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

 

우리가 교회 생활에서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문제 하나입니다. 대부분 교회의 지도자들이 성도들에게 확실하고 올바른 설명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공부로서 여러분께서 교회 속에서의 올바른 판단을 이해하셨으면 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교회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주안에서

서성필.

 

 

 

6, 교회의 권세와 순결(고전5: 1-13)

 

 

 

1.   최악의 음행 (1, 2)

 

5:1 여러분 가운데 음행이 있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일까지 있다고 하니, 그러한 음행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5:2 그런데도 여러분은 교만해져 있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그러한 현상을 통탄하고, 그러한 일을 저지른 자를 여러분 가운데서 제거했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인간들로부터 표출되는 가장 사악한 죄 가운데 하나는 성적인 음행(淫行)이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더러운 가면으로 가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소설이나 영화, 그리고 안방에서 방영되는 텔레비전 연속극 등에서는 저질스런 사랑마저도 아름다운 것인 양 포장되고 있다. 타락한 인간들은 욕망과 사랑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죄에 빠진 인간들은 진정한 사랑과 이기적인 욕망 사이를 올바르게 구분하지 못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랑이란 대개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감정적인 욕망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인간들은 욕망으로 인한 애정의 감정을 마치 아름다운 사랑인 양 치부한다. 이는 특히 기본적인 인간성을 상실한 21세기 이성(異姓) 관계에서 강하게 두드러진다.

   이기심에 가득 찬 죄인들은 사랑의 욕망이 일게 되면 그것을 미화하려는 경향성을 띠고 있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이성적인 감정은 쌍방으로 상호 작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부부 사이가 아닐 경우 그것은 욕망과 욕망이 부딪치는 불건전한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어리석은 자들은 이성간에 발생하는 욕망의 변화된 현상을 마치 사랑인 양 착각하여 속기 십상이다.

  고린도교회에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음행이 있었다. 교회에 출석하는 어떤 사람이 자기 아버지의 아내 즉 계모를 성적으로 취했던 것이다. 그는 단순히 몇 차례 성적인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라 그녀와 동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당사자에게 아무런 뉘우침이 없었다는 사실과 교회가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바울은 단순히 범죄한 당사자를 질책하는데 그치지 않고 온 교회가 그 범죄에 동참하고 있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한 두 개인의 사적인 범죄행위일 뿐 아니라 그 악행을 알면서 엄하게 다스리지 않고 묵인한다면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그 악행에 간접적으로 참여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교인들은 그 음행을 알고도 침묵하면서 자신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듯이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 가운데는 그 더러운 악을 저지른 사람을 향해 뒤에서 비난하고 욕하는 자들이 많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 추잡한 음행을 보고도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타락한 세상 가운데서도 인간들의 양심을 배경으로 하여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도리와 인륜(人倫)이 있다. 그런데 교린도 교회 가운데 일어난 패륜(悖倫)은 불신자들 가운데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더러운 악행이었다.

   거룩해야 할 하나님의 교회에서 그런 일이 발생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이며 교회를 허무는 악한 행위이다. 개인적인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하나님의 교회를 허문다면 그보다 더 악한 일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교회와 성도들이 그것을 방조한다면, 교회를 모독하는 자들을 관대하게 받아들임으로써 그 죄에 참여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2. 교만한 자에 대한 판단 (2-5)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가 그런 끔찍한 죄악에 대해 통탄스럽게 여기지 않고 그 악한 자를 공적으로 엄하게 징계하지 않은 채 도리어 용납하고 있는 사실을 두고 강하게 질책하고 있다. 그런 자들은 교회 가운데서 중징계를 내려 마땅히 물리쳐 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로 보건대 당시 고린도교회 가운데는 세속적인 악한 풍토와 더불어 불건전한 관용사상이 존재했던 것 같다. 그런 악행을 보면서, 모든 인간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떳떳할 것이 없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해서는 안되며, 죄악이라 할지라도 이해하고 관용하는 것이 덕목이라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나아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철저히 이기적이 되어 다른 사람들의 범죄에 대해서 무관심했을 수도 있다. 각자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책임지면 될 일이지, 옆에서 그것을 지적하다가 복잡한 인간관계에 얽히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곧 어떤 경우에도 남의 일에 주제넘게 간섭할 필요가 없다는 그릇된 사상이다.

