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신을 속이는 행동만큼 미련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내가 자신을 속이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하게 여기시고 저를 주님의 길로 있게 인도해 주십시오.

 

주안에서

서성필.

 

 

 

 

4, 하나님의 밭,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고전3: 1-23)

 

 

 

1. 육신에 속한 어린아이 같은 자들 (1-9)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들은 항상 자기중심적이다. 이는 남을 배려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아이들은 모든 것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려 한다. 그래서 즉각적인 반응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금만 좋으면 모든 것이 자기 세상이라도 되는 양 여기고 조금만 힘들면 낙심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어린아이들은 음식을 씹어 삼키는 능력이 부족하며 소화력도 약하다. 아무리 건강에 좋은 귀한 음식이라 할지라도 아이들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씹어 먹을 수 없다. 도리어 어른들에게 좋은 식품이라 해서 아이들에게 그것을 억지로 먹이게 되면 소화불량에 걸릴 우려가 있다.

   그리하여 소화를 제대로 시켜내지 못하게 되면 음식으로 인해 유익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심각한 손해를 보게 된다. 건강을 위해 먹는 음식이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물론 음식물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단한 음식을 씹어 삼킬 수 없고 소화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점차 성장해 가야 한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영적으로 성장해 가지 않은 안타까운 사실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그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여전히 어린아이들과 같다고 지적했다. 그들을 성숙한 성도인 신령한 자들(spiritual men)을 대하는 것 같이 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고전3: 1). 여기서 말하는 신령한 자들이란 영적인 사람이라는 의미로서 성령 하나님께 온전히 속한 성도들(Holy Spiritual men)을 지칭한다.

   이는 결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종교적인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겉보기에 종교성이 풍부하게 보이는 자들 가운데 도리어 진정한 영적인 인물이 아닌 경우가 많다. 고린도 교회에는 그런 인물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육신에 속한 자와 같이 대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과거 고린도에서 그들과 함께 거할 때 저들에게 영적으로 단단한 밥을 먹이지 않고 부드러운 젖으로 먹였다. 그들이 밥을 먹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상당한 세월이 흘렀으면 이제 그들은 밥을 먹을 만큼 성장해 있어야 했다. 그것이 자연스런 성장과정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미숙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으며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라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단순히 개별 성도들에게 국한된 문제라기보다 교회적인 의미임을 주의 깊게 이해해야 한다. 물론 개인 성도들은 교회가 온전히 성장해 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에 참여하게 된다. 다시 말해 교회가 올바르게 성장해가지 않은 상태에서 개별 성도들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없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이해해야 할 바는 신앙성장이라는 말이 종교적인 경험의 축적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목사, 장로, 집사 등의 직분을 가지고 수십 년간 교회에 다녔다는 경력이나 연령 따위가 신앙성장을 보증하지 않는다.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어 오랜 세월 동안 종교적인 일에 열정적으로 가담했다고 할지라도 신앙이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은 얼마든지 많이 있다. 도리어 영적으로 어린아이면서도 마치 어른인 양 행세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중요한 사실은 신앙의 성장은 일차적으로 교회공동체에 연관된다는 점이다. 즉 성숙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그 성숙함에 참여하게 될 것이며, 미숙한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겉보기에 어떤 모습을 띠고 있든지 간에 영적인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다. 성숙한 교회에 속하지 않은 성숙한 교인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미숙함이 인간적인 지혜와 판단에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와 더불어 말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인본적인 이성과 경험에 의존하게 하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보다 주관적인 신앙에 얽매이도록 한다. 그러한 신앙은 교회 내부에서 자기중심적인 불건전한 파당을 일으키게 된다. 바울은 그런 형태의 신앙적인 삶을 육신에 속한 것이라 지적하고 있다.

