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교회에서 먹는 만찬(supper)과 예배시간의 거룩한 성찬(고전11: 17-34)

 

 

1. 교회의 만찬 (晩餐) 과 성찬 (聖餐)

 

   교회 가운데서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교제가 이루어진다. 그것은 단순한 일반적인 교제(fellowship)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중심으로 한 영적인 교제(Holy Communion)를 의미한다. 절대다수의 현대교회가 오해하고 있듯이, 교인들이 예배시간에만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고 올바른 신앙생활이라 말하지 않는다. 한 주일에 한번씩 교회에 출석하고 세상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며 건전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식탁을 나누는 가운데 공동의 삶을 이어가는 영역이다. 즉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서로 간 함께 먹고 마시며 살아가게 된다. 날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번씩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주일 날 교회로 모일 때 성도들은 식사를 함께 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모든 성도들은 식탁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서로 간의 신뢰관계를 확인하며 다른 이웃의 삶을 알아가게 된다. 동일한 교회에 속해 있다고 하면서 함께 식사를 나누는 기회를 가질 수 없다면 전혀 자연스럽지 못하다. 한 교회에 속한 진정한 형제자매라면 결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만찬(supper)과 같이 성도들이 음식을 앞에 두고 함께 식탁에 둘러앉는 것은 공 예배 시간에 시행되는 성찬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만찬이 일반 음식을 차린 식탁을 의미한다면 성찬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공 예배 시간에 행해지는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나누는 의례를 의미한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120절에서 만찬(supper)에 관한 언급을 하고 있으며, 23절에서는 성찬(Holy Communion)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둘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구별해야만 한다.

 

 

2. 교회와 만찬 (17-22)

 

   사도교회 시대에는 주일 예배모임을 오후 시간에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일요일이 공휴일이 아니었으므로 다수의 성도들은 낮에 나름대로 일을 하고 오후에 교회로 모여 하나님을 경배하며 함께 저녁식사(supper, 晩餐)를 나누었던 것 같다. 그들은 제각각 자신이 먹을 음식을 준비해와 다른 교인들과 한 자리에서 식사를 했다. 매주일 모이는 집회 자리에서 온 성도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이 문제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함께 식사를 나누는 것은 삶에 연관된 매우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사람들은 한 식탁에 둘러앉는 관계가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삶의 교제가 나누어질 수 있게 된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주일 날 예배시간에 잠시 참석한 후에는 즉시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나 교회에 속한 많은 성도들이 서로 간 전혀 알지 못하는 관계에 놓여있는 것은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동일한 교회에 속한 성도로서 서로 간 삶을 나누는 인격적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 자리에 앉아 선포되는 말씀과 성찬을 나누며 진정한 권징사역을 감당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나아가 직분 자 선출을 하면서 다른 성도들의 신앙과 인격을 전혀 알지 못하면서 투표에 임한다는 것은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 교회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말하면서 성도들 상호간에 긴밀한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저들의 공적인 모임에 잘못된 폐해가 있음을 지적했다(고전11: 17). 당시 그 교회 내부에는 계층적 형편에 따라 별도로 모이는 자들이 있었다. 한 교회에 모이는 교인들 가운데도 편당이 존재했던 것이다.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교회 안에, 세상적인 지위와 부의 정도에 따른 차별화된 계층이 형성되어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출신 배경과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형편 등에 따라 서로 간 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개인적인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그런 잘못된 분위기를 주도하는 자들은 그것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들은 세상의 것들을 기준으로 한 차별화를 시도하며 남으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했다. 그것은 주로 음식을 먹고 교제하는 문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들은 생활환경이나 지위에 따라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인본적인 교제를 나누기를 좋아했다.

