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문안과 감사(고후1:1-11)

 

1. 사도바울의 기원 (1, 2)

 

바울은 에베소에 있으면서 고린도전서를 기록하여 그것을 디모데를 통해 고린도교회에 전달했다(고전4: 17;16:10). 그는 편지를 보내고 난 후 당시 좋지 않은 상황으로 인해 오순절 때까지 에베소에 머물렀다(고전16:8). 그 후 바울은 고린도를 방문하기 위해 가는 길에 마게도니아에 들러 여러 교회들을 방문했다.

그 때 고린도에 있던 디모데가 디도와 함께 마게도니아로 와서 바울을 만났다. 바울은 거기서 고린도교회에 관한 좋은 소식을 들었다(고후7: 13, 참조). 고린도전서를 받은 지역의 성도들이 바울의 권면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은 기쁨과 감사에 넘쳤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 반가운 소식을 듣는 상황 가운데서 바울은 디모데와 함께 고린도교회에 두 번째 편지를 쓰게 되었다. 이는 물론 바울의 자의적인 판단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감동에 의한 것이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기록하면서 또다시 자기의 사도성을 언급했다.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란 사실을 분명히 밝혔던 것이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란 사실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직분적 신분을 말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의 서신이 하나님의 계시란 사실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사도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지상 교회에 주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절대로 중요한 신앙의 본질에 해당된다.

바울은 또한 편지의 초두에서 고린도교회를 위해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이름으로 은혜와 평강을 기원했다. 바울의 기원은 단순한 형식상의 겉 치레 인사가 아니었다. 고린도교회를 향해 바울이 한 기원은 매우 중요한 상속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도로부터 고린도교회로, 그리고 고린도교회로부터 이후 역사상 존재하는 여러 참된 교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상속되었다. 이는 물론 고린도교회 뿐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를 비롯한 에베소 교회와 로마 교회 등 사도교회 시대의 모든 교회들이 함께 소유했던 내용이었다.

 

 

2. 교회로부터 찬송 받으시는 하나님

 

(1)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위로(3,4)

 

하나님은 교회로부터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다. 그 분께서는 개인 성도들에 의해 찬송을 받으시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 공동체를 통해 공적으로 영광을 받으신다. 개별 성도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찬송할 수 있는 것은 저들이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 속한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유념해야 할 바는 개인 성도들의 종교행위를 넘어 전체 교회공동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자면 한 가정에서 자녀들 개개인이 부모의 기쁨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형제들 전체가 하나가 되어 부모의 기쁨의 대상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즉 자녀들 가운데 한 아들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그 아들 하나만으로 부모의 기쁨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형제들이 부모가 원하는 온전한 관계를 이루게 될 때 비로소 부모를 진정으로 기쁘시게 할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체도 개별 성도들이기에 앞서 전체 교회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며 자비로우신 분이다. 그는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위로의 하나님으로서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족하다. 그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 항상 자기 백성들을 위로하신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진정한 위로를 통해 역시 세상의 환난 가운데 살아가는 다른 성도들을 위로할 수 있게 된다. 그 위로는 인간들의 종교적인 심성이나 마음씀씀이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참된 위로는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가 마땅히 소유해야 할 중요한 기능들 가운데 하나를 본다. 그것은 교회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는 성도들을 위로하는 기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진정한 교회라면 세상에서 환난 당하는 성도들을 온전히 위로하게 되며, 교회 가운데서 부당한 상처를 입히거나 입지 않는다.

우리는 또한 타락한 세상은 결코 교회와 성도들을 위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어린 교인들과 어리석은 자들은 세상에서 위로를 받고자 기대하며 애쓰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으며 심한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5:19);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16:13)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자녀들이 세상에 살고 있으되 타락한 세상에 속하지 않았음을 말씀하고 계신다. 만일 그들이 이 세상에 속했다면 세상이 그들을 사랑할 것이며 세상으로부터 상당한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은 세상 왕국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는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 환난을 당하게 됨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 하라는 권면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강을 누리도록 하셨다. 그가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악한 세상을 이겼으니 그에게 속한 자들은 환난을 당하지만 담대하게 대처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세상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진정한 위로가 임하게 된다.

