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공부는 교회의 민감한 부분인 사역자들의 생활비 부분을 얘기 합니다.

우리들의 모든 것이 말씀 속에서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여러분의 교회에 주님의 은혜가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주안에서

서성필.

 

 

 

12, 사도와 복음선포의 직무(고전9: 1-27)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바울 (1, 2)

 

   바울은 본문 말씀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자신의 신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유를 소유한 사도로서 주님을 보았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행한 모든 사역의 결과가 고린도교회 즉 성도들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말했다.

하지만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말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다. 그들이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의 파당을 나누고 있음은 그 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스스로 바울파라 칭하는 자들도 문제였지만 바울파가 아닌 다른 파당을 만들어 두고 있는 자들은 더욱 문제가 되었다. 이는 그들이 과연 바울의 교훈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될지 우려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사도성을 강조했다. 그는 설령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도가 아니라 할지라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는 사도라는 사실을 강하게 언급했다. 이는 그가 다른 지역의 성도들에게는 사도가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편지 가운데 기록하고 있는 모든 내용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진리이므로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요구를 했던 것이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인침을 받은 사도인 자신의 말을 거역하는 일이 없도록 명령했다. 이것은 자신의 사도성에 대한 절대적인 지위를 확인하는 의미를 지닌다. 물론 베드로와 아볼로 같은 하나님의 종들은 바울의 그 말에 대해 전적인 공감을 했을 것이 틀림없다. 이는 바울이 다른 사도들을 주 안에서 존중하고 있는 점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2. 바울의 경고와 설득 (3-15)

 

   사도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 가운데 자기를 트집 잡아 비판하는 자들을 향해 특별히 경고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를 갖추고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해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편지를 쓰고 있던 당시에도 다른 사람들처럼 배불리 먹고 평안히 살아가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잘못된 종교 지도자들이 배부르게 살아가며 풍요로움을 누릴 때, 바울은 열악하고 가난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전4: 8-11). 바울이 그렇게 살았던 까닭은 오로지 교회를 위한 삶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를 향해 그 점을 상기시키는 바울은 자기인들 왜 남들처럼 배불리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며 항변했다. 즉 자기에게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권한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자기 아내와 함께 여행을 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힘썼다. 다른 사도들이 가정을 꾸리고 부부가 함께 다니는 데 반해 바울은 그렇게 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이는 일상적인 삶에 있어서 바울이 상당히 외로울 수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는 교회를 섬기면서 직업을 가지고 노동하는 삶을 살았었다. 본문의 문맥을 살펴 보건데 베드로는 노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후원을 받아 제반경비를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노동을 하며 상당한 경비를 마련했던 것은 전적으로 교회와 복음사역을 위해서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지원을 어느 정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것은 개인적인 생활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역을 위한 것일 수 있다. 특별히 99절 이하에서 구약의 율법을 근거로 하여 사역자가 교회의 지원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언급을 강조한 점으로 보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린도의 일부 교인들이 바울을 트집 잡아 비난한 데는 바로 그 점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고전9: 3).

   바울은 본문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며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말씀사역 자들의 삶의 방편에 관한 중요한 언급을 하고 있다. 이는 사역 자들이 교회에 의해 재정적인 보장을 받는 것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에 대한 교훈이다. 바울은 자기는 자비량(自備糧)하는 입장에 놓여 있으면서도 그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군대와 일반적인 직업에 관한 내용을 예로 들고 있다. 국가의 명령에 따라 군에 입대하는 병사는 스스로 그 비용을 충당하지 않는다. 국가가 모든 필요경비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포도나무를 심고 양떼를 기르는 농부가 그 열매와 젖을 먹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역자의 생계를 지원하는 것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즉 교회의 사역자가 생활비를 지원받는 것은 성경적 원리에 의해 시행되는 것이다. 바울은 그에 관한 언급을 하면서 그것이 인간적인 사사로운 판단이 아니라 구약성경에 기록된 율법에 의한 원리라는 사실을 언급했다. 이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뿐 아니라 디모데에게 보내는 바울의 서신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9:9-14);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딤전5:18)

 

