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하게도 제가4. 생명 (3)『선악과와 예수의 생명』을 잊고 여러분들에게 보내지 않아 오늘 보내드립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주안에서

서성필.

 

 

 

4. 생명 (3)『선악과와 예수의 생명』

 

 

(2008 6월 중국 신학교 강의록)     정진국 목사.(예본교회)

 

선악과란 무엇인가?

 

앞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고를 하셨다고 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으며, 선악과를 따 먹으면 우리가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또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선악과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왜 그것을 먹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 17)

 

성경의 정확한 표현을 빌리자면, 선악과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입니다. 그렇다면 선악과가 무엇이겠습니까? 선악과를 따 먹게 되면,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는 그런 효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악과는 단순히 어떤 것을 상징하는 나무가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효능이 가지고 있는 나무였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게 되면 선과 악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2 17절의 말씀은 우리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는 선과 악을 알게 되면 안 된다. 네가 그것을 알게 되면 너는 죽는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가 선과 악을 알면 안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선과 악을 깨닫는 것이 왜 나쁜 것입니까? 선과 악을 알아야 우리가 선을 행하기도 하고, 악을 멀리하기도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선과 악을 알면 안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 아주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생명이 무엇인가?”라는 것을 명확하게 가르쳐주는 핵심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것을 자세히 알려주고자 합니다.

왜 하나님은 선과 악을 알면 안 된다고 하셨는가?”에 대한 답을 드리기 전에. 한 가지 질문하겠습니다. 선악과를 먹게 되면 분명히 선과 악을 알게 되는 것일까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것은 단지 어떠한 상징적인 나무가 아닙니까?

여러분 중에서는 “선악과는 어떤 효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악과에 대한 본론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이 부분을 성경으로 증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악과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효능이 있었다. (1)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기 2 9)

 

에덴동산의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선악과의 나무를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영어성경에서는 이것을 “지식의 나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선악과에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나무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선악과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효능이 있었다. (2)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세기 3 4-5)

 

창세기 3장을 보면, 뱀의 모습으로 에덴동산에 사탄이 하와를 유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탄이 뭐라고 말하는지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 인간이 그것을 먹게 되면, 우리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먹게 되면 하나님과 같이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사탄의 말이라고 해서 전부 거짓말은 아닙니다. 사탄은 거짓말을 하지만, 때로는 진실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그 말에 미혹되는 것입니다. 사탄도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럴듯한 진실을 미끼로 삼아서, 그곳에 함정을 놓는 것이 사탄의 방식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들은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졌습니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창세기 2 25)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세기 3 7)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아담과 하와가 서로 벌거벗고 있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선악과를 따 먹고 나니까, 눈이 밝아져서 자신들의 몸이 벗을 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탄의 말대로 선악과를 먹으니까,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

예전에는 벌거벗었다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전혀 부끄럽지도 않았습니다. 옷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벌거벗을 모습이었지만, 자연스럽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난 다음에, 자신들이 벗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졌으며, 무언가를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선악과에는 그런 효능이 있었던 것입니다.

 

선악과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효능이 있었다. (3)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세기 3 22)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이 선과 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에 대해서 “우리들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나오는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합니다. 즉 이 말씀은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십니다. 앞서 제가 제시한 증거는 사탄의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납득하기 어려우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 누구도 이 말씀에 대해서 반론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은 인간을 보시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효능이 나타났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선악과에는 분명한 효능이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게 되면 실제로 선과 악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악과를 어떤 상징적인 말씀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선악과가 무엇을 상징하는가?”를 살펴보지 않을 것입니다. “선악과에는 어떤 효능이 있었는가? 그 효능으로 인해 인간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살펴볼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선악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그 사람을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에덴동산의 중앙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 선악과만은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우리가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 17)

 

그런데 이 선악과에는 선과 악을 알게 되는 효능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먹게 되면 사람을 선과 악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너희는 선과 악을 알게 되면 안 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선과 악을 알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까? 이 질문을 풀기 위한 중요한 열쇠가 사탄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 속에 들어있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세기 3 4-5)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세기 3 22)

 

사탄은 우리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선악과를 먹은 인간을 보시고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사실이 이 질문을 해결하는 아주 중요한 열쇠입니다. 우리는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는 것이 왜 문제가 됩니까?

