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인 우리는 우리들의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우리들의 풍습과 관행, 습성을 어찌해야 할까요?

결코 쉽지 않은 얘기입니다.

 

주님의 긍휼과 은혜가 필요한 입니다.

 

주안에서

서성필.

 

 

11, 우상제물에 연관된 문제(고전8: 1-13)

 

 

 

1. 우상제물 (1-4)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우상제물 곧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things offered unto idols)에 관한 특별한 교훈을 주고 있다. 대다수 성도들은 우상과 그에 바쳐진 제물에 대한 나름대로의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전부는 아니다.

   바울은 우상제물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기에 앞서 지식이 가지는 부정적인 기능을 기록하고 있다. 지식은 대개 사람들로 하여금 교만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사랑은 덕을 세운다는 사실을 말했다. 이는 자기의 지식을 내세워 다른 사람들 앞에서 교만한 자세를 취하는 것보다 사랑으로 이웃을 위해 덕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바울은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한다면 아직도 마땅히 알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라 언급했다(고전8: 2). 이는 인간 스스로 가지는 모든 지식은 불안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의 지식은 자기의 주장을 합리화시키거나 경직된 자기 확신에 이르게 만든다. 그것은 진리에 순복하는 것이 아니라 유치한 아집에 빠지도록 한다.

   그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기록된 말씀과 성령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는 계시된 말씀의 요구에 따라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자세를 가질 때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인간들의 단순한 사랑의 감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도리어 확증되지 않는 종교적 착각일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언약에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써 온전한 사랑의 자세를 지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더불어 자기 자녀를 알고 기꺼이 받아들이신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 인간들에게서 발생한 주관적인 판단은 항상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바울은 그런 언급을 하는 가운데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에 관한 교훈을 했다.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우상제물로 인해 상당한 문제가 되고 있었다. 그것을 먹는 자와 먹지 않는 자는 각각 나름대로 자신의 정당성을 내세웠을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결국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당시 우상제물을 먹는 자들은 왜 그것을 먹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과연 배가 고파서 먹었을까? 아니면 제사를 지내며 그것을 먹는 불신자들인 이웃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먹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과거의 습성 때문에 먹었을까? 아마도 이 가운데 불신자인 이웃을 배려해야 한다는 이유와 과거에 가졌던 종교적 습성에 연관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세상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우상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들이 제멋대로 우상을 만들어 두고 아무리 떠들어댄다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을 위해 실제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이 능력을 발하시는 참된 신일 따름이다.

 

 

2. 여호와 하나님과 거짓 신령들이 가득한 세상 (5, 6)

 

   죄에 빠진 인간들의 마음은 항상 자의에 따라 원하는 신을 만들어 내기도 하며 형편에 따라 그것을 변형시키기도 한다. 그것은 물론 역사적 과정을 통해 드러나게 되지만 인간의 연약함과 사탄의 영향력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이 세상에는 온갖 잡다한 종교의 형태를 띤 귀신들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세상에는 신이나 신령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유무형의 존재들이 많이 있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하늘의 천체들과 지상에 존재하는 피조물들을 두고 신이라 칭하는가 하면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 내용들을 염두에 담아두고 신이라 부르기를 좋아한다. 물론 그것들은 진짜 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간주하며 믿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여러 신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참 하나님은 상천하지(上天下地)에 단 한 분 밖에 없다. 삼위일체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주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지으셨다. 그는 태초에 천지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지으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시는 영원불변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홀로 우주만물의 근원이 되신다. 그로 말미암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고전8: 6). 사탄의 유혹에 의해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만물이 오염되어 상당한 변형이 일어났으나 그 근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어진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다. 따라서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어떤 피조물과도 확연히 구별되는 독특한 존재이다.

 

 

3. 음식과 우상숭배에 대한 관습 (7, 8)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놀라운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이 아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은 자신이 존재하는 근원에 대해서조차 모르고 있다. 그들은 우주가 우연히 생겨난 것이라 생각한다. 나아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과 생물, 그리고 인간까지도 우연히 생겨났다고 믿는다.

   그런 자들은 자기의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지되 죄로 인한 한계에 부딪쳐 진화론적인 엉뚱한 상상을 한다. 그들은 인간마저도 진화의 과정에서 우연히 생성된 산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유물론적(唯物論的) 사고를 하게하며 인간자체로서의 본질적인 값어치를 멸시하게 된다.