   성경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종교적인 판단에 의존하는 자들은 저마다 자신의 주장에 따른 시기와 분쟁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고전3: 3). 이성과 경험을 중심으로 한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면서도 육신에 속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이 소유한 세상의 지혜를 따라 사고하며 행동하는 것을 당연한 듯이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런 미숙한 신앙을 소유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저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라고 하는 주관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사고 자체가 전적으로 잘못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결같이 자기가 옳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 안에서는 결코 그런 파당들이 존재해서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참된 교회 안에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아 다른 성도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인물이 아무도 없다. 이는 한 가정 안에서 불평등한 차등대우가 있을 수 없는 것과 유사한 이치이다. 물론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서로 간 존중하며 진솔한 삶을 나누는 것은 반드시 있어야 할 소중한 일이다. 그렇지만 인간적인 판단과 편견에 따라 특정 개인을 높이려는 행위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사도바울은 그런 양상을 보이고 있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강하게 질책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발견해야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완벽하게 증거하는 사도들마저 특별히 높임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조차도 자신을 특별히 높이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경계했는데 그 이외의 사람들에 대해서야 두말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교회 가운데 성도들 상호간에 서로 존중하는 의미를 넘어 특정한 개인을 구분하여 높이는 일은 근절되어야 한다. 과거에 살았던 훌륭한 믿음의 선배들조차도 교회 안에서 특별히 인정받는 영웅이 될 수 없다. 하물며 이 세상에 살아있는 유명한 자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사도바울은 그 점을 분명히 설명하기 위해 바울과 아볼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전한 하나님과 그의 복음이 중요함을 강조해 말하고 있다. 즉 바울과 아볼로가 교회에서 높임을 받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을 맡겨 보내신 사역 자들일 따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 가운데 허락된 직분과 은사에 따른 성도들의 개별적인 역할마저 무시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성도들이 전부 동일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제각각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사대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 사도들의 직임에 있어서도 그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바울은 그에 대해, 자신은 심었으며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 전에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하면서 사도 직에 있어서도 각각 은사적 특성이 있음을 말한 적이 있다. 베드로는 유대인을 위한 사도이며 자신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는 사도들의 사역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지는 순종의 사역임을 보여주고 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2: 8,9)

 

   성도들의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최종적인 모든 일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달려있다. 베드로를 유대인의 사도로 삼으시고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신 분께서는 하나님이시다. 즉 베드로와 바울이 저들의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스스로 그렇게 결정하지 않았다. 사도들은 저들에게 허락되고 요구된 사역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이 또다시 은사에 따른 다양한 역할이 있음을 말했던 것은 인간이 높임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심은 자와 물주는 자는 다르지만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심을 언급했다. 바울은 여기서 심은 자와 물주는 자에게 공로가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아무런 공로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과 아볼로 같은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수종 드는 사역 자들이다. 그들 사이에 누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다는 차별 개념은 없다. 그들은 제각각 자기의 봉사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을 받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이란 삯을 받게 됨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상(prize)이 아니라 보상(reward)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 자들이 궁극적으로 받게 되는 신령한 보상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 (9-17)

 

  사도바울은 이제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에 관한 언급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교회가 어떻게 지상에 세워지며 자라가야 하는지 말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점은 교회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동역자들에 의해 세워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3: 9)

 

   바울은 사도들을 하나님의 동역자(God's fellow workers)라 표현하고 있다(고전3: 9). 그는, 개인이 아니라 복수의 의미를 지닌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임을 밝혔다. 여기서 우리란 말은 좁게는 바울과 바나바를 지칭하고 있으며, 넓게는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여러 사도들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은 위 본문 가운데서 우리너희를 분명히 구분 짓고 있다. 우리가 이 말씀 가운데서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할 바는 바울이 말한 우리라는 용어가 오늘날 우리시대의 모든 직분자들을 직접 포함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이다.

   따라서 바울이 언급한 우리란 말은 제한적인 의미로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사도들로 이해해야 하며 그 이후 시대의 모든 직분자들을 직접 일컫지 않는다. 즉 보편교회 시대의 교사 직분자로 세워진 목사들은, 바울이 말한 직접적인 하나님의 동역자라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사도교회 시대 이후에 세워진 목사들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동역자에 연관된 영적이며 정신적인 의미를 상속받는 가운데서 허락된 직분을 감당해야만 한다.

