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을 위한 기도의 동기(33:12~17) (우리의 행동으로)

(하나님의 이름과 영예와 영광과 하나님의 소유인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다음에, 밖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세상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 신앙 전체를 판단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대표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은 교회를 하나님 대신으로 여깁니다  오늘날 의 관심은 통계나 숫자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교인수가 줄어드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들은 교회를 가득 채우고 사람들을 다시 교회로 끌어모으는 방법과 방식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들은 교인 수와 재정과 조직들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

 

 David Martyn Lloyd-Jones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33:12-17)

 

우리가 출애굽기의 이 위대한 장을 계속 연구해 나가기 전에 이 장에서 지금까지 배운 것을 상기해 봅시다. 모세는 자신의 개인적인 확신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자신과 백성들을 위해 능력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또한 그는 교회와 그의 메시지가 가짜가 아님을 예외적으로 특별하게 확증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째서 모세가 이러한 것들을 위해서 기도했는지 숙고해 보아야합니다. 그의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분명히 이것은 우리에게도 정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의도와 동기의 영역에서 끊임없이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릇된 목적을 향하여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가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 큰 유익과 교훈을 얻게 될 것입니다. 물론 성경 어느 곳을 보든지 모세의 간구는 하나님의 여러 중재자들이나 성도들에게도 해당됨을 발견할 것입니다.

 

더구나 제가 여러분에게 상기시켜드리고 싶은 것은, 과거의 위대한 부흥 역사를 읽어보면, 특히 하나님께서 가장 두드러지게 사용하셨던 사람들이 부흥이 임하기 전에 얼마나 간절하게 중보 기도를 드렸는지를 주시하면서 그들의 기록을 읽어보면, 그들이 모세와 똑같은 동기로 힘을 얻었음을 틀림없이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동기에 관해서 분명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촉구하는 바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째서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까? 무엇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까? 첫번째 대답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관심 바로 이것입니다. 13절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바로 이것이 동기이며 이유입니다. 모세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가 부단히 하나님께 이렇게 특별하게 간구하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출애굽기32:11-12에서도 이와 같은 예가 발견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금신상을 만들고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분을 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은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32:9-12)

 

여러분은 모세의 관심을 아십니까? 그는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명성과 영광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다시 여기서 모세는 이 점을 주시합니다. 그는 "이 족속은 주의 백성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사실상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예가 이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은 표증을 주셨고 기이하고 이적적인 방식으로 애굽에서 그들을 구해 내셨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건너게 하사 그들을 이끌어 내셨는데 광야에 그들을 내버려두려 하신단 말씀입니까? 그러면 애굽 사람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다른 족속들이 뭐라 말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실패했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큰 일을 약속하셨는데, 이제 그러한 약속들을 이행하실수 없는 겁니까? 그 약속들을 성취하실수 없는 겁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과 영예가 바로 이 전체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고 하나님께 떼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간청이 시편에 끊임없이 나타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선지서에도 부단하게 나타납니다.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그렇게 말할 자격도 없고 실질적으로 그것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의 영원한 영예를 위해서입니다."

 

모세는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에 관심이 있었고 그것을 위해 열심을 내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특별히 하나님께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요점들을 상세하게 다룰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닙니까? 결국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물과 말씀으로 되어진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입니다. 어째서 어둠 가운데서 불러내사 그 기이한 빛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셨습니까? 그를 찬미하고 그의 탁월함과 덕을 선전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차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이름과 영광과 영예 때문에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세상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 신앙 전체를 판단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대표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은 교회를 하나님 대신으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기서 모세의 본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첫번째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점이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고 말씀드린다면 너무 지나칩니까? 물론 오늘날 교회에 대한 관심은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 관심은 무엇에 대한 것입니까?

오늘날 의 관심은 통계나 숫자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교인수가 줄어드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들은 교회를 가득 채우고 사람들을 다시 교회로 끌어모으는 방법과 방식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들은 교인 수와 재정과 조직들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이름의 존영에 관심을 표하는 연례 모임과 집회들에 관해서는 얼마나 자주 듣습니까? 우리의 태도는, 교회가 오히려 하나의 인간적인 조직인 것 같은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자기 사업이 잘 안되면 근심을 하듯이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염려합니다.