   우리가 참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은 계시된 성경말씀이다. 그 말씀을 통하지 않고 인간들의 이성과 경험, 혹은 특별한 실험과 연구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이성과 경험을 통해 상상의 신들을 만들어내고는 그것을 마치 전염병처럼 확산시켜나가게 된다.

   이방신 사상에 빠진 자들은 그런 식으로 저들의 종교적인 취향에 맞는 우상을 만들어 두고 그것을 섬기기에 열중한다. 그 우상들 가운데는 유형적인 것들이 있는가 하면 무형적인 것들도 많이 있다. 그런 것들은 세상의 천박한 철학과 연관되어 잘못된 가치관을 생성하여 사람들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살아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더러운 우상을 섬기면서 스스로 자족하며 종교적인 안도감을 가진다. 그들은 더러운 우상을 섬기면서도 자기를 위해 유효한 것이라 여기며 비천한 종교적 습성에 빠져 든다. 그것은 죄에 빠진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표식이다. 따라서 그들은 저들의 종교행위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끔찍한 행동이라는 사실을 감지조차 못하고 있다.

   그런데 그보다 더욱 큰 문제는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 가운데도 여전히 과거 이방신을 섬기던 때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자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과거에 가졌던 종교적인 습성을 교회 안으로 가져와 혼합하기에 이른다. 말씀의 예리한 칼로 도려내야 할 이방신 사상을 그대로 둔 채 그것을 자신의 삶과 신앙에 엉긴 상태로 방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혼합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자들은 우상 제물에 대한 명확한 깨달음 없이 그것을 먹는다. 이는 그들이 성경을 통한 진리와 본질적인 신앙보다 과거에 세상에서 획득한 종교적인 습성을 우선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즉 그들은 영원한 진리를 바라보는 절대적인 신앙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편으로서 종교적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우상제물인 음식을 먹으면서 주관적인 입장에 따라 자신을 변명하기 시작한다. 나아가 그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것이라 여기며 자신의 배를 채워주는 은총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바울은 그런 생각을 하는 자들을 두고 양심이 약해져 더러워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고전8:7).

   물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음식물 자체가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우상 제물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식생활을 통한 일상적인 삶 또한 마찬가지다. 즉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 어려운 삶을 살아간다고 해도 인생의 본질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며, 배부르게 먹어 풍족하게 살아간다고 해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즉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궁극적인 은혜를 논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어떤 음식을 먹고 먹지 않는 일 자체가 하나님 앞에 의로 드러나지 않는다. 즉 우상제물을 먹지 않음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이 아니며, 그 음식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먹는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의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것들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4. 그리스도인의 제한된 자유 (9, 10)

 

   성숙한 성도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상은 먹는 음식물 자체가 아니라 주변의 연약한 성도들이다. 즉 우상제물을 먹고 먹지 않는 행위 자체보다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온전히 돌아보며 보호하는 일이다. 자기의 신앙적인 판단에 따른 음식물 섭취 행위보다 다른 성도들이 더욱 귀중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타락한 세상에 존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진정한 자유가 허용되어 있다. 그래서 진리 안에서 모든 것을 올바르게 판단하여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유가 연약한 형제들의 신앙에 걸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숙한 성도들은 자신의 모든 판단과 행동이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상제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성도가 우상의 집(an idol's temple)에서 앉아 불신자들과 함께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게 되면 저들은 그것을 보며 자신도 그렇게 따라 하려 할 것이다(고전8: 10). 그들은 말씀에 의한 올바른 지식을 소유하지 않은 채, 다른 교인이 행하는 것을 보고 왜곡된 판단에 의해 그것을 모범 삼아 따라 하게 되는 것이다.

   죄에 빠진 인간들은 항상 자기 자신을 변명하기에 급급하다. 그런 비뚤어진 성향은 하나님은 물론 사람들 앞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남에게 증거해 보이려 한다. 설령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확인되었다 하더라도 자신에게는 그렇게 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는 또 다른 핑계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성경적인 온전한 지식을 소유한 사람이 우상에 연관된 제물을 먹을 때 그것 자체로서는 죄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광경을 지켜보게 되는 연약한 교인들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의한 참된 지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위를 그대로 따라 하며 자신을 합리화시킨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타인의 행동을 보고 스스로 담력을 얻어 우상 제물을 먹으면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기게 된다(고전8:10). 동일한 사안에 대한 유사한 행동이라 할지라도 나타나는 영향은 전혀 다를 수 있다. 성숙한 성도가 자기 생각만 함으로써 다른 성도들을 넘어지게 한다면 그것이 곧 죄가 되는 것이다.