   그러므로 부자들은 값비싼 음식들과 술을 풍성하게 준비해와 배불리 먹으면서 심지어는 취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비슷한 상류계층의 부류로 판단되는 자들과 함께 풍족한 식탁을 나누며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넘치는 축복을 받은 양 거드름을 피웠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가난한 성도들은 먹을 것이 부족해 구차한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 거룩한 자리에서 그런 일이 발생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세속적인 자세를 버리지 않는다면 교회에서 성도들 간 원만한 식탁의 교제를 나눌 수 없다. 바울은 교회에서 부를 자랑하며 자신을 내세우는 그런 자들에 대해 강한 책망을 했다. 먹고 마실 집이 없어서 많은 음식을 싸가지고 와서 남들이 보는 앞에서 배불리 먹고 마심으로써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행동은 단순한 개인적인 취향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교제를 돕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상처를 주고 방해하는 역할만 하게 된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그런 행태는 교회를 멸시하는 것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런 행동을 하는 자들을 강하게 책망할 수밖에 없음을 언급했다. 그렇게 하는 자들에 대해 전혀 칭찬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설령 재정적인 측면에서 교회를 위해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가장 기본적인 자세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결코 그들을 칭찬할 수 없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그 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오늘날 우리 시대 교회들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3. 주님께서 교회에 허락하신 거룩한 성찬 (23-26)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예비하는 절기를 지키면서 매우 특이한 유월절 음식을 제공하셨다. 당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은 집집마다 유월절 양고기를 먹었다. 비단 팔레스틴 지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 뿐 아니라 전 로마제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도 그날 밤 유월절 음식을 먹었을 것이 틀림없다.

   당시 예수님과 제자들은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있었다. 그 때는 예수님께서 다윗의 왕위를 이으시는 유대인의 왕으로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뒤였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환호하는 것을 본 유대 당국은 그것을 로마제국의 황제에게 저항하는 모반행위로 몰아갔다.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에 대한 체포를 눈앞에 둔 긴박한 상태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유월절 음식을 어디서 먹을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했다. 제자들은 일반적인 입장에서 물어본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유월절이 매우 의미 깊은 때임을 알고 계셨다, 물론 그 마지막 유월절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때였지만 당시 제자들은 아직 그것을 구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제자들은 예루살렘성 안의 한 집에 있는 다락방을 유월절 음식을 먹는 장소로 정하고 준비를 했다(26: 17-19; 14: 12-16; 22: 7-13). 그들이 장소와 식탁을 마련하고 방을 정리하는 등 나름대로 준비를 했을지라도 유월절 양고기를 준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사실 매우 중요한 구속사적 의미와 더불어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약속의 땅으로 불러내시고 그에게 독자 이삭을 특별한 선물로 허락하셨다. 그 후 약속의 자녀인 그를 정하신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도록 요구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은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이삭을 바치기 위해 그를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갔다. 그때 아브라함은 이삭과 함께 가면서 칼과 불, 그리고 제물을 태울 나무를 준비해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 산에 이르렀다(22: 3,4).

