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보존하기 위해 장로회가 교인들의 세례에 대한 결정은 중요합니다.

한국에서도 많이 알려진 블래가비 목사님의 하나님을 경험하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5과 – 몸 안의 생명력.

몸과 언약 관계

고린도전서 12; 7(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시는 것은 공동의 이익을 얻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18(그런데 실은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우리 몸에다가 각각 다른 여러 지체를 두셨습니다.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지체를 몸에 두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 그들의 몸에 두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우리의 몸에 해주실 우리는 기뻐할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이 우리 교회의 교인이 때마다 우리는 곧바로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목사로서 저는 우리 교회의 회중이 사람과의 언약의 관계 맺도록 인도합니다.  개인의 경험에 비추어서 수단은 다르게 사용했을지 모르지만, 언약관계를 맺는 것은 대개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개인의 간증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아래의 질문들에 답하라고 부탁합니다.

 

1 – 당신은 성도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시인하십니까?

2 – 당신은 믿는 자들이 받는 침례를 받음으로 주님께 순종했습니까? (혹은 침례를 받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싶습니까?)

3 –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을 그리스도의 몸에 속함을 분명히 믿습니까? (혹은 하나님이 당신을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게 해주신 것을 어떻게 느끼게 되었는지 저희에게 말씀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연히 당신을 우리 교회에 포함시켜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삶을 통해서 어떤 일을 하심으로 우리가 완전해 지기를 원하십니다.”

 

4 – 당신은 하나님이 교회를 좀더 완전하게 만드시게 위해서 당신을 통해서 일하시도록 허락하시겠습니까?

5 – 당신은 교회가 당신을 완전하게 만드는 사역을 있도록 당신의 삶을 열어놓으시겠습니까?

 

사람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마치고 나면, 저는 성도에게 묻습니다.

 

6 – 지금 들은 신앙고백에 의거해 , 여러분은 하나님이 이분을 우리의 교회에 더해 주신다고 믿습니까?

7 – 여러분은 하나님이 분을 통해서 당신의 삶에 역사하시도록 여러분의 삶을 분께 개방하겠습니까?

8 –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 각자의 인생을 통해 분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목적하신 바를 모두 이루시도록 도와드리겠습니까?

( 부분은 어떠한 경우에도 지금 세례 받는 분의 삶을 형제로서 여러분은 책임질 있습니까?” 받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교인들을 상기 시킵니다.  

우리는 아무도 분이 미래에 어떤 일에 부딪칠지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분을 우리 교회에 더해 주신 것은 분이 우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서 분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이루시게 하겠다는 언약을 하겠습니까?   만일 서약을 하시겠다면 지금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이분을 주시는 멋진 일을 하신데 대해 찬양을 드립시다.”

 

 

여러분들의 교회는 세례에 대한 어떤 방침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교회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주안에서

서성필.

 

 

2, 교회의 본질과 참된 지혜(고전1: 10-31)

 

1. 교회 연합에 대한 당위성 (1:10-13)

 

   기독교 역사 가운데는 교회의 분열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의 교회가 여러 갈래로 분열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갈라지게 되는 것은 세상의 지혜를 앞세우는 자들이 종교적인 욕망을 자제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잘못된 현상이다.

