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거듭나기 에는 세상의 풍습, 세상이 허용하는 아량, 승리하기 위한 방법, 전통, , 우리들의 삶의 잣대가 세상에 있었기에 우리가 속에서 무엇이던 있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막을 있었을까요?

 

그러나, 거듭난 후부터는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시는 잣대와 삶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의 잣대와 삶이 바뀌지 않으면 사람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여러분들의 가정에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주안에서

서성필.

 

 

10, 혼인의 본질과 독신자에 관한 교훈(고전7: 17-40)

 

 

 

1. 차별 없는 신분

 

(1) 할례와 무 할례(17-20)

 

   사도바울은 혼인과 부부에 관한 내용을 교훈하던 중 성도들의 일반적인 출신배경에 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신앙의 본질적인 것 이외에 대해서는 원래 처한 자연적인 형편 가운데서 행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본질적 차이가 없음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닌다.

   바울의 이 말 가운데는 동일한 신앙의 본질을 소유한 성도들의 모든 삶에 있어서 상호간 개방성이 드러나고 있다. 즉 민족적, 종교적 배경이나 사회적 신분 등이,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성도들의 교제를 위해 더 이상 걸림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바울은 원래 속한 민족적인 배경을 두고 성도들을 구분 짓지 않았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점은 바울이 구약시대의 신앙에 연관된 할례자와 무할례자에 대한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교회 가운데서는 유대인 출신이라 해서 특별한 긍지나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으며 이방인 출신이라 해서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었다. 성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라 하면서 이 세상의 외부적인 조건이나 혈통적인 배경으로 인해 특별한 자부심을 가지거나 열등감을 느낀다면 두 경우 모두 신앙이 지극히 미숙한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 즉 과거의 민족적이며 종교적인 배경이 어떠할지라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성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저들을 구원의 자리로 불러주신 하나님과 그의 뜻이다.

   유대민족의 배경을 지닌 성도들이 과거에 할례를 받았다면 그 상태에서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할 것이며,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또한 그 상태로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한다. 육신에 남아있는 할례의 흔적이나 민족적인 배경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하면서도 그에 대한 분명한 언급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3: 29,30);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5:6)

 

   바울이 여러 교회들을 향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각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민족적이며 종교적인 상이한 배경에 관한 것이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 어떤 종족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가 하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지금 현재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가 하는 점이 중요할 따름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백성들 가운데는 저들의 조상과 몸의 흔적을 자랑으로 삼으려는 자들이 있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의 신앙이 보다 정통성이 있는 듯 남에게 드러내 보이고자 했으며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우월감을 가지고자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도리어 열등감의 표현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참된 신앙과 하나님의 계명에 관한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유치한 현상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유사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배도한 기독교 집단들 가운데는 여전히 소위 성골(聖骨)과 진골(眞骨) 등 출신성분에 따른 신분차별이 존재한다. 그들의 부모와 인척들의 공로와 저들이 끼쳤던 종교적인 영향으로 인해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세속화의 늪에 빠져 있는 지 교회들 가운데도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즉 목사나 장로 등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직분자의 자녀와 일반 성도의 자녀이거나 나중에 복음을 알게 되어 혼자 교회에 출석하는 청소년들이 차별대우를 받는 경우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잘못된 관행은 하나님의 몸 된 교회 가운데서 마땅히 사라져야 할 폐습이다.

   소위 몇 대를 이어 예수를 믿어왔다는 식의 가족 전통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설령 믿는 조상들로부터 훌륭한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긍지를 가질만한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 바울은 할례 받은 유대인들의 혈통을 지닌 자들조차도 이방인과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강조했다. 이는 혈통적인 배경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온전한 신앙이 소중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2) 자유인과 종(21-24)

 

   할례 받은 유대인들과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본질상 동등선상에 둠으로써 민족적, 종교적인 배경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말한 바울이 이번에는 자유인과 종에 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이는 사회적인 신분에 연관된 문제이다.

