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그 적실성(17:16~34)(부활)

 

 

 

마틴 로이드 존스 (D. Martyn Lloyd-Jones)

 

 

16 ○바울이 아테네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그는 온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격분하였다.

17 그래서 바울은 회당에서 유대 사람들과 이방 사람 예배자들과 더불어 토론을 벌였고, 또한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날마다 토론하였다.

18 그리고 몇몇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도 바울과 논쟁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몇몇은 "이 말쟁이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가?" 하고 말하는가 하면, 또 몇몇은 "그는 외국의 낯선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인 것 같다"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바울이 예수를 전하고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었다.

19 그들이 바울을 붙들어, 아레오바고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당신이 말하는 이 새로운 교훈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소?

20 당신은 우리 귀에 생소한 것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소" 하고 말하였다.

21 모든 아테네 사람과 거기에 살고 있는 외국 사람들은, 무엇이나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일로만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었다.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법정 가운데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많습니다.

23 내가 다니면서, 여러분이 예배하는 대상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들이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그 대상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24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25 또 하나님은,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26 그분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온 땅 위에 살게 하시며, 그들이 사는 시대와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27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28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몇몇도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다' 하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29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가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만들어 낸 것들과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30 하나님께서는 그 무지의 시대에는 그대로 지나치셨지만, 이제는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십니다.

31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정의로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정하신 사람을 내세워서 심판하실 터인데,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32 ○그들이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전해 들었을 때에, 더러는 비웃었으나, 더러는 "이 일을 두고, 선생의 말을 다시 듣고 싶소" 하고 말하였다.

33 그런 다음에, 바울이 그들을 떠나니,

34 몇몇 사람은 바울 편에 가담하여 신자가 되었다. 그 가운데는 아레오바고 법정의 판사인 디오누시오도 있고, 다마리라는 부인도 있고, 그 밖에 다른 사람도 있었다.

 

 

저는 오늘 밤, 성경에 나오는 바울의 생애와 사역에 있어서 위대하고도 유명한 사건에 관해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사건은 사도행전 17 16절부터 시작되는데, 아마도 18절이 이 사건의 성격에 대해 우리에게 가장 잘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본문에 보면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자들이 바울 일행과 마주쳤습니다. 일부는 말하기를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라고 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부활주일 저녁에 함께 모였으며, 온 세계의 다른 모든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에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온 교회가 이날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금요일이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음을 상기시켜주듯이, 오늘 부활절은 그분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줍니다.

1. 부활은 정말 진부한 이야기인가


그러나 오늘날 우리를 대적하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의 부활절이 이 현대 세계에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하는 것입니다. 이 밤에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이 나라의 대다수 사람들을 예로 들어봅시다. 그들에게 부활절이 갖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고 대다수 사람들에게 찬동하기 위해 부활절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하겠습니까?


이 날이 단지 휴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것도 일손을 멈추고 집에서 쉬거나 다른 집을 방문하거나 하는 주말 혹은 일반 공휴일과 전혀 다를 바 없다고 말하겠습니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부활절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삼척동자라도 그렇게 말하는 것은 허황되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말하는지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왜 부활절을 다른 공휴일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날로 여기는가” 또 “과연 교회에서 부활절에 관한 메시지를 들어보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아마도 들어보았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또 물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믿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왜 그 사실에 흥미를 갖지 않습니까?” “도대체 왜 상상할 수 없는 황당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만일 여러분이 이렇게 물으신다면,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들은 부활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 이야기는 마치 요정들 얘기 중의 하나 같군요”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더 나아가서, 자신들은 부활을 믿지 않으며 부활은 그들과 관계 없는 지나간 이야기 그리고 이 현대라고 하는 시대에는 걸맞지 않는 이야기라고 할 것입니다.


