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의 회복(고후4: 1-18)

 

1. 사도와 직분 (1, 2)

 

하나님의 백성들이 타락한 이 세상에서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사탄의 통치 영역 가운데서 거룩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자 할 때 많은 환난과 핍박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일반성도들뿐 아니라 사도들에게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도바울은 자기 앞에 낙심할 만한 일들이 숱하게 많이 놓여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그로부터 긍휼을 힘입어 부여 받은 직분으로 인해 그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바울을 비롯한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던 성도들은 세상에서 값어치 있다고 하는 것들과 천박한 욕망을 포기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세상의 환난과 고통 가운데서도 오히려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천상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믿음의 선배들은 남에게 드러나지 않는 것들이라 할지라도 부끄러운 일을 버리고 간교한 삶을 추구하지 않았다. 경건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히 붙잡음으로써 그것을 혼잡스럽게 하는 일을 피했다. 도리어 저들의 삶 가운데 영원한 진리가 나타나도록 힘썼다. 그런 순전한 신앙자세와 성숙한 삶을 통해 모든 사람들의 양심에 비추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추천하며 보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을 거리낌 없이 남에게 추천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바울은 진리를 나타냄으로써 자신을 비롯해 함께 있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몸 된 교회 앞에서 스스로 추천했다. 원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 역시 겸손을 유지하는 가운데 저들과 동일한 정신을 소유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올바른 신학과 신앙을 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신앙에 대한 주관적인 자기 판단이 아니라 객관성 있는 말씀의 증거가 따라야 함을 말해준다. 지상의 교회가 견고하게 자라감으로써 그러한 분량에 까지 다다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복음의 비밀과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 (3, 4)

 

하나님의 복음은 바깥으로 드러남에 있어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비밀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교회에 속한 성도들에게는 그 복음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에게는 그것이 철저히 감추어져 있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들은 결코 스스로 하나님의 복음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사탄의 세력은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철저히 단속하고 있다. 사탄은 항상 인간들을 어두움과 혼동 속에 가두어 두고자 온갖 책략을 다 쓴다. 따라서 어리석은 인간들은 사탄이 제시한 가짜 신령들을 믿는 것이 마치 참된 신앙이라도 되는 양 확신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거짓 신들을 따르는 자들은 마음이 혼미할 수밖에 없다. 어느 것이 참된 진리인지 거짓 가르침인지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바로 옆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불신자들의 마음이 혼미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소극적인 입장이 아니라 매우 적극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유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동일한 모범과 교훈을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시대의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여 그에 관련된 교훈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13:13-15)

 

하나님의 복음의 비밀은 아무에게나 함부로 공개되어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녀들에게만 그 복음이 특별히 증거 되어야 한다. 즉 복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 내용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성도들은 복음을 소중히 여겨 신중하게 전달해야 한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그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가 드러나게 된다. 이에 대한 증거와 의미는 구약시대의 선지자들과 신약시대의 사도들에게서 공히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위에 기록된 복음서의 기록을 통해 예수님께서도 그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보이셨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시대의 성도들도 마땅히 주님을 비롯한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교훈을 받아들여 그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하지만 현대에는 잘못된 사람들에 의해 복음이 값싼 물건처럼 되어버렸다. 마치 마음씨 좋은 장사꾼이 아무에게나 제멋대로 나누어주는 듯이 헤프게 되어 버린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경이 마치 그렇게 하도록 교훈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진지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야 한다. 이는 인간들의 종교적인 만족을 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귀한 뜻을 이루어가는 방편이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세속적인 이성과 판단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는 사고와 행동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

또한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임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고후4: 4). 하나님께서는 맨 처음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자신의 형상에 따라 지으셨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그를 섬길 수 있는 것은 그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들에게 모든 피조세계를 통치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1: 26-28)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피조물도 소유하지 않은 자신의 형상을 오직 인간들에게 부여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의도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세계를 대리 통치하도록 맡기기 위해서였다.

