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목회자 일까요?

나는 어떤 장로 일까요?

나는 어떤 집사일까요?

나는 어떤 성도 일까요?

 

2 4-8: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베푸셔서 그대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하심과 너그러우심과 오래 참으심을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그대는 완고하여 회개할 마음이 없으니,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 나타날 진노의 날에 자기가 받을 진노를 스스로 쌓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 사람에게 그가 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참으면서 선한 일을 하여 영광과 존귀와 불멸의 것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쏟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잊고 살지만 하나님께서는 죄를 심판하십니다.

우리 고민해 봅시다.

 

주안에서

서성필.

 

 

 

5, 교회와 하나님 나라(고전4: 1-21)

 

 

 

1. 사도직분의 성격 (1)

 

(1) 그리스도의 일군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41절 본문에서 우리라는 말을 통해 자기를 비롯한 사도들을 그리스도의 일군이라 칭하고 있다. 이 말은 그들이 누구를 위해 일하는 자들인가 하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즉 그들은 개인적인 목적을 두고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순종함으로써 수행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신실한 믿음의 선배들이 하나님의 참된 일군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명령에 온전히 순종한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신령한 일을 뒤로 하고 개인의 사사로운 종교적인 목적을 추구하거나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일을 전개해나간다고 하면 결코 성실한 일군이라 할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오늘날 우리 시대에 있어서도 그와 동일한 적용이 가능하다. 지금도 교회에서 다양한 직분들을 맡고 있는 자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맡은 일군이라는 말을 한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신령한 일을 맡기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말로만 끝나게 될 성질이 아니다. 그에 대한 실제적인 적용이 없다면 위험한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핑계대면서 신앙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자기가 원하는 종교적인 활동을 전개하거나 개인적인 목적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여간 잘못된 일이 아니다. 이는 일반적인 신앙생활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직분에 대한 잘못된 적용에 연관된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참된 일군이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도를 핑계 댄 종교사업가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을 핑계 대면서 개인적인 유익을 도모하는 일이 얼마나 악한 행위인가 하는 점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2)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바울은 또한 사도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맡은 자들이란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비밀은 절대적인 내용으로서 아무렇게나 이 세상에 누설되지 않는다. 그 비밀은 사도들의 사역에 의해 마땅히 알아야 할 성도들에게 비밀리에 전달된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바 비밀이란 매우 중요한 내용을 소유하고 있다. 특별한 의미가 없고 보잘것없는 내용이라면 그것을 굳이 비밀이라 말할 이유가 없다. 반드시 지켜야만 할 소중한 내용이 아니라면 구태여 그것을 비밀이라며 주의 깊게 간수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이와 연관된 의미를 그의 여러 서신들에서 언급하고 있다(3: 4; 6:19; 1: 25-27; 딤전3: 16). 특히 골로새교회에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그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교회의 일군이 된 의미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비밀과 연관 지어 설명했다. 그 비밀은 창세전부터 예언되어 세상에서는 비밀로 감추진 내용으로서, 그 핵심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교회 가운데 존재하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1: 25-27)

 

   타락한 세상에 대한 심판주가 되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은 창세기 315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에게 허락하신 은혜의 본질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소망의 근거가 되지만 나머지 인간들에게는 심판의 근거가 된다.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특별히 약속된 비밀인 그 놀라운 영광의 소망이 지상의 교회 가운데 허락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몸 된 교회가 소유한 이 놀랍고 신비로운 비밀과 그에 따른 의미는 교회의 존재의미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성도들은 교회에 속해 그 비밀을 공유하게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그 비밀은 교회와 그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주의를 기울여 잘 간직해야만 할 보배로운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비밀의 누설비밀의 전달이 가지는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비밀의 누설은 왜곡된 채 외부로 잘못 전해질 가능성이 많다. 그것은 유언비어가 되어 종교적인 여론이 형성될 수 있으며 비밀의 내용이 변질되어 전혀 다른 형태로 알려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된 하나님의 복음은 무책임하게 아무렇게나 누설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도들과 직분 자들에 의해 교회 가운데 정확하게 전달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비밀은 성도들에게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으면 안 된다. 비밀의 내용과 그 의미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다면 성도들은 신학적인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해 신앙자체를 오해할 우려를 낳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가 이 세상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복음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비밀은 타락한 세상에서는 철저히 감추어져 있으며 자연인으로서는 결단코 자력으로 그것을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비밀로 인해 설령 이 세상에서 견디기 어려운 환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당당히 살아가게 된다.