   그런 생각들은 일면 그럴듯하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인간들의 죄에 대해 상호 용납하고 위로를 주고받음으로써 교회를 무시하는 위험한 상황을 유발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한 모습을 보이면서 자신의 악행에 대해서도 교회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사고를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아마 그들 가운데는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한 말씀(7: 1-3)을 오해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들먹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교회 가운데 죄를 용납하려는 그런 태도는 무서운 누룩이 되어 다른 교인들에게 급속하게 퍼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교회를 어지럽혀 약화시키게 되며, 교인들이 사악한 죄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경건한 삶을 훼방하는 역할을 한다. 그 결과 교인들은 점차 죄에 무디어지고 둔감하게 된다. 그것이 더욱 심화되는 단계에 이르면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성도들을 질투하게 되고 그들을 향해 도리어 비아냥거리는 분위기마저 조성될 우려가 없지 않다.

   그 모든 내용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바울은 저들의 교만한 태도를 책망하며 자신이 그 악한 자를 이미 판단했음을 언급했다. 이는 단순한 판단이 아니라 그를 정죄한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자신의 몸이 비록 고린도교회 가운데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영으로는 그들과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처럼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본문 가운데서 계모와 통간하는 것과 같은 더러운 악행을 저지른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었음을 분명히 선언했다. 우리가 여기서 특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바는 바울이 멀리 에베소에 있으면서 개인적으로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는 말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육신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의 영은 고린도교회의 공적인 모임 가운데 함께 있으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그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었음을 분명하게 말했다. 이는 보편교회가 세상과 악한 자들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권세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연관되는 것이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전5: 4,5); In the name of our Lord Jesus Christ, when ye are gathered together, and my spirit, with the power of our Lord Jesus Christ, To deliver such an one unto Satan for the destruction of the flesh, that the spirit may be saved in the day of the Lord Jesus(1Cor. 5:4,5, KJV)

 

   바울이 여기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그런 자를 사탄에 내어준다고 한 말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가? 이는 사도와 교회가 그를 공적으로 영원한 멸망에 내어주었음을 말한다. 더구나 주 예수의 능력으로 그를 사탄에게 내어 주었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바울의 선언은 평범한 수준의 징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럴 요량이었다면 다른 징계절차가 따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당사자에게 우선 범죄사실에 대한 지적과 더불어 권면을 하고, 그것을 수용하지 않을 경우 점차 높은 단계의 징계를 시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곧바로 그가 하나님의 구원과 상관이 없는 자로서 거룩한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 들어와 교회를 더럽힌 자였음을 밝히고 있다. 물론 이러한 궁극적인 심판에 관한 선언은 오직 사도들만 할 수 있는 특별한 사역이다. 그러므로 사도가 아닌 보통 신자들이 함부로 말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게 된 목적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육신은 멸하고 영은 마지막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물론 본문에서 말하는 영은 그 악을 행한 자의 영혼을 지칭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 영은 교회 곧 영에 속한 하나님의 성도들을 일컫고 있다.

   바울의 이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우리가 악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 사도들은 이미 판단하고 심판하는 내용들이 우리 가운데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한다. 시대적 조류로 인해 전반적으로 죄에 둔감해진 상태에서 우리는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며 악행을 저지를 때, 사도들의 준엄한 판단이 어떠한지 귀담아 들으려는 자세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사도바울이 본문 54절에서 언급한, 사탄에게 내어준 사람을 지칭하고 있는 이런 자가 영어성경(KJV)에서는 such an one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는 고린도전서 51절에 기록된 바로 그 사람을 직접 일컫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악행을 저지르는 자를 포괄적으로 의미한다. 바울은 그런 더러운 음행을 저지르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교만에 빠져 있는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었다고 말했다. 이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며 교회를 어지럽히는 그런 자가 멸망 당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뒤이어 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는 과연 그런 사람의 육신은 멸망 당하도록 사탄에게 내어주고 그의 영혼은 궁극적인 구원을 얻게 한다는 말인가? 즉 육은 사탄에게 넘겨지고 영은 하나님께 맡겨진다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인가?