 

(2) 그리스도의 고난과 우리의 소망(5-7)

 

하나님의 자녀들이 타락한 세상에서 평강과 즐거움을 누리려고 한다면 여간 어리석은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으로부터 모진 환난을 당하셨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더러운 사탄이 지배하는 악한 세력으로부터 엄청난 고초를 당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거룩한 하나님께 속하게 된 자들은 세상으로부터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하나의 이유만으로 세상의 견제를 받는 대적자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그에 관한 언급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저와 함께 하는 자들 위에 넘쳤음을 말하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저들이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를 통해 넘쳐나게 된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으로부터의 엄청난 고난과 더불어 주님으로부터 오는 커다란 위로를 동시에 받게 된다.

이는 비록 사도바울뿐 아니라 그의 교훈 아래 있는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공히 해당되는 말이다.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아무리 심한 핍박을 가한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는 아무것도 없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면서도 그에 대한 언급을 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8:35-37)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결코 타락한 세상이 평강의 영역이 될 수 없다. 거기에는 환난과 핍박이 있으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위의 본문 가운데는 바울이 세상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잘 기술하고 있다. 바울과 함께한 무리는 마치 곧 죽임을 당할 자처럼 취급 받았으며 도살당하게 될 양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는 교회에 속한 성도들에게 세상으로 말미암아 허락된 평강이 없음을 의미한다. 도리어 그들은 세상의 위협으로 인해 불안한 마음이 가득 차게 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세상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최상의 의미로 생각한다. 그러나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은 그런 자들을 보고 복된 자들이라 말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저주받은 자들로 판단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으로부터 당하는 환난으로 인해 그다지 낙심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들은 환난과 고통을 당하면서도 타락한 세상을 넉넉히 이겨나갈 수 있다. 교회가 세상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저들의 능력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점은 교회에는 항상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쳐나며 동시에 그의 위로가 넘쳐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고난을 당하게 되지만 천국의 소망 가운데 그리스도의 위로가 넘치게 됨을 의미한다.

바울은 사도로서 자기와 함께하는 무리가 환난을 받는 것은 고린도교회의 위로와 구원을 위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것도 저들의 위로를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 위로는 교회와 성도들 가운데 풍성히 역사함으로써 그것을 통해 저들이 받는 고난을 거뜬히 견딜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를 위한 바울의 소망이 그토록 견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처럼 그리스도의 위로에 참여하는 자가 될 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관련된 바울의 언급은 역사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교회들에 공히 적용되며 오늘날 우리 시대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존재하면서 엄청난 고난을 견뎌나가는 동시에 하나님의 영원한 위로를 풍부히 누리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의 의미는 사도들을 통해 분명하게 설명되어 드러났으며 하나님의 모든 교회를 통해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적용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위로와 그를 통한 구원이 사도들을 통해 설명되어 성도들에게 적용되었다. 사도들이 없으면 우리는 그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를 통해 세움 받은 사도들을 통해 창세전에 택하신 모든 성도들에게 그 의미를 분명히 전달하여 적용케 하셨던 것이다.

 

 

3. 세상에서의 환난 (8-10)

 

교회가 세상에서 당하는 다양한 고난은 결코 낭만적인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그에 관해 언급하셨던 것처럼 바울은 에베소에 있으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환난을 당했다. 그것은 철천지원수 관계와 대적이 아니면 발생할 수 없는 환난이었다.

바울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결코 그 환난을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과연 그렇다면 우리 역시 세상으로부터의 그 환난을 피하지 못한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그런 환난을 당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우리가 분명히 이해해야 할 바는 우리 또한 그 환난의 의미 속에 그대로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21세기에 존재하는 교회들과 그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도들이 당했던 환난으로부터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다. 참된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그 고난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세속정치와 사회 환경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환난을 당하지 않는 자들이 많이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오늘날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환난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고 있다. 그들 중 다수는 세상에서 크게 성공하여 좋은 집에서 배불리 먹으며 호사스런 삶을 살아간다.

그렇다면 그들의 삶은 환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서의 풍요로움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어리석은 교인들 가운데는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축복인 양 우기는 자들이 없지 않다. 하나님께서 자기가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이 세상에서 풍요롭게 살아가도록 축복을 내리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은 그것을 두고 축복이라 자랑하기도 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 온갖 종교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으로 성숙한 신앙인이 취할 자세가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타락한 세상에 살면서 엄청난 고난을 당한다. 즉 세상에서의 풍요로움과 안락한 삶이 축복이 아니라 도리어 위험한 상황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 대처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환난이 될 수 있다. 다수의 사람들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삶을 추구하며 그것을 획득하여 좋아할 때, 그러한 것이 얼마나 위태로울 수 있는가 하는 점을 깨달아 오직 주님만 의지한다는 사실 자체가 고난인 것이다.

