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고전15:29-58)

 

 

1. 오해된 신앙 (29)

 

   고린도교회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어떤 어리석은 자들은, 교인들이 죽은 자를 대신해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나아가 그 후 타락한 가톨릭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공간인 연옥(煉獄)을 만들어 두고 그곳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위한 또 한번의 구원의 기회가 있는 것처럼 주장했다.

   배도에 빠진 중세의 기독교에서는 돈을 끌어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면죄부를 판매했다. 그 때 연옥을 들먹이며 죽은 자들을 천국에 보내기 위해서는 많은 액수의 돈을 헌금해야 한다고 선전했던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을 멀리했던 많은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지옥에 가게 될 죽은 조상들을 불쌍히 여겨 헌금을 하며 대신 빌었던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했던 까닭은 성경의 교훈에 대한 근본적인 무지 때문이었다. 죽은 사람과 연관된 성경본문들 가운데 한 구절이 곧 고린도전서 1529절이다. 어리석은 자들은 바울의 편지 가운데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를 받는 것이 상당한 효력이 있는 것으로 말한 듯이 착각하고 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고전15: 29); Now if there is no resurrection, what will those do who are baptized for the dead? If the dead are not raised at all, why are people baptized for them?(1Cor.15:29)

 

   이 말씀이 과연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 받는 것에 대한 타당성을 말하려는 것이었을까?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다. 어리석은 자들은 이 본문에 대해 상당한 오해를 하고 있다. 바울이 기록한 위의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죽은 자를 대신해 세례를 받는 자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사도바울은 여기서 진리를 오해하고 있는 자들의 어리석은 행위를 강하게 질타하고 있다.

   성경은 결코 죽은 자들을 위해 대신 세례를 받는 자들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도리어 진정한 세례를 오해하여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자들을 향해, 죽은 자들을 위해 대신 세례를 받기도 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지 않는 것에 대한 질책을 하고 있다. 그들은 죽은 자를 위해 세례를 받는 불신앙적인 한심한 행동을 하면서도 정녕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근거로 말미암아 죽은 자를 위해 세례를 받았던 것일까? 성경본문의 전체적인 문맥을 살펴 보건데 그들은 교회 바깥이 아니라 교회 안에 들어와 있던 자들이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여겨 외형상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 가운데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유대인들 가운데 바리새파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란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나름대로 내세를 믿었으며 왜곡된 부활사상을 가지고 있었다(23:8).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이는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궁극적인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던 자들(고전15:12)이 사두개파의 신학적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과 크게 대비된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529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 영생할 것이라고 믿던 자들의 신앙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부활사상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당시 고린도교회 내부에 왜곡된 내세관을 가진 바리새파 배경을 가진 자들과 내세를 부인하는 사두개파의 불건전한 사상 배경을 가진 자들이 부활에 연관된 하나님의 진리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었던 사실을 보여준다.

 

 

2. 나는 날마다 죽노라 (30-34)

 

   사도바울은 지상에서 사역을 하는 동안 항상 어렵고 힘든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는 과연 무엇 때문에 그런 위험을 무릅쓰며 복음을 전파해야만 했을까? 바울은, 끊임없이 발생하는 불안한 여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의 부활이 있기 때문이라 말했다.

   그러므로 소중한 것은 이 땅에서의 잠시 지나가는 인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소망하며 천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바울은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포기하는 자세를 유지했다. 그가 날마다 죽노라는 언급과 더불어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던 것은 바로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 31)

 

   바울은 여기서 단호한 어조로 날마다 죽노라는 말을 하며 그것이 자랑스럽다는 고백을 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자신의 삶을 날마다 확인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해 하나님께 팔려간 자들의 삶에 있어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은 그 전에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하면서도 그 점을 분명히 말했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음을 고백했다. 그러므로 범죄한 아담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연인으로서의 그의 삶과 욕망은 포기되었으며, 대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새로운 삶이 허락되었다. 그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생과 다른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 20)

 

   우리는 바울의 고백적 기록을 통해 성도의 삶의 근본적인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은 더 이상 자기 개인의 욕망을 위한 것이 아니다. 거듭난 모든 성도들은 자신을 위해 거룩한 몸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뜻에 순종하면서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바울의 삶은 명료했다. 바울이 그런 신앙자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고 싸울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신의 삶의 포기를 통해 영원한 부활의 소망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가 에베소에 머물면서 무서운 맹수(猛獸)와 더불어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생명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바울은 인간들의 일반적인 동기로 인해 그런 무모한 싸움을 싸우지 않았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맹수란 실제적으로 사나운 동물일수도 있으며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여 성도들을 죽이려 하는 악한 자들을 상징적으로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그가 무서운 맹수와 싸우며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걸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게 속한 자들에게 약속된 생명의 부활 때문이었다.