   우리는 이 본문을 주의 깊게 해석하면서 교회론 적 관점과 더불어 이해해야 한다. 즉 바울이 그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었다고 한 선언은 사도만 할 수 있는 특권적 선언으로서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이는 교회의 순결을 위해 그런 자를 영원한 저주에 내어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도바울이 공적 모임 가운데서 ‘그런 자를 사탄에게 내어준 사실’(To deliver such an one unto Satan)‘주 예수의 날에 육신은 멸하고 영은 살리는 일’the flesh may be destroyed and the spirit may be saved on the day of the Lord)을 양분해서 이해해야 한다. 이와 같은 의미를 잘 보여주는 문장번역에 있어서는, 영어성경 NIV가 일반적으로 타당한 문장구분을 한 것으로 이해된다.

 

When you are assembled in the name of our Lord Jesus and I am with you in spirit, and the power of our Lord Jesus is present, hand this man over to Satan, so that the sinful nature may be destroyed and his spirit saved on the day of the Lord(1Cor. 5:4, 5, NIV)

 

   사도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가 현존하는, 성도들의 공적인 집회 가운데 함께 있으면서 더러운 악행을 저지른 자를 사탄에게 넘겨주었다. 본문의 문맥을 살펴볼 때 이 사실은 그 자체로 완료되는 성격을 지닌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육신 즉 죄의 본성을 지닌 자들은 멸망케 하기 위함이며 동시에 영에 속한 자들은 주님의 날에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여기서 동일한 한 사람의 육체와 영혼을 두고 육신은 사탄에게 보내지고 영은 하나님께 가게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이 말은 교회 가운데 존재하는 육 적인 자들과 영적인 사람들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즉 육 적인 사람들은 사탄에게 내어줄 것이며, 영적인 성도들은 마지막 날 구원받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다시 말해 교회 가운데 육적인 자들과 영적인 자들을 분리해 영원한 심판과 영원한 구원이 이루어지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할 바는, 사도들의 영이 우리 시대의 공적인 모임 중에도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의 모임 가운데는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정신이 존재해 있는 것이다. 물론 저들의 몸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저들의 정신은 우리 가운데 분명히 존재한다. 이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훈이 모든 교회 가운데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3. 위험한 누룩 (6-8)

 

   사도바울은 악행에 빠져 있으면서도 상황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고린도교회를 향해 엄하게 책망하고 있다. 그들은 그런 악행이 범행 당사자 개인의 문제일 뿐, 전체 교회공동체의 문제라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의 관계적 원리를 잊고 있었으며,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게 된다는 사실을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는 도리어 저들에게 자랑거리가 있는 듯한 교만한 태도를 버리지 못했다. 그들은 본질을 상실하고 죄악에 빠져 있으면서도 나름대로 종교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럴듯한 종교적인 외형을 갖추고 있다 할지라도 더러운 누룩을 방치한다면, 그것이 퍼져 교회전체가 악한 집단으로 변모할 우려가 없지 않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로 하여금 바리새인들의 악한 누룩을 경계하도록 명령하셨다. 저들은 종교적 형식을 중시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불신자들이었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되풀이하여 언급하지만 실상은 배도한 자들로서 하나님의 일을 허물고 방해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을 경계하도록 요구하셨다.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8: 15)

 

   종교적으로 포장된 자들의 외형은 어린 성도들을 미혹하게 된다. 그들의 열성이 마치 하나님을 위한 것인 양 비쳐지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들은 그런 자들의 위선을 부러워하고 자기도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누룩과 같이 서서히 주변으로 퍼져나가 본질을 변형시키게 된다. 그런 것에 대한 재빠르고 민감한 대처가 없다면 전체덩어리에 누룩이 퍼져나갈 수밖에 없다.