   하나님의 자녀들 상호간에는 이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며 내세우는 모든 조건들이 완전히 소멸된다. 즉 그런 것들은 교회 가운데서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바울은 골로새교회에 편지하면서 종족문제와 종교적인 배경문제, 그리고 사회적 신분이 더 이상 성도들의 신앙적인 삶에 있어서 아무런 효력을 가지지 못함을 말하고 있다.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3: 11)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사회에는 대개 상이한 신분을 통한 계층적 차별을 두고 있다. 그것이 마치 사회적인 질서를 유지하는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인 양 여긴다. 그리고 독특한 문화적 배경을 강조함으로써 주변의 다른 종족 집단과 차별을 시도하며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립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교회에서는 도리어 그런 모든 것들을 적극적으로 소멸시킨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유능하고 훌륭한 사람들을 선택해 부르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들의 능력과 인정이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타락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만한 내용이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이 된 모든 성도들에게는 진정한 자유가 허락된다. 그것은 인간들의 이성과 경험에 의해 이해되고 있는 것들과 다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신분이 설령 비천한 종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완전한 자유인이다. 반면 세상에서 어느 누구의 제재도 받지 않는 자유인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종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 가운데 존재함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의 어떤 배경과 신분을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와 상관없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허락된 참된 자유를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자유는 인간의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되어야 하는 성질을 지닌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서신 가운데서 자유에 대한 언급을 하며, 하나님께 예속된 성도들에게 그 자유를 올바르게 사용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2: 16)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된 자유를 얻은 성도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올바르게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 만일 자기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그것을 사용한다면 오용과 남용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악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한 피로 교회와 성도들을 값 주고 사셨다. 모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하나님께 팔려간 자들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더 이상 이 세상의 인간들의 종이 될 필요가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성도들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 해서는 안 될뿐더러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아서도 곤란하다. 오직 하나님께서 부르신 거룩하신 뜻에 따라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그를 온전히 섬겨야만 한다.

 

 

2. 처녀에 대한 교훈 (25, 26)

 

   사도바울은 본문 가운데서 특별히 처녀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말을 하면서 주님으로부터 처녀에 대해 특별히 받은 계명이 없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는 내 생각에는.......(고전7: 26)이라는 말과 더불어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울의 교훈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 말은 하나님의 계시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의미인가?

   바울은 그냥 평범한 신앙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은 사도였다. 그는 주님의 자비하심에 따라 신실한 자세로 교훈하고 있는 자신의 심경을 고백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교훈이 단순한 기독교 지도자의 권면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특별한 사도의 계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가 서신에서 기록한 내용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처녀에 대한 교훈을 주면서 바울은 임박한 환난으로 인해 혼인하지 않고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는 말을 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한 임박한 환난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임박한 환난은 우리 시대에 비춰볼 때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인가?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임박한 환난은 항상 지상에 살고 있는 성도들의 눈앞에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즉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임박한 진노가 진행되는 가운데 살아가게 된다. 이는 비록 육신의 환난뿐 아니라 정신적이며 영적인 환난을 포함하고 있다.

   바울은 이 말을 통해 성도들에게 세상의 다른 것을 기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조용히 기다리라고 당부했다. 즉 사람들은 혼인에 대해 지나친 기대를 해서 안되며 그것을 아무런 의미 없는 것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단지 하나님 앞에서 정숙하고 신실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미성숙한 교인들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항상 더 나은 다른 무엇인가를 기대한다. 혼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혼인을 염두에 두고 있는 당사자는 물론 그 부모마저도 혼인을 하게 되면 다른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실상은 그에 대한 아무런 보장이 없다. 설령 혼인을 통해 인간들이 보기에 화려한 변신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도리어 위험한 것일 수 있다. 바울은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처녀에 관한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혼인하지 않은 처녀는, 하나님께서 남편을 허락하신다면 그에게 복종하며 살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5:22-24). 이는 무조건 굴종할 자세를 갖추라는 의미와는 다르다. 남편에게 복종하는 준비를 갖추고 있을 때, 그 삶은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한 삶이 아니라 가정과 교회를 위한 삶에 대한 기초적인 깨달음을 가지게 된다.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그것은 결코 남편을 위한 것만이 아니다. 즉 남편은 아내로부터 항상 섬김을 받는 위치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가정질서를 요구하신 것은 창조질서와 연관된 의미를 혼인과 가정을 통해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가정과 더불어 영원한 진리를 깨달아 가는 가운데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그런 삶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중 처녀가 혼인하지 않고 홀로 살아간다 해도 여전히 그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진 삶이 된다. 성도의 삶의 의미는 혼인에 연관된 가족 양식에 달려 있지 않다. 도리어 혼인을 통한 삶에 대해 지나친 기대를 하거나 행복을 추구한다면 위태로운 모험에 빠질 수 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자신의 인생을 천박한 확률놀이에 내 맞기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면서 다양한 상황을 접하는 가운데 점차 체념하면서 그것이 곧 인생살이인 양 치부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이 처녀들에 대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한 것은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혼인을 할만한 나이가 된 성도들에게 진지한 삶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려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바울의 교훈을 통해 이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사고를 뛰어넘어 인생의 진지함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3. 혼인한 자들이 지켜야 할 도리 (27-35)