   모리아 산에 도착할 때 즈음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준비되었는데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위해 제물을 예비하실 것이라 말했다. 이는 여호와 이레(Jehovah-jireh)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22: 8,14). 사실 그 의미는 나중에 거룩한 하나님의 어린 양인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위해 완벽한 제물로 바쳐지게 될 것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이제 오래 전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 예표되었던 바로 그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체적으로 성취될 사건이 눈앞에 닥쳐왔다.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 앞에 당도했던 것처럼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십자가 사역을 앞두고 하나님의 어린 양을 상징하는 유월절 음식을 먹기 위해 예루살렘성 안의 한 다락방에 모여 앉았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정녕 있어야 할 유월절 양고기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때는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저들의 조상이 출애굽과 더불어 먹었던 유월절을 기념하면서 집집마다 양고기를 먹고 있을 시간이었다. 이는 비단 이스라엘 지역뿐 아니라 전 로마제국에 흩어진 유대인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모인 그 특별한 자리에 유월절 양고기가 없었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삶은 양고기에 대한 어떤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당시 제자들은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물어보고 그의 말씀에 따랐다. 예루살렘성에 입성하기 위해 나귀새끼를 구할 때도 그랬으며(19: 29-30), 유월절 음식을 먹을 다락방을 구할 때도 그랬었다(22: 7-13).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어디에 가서 어떤 방법으로 양고기를 구해오라는 말씀을 하실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양고기를 구해오라는 명령을 하시는 대신 떡과 포도주를 떼어 저들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그것이 자기의 몸이라며 먹고 마시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에 맺어지게 될 새 언약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역을 통해 자신의 거룩한 몸을 자기 자녀들이 먹고 마실 신령한 음식으로 주실 것에 대한 언약의 말씀이었다. 따라서 자기가 부활 승천하신 후 이 땅에 다시 재림할 때까지 자신을 기념하여 성찬을 나누도록 명령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은 주님께서 직접 제정하시고 교회 가운데 명령하신 것이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매주일 공 예배를 위해 모이는 성도들이 함께 음식을 먹기 위해 둘러앉는 일반적인 식탁이 주님의 직접적인 명령이 아니라 성도들 사이에 존재해야 할 삶의 한 방편인 점과 구별된다. 성찬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나누었던 유월절 음식과 직접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그 때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월절 음식을 먹던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지만 주님께서 그로 하여금 그 의미를 알게 해주셨음을 밝혔다. 마지막 유월절 절기에 유대인 당국에 의해 잡히시던 날 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나눠주시며 그것이 자신의 살과 피라는 사실을 언급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기념하여 자신이 십자가 가역을 완성하신 후 이 세상에 다시 올 때까지 신앙의 본질인 성찬이 교회 가운데 지속적으로 나누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신약교회의 성찬에서 나누어지는 떡과 잔이 과연 구체적으로 어떤 본질적 성격을 띠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교회사 가운데 다양한 주장들이 있어왔다. 그것은 흔히 로마 가톨릭교의 화체설, 마르틴 루터의 공재설, 쯔빙글리의 상징설, 존 칼빈의 영적임재설등이다.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은 로마가톨릭교에서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신부가 떡과 잔에 축사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실제 살과 피로 변하며 그것을 먹는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것이라 생각한다. 즉 화체설은 성찬에 사용되는 떡에 축사를 하게 되면 그 떡이 곧 바로 그리스도의 몸과 동일한 본질(substance)로 변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상당히 미신적인 요소가 가미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성찬의 공재설(共在說, Consubstantiation)은 마르틴 루터가 주장했다. 교인들이 성찬 상의 떡과 포도주를 먹을 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직접 변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찬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임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예수의 몸이 떡과 잔에 편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성찬 상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실제적으로 임재하여 예배 참여자들이 그것을 먹게 되지만 성찬이 끝나면 남은 떡과 포도주는 원래의 떡과 포도주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이와 달리 쯔빙글리는 상징설(象徵說, Symbolism)을 주장했다. 예배 시간에 나누어지는 성찬은 단순한 기념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즉 성찬상의 떡과 잔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적인 몸과는 무관한 것으로 이해한다.

   오늘날 대다수 한국교회는 성찬을 나누며 개념상 쯔빙글리의 이론에 참여하고 있다. 소위 칼빈주의자들이라 자처하며 칼빈의 영적임재설을 따른다고 주장하는 자들조차도 실상은 상징설을 따르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들은 성찬을 나눌 때 천상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실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있었던 그의 십자가 사역을 기억하며 그의 죽음으로 인해 베풀어진 은혜를 마음속 깊이 되새기고자 하는 선에 머무르고 있다.

   성찬에 있어서 우리가 중요하게 이해해야 할 것은 영적임재설(靈的臨在說, Presence Spiritualism)이다. 이는 칼빈이 주장한 견해이자 오늘날 개혁교회가 고백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예수님의 몸이 계시된 말씀과 더불어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성찬 가운데 영적인 실재로 임한다는 것(real presence)이다.

