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모세의 수건과 신약교회(고후3: 12-18)

 

1. 언약과 모세의 영광 (34:28-35)

 

하나님께서 처음 모세를 시내산 위로 불러 올리셨을 때 산 아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32: 1-6; 고전10: 7). 모세가 산으로부터 더디 내려온다는 이유로 백성의 장로들은 당시 두 번째 영도자였던 아론을 찾아가 저들을 위해 금송아지를 만들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를 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자 했던 것이다.

일반 종교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저들의 마음은 가히 헌신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굽에 있을 때 하나님의 무서운 재앙들을 겪은 이방민족이 그곳에서 빨리 나가달라며 저들의 손에 쥐어주었던 금반지와 금귀고리 등을 내놓으라고 지도자들이 요구했을 때 백성들은 귀한 보물들을 아낌없이 바쳤다.

아론은 그것들로 금송아지를 만들고 여호와의 절일을 선포했으며(32: 5),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앞에서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지냈다. 그들은 우상숭배행위를 하면서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착각한 채 춤을 추면서 성대한 축제를 벌였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행위는 여호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를 욕되게 하는 악한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에 빠진 백성들에게 크게 진노하셨다.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배도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십계명을 받아 시내산 위에 있던 모세에게 그 두 돌 판을 가지고 내려가 금송아지를 파괴하도록 명령하셨다.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모세는 산 아래서 우상숭배에 빠져 종교적 즐거움에 취해 있던 백성들을 향해 두 돌 판을 던짐으로써 그것들이 깨어졌으며, 금송아지는 불살라졌다(32: 19,20).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셨던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 판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맺어진 계약문서였다. 그런데 그 돌 판들이 산산조각 나버렸으니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그 후 다시금 모세를 시내산 정상으로 불러 올리셨다. 백성들의 배도행위로 말미암아 깨어진 돌로 된 계약문서를 다시금 작성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모세는 두 번째 시내산 위로 올라가 40일간 머물면서 식음을 전폐하며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섰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다듬어 가지고 올라온 두 돌 판들에 계약문서인 십계명을 다시금 기록하셨다. 모세는 하나님의 계명이 기록된 그 돌 판들을 가지고 시내산에서 내려오게 되는데 그 때 모세의 얼굴에는 영광의 광채가 났다. 이는 모세가 하나님과 자기 백성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중요한 사역자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일 사십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모세가 그들을 부르니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하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34:28-35)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아 들고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놀라운 광채가 발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광채 나는 얼굴을 똑 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이는 타락한 아담으로 말미암아 소유하게 된 원죄성과 이스라엘 민족의 배도에 빠진 죄성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모세의 얼굴을 보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모세는 아론을 비롯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그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모세는 백성들 앞에서 시내산에서 받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전하고 그의 계명에 온전히 순종하도록 명령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들의 판단에 따라 원하는 대로 살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살아야만 했다. 앞서 시내산 아래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김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배도의 길에 들어섰던 그들이었기에 그에 대한 선명한 깨달음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때 모세는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KIV, 우리말 성경, 참조). 그러나 모든 말씀을 전달한 후, 하나님 앞에 홀로 있을 때는 그 수건을 벗었다. 즉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얼굴의 수건을 벗고 있다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할 때는 얼굴에 수건을 썼다. 이는 죄악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광채가 나는 모세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악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게 되면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언약의 두 돌판 (32:15, 16)

 

하나님께서 처음 모세를 통해 주셨던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 판은 아론이 만들어 백성들의 섬김의 대상이 되었던 금송아지에 던져져 깨어지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 후 다시금 모세에게 새로운 돌판 두 개를 다듬어 가지고 시내산 위로 올라오도록 명령하셨다(34: 1). 그분께서는 또다시 그 전과 동일한 십계명이 새겨진 두 개의 돌 판들을 주셨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 판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 돌 판이 하나가 아니고 굳이 둘이었는가? 하나의 돌 판이었으면 안 되었을까? 일반적인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좀 더 큰 돌판 이라면 하나에 십계명을 다 기록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또한 형편에 따라 글씨를 좀 더 작게 새기거나 글자 배열을 기술적으로 한다면 하나에 다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굳이 두 개의 돌 판을 가져오도록 명령하셨다. 이는 사실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체결되는 양 당사자 간의 엄중한 계약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 판은 계약문서이자 하나님의 언약문서이다. 이에 대해서는 첫 번째 두 돌 판이 주어졌을 때 그에 대한 분명한 설명이 나타나고 있다.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증거의 두 판이 그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편저편에 글자가 있으니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32: 15,16)