   만일 영원한 부활이 없다면 그런 위험한 지경에 빠지면서까지 맹수와 싸우는 행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에게 아무런 실질적인 유익이 없는 무모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부활을 통한 영원한 삶에 대한 진정한 소망이 없다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 세상에서 배불리 먹고 마시며 쾌락을 누리는 삶이 도리어 최선의 방책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많은 불신자들이 세속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은 저들에게 영원한 삶에 대한 진정한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교회를 향해 주변의 악한 자들의 욕망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보며 그에 속지 말라는 철저한 당부를 했다. 그런 자들은 성도들의 선한 삶을 방해하며 주위를 혼란스럽게 할 따름이다. 하지만 지상에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의 주변에는 항상 그런 악한 자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실정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의 악한 유혹을 이겨나가기 위해 깨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항상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를 행하며 죄에 빠져들지 말아야 한다. 지상의 성숙한 교회와 신앙이 장성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타락한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방어하는 노력을 지속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그런 언급을 하는 이유가 그들 가운데 세상을 탐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들의 세속적인 삶의 행태는 어린 교인들로 하여금 현실주의적 사고를 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잘못된 가르침을 방치하는 고린도교회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고자 했다.

   우리는 그런 위험한 일이 오늘날 우리시대 교회들 가운데 더욱 심각하게 기승을 부리고 있음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속한 교회 안에 그런 자들이 있다면 그들을 강하게 책망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그것을 수수방관(袖手傍觀)하고 있다면 사도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3. 부활의 몸 (35-44)

 

   어리석은 인간들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된 그대로 받아들여 믿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적 이성과 경험에 의존하려 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부활에 대해서도 인간적인 이성의 잣대를 내민다. 그런 사고를 하고 있는 자들을 염두에 둔 바울은 부활의 몸에 관한 기술을 하고 있다.

   영원한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은 과거에 살다가 죽은 인간이 어떻게 그 상태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으며, 만일 살아나게 된다면 도대체 어떤 몸을 가지게 되는지 반문한다. 그들은 부활 자체를 믿지 않지만 설령 부활한다고 해도 어떤 형태의 몸으로 부활하게 되는지 의심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런 사람들에게 식물의 씨앗과 그 형체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밭에 씨를 뿌리는 자들은 식물의 형체가 아니라 밀알과 같은 알갱이를 심게 된다. 땅에 묻힌 그 씨앗이 점차 자라나 줄기를 형성하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게 된다.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바는 그 씨앗만을 보고는 그 열매에 대한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한 번도 수박과 참외를 보거나 만져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새까만 수박 씨와 하얀 참외씨앗을 보여주고 거기에서 어떤 먹음직한 열매들이 맺힐지 물어보면 결코 그에 대한 답변을 할 수 없다.

   그 전에 한 번도 그런 과일을 보고 먹어본 적이 없다면 그 새까만 수박 씨에서 속은 빨갛고 껍질은 푸른 먹음직스런 수박을 상상할 수 없으며, 그 하얀 참외 씨앗으로부터 속이 희고 겉이 노란 색깔을 지닌 맛있는 참외가 열릴 것으로 짐작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새까만 씨앗과 하얀 씨앗 속에는 먹음직스런 수박과 참외가 들어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각 종자를 통해 그 식물과 열매의 풍성한 형체를 주시는 것이다.

   다양성에 있어서는 비단 식물에 대한 것들뿐 아니다. 동물들 역시 서로 상이한 다채로운 형체들을 지니고 있다. 움직이는 동물이라 할지라도 땅 위를 뛰어다니는 짐승,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를 가진 새, 물속에서 살아가는 물고기가 서로 다른 형체로 살아간다. 그런 동물들 사이에는 결코 상호 뒤섞일 수 없는 제 각각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