 

   신앙이 어린 교인들은 혼인과 가정에 대해 근본적인 착각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부부의 애정과 가정의 행복을 마치 인생의 목표인 양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수준의 정도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 가운데도 그런 삶을 누리는 자들이 얼마든지 많다. 그리고 신앙이 미숙하거나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 역시 그렇다.

   그러나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삶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물론 성도의 가정은 인격적이어야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바탕이 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두고 있다.

   타락한 세상 가운데 놓인 성도의 가정은 그런 온전한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지상에서의 행복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가정이 전체적으로 엄청난 환난에 휩싸일 수 있으며 가족 중에 신앙이 어리거나 비뚤어진 식구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일반적으로 말하는 행복을 가지기 어렵게 된다.

   물론 그런 힘든 상황에 부닥친다 할지라도 결코 실망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다. 그럴수록 더 높은 곳을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는 구약성경 호세아 선지자와 그의 가정을 잘 기억하고 있다. 물론 호세아의 가정은 하나님의 구속사 가운데 있었던 특별한 경우였지만 우리는 그를 통해 일반적인 교훈을 얻게 된다.

   호세아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선지자였지만 그의 아내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남편의 신실함에 비해 아내는 정숙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내가 더러운 부정을 저지르고 악을 행한다고 해서 남편도 그와 같은 삶을 살 수는 없다. 그것은 인내하기 어려운 엄청난 고통이 동반됨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지만 신앙이 성숙한 호세아는 인내하는 가운데 부정한 아내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점은 호세아가 자신의 아내에게 모든 인생을 걸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세상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는 삶을 살았다. 그에게는 하나님과 그의 영원한 나라가 진정한 소망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가정과 부부관계에서 일어난 심각한 고통 가운데서도 천상의 기쁨과 즐거움을 바라보며 살았던 호세아를 기억하며 그의 삶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비록 우리에게 호세아가 겪었던 것과 동일한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의 올바른 신앙정신을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부모와 처자 및 가정에 대해 그와 동일한 교훈을 주셨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라다니던 무리들을 향해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옆에 있던 제자들이 직접 듣고 받아들였던 교훈이며 오늘날 우리를 포함한 역사상 모든 교회들에게도 그 교훈은 여전히 유효한 진리의 말씀이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14: 26,27)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해하기 쉽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자매를 사랑하라고 말하는 대신 도리어 미워하라고 말씀하셨다. 나아가 단순히 경우에 따라 미워할 수도 있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적극적인 의미가 내포된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께서 하신 그 말씀은 단순히 상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성도들에게 실제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내용인가? 우리는 물론 이 말씀이 상징성을 지니는 가운데 실제적인 요구를 동반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상징적인 것만 강조하고 실제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 가운데 그에 대한 실제적인 의미가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남편과 아내가 있건 없건 간에 그것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요구하고 있다. 미혼 청년들이 혼인을 하는 것도 그것 자체로서는 대단한 일이 아니며 도리어 혼인을 하면 더욱 많은 고통이 따르게 되리라는 언급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혼인을 행복의 뿌리가 될 것이라 기대하는 터에 바울은 정반대로 말했던 것이다.

   바울이 이 언급을 한 것은 단지 혼인을 한 후 야기 될 부부생활의 문제와 고통에 대한 것 때문이 아니다. 도리어 그 말 가운데는 혼인을 하여 가정을 가지게 될 경우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말해준다. 즉 부부관계가 너무 부담스럽고 힘겨워도 올바른 신앙을 유지하기 어렵지만 너무 풍요로워 행복에 겨운 관계가 전개된다고 해도 올바른 신앙을 영위하는 것이 쉽지 않다.