   사도바울은 또한 고린도 교회를 향해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라 언급했다(고전3: 9). 이는 비단 고린도교회 뿐 아니라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참된 교회들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을 비롯한 모든 사도들은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서 일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었던 것이다. 이는 사도들의 사역이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 가운데도 여전히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교회를 설립한 지혜로운 건축자로 묘사하고 있다. 우리가 각별히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교회를 세워가는 건축자로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것은 인간적인 지혜와 경험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다.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어 교회의 터를 닦아두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터 위에, 역사 가운데 살아가는 여러 성도들이 영전인 구조물들을 건립해 나가게 된다. 하지만 사도들이 닦은 터 위에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아무렇게나 건물을 세우려 해서는 안 된다.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깊은 주의를 기울여 신중하게 건축해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몸 된 교회의 터는 아무나 닦을 수 없으며 닦으려 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오직 사도들이 감당해야 할 사역이다. 바울은 그 터가 십자가 사역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고 있음을 밝혔다. 이 말은 교회의 기초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해석이 사도들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 대한 성경적인 증거가 곧 교회의 기본적인 터가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교회의 유기성과 역동성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즉 교회는 처음부터 정체된 상태로 일시에 제시된 것이 아니라 역사 가운데 끊임없이 세워져 나가야 한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사도들의 교훈을 상속받은 기본적인 원리에 따라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나가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동일한 본질로써 다양한 환경 가운데 지상의 교회를 세워나간다. 이는 시대에 따른 역사적 배경과 지역에 따른 상이한 여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물론 우리에게 있어서 항상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한 말씀에 근거한 진리의 본질적인 내용이다.

   바울은 이처럼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을 일반 건축에 비유하며 설명하고 있다. 누구든지 건축을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자재들을 사용하게 된다. , , 보석을 사용하기도 하며, 나무, , 짚을 사용하기도 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점은, 그 가운데 어떤 자재들은 진정으로 소중한 값어치를 지니고 있지만 또 다른 어떤 자재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건축물이 외형상 겉보기에 얼마나 화려한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건축물이 얼마나 소중한 자재들을 사용했는가 하는 점과, 탄탄하게 지어졌는가 하는 사실이다. 이는 겉보기에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전혀 쓸모 없는 잘못된 건축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나중이 되면 모든 건축물들에 대한 공력(功力) 즉 일한 결과가 드러나게 될 것이라 언급했다. 이는 모든 건축물들이 불로써 시험하게 될 날이 이르게 되리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 건축물을 불로 태웠을 때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건축물은 좋은 건축물이지만 불에 의해 다 타버리고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면 그 건축물은 외견상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건축물 자체뿐 아니라 그 건축에 참여한 자들의 노력의 가치를 동시에 언급하고 있다.

   지상에 세워지는 역사상 여러 교회들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불은 교회와 성도들을 태우신다. 하나님께서 최종 심판을 행하실 때 그 모든 것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불로써 그것을 태웠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가 그대로 남아 있으면 온전한 교회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불타버리게 되면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임하게 된다. 이는 숱한 종교인들이 지상에서 교회를 세우고 건축한다면서 기울인 온갖 노력들이 아무런 의미 없는 것이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됨을 보여준다.

   그런데 바울은 성경본문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것은 지상교회 가운데서 성도들의 편에 서서 올바른 사역을 감당치 못했지만 구원을 받게 될 자들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은 창세전에 선택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세상을 착각하며 산 자들이다. 바울은 그런 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3: 15)

 

   이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이는 지상에서 기독교란 이름을 붙인 잘못된 종교집단들은 불타게 되지만, 그 가운데 있는 선택 받은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가 불 가운데서 얻는 것과 같이 구원받는다는 의미는 마치 위기를 탈출해 나오듯이 극적인 구원이 저들에게 임하게 됨을 말해준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그 말과 더불어 지상에 세워진 하나님의 참된 교회의 소중함을 밝히고 있다. 교회가 소중한 것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거룩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거룩한 성전이라 칭하고 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 16,17); Don't you know that you yourselves are God's temple and that God's Spirit lives in you? If anyone destroys God's temple, God will destroy him; for God's temple is sacred, and you are that temple(1Cor. 3:16, 17)

 

   바울은 여기서 너희(you)하나님의 성전(God's temple)이라 말하고 있다. 본문에 기록된 복수 의미를 지닌 너희란 단어는 단순히 성도들 각 개인을 제한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한다. 즉 개인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본문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이 성도들 개인의 몸에 국한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는 하나님의 몸 된 교회 공동체를 일컫고 있다. 즉 개인 성도들의 몸이 연합하여 하나의 성전을 이루고 있으며 그 교회공동체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너희 안에 거하신다는 말의 의미도 성도들 개인의 몸 안에 거하신다는 의미로 제한되지 않는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값 주시고 사신 거룩한 교회 가운데 거하고 계심을 의미하고 있다.