   숲 속에서 생활하는 짐승이 하늘을 날 수 없고 물 속에서 살아갈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늘을 나는 새가 물속에서 살아갈 수 없으며 물고기가 땅 위를 뛰어다니거나 하늘을 날아다닐 수 없다. 모든 동물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유한 능력 가운데 저들의 생명을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하늘에 가득 차 있는 천체들 역시 마찬가지다. 날마다 지구를 비추는 태양, , 별의 기능은 서로 다르다. 그것은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태양은 태양의 고유한 역할이 있으며 달은 달의 고유한 기능이 있다. 또한 수많은 별들에게는 제각각 나름대로의 고유한 역할이 있다. 그리고 지구는 지구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매우 중요한 기능을 소유하고 있다. 모든 천체들은 나름대로의 고유한 역할이 있으며 다른 천체의 역할을 대신하지 못한다. 모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섭리와 권한 아래 놓여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사도바울은 해의 영광과 달의 영광과 모든 별들의 영광이 서로 다르다고 표현하고 있다. 물론 그것들이 영광스러운 것은 하나님과 그의 형상을 닮은 인간들을 위해 제각각 고유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양은 지구를 위해 존재하며 달 역시 지구를 위해 존재한다. 하늘의 모든 별들도 지구를 위해 존재한다. 왜냐하면 지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에 따라 지으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가는 특별한 곳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기능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은 그 천체들에게도 영광이 된다. 이는 모든 천체들이 스스로 영광을 받아 누린다는 뜻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됨을 의미하고 있다. 나아가 성도들의 부활은 지구 위에서 일어나지만 지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 연관된 우주적인 사건이 된다.

 

   신불신(信不信)을 막론하고 이 세상에 살다가 죽은 모든 사람의 부활도 위에서 언급한 다른 경우와 더불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우주적인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인간들은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아나게 된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며, 한시적이고 연약한 것으로 심어 영원하고 견고한 삶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부활한 후 살게 될 삶은 영원한 삶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고유한 뜻에 의해 자연적인 육신의 몸을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된다. 부활하게 될 성도의 몸에 대해서는 일차적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기억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부활하게 될 하나님의 자녀들이 부활하신 주님의 몸에 연관되는 몸을 입게 될 것은 분명하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옛 세상과 다른 새로운 세계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피조 세계로서 첫 번째 세계와 연관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곳에서는 부활의 몸을 입은 성도들이 범죄하기 전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즐겁게 뛰놀 것이며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신령한 음식을 먹고 마시며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4. 땅에 속한 자, 하늘에 속한 자 (45-50)

 

   사도바울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해 땅에 속한 자와 하늘에 속한 자로 구별하고 있다. 겉보기에 똑같아 보이는 인간이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땅을 지배하는 사탄의 세력 아래 놓여있으며 하나님의 자녀들은 천상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의 시민권은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에 있다.

   바울은 천상의 나라에 속한 성도들의 시민권을 언급하면서 그것을 예수님의 재림과 부활에 연관 지어 말하고 있다. 하늘에 속한 성도라 할지라도 몸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소망하게 된다. 십자가 사역을 통해 사망을 이기고 부활한 후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허락하신 약속이 소망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 점을 밝히고 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3: 20,21)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서 생활하는 보통 사람들과 외견상 별로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천상의 나라에 속한 시민권 자들이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타락한 세상은 안개와 같이 잠시 지나가는 영역일 뿐 그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이는 성도들의 본향은 영원한 천국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첫 번째 아담과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그 역할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첫 번째 아담은 흙으로 지음 받아 생명을 부여 받았다. 바울은 첫 사람 아담이 성경이 밝히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산 영()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2: 7).

   하지만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는 다른 인간들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영 곧 죽음에 빠진 인간을 살리는 영이 되셨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이 세상에 살아가기 위해 출생한 분이 아니라 사망에 빠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위로부터 나신 분이다. 그러나 순서적으로 보자면 신령한 몸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육체가 먼저 있었다.

   이는 모든 인간들의 조상이 되는 아담의 몸이 먼저 있었고 사탄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빠진 자기 백성들을 살리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은 그 후에 따라오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첫 번째 사람은 땅에서 났으므로 흙에 속한 자였다. 이에 반해 두 번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신 거룩한 분이다.

   이처럼 흙에 속한 자들은 흙에 속한 아담과 같으며 하늘에 속한 자들은 천상의 나라에 속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신분을 소유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에 땅에 속한 자인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던 것처럼 이제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게 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택하신 백성으로 하여금 그 아들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 점을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8: 29)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부터 나신 존재로서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이다(고후4: 4).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은 그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아담의 범죄로 인해 상실된 하나님의 그 형상을 회복하게 되었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영생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분명한 점은 혈과 육은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사실과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않은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썩어 부패한 것이 썩지 않은 거룩한 것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5.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51-56)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 그의 재림이 약속되었다. 그가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본 많은 성도들은 구약시대의 에녹과 엘리야를 머리에 떠올렸을 것이 틀림없다.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은 천상의 나라에 대한 확증이 되었으며 구약시대 성도들의 소망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거룩한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부활하신 몸을 입고 천상의 나라로 올라가셨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서 승천하시는 역사적인 광경을 쳐다보고 있을 때 흰옷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은 나중 종말의 때가 이르면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다시금 세상에 재림하게 되실 사실을 언급했다.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1:10,11)

 

   이 말을 전한 두 사람은 하나님의 천사들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간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고 말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재림이 몸의 재림이 된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부활하신 몸으로 승천하신 주님께서는 올라가신 그 모습 그대로 재림하시게 된다.

