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오직 복음으로만 설교를 원합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듣고 싶은 지혜와 달변을 보조수단으로 설교를 원합니까?

 

주님의 긍휼이 여러분의 교회에도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주안에서

서성필.

 

 

3,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대한 바울의 고백(고전2: 1-16)

 

 

1. 달변 (達辯) 의 위험과 하나님의 권능 (1, 2)

 

   인간의 언어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도구가 된다. 사람들은 구변이 좋은 것을 자랑으로 여기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어떤 내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자신의 의사를 남에게 설득시켜내는 언술은 여간 중요하지 않다. 원만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언어사용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하나님에 관한 증거를 전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음을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를 다소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절대적인 내용을 교회 가운데 전달하는데, 바울이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다고 말한 점이다. 좋은 내용이라면 인간의 모든 지혜를 동원하여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해야 하는 것 아닌가!

   바울이 그런 말을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섞지 않고,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인위적인 방편들을 사용하지 않았음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는 자체적인 능력이 부족해서 인간들의 눈에 보기에 그럴듯한 지혜와 달변을 보조수단으로 사용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절대적인 능력이 있음을 말해준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에 대한 분명한 기록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4: 12,13)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서 진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인간들이 알고 있는 어떤 칼 보다 예리하며 강력하다. 그것은 인간들의 신체적인 모든 부위들을 예리하게 분리해낼 뿐 아니라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부분에 관한 것들 까지도 완전히 분해해 버린다. 그러므로 죄로 인해 오염된 우주 만물의 모든 형편들이 하나님 앞에 낱낱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그에 대한 모든 내용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죄에 빠진 인간으로부터 발생하는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소유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사역이 삶의 가장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그는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뜻이 가감 없이 그대로 드러나야 한다는 사실을 고백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바울의 말 가운데 매우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이 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힌 그의 사역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음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바울이 소유한 신앙의 본질적인 내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도바울은 여기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입술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지런히 입에 오르내리며 십자가에 관한 용어를 되풀이해서 언급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사역이 인생의 전부임을 깨닫도록 권면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 가운데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는 항상 메시아와 그에 관한 예언과 모든 사역이 가장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인간들의 지혜와 언변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을 통해 교회 가운데 보존되어야만 한다.

 

 

2. 공포에 떨었던 바울의 고백 (3-5)

 

   우리는 흔히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은 담대하여 두려움이 없이 평안한 자세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으로 말한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데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런 공포감이 없이 용감한 것을 두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강한 것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말이라 할 수 없다.

   물론 특별한 위험이나 박해가 없는 평온한 시대에는 별다른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역사상 존재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있어서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시대와 형편에 따라서는 도리어 인간적인 연약함으로 인해 견디기 힘든 고통의 지경에 빠지기도 한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그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드러내셨다(26: 36-39).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움과 겁이 없는 것 자체가 마치 신앙이 좋은 것으로 말하는 자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미숙함 때문일 것이다. 지상에 살아가는 성도들은 하나님으로 인해 담대함을 가지게 되지만 그것이 일반적인 두려움 자체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기록이 많이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전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가운데 구약성경 이사야서와 신약성경 요한복음과 계시록에 기록된 내용들은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구절들이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41: 10);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14: 27);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2: 10)

 

   이 성경구절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두려워 말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우리는 이 말씀들의 진정한 의미를 잘 깨달아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두려워할만한 불안한 형편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심각한 두려움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그 두려움으로 인해 낙심하지 말고, 천국에 소망을 둠으로써 진정한 평안을 찾으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으로부터 임하는 공포분위기가 조성되고 위협과 협박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인내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성도들은 마땅히 그런 자세를 가져야만 한다. 사도바울 역시 고린도 지역에 머물고 있을 때 그런 공포분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면서 자신이 과거 고린도에 거할 때, 연약하여 두려워하며 심한 공포에 떨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이는 그에게 실제적으로 임했던 공포분위기에 대한 것을 말해준다. 그에 대해서는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상당부분 알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바울이 겪어야 했던 공포분위기가 일시적으로 발생했던 것이 아니라 상시적인 상태였을 것이란 점을 기억해야 한다. 즉 바울은 어떤 특별한 사건으로 인해 순간적인 공포감에 빠졌던 것이 아니라 늘 불안한 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서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과연 누구 때문에,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런 심각한 공포감을 느껴야만 했을까? 그 주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바울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배도에 빠진 유대인들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로부터 극진한 환영을 받았던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극한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악한 유대인들 가운데는 그를 모함하여 로마제국의 당국에 고발하기를 일삼았다. 그리고 더욱 극렬한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기 위해 온갖 다양한 방법들을 강구했다. 그들은 바울을 단순히 말로 위협하고 주먹으로 폭행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기회를 잡아 그의 생명을 박탈하려 했다.