   아마도 고린도교회에서 사악한 음행을 저질렀던 사람 역시 겉보기에는 유능한 종교인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교회를 위해 연보를 많이 한다든지 혹은 무엇인가를 통해 나름대로 힘 있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은 그의 더러운 음행을 알면서도 아무런 공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교회 가운데 용납되어서는 안 될 위험한 누룩과 같은 것이었다. 누룩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은 하나님의 몸 된 교회가 묵은 덩어리를 내다버리고 누룩 없는 새 덩어리가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유월절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 바쳐진바 되었으니 그의 몸 된 교회도 그러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내부에 존재하는 누룩과 같은 악을 완전히 제거하고 누룩 없는 진실한 신앙으로 거룩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바울이 본문 가운데서 누룩 없는 떡으로 명절(the feast)을 지키라고 요구한 것은 주일 공 예배와 연관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희생양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명절과 관련 지어진 것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다. 즉 그 유월절 양이 매주일 공 예배 가운데 떡과 포도주로 제공되는 것은 그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가운데서 세상의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을 방지해야 한다. 그 대신 순전하고 진실한 누룩 없는 떡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를 정결한 공동체로 세워나가야 된다. 바울은 여기서 죄악의 무서운 성격을 지적함과 동시에 교회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는 성찬의 본질적 의미를 말하고 있다.

 

 

4. 성도와 세상 (9, 10)

 

   사도바울은 본문 말씀 가운데서 타락한 이 세상에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에 관한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그는 음행 하는 자들에 대한 책망을 하면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성도들이 취해야 할 입장을 언급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동일한 음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본다고 할지라도 교회 안에 있는 자의 경우와 교회 밖에 있는 자의 경우를 달리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가까이 살고 있는 이웃인 불신자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는 자칫 하나님의 복음을 알게 되면 과거에 알던 세상의 모든 친구들과의 교제를 단절해야 하는 것처럼 여기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 자체로서는 결코 바람직한 생각이 아니다. 어쩔 수 없어 그렇게 된다 할지라도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성도의 자세라 할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을 모르는 친구들과 교제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논리라면 불신자인 부모형제들과도 교제를 끊어야 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도들에게 불신자들을 사귀는 행위를 중단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의 친구들과 어울려 희희낙낙(嬉嬉諾諾)해도 좋다는 의미가 아님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는 그들에게 참되고 진지한 삶의 본을 보이는 가운데 복음을 드러내야 함을 의미하고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교회에 속했다고 말하면서 더러운 음행에 빠지거나 악한 죄를 되풀이하는 자들과는 가까이 사귀지 말아야 한다. 그런 위선자들과는 성도의 교제를 끊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 가운데 음행을 행하며 남의 것을 탐하고 토색하는 자들, 그리고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 있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전히 저들을 이웃으로 두고 삶을 통한 선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그들의 악행을 용납해도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저들의 삶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 때문이다.

 

   만일 그런 자들을 아예 보지 않으려면 타락한 세상의 모든 것이 끝나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들로서는 결코 피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더럽고 음란한 세상에 살아가는 성도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온전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이런 형편 가운데서 성도들이 취해야 할 기본자세는 교회 내부에서는 철저하고 교회 밖에 대해서는 관대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물론 불신자들의 악행을 괜찮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의 악행 역시 용서될 수 없는 무서운 죄악임이 틀림없다. 단지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로서 불쌍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의 참된 삶을 보여주어야 한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간 민감한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주변의 미성숙한 성도들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앙이 어린 자들은 성숙한 성도들의 그런 행위를 보고 엉뚱한 오해를 할 수 있다. 따라서 전혀 예기치 않은 오해들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즉 신앙이 어린 교인들의 눈에는, 악행을 저지르는 불신자들과 의도적으로 멀리하지 않는 장성한 성도들의 일상적인 삶을 보며 마치 그것이 저들의 악행마저 용납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 미숙한 자들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외형만 볼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하나님께 저항하는 악한 자들은 그런 것을 악용해 악선전을 할 우려마저 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들은 항상 주변을 기억하는 가운데 그에 대한 민감한 자세로 대응하며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5. 거룩해야 할 교회 (11-13)

 