 

 

2.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 (2)

 

   사도바울은,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는 충성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직분 자들이 자신의 뜻에 따라 신실한 충성을 다하고 있는지 살피신다. 이는 소중한 직분을 맡기신 하나님의 뜻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함을 의미한다. 물론 이 말은 일차적으로 사도 직에 관한 언급으로써 사람들의 종교적인 취향이나 기호에 맞추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한다. 한편 간교한 자들은 개인적인 성공이나 명예를 위해 충성을 가장해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해 열심히 활동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진정으로 충성된 사람들은 자기의 목적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섬겨야 할 자 때문에 충성을 다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의 기본 요건에 관한 언급을 하셨다. 누구든지 자기를 따르고자 하는 자라면 반드시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의 자기 삶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는 인간적인 판단을 배제해야 하는 의미가 들어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앞으로 임하게 될 십자가 사역에 관한 언급을 하셨다. 이제 멀지 않아 자신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대인 지도자들에 의해 고난을 당한 후 죽임을 당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예언하셨던 것이다. 물론 그 후 부활을 통한 승리가 있으리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의 귀에는 그의 비참한 죽음에 관한 예언의 말씀만 크게 들렸을 따름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앞으로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다. 그것은 무슨 한이 있어도 그 일을 막겠다는 인간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했던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강하게 책망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자기를 따를 수 있는 기본 요건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16: 23-25)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의리와 충성심을 배경으로 하여 진정으로 말했을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반응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셨다. 그래야만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으며 참된 충성을 다할 수 있음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인간들의 이성에 기초한 충성심 자체에는 아무런 보장성이 없다. 그것은 또 다른 인간적인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자들은 어려움이나 위기가 닥치면 더 이상 충성을 지속하지 않는다. 이는 자기에게 실질적인 유익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종교를 앞세운 저들의 개인적인 목적일 따름이다.

   그렇지만 진실로 충성을 다하는 자들은 인간적인 판단에 따른 자기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에게 엄청난 손실이 생긴다 해도 성경의 교훈에 따라 마땅히 행해야 할 바 도리를 실천한다. 설령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아야 할 위태로운 지경에 놓인다 할지라도 여전히 충성스런 의무를 다하게 되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요구한 것은 바로 그런 충성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특별히 세움을 받은 직분 자들은 충성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소중한 직분들을 맡기신 것은 저들의 개인적인 성공이나 이 세상에서의 평안한 삶을 허락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의 성취와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그 점을 확인하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분을 부여 받은 성도들은 평안하고 안락한 형편 가운데서가 아니라 무서운 시험과 모진 환난이 닥친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해야 함을 언급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2: 10)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결코 이 세상에서의 만족스럽고 화려한 삶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하지 않으셨다. 도리어 악한 세상에서는 견디기 어려운 무서운 고난이 닥칠 수 있음을 예언하셨다. 이는 사탄이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중요한 사명을 부여 받은 성도들이라면 고통 가운데서라도 그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요한은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지상교회의 앞날에는 넘치는 평화가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견디기 힘든 위기가 이르게 되리라는 사실을 언급했던 것이다.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성도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교회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 의해 엄청난 환난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환난의 기간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한정된 기간 동안만 진행된다. 그 사실을 알기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의 핍박을 크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현실적으로 공포분위기가 조성되고 엄청나게 고통스런 일을 겪게 되지만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능히 이겨낼 수 있게 된다.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부여 받은 성도들이라면 견디기 어려운 박해 가운데 처한다 할지라도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해야 함을 언급했다. 그것은 주변의 환경에 구애됨이 없이, 맡겨진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함을 말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을 허락하시게 되는 것이다.