   사도바울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25:4)는 기록을 인용하면서 그것이 교회와 사역자의 삶에 연관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즉 그것은 곡식을 떠는 소가 가지는 권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교회와 사역자들에 관한 의미로 해석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바울은 그와 동시에 밭을 일구며 곡식을 떠는 농부는 그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소망을 가지고 일한다는 사실을 말했다. 그처럼 신령한 복음을 뿌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역 자들이 저들의 육신의 삶을 위해 교회로부터 생활을 보장 받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또한 사도는 구약시대 예루살렘 성전에서 여러모로 수종을 들던 레위인들이 성전으로부터 나오는 음식을 먹고, 제사에 사용되었던 제물을 제사장들이 나누었던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물론 이 모든 교훈은 단순히 목회자가 생활을 보장받는 문제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그가 온전히 교회에 예속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이 그 사역으로 인해 교회로부터 지원을 받아 생활을 보장받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다. 바울은 그것이 말씀사역 자들에게 주어진 신령한 권리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바울은 신앙이 어린 교인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자신은 그 권리를 완전히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그것으로 인해 복음증거에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바울은 고린도의 형편을 배려한 자신의 그런 처신이 오로지 교회를 위한 것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그 말을 하는 것은 교회로부터 재정적인 도움을 바라기 때문에 언급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혔다.

   바울은 그 교훈으로 인해 어느 누구도 자신을 오해하는 자들이 없기를 바랐으며,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자신의 참된 자랑에 손상이 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그는 친히 자비량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으므로 교회의 사역 자들의 생활비에 관한 분명한 교훈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도바울은 이처럼 자신을 비판하는 자들에게 구약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배경으로 하여 구체적인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던 자들은 자기의 기준에 따라 사도들을 트집 잡아 비판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비난하는 행위로서 실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감히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 혹은 선지자들을 비판하는 오만한 자들이 있지는 않은가?

 

 

3. 복음을 위한 사도 (16-23)

 

(1) 사도직분(16,17)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사도직분으로 인해 부득불 감당해야 할 사명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로서 겉으로 자랑할 만한 행동이기 때문이 아니라 마땅히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사도이면서 그 일을 감당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저주가 돌아오게 될 것이라 말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복음 사역을 개인적인 판단에 따라 임의로 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언급했다. 이는 자신의 모든 가르침과 행동이 인간적인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요구에 의한 순종임을 의미하고 있다. 만일 자신의 판단과 열정에 의해 그 일을 수행한다면 받을만한 상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수행하므로 달리 받을 상이 없음을 말했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이 성도들의 삶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종교생활을 하는 인간이 그 중심에 서있는 것인지 명확한 깨달음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성도의 삶 가운데는 항상 자기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이 중심에 놓여 있어야 한다. 신앙이 어린 교인들은 그렇게 사는 인생은 마치 손해를 보는 듯 박탈감을 느끼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성숙한 성도들은 그렇게 사는 삶이 진정으로 복 있는 자의 인생이라는 사실을 적실히 깨닫게 된다.

 

(2) 값없이 전하는 복음(18)

 

   사도바울은 자신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진정한 보상(reward)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자체라는 사실을 고백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발적으로 값없이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것이 곧 자기에게 허락된 보상이라는 것이다. 이는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삶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된 보상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들은 자신의 공로를 스스로 치하하려는 묘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 즉 보통 사람들은 남을 위해 무엇인가를 베풀면 그것을 곧 자랑거리로 삼고자 한다. 겉보기에 다른 사람에게 그런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심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변형된 형태의 긍지와 자부심으로 마음속에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성도들의 복음사역이나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와 같은 성질이 드러난다. 신앙이 어린 교인들은 자기의 행위를 스스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만족스러워 한다. 나아가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고자 기대하게 된다.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은 누구나 소중한 복음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개별적으로 간직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교회와 성도들이 함께 공유하게 된다. 따라서 그것을 소유한 백성들은 선택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찾아 무상으로 나눠주어야 한다. 즉 자기만 혼자 움켜쥐고 있을 것이 아니라 복음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나눠줌으로써 함께 공유해야 하는 것이다.