   이는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에 밀접하게 연관된 증언이다. 승천하신 주님을 목격하고 그에 관한 증인이 된 성도들은 지상교회의 기초가 되었다. 인간 역사 가운데 세대가 바뀌어 종말의 때가 이르게 되면 그들에게 연결된 맨 마지막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이 재림하시는 주님을 직접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는 지상의 모든 교회가 소유한 간절한 소망이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지금까지 그 약속의 때가 도래하기를 기대하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왔다. 이는 사도교회 시대부터 오늘날 우리에게 이르기까지 동일한 소망이 되어 있다.

   조만간 도래하게 될 최종적인 종말의 때가 되면,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과 심판을 알리는 나팔소리와 더불어 천상의 나라로부터 주님께서 친히 강림하시게 될 것이다. 그 때는 지상에 살아있는 자들은 물론 그 전에 죽은 모든 인간들도 그 엄위한 심판대 앞에 서야만 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 점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 16,17)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위로의 날이 될 것이며 불신자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날이 될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승천하신 그 모습 그대로 성도들 가운데 강림하신다. 그 때는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더불어 심판주이신 주님께서 큰 소리로 호령하시게 된다.

   주님의 재림으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게 되고 지상에 살아남은 자들은 홀연히 변화(고전15: 51)하여 재림하신 주님과 함께 천상으로 올라가 공중잔치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은 영원한 천국에 거하게 된다. 이러한 소망은 험난한 지상에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발생하는 인간들의 궁극적인 부활이다. 종말이 되면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인간들은 누구나 부활하게 된다. 그것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당연히 일어나게 될 사건이다. 따라서 마지막 심판 날이 되면 하나님께 속한 의인들 뿐 아니라 그렇지 않은 자들도 부활하게 된다. 성경이 그에 대한 내용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 29);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24: 15)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종말이 되어 궁극적으로 맞게 될 생명의 부활과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자들의 심판의 부활에 관한 내용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로마제국의 총독 벨릭스의 심문을 받으면서 마지막 심판날 있게 될 의인과 악인의 부활에 관한 언급을 했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점은 모든 인간들은 예외 없이 부활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궁극적인 부활은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필연적인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의인과 악인의 부활은 인간들에게 주어진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게 됨으로써 사망이 참 생명에 의해 삼킨바 되었다. 즉 생명이 사망을 정복하여 승리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과거에 인간을 멸망에 빠뜨렸으나 이제는 세력을 완전히 상실한 사망을 향해 조롱하는 말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 강력하게 저항하며 교회를 괴롭히던 사탄의 세력이 힘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인간을 사망에 빠뜨리는 독침은 죄며 죄의 권세는 율법이라는 사실(고전15: 56)을 언급했다. 이 말은, 사탄은 죄를 통해 인간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뜨렸으며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함으로써 막강한 권세를 휘둘렀다는 점을 말해준다. 즉 하나님께 저항하는 무서운 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사악한 기능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6.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 (57, 5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사망을 이기고 승리하도록 신령한 능력을 주셨다. 그것은 인간들이 노력을 통해 배양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이다. 하지만 타락한 이 세상에 살아가는 성도들은 여전히 나약한 인간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세상의 악한 속성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은 성도들에게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도록 격려했다. 또한 항상 주님의 일을 위해 더욱 간절히 힘쓰는 자가 되도록 요구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성도들의 모든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역시 이에 대해 여간 민감한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시대는 과거에 비해 더욱 위태로운 세대가 되어 있다. 인간의 이성이 절대화 되고 첨단과학이 극도로 발달한 현대문명 사회는 인간의 교만이 극에 달한 시대이다. 이는 세속적인 값어치가 세력을 얻어 범람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런 것들에 의해 쉽게 미혹 받을만한 기회가 많아졌음을 의미한다.

   현대의 교만한 현실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은 여간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악한 세상의 유혹을 물리치고 능히 그것을 이기기 위해서는 세속적인 것을 멀리할 수 있는 믿음이 견고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세상의 달콤한 거짓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땅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굳건하게 세워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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