이 시대에는 전혀 실용적인 중요성도, 가치도 없는 것으로 치부할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합니까? 이유인즉 그들이 20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랍니다. 20세기의 사람이기 때문에, 분명한 지식, 분명한 정보, 분명한 이해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이 모든 사실을 거부하는 까닭은, 단지 이전 세대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던 사실들을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저의 이 말에 동의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 기념하고 있는 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놀라운 사실에 대해 현대인들이 취하는 전형적인 태도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오늘 저녁, 저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우선, 그들의 태도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제가 볼 때 이런 태도야말로 현대의 끊이지 않는 비극입니다. 이 복음을 거절하고 이 메시지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그런 태도야말로 현대인임을 나타내는 하나의 표지라고 생각합니다. 그 표지야말로 자신들을 20세기의 사람으로 만들어준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남들과 똑같아지려는 사람들의 태도에 관한 한, 무엇이 되었든 새로운 것이라곤 전혀 없습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저는 사도행전 17장의 본문으로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아덴이라고 하는 도시에 처음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1900년 전 아덴의 일반인들에게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 지금과 너무나도 똑같은 태도를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로서, 여러분들 모두를 그리고 여러분들 중에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 모두를 흔들어놓을 것입니다.


이야기를 더 하기 전에, 분명한 사실은 분명한 것으로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활에 대한 불신은 20세기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현대의 지식이나 공부나 과학적 발전 등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놀랍게도 똑같은 태도가 1900년 전에도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저는 다음과 같이 추론해봅니다. , 오늘날 이 세상의 입장이 그 이전의 태도와 전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진보한 지식이 각 개인에게나, 사람들의 필요에나,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에 관한 진리에 있어서나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밤 성경의 이 특정 본문에 의거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여러분에게 펼쳐보이고자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새로운 것을 보여주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은 이 낡고 오래된 책이 지나간 시대의 산물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성경이 미래 시대에만 적합한 것이 아님을 또한 알게 될 것입니다(바로 오늘 이 시간, 우리를 위한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1)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


이렇게 말해보겠습니다. 우선 사도 바울이 설교하고 있는 이 큰 도시 아덴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성경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울이 전파(설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과 그 부활이었습니다. 이 에피쿠로스 학파(쾌락주의)와 스토아 학파(금욕주의)의 철학자들은 바울의 소리를 들었고, 그 중 일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이 사람이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지식과 정보를 우리에게 전하는가 보군. 대체 이 말장이가 뭐라고 말하는 건가”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혹은 말하기를 “예수와 부활을 전하는 것을 보니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 보다”라고 했습니다.


, 이 도시 아덴을 한번 살펴봅시다. 그곳은 지금의 아테네와는 다릅니다. 1900년 전의 도시니까요. 좋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교육 수준이 높은 도시, 자긍심이 높은 도시, 즉 고대 세계에서 배움의 도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철학으로 특히 유명했습니다. 그들은 세계적으로 위대한 철학자들을 배출했습니다. 그리고 아덴은 그 철학을 배우고 가르치는 성지요, 중심지요, 수도였습니다. 따라서 아덴은 큰 도시로서 그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거기에는 크고 웅장한 건물들도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 그 유적을 관광할 정도입니다.

 
이처럼 큰 자부심과 지식과 학식을 겸비한 분주하고도 아름다운 도시는, 당시 두 학파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아마도 다른 분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훌륭한 지식인이요, 사람들의 교사요, 철학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신앙은 무엇입니까?


스토아 학자들은 뛰어난 사람들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들은 인생을 매우 경건하게 생각했습니다. 인생은 매우 어려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자신을 조절하고 강한 훈련을 하면 매우 경건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을 통제하고 특히 자신의 감정을 잘 살펴야만 인생에 성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또 한 가지, 그들은 일종의 피안의 삶에 대한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몸의 불멸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사후에 인간의 영혼은 또 다른 형태로 어디엔가에 존재하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개개인의 사후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영혼의 불멸 즉 개개인이 사후에는 어떤 위대한 절대자에게 흡수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 큰 절대자의 존재를 믿는 것이지, 몸의 불멸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소위 범신론으로서 신이 모든 것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토아 학파의 믿음입니다.