   그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받은 것이므로 다른 이웃들에게 값없이 주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값없이 받은 것을 나누어 가지면서 그에 대한 대가를 받으려 하는 것은 잘못이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보내시며 그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의 복음은 대가나 삯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0:5-8)

 

   이는 천국복음에 대한 전파 원리를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내보내시면서 그것을 명하셨다. 사도들은 천국복음을 선포하면서 질병, 죽음, 귀신 등 지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도록 명령 받았던 것이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은 교회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본질적인 내용은 지상의 모든 교회가 받아들여야 할 말씀이다. 따라서 만일 어떤 사람이 적당한 대가를 바라고 복음에 연관된 노동력을 제공한다면 삯군이라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이웃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 일을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교회로부터 생활을 보장받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말씀사역자가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받는 의미 가운데 하나는 자의대로 행하지 않게 하기 위한 방편이 된다. 즉 신앙이 어린 사람이 자비량하여 지도자가 되면 교회를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려 할 것이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 교회에 생활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일하면서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자랑거리가 아니라 도리어 위험할 수 있다.

   그런 원리를 잘 알고 있는 사도바울이 자신은 직접 노동하며 복음증거 사역에 참여하고 있음을 말했다. 바울이 그렇게 했던 것은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교회에 소중한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한 사도바울의 신앙자세를 잘 배워야만 한다.

 

(3) 복음을 위한 성도와 교회(19-23)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진정한 자유인이었다. 그러나 진리를 소유한 그는 도리어 모든 사람에게 종(slave)이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는 사도로서 다른 성도들 위에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섬기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도바울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모든 자유를 사용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자유를 진정으로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유를 개인의 목적을 위해 잘못 사용하게 되면 추한 방종에 빠지게 된다.

   바울의 주변에는 항상 다양한 형태의 사람들이 있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유대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들도 많이 있었다. 또한 유능하고 건강한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무능하고 연약한 자들도 많았다. 그의 주변에는 상이한 모양 다양한 형편에 처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개인적인 주장을 고집하지 않았음을 고백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사도바울은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아까운 생명을 미련 없이 내어놓는 소신이 강한 신앙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율법아래 있는 자들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 했으며, 율법 없는 자들에게는 또한 그들과 같이 처신했다. 나아가 그는 강한 자들에게는 강한 자가 되었으며,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되어 겸손한 자세를 취했다.

   바울이 그렇게 처신했던 까닭은 더 이상 그런 것들이 신앙의 본질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종교적인 형식에 매어 달리는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바울은 그들의 양식을 배척하지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형식보다 훨씬 소중하고 중요한 본질에 대한 깨달음을 주고자 했다. 바울의 처신은 개인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몸 된 교회와 복음을 위한 것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할 바는, 바울의 처신이 상황에 따라 잦은 변신을 허용하는 상황윤리에 연관된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약삭빠른 행동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바울의 처신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위한 자기 포기에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본성적으로 타락한 성품을 지닌 인간들은 항상 복음을 핑계대면서 자신의 종교적인 목적을 도모하려는 경향성을 띠고 있다. 즉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다고 말을 하지만 실상은 자기를 위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여간 민감한 자세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역 자들은 바울처럼 교회를 섬기는 성도들이다. 사도인 바울과 결코 비견할 바가 되지 못하지만 교회 가운데 상속된 의미상 그렇다. 그러므로 특히 교회에 의해 말씀사역 자로 세움을 받은 성도들은 사도바울처럼 항상 복음에 참여하는 자의 자리에 온전히 서있도록 애써야만 한다. 주변의 이웃들에게 유연하게 대처하면서도 하나님의 복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강력하게 투쟁하는 모습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4. 신앙의 정체성과 면류관 (24-26)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종교적인 열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신앙이 중요하다. 아무리 최선을 다하는 기독교 활동이라 할지라도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무모한 허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 헛된 일이 개인에게는 나름대로 상당한 위안을 안겨주게 된다는 사실이다. 열정적인 노력이 눈에 보이는 종교적인 성과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을 상실한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운동경기에서 달리기 경주를 하는 것을 예로 들고 있다. 우리의 신앙적인 삶은 마치 여러 사람이 동일한 선상에서 출발하는 마라톤(Marathon) 경기와도 같다. 많은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 달리지만 그 가운데 명예로운 상(prize)을 얻는 자는 한 사람이라는 점이 언급되고 있다.