   신앙이 어린 사람들이야 이 세상에서의 삶이 풍요롭고 행복하면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 말하겠지만 바울은 그것이 신앙의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남편이나 아내를 기쁘게 하는 것이 성도들이 근본적으로 추구해야 할 바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배우자가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살고, 슬픈 자는 그것과 상관없는 자처럼, 기쁜 자도 그렇지 않은 자처럼 무덤덤한 자세로 살라고 당부했다. 세상에서 풍요롭게 사는 자나 그렇지 못한 자나 그 자체로서는 별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세상을 무덤덤하게 여기며 살도록 당부했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형편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로서 아무런 형적도 남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조금만 좋으면 모든 세상이 자기 것이라도 되는 양 마음이 들뜨는 반면 조금만 어려워도 하늘이 무너지는 듯 낙심에 빠지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남들이 엄청난 축하와 꽃다발을 보낸다 할지라도 무덤덤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그것들이 영원한 값어치를 소유하고 있지 않은 까닭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심각한 고통과 시련을 당해 다른 사람들이 매우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위로의 말을 전한다 할지라도 무덤덤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잠시 지나가는 상황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것들로 인해 호들갑을 떨며 넘치는 즐거움에 빠지는 자나 이 세상의 것으로 인해 지나친 낙담에 빠지는 자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의 것들을 목적으로 삼아 살아가지 않는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만족스럽게 살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는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부부간의 가정생활도 그러하지만 일반적인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도 그렇다. 그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기 위해 세상에 맞서 투쟁해야 하며 처절한 싸움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세상에서 평안하고 즐겁게 살만한 것들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와는 반대적인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살아가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려 하며 진정한 유익을 추구하는 가운데 기쁘게 살아간다. 세상에서 어떤 일이 발생할지라도 성도들의 궁극적인 삶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교회와 그에 속한 백성들의 삶은 지나가는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 점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4:4-7)

 

   바울은 감옥에 수감 중인 상태에서 빌립보교회에 편지를 썼다. 수감생활은 고달프고 힘든 삶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간수의 감시를 받으며 생활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서 고통이다. 거기다가 먹고 입는 문제도 힘들었을 것이며 컴컴하고 조그만 감방에서 추위와 더위를 견디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세상의 어려운 여건으로 인해 본질적인 구애를 받지 않았다. 견디기 어렵고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것은 지나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바울은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깝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이 말은 고린도전서 726절에서 언급한 임박한 환난과 통하는 말이다. 이는 단지 시간적인 의미뿐 아니라 종말에 처한 정서적인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의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를 의지해야 한다. 그 가운데 기도와 감사가 우러나오게 된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들의 삶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타락한 세상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인간들의 노력으로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특별히 베푸시는 놀라운 은혜이다. 성도들의 혼인문제와 가정생활에 있어서도 이와 동일한 원리와 이치가 적용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성도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며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 알 수 있게 된다.

 

 

4. 혼인은 개인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님 (36-38)

 

   일반적인 경우, 대다수 사람들은 마땅히 혼인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혼인을 해야만 임무를 다해 뭔가를 남기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다. 사람은 혼인을 할 수도 있으며 혼인하지 않고 혼자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성도의 혼인은 단순히 개인적인 판단과 결단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말할 바 아니라 할지라도 성도들의 혼인 가운데는 하나님의 분명한 섭리와 경륜이 존재하고 있다. 설령 인간들이 판단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놀라운 관여 아래 놓여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 잠언서 기자는 그에 연관된 교훈을 주고 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16:1,9)

 

   이 교훈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들의 모든 삶을 직접 하나하나 간섭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기 자녀들에게 항상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저들의 길을 인격적으로 인도하신다.

   하지만 이 말은 성도들의 모든 일상생활에 있어서 그렇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운명론이나 숙명론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연관된 문제에 있어서 자기 자녀들을 그렇게 인도하신다. 인간들이 마음으로 어떤 생각을 하며 계획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저들을 구체적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의 혼인문제는 하나님의 언약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은 개별 가정에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교회공동체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즉 개인이 혼인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그것은 교회 공동체에 속한 공적인 성격을 지니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혼인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간섭 아래 놓여있다. 그것은 창세전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하고 있으며 창조질서와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한 남녀를 부부로 짝지어 주신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이 말은 혼인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로운 경륜에 따라 혼인이 이루어지며 한 가정이 세워지게 된다는 사실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남녀간의 배우자를 얻게 되는 것이 인간의 선택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에 따른 은혜의 결과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설령 인간이 자신의 남편이나 아내를 스스로 선택하는 듯이 여기고 혼인을 결심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을 인도하시는 분께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처녀 딸의 혼인이 부모의 의사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딸을 시집 보내든지 집에 그냥 머물러 두게 하든지 그것은 부모의 소관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억지로 딸을 시집 보내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당부했다. 부모는 그것이 낫다고 판단하여 혼인을 강행하려 할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중요한 것은 처녀 딸을 비롯한 모든 식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다.