 

 

3.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3-5)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충성을 언급하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판단 받는 문제에 대한 기록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이 말을 매우 주의 깊게 이해해야 한다. 이는 일반적인 사실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사도 직에 연관되는 문제로 보이기 때문이다. 즉 당시 고린도를 비롯한 주변 지역에는 잘못된 종교적 취향으로 인해 바울의 사도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판단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교회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과 그의 뜻이 중요할 뿐 악한 인간들의 말과 주장에 그렇게 민감한 반응을 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바울은 자기 자신도 스스로 자기를 판단하는 행위를 하지 않음을 강조했다. 이는 그의 교훈이 인간적인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자책(自責)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는 그의 일반적인 삶과 행위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니다. 즉 그가 아무런 허물이 없는 완벽한 삶을 살고 있음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바울이 그 언급을 한 것은 자기의 사도적 언행을 두고 하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사도로서 교회에서 말씀을 선포하고 진리를 증거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잘못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바울처럼 자책할 것이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우리 중에 누가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인간적인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타락한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은 예외 없이 더러운 죄인일 수밖에 없다. 바울은 이 세상에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에 대한 분명한 언급을 하고 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3: 9-18)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든 인간들은 예외 없이 무서운 죄의 굴레에 갇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죄인들은 항상 더러운 욕망에 가득 차 있으며 악을 행하기에 여념이 없다. 죄에 빠진 인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타락한 본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 모든 인간들이 더러운 죄인일진대 바울만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비록 사도로서 자책할만한 것이 전혀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아님을 말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에 참여하게 된 자신에 대해 의롭다고 인정해 주실 분은 오직 주님 한 분 이시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인간들의 판단이나 승인여부가 악한 인간들을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의를 내세워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는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고 당부했다. 이는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사안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성경의 교훈에 따라 세상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은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을 마땅해 행해야 할 일이다.

   나아가 우리는,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고전4: 5)고 말한 사도바울의 언급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77:1)고 하신 말씀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고 당부한 것은 자신의 사도성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품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종국에 가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어두움에 감추어져 있는 모든 것들을 드러내시고 자신의 거룩한 뜻을 만천하에 나타내신다. 그 동안 사도들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 가운데서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스런 칭찬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4.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6)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말씀은 절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결코 상대적이지 않다. 그 말씀은 타락한 이 세상에서 생성된 것이 아니며 지상의 교회에서 양산되지도 않았다. 즉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세상의 역사적 산물이 아닐 뿐 더러 역사 가운데 존재했던 교회로부터 만들어진 산물도 아닌 것이다.

   바울은 자기와 아볼로가 고린도교회에 본을 보였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 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일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에 관한 것을 의미하고 있을까?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런 식의 본이라면 비록 바울이 아니어도 윤리적으로 본을 보일만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바울이 언급한 것은 자신과 아볼로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의 본을 보인 사실과 연관된다. 바울과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밖에 넘어가지 않도록 당부했다. 그리고 그들 자신이 먼저 그에 대한 본을 보였다.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이 자신과 아볼로를 통해 그 중요한 교훈을 이미 배웠다고 말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기억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교회와 세상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말씀이, 참된 지혜와 세상의 지혜 사이에 경계가 됨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둘째는 말씀 안에 있는 성도들이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잘못된 마음을 먹지 않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만 그 기초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경계가 되어 같은 편에 서있으면 서로 대적할 일이 없으며 교만한 마음을 먹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5. 진정한 왕 (7-13)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상으로부터 구별해 내신 특별한 공동체이다. 이는 인간들의 종교적 판단에 따라 결성된 신앙조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자기 자녀들을 위해 작정하신 뜻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됨으로써 그 모임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그 교회가 누구에게 속했는지 다시금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참된 것들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말했다. 그리하여 모든 진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받았으면서도 마치 스스로 가진 것인 양 자랑하고 있는 어리석은 자들을 강하게 책망하고 있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스스로 만족스러워하며 부자가 되어 군림하려는 잘못된 종교지도자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는 신앙이 어린아이 같은 지도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어린 성도들 위에서 권세를 누리며 마치 왕처럼 행세했다. 바울은 그런 자들에 대해 우리 없이왕 노릇 한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고전4:8). 이는 그들이 사도들의 교훈을 무시하고 교회를 정치적인 조직과 유사한 기관으로 변질시켜 버렸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이 그런 잘못된 방식에서 벗어나 진정한 왕의 권위를 소유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올바른 권위를 가짐으로써 사도들의 가르침 또한 왕적인 권위를 유지하게 된다. 직분 자들이 참된 권위를 소유하게 될 때 그것을 통해 사도들이 전한 교훈이 교회 가운데서 진정한 권위를 회복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고린도교회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교회 내부에 잘못된 권위주의가 팽배해 있었던 것이다. 신앙이 어린아이 같은 지도자들은 권위주의적인 태도로 어리석은 교인들 위에 통치자처럼 군림했다. 그들은 교인들을 이용해 부유한 삶을 누렸으며, 구약시대의 악한 종교인들이 그랬듯이 신앙을 구실삼아 감히 하나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세를 행사했다.