   물론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 단위가 된다. 이는 마치 벽돌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자재들이 하나로 엮어져 한 건축물로 세워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처럼 각 개인 성도들이 제각각 거룩한 성전인 교회를 이루는 기본 요소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체 교회가 거룩하기 위해서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각 성도들이 거룩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다시 말해 성전을 구성하고 있는 개인 성도들이 부정하고 더러운 상태에서 교회가 거룩함을 유지할 수 없다. 즉 세상에 속한 불결한 인간들이 모여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구성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했다. 이는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더럽히는 악한 자들을 향한 경고이다. 즉 단순히 개인적으로 자신의 몸을 더럽힌 자들에 대한 말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를 더럽힌 자들에게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임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는 물론 개인의 몸을 자신의 것으로 알고 무분별하게 더럽힘으로써 전체 교회가 더러워질 수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또한 교회의 거룩성에 대해 매우 중요한 입장을 보였다.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역시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구약시대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거룩한 집이었다는 사실을 잘 기억하고 있다. 그 성전에는 아무나 출입할 수 없었으며 반드시 지켜야 할 엄격한 규례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성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그림자로서 제사장들이 규례에 따라 드리는 제사를 받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을 전체적으로 소유하고 있어야만 했다. 거룩한 하나님께서는 그 성전에 거하시면서 택하신 민족 가운데 자신의 거룩한 뜻을 드러내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신약시대에도 자신의 거룩한 성전인 교회를 통해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신다. 그리고 그 성전을 이루고 있는 자기 백성들을 통해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없다.

 

 

3. 하나님의 소유된 자의 기본적인 자세 (18-25)

 

   사도바울은 모든 성도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신앙적 사고의 기초가 되는 매우 중요한 언급을 하고 있다. 그것은 아무도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명령이다. 이 말은 단순히 거짓말하지 말라는 의미와는 다르다. 자기를 속이는 행위는 스스로 자기에 대해 착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타락한 인간의 몸을 입고 있는 상태에서 자기를 지혜로운 자로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벌써 자기를 속이는 행위라는 것이다.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3: 18)

 

   우리는 여기서 일반적인 논법(論法)을 떠올리게 된다. 바울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자가 되고자 원하는 자라면 반드시 미련한 자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이는 과연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한 필수과정으로써 겸손한 자세를 지닌 미련한 자가 되라는 뜻일까? 즉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미련하게 되는 절차를 밟아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할까?