고린도교회에도 그런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보다 세상에서 익힌 이성과 경험에 따른 판단들을 현실에 옮겼기 때문이다. 범죄한 인간들은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항상 자신의 잘못이라 말하지 않고 다른 누구에겐가 핑계를 댄다. 이는 처음 사람 아담부터 그랬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잘못된 교회 분열은 죄에 빠진 인간들의 악한 성품에 기인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바울은 분열된 고린도교회로 하여금 다시 연합하도록 요구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면하면서 교회 가운데 분쟁을 일으키지 말고 동일한 마음과 뜻으로 온전히 연합하도록 당부했던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1: 10)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파벌이 생겨 분열된 사실을 가슴 아프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글로에의 집에 속한 성도가 에베소에 있는 바울을 방문해서 교회에 심각한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전체적인 내용을 고려해 볼 때 그 성도는 단순히 그 사실을 바울에게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던 것이 아니라 그에게 그 문제들을 해결해주도록 요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그 점을 맨 앞부분에 언급한 것을 보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적어도 네 개의 파벌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베드로파). 그리고 그리스도파였다. 바울과 아볼로, 베드로는 고린도교회와 직접 연관이 있던 자들이었다. 바울은 그 전에 16개월 간 고린도 지역에 머물면서 교회를 세웠고(18:1), 아볼로는 바울 다음에 고린도교회 가운데서 말씀을 가르치며 목회를 했었다(18:27;고전3:6). 그리고 베드로는 로마로 가는 길에 고린도를 방문해 일정기간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고전9: 5).

   이러한 이유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인간적인 친분관계로 인해 분열되었던 것 같다. 우리가 자칫 잘못 생각하면 그 네 파당 가운데 그리스도파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가장 신앙이 좋았던 것으로 여길 수 있지만 그렇게 말할 수만은 없다. 그들은 바울, 아볼로, 베드로 등 세 사람과 개별적인 친분이 없는 사람들로서 또 다른 파당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의 깊게 생각해보아야 할 바는 그들이 한 지 교회 안에서 네 개의 파벌로 분열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은 서로 다른 네 장소에서 회집하는 지 교회에 속한 성도의 무리로 보인다. 고린도지역에는 글로에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고전1: 11)스데바나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고전1: 16) 이외에 또 다른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모이는 교회들이 있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 그들은 각각 다른 인물들을 내세워 파벌을 형성했던 것이다.

   사도바울은 그런 형편에 빠진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심한 책망을 하고 있다. 교회 가운데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달리 앞세울 만한 인물이 있을 수 없다며 강하게 질책했던 것이다. 만일 특정한 인간을 종교적으로 영웅화한다면 그것은 우상을 만드는 행위와 전혀 다르지 않다.

   그는 또한 한 분이신 그리스도가 어떻게 분열될 수 있느냐고 따져 물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저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줄 뿐 다른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와 그의 이름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회를 통해 높임을 받을 수 있는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다.

   우리는 또한 여기서 매우 깊은 주의를 기울여 생각해야 보아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교회의 분열(分裂)과 진리보존을 위한 분리(分離)의 차이에 관한 문제이다. 이기적인 목적과 이유로 인한 분열이라면 악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발생하는 분리는 마땅히 일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에 대한 분명한 언급을 하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슬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16: 17,18)

 

   하나님의 교훈을 버리고 인간적인 지혜를 내세우는 자들은 악한 배도에 빠진 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입술에 떠올리는 신앙적인 언술과는 달리 인간적인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순진한 성도들의 마음을 미혹한다. 참된 교회는 저들을 주의 깊게 살펴 교제를 끊고 저들로부터 떠나야만 한다.

   따라서 진리를 중심에 두지 않는 무조건적인 정치적 교회연합을 추구하는 것은 또 다른 영적인 간음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시대에 들어와 교회의 분열만큼이나 위험한 것은 무분별한 연합이다. 올바른 믿음과 그에 대한 고백을 뒤로한 채 형식상의 연합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겉으로는 사랑과 화해를 앞세우고 있지만 실상은 더욱 악한 종교정치적인 욕망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 형태의 기독교 정치를 배경으로 한 연합은 혼합주의를 불러오게 되며 진정한 신앙을 뿌리 채 뒤흔들게 된다. 나아가 어린 성도들을 미혹하여 진리로부터 떠나게 만든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면서 하나님의 교훈을 떠난 악한 자들을 살펴 그들로부터 떠나라고 한 이유는 바로 거기 있다.

