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공부로서 고린도전서 끝납니다.

내년 1월부터 고린도후서 공부합니다.

내년 1월에 여러분들을 다시 뵙겠습니다.

가족들과 주님의 은총이 가득한 연말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주안에서

서성필.

 

 

 

22, 바울의 여행 계획과 마지막 당부 (고전16: 1-24)

 

 

1. 주일 예배와 연보 (1, 2)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연보에 관한 언급을 하고 있다. 그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매주일 성도들 곧 교회를 위해 연보 하도록 요구했던 것이다. 앞에서 교훈한 부활에 관한 내용이 신앙의 본질에 관련된 것이라면 이는 성도의 삶에 연관되어 있다.

   바울은 그들에게 연보를 요청하면서 그 전에 갈라디아 교회들에게도 그와 동일한 명령을 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 말이 갈라디아서에 기록된 말씀을 두고 언급한 것인지 혹은 그에 대해 달리 명령했던 사실을 두고 말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물론 성경에는 그와 관련된 충분한 근거들이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에 연관된 기록을 하고 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all good things)을 함께 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do good)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6: 6,10)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모든 좋은 것들을 가르치는 교사와 함께 나누고 기회가 되는 대로 모든 사람들 특히 성도들에게 좋은 일을 하도록 권면했다. 여기서 좋은 것들좋은 일이란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과 연관되는 것이다. 이는 고린도전서 16장에 언급된 연보와 연관 지어 볼 때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 가운데 물질이 나누어져야 함을 의미하고 있다.

   특히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라고 한 말 가운데는 교회의 교사로 세움을 받은 목사의 생활비를 부담하는 문제와 연관된다. 그리고 주변의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면서 특별히 교회에 속한 여러 성도들이 서로 간 생활문제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오래 전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교회를 섬기고 있을 때 예루살렘에서 온 선지자들 가운데 아가보(Agabus)라는 사람이 수년 내에 큰 흉년이 들것을 예언한 적이 있었다. 그 후 바울은 복음전파를 위해 여러 지역을 여행하던 중 갈라디아 지역을 방문했다.

   아가보가 예언한 흉년은 로마제국의 글라우디오(Claudius) 황제가 재임(AD41-54)하고 있을 때 일어나게 되었다.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게 되자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성도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힘대로 연보 하도록 당부했다. 그에 관련된 내용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11:27-30)

 

   바울과 바나바는 그 때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이 모은 연보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 전달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그때 있었던 일을 상기시키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 역시 심한 기근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위한 연보를 하도록 요청했던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매주일 공예배를 위해 교회로 모일 때 정기적으로 연보를 하도록 요구했다. 그는 갑작스럽게 연보 하지 말고 교회가 사전에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한꺼번에 많은 액수의 연보를 하라는 말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소유 가운데 일정부분을 나누어 주도록 요구한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마지못해 억지로 연보를 해서는 안 된다. 성숙한 성도들의 참된 연보는 교회를 기억하는 가운데 기쁜 마음과 자원하는 자세로 해야만 한다. 바울은 나중 고린도후서를 기록하면서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고후9: 5)

 

   연보를 하면서 억지가 아닌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삶의 표현이어야 한다. 또한 고린도전서 본문이 보여주고 있는 바는 연보가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고전16:1). 이 말은 곧 연보가 교회 곧 성도들을 위한 것임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각별히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할 점은 연보가 하나님께 바쳐진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연보는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물질이 아니라 교회를 이루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상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물질() 자체가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에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삶과 소유를 나눌 줄 아는 성도들을 기뻐하신다. 즉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많은 액수의 물질이 아니라 교회와 어려운 성도들을 기억하는 성도들의 올바른 신앙자세이다.

 

 

2.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염려와 도움 (3, 4)

 

   사도바울은 첫 번째 편지를 써서 고린도교회에 보낸 다음, 나중 그곳을 직접 방문해 석 달 동안 머물며 성도들과 깊은 신앙의 교제를 나누었다(20:3). 그 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거두어진 연보를 가지고 다른 형제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해 그것을 전달했다(24: 17).