 

 

5. 재혼 (再婚) 문제 (39, 40)

 

   우리는 재혼문제에 대해서 성경의 교훈에 따라 분명한 이해를 해야만 한다. 부부가 혼인해 함께 살아가다가 배우자를 사별(死別)하게 되었을 때 재혼을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는 혼인 하지 않은 미혼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상태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배우자와 사별했을 경우 과거의 삶에 지나친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된다. 부부가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어 생활하다가 사별했으므로 슬픔과 아쉬움이 크겠지만 그 이상의 마음을 가질 필요는 없다. 도리어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속히 슬픈 마음을 청산하도록 애쓰는 것이 지혜로운 자세이다.

   따라서 배우자를 사별했을 경우 재혼에 대해서는 개방되어 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언제든지 혼인을 통해 새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사별했을 경우 재혼하는 것보다 혼자 사는 것이 더욱 행복할 것이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에 따라 말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왜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그런 말을 했을까? 아마도 재혼이 초혼에 비해 혼인생활을 영위하기가 훨씬 힘들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초혼일 경우 자신과 주변 환경에 의해 인내할 수 있는 자연적인 강한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재혼일 경우 인간의 연약성으로 인해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만날 때 그것을 견디며 이겨낼 힘이 훨씬 약화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여기서 매우 중요한 내용을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재혼하는 당사자의 가족관계에 연관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여인이 혼인을 했을 때 그녀는 시댁 식구들과 새로운 가족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혼인하기 전에 아무런 관계가 없이 남남이었던 사람들이 시부모가 되고 시누이, 시동생이 된다. 그러다가 남편이 죽게 된다 해도 그 가족관계는 여전히 존속된다.

   그러므로 그녀가 혹 재혼을 한다면 원래 초혼에서 형성되었던 시댁의 모든 가족관계를 그대로 유지한 채 재혼을 하게 된다. 즉 전남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되었지만, 가족관계상 원래의 친정가족과 나중에 맺어진 시댁가족을 동시에 가족으로 두고 있다. 사별한 며느리 혹은 딸이 다른 남성과 혼인을 하려 할 때 가족관계에 있는 그녀의 양가는 동시에 친정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원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 여성의 처음 시댁 부모들은, 남편을 잃은 며느리를 딸처럼 인식하고 그녀의 인생에 진정한 신앙의 도움을 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물론 그녀가 재혼 한 후에도 원래의 친정과 마찬가지로 처음 결혼을 통해 맺어진 가족들과도 교제의 끈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에 대해서는 부인을 사별한 남편에게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구속사적인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경우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그에 연관된 한 경우를 보게 된다. 룻기에는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의 관계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나오미는 아들이 죽은 후 며느리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도록 권했지만 룻은 혼인으로 인해 형성된 가족관계를 파기하지 않고 시어머니를 따른다.

   그리하여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과부가 된 며느리 룻은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때 나오미는 며느리 룻을 그곳에서 자신과 친족관계에 있는 보아스와 혼인을 시키고자 한다. 그 일을 위해 나오미는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으며 룻은 시어머니의 권면을 받아들여 따랐다.

 

룻의 시모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로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함께 하던 시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그가 오늘 밤에 타작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너의 할일을 네게 고하리라(3:1-4);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찌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4:13-15)

 

   룻기에 나타나는 내용이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 룻기 본문은 메시아 계보에 속한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서 가족관계의 한 단면을 보게 된다. 룻의 재혼은 단순히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언약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 점은 보아스와 나오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룻이 보아스와 혼인하여 자녀를 나았을 때 그 아이를 전남편의 어머니였던 시어머니 나오미의 자녀라 칭하고 있다. 그것은 실제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 사실은 하나님을 믿는 저들의 주변에 살던 모든 친족들과 이웃들이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저들은 그것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재혼에 관한 또 다른 중요한 내용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재혼을 통해 주안에서 얻게 된 아내는 초혼에서 얻은 아내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뜻에 의해 허락된 아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결코 저들의 이혼은 허용되지 않는다. 만일 재혼한 아내를 사별하지 않은 채 이혼을 하고 다른 여인을 취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간음행위에 지나지 않는 악한 행동이다.