우리는 성경에서 얻은 질문의 답을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질문을 내 생각으로 답하면 안 됩니다. 사탄은 그런 사람에게 역사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잘못해석하게 하고, 이상한 교리를 만들게 하고, 결국에는 그 사람을 이단의 우두머리로 만듭니다. 적그리스도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절대로 스스로 생각해서 답을 내리지 마십시오. 모든 답은 성경에 있습니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창세기 2 25)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세기 3 7)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기 전에도 벌거벗었고,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도 벌거벗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부끄럽지 않았는데, 선악과를 먹고 난 다음부터 부끄러워했습니다.  상황으로 보면 똑같습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도 벗었고, 먹은 후에도 벗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벗은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선악과를 먹으니까 문제가 되었습니다. 부끄러워서 옷을 만들어 입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어도 그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것을 부끄러운 것이라고 여기셨다면,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옷을 만들어 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벌거벗은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도 자신들이 벗은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다 먹은 후에는 갑자기 벌거벗은 것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선과 악의 기준”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선과 악의 기준”과 달라졌다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는 그들에게는 벗은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선악과를 먹고 어떤 지식이 생겼습니다. 어떤 분별력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분별의 결과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것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하나님의 생각과 똑같은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벗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인간도 그것을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으니, 이제는 하나님과 다른 분별력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벗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사람의 생각은 그것과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실지라도, 내 생각은 좀 달라. 벗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야. 옷을 입어야 해.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선과 악의 개념이 하나님과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선악과를 먹은 후에는 하나님과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독립적이고, 자위적인, 스스로의 선악의 기준이 생긴 것입니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는 하나님처럼 자기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처럼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 판단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는 사람도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자기가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과 사람의 기준이 달라졌습니다.

 

타락의 결과 (1) 하나님과의 분리됨.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하나님과는 다른 판단의 기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들을 결코 독립적인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 17)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악과를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나서 죽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너희가 죽을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은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죽는 것을 육체와 영혼의 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야고보서 2장에서는 행함과 믿음이 분리된 것을 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분리되는 것을 죽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가 죽을 것이다.”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너희가 나에게서 분리될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스스로 독립적으로 선악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저들이 선악과를 따 먹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됐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분리시키신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타락이 무엇입니까? 타락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상태가 타락입니다. 누가복음 15 11절부터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집나간 작은 아들을 탕자라고 부릅니다. 탕자라는 말은 타락한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타락했습니까? 아버지의 돈을 가지고 나가서, 마음껏 먹고 마시며 돈을 썼기 때문에 타락한 것입니까? 둘째 아들의 타락은 아버지로부터 분리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난 것이 바로 타락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에서 말하는 구원은 무엇입니까? 아버지 품을 떠난 탕자가 모든 것을 허비하고, 거기서 뉘우치는 것이 구원이 아닙니다. 진정한 구원은 타락한 아들이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것이 누가복음 15장에서 말하는 구원입니다.

타락과 구원의 분명한 개념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합니다. 타락은 아버지 품을 떠난 것이 타락입니다. 스스로 독립된 것이 타락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분리 된 것이 타락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에서는 우리가 예수와 함께 연합된 것을 말합니다. 예수의 죽음과 연합이 되고, 예수의 부활과 연합이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타락의 결과 (2) 사람들이 저마다 독립적 판단을 함.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자기의 판단기준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아담과 하와만 그런 존재가 된 것이 아닙니다. 아담으로부터 태어난 우리 모든 인간들에게 그 선악과의 영향력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아담 안에서 타락한 죄인이 됐기 때문에, 아담 안에서 있는 모든 사람들은 선악과를 먹고 타락한 그 죄를 물려받습니다. 그것을 원죄라고 말합니다.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죄,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를 말합니다. 이미 앞에서 한번 말씀드렸지만, 아담은 죄를 범해서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들은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죄를 범합니다. 선악과의 영향력이 우리에게도 전달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원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선악과의 효능은 오늘날 모든 인간에게도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다 자기가 하나님이 됐습니다. 쉽게 말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만의 판단기준을 가지고, 가기만의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의견은 저마다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두 사람이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싸움을 말립니다. 그리고 왜 싸웠냐고 물어보면, 서로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의 판단기준에서는 저 사람이 잘못했다고 말하고, 저 사람의 판단기준에서는 이 사람이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청년들끼리 서로 친해지기 위해서 극장에 가면, 거기에서도 서로 의견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무술영화를 보고 싶고, 어떤 사람은 마피아 영화를 보고 싶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멜로 영화를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보자고 서로 싸웁니다. 친해지기 위해 극장에 가서, 서로 싸우고 돌아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판단기준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아내와 남편의 의견이 서로 다르고, 부모와 자식의 의견이 서로 다릅니다. 친구와 친구의 의견이 서로 다르고, 선생님과 학생의 의견도 서로 다릅니다. 그리고 의견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싸웁니다. 남편과 아내가 싸우고, 형과 동생이 싸우고, 친구가 서로 싸웁니다. 나라와 나라가 서로 전쟁을 벌이며 싸우기도 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증거입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 자기의견이 옳다고 말합니다. 자기 생각이 가장 좋은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증거입니다.