이 말씀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바는,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해서 미련한 자가 되면 비로소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다는 말과 다르다. 이는 도리어 자기에게는 아무런 지혜가 없으므로 미련하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어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그것이 전부임을 말해주고 있다. 즉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해 애쓸 필요 없이 자기가 미련하다는 사실만 분명히 깨달으면 된다. 더 이상을 바라면서 추구하는 것은 자기 인생을 꾸미려는 인간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가 자신의 미련함을 진정으로 깨닫게 된다면, 그 다음의 모든 일은 성령께서 감당하시게 된다. 다시 말해 자신이 미련한 사실을 깨달은 후 비로소 자기가 지혜로운 자처럼 행세한다면 여전히 미련한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죄인의 굴레를 쓰고 있는 인간 스스로는 항상 미련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타락한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지혜란 하나님 보시기에는 미련한 것 즉 어리석은 것일 따름이다. 그 가운데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판단하는 자들은 결국 자기의 미련한 꾀에 넘어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자기 꾀에 넘어가도록 하신다(고전3: 19,20). 그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의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확립한 이성과 경험에 익숙한 어리석은 인간들은 자기를 지혜롭다고 여기며 그것이 매우 값어치 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문제는 불신자들뿐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자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교인들은 신앙이 매우 어린 자들이거나 신앙이 없는 자들이다. 외견상 그들의 종교적인 경험이 얼마나 풍부한가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아가 얼마나 많은 기독교적 활동을 하는가 하는 것도 별다른 의미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만일 그들이 계시된 말씀을 좇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했다면 자신이 지혜롭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라는 사실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된다. 그것이 곧 성도들의 신앙성장에 연관된다. 어린 교인들은 자기를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운 자로 만들어가기 위해 힘쓰지만 그것은 허사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세상에서 자랑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자랑할 만한 유일한 값어치가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룩하신 그 십자가 사역만이 죄에 빠져 신음하는 불쌍한 인간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만물이 십자가 사역으로 인해 세워진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속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지상교회에 허락된 매우 중요한 권능이다. 이에 대한 온전한 깨달음이 없이는 하나님께서 값 주고 사신 교회의 진정한 의미에 참여할 수 없다.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파당으로 나누어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 역시 교회에 속한 한 형제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나아가 온 세계와 생명과 사망, 그리고 현재의 것이나 장래의 것이나 전부 교회의 통치 아래 있음을 천명했다. 모든 것들은 교회의 머리이자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관할 아래 있으며, 그리스도는 또한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의 몸 된 교회에 허락된 이 놀라운 진리를 올바르게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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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중국 신학교 강의록 - 정진국 목사 서성필 2016.03.11 5342
공지 [야고보서] 머리말, 차례. 이광호 목사 서성필 2015.10.09 5702
공지 '에세이 산상수훈', 서문, [권두언]-“아프리카, 아쉬움이 남아있는 대륙’, [목차]. 이광호 목사 서성필 2015.02.13 7170
공지 '교회와 신앙'. 서 문, 머 리 말, 송영찬 목사 서성필 2014.10.11 6735
공지 ‘교회와 사명’ - 서 문, 머리말, 프롤로그. 송영찬 목사 [2] 서성필 2014.06.21 6316
공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머리글과 목차. 이광호 목사 [5] 서성필 2013.08.25 12021
258 제17장, 본질적 은사인 사랑(고전13: 1-13) 서성필 2016.11.04 798
257 제15장, 교회에서 먹는 만찬(supper)과 예배시간의 거룩한 성찬(고전11: 17-34) 서성필 2016.10.28 1004
256 제16장, 성령의 은사들과 교회의 세움(고전12: 1-31) 서성필 2016.10.28 772
255 제14장, 창조질서 속의 남자와 여자(고전11: 1-16) 서성필 2016.10.13 799
254 제13장, 언약적 세례와 신령한 음식(고전10: 1-33) 서성필 2016.09.23 764
253 제12장, 사도와 복음선포의 직무(고전9: 1-27) 서성필 2016.09.16 756
252 제11장, 우상제물에 연관된 문제(고전8: 1-13) 서성필 2016.09.09 736
251 제10장, 혼인의 본질과 독신자에 관한 교훈(고전7: 17-40) 서성필 2016.09.02 768
250 "제9장, 부부관계를 통한 교훈(고전7: 1-16)" 서성필 2016.08.29 1157
249 제8장, ‘성도의 자유’와 교회와 순결(고전6: 12-20) 서성필 2016.08.19 753
248 제7장, 성도의 세상법정 소송문제(고전6: 1-11)입니다. 서성필 2016.08.12 806
247 '제6장, 교회의 권세와 순결(고전5: 1-13)' 서성필 2016.08.05 948
246 '제5장, 교회와 하나님 나라(고전4: 1-21)' 서성필 2016.07.29 828
» '제4장, 하나님의 밭,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고전3: 1-23)' 서성필 2016.07.22 964
244 '제3장,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대한 바울의 고백(고전2: 1-16)' 서성필 2016.07.15 818
243 제2장, 교회의 본질과 참된 지혜(고전1: 10-31) 서성필 2016.07.08 799
242 고린도전서, 제1장, 고린도교회와 보편교회의 정체성(고전1: 1-9) 서성필 2016.07.01 1897
241 5장. 사역자들을 향한 당부, 6장. 복음을 알 수 있는 성경 서성필 2016.06.17 666
240 4장. 생명 (3)『선악과와 예수의 생명』 서성필 2016.06.17 7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