위 본문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특별히 복 주셨음이 언급되어 있다(1: 28). 그 복은 타락한 인간들이 생각하는 복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 복은 온갖 저주와 고통을 겪은 자들이 느끼는 상대적인 복과는 상이한 개념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범죄하기 전에 주셨던 원천적인 복을 통해 인간들은 생육, 번성, 충만한 가운데 천하의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은총을 입었다. 그것이 곧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원천적인 복이었다.

그런데 사악한 사탄의 유혹을 받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반함으로써 저들 가운데 존재하던 거룩한 형상이 파괴되어 버렸다. 그래서 인간은 그 후부터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범죄한 아담의 형상을 지니게 되었다. 그 형상은 사탄이 관여하는 타락한 형상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선택하신 자기 자녀들을 버리지 않고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하고자 작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자기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써 선택한 백성들에게 그 형상을 회복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분이시다. 오늘날 그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새롭게 된 성도들은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들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들의 거룩한 공동체로서 그것으로 인해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게 된다.

 

 

3. 복음전파의 내용 (5-7)

 

사도바울은 본문 가운데서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있다. 사도들을 비롯한 성도들은 저들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세우거나 전파하지 않았다. 그들이 전파하는 내용은 크게 보아 두 가지였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 되신다는 사실과 사도들이 교회를 섬기는 종이 된다는 점이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창세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함으로써 저들의 주인이 되시기 위해서였다. 이로 인해 예수님과 그의 자녀들 사이에는 주인과 종의 확고한 관계가 성립되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자신을 비롯한 사역자들이, 너희교회의 종이 되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이는 저들에게 허락된 직분은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기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즉 사도들은 교회를 섬기는 종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저들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오늘날 모든 직분자들은 자신의 신앙적인 삶을 종교적으로 그럴듯하게 장식하는 자가 아니라 교회를 온전히 섬기는 자들이어야 한다. 따라서 아무리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라 할지라도 교회 위에 군림하는 자가 될 수 없다. 사도들조차도 교회를 섬기는 성도였을 뿐 그 위에 군림하는 자들이 아니었다.

이는 바울이 전파하는 복음의 내용과 목적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지상에 온전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도들과 사역자들을 특별히 세우셨다.

하지만 범죄한 인간들은 참된 빛이 전혀 없는 사탄이 지배하는 흑암 가운데 살게 되었다. 선택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역시 구원이 임하기 전에는 그와 동일한 형편에 놓여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구원이 약속된 자기 자녀들을 위해 참 빛을 보내기로 작정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어두움을 밝히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 사도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빛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1: 5-13)

 

죄에 빠진 인간들은 참 빛이 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일반 불신자들은 물론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도 그를 영접하지 않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도리어 그를 심하게 핍박하고 배척했으며 급기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핑계 대며 이 땅이 자신의 욕망의 세계를 구축하고자 애쓰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빛이신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영접하여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그것은 세상에서의 혈통이나 신분 혹은 지식에 의해 쟁취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 권세는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주어지는 고귀한 선물이었다.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에게 자신이 소유한 빛의 본성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어 주셨던 것이다. 그로 인해 성도들의 심령은 죄를 벗어나 변화될 수 있었다.

바울은 또한 본문 가운데서 그 보배를 질그릇에 담고 있음을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다(고후4: 7). 이는 개인 성도들과 더불어 교회에 관련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구원받은 성도이지만 날로 후패해져가는 인간의 몸을 지닌 사실과 여전히 피조물인 부족한 인간들이 모인 지상교회를 질그릇으로 이해했다. 이 말은 교회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를 통해 죄악 세상을 능히 이기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 놀라운 능력이 사도들을 비롯한 인간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사도들조차도 그 능력이 저들에게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보아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그 놀라운 능력을 독자적으로 소유한 자가 없음이 분명하다.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반영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 의미를 올바르게 깨닫게 될 때 교회의 존귀함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4. 세상에 맞서 싸우는 전투 (8-11)

 

하나님의 몸 된 교회가 존재하는 이 세상은 마치 전쟁터와도 같다. 사탄의 세력은 성도들을 사방에서 에워싸고 핍박을 가하는 가운데 지상의 교회를 거꾸러뜨리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백성들은 저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지 않을뿐더러 결코 낙심하지 않고 궁극적인 패망을 당하지 않는다.