 

   사도바울은 첫 번째 고린도 지역에 도착하기 전 빌립보 감옥에 갇혀 심한 고생을 한 적이 있다(16: 24). 출옥하고 나서는 그곳을 떠나 데살로니가 지역으로 갔다. 그는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강론하며 약속된 메시아가 오셔서 예루살렘에서 그의 모든 사역을 이룩하셨음을 증거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유대인들 가운데 불량한 자들은 그를 찾아 폭행하려 했다. 그들은 바울의 복음 선포 사역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자 데살로니가의 믿는 형제들은 그 위험한 상황을 파악하고 밤중에 바울을 베뢰아로 피신시켰다. 그곳에서도 바울은 유대인 회당을 찾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다. 메시아에 관한 그의 증거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 다수는 그의 말을 받아들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그렇지만 또 다른 유대인들은 도리어 무리를 동원해 그에게 위해(危害)를 가하고자 했다. 그로 인해 바울은 또다시 형제들의 보냄을 받아 데살로니가에서 배타고 아테네를 거쳐 고린도에 도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 전에도 바울의 주변에는 항상 그를 해하려던 대적 자들이 숱하게 많이 있어 왔다. 대개의 경우는 단순히 우발적인 감정에 의한 도발이 아니라 상당히 조직적인 행동이었다. 즉 바울이 어느 지역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지역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통지해 알렸다. 그리고는 그가 유대교에 대항하는 위험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전해 그에게 해를 가하도록 했다.

   바울은 그런 위협적인 환경 가운데서 인간적인 연약함으로 인해 두려움에 빠져 심히 떨었던 것이다. 바울은 그 사실을 말하면서 자기가 고린도에 있으면서 사사로운 목적이나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다. 그가 고린도에 머물렀던 유일한 이유는 그들에게 참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였다. 만일 자신의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였다면 결코 그런 끔직한 공포분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도바울은 그런 힘든 여건에 처해있으면서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음을 선포했음을 전하고 있다. 그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언어(speech)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preaching)했다. 하지만 그 때 인간의 두뇌에서 나온 세상적인 지혜의 설득하는 언술(persuasive words of wisdom)로 하지 않고 성령의 증거와 권능(demonstration of the Spirit and of power) 안에서 말씀을 증거했다.

   바울이 그렇게 했던 까닭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타락한 인간들의 지혜 가운데 있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 아래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즉 바울은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지 않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인간의 지혜 안에 저들의 믿음을 가두어 둘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 안에 믿음을 두고 살아가도록 했다. 즉 그가 극한 공포분위기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 복음을 증거했던 것은 교회를 올바르게 세우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3. 비밀리에 존재하는 참된 지혜의 비밀 (6-10)

 

   사도바울은 타락한 세상에 존재하는 지혜와는 전혀 다른 참된 지혜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그 지혜는 오염된 세상 가운데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세상에서 똑똑하고 잘난 인간들이나 유능한 행정관원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대단하고 탁월한 능력을 소유한 자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참된 지혜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다.

   세상에서는 그런 인물들이 자타가 인정하는 지혜로운 자로 받아들여져 다른 사람들을 가르친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로부터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유익이 될만한 지혜를 배우고자 한다. 물론 세상에서는 탁월한 그들의 가르침이 세파(世波)를 해치고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며 살아가는데 상당한 도움을 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시대에 와서 하나님께 속한 성도들마저 세상에 속한 자들로부터 지혜를 배우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세상에 대응하며 살아가는 방편을 의미하고 있다. 세상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과 세상의 지혜를 배우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현실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내용을 반성적으로 되새겨 보아야 한다. 그것은 세속국가에 존재하는 일반학교 교육에 연관된 문제이다. 현대교회 내부에서도 일부 경건한 성도들 가운데는 그로 말미암은 학교교육에 관한 논의를 지속하고 있다.

   교회와 성도들은 이에 대해 매우 분명한 이해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지혜지식을 나누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성도의 자녀들이 일반학교에 가는 것은 일반적인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것이며 참된 지혜를 배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는 오직 교회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교회를 통해 모든 진리와 지혜를 배우고 익혀야 한다. 교회가 성도들에게 말씀을 통해 천상의 지혜를 가르치는 유일한 학교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지혜를 배우려는 잘못된 욕망은 하나님의 지혜를 잠식하거나 소멸시키는 악한 역할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분명한 점은 세상의 지혜가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에게는 아무런 지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소유해야 할 참된 지혜는 타락한 세상에서 성공하여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성숙한 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 미련하다는 말을 듣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박해를 받으면서도 진리 안에서 참된 지혜를 소유한 채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속한 자들 가운데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이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진정한 지혜가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의 상태에서 발생하는 세상의 것을 두고 지혜라 말하지 않는다. 즉 그들의 지혜는 세상에서는 대단한 것으로 비쳐지고 인식될지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결코 영원한 참된 지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나아가 신앙이 어린 교인들과 잘못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지도자들 중에도 이에 대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도리어 그런 사람들은 교회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만 진정한 지혜가 있다고 말하면 교만한 것이라 책망하기 까지 한다. 세상에 있는 지혜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그 사실을 성숙한 성도들 가운데서 말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고전2: 6). 교회가 말하는 진정한 지혜란 창조와 타락 이래 구약시대부터 비밀로 감추어져 왔던 하나님의 지혜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연관되는 것으로서 성도들에게 영광을 허락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작정해두신 것이었다. 이제 지상의 교회 가운데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 그 참된 비밀은 이 세상에서 여전히 비밀리에 존재하게 된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 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1: 26,27)