 

 

2. 세례복음선포 (preach) (13-18)

 

   바울은 인간들의 이기적인 욕망으로 인해 하나님의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는 자들을 책망하며 자신에게 연관된 사실을 두고 그에 관한 언급을 했다. 그는 고린도교회에 자신을 따르는 파당을 형성한 교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서 아볼로나 베드로를 핑계대어 파벌을 형성한 자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책망을 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위한 자신의 공로가 전혀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는 저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음을 언급하면서 인간들 가운데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특별히 은혜를 베푼 자가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해 말했다. 하나님의 몸 된 교회 가운데 특정한 인간의 공로를 내세운다는 것은 말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바울은 자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았음에 대해 감사한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그는 고린도교회에서 일 년 반 동안 목회를 하면서 그리스보와 가이오, 그리고 스데바나의 집에 속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세례를 베풀었을 따름이다. 이는 결코 세례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의 세례행위 자체가 영원한 구원을 보증하는 본질적인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 바울이 자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은 사실을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언급한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그가 만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면 인간적인 감정으로써 자신을 따르려고 하는 자들이 많아져 그와 같은 분열이 더욱 심화되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말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 베푸는 행위자체를 두고 자랑거리로 삼는 자들이 상당수 있다. 그것은 개별적인 종교지도자들뿐 아니라 공 교회를 이루고 있는 교단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들은 대개 세례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한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시대 하나님을 능멸하는 타락한 교회들이 귀담아 들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극한 타락상 가운데 하나는 소위 진중세례(陣中洗禮)라고 하는 악습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허물게 하는 행동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무지하고 어리석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그에 대한 실상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에 참여하는 자들은 소위 전도목적이라는 명분을 갖다 붙이면서 진정한 교육과 고백이 없는 상태에서 한 번도 신앙적인 교제를 나누어 본적이 없는 수천 명이나 되는 군인들에게 한꺼번에 세례를 베푸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코 악하기 그지없는 영적인 간음행위에 해당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거의 대다수 교단들과 지도자들은 서로 앞장서듯 틈나는 대로 진중세례식을 주관하고 있다. 그것이 전도를 위해 그렇게 장려할 만한 일이라면, 바울은 과연 그걸 몰라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세례는 교회의 울타리와도 같다. 그 울타리가 무너지면 아무나 들어와 울타리 내부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리게 된다. 한국교회에 있어서는 비단 진중세례뿐 아니라 일반 세례에 있어서도 그 진정한 의미가 거의 상실되어 버렸다.

   세례를 베풀기 위해서는 교회의 장로회의 확인과 전체 회중의 확실한 보증이 있어야 한다. 즉 장로회를 통한 정당한 교육이 있어야 하며, 그에 따른 마땅한 고백이 뒤따라야 한다. 교회의 기본적인 교육과 더불어 세례를 받게 되는 성도의 고백을 통해 비로소 교회 앞에서 말씀 사역자인 교사에 의해 세례가 베풀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 세례는 교회 가운데 항상 지속되는 성찬의 교제를 전제하며 약속한다. 따라서 세례를 받은 성도들은 매주일 행해지는 성찬에 참여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하게 된다. 공 예배 시간에 행해지는 지속적인 성찬에 대한 약속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들의 종교심에 의해 아무렇게나 베풀어지는 세례는 참된 교회를 모독하는 행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다른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복음을 선포하는 것임을 말했다.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즉 교회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보다 더 소중한 것은 있을 수 없다.

   교회에서는 형식적인 것이 복음의 본질을 능가해서는 안 된다. 본질을 보존하기 위해 형식을 필히 요구하지만 그에 대한 분별이 필요하다. 세례는 교회에서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표지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본질자체는 아니다. 즉 세례가 곧 구원의 절대적인 표징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바울뿐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와 그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동일하게 받아들여야 할 내용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 17,18)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셨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그가 인간적인 판단이나 열정에 의해 사도직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이 말을 매우 신중하게 이해해야 한다. 바울의 이 말은 교회의 교사인 목사들에게는 특별히 적용되어야 할 내용이다. 이는 교사의 직분은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에 전달하는 중요한 사명을 부여 받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한 임무를 부여 받은 성도들은 항상 자기에게 일을 맡기신 분의 뜻을 기억해야 한다. 무엇 때문에 자신을 보냈으며 무엇을 가르치고 전하도록 요구하시는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보내시지 않았는데 보냄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종교적 사기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자들은 자기 마음대로 와서 개인적인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교회와 성도들을 속인다.