   그 연보 가운데는 마게도니아 교회에서 모은 연보도 상당 액수 포함되어 있었다.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계획에 대해서는 그가 고린도지역에서 겨울을 보내며 머물고 있을 때 기록한 로마서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 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15: 25-27)

 

   사도바울은 여기서 재정적인 어려움에 빠진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기억하는 자신의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바울은 당시 전 세계에 흩어진 모든 교회들의 모체가 되는 예루살렘 교회가 굳건하게 서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즉 바울은 단순한 구제차원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기근에 빠진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바울의 대응은 단순히 감성적인 자세가 아니라 매우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것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성도들은 죄악 된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백성들이다. 따라서 성도들이 소유한 재물은 자기 자신과 가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에게 넘치는 물질이 있다면 항상 하나님의 복음과 극심한 가난에 빠져있는 성도들을 향해 넘쳐 흘러내려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매주일 힘써 모은 연보를 예루살렘으로 보낼 때 그들이 인정하는 사람을 택해 그들의 손에 편지를 들려 보낼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자기도 그들과 함께 가는 것이 합당하다면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했다. 이는 바울의 개인적인 의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공적인 의사가 소중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사도로 부름을 받은 바울이 그런 자세를 가지고 있을진대 다른 일반 성도들이야 두말할 나위 없다.

 

 

3. 고린도 지역 방문계획 (5-7)

 

   신약시대의 사도들은 보편교회 이후 오늘날 교회의 목사들처럼 한 군데 정착해서 목회를 하는 성도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특정한 지 교회에 얽매여 사역하는 교사가 아니었으며 한 지역에 소속된 교사가 아니었다. 그들은 전체 지상교회를 위한 특별한 교사들이었다. 원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오늘날의 성도들을 가르치는 목사들 역시 그와 같은 지위에 있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머물며 고린도전서를 기록하는 가운데 나중에 고린도를 직접 방문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는 북부 지역에 위치한 마게도니아를 거쳐 그곳으로 가고자 했다. 마게도니아에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교회 등 바울의 기억 속에 소중하게 자리 잡고 있는 여러 교회들이 있었다.

   바울은 오래 전에 그곳을 방문해 애써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한 적이 있었다. 빌립보에서는 실라와 함께 그곳 사람들에 의해 많은 매를 맞고 깊은 감옥에 갇혀 엄청난 고생을 했었다(16: 19이하 참조). 그는 또한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지역에서도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그에 저항하는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 대신 마게도니아의 여러 지역에는 하나님의 몸 된 교회들이 세워졌다.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달아 하나님께 돌아온 자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바울이 마게도니아 지역을 다시금 방문하고자 했던 것은 그곳에 있는 여러 형제들을 다시금 만나 하나님의 복음을 나누기 원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그에 관련된 언급을 하며, 자기가 마게도니아를 지나 고린도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겨울을 나게 되리라는 사실을 말했다. 이는 그들에게 자신이 머물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해 달라는 당부와도 같다. 겨울이 되면 여행하기에 부적합 시기이기도 하거니와 주님께서 원하시면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같이 상당기간 함께 머물면서 여유로운 마음으로 교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 원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나중 고린도 교회가 자신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다른 지역으로 보내주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이 말 가운데는 재정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이는 사도의 목적이 곧 교회의 목적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울은 자기의 인간적인 판단에 따라 맘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의 지원을 받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하는 사도였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보편교회의 원리를 깨닫게 된다. 바울은 복음전파를 위한 활동과 여행에 드는 경비를 고린도교회에 요청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있다. 비록 각 성도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다르다 할지라도 모든 참된 교회들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그에 대해 신실한 응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가 목사의 생활비를 부담하는 것도 보편교회의 원리 때문이다. 목사는 단순히 지식을 제공하고 적절한 급여를 받는 근로자가 될 수 없다. 교회가 목사를 위한 생활비를 부담하는 것은 목사를 주님의 교회에 온전히 묶어두는 기능과 연관된다. 즉 목회자는 자신의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해야만 한다. 간혹 목사가 교회로부터 아무런 생활비를 지급받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지만 그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만일 교회에 속한 교사인 목사가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받지 않는다면 교회의 간섭을 받지 않고 개인적인 판단에 따라 마음대로 행동하려는 유혹을 받을 우려가 있다. 즉 교회의 의사에 순종하는 목회가 아니라 자기 개인의 주관에 따른 목회를 할 위험이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가르치는 교사로 세움을 받은 직분 자는 주님의 몸인 참된 교회의 뜻을 벗어나 자의로 행동하거나 가르치려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시대는 보편교회의 원리가 거의 사라진 위험한 시대가 되어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은 원리적 특성상 이 세상 어디에 살고 있든지 주안에서 한 형제가 된 자들이다. 주님 안에서 진정한 형제들이라면 모든 것을 나누며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대구에 살고 있는 성도가 서울이나 부산 혹은 멀리 외국을 방문하게 될 경우 여관이나 호텔에 돈을 주고 잘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 있는 성도들의 집에 머무를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서로 간 미리 잘 알고 있는 사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기본요건으로 하고 있다. 이는 물론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성도들이 우리 지역을 찾는다면 기꺼이 그들을 위해 당분간 머물 수 있는 방을 내어주고 음식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전에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성도라 할지라도 그를 주님 안에서 이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그것을 위해서는 믿을만한 교회에 속한 성도인지에 대한 보증과 확인이 필요하다. 하지만 교회를 통한 아무런 보증서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형제임이 확인되면 기꺼이 방과 음식을 내어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4. 에베소 지역에서의 소요와 복음전파의 기회 (8-12)