 

모든 죄는 그 선악과의 성분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에는 이것이 옳다.”라고 하는 기준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왜 화가 나는지 아십니까? “내가 옳고, 상대방이 틀렸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렇게 화를 내면서도,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옳다. 틀린 것은 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화를 낼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고, 짜증낼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짜증을 내는 것입니다. 오히려 잘못된 것은 내가 아니고 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생각이 틀렸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내가 나의 기준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내 입장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선악과의 효능 때문에 모두 자기 기준에 서 있습니다. 자기가 기준이고, 자기가 옳습니다. 나와 다른 것은 모두 틀린 것이고, 잘못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나 같아야 하고, 내 의견에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만 그런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도 똑같이 자기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준들을 일컬어서 “입장”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고, 그 기준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실 자기의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기준과 입장은 서로 다른 개념입니다. 기준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 기준에 맞춰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입장은 상대적입니다. 입장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판단한 것을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입장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의 입장을 고집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모두 자기 입장에 서있을 뿐인데, 그것을 기준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모두 선악과 때문에 우리 인간들에게 찾아온 결과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의 입장을 기준으로 고집하는 죄인들이 된 것입니다.

 

근본적인 “죄”와 그로인해 나타나는 “죄들”

 

사람이 왜 죄인인지 아십니까? 제가 이런 질문을 하면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했기 때문에 죄인이다”라고 대답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말이 맞는 말입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답은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다른 자기의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과는 다른 내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의견이 있기 때문에 불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르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순종보다 더 무서운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자기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나머지들은 그 죄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들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의 열매입니다.

 

로마서를 보면 “죄”라는 말이 있고 “죄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죄”는 단수입니다. 이것은 아담의 죄를 말합니다. 즉 선악과를 따 먹고 타락한 죄의 본질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러나 “죄들”은 복수입니다. 이것은 죄의 결과를 말하는 것으로써, 자기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죄를 열매를 말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죄”는 끊임없이 “죄들”을 만들어내는 공장입니다. 그리고 “죄들”은 그 공장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물건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많은 “죄들”을 범하는 이유는 “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죄들”이 아니라, “죄”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화를 내었습니까? 짜증을 부리셨습니까? 그 외에 많은 “죄들”을 범하셨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죄”를 가지고 있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 이 부분을 명확하게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죄”를 가지고 있는 죄인이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입니다.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죄들”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그 화는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의 결과로 나타나는 “죄들”인 것입니다. “죄”의 열매입니다.

왜 내가 화를 내고 남을 미워하는 것입니까? 내 속에 선악의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화를 내는 이유는 “나는 옳고 네가 틀렸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미워하는 이유는 “네가 틀렸고, 나는 옳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죄의 행동들은 내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죄”가 무엇이고, “죄들”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명확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그렇기 않으면 우리는 변화되기 위해 행동을 고치려고 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지 않고, 율법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가 어떤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이것을 여러분들이 바르고 명확하게 깨달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화를 내는 것은 “화내는 법”을 배워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남을 미워하는 것은 “미워하는 법”을 배워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들”을 범하는 훈련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아담의 생명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죄”를 가진 생명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화내고 다투고 남을 미워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았어도, 자연스럽게 “죄들”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죄들”을 행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보면 이것을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부모님들이 그 아이에게 화를 내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욕심내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화를 내고, 싸우고, 욕심을 부립니다. 부모님들이 그런 것들을 안 가르쳐줬는데, 그 아이들이 누구한테 화내는 법을 배웠습니까?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욕심을 부리는 법을 훈련한 적이 있습니까?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화내고, 싸우고, 욕심을 부립니다. 아이도 아담의 생명으로 태어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죄”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죄들”을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담의 생명 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미국 사람도 아담의 자손이요, 한국 사람도 아담의 자손이요, 중국 사람도 아담의 자손입니다. 중국인의 성격과 한국인의 성격이 서로 다르다고 해도, 똑같이 아담 안에서 태어난 죄인입니다. “죄”를 가지고 있는 인간의 본성은 다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은 죄인입니다. “죄들”을 범해서 죄인이 아니라, “죄”를 가지고 있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죄”의 결과로 “죄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면, 이제 여러분은 완전히 새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드디어 “하나님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오신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생명의 세계로 들어온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행위는 생명의 열매다.