   성령 하나님에 의해 실재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 상에 전달되게 된다. 그것은 성도들의 육신이 아니라 영혼에 영적으로 임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떡과 포도주를 입으로 먹고 마실 때, 성령의 도우심이 우리 영혼에 역사하심으로써 영혼에 필요한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먹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입으로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실 때 우리의 영혼은 믿음을 통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영적인 실재로 섭취하게 된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본질상 육신으로 변한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아니라 영적으로 임재하는 실제적인 신비의 몸이다. 그러므로 성찬은 거듭난 우리의 영혼이 실제로 주님의 몸을 먹는 은혜의 과정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성찬을 나눌 때 우리의 영혼을 높이 들게(sursum corda: 'Lift up your hearts')된다. 거룩한 성찬을 통해 천상의 나라와 지상의 교회가 서로 맞닿게 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상징적인 의미 이상의 실제적인 상태를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현실적인 실제로 섭취함으로써 영생의 영양소를 받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거듭난 성도는 거룩한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그 영혼은 천상의 지성소로 올라가게 되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 사이에 신령한 교제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성도들은 성찬 가운데 임하는 성령의 도우심에 따라 저들의 영혼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게 된다. 이는 은총의 수단인 성찬이 단순한 상징을 벗어나 성령의 능력에 의해 성도들이 신비한 방법으로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하게 됨을 말해준다.

 

   우리는 성찬의 성격에 연관된 다양한 견해들 가운데 칼빈의 영적임재설이 교회가 받아들여야 할 가장 성경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친히 성찬에 관한 중요한 교훈을 주셨으며 십자가 사역을 통해 자신의 몸을 구체적으로 내어주셨다. 그로 인해 이 땅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매 주일 공 예배 가운데 시행되는 성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영적으로 섭취하며 참된 생명을 공급받아 천상의 지성소에 계시는 그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참된 교회들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그것을 기념하며 공 예배를 통해 영적인 삶을 충만히 받아 누리게 된다. 사도들은 그 내용을 지상교회에 상속했으며 오늘날 우리 역시 주님과 사도들로부터 받은 성찬을 하나님의 은총의 수단으로 받아들여 교회 가운데 풍성하게 누리고 있다.

 

 

4. 성찬 참여의 자격 (27-32)

 

   하나님의 거룩한 성찬에는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아무나 마음대로 참여하지 못한다. 공 예배 가운데 배설되는 성찬 상에는 공적인 신앙고백과 더불어 세례를 받은 성도들만 참여하게 된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만찬(supper)에 해당하는 일반적인 음식을 교회에서 나눌 때 아직 세례 받지 않은 사람들이 그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과 비교된다.

   즉 교인들이 주일날 함께 모여 나누는 일반적인 식탁에는 교회에 나온 자라면 누구나 함께 동참할 수 있지만, 공 예배 시간에 시행되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행위인 거룩한 성찬은 그렇지 않다. 만일 주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가 있다면 그는 주님의 거룩한 몸을 범하는 죄를 짓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를 살피고 난 후에야 성찬 상에 배설된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셔야 한다. 이는 자기 삶이 죄가 없는 깨끗한 상태인가 하는 것을 살피라는 의미라기보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와 그에 속한 자신을 올바르게 분변하는 가운데 성찬에 참여하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성찬에 마치 미신적인 효력이라도 있는 것인 양 여긴다. 그들은 성찬 상에 마련된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써 위안을 얻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거룩한 성찬이 종교적 관행이 되어 본질적인 의미는 상실되고 빈 껍데기만 남게 된다.

   이처럼 고린도교회 가운데는 주님의 몸을 제대로 분변치 못하고 자신을 살피지도 않는 자들이 다수 있었다. 바울은 그런 자들을 두고 약한 자, 병든 자, 잠자는 자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고전11: 30). 이는 물론 영적인 의미에서 언급된 말이다. 그런 자들이 성찬의 본질적인 측면을 도외시한 채 종교적인 관행으로 인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곧 자기 죄를 먹고 마시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바울은, 교회와 자신을 온전히 살피는 성도들이라면 성찬 상에 올바르게 잘 참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채 습관적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도리어 심판을 받는 의미와 더불어 주님의 징계에 연관되는 것이라 말했다. 우리는 그것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한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세상과 함께 정죄 받는 저주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된다.