 

   따라서 이 세상은 참된 지혜에 대해 아무런 지식도 가질 수 없다. 즉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 사이에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서 상호간 아무런 연결고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유명하고 자타가 인정하는 대단한 능력을 소유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그 진리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일 그에 대한 약간의 지혜라도 있었더라면 인간들이 감히 영광의 존재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들은 진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무서운 죄악을 저지르게 되었다. 악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모독하고 십자가의 고통에 빠뜨리면서 도리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행한 듯 오만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무관한 인간들은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과는 전혀 다른 눈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나름대로 많은 정보들을 소유하고 있다. 그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성인(聖人)으로 인정해 존경한다는 자들이 많다. 또한 엉뚱하게도 예수님을 윤리적으로 본받고자 하는 자들마저 없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그가 베푸시는 참된 지혜에 대해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2:9)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지혜를 언급하면서 구약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하나님과 무관한 불신자들은 참된 진리에 대해 아무런 지식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언급했다. 영원한 진리를 알 수 있는 참된 지혜는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그것은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해 교회에 허락되었다. 즉 하나님의 세계에 관한 참된 지혜는 성령을 통해 자기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4. 교회가 소유한 지식 (11-16)

 

   무서운 죄에 빠져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 자연적인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개념 자체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그 점을 설명하기 위해 사람의 사정에 관해서는 사람의 속에 있는 영(spirit)만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말했다. 이는 인간이 소유한 사정을 결코 다른 동물이나 식물 등의 생명체가 그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해서도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알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만 알고 계시는 그에 관한 지식이 하나님의 영을 받은 성도들에게는 은혜로 허락되었다. 여기 언급된 하나님의 영이란 성령(Holy Spirit)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이제 세상의 영 즉 세상의 정신(spirit)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성령을 받은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참된 지혜를 알게 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특별히 베푸신 은혜로써 영원한 진리를 알게 하셨음을 말해주고 있다.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은 참된 지식을 소유함으로써 더 이상 세상의 편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자들과 타락한 세상의 영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분명한 차이를 보게 된다. 이는 외관상 동일한 인간의 모습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지만 본질은 근원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말은 하나님의 형상과 연관되는 것으로서, 세상의 영을 가진 상태에서는 결코 하나님의 성령과 그의 사역을 알거나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인간의 지혜에 따른 언술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으로 진리를 증거한다는 사실을 강조해 말하고 있다. 신령한 일은 오직 신령한 것으로써 분별할 수 있으며 타락한 세상의 영을 지닌 인간들의 지혜로는 결코 진리를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성도들은 세상을 판단할 수 있지만 세상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과 그의 교회를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2: 15)

 

   하나님께 속한 신령한 자들과 아담의 범죄로 인해 세상에 속한 자들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난다.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육신에 속한 사람들은 성령의 사역과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행하시는 일들을 깨닫지 못한다. 나아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보면서 도리어 미련하게 여길 따름이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가 아닌 인간들의 지혜를 통해 영원한 세계를 알아가려 하지만 하나님의 신령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분별력이 없다.

   이에 반해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 속해 온전한 신앙을 소유한 성도들은 신령한 자가 되어 분별력을 가지게 되며 세상의 모든 것들을 판단할 수 있는 천상의 지혜를 가지게 된다. 그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들과 발생하는 모든 사건들을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해석하며 판단한다. 물론 그것은 개별 성도들의 종교적인 이성과 경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 허락된 특별한 권능이다.

   그렇지만 참된 교회와 성도들은 결코 세상으로부터 판단을 받지 않는다. 참된 지혜를 가지지 못한 세상이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소유한 성도들을 판단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과 세상에 속한 자들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격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알아 그를 가르칠 수 있겠는가? 물론 그런 자들은 아예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the mind of Christ)을 소유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고전2: 16). 이는 교회에 속해 참된 지혜를 소유한 성도들의 위상은, 타락한 세상의 이성과 경험에 익숙한 자들과 격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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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장,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대한 바울의 고백(고전2: 1-16)' 서성필 2016.07.15 818
243 제2장, 교회의 본질과 참된 지혜(고전1: 10-31) 서성필 2016.07.08 798
242 고린도전서, 제1장, 고린도교회와 보편교회의 정체성(고전1: 1-9) 서성필 2016.07.01 1897
241 5장. 사역자들을 향한 당부, 6장. 복음을 알 수 있는 성경 서성필 2016.06.17 666
240 4장. 생명 (3)『선악과와 예수의 생명』 서성필 2016.06.17 7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