물론 역사적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는 정신과 육체적으로 심한 환난을 당하는 경우가 많이 있어왔다. 한편 생각해보면 그런 어려운 환경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은 영적으로 훨씬 건강한 모습을 유지하기도 했다. 고통 중에 있는 성도들이 세상의 악한 모습을 분명히 깨닫기에 훨씬 쉬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환경은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이 스스로 만들거나 선택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머무는 동안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고난을 당했다. 그는 풍요롭고 호사로운 생활을 한 것이 아니었으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귀를 받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남들 보기에 저주받은 자처럼 비천하게 보이는 삶을 살았다. 에베소에서 쓴 고린도전서 가운데는 그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고전4:9-13)

 

에베소에서의 바울의 생활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에게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행복과 세속적인 즐거움이 없었다. 사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된 세상의 복락을 누렸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마치 저주를 받은 것 같은 최악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렇게 되자 그들은 타락한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조롱의 대상과 구경거리처럼 되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미련하여 지혜 없는 자처럼 살며 연약하고 비천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세상에서 비천한 자가 되어 굶주리고 목말랐으며 헐벗고 매를 맞았다. 또한 안정된 거처가 없었으며 핍박을 당하고 모욕을 당함으로써 세상의 추한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은 모습을 보였다.

그런 형편 가운데서도 성도들은 세상에서 더 낳은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대신 도리어 아량을 베풀었다. 세상의 안목으로 볼 때 그것은 실로 어리석은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사도들의 모습은 신앙을 적절히 뒤로하고 세상과 타협하는 자들과는 완전히 대비되었다.

세상을 가까이 하는 자들은 세상에서 강한 모습을 보이면서 남부럽지 않은 존귀한 모양새를 갖추었다. 그들은 세상에서 슬기로운 사람들처럼 보이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은 자들인 양 행세했다. 그런 것을 목격하는 신앙이 어린 자들에게는 가치관에 엄청난 혼선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 형편을 잘 알고 있던 바울은 아시아 지역에서 자신이 당했던 환난을 언급하면서 힘겨운 삶을 살았던 사실을 전했다. 그는 고린도전서에서 에베소에 있으면서 맹수와 맞서 싸웠던 사실(고전15:32)을 밝혔다. 원수들의 위협에 둘러싸인 그의 삶은 결코 즐겁고 평온한 삶이 아니었다(19:23-41, 참조). 바울은 바로 그런 자신의 삶을 성도들이 기억해줄 것을 당부했다.

바울은 자기가 너무 심한 환난으로 인해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자처럼 되었으나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되었음을 고백했다. 무능한 자기 자신을 의뢰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고 전능하신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뢰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진실로 감사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부활의 소망을 가진 성도들에게 커다란 소망이 되었다. 사망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궁극적으로 다시 살리시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지상의 참된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을 사망의 세계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므로 오직 천상의 나라를 바라보며 주님만을 의지해야 한다.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는 사도들에 대해 크게 오해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어리석은 자들은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사도들의 명성을 부러워한다.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성공적인 성도의 삶을 살았던 바울의 명성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그의 가르침에 민감해야 한다. 누군가 사도의 사역을 부러워하여 자기도 그렇게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일 뿐 아니라 인간적인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바울이 참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얼마나 큰 환난과 고통을 당했는지 당연히 기억해야 한다. 우리 역시 그가 걸었던 길을 교훈 삼아야 하며 오로지 진리 안에서 신앙의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 타락한 세상에 소망을 둔 자가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4. 기도를 통한 성도들의 교제 (11)

 

성도들 사이의 진정한 교제는 기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 기도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상징하는 교회의 성찬을 그 기초로 하고 있다. 이는 참된 기도가 교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기도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개인의 욕망을 표출하는 종교적 행위가 될 수 없다. 그런 것은 잘못된 기도일 뿐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께 욕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참된 교회와 그에 속한 성숙한 성도들은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참된 기도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 안 된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바는 어떤 경우에도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을 떠나서는 참된 기도의 교제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참된 기도를 하도록 요구하셨으며, 우리가 그의 가르침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Jesus Christ) 기도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을 말해주고 있다.