   또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보낸 분의 요구를 무시하고 제 맘대로 가르친다면 배도자가 된다. 사실 이 말은 가르치는 교사인 목사들뿐 아니라 모든 직분 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한다. 교회에서 사기꾼이 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의도적으로 보내신 분의 뜻을 멸시하는 행위도 엄청난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속한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은 세례를 베풀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하기 위함임을 밝혔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할 때 인간적인 지혜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해 말하고 있다. 인간들의 지혜가 동원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다는 것이었다. 이는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인간들의 지혜를 보조수단으로 삼지 않으신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매우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할 교훈이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자신의 지혜가 하나님을 위해 상당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들의 오만한 성품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구속을 이루기 위해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곧 복음의 핵심이다. 그 십자가의 도는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을 제공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되지만,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도구가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말했다.

   고린도전서 118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능력하나님의 세력the power of God을 의미한다. 능력(ability)이란 말과 세력(power)이란 말은 의미상 상당한 차이가 난다. 능력이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을 의미한다면, 세력은 다른 세력을 제압하여 억누르는 힘을 의미한다. 따라서 십자가의 도는 자기 자녀들을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구출해내는 하나님의 세력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연관된 기록은 성경전체에 걸쳐 설명되고 있다. 특히 사도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그에 관한 명백한 기록을 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직접 관련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구약성경 이사야서 814절과 2816절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2:6-8)

 

   베드로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건축을 위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로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돌을 시온 곧 예루살렘에 두시게 된다. 그 돌이 미련한 자들에게는 아무런 값어치 없는 돌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돌의 성질을 가장 잘 알고 건축을 위해 그것을 사용하는 건축자들이 그 돌의 진가(眞價)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 보배로운 돌을 바깥에 내다 버리게 된다. 일반적인 전문가들이 충분히 살펴보고 쓸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여 내다버린 그 돌의 진정한 가치를 누가 어떻게 알아본다는 말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만 알아보게 된다. 그에 대한 감정은 경험이 많은 노련한 전문가의 몫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세상의 지혜로운 건축 전문가들이 알아보지 못한 그 돌이 건축을 위해서 절대로 없어서는 안될 머릿돌이 되었다. 그 돌은 인간들의 삶을 영생과 영멸을 가르는 기능을 하게 된다. 그 돌이 인간의 지혜를 의지한 자들에게는 무서운 파괴력을 지닌 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생명을 허락하는 보배로운 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지 않고 그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들 앞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두려운 파멸이 놓여 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지상의 다양한 상황에 따라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작정하신 일이 성취되는 것을 보여주신다.

 

 

3. 참된 지혜와 어리석은 자들의 지혜 (18-21)

 

   앞에서 사도 베드로의 편지를 통해 살펴본 것처럼 인간들의 지혜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무리 탁월한 전문가들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지혜로는 결코 참된 진리를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평생 건축에 종사하고 그 분야에 전문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영원한 모퉁이 돌이 되는 그 돌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들에게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이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그에 대해 분명히 말하고 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단순히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소극적인 의미 정도가 아니라 저들을 심판하는 무서운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저들을 죄악세상으로부터 구출해내는 엄청난 세력(power)이 된다. 동일한 십자가가 사람에 따라 구원과 심판이라는 정반대의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세상에서 발생하는 인간들의 지혜가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고전1:19). 그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며 그 점을 말했다(29:14). 교회는 인간의 지혜를 앞세우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적으로 지혜롭고 총명한 자들의 모든 것들을 심판하신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든지 다른 인간들이 인정해주든지 온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지혜와 총명에 환호를 보내든지 그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편에 서 있다. 타락한 인간들의 두뇌에서 발생하는 모든 지혜와 총명은 궁극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에 존재하는 그런 류의 지혜와 총명을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로 끌어들이려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사도바울은 그 점에 대해 견제와 더불어 심한 책망을 하고 있다. 타락한 이 세상에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으며 탁월한 선비(학자)와 유능한 변사(변론가)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그것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지혜와 총명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그것이 인류를 위해 엄청난 유익을 끼치는 것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의 지혜라고 주장하는 것들을 도리어 미련케 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을 찾거나 의지하는 마음을 없애는 교만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점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을 가져야 한다. 인간들의 지혜로서는 결코 하나님을 알아갈 수 없다. 진정한 지혜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허락하시는 계시를 통해 드러나게 된다. 나아가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라는 미련한 방편을 통해 믿는 성도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 21)