   그에 비해 당시 사도들은 악한 세상으로부터 엄청난 시련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그 정도가, 마치 하나님께서 사도인 저들을 죽이기로 작정한 것 같은 최악의 고통스런 자리에 내몰렸음을 말했다. 그러므로 저들은 하나님을 배신한 세상과 그에 속한 천사들 및 불신자들의 눈에 구경거리와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은, 과연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그에게 충성하는 자들이 왜 그런 고통을 당하느냐며 비아냥거렸을 것이 틀림없다. 악한 자들은 그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그와 동일한 조소(嘲笑)를 보냈다. 사탄은 고통에 처해 있는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뭘 그런 고생을 하느냐며 비아냥댔으며(4: 3,6,9), 배도 자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고통 당하지 말고 그곳에서 뛰어 내려오라고 조롱했다(27: 40).

사도들 역시 엄청난 고생을 감내하면서 그와 같은 조롱과 비아냥 소리를 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사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자들처럼 엄청난 고난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형편이 얼마나 힘든 삶인지 고린도교회의 지도자들의 형편과 비교하며 그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고전4: 10-13)

 

   우리는 바울의 고백을 통해 사도들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큰 고통을 당했는지 짐작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 같았으면 과연 그와 같은 끔찍한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을까? 사도들은 연약하고 비천한자처럼 되어서 헐벗고 매맞으며 핍박을 당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늘 그런 위태로운 분위기 가운데 살아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세상에서조차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인간들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 반해 고린도교회의 악한 지도자들은 그와 전혀 다른 부요한 삶을 살았다. 그들은 교인들 앞에서 마치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로운 자인 양 선전하며 행세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배부르게 살면서 스스로 강하고 존귀한 자임을 내세웠다(고전4: 10). 그들은 저들의 풍요로운 삶이 마치 하나님의 축복인 양 자랑하며 교인들을 기만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시대의 교회 지도자들은 과연 어떤가? 세상의 것들을 내세우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양 자랑하며 어린 교인들 위에 왕처럼 군림하려 하지는 않는가?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대단한 권세라도 부여 받은 듯 왕 노릇 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만일 우리가 그런 불손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사도들을 비롯한 참된 믿음의 선배들을 모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배불리 먹고 부유하게 사는 것을 두고 하나님의 축복이라 주장한다면 그렇게 살지 못하고 헐벗은 채 모진 고통을 당했던 믿음의 선배들을 하나님의 축복과 아무런 상관이 없이 살았던 사람들로 몰아 부치는 꼴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한히 겸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이라 자처하는 직분 자들은 더욱 그렇다. 하나님의 몸 된 교회 가운데서 권세를 행하거나 성도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자들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우리가 처한 시대적 환경으로 말미암아 배불리 먹고 살아간다면 그나마 자랑스러워할 것이 아니라 과거 믿음의 선배들과 현재 환경이 열악한 가운데 살아가는 형제들을 기억하는 가운데 겸손한 자세로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어야만 한다.

 

6. 나를 본받는 자 되라 (14-17)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지도자들을 책망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는 단순히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저들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기 위한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 도리어 사랑하는 자녀를 애틋하게 권면하는 심정으로 저들의 잘못된 삶을 돌이키고자 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instructers)이 있으되 아버지(fathers)는 많지 않다고 언급했다(고전4: 15). 그러면서 자신은 단순한 저들의 스승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써 저들을 낳은 부모라는 사실을 말했다.

   그렇다면 스승과 부모는 어떻게 다른가? 스승(instructer)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지시하며 인도하는 일을 한다. 지식전달과 더불어 훈련을 시키게 된다. 이에 비해 부모는 자식이 올바른 삶을 사는 인간이 되기를 바란다. 부모는 자식이 잘못된 길로 접어들게 되면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책망하기도 하고 권면하기도 한다.