타락한 세상은 원천적으로 하나님과 원수관계에 놓여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신음하는 자기 자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세워 이 땅에 보내셨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한 이래 사탄의 편에 서 있던 세상은 결국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을 멸시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참혹하게 죽어버렸다.

그런데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 따른 것이며 십자가 사역을 통한 부활사건은 그의 자녀인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보통 인간들의 단순한 죽음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달랐다. 이는 그의 죽음이 우리와 밀접하게 연관되며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에 관한 언급을 하며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 10,11)

 

하나님의 자녀들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몸에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고 있음을 고백했다(6: 17). 이는 성도들의 모든 삶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것을 통해 우리의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게 된다.

이 말은 살아있는 성도들의 삶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본질적으로 연합관계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6: 5). 즉 우리의 삶은 항상 예수님으로 인해 세상에서의 죽음에 넘겨지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는 것은 단순한 박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즉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는다는 사실은 그들이 타락한 세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속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악한 세상이 성도들을 핍박하는 것을 통해 지상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에 직접 연관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그 박해는 예수님의 죽음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생명이 나타나게 된다. 이 말은 세상에서 성도들이 당하는 핍박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존재한다는 표식이 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이와 동일한 의미의 말을 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타락한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이는 성도들의 삶에 대한 명확한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 20)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향해 자신의 삶을 고백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로서 자신을 언급했다. 역사적으로 보아 과거에 일어난 십자가 사건에 자신의 몸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의미는 비록 사도바울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를 포함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해당된다.

그러므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상태이다(2: 20). 그 대신 그들의 심령 가운데는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다. 이는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는 표현이 아니라 영적인 실제로 이해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자녀들은 생명이 없는 세상에서의 일시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갈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의 삶의 의미와 목적은 그로 인해 완전히 확정되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위해 이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은 전혀 그렇지 않다. 성도들은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기억해야 할 바는 이 세상이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교회와 원수관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원수로 여기고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이라면 우리에게도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 타락한 세상은 아직까지도 사탄의 적극적인 간섭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세상과 문호를 개방하고 저들과 상호 가까이 지내려는 자들이 많이 있다. 나아가 그런 자들은 세상과 교회 사이에 가로놓인 벽을 허물고자 애쓴다. 우리 시대의 기독교가 타락한 세상을 친화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여간 우려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교회 가운데 보존해야 할 우리는 이에 대해 매우 민감한 자세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5. 사망과 생명의 주님 (12-15)

 

하나님의 통치를 떠난 죄악 세상은 그것 자체로서 사망의 영역이다. 세상에서 드러나는 모든 죄의 양상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 하느니라(고후4: 12)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과연 무슨 의미인가? 이는 너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있다는 말과도 같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영혼을 사망과 눈물과 걸려 넘어짐으로부터 구원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기에 이 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생존투쟁이 벌어지는 세상에 살아가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있는 자세로 사고하며 행동해야 한다. 그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기에 시편기자는 그에 대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내가 생존 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내가 믿는고로 말하리라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116:8-17)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잔을 들고 거룩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모든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께 한 서원을 갚으리라는 다짐을 노래했다. 사망이 지배하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감사의 제목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 속한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호사스런 인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죽음으로써 살아간다. 이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욕망을 포기함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이 타락한 세상에서 남 보기에 유능하고 훌륭한 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그 앞에서 겸손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자신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자 여자의 후손인 메시아의 종이라는 사실을 고백했다. 그가 사탄의 세력에 의해 결박되었던 자신을 영원히 해방시키셨기 때문이다. 띠라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모든 일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삶 가운데 일어나게 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속하신 자녀들도 그와 함께 살려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끝없는 찬송과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6. 새 생명과 영원한 영광 (16-18)