 

   우리는 바울이 기록하고 있는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올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바울이 언급한 전도의 미련한 것(the foolishness of preaching)이란 과연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복음 선포(preaching)가 미련하다는 말인가?

   이 말은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리석은 것이라 판단한다. 저들의 눈에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특별한 유익이 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되는 복음의 내용을 진리라고 믿는 자들이 어리석게 보일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말씀이 교회 가운데 선포(preaching)되도록 하셨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말씀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게 된다. 그것은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선포되는 말씀을 어리석은 자들이나 믿는 것이라 생각하며 배척하게 된다. 그것이 곧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되는 것이다.

 

 

4. 유대인과 헬라인: 표적과 지혜 (22-25)

 

   바울은, 이 세상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인간들의 대표적인 부류를 형성하고 있는 자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거기에는 고린도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절대로 그런 자들을 본받지 말고, 교회 안에 그런 풍조가 조성되지 않도록 주의시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는 우리 시대 교회 역시 그에 대해 민감하게 살펴 경계해야 함을 말해준다.

   사도바울은 표적(sign)을 구하는 유대인들과 지혜(wisdom)를 추구하는 헬라인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사조와 용어로 말하자면 유대인들은 경험주의를 추구하며 헬라인들은 이성주의를 추구한다. 즉 경험주의자들은 실증적 확인이 없는 사실은 무가치한 것으로 판단한다. 이에 반해 이성주의자들은 실증이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지혜로부터 확인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유대인들은 신앙에 대해서도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헬라인들은 이성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만 신앙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인간들의 판단으로 가늠하기 위해 부단한 애를 쓰지만 결국은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유대인들이 찾는 표적을 찾아 헤매거나 헬라인들이 추구하는 지혜에 의존하지 않는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창세전부터 말씀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그에 순종하게 된다. 즉 인간들의 경험이나 이성에 따른 종교적인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언약에 따른 신앙행위는 경험주의와 이성주의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미련한 모습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에게는 십자가의 복음이 곧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세력(power)이 된다. 반면에 인간들이 아무리 지혜롭고 잘난척하며 서로 간 대단한 것인 양 격려한다고 할지라도 세상의 것들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형편없이 미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죄에 빠진 악한 인간들은 자신의 이성과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확인하고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신앙을 가지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욕망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런 잘못된 신앙을 가진 자들은 종교를 내세운 은사주의나 불건전한 신비주의를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참된 신앙을 소유한 성도들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교회와 더불어 온전한 신앙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5.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교회: 계시된 말씀을 통한 진리 (26-29)

 

   사도바울은 본문 가운데서 지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교회에 관한 언급을 하고 있다. 그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교회 안에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지 살펴보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성도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서 인간적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해 말했다. 외부적인 조건은 물론 개인적으로 처한 내적인 형편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에 존재하는 각양 집단과 모임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세상적인 조건이 따른다. 특별한 지위를 가지거나 부자여야만 가입할 수 있다든지 건강해야 한다든지 인간들이 제시하는 나름대로의 다양한 조건들이 따른다. 그에 부합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그 집단에 들어갈 수 없다.