사도들과 믿음의 선배들은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기도를 되풀이 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 가운데서 제자들에게 그 점을 강조하셨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풍요롭게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대한 문제는 성도들이 간구할 기도제목이 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성도들로 하여금 그런 것들을 구할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도록 요구하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6:33,34)

 

이 기도에 부합하는 기도는 마태복음 69-13절에서 가르쳐진 주기도문에 잘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기도한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풍요롭게 살아가기 위해 기도하거나 힘든 일을 피하며 살아가기 위해 기도하기를 애쓴다. 그런 자들은 했던 말을 되풀이 하는 가운데 자신의 종교심을 드러낸다. 어리석은 자들은 그렇게 하면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질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하는 그런 식의 기도를 본받지 말도록 명령하셨다. 그렇지만 교회 안에 들어온 어린 교인들은 저들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하며 이 세상에서의 저들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기도한다. 그들은 그것이 마치 최상인 것인 양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 사이에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자녀는 항상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가운데 살아간다. 나아가 성도들 사이의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십자가에 달려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기도를 쉬지 말도록 당부(살전5:18)한 것은 존재론적인 의미를 지닌다. 즉 그 말씀은 기도하는 행위를 계속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여 그와의 교제를 잠시도 떠나지 말라는 요구인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자신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함으로써 도우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이 말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단순히 바울 자신이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어떤 일이나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도록 기도를 많이 해달라는 말과는 다른 것이다. 바울이 저들에게 기도를 당부한 것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것과 연관되어 있다. 물론 그 가운데는 하나님의 영광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바울을 비롯한 형제들을 기억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은 항상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게 된다. 즉 천국에 속한 백성들은 어디에 있든지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여기에는 교회에 관한 보편적인 의미가 드러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거룩한 피로 값 주고 사신 지상의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요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찬송과 영광을 받으신다. 이는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참된 교회들이 누릴 감사의 근거가 된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고린도후서. 이광호 목사. 머 리 말, 차 례 서성필 2017.01.27 1849
공지 고린도전서 - 머 리 말, 차 례. 이광호 목사. 서성필 2016.06.24 2532
공지 중국 신학교 강의록 - 정진국 목사 서성필 2016.03.11 3820
공지 [야고보서] 머리말, 차례. 이광호 목사 서성필 2015.10.09 4372
공지 '에세이 산상수훈', 서문, [권두언]-“아프리카, 아쉬움이 남아있는 대륙’, [목차]. 이광호 목사 서성필 2015.02.13 5754
공지 '교회와 신앙'. 서 문, 머 리 말, 송영찬 목사 서성필 2014.10.11 5465
공지 ‘교회와 사명’ - 서 문, 머리말, 프롤로그. 송영찬 목사 [2] 서성필 2014.06.21 5023
공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머리글과 목차. 이광호 목사 [5] 서성필 2013.08.25 9964
283 오늘 공부는 제19장, 바울의 사랑과 호소(고후12: 11-21) 서성필 2017.09.08 120
282 제18장, 바울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특별 계시(고후12: 1-10) 서성필 2017.08.19 174
281 제17장, 바울의 교회를 위한 염려(고후11: 16-33) 서성필 2017.08.04 228
280 제16장, 거짓 선지자에 대한 경고(고후11: 1-15) 서성필 2017.07.28 218
279 제15장, 사도 바울의 영적인 권위(고후10: 1-18) 서성필 2017.07.14 210
278 제14장, 교회와 복음사역을 위한 신실한 연보(고후9: 1-15) 서성필 2017.07.07 287
277 제13장, 복음을 위한 신실한 동역자들(고후8: 16-24) 서성필 2017.06.30 280
276 제12장, 평균케 하는 삶의 원리(고후8: 1-15) 서성필 2017.06.22 322
275 제11장, 참된 기쁨과 진정한 회개(고후7:9-16) 서성필 2017.06.09 308
274 제10장, 하나님의 약속과 순결한 교회(고후7:1-8) 서성필 2017.05.12 314
273 제9장, 말세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교회(고후6: 1-18) 서성필 2017.05.08 345
272 제8장,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피조물(고후5: 11-21) 서성필 2017.04.28 392
271 제7장,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기억하는 성도의 삶(고후5: 1-10) 서성필 2017.03.17 409
270 제6장,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의 회복(고후4: 1-18) 서성필 2017.03.10 378
269 제5장, 모세의 수건과 신약교회(고후3: 12-18) 서성필 2017.03.03 479
268 제4장,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와 새 언약(고후3: 1-11) 서성필 2017.03.03 402
267 제3장,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교회(고후2: 1-17) 서성필 2017.02.17 497
266 제2장,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고후1: 12-24) 서성필 2017.02.10 493
» 제 1장,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문안과 감사(고후1:1-11) 서성필 2017.02.03 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