   바울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자기는 고린도교회를 위한 스승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있음을 말했다. 나아가 교회 안에서 가르치기에 열중하며 스승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많이 볼 수 있는데 반해 애틋한 부모의 심정을 가진 자들이 많지 않음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런 부모의 심정을 가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자신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했다. 이는 사실 기독교교육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세속주의 교육학에서는 자녀를 잘 양육하기 위해 부모들이 많은 조건들을 제공하도록 요구한다. 학비를 마련해주기도 하며 양질의 교육을 위한 좋은 환경을 마련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식을 위해 이것저것 모든 것을 해주며 아낌없는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성도들의 자녀를 위한 기본적인 교육 자세는 그런 것이 아니다. 사도바울이 언급한 것처럼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가 자녀들의 본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즉 성숙한 신앙을 가진 부모는 자녀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주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자녀가 유아세례교인일 경우 교회에 입교할 때까지, 그리고 혼인을 하거나 독립해서 살아갈만한 연령이 될 때까지 부모는 자녀에게 본을 보이며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모가 자식을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여러 가지 좋은 조건과 환경을 일방적으로 제공한다면 그것은 도리어 위험할 수 있다. 이는 그것이 마치 자식을 위한 투자인 것처럼 생각할 우려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투자에 대한 성공과 실패가 나누어지며 나중 자녀에게 필요 이상의 것을 요구하게 될지 모른다. 또한 자식이 소위 성공하는 자리에 이르기라도 하면 무언중에 그에 대한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게 된다.

   우리는 이에 대한 내용을 통해 교회적으로 이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교회의 직분 자들은 아직 어린 성도들을 위한 본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세례를 받은 부모인 성도들은 유아세례 교인인 아이들은 물론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어린 성도들의 신앙적인 본이 되어야만 한다. 어린 성도들이 비뚤게 자란다면 이는 전적으로 어른들이 잘못된 본을 보인 까닭이다. 이 얼마나 무거운 책임인가!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의 사랑하는 영적인 아들 디모데를 그들에게 보낸다고 말했다. 디모데는 아마도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를 저들에게 전달했을 것으로 보인다(고전4:17). 바울은 그가 도착하게 되면 자신이 그전에 여러 교회들을 방문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치고 교훈한 내용들을 기억나게 할 것이라고 했다. 사도바울의 언행(言行)이 일치하는 신앙적인 삶이 그들에게 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7. 하나님 나라의 속성과 교회 (18-21)

 

   고린도교회 가운데는 사도들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교만에 빠진 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 자들은 두 번 다시 사도들을 보지 않아도 될 것처럼 행세했다. 이는 사도들을 멸시하는 것이며 그들을 교회 가운데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조만간 그들에게 가서 실상을 알아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마저도 자기 마음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가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이는 사도들의 신실한 신앙자세와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는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의 오만한 태도가 크게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바울은 자기가 저들에게 나아가게 되면 그들의 모든 실상을 알아보겠노라고 강조해 말했다.

   바울은 교회에서 권세를 누리며 군림하는 교만한 자들의 이 아니라 저들의 능력을 확인해보겠다고 했다. 그들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은 저들의 교활한 주장을 듣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쉽게 반성하고 뉘우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다는 말을 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

 

   바울이 본문에서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 말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 여기서 말하는 능력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고 있을까? 과연 은사주의자들이나 신비주의자들처럼 일상적이지 않은 종교적인 기적을 행하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일까? 물론 그런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능력이란 곧 세력(power)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 나라는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적자들을 제어하는 신령한 세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참된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이라면 세상을 능히 이길 수 있는 세력을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타락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면서 세상에 승리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그런 능력 곧 세력을 갖추고 있는지 확인하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물론 바울은 이미 그들에게 그 능력이 매우 약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를 향해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면서 매를 가지고 나아갈지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갈지 물었다. 즉 매를 맞기 원하지 않는다면 속히 잘못된 태도를 뉘우치고 고쳐 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함으로써 교회의 원 모습을 회복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해 내가 너희에게 매를 가지고 나아갈까라고 한 말은 오늘날 우리도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다. 우리에게는 과연 사도들의 매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가? 우리는 항상 우리가 잘못할 때 매를 들고 가겠다고 한 사도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잘못된 점이 발견되는 순간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교정함으로써 교회를 온전히 세워가려는 자세를 유지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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