그러면 에피쿠로스 학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비종교적인 유물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좋은 삶이란 쾌락, 그것도 감각적인 쾌락에서 얻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자!” 바로 그것이 좋은 삶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가진 지혜의 핵심입니다. 그들은 사후 세계를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삶이란 전적으로 현세에 제한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곧 감각적인 삶입니다. 세상이란, 하나님도 없고 아무 의미도 없으며 원리도 없이 다만 기회의 연속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피쿠로스 학파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위대한 도시 아덴은 그 학문과 인생관에 있어서 크게 이 두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간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여러분은 온통 삶의 전쟁 가운데 처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묻습니다. 그 가운데서 평화만 찾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어떻게 그 평화를 얻을 수 있겠는가?

제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스토아 학파는 훈련과 용기를 통해서 찾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 그 자체와 활용을 통해서 평화를 얻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을 사는 동안 즐겨라. 먹고, 마시고, 즐기자! 내일에는 죽을 것이다.” 둘 다 결국에는 개인의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배적이고 지적인 시대 정신이었습니다.


(2) ‘알지 못하는 신’을 찾던 아덴 사람들


그러나 우리는 매우 흥미로운 얘기를 듣게 됩니다. 그들이 그토록 현세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도시는 여러 신들을 위한 수많은 신전들로 가득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그들은 매우 종교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 수 있는 모든 신들에게 신전을 지어주었습니다. 전쟁의 신, 평화의 신, 사랑의 신, 기타 모든 신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말할 것입니다. “아시죠? 분명히 어떤 힘이 있어서, 우리의 인생에 그리고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 힘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바로 이런 신들이 인생과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런 까닭에 그들이 바울을 붙잡았던 것입니다. 그가 좀 이상한 신을 퍼뜨리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이 신은 대체 누구야? 명부에 없는 신이잖아. 이건 허가되지 않은 일인 걸. 불법이지.” 너무나 많은 신들이 그들을 다스렸기에, 그들은 신의 명부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여러 신들을 위한 신전들이 가득했습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바울이 본 신전들 중에 유독 바울의 눈을 끄는 것이 있었습니다. 신전의 이름이 머큐리도 아니고, 마르스도 아니고, 쥬피터도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 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온갖 신들을 다 생각해내서 명부를 만들었다고 했지만, 그들 마음속에는 지울 수 없는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 그 모든 신들의 이름 뒤에 또 다른 신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모든 신들보다도 더 힘있는 신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신비한 존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능력에 걸맞는 이름을 지어줄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그를 ‘알 수 없는 신’으로 부르는 것뿐이었습니다.


이제 아덴 사람들에 대하여 아주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더 알려드리겠습니다. 21절의 괄호 안에 있는 말씀입니다.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개역 성경은 표시하고 있지 않으나, 영어 성경은 이 부분을 괄호 처리하고 있다; 삽입으로 간주한 것임). 이 얼마나 중요한 진술인지 모릅니다! 지금 여러분은 세계 제일의 철학이 소개되던 곳에서, 알 수 있는 모든 신에게, 심지어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까지 먹을 것이 장만되는 장면을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좀 더 새로운 것을 말하거나 듣는 것 외에는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에서는 그리 큰 만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것은 큰 불만이었으며 불행이었습니다. 모든 문화적 혜택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더 새로운 것이 아니면 듣거나 말하는 데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불만스러움을 드러내곤 합니다. “그게 정말인지 몰라.” “이게 도움이 될까 모르겠어?”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말합니다. “아, 여기 새로운 게 있군.” “이게 뭐지?” 그들은 온종일 새로운 것을 찾아다녔습니다. “이 사람이 우리에게 줄 새로운 위로와 평안이 있을까?” 그들은 그 새로운 위로와 평안을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것 중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크고 유명한 도시 아덴입니다.