 

 

5. 진리에 대한 지식과 성도의 자세 (11-13)

   영원하고 참된 진리를 아는 지식은 인간들의 추구정신과 노력에 의해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그의 자녀들에게 주어진다. 교회는 그 지식을 온전히 보존하며 전수하는 일을 감당하는 공동체이다.

   우리가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바는, 성도들이 소유한 그 지식을 조심스럽게 적용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것이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이웃들을 위한 공적인 성격을 띤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 지식은 정체된 상태로 개인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삶 가운데 활동하는 지식이다. 따라서 그 지식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연약한 다른 이웃들이 크게 상하게 될 우려가 없지 않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구원하신 형제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시어 말하고 있다. 교회 가운데는 항상 신앙이 어린 자들이 많이 있기 마련이다. 지상의 어느 교회든지 신앙이 강한 자들만 모여 있는 교회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는 마치 일반적인 가정과도 같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정에는 모든 식구들이 한결같이 성장하여 강한 자들만 모여 사는 것이 아니다. 정상적인 가정에서는 항상 어린아이들이 태어나며 그들이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간다. 그들이 나중 어른으로 성숙해가게 되며 또다시 출산과 성장을 되풀이 한다.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 역시 그와 동일한 원리 가운데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성숙한 성도들은 항상 교회 안의 연약한 어린 성도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성숙한 자들은 그들을 말씀으로 돌아보며 인도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진리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이 있는 자들이 저들 가운데 있는 신앙이 어린 성도들로 하여금 잘못된 사고에 빠져들게 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그 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8: 11,12)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은 항상 주변의 다른 이웃들을 기억하는 가운데 사고하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자신의 지식으로 인해 형제로 하여금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어린 그 형제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과도 같다. 진리를 따른다고 하면서 형제를 배려하지 않음으로써 범죄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는 앞에서 언급된 대로 진리로 말미암는 자유를 자기 마음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과 연관되어 있다.

   이는 우상제물에 있어서도 그와 동일한 적용이 이루어진다. 그 음식을 먹는 행위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라 해서 무분별하게 먹어서는 안 된다. 설령 우상의 집에 앉아 거기서 사용된 음식을 먹는 것 자체가 특별한 죄가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는 것은 신앙이 어린 형제들로 하여금 실족케 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만일 음식물로 인해 형제를 실족케 한다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에게 허락된 자유로 인해 신앙이 어린 형제를 실족케 하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언급된 우상의 집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에 비한다면 아주 가벼운 경우에 해당된다.

   바울 당시에는 동물을 도축하면서 의례적인 종교행위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것은 비록 우상에게 바치기 위한 동물을 잡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먹기 위해 동물을 죽일 때도 그러했다. 그들은 동물의 생명에 칼을 대는 자체를 두고, 저들의 신을 향한 나름대로 종교적 요식행위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에도 다양한 종족들의 종교문화에 따라서는 그와 유사한 일들이 있다. 사람들이 먹기 위해 동물을 잡을 때 종교성이 포함된 간단한 요식행위가 포함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외국의 그런 지역을 여행할 때, 그런 종교의례와 더불어 잡은 고기라 해서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바울은 일반적인 관점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행동이라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형제를 실족케 한다면 고기를 일절 입에 대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관심이 먹는 음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와 성도들에게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으시다. 이처럼 우리의 주된 관심의 대상도 일반적인 행사나 주장이 아니라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이어야 한다.

 

 

6. 현대교회의 적용

 

   우리시대는 전반적으로 배도에 빠진 악한 시대이다.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을 맡은 것으로 알려진 자들이 그보다 훨씬 더한 배도행위에 앞장서고 있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가 되어버렸다. 즉 목사나 장로가 이방종교의 전당(殿堂)에 들어가 직접 우상을 숭배하는 일이 발생해도 별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러한 행동은 우상제물을 먹는 행위와는 결코 비교가 되지 않는 더러운 악행이다. 나아가 일시적인 종교적 요식행위와 더불어 도축된 고기를 먹는 것과는 아예 비교가 되지 않는다. 바울의 교훈에 비쳐볼 때 성도들로 하여금 실족케 하는 그런 악한 일이 지속적으로 발생해도 배도한 기독교는 그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조차 없다.