 

   사도바울은 머지않은 장래에 고린도 지역을 방문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음을 밝히면서 곧바로 가지 않고 오순절 기간이 지난 후 출발하겠노라고 했다. 그 이유는 에베소 지역에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으며 동시에 대적자들 역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좀더 머물고자 했던 까닭은 아마도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서였던 것이 분명하다. 또한 바울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아볼로가 고린도에 가지 않으려 했던 것도 그의 이기적인 판단 때문이 아니라 복음증거와 더불어 에베소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당시 에베소 지역에 큰 소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은 에베소의 전 지역뿐 아니라 교회와 성도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칠만한 큰일이었다. 사도행전 19장에는 그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복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아짐으로 인해 그것을 수익의 기반으로 삼고 있던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으며 아울러 교회를 향한 대적 자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는 교회와 우상숭배자들 사이에 생존을 건 마찰이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게 되었으며 동시에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의 활동도 적극적이 되었다. 따라서 교회를 염려하던 바울은 오순절까지는 에베소에 머물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디모데를 고린도에 보내겠노라는 말을 했다. 디모데는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를 손에 들고 먼 길을 걸어 스승의 심부름을 갔을 것이 분명하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디모데를 하나님의 일을 위해 힘쓰는 자로 추천하면서 그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잘 받아들이도록 요구했다.

   바울은 디모데가 사사로운 개인의 목적을 추구하지 않고 주님의 일을 위해 온전히 힘쓰는 자임을 보증했다. 그의 보증은 고린도교회에 그대로 전달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오늘날 우리 시대교회들도 서로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성도들 간에 교회의 보증을 기초로 한 교제를 위해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할 내용이다.

 

   당시에는 아직 디모데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젊은 디모데가 낯선 고린도 지역에 도착하게 될 즈음 분위기가 상당히 어수선할 것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위한 신앙적인 보증을 하며, 자기가 에베소에서 그와 일행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아무도 그를 멸시하는 일없이 평안하게 돌려보내달라고 말했다.

   바울은 또한 아볼로에 관한 특별한 언급을 하고 있다. 고린도에는 아볼로파라 하는 자들이 생겨날 만큼 아볼로를 신뢰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바울이 아볼로에게 다른 형제들과 더불어 고린도에 가도록 적극적으로 권해봤으나 당시로는 갈 뜻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러나 나중 기회가 되면 그가 고린도를 방문하게 될 것이라 말했다. 아볼로가 그 때 고린도에 가지 않으려 했던 것은 아마도 에베소 교회를 위한 바울과 동일한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바울이 오순절까지 자기가 에베소에 머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처럼 아볼로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바울과 아볼로가 가능한 대로 에베소에 좀더 머물고자 했던 까닭이 이기적인 판단 때문이 아니라 복음전파와 더불어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헌신적인 자세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나중 오순절이 지나고 늦봄이 되어서야 에베소를 떠난 바울은 마게도니아를 거쳐(20:1,2) 고린도 지역까지 가는데 6개월가량 걸렸다. 그가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는 겨울이 눈앞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고린도에서 석 달간 머물며 겨울을 지났던 것이다.