 여러분, 제가 만일 여러분에게 늘 말하고 설명하던 것을 새로운 발견이라고 한다면 그건 거의 모욕이 아니겠습니까? 그게 바로 현대 세계가 하는 짓입니다. 너무나 똑같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오늘날에도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가 있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만약 TV를 보신다면, 그 두 학파에 너무나 익숙해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두 학파의 생각이 대표적인 현대사상으로 TV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도덕과 규율을 믿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 절대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테니까.” 그들의 지혜란 쾌락을 즐기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오직 쾌락과 행복을 위해서만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크게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로 나뉘어서, 아덴의 지식을 또다시 자랑하고 있습니다. 1900년 전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오늘 밤 이 도시의 사람들처럼, 아덴 사람들 역시 자신들의 문화를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사람들은 심판자이신 그리스도는 알지 못하면서, 자신들의 학식과 지식과 문화에 대한 이해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을 스스로 고발하는 공소장이나 다름없습니다.


(3)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는 이들


, 이제 여러분은 이 모든 사실을 하나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만족도 쉼도 평화도 없는 세상은 불행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로운 것,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가르침을 이야기하는 데에만 시간을 사용합니다. 괜찮은 사람들이 다 이 새로운 것을 추구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새로운 가르침을 베풀겠노라고 하면,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일 것입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하고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믿으려는 현대의 사람들이 불행하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이라는 완전한 패배감이, 일부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따르라, 내가 지도자가 되겠다. 내가 너희들을 승리와 평화와 기쁨으로 인도해주겠다”라고 말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어때, 그에게 한번 기회를 줘보지. 그것말고는 다 해봤잖아. 자 들어봐, 괜찮을 거라고 하잖아. 사람들도 원하고. 한번 기회를 줘보자구. 무언가 새로운 것. 이게 바로 그거야.” 이렇듯 사람들은 그것이 듣는 것이 되었든 말하는 것이 되었든 간에, 조금이라도 개연성이 있으면 다 믿으려고 합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철학이나 사교나 미신들이 모두 새롭고 신선한 자극을 찾아나서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세상은, 문제를 회피하고 열악한 현실과 삶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평화를 주고 점점 어두워져만 가고 있는 세계에 어떤 희망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밤의 이 세계는 바로 바울이 갔을 때의 아덴과 똑같은 상황인 것입니다.


1900년 전과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뭐란 말인가, 기독교가. 이 말장이들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가. , 예수라는 자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다고? 이 말장이들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그렇잖아도 문제투성이인 이 시대에 기독교 교회는 대체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이미 다 알고 있는 옛날 이야기를 또 들려주려는 건가? , 이제 그 이야기엔 질렸어. 대체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2. 바울의 복음 전도의 동기


⑴ 예수님의 부활 사실


이제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잡아 아레오바고로 데리고 가서는 그에게 이 새 교()가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것은 일종의 재판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하는 것으로 볼 때, 한편으로는 이 새로운 종교와 새로운 신에 대해서 듣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법과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묘하게 합쳐져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무엇을 전했냐고 묻습니다. 바울이 무엇을 전했습니까? 그는 회당과 거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예수와 그의 부활을 전했습니다.


이제 저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왜 바울이 그 일을 했습니까? 왜 저도 바울처럼 이 밤에 그 미약한 소리를 전하려는 겁니까? 예수와 부활을 전하는 일이 왜 계속되어야만 합니까? 그 전하는 소리가 여러분에게 조금이라도 적절한 면이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그저 오래된 옛날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까?


기독교는 이 현대세계에 있어서 단지 시대착오적인 종교에 불과합니까? 아니면 사도 바울이 아덴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한 것처럼,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 가운데 전하고자 하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바로 지금 이 시간 전세계에, 그 사실을 보지도 못한 자들에게 예수의 부활이야말로 가장 시급하고도 적절한 메시지임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까?