   하나님께서는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의 순결을 요구하고 계신다. 더러운 죄인들이 모여 있는 교회가 과연 거룩해 질 수 있는가? 만일 그것을 단순히 윤리적인 관점에서만 본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는 일이다.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라면 항상 더러운 죄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성도들에게 거룩한 삶을 영위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구약의 율법에서 그 점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신약시대의 사도들도 그와 동일한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바는 그것이 개별적으로 선택할 사항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도리어 교회는 마땅히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야만 한다. 타락한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이지만 그 속성은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 조화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이 거룩해야 함을 강조한다.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20: 2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17: 16-19);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 14,15)

 

   하나님께서는 모세 율법을 통해 자신의 백성들의 본질적인 속성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의 소유가 된 자들은 그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은 세상에 존재하는 더러운 것들을 그대로 용납하시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난 성도들을 자신의 소유로 삼으셨다.

   예수님께서도 죄로 오염된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기 자녀들이 진리로 거룩하게 되어야 함을 기도 중에 언급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존재인 자신이 악한 세상에 보냄을 받았듯이 이제 자기 자녀들을 거룩하게 해 세상에 보내신다는 사실을 밝히셨다. 이는 그들을 타락한 세상과 조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에서 신음하고 있는 택한 백성들을 불러내어 거룩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도 베드로 역시 이와 조화되는 동일한 교훈을 주고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욕망에 충실한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도 그전에는 그랬지만 이제는 삶의 본질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본받아 거룩한 삶을 살며 더 이상 세상의 악한 자들의 욕망에 가득 찬 삶을 따라 살지 않도록 요구했다.

   거룩함에 대한 이 모든 것들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품으로 말미암는다. 즉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의 거룩함에 참여함으로써 놀라운 은혜를 누리게 된다. 즉 지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교회가 거룩한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참된 교회 가운데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이 항상 내재하고 있다. 성도들은 타락한 세상에 살아가고 있지만 그의 몸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매주일 공 예배를 통해 시행되는 성찬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교회공동체는 물론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코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과 잘못된 관용주의로 위장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에서는 음행을 하거나 탐람한 자, 그리고 우상숭배를 하거나 욕을 하는 자, 술 취하거나 토색하는 자들이 용납될 수 없다. 그런 자들은 자기 자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며 더럽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교회 바깥사람들의 악행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민감하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교회 안의 형제라 하면서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면밀히 살펴 엄하게 대처해야만 한다. 그것은 교회의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바울은 그 점을 분명히 말했다.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 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 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고전5: 12,13)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불신자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시지만 교회 안에 있으면서 스스로 형제라 주장하는 자들의 악행은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의 거룩성을 온전히 지켜나갈 수 없다.

   이는 권징사역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문제로써 그에 온전히 대처하기 위해 교회는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교회가 말씀의 교훈에 따라 거룩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사악한 성품과 그에 영향을 받은 악한 사상이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고 있지 않은지 항상 민감하게 살펴야 한다. 이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매우 냉정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교회는 자신의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 철저한 자세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그런 자들이 있다면 엄중한 경고를 함으로써 회개의 자리에 앉게 해야 하며 말씀에 불순종할 경우 그를 교회로부터 출교해야 한다.

 

 

6. 간음과 살인

 

   고린도전서 5장에서는 음행 즉 간음한 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 시대는, 간음이 무서운 죄라는 사실이 점차 둔감화 되어가고 있는 매우 안타까운 세태에 처해있는 실정이다. 세상에서 그런 악한 풍조가 일반화하게 됨으로써 교회 안에 마저 그런 더러운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인간들에게 있어서 간음은 역사 가운데 항상 문제가 되어 왔다. 그것이 우리 시대에 와서는 더욱 노골화되기에 이르렀다.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잘못된 인간화(人間化) 작업이다. 현대인들에게는, 모든 인간이 자기의 성을 즐길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식의 이상한 논리가 통념화 되어 있다.