   그 때 바울은 고린도 지역에 있는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며 교회를 강건하게 했다. 바울은 거기 머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로마서를 계시 받아 기록하게 되었다. 그 편지는 로마제국의 심장부인 로마시에 있는 교회에 천상의 진리를 선포함으로써 세상에 대해 복음을 선언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5.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삶 (13-20)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 하라며 강조해 말하고 있다. 이는 타락한 세상의 달콤한 유혹에 흔들리지 말고 신앙을 견고하게 하라는 의미이다. 신앙이 어린 교인들은 항상 세상의 가치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에 동화되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천국시민이 된 자가 타락한 세상을 기웃거린다면 여간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신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요구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한 바는 사랑의 감정을 가슴에 품고 있으라는 말과 다르다. 도리어 거기에는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기적인 욕망에 기초한 태도를 버리고 진정으로 교회와 이웃을 위해 행동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사도는 또한 성도들에게 교회의 질서에 온전히 따르라는 요구를 했다(고전16:16). 그는 먼저 스데바나의 집에 관한 특별한 언급을 하고 있다. 그 집이 아가야의 첫 열매라는 사실을 말했던 것이다. 이는 그의 개인적인 가정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그 지방에 처음으로 세워진 교회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스데바나의 집은 아가야 지역의 첫 열매가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기로 작정하고 그것을 실천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바울은 그 점을 상기시키면서 그와 같은 자들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순종하도록 요구했다. 물론 그것은 개인의 명령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이 아니라 교회의 직분 자들에 대한 언약적 순종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는 바울의 서신을 통해 사도교회 시대 다양한 지역에 살았던 성도들 사이에 원만한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에베소에서 고린도 지역으로 간 성도들이 있었는가 하면 고린도에서 에베소 지역에 간 성도들도 많이 있었다. 바울이 서신을 쓸 당시 에베소에는 그전에 고린도에 있었던 바울과 아볼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뿐 아니라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도 머물고 있었다.

   바울은 위에 언급된 여러 성도들 가운데 특히 나중 세 사람이 자신에게 큰 힘이 되었음을 언급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그리움이 그들을 통해 상당부분 해소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과 가까이 교제함으로써 고린도교회와 영적인 교제를 밀접하게 나눌 수 있으므로 그런 자들을 인정해주라고 말했다. 이는 세상에 흩어진 모든 교회들 사이에 원만한 영적 교제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사도바울은 또한 에베소를 비롯한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들이 고린도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게 문안한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리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그들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가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 간절히 문안 전한다는 사실도 전했다. 그들 부부는 과거 고린도에서 생활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간절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에베소에 살고 있는 모든 형제들이 고린도교회에 문안한다는 말을 전하면서 거룩하게 입맞춤(holy kiss)으로 서로 문안하라는 요구를 했다. 이는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남녀간의 입맞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여기서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전16: 20)라고 한 말은 서로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인사를 나누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서로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형제나 이웃 사이에 상대의 뺨에 입술을 갖다 대며 사랑의 인사를 나누던 당시의 풍습에 연관된 형태의 인사방법이다.

   그리고 성경본문은 일차적으로 한 지 교회에 속한 성도들끼리가 아니라 에베소교회와 고린도교회 사이에 그런 인사를 나누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는 에베소교회에 속한 성도들과 고린도교회에 속한 성도들 사이의 절대적인 신뢰를 의미하며, 양 교회 간의 공적인 신뢰를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누어져 있는 지 교회들 상호간에 사랑의 교제를 나누도록 요구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6. 사도의 경고와 축원 (21-24)

 

   바울은 고린도전서의 맨 마지막에 친필(親筆)로 문안한다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앞부분의 긴 글은 바울의 친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대필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아마 고린도전서를 대필한 사람은 소스데네(Sosthenes)였을 것이다. 이는 고린도전서 맨 앞부분에 기록된 서두(고전1:1-3)에서 바울과 소스데네가 함께 인사를 전하고 있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이제 바울은 편지를 마무리 하면서 친필로 문안을 전했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즉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대필한 내용들과 바울 자신이 친필로 기록한 마지막 내용은 전혀 차이가 없는 계시된 말씀인 것이다.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찌어다(고전16:21-24)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을 통해 진리의 말씀을 계시하셨으며, 바울은 받은 계시를 옆에 있는 소스데네에게 구술로 전달했다. 소스데네는 바울의 입술을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 적었다. 계시를 받아 말하는 바울과 그것을 받아 적는 소스데네에게 공히 성령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이 임했음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기록계시인 고린도전서는 독특한 방법의 예언으로 주어졌다. 물론 그것은 은사로서의 예언과 유사한 형식으로 주어졌을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특별 계시로서의 예언이 다른 은사들과 마찬가지로 교회 가운데 공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던 것에 반해 사도를 통한 기록 계시는 개별적으로 이루어졌다.