   이는 바울 당시 고대 그리스의 운동경기를 예로 든 설명이었다. 물론 바울은 여기서 달리기 경주 자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의 올바른 삶에 관한 교훈을 주려고 했다. 물론 그는 달리기 경주에서 일등 하는 사람만 영예로운 상을 받듯이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 상을 받게 된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도리어 정확한 푯대를 향해 결승지점을 향해 주변을 살피지 않고 절제하며 최선을 다해 달리는 성도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바울은 본문가운데서 달리기 경주를 하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와 지식에 관한 언급을 했다. 경주하는 자는 우선 자신의 욕구를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 달리기를 하는 선수가 주변을 기웃거리며 나태하거나 안일한 태도를 가질 수 없다. 또한 열심히 달리다 보면 힘겹고 어려워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차라리 달리기를 시작하지 않는 편이 훨씬 나을 수도 있다.

   그리고 달리기 경주를 하는 자들은 결승지점에 대한 정확한 위치파악을 하고 있어야 한다. 즉 어느 방향으로 어디까지 달리면 최종 도달점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면 안 된다. 분명한 푯대를 알고 그것을 향해 전력질주(全力疾走) 해야만 하는 것이다. 만일 푯대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채 달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럴 경우에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달리면 달릴수록 엉뚱한 데로 달리는 꼴이 된다. 즉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해도 그것으로 인해 받을 상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영원한 면류관을 얻게 되는 신앙인의 삶 또한 이와 마찬가지다. 일시적인 영예를 얻기 위한 달리기에서도 그런 기본적인 법칙이 있는데, 영원한 천상을 향해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야 오죽할까?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그와 같은 자세로 최선의 삶을 살도록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분명한 천상의 푯대를 향해 전심전력을 다해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사도바울 자신은 방향을 모르는 채 무모하게 달리지 않고 싸움의 대상이 누구인지 모르는 채 허공을 치는 것 같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했다. 우리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우리는 온전한 신앙을 가진 성도로서 타락한 세상을 기웃거릴 필요가 없다. 단지 이 세상 가운데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가운데 영원한 천국의 푯대를 바라보며 최선을 다해 살아갈 따름이다.

 

 

5. 바울의 엄한 교훈 (27)

 

   타락한 인간들의 마음 가운데는 항상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추구하며 그것을 이룩하고자 하는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부정적이고 불건전한 것들에 국한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 보기에 긍정적이고 그럴듯해 보인다 할지라도 개인이 원하는바 세상에서의 욕구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아니라 인간적인 목적을 이룩하려는 천박한 욕망에 연관된다.

   사도바울은 본문 말씀 가운데서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과연 무슨 의미인가? 이 말은 절제와 연관되어 있으며 단순한 상징에 그치는 말이 아니다. 그가 언급하고자 했던 점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쳐부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켰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는 그가 개인의 종교적인 욕망에 따라 사도직분을 감당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고전9: 27)

 

   바울은 본문 가운데서, 남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이 이 말을 한 근본적인 의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문자 그대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성실하게 전했지만 나중에 가서 버림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 했던 것일까?

   물론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중요한 의미는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보상(reward)에 적합하게 살고자 하는 그의 신앙자세이다. 그것은 바울의 말을 듣는 고린도교회 지도자들과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들을 포함한 역사상의 모든 교회의 사역 자들을 향한 엄한 교훈의 말씀이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행위 자체가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교훈하고 있는 본질을 진정으로 소유하는 신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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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 제8장, ‘성도의 자유’와 교회와 순결(고전6: 12-20) 서성필 2016.08.19 752
248 제7장, 성도의 세상법정 소송문제(고전6: 1-11)입니다. 서성필 2016.08.12 806
247 '제6장, 교회의 권세와 순결(고전5: 1-13)' 서성필 2016.08.05 948
246 '제5장, 교회와 하나님 나라(고전4: 1-21)' 서성필 2016.07.29 827
245 '제4장, 하나님의 밭,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고전3: 1-23)' 서성필 2016.07.22 963
244 '제3장,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대한 바울의 고백(고전2: 1-16)' 서성필 2016.07.15 818
243 제2장, 교회의 본질과 참된 지혜(고전1: 10-31) 서성필 2016.07.08 798
242 고린도전서, 제1장, 고린도교회와 보편교회의 정체성(고전1: 1-9) 서성필 2016.07.01 1897
241 5장. 사역자들을 향한 당부, 6장. 복음을 알 수 있는 성경 서성필 2016.06.17 666
240 4장. 생명 (3)『선악과와 예수의 생명』 서성필 2016.06.17 7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