왜 바울은 예수와 그 부활을 전했습니까? 첫 번째 대답은 그것이 하나의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단순히 그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전했던 것입니다. 그는 다른 구절에서 자신을 말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말장이(babbler)의 어원적 의미는 ‘씨앗을 쪼아먹는 것’(쪼아먹는 새;seed gatherer)이란 뜻입니다. 고대 세계에도 이야기꾼이 있었습니다. 이 직업을 가진 사람, 아니 철학자 또는 연사라고 해야 할 이 사람들은, 시장에서 진부한 이야기들을 지껄여댔고, 지금도 텔레비전에서 똑같은 일들을 하고 있죠. 그들은 그 이야기들로 먹고 삽니다. 그들은 여기저기서 조금씩 주워 모은 정보들을 엮어서 책으로 펴냅니다. 똑같은 일이 고대세계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그들을 가리켜 말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바울을 말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고,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완전히 오해하고 있군요.” 그는 자신이 서투른 철학자가 아니라고, 떠돌이 철학자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그는 바리새파의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이제는 어떤 진정한 ‘사실’을 밝히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그는 지금 선포자(설교자)입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것은 어떤 인생관이나 이론이 아니고, 단지 한 사실일 뿐입니다. 그 사실이란 바로 나사렛 예수가 말 그대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은 어떤 생각도 아니고, 개념도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 있는 그대로의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지금 자신이 예수와 그 부활을 인류 역사상 일어났던 사건 중에 가장 놀라운 사실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에 그것을 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아덴 사람들에게 알려주려 애쓰고 있습니다.


⑵ 다메섹 도상에 나타난 부활하신 예수님


, 이제 바울의 이야기를 더듬어봅시다. 이 사람, 설교자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은 또 어떤 사실(사건)로 인해 예수를 전하는 일에 열중하게 되었습니까? 그는 자신이 유대인이고 바리새인의 높은 지위에 걸맞는 양육과 훈련을 받았으며,유대 율법의 권위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사렛 예수에 관해 듣게 되었고, 그 모든 것을 증오했습니다. 예수는 단순한 목수라고 판정을 내렸습니다.


“그가 대체 무엇을 안단 말인가?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훈련을 받아본 적도 없다. 이 사람이 율법에 관해 무엇을 알겠는가? 전혀 알 수 없다. 그는 목수야. 그는 갈릴리 출신의 평민이라구. 그는 가말리엘의 발 아래서 배워본 적이 없는 사람이야.” 그도 역시 다른 바리새인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했습니다. 완전히 신성모독자로 여겼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바로 그런 이야기들이 반복됩니다. 그는 기독교와 그 교회를 끝장내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습니다. 자기의 열심과 열정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이 일을 했습니다. 그에게는 이 말도 안 되는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이 예수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얘기는,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부조리한 말이요 신성모독적인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울이 지금 여기 아덴에서 바로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대체 무엇이 그를 이렇게 바꾸어놓았습니까? 거기에는 오로지 한 가지 대답밖에 없습니다. 그가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긍정적인 증거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는 자신이 말하던 것이 거짓말이요, 진리를 부인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다시 살아나사 승천하신 나사렛 예수가 그에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진실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 영광으로 올라가셨다는 절대적인 증거를 바울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의 삶을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는 예수야말로 이 세상에서 죽음과 무덤을 정복하고 생명으로 올라가신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죽음을 통과하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몸으로 다시 살아나신 분이라는 그 사실이 그의 삶에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전생애를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는 바로 이 사실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아덴에서 그곳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바울이 한 설교의 의미


잘 들어보십시오.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17:15), 성령에 감동되고 말았습니다. 온 도시가 우상숭배로 꽉 찬 것을 보고는,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지금 데살로니가에서 소동을 일으켜서 목숨을 구하고자 아덴으로 도망쳐온 것입니다. 그래서 동료들이 도착할 때까지 아무 일도 벌이지 않을 의도로 지금 잠자코 있는 것입니다. 그는 동료들을 기다리며 마치 관광객처럼 아덴 시내를 걷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그의 영혼은 일종의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는 이 사람들에게 전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온 성 사람들이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것이 참으로 불쌍해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흑암과 위험 속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그는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경건한 사람들과 논쟁하기 시작했습니다. 날마다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논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하는 짓이 위험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잘못하면 체포되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 백성들이 너무나 불쌍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은 그들로 인해 터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저들에게 말해야겠다. 나를 그토록 변화시켰던 그 무엇이 저들에게도 역사할 것이다.” 그는 성령에 감동되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예수와 그 부활이라는 기이한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들이 그 사실의 의미를 이해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그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작은 제목으로 여러분에게 그 뜻을 말씀드리겠습니다.