   사도바울은 친필문안과 더불어 교회를 향한 축복과 그에 벗어난 영역에 대한 저주를 선포하고 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의 대상이 된다.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는 재림하실 때 자신의 몸에 온전히 붙어있는 모든 성도들을 영접하실 것이며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저주가 임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하나님의 몸 된 교회 가운데 함께 하기를 기원했으며, 자신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와 함께 하기를 기원했다. 우리는 특히 바울 자신의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 가운데 있기를 원한다고 언급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교회가 사도적 계승을 이어가야 할 거룩한 공동체임을 말해주는 것과 같다. 또한 이 말은 교회를 위한 축도의 의미를 지니는 내용으로서 역사 가운데 존재하는 지상의 교회들 가운데 지금까지 그대로 상속되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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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야고보서] 머리말, 차례. 이광호 목사 서성필 2015.10.09 4372
공지 '에세이 산상수훈', 서문, [권두언]-“아프리카, 아쉬움이 남아있는 대륙’, [목차]. 이광호 목사 서성필 2015.02.13 5754
공지 '교회와 신앙'. 서 문, 머 리 말, 송영찬 목사 서성필 2014.10.11 5465
공지 ‘교회와 사명’ - 서 문, 머리말, 프롤로그. 송영찬 목사 [2] 서성필 2014.06.21 5023
공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머리글과 목차. 이광호 목사 [5] 서성필 2013.08.25 9964
» 제22장, 바울의 여행 계획과 마지막 당부 (고전16: 1-24) 서성필 2016.12.16 493
263 제21장,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고전15:29-58) 서성필 2016.12.12 528
262 제20장, 그리스도의 부활과 복음의 본질(고전15:1-28) 서성필 2016.11.25 503
261 제19장, 공 예배를 위한 계시와 은사들(고전14: 26-40) 서성필 2016.11.18 520
260 제18장, ‘교회의 덕’을 위한 방언과 예언(고전14: 1-25) 서성필 2016.11.11 521
259 제17장, 본질적 은사인 사랑(고전13: 1-13) 서성필 2016.11.04 529
258 제15장, 교회에서 먹는 만찬(supper)과 예배시간의 거룩한 성찬(고전11: 17-34) 서성필 2016.10.28 494
257 제16장, 성령의 은사들과 교회의 세움(고전12: 1-31) 서성필 2016.10.28 522
256 제14장, 창조질서 속의 남자와 여자(고전11: 1-16) 서성필 2016.10.13 503
255 제13장, 언약적 세례와 신령한 음식(고전10: 1-33) 서성필 2016.09.23 552
254 제12장, 사도와 복음선포의 직무(고전9: 1-27) 서성필 2016.09.16 509
253 제11장, 우상제물에 연관된 문제(고전8: 1-13) 서성필 2016.09.09 507
252 제10장, 혼인의 본질과 독신자에 관한 교훈(고전7: 17-40) 서성필 2016.09.02 500
251 "제9장, 부부관계를 통한 교훈(고전7: 1-16)" 서성필 2016.08.29 743
250 제8장, ‘성도의 자유’와 교회와 순결(고전6: 12-20) 서성필 2016.08.19 512
249 제7장, 성도의 세상법정 소송문제(고전6: 1-11)입니다. 서성필 2016.08.12 530
248 '제6장, 교회의 권세와 순결(고전5: 1-13)' 서성필 2016.08.05 655
247 '제5장, 교회와 하나님 나라(고전4: 1-21)' 서성필 2016.07.29 609
246 '제4장, 하나님의 밭,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고전3: 1-23)' 서성필 2016.07.22 717
245 '제3장,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대한 바울의 고백(고전2: 1-16)' 서성필 2016.07.15 5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