   또한 우리가 여기서 주의 깊게 기억해야 할 점은 유아세례를 받은 성도들도 교회에 마련된 성찬 상의 자리에 당연히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아직 고백을 통한 입교가 있기 전이지만 성찬 상 앞에 부모와 함께 앉아 있으면서 그 의미를 누려야만 한다. 그들 역시, 이미 공적인 고백을 함으로써 입교한 부모를 통한 간접적인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섭취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5. 교회와 성도들의 음식 (33, 34)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는 항상 성도들의 식탁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매주일 공 예배를 위해 회집하는 자리에는 온 성도들이 더불어 먹을 음식이 준비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정기적으로 함께 음식을 먹는 삶의 교제가 없는 교회란 상상할 수 없다.

   그 식탁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성격상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둘 가운데는 본질에 관계되는 더 중요한 것이 있는가 하면 일상적인 삶에 연관되는 덜 중요한 것이 분명히 있다. 본질에 해당하는 성찬(Holy Communion)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 승천하신 후 천상의 나라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직접 연관되어 있다.

   그에 비해 성도들이 일반적으로 함께 식사를 나누는 식탁의 교제(Table Fellowship)는 삶의 나눔을 드러내게 된다. 그것을 통해 지상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삶이 하나님께 예속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거기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등 세상에서의 어떤 차별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순히 교인들이 음식을 나누어 먹기 위해 모이는 영역이 아니다. 그 자리에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는 것과 더불어 성도들의 일상적인 삶의 교제가 발생해야 한다. 이는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의 생명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달려 있으며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다른 성도들의 삶에 연결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교회에 모일 때 모든 성도들은 항상 주변에 있는 다른 이웃들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경제적으로 가난한 교인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식탁에서 함께 먹는 음식으로 인해 교만하게 되는 자나 그것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상하는 자가 없어야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유능하고 부유한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을 때 가난한 교인들이 소외 당하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바울은 교회 가운데 그런 일이 생겨나지 않도록 특별히 당부하고 있다. 그래서 음식을 먹기 위한 식탁으로 모일 때 다른 성도들을 기억하며 서로 기다리도록 명했다. 만일 시장하기 때문에 음식을 먹는 것이라면 굳이 교회에 와서 그렇게 하지 말고 집에서 마음대로 먹으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몸 된 교회가 음식을 통해 배를 채우기 위해 모이는 곳으로 전락하게 되면 그 모임은 심판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바울은 교회가 그런 안타까운 모임이 되지 않도록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서신에서 언급하지 않은 나머지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가 고린도교회를 방문할 기회가 되면 그 때 그에 대한 말을 하겠노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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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제10장, 혼인의 본질과 독신자에 관한 교훈(고전7: 17-40) 서성필 2016.09.02 868
250 "제9장, 부부관계를 통한 교훈(고전7: 1-16)" 서성필 2016.08.29 1340
249 제8장, ‘성도의 자유’와 교회와 순결(고전6: 12-20) 서성필 2016.08.19 871
248 제7장, 성도의 세상법정 소송문제(고전6: 1-11)입니다. 서성필 2016.08.12 940
247 '제6장, 교회의 권세와 순결(고전5: 1-13)' 서성필 2016.08.05 1071
246 '제5장, 교회와 하나님 나라(고전4: 1-21)' 서성필 2016.07.29 963
245 '제4장, 하나님의 밭,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고전3: 1-23)' 서성필 2016.07.22 1078
244 '제3장,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대한 바울의 고백(고전2: 1-16)' 서성필 2016.07.15 943
243 제2장, 교회의 본질과 참된 지혜(고전1: 10-31) 서성필 2016.07.08 922
242 고린도전서, 제1장, 고린도교회와 보편교회의 정체성(고전1: 1-9) 서성필 2016.07.01 2010
241 5장. 사역자들을 향한 당부, 6장. 복음을 알 수 있는 성경 서성필 2016.06.17 771
240 4장. 생명 (3)『선악과와 예수의 생명』 서성필 2016.06.17 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