 

위의 본문 말씀 가운데 중요한 점은 두 돌 판의 양면에 글자가 기록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돌 판의 양면에 글자를 새기셨을까? 흔히 잘못 생각하듯이 두 개의 돌 판의 한 면에 십계명을 반반씩 혹은 내용의 특성에 따라 나누어 기록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같은 내용을 두 개의 돌 판에 각각 앞뒤로 새긴 복사판과 같이 동일한 내용의 두 개의 돌 판이었다는 점이다.

십계명이 기록된 모세의 두 돌 판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맺어진 계약문서이다. 즉 돌 판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것이었다. 이 계약문서에는 모세가 가져간 돌판 위에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똑 같은 내용이 두 돌 판에 새겼으므로 위조나 변경이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계약문서인 언약의 두 돌 판을 나중 하나님의 규례 가운데 제작된 언약궤 안에 보관하도록 하셨다. 언약궤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맺은 계약문서의 보관소의 기능을 했다. 따라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그곳을 중심으로 삼아 교제하게 되었다. 언약궤와 그 안에 있던 계약문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완성될 때까지 계약적 효력을 지니고 있었다.

지성소와 그 안에 놓여있던 언약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는 중심지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 사이에 맺은 계약의 증거인 두 돌 판들이 백성을 대표하는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신약성경 히브리서에서는 지성소 안의 언약궤 안에 두 돌 판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9: 3-5)

 

성전 내부는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되어 있었다. 성소에는 향단과 금 촛대, 그리고 떡 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휘장으로 가려진 지성소 안에는 두 개의 돌판으로 된 십계명인 계약문서가 들어있는 언약궤가 놓여 있었으며 그 안에는 만나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등 시내광야에서 주어진 물건들이 함께 들어 있었다. 물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맺어진 계약문서인 언약의 두 돌 판이다.

성소에는 여러 제사장들이 날마다 출입했다. 하지만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일 년 한 차례 들어갈 수 있었으며 일반 제사장들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즉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언제든지 수시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정해진 규례에 따라 정해진 날에만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16: 34). 어느 누구든지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죽음을 면할 수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시내산에서 맺은 그 계약을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심으로써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과 맺은 언약을 완성하셨다. 즉 십자가 사역은 이전에 맺은 계약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게 되자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의 가운데가 찢어졌던 사건은 그것을 증거한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15: 37,38)

 

약속의 땅의 중심부인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십계명을 통해 맺어진 계약의 완성을 의미한다. 이는 속죄제물이자 화목제물인 흠 없는 예수님의 몸이 지성소에 바쳐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몸 된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으며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4: 6; 8: 15).

 

 

3. 모세의 광채와 교회의 영광

 

(1) 모세의 수건(12-13)

 

사도바울은, 시내산에서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 판을 가지고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 영광의 광채가 났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서신을 쓰고 있다. 십계명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에 맺어진 계약문서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계명을 들고 있는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다. 이는 저들이 하나님께 저항하는 무서운 죄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바울은 그와 함께 직분사역의 영광을 언급한 후 그것으로 말미암은 소망이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 그는 그 사실로 인해 교회와 성도들에게 담대히 말할 수 있었다. 바울은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더 이상 모세 시대에 그랬던 것과 같이 얼굴을 가리는 수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모세는 시내광야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도록 하기 위해 얼굴에 수건을 썼다(고후3: 13). 이 말은 모세가 자기의 얼굴에서 영광의 광채가 사라지는 것을 백성들로 하여금 보지 못하도록 함이라는 것이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는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었다. 즉 일반 백성들에게는 항상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영광을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일시적인 영광으로 인해 잘못 판단할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그 말을 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수건을 쓸 필요가 없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사도들과 교회 가운데는 항상 영광의 광채가 상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이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확정된 것이다.

