분께서는 마지막 날 심판주가 되어 우리 앞에 다시 오시게 될 것이다.

그 놀라운 사실을 깨달아 알고 있는 성도라면 더 이상 자신의 욕망을 좇아 살지 않는다. 모든 성도들은 자기를 위해 모진 고통을 당하고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위해 살게 된다. 사도바울은 로마교회에 편지하면서 그에 대한 분명한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은 그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의 삶과 직접 연관된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14:7-9)

 

교회에 속한 성도들 생명은 이미 개인의 소유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피로 값 주고 그들을 사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거룩한 피를 흘리신 것은 성도들을 자기에게 속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어야 한다. 그렇게 사는 삶은 결코 스스로 손해를 보거나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희생당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렇게 사는 것이 저들에게 가장 훌륭한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인간 스스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창출해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오직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통치에 연관되어 있을 때 진정한 인생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살든지 죽든지 항상 주님을 기쁘게 하는 가운데 그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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