 

저는 지금까지 생명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렸고, 선악과가 무엇인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들이 생명과 선악과를 이해했다면, 이제 이 말 또한 명확하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행위는 생명의 열매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오늘 행위와 생명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했다면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진정한 복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해를 하지 못하고 계시다면, 여러분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다른 복음에 빠져 있게 될 것입니다.

 

복음은 순수한 복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복음이 있습니다. 이 다른 복음이라는 것은 행위에 기초를 두고 예수를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을 뜯어 고치려고 합니다. 화내지 않고, 남을 미워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결코 변화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이것은 행동을 뜯어 고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죄를 짓는 이유는 아담의 생명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담의 생명 안에 있는 선악과의 영향력 때문에 우리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행동만 고치려고 한다면, 고쳐질 수 있겠습니까? 화가 날 때, 몇 번은 참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 안에 여전히 “나의 기준”과 “나의 의견”이 남아있다면, 결국 우리는 다시 죄를 범하게 됩니다. 생명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행위를 변화시키려 하니까, 변화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위는 생명의 열매입니다. 내가 화를 내는 것은 단지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아담의 생명이 발동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담의 생명은 보지 못하고 “참아야 해. 저 사람이 미운 짓을 했어도, 미워하지 말자. 저 사람이 나를 화나게 했지만, 그래도 화를 참아야 해.“ 라고 한다면 이것은 복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정말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방법으로 결코 변화되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그것이 참으려고 노력해서 참을 수 있다면, 왜 예수님께서 오셔야 했습니까? 여러분들이 결심하고, 각오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금식을 한다고 해서 죄를 안 지을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까?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나눠주기 위해서입니다. 아담 안에서 태어난 생명으로는 하나님의 계명을 절대로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새로운 생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생명을 나눠주시려고 세상에 오셨으며,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나눠주실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생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륜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생명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 안에는 선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의를 행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거룩하게 변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삶.

 

이제 생명에 대해서 눈이 떠지기 시작하십니까? 제가 처음 하나님의 생명에 대해서 설명할 때는 생명을 제대로 설명해드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비로소 생명의 의미를 여러분께 온전히 가르쳐드렸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고, 생명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행위를 뜯어고치려 오신 것이 아니고, 당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심어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 생명이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가 예수님처럼 거룩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후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예수님처럼 살 수 있겠습니까? 흉내는 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변화된 것이 아니고, 흉내를 내는 것뿐입니다. 흉내를 내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흉내를 내서 잠깐 거룩해질 수는 있어도, 거룩한 변화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토끼가 호랑이를 흉내 내는 것과 같습니다. 토끼는 본래 온순합니다. 용맹스럽지 못합니다. 그러나 호랑이는 본래 용맹스럽습니다. 토끼의 생명과 호랑이의 생명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토끼의 생명은 온순한 것이 특징입니다. 호랑이의 생명은 용맹한 것이 특징입니다. 본질부터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토끼가 호랑이를 흉내 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호랑이가 되고 싶어. 그러니까 이제부터 호랑이처럼 살 거야.” 그래서 토끼가 고기를 먹기 시작합니다. 토끼는 고기를 먹고 배탈이 납니다. 죽을 만큼 배가 아픕니다. 정말 힘들고 어렵게 호랑이를 흉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호랑이의 울음소리, 호랑이의 걸음걸이들을 흉내 냅니다. 그 외에도 호랑이의 여러 행동들을 흉내 냅니다. 하지만 이 토끼는 결코 호랑이가 될 수 없습니다. 평생을 노력해도 호랑이는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토끼는 토끼의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호랑이의 생명을 소유하지 못한 토끼는 결코 호랑이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의 생명으로는 절대로 예수님처럼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닮고 싶다면, 아담의 생명으로 사는 것을 끝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깨달으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의 행동을 고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임하셔서 우리 안에서 살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를 본받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 되신 예수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라디아서 2 20절 앞부분)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종교는 예수님을 흉내내고, 예수님을 본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은 예수가 내 안에 오셔서 내 생각을 바꾸고, 내 뜻을 바꾸고, 내 안에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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