⑴ 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부활이 바로 이 사실을 입증합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최초로 살아나신 유일한 존재이십니다. 죽기 직전에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었다가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는 죽음을 건너 생명으로 가셨습니다. 이전에 결코 일어난 적이 없던 일입니다. 진실로 처음 있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그것이 사실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중에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그것이 사실임을 알았습니다. 바로 그 사실로 인해 그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경멸하던 예수가 다름 아닌 영광의 주시요,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가 말하는 그분이십니다.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아버지께로부터 온 유일한 사람,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주장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먼저 계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여러분이 사복음서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처음에는 이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뵙고 난 뒤에 믿게 되었습니다. 부활은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최종적인 증거입니다. 구약성경의 선지자들과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은, 그가 못박혀 죽을 것이나 3일 후에 다시 살아나실 것임을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는 모든 예언의 완성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나사렛 예수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에 관해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나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임을 압니다. 이 말을 들으십시오.

 
왜 들으라고 합니까?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 “여러분들은 지금 알지 못하는 신을 찾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 신전이 그 증거입니다. 여러분은 선배 철학자들이 최선을 다했지만 알 수 없었던 신, 그러나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 신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더 이상 알아낼 수가 없어서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신’으로 짓고 말았습니다. 그 이름이 모든 사실을 대변하며, 이 말은 곧 여러분이 그 신을 찾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를 권면할 때 했던 말을 그들에게도 일러주었습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던 것을 말입니다. “여러 철학자들이 매우 근접했었습니다. 플라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하나님께 매우 가까이 갔지만, 그러나 그들은 결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창조자가 있어야 한다는 느낌만 가졌을 뿐, 그분이 누구인지는 몰랐습니다.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다시 말합니다. “들어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이 알지 못하는 신을 찾는 방법을 말해주겠습니다. 그분을 알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리고 내가 여러분에게 그 길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방법도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리고나서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인 이 예수를 그들에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왜 세상에 오셔야 했는가? 이 곳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가? 그 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1:18).


하나님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더 이상 알지 못하는 신이 아니라, 알려진 신이 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분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14:9)이라고 말씀하신 분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3: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너희는 하늘에 올라갈 수 없지만, 나는 너희에게 지식과 정보를 주기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여기 아덴에서 섬기는 모든 신들은 다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금이나 은이나 돌로 사람이 고안하여 새긴 수공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덴 사람들이 섬기던 신은 바로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거기 있는 신들을 귀금속으로 만들어서 그것들 앞에 절하고 그것들을 섬겼습니다. 강아지 모양 같은 것을 세워놓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엉터리입니다! 이것은 우상 숭배요, 그런 것들은 전혀 신이 아닙니다. 바울은 외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아덴 사람들이여, 이것은 미신이요, 황당한 것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건 거짓입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이제 바울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가 창조주이심을 아덴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 경배받지 않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문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이는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바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오직 참되시고 살아계시고 영존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전에 거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 하나님을 만들 수도 없고, 여기저기로 옮길 수도 없습니다. 그분이 거하실 전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은 모든 것을 만드셨고 또한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는 온 우주의 통치자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그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 그분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시인들 중에 몇몇 사람이 발견하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며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분에게서 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바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만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신이 바로 율법의 수여자시며, 계속해서 섬김을 받으시던 하나님이심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경배를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배를 요구하십니다. 그는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자기 형상을 따라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자신과 교제하기 위해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경배를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께 경의를 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경배받으실 자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을 지으신 이 위대한 하나님이 이제 요구하십니다. 사람들이 다 그분을 믿고 그분께 경배하며, 그분을 찬양하기 위해 살며,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행하며, 그의 율법을 지키며, 그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의 머리 속에 나타내신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주재자 하나님, 우주를 붙드시는 자, 그 하나님이 바로 사람에게 경배를 요구하십니다.