   그런 위태로운 사고의 파급은 타락한 예술과 문학에 맞물려 있다. 세속주의자들은 표현의 자유를 중시한다. 인간은 무엇이든지 예술적으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문제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소설과 영화 등을 비롯한 다양한 양식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런 식의 헛된 주장을 하는 자들은 그들의 왜곡된 자유가, 그것을 피하고자 하는 이들의 기본적인 자유를 빼앗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자유만 내세울 뿐 다른 사람들의 순수한 자유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런 더러운 표현들로부터 방해 받지 않고 자기 인생을 지키며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한다면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예를 들어 도시의 길거리 여기저기에 나붙어있는 음란한 영화포스트는 그에 대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길거리에 음란한 광고를 하면서 보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는 식이다. 가정에서 방영되는 텔레비전 연속극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음란한 내용물들을 방영하면서 싫으면 보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고 억지를 부린다.

   우리시대에는 이런 식으로 음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점차 허물어져 가고 있다. 대중매체가 음란한 내용을 예술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사람들의 사고를 파괴하고 있을 때 진정으로 고귀해야 할 성에 대한 존엄성은 파괴되어 간다. 인간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음란에 대해 점차 무디어져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는 그런 악영향이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에 속한 성도들에게도 강하게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의 음란한 문화는 거룩하고 경건해야 할 성도들의 삶을 강하게 위협한다. 그것은 결국 지상의 교회를 나약하게 만들며 세속화된 분위기에 휩싸이게 만들어 간다.

   우리는 매우 위험한 세태 가운데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음란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 저항하는 무서운 죄악이다. 세상 사람들이 보아 실정법에 저촉이 되지 않는다 해도 그 가운데는 음란한 내용들이 가득하다. 이는 마치 우리 주변 여기저기에 가득 널려있는 무서운 지뢰밭을 연상케 한다.

   우리가 날마다 눈과 귀를 통해 접하고 있는 다양한 매체의 정보들 가운데는 음란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런 것들을 보며 민망해하고 당혹스러워 해야 할 우리가 현세에 적응해 아무렇지 않은 듯 무디어져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는 소위 미성년자들이 듣고 보기에 음란의 정도가 심한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성인들이 보기에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여기고 있는 내용들 가운데 과거에 살았던 경건한 믿음의 선배들이 본다면 깜짝 놀랄만한 내용이 많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그러한 현실적 분위기는 음란한 사고를 강하게 부추길 수밖에 없다. 그것은 결국 더러운 간음의 길로 접어들게 한다. 간음은 어떤 경우에도 무서운 죄악이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이미 웬만한 행동은 간음이 아니라 생각하는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예를 들어 혼인하지 않는 남녀청년들이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서로 손을 잡는 행위는 엄연한 간음인데도 불구하고 대개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필자의 이런 소리를 듣는 대다수 현대인들은 비웃을 것이 틀림없다.

   비록 구체적인 성관계가 없다고 해도 그것은 더러운 간음행위이다. 부부가 아닌 사람들끼리 서로 손을 잡고 애정을 나누며 키스를 하는 행위는 사랑을 가장한 음행이다. 장래 다른 사람의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될 이성과 남몰래 은밀한 사랑을 나눈다면 부정한 죄악이 아니고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이라 선전해도 그것이 무서운 죄악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복된 자들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는, 미혼 청년들이 서로 사랑하면 손을 잡는 정도는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나아가 성행위를 한다고 해도 서로 사랑한다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위태로운 분위기가 거룩한 하나님의 몸 된 교회 안으로 막무가내 밀려 들어와도 교회 지도자들은 그에 대한 아무런 염려가 없는듯하다. 영적으로 어린아이 같이 미숙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벌써 그에 대해 완전히 둔감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명확하게 기억해야 할 바는 간음이 살인보다 오히려 더 무서운 죄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가정을 가진 사람과의 간음은 더욱 무서운 범죄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는 간음이 곧 한 가정을 파괴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한 개인을 살해하는 살인자의 행위보다 더욱 무서운 범죄는 다른 사람의 한 가정을 파괴하며 살해하는 것이다. 간음은 이웃의 가정을 파괴하는 끔찍한 악행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누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살인을 방조할 것인가? 누가 한 가정을 파괴하는 간음행위를 방조할 것인가? 거룩해야 할 하나님의 교회는 결코 그런 사악한 범죄행위를 가볍게 생각하거나 용납해서는 안 된다.