 

(2) 신약교회의 구약성경 읽기(14,15)

 

기독교인이라 스스로 주장하면서 어리석음에 빠져 있는 자들은 새 언약이 주어진 신약교회시대에 살아가면서 아직까지도 영적인 수건을 가리고 있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고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그리스도를 멀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세의 얼굴을 가렸던 그 수건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땅히 없어져야 할 것이었다.

이 말은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구약성경을 대하고 읽는 것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신약교회 시대에도 모든 성도들은 신약성경과 함께 항상 구약성경을 읽는다. 구약의 진리는 우리시대에도 여전히 변함없는 동일한 진리인 것이다.

그렇지만 구약시대의 성도들과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구약성경을 읽는 관점과 방법은 서로 동일하지 않다. 만일 그렇게 되면 구속사적 의미를 경시하는 위험한 윤리주의적인 관점에 빠질 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의 관점에서 구약성경을 읽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신구약에 연결되어 흐르고 있는 구속사적 의미를 명확하게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본문 가운데서 모세의 글을 읽는 문제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모세오경으로부터 구약성경 전체로 확대해 이해할 수 있다.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지 않고 읽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렇게 해서는 구약성경을 올바르게 깨달을 수 없을뿐더러 도리어 성경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에는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그리스도를 배제한 채 자의적으로 읽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것은 구약성경을 구원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가 아니라 단순한 역사서술로 읽거나 윤리적인 목적을 위해 읽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기독교로 채색된 어리석은 종교학자들 가운데는 구약성경을 신화적으로 접근하는가 하면 종교적 모델 가운데 하나로 이해하는 자들마저 있다.

그러나 그런 자들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심령으로부터 모세의 수건을 벗고 구약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에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올바르게 깨달아 이해할 때 이 땅에 주님의 교회가 건전하게 자라갈 수 있는 것이다.

 

(3) 수건의 구속사적 기능(16,17)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에게는 마음으로부터 수건이 벗어지게 된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성도들이 자신의 부단한 노력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저절로 그렇게 된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항상 자기 자녀들과 함께 거하신다. 성도들이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조차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떠나지 않으신다. 이는 그분께서 항상 교회 가운데 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한다. 성령께서 교회와 성도들 가운데 내주하시는 것은 종교적 인식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에 근거하고 있다.

성숙한 신앙으로서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천상으로부터의 참된 자유가 주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에 대한 분명한 말씀을 하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영원한 진리이자 참된 자유의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 31,32)

 

예수님은 인간을 비롯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이시자 전능하신 하나님의 본체이시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한 진리이시다. 하나님의 선택 받은 자녀들은 타락한 세상에서 익힌 이성과 경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온전한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본문 가운데서 성도들의 자유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이 말은 이 세상에서 아무렇게나 살 수 있는 방종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코 이 세상에서 분별없이 살아가지 않는다. 그렇게 사는 것은 천박하고 위험한 욕망표출에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언급하는 자유란 타락한 세상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이는 곧 사탄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졌음을 의미하고 있다. 공중권세를 잡은 사탄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며 천상의 하나님께 속해 영원한 삶을 소유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4.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 (18)

 

맨 처음 창조된 인간인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창조되었다. 그러나 아담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 범죄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따라서 타락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된 인간은 참 인간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완전히 상실 당하게 되어 버렸다.

하나님께 저항함으로써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대신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지니게 되었다. 그런 인간은 그 전의 인간과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다른 사탄의 형상과 연관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창세전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 잠재적으로 남아 있었다. 비록 그 기능을 발휘할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그 본질은 남아 존재했던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만 할 자들이다. 그들은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임하게 될 때 그의 형상을 덧입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적인 수건을 벗은 채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 이는 구약시대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볼 수 없었던 점과 비교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완성된 후로는 그를 통해 하나님을 보며 그의 영광을 직접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 자신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1244,45)

 

타락한 상태라 할지라도 인간들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에 대해 알기를 원하고 눈으로 보기를 원한다. 하나님께 저항하고 있는 불신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들은 종교적인 열성을 다해 신을 찾아 나서지만 허사일 따름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오직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보며 섬긴다. 즉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 수도 없으며 볼 수도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섬김으로써 그것을 통해 참된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

지상의 교회와 성도들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그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을 가져야만 한다. 즉 인간들의 특별한 노력이나 종교적 행위를 통해서는 그것이 아무리 탁월한 방법이라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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