⑵ 이 세상을 심판할 날을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의로 이 세상을 심판할 날을 약속해주셨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한 날을 이미 정하셨습니다. 시작이 있었던 것처럼, 이제 마지막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로서 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부활을 증거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가르침입니다. 한 날이 이를 것이고 그때에는 이 우주의 종말이 있을 것이며, 우리가 아는 삶의 마지막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이 이르면 큰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기 위해 설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습니다. 우상 섬기는 것을 간과하시던 때는 이제 끝났습니다. 하나님이 간과하시던 무지의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도처의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할 것을 명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가 의로 이 세상을 심판할 날이 이미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죠?”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바울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알 수 있고 말고요. 죽음에서 예수를 다시 살리신 사실 가운데 분명한 확신이 주어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을 보장한다는 선언입니다. ,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죽음에서 살리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환영받지 못하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미워하든 아니든 간에 문제는 그것이 참이냐 거짓이냐 하는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지금 바로 이 문제에 봉착해 있습니다.


둘 중에 한 가지입니다. 오늘밤 이 모든 어둠과 미신과 무지와 인간만의 생각에서 나온 철학으로 엮어진 스토아 학파·에피쿠로스 학파의 논리와 가정을 믿고 가겠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오셨다가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다가 살아나셔서 사람들에게 보이시고, 하늘에 올라갔다 곧 다시 오실 그분의 증거를 들으시겠습니까? 전자가 아니면 후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분의 입으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이 요한복음 5장에 아주 간단하게 나와 있는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5 21절부터 26절입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사람들을 일으켜 살리시니,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을 살린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맡기셨다.그것은,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의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듣는 사람은 살 것이다.그것은,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생명이 있는 것처럼,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셔서, 그 안에 생명이 있게 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것을 되풀이할 뿐입니다.


,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메시지입니다. 그 메시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해줍니다. 뿐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이 무덤에서 살아나와 영원하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임을 전해줍니다. 과연 그분이 무엇으로 우리를 심판하시겠습니까? 그분은 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거기에는 불공정한 것이라곤 없습니다. 전적으로 정의로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심판의 말씀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벌써 이 말을 여러분에게 전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12:30~31). 저나 여러분이나 바로 이 말씀으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단지 여러분이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만 가지고 심판을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전 오늘 술취하지도 않았구요, 간음도 혼전 정사도 안 했어요. 살인한 적도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에 관심을 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알기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너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니? 너는 하나님을 경배했니?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께 순종했니? 그분께 영광을 돌렸니?” 만일 그렇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죄인이요 형벌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 사실을 여러분께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아덴 사람들에게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의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그 증거는 바로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에서 읽은 대로, 일부 사람들은 죽은 자의 부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바울의 말을 막았습니다. 그 전하는 말을 중지시켰습니다. 모임을 해산하고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그런데, 제가 오늘밤 여러분을 그들처럼 가버리게 한다면 어떡하겠습니까? 이와 같은 부활절 메시지를 전하지 않고 서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계십니다. 오직 한 분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가 우리를 지으셨지 우리가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이 그분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가 원하시면 어느 때에라도 취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죽을 것이며, 죽음 뒤에는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바로 그때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너는 네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했는가?” “너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했는가?”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 어리석고 눈먼 자들이여! 그들은 어째서 기다리지 않았을까요? 어째서 묻지 않았단 말입니까? “당신 말대로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단지 심판을 선포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단 말인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심판을 위임하셨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 단지 우리에게 저주를 쏟아 붓고 우리에겐 아무 희망이 없다고 말하기 위해서, 과연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셨단 말인가?” 이렇게 물었다면, “절대로 아니오”라는 답을 얻었을 텐데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은, 그 전에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에 대해 아마도 물으실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러면 그분이 어떻게 죽었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어떻게 죽을 수 있나?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왜 그 아들을 죽도록 내버려두신단 말인가?”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매우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단지 반드시 다가올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미리 그 시험을 통과할 방법이 있음을 또한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그의 메시지는 우리를 모두 죄인으로 저주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버려지고 아무런 희망도 도움도 얻을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자신이 알고 있으며 우리를 구원하시고 살리실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거역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으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저주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저주를 자신에게로 옮기셨습니다. 그가 자기 몸에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나무 위에 달리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셨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는 다시 살아나시기만 한 게 아닙니다. 그는 먼저 죽으셨습니다. 그가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용서받았습니다. 우리를 대신하는 제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영원한 죽음과 저주를 피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이르게 하고,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려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또한 오늘 저녁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드리는 저의 메시지입니다.