 

 

7. 교회와 권징사역

 

   이 세상에는 교회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종교단체들이 무수히 많이 있다. 그들은 매주일 특별히 마련된 종교시설에서 정기적인 집회를 가진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이 모이는 단체가 진정한 교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람들은 흔히 목사와 장로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고 정기적인 종교집회를 하며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설교와 찬송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교회라 생각한다. 나아가 주일학교라는 모임과 기독교식의 기도를 하면 교회인 것으로 믿는다. 심지어는 건물 꼭대기에 십자가가 걸려있거나 집회장 내부에 찬송가를 부르기에 필요한 보조기구인 피아노가 있고 십자가 형태의 장식물이 있으면 교회라 의심하지 않는다.

   과연 그럴까? 위에 있는 내용들을 전부 충족시킨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교회라 할 수 없다. 교회가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이기 위해서는 교회로서 마땅히 소유해야 할 표지가 있어야 한다. 교회의 표지는 형식상의 목사나 장로가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며, 십자가가 달린 건물이나 찬송가 소리와 기도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는 여부를 말하지 않는다.

참된 교회에는 올바른 말씀선포와 참된 성례의 시행, 그리고 정당한 권징사역이 있어야 한다. 마땅히 있어야 할 그 표지들이 없다면 외견상 교회처럼 보일지라도 거짓교회일 따름이다. 아무리 순수하고 착한 사람들이 모이며 정직한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교회의 참된 표지가 없다면 그 모임을 진정한 교회라 칭할 수 없다. 그런 단체는 무지한 사람들을 기만하게 되어 도리어 매우 위험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표지를 보지 않고 외형을 보며 좋은 교회인 것으로 착각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시대 교회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진정한 권징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교권을 차지하기 위해 눈에 거슬리는 자들을 쳐내는 만용을 행사하고 있지만 참된 권징은 시행하지 않는다. 교회 내에 인본적인 파당과 잘못된 계급주의가 형성되어 있다면 성경에서 요구하는 권징이 원활하게 시행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 가운데는 권징사역이 마땅히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그 점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이 있는 반석위에 세워진 교회에 관한 언급을 하시면서 권징의 중요성과 그 효력에 대한 교훈을 주셨던 것이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6: 18,19)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베드로를 통해 교회에 천국열쇠를 주셨다. 그것은 교회 가운데서 권징을 시행할 수 있는 막강한 권세이다. 사도들로 말미암아 세워지게 되는 교회가 지니는 권세는 실로 엄청난 것이다. 이는 사도들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의 교회는 타락한 세상에 맞서 싸워 이기고 승리하게 된다. 따라서 음부의 권세가 결코 교회를 궁극적으로 해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 허락하신 천국열쇠를 가지고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게 되며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게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교회는 항상 그 천국열쇠를 잘 보존해야 하며 필요할 경우 항상 그것을 적절하게 사용해야만 한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서는 그 열쇠를 제대로 보존하지 못했으며 정당하게 사용하지 않았다. 즉 고린도교회는 더러운 음행에 빠진 자에 대해 정당한 권징을 시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그들 나름대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그 이유가 권징을 시행하지 않은데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지 못한다.

   권징을 시행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이다. 즉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는 것이 권징시행의 본질적인 중요한 목적이다. 따라서 권징의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히 범죄에 빠진 자를 책망하고 벌 주려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그런 자를 징계함으로써 본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또한 그것을 통해 나머지 모든 성도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과 신앙을 유지하도록 한다.

   만일 교회가 악을 행한 자를 권징하지 않는다면 거룩성을 상실한 그 교회 자체가 징계의 대상이 된다. 고린도교회의 경우 범죄한 당사자와 그의 악행을 방관한 성도들뿐 아니라 전체 교회가 사도들의 권징의 대상이 되었다. 바울이 그들을 강하게 책망하며 질책하는 것은 표지를 상실한 교회에 대한 권징사역의 일환이다. 오늘날 우리가 속한 교회는 사도들의 권징의 대상이 되어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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