   혹시 그런 잘못된 일이 발생한다고 해도 주안에서 재혼했다가 이혼을 통해 버림을 받은 아내는 여전히 그 남편의 집안과 가족관계를 지속한다. 두 번째 혼인을 통해 형성된 가족들과의 관계가 파기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재혼한 아내와 사별하지 않은 채 부당하게 이혼한 남성과 함께 사는 여성은 새로운 가족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여간 분명한 깨달음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바는 사별한 것이 아니면서 이혼을 한 사람과는 결코 재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설령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 재혼은 원천무효라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간음행위가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론 혼인에 관한 모든 내용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며, 혼인 문제는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 속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가운데 그 원리를 마음속 깊이 새겨야만 한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고린도전서 - 머 리 말, 차 례. 이광호 목사. 서성필 2016.06.24 4349
공지 중국 신학교 강의록 - 정진국 목사 서성필 2016.03.11 5774
공지 [야고보서] 머리말, 차례. 이광호 목사 서성필 2015.10.09 6157
공지 '에세이 산상수훈', 서문, [권두언]-“아프리카, 아쉬움이 남아있는 대륙’, [목차]. 이광호 목사 서성필 2015.02.13 7555
공지 '교회와 신앙'. 서 문, 머 리 말, 송영찬 목사 서성필 2014.10.11 7114
공지 ‘교회와 사명’ - 서 문, 머리말, 프롤로그. 송영찬 목사 [2] 서성필 2014.06.21 6850
공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머리글과 목차. 이광호 목사 [5] 서성필 2013.08.25 12623
258 제17장, 본질적 은사인 사랑(고전13: 1-13) 서성필 2016.11.04 979
257 제15장, 교회에서 먹는 만찬(supper)과 예배시간의 거룩한 성찬(고전11: 17-34) 서성필 2016.10.28 2191
256 제16장, 성령의 은사들과 교회의 세움(고전12: 1-31) 서성필 2016.10.28 886
255 제14장, 창조질서 속의 남자와 여자(고전11: 1-16) 서성필 2016.10.13 957
254 제13장, 언약적 세례와 신령한 음식(고전10: 1-33) 서성필 2016.09.23 865
253 제12장, 사도와 복음선포의 직무(고전9: 1-27) 서성필 2016.09.16 870
252 제11장, 우상제물에 연관된 문제(고전8: 1-13) 서성필 2016.09.09 846
» 제10장, 혼인의 본질과 독신자에 관한 교훈(고전7: 17-40) 서성필 2016.09.02 866
250 "제9장, 부부관계를 통한 교훈(고전7: 1-16)" 서성필 2016.08.29 1338
249 제8장, ‘성도의 자유’와 교회와 순결(고전6: 12-20) 서성필 2016.08.19 870
248 제7장, 성도의 세상법정 소송문제(고전6: 1-11)입니다. 서성필 2016.08.12 938
247 '제6장, 교회의 권세와 순결(고전5: 1-13)' 서성필 2016.08.05 1067
246 '제5장, 교회와 하나님 나라(고전4: 1-21)' 서성필 2016.07.29 961
245 '제4장, 하나님의 밭,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고전3: 1-23)' 서성필 2016.07.22 1077
244 '제3장,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대한 바울의 고백(고전2: 1-16)' 서성필 2016.07.15 940
243 제2장, 교회의 본질과 참된 지혜(고전1: 10-31) 서성필 2016.07.08 920
242 고린도전서, 제1장, 고린도교회와 보편교회의 정체성(고전1: 1-9) 서성필 2016.07.01 2007
241 5장. 사역자들을 향한 당부, 6장. 복음을 알 수 있는 성경 서성필 2016.06.17 769
240 4장. 생명 (3)『선악과와 예수의 생명』 서성필 2016.06.17 9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