4. 회개하라


지금 여기 계시는 여러분들은 분명 하나님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설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것을 한번 깊이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이야기를 듣는 여러분이, 철학자들의 영민함에 놀라는 여러분이, 가장 최근의 이야기와 이론과 사상을 듣고 있는 여러분이, 진정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임을 깨달으셨습니까? “먹고 마시고 즐기자. 인생은 아름다운 거야. 우리가 배운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라고 말하는 여러분이, 진정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임을 깨달으셨습니까?

 
여러분, 어떻게 하면 두려움 없이 죽을 수 있는가를 알기 원하십니까?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참 평안을 얻기 원하십니까? 정결하게 나타나기를 원하십니까? 정직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십니까? 새생명을 원하십니까? 시간의 역사, 그 시작과 영원을 알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도 사도 바울이 아덴 사람들에게 배우라고 권하는 것을 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회개할 것을 명하십니다. 우리의 무지함을 인정하십시오. 우리의 실패를 인정하십시오. 우리의 죄를 인정하십시오. 하나님께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씀하십시오. 너무나 당혹스러운 인생을 산 나머지, 지금 여러분이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모른다고 말씀드리십시오.
죽음을 인정하고 회개하십시오.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잘못을 인정하십시오. 금욕주의 사상, 쾌락주의 사상, 모든 철학과 영특함을 버리십시오. 단지 “전 모릅니다. 그리고 철학자들도 모릅니다. 저는 이렇게 흑암과 무지함 속에서 죽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씀드리십시오. 회개하십시오! 하나님은 도처에 있는 자기 모든 백성들을 부르셔서 회개하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에 관한 이 단순한 메시지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부활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16).


금욕주의자들도 쾌락주의자들도 결코 여러분에게 ‘알지 못하는 신’을 가르쳐주지 못합니다. 오늘밤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분이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실 뿐 아니라, 여러분이 그분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그분이 자기 성품을 여러분 안에 두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성품을 갖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전에 알지 못하던 힘을 얻게 될 것이요, 평화와 기쁨과 행복을 맛볼 것입니다.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벌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에서 심판을 지나 생명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곳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그의 아들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바로 지금부터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생명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하나님을 뵙고 거기에서 그분의 임재의 영광중에 영원토록 지낼 것입니다.


여러분은 회개하셨습니까? 그렇다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혹 살아서 주님의 재림을 맞는다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그분을 볼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과 그 후에 심판이 있는 것은, 어디에서든지, 모든 이들에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이미 약속하신 분을 통해 장차 이 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분명한 확신을 심어주셨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분 자체가 부활의 증거로 주어졌음을 믿는다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다면, 그분을 전적으로 믿으십시오. 여러분도 죽음에서 살아나 하나님 앞에서 공의로 심판 받을 것 또한 믿어야만 합니다. 만일 그 사실을 믿는다면, 지금 즉시 회개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여러분의 죄가 사해졌음을 믿는다면, 그럼으로써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심판 때에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후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소유를 누리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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