 

죄에 물든 인간은 세상에 살아가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후패해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인간이 썩어져 가는 자기 자신의 일시적인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행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 결과는 아무런 가치 없이 영원히 썩는 것에 귀착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살아가는 대다수 인간들은 썩어져 가는 자기의 인생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 이는 마치 썩어가는 시체에 짙은 화장을 하거나 화려한 비단옷을 입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썩어져 가는 겉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속사람에 진정한 가치를 두어야 한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타락한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어려운 일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숙한 성도들은 그것으로 인해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이 겉 사람과 속사람의 본질적인 속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이에 대해,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라는 고백을 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는 자들 가운데도 겉 사람의 일을 추구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자들은 탐할만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세상의 것들에 대해 탐심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주로 종교적으로 채색된 형태로 드러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에 속아 넘어갈 수 있다.

참된 지혜는 인간의 겉 사람은 날로 후패해 가는 존재임을 분명히 깨달아 인식하는 것이다. 지나가는 세상에서 육신을 좇아 살아가는 자들은 항상 육신의 일을 도모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영원한 세계를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자들은 영의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육신의 생각을 하며 추구하던 무엇인가를 이룩하게 되면 그것을 대단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여긴다. 멀지 않은 장래에 그 모든 것들이 완전히 사라지리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세상에 자기의 이름을 남기기를 원하며 사람들이 오래도록 기억할만한 업적을 남기고자 한다.

한편 스스로 그런 삶을 살기 어렵다고 판단하는 자들은 다른 방법을 강구하거나 자기 자식을 통해 그것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 가운데서 나름대로 터득한 범위 안에서 만족스럽게 살아갈 궁리를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삶의 태도이다. 사도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5-8)

 

바울은 여기서 육신의 일과 영의 일이 분명히 다르다는 사실을 말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육신의 판단으로 세상의 값어치를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행위라는 것을 깨달아 알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하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는 결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없다.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그 어떤 것들을 동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

설령 그것들이 종교적인 모양새를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육신의 사고로 말미암는 것들이라면 기독교 음악이나 미술, 혹은 다양한 종교 활동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다. 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육에 속한 것들은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욕이 될 따름이다.

성숙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의 환난을 막연히 회피하고자 하지 않으며 세상에 속한 육신의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그들은 천상의 나라에 연관된 영원한 영광을 이루는 것을 즐거워한다.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것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눈에는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항상 그것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잠시 지나가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타락한 세상의 제한적인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세상은 인간들에게 결코 영원하지 않은 과정적인 영역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참된 지혜를 가진 성도들이 가져야 할 신앙자세에 대해 교훈하고 있다.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 거한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51:6)

 

어리석은 인간들은 잠시 지나가는 세계를 마치 영원한 듯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세상에서 쟁취해 얻은 것을 큰 자랑거리로 삼으며 삶의 가치로 생각하게 된다. 기독교인들 가운데도 세속화된 자들은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만일 교회 가운데 그런 사상을 가지고 들어오게 되면 교회는 일반 종교적 색깔만 띠고 있을 뿐 세상과 다르지 않는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얻는 것들이 아무런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 그 모든 것들은 멀지 않은 장래에 마치 연기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며 그들이 자랑거리로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옷이 해어지듯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살던 인간들은 저들의 기대와는 달리 하루살이 벌레처럼 죽음에 직면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소유한 구원은 영원히 존재한다. 또한 그들이 거룩한 하나님으로부터 얻어 소유하게 된 참된 의는 영원토록 소멸하지 않는다. 성숙한 성도들이 소유한 참된 소망은 바로 거기 있으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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