   현대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이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응하며 적용해야 할까? 이는 사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실제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현대적 경향은 문화혹은 토착성에 대한 수용이란 명분으로 제사문제를 무분별하게 수용하려는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자 한심한 태도이다. 성경에 기록된 교훈을 단순히 문화적인 것으로 호도(糊塗)함으로써 본질을 버리는 행위는 악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성과 경험에 따른 주관적인 태도 역시 주의해야 한다. 시대적인 정서를 기준으로 삼아, 경우에 따라 모든 음식을 무조건 먹어도 괜찮은 것으로 주장해서는 안 된다. 또한 자신의 종교적인 성향에 따라 특정 음식을 먹지 않는 것으로 인해 그것을 절대화하는 것도 곤란하다.

   하지만 인간들은 하나의 틈을 발견하게 되면 그것을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어들이려는 간악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비단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삶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자신에게 허락된 자유를 맘대로 누리려는 근거로 삼으려 한다. 인간들은 항상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이기적인 욕망을 발산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경우 조상제사와 제사음식에 관한 문제는 상당히 현실적인 문제가 되어 있다. 전형적인 다종교사회에서 성도들의 주변에는 항시 불신자들이 있고 그들과 어느 정도 교제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경우에 따라서 제사음식 문제는 가족 가운데 매우 심각한 문제로 발전하기도 한다.

   제사음식이라 할 때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한 음식과, 제사상에 직접 올려졌던 음식이 모두 포함된다. 그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으니 먹어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달리 오해할 어린 자들이 있을 것이므로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 가운데 배가 고파 제사음식을 먹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 대신 가족이나 이웃과의 원만한 관계유지 때문에 먹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며, 과거의 습성 때문에 먹는 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웃 사람들보다 교회 안의 신앙이 어린 성도들을 기억하는 자세가 앞서야 한다. 또한 과거의 종교적 습성으로 인해 제사음식을 먹는다면 그것을 즉시 중단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모든 경우의 해석과 행동에 있어서 주변의 여러 이웃들을 기억하는 가운데 겸손하게 처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이와 더불어 생각해 봐야 할 바는, 한국인의 전통 가운데는 일반적으로 장례와 제사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이웃의 장례 때 상가(喪家)를 방문하여 조문(弔問)하면서 죽은 자의 시신이 놓였다고 생각되는 곳 앞에 향을 피우거나 꽃을 헌화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가진 자들 가운데 일부는 그 앞에서 엎드려 절을 하기도 하지만, 대다수 교인들은 그 앞에서 절을 하는 대신 꽃과 향을 매개로 한 종교적 습성이 강한 다른 행위를 따라 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불신자들로부터 인정머리 없어 보이지 않으며 예를 다하는 이웃으로 보이게 된다고 여긴다. 이웃에 대한 배려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어린 성도들을 실족케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따라서 성숙한 성도들은 불신자들을 핑계 삼아 그런 타협적인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가족을 잃어 슬픔에 빠져 있는 이웃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것은 소중하지만 죽은 자의 시신을 향해 어떤 의례를 행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의 본질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서 이미 보편화되어 있는 죽은 자를 기억하는 추도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불신자들은 죽은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제사 대신에 추도식이라는 명목으로 그것을 대체하고 있다. 그 때가 되면 특별히 교회의 목사를 초청해 추도예배를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죽은 사람을 중심에 두고 추도예배를 본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서 어폐(語弊)가 있다. 굳이 조상이 죽은 날 가족들이 모인다면 죽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가족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날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인다면 추도예배가 아니라 가족끼리의 친교모임이어야 한다. 그 자리에 교회의 다른 성도들을 초청해 함께 편안하게 교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죄에 물든 인간들은 저들의 모든 행위를 합리화시킬 것이므로 우리는 여간 분명한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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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제2장, 교회의 본질과 참된 지혜(고전1: 10-31) 서성필 2016.07.08 920
242 고린도전서, 제1장, 고린도교회와 보편교회의 정체성(고전1: 1-9) 서성필 2016.07.01 2007
241 5장. 사역자들을 향한 당부, 6장. 복음을 알 수 있는 성경 서성필 2016.06.17 769
240 4장. 생명 (3)『선악과와 예수의 생명』 서성필 2016.06.17 9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