   일반 직장이나 취미생활을 하는 동호회, 나아가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교 역시 그렇다. 아무리 그 집단에 들어가고 싶어도 외형적인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그 모임에 속할 수 없다. 나아가 그 모임들은 하나의 조건뿐만 아니라 복합적인 조건들을 동시에 요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모임들은 예외 없이 나름대로의 외적인 자격과 조건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전혀 그렇지 않다. 거기에는 어떤 세상적인 조건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는 외부적 조건이나 개인적인 형편으로 인해 잘나고 못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 신앙공동체에 참여함으로써 천상의 나라에 연결된 새로운 나라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그 점을 상기시키며 교회 가운데 육체를 따라 지혜 있고 세상에서 유능한 자들, 그리고 문벌 좋은 자들이 많은지 살펴보라고 했다.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는 그런 자들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설령 그런 자들이 다수 있다고 해도 외적인 형편 자체가 교회 안의 성도들 간에 아무런 의미를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심오한 뜻은 인간들의 생각과 전혀 다르다. 그는 세상에서 미련하다고 하는 자들을 택해 스스로 지혜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그리고 세상에서 약한 자들을 택함으로써 강한 자들의 힘이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주신다. 또한 사람들이 멸시하고 천대하는 자들을 택해 교만한 자들을 창피하게 하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도록 만드신다. 현재의 형편이 어떻든지 간에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내세울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건강하든지 병약하든지, 학력이 높든지 낮든지,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그런 것들은 본질적인 문제가 될 수 없다. 나아가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와 효력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소중한 것은, 성도의 삶이 어떤 현실적인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신실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허락된 진정한 은혜가 된다. 우리는 현재 처한 형편에 상관없이 어떤 경우에도 교만해서 안되며, 나태하고 게을러서도 안 된다. 그런 습성들은 인간의 오만한 죄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6. 코람데오(Coram Deo)(29-31)

 

   하나님의 자녀들은 항상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있다. 그리고 그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간다. 하나님 앞에(Coram Deo) 존재한다는 사실은 자신의 더러운 죄와 무능함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단순히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야겠다는 종교적인 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서있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 자랑할 만한 것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이 완전히 부패하고 전적으로 무능한 것은 단 하나라도 그 앞에 내세울만한 것이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 자체로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 앞에서 그대로 타버릴 수밖에 없는 처참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심으로 인해 성도들은 그 앞에서 감사하며 찬양과 경배를 드리게 된다. 그것은 인간들의 지혜에 따른 결단이 아니라 십자가 사역을 담당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나아가 그것은 인간들의 자력(自力)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해 실천이 이루어지게 된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속(救贖)을 받은 성도들의 특별한 공동체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참된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허락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 쟁취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주어진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인간들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감히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구약성경 예레미야서에는 그에 대한 분명한 언급을 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9:23,24)

 

   사도바울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기록한 교훈을 기억하며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그에 대한 교훈을 준 것이 분명하다. 그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하면서 구약성경을 인용했던 것이다(고전1:31). 이 말은 우리가 여간 주의 깊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칫 잘못하면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을 기독교와 연관된 일을 열심히 하고 그것을 행한 자신을 다른 사람들 앞에 자랑하라는 말로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하고자 한 말은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는 도리어 이 세상의 것들을 가지고는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말하고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기록한 것처럼 인간들이 가진 지혜와 용맹과 부는 결코 자랑거리가 되지 못한다. 어리석은 자들은 엉뚱한 자랑거리들을 만들려 애쓰다가 스스로 넘어지게 된다.

   그러나 참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사역을 올바르게 깨닫는 것이 진정한 자랑이 된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께서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시는 분인 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곧 지상에 임하게 될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세상에서 자신을 위한 자랑거리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감히 자신을 내세우고자 하는 오만한 행동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그의 은혜의 사역을 깨닫는 가운데 신앙적인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신다. 우리는 항상 그에 넘어서지 않도록 주의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겸손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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