 

우리는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고 제도와 조직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일차적인 관심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일차적인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상태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까? 만일 그렇다면, 왜 그런 마음이 듭니까?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가는 습관이 있었던 빅토리아 시대 말기나 에드워드 시대를 기억할 만큼 나이가 많아서입니까? 그것은 단지 위대한 교회 시대에 대한 일종의 향수병에 불과합니까?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관심이 어떤 것인지 조금이라도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고통스럽습니까? 우리 마음이 상해 있습니까? 슬픕니까? 우리는 주위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는 것을 볼 때 마음과 생각과 영이 크게 무거워집니까? 이 열심이 거룩한 열심에 속한 것을 알고 있습니까?

 

시편 기자가 시편 79편에서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10)라고 말할 때 그의 관심이 무엇이었는지 아시겠습니까? 이방 사람들은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들이 어떤 뛰어난 신에 대해서 말했다. 다른 모든 신보다 더 뛰어난 신이라고 말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신이라고 하면서 그 하나님을 자랑했다. 그 하나님은 놀랍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그런데 그가 어디 있는가? 저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라! 어떻게 이 사람들이 자기들이 그런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다고 외칠수 있겠는가? 진실로 그 말이 진리라면 그들은 그러한 상황에 있을 턱이 없다."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일차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영광과 영예와 이름입니다.

우리의 제도들이나 우리의 성공이나 실패가 문제가 아닙니다. 제일 우선적인 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시편기자는 그것을 알았습니다. 시편 2편에서 그것을 얼마나 잘 묘사하고 있는지 주목해 보십시오. "세상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2). 물론 그들은 다윗과 이스라엘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영적인 통찰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이것은 나를 거스름이 아니요 하나님을 대적함이다. 그들이 스스로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자를 대적하고 있다."

 

실로 이것은 시편 전체를 통해서 어느 곳에서나 줄기차게 발견되는 위대한 주제입니다. 저는 그 경우를 딱 하나만 더 들어 보겠습니다.

시편 83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대저 주의 원수가 훤화하며 주를 한하는 자가 머리를 들었나이다 저희가 주의 백성을 치려 하여 간계를 꾀하며 주의 숨긴 자를 치려고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가서 저희를 끊어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2-4).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에 이것에 대한 놀랍고 서정적인 실례가 있습니다.

당국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괴롭히고 복음을 전파하지 못하게 막은 후에, 교회를 진멸해 버리고 교회가 복음 전하는 일에 종지부를 찍게 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을 위협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돌아가서 모든 믿는 무리들과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시편 2편을 인용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십시요-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4:26).

 

그런 다음에 그들의 말이 나옵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4:27-29).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들은 분명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자신들에 관해서만 기도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선적으로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진실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인식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반드시 되찾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접근 방식은 너무 주관적이고, 언제나 우리 자신들만 생각합니다. 이것은 부흥을 위한 기도방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영광과 영예와 그 이름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약성경에 있는 위대한 기도들을 흝어 보십시오. 그러면 언제나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크신 하나님이 마땅히 받으셔야 할 경배를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근심했고 마음이 편치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변호하고 일어나사 그 원수들을 흩어 버리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모세가 기도한 첫번째 동기입니다.

 

모세가 기도한 두번째 동기 - 이것은 언제나 첫번째가 아니라 두번째 기도제목이 되어야 합니다-는 교회 자체의 영예에 대한 관심이었습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 대목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 민족으로 이루어졌던 교회에 대한 모세의 관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애정어린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놀라운 조짐을 몇 가지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단순히 개인적인 축복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이 축복에 관련될 것인지를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그에 대한 놀라운 실례를 다시 보게 됩니다. 이것은 구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대목 중 하나입니다. "이튿날 모세가 백성엑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의 죄를 속할까 하노라 하고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30-31).

 

잠깐 멈춰 보십시오. 그는 마치 힘이 다하여 더 이상 말할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그는 큰 영혼의 고뇌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32). 만일 하나님께서 그 축복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함시키지 않으신다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백성을 지워 버리리라. 내가 너에게서 한 민족을 만들려 한다."

모세는 말합니다. "아닙니다. 저도 지워 버려 주소서. 이 백성이 없으면 저도 더 이상 나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중보의 기도입니다. 이 사람은 교회 전체의 상태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복을 받지 않는다면 자기의 개인적인 삶이나 복락이나 형통함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습니다. 여기 출애굽기 33장에서 그 모든 것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우리는 여기서 더 머물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문제는 이 정도에서 접어 두겠습니다. 여러분과 저,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을 잠깐 잊고 교회와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의 단체를 염려하는 단계에 이르기 전에는 부흥에 관한 한 어떠한 소망도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많은 기도는 너무나 주관적이고 자기 중심적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제와 어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난제들을 다 해결하고 난 다음에는 너무 지치고 피곤해서 교회를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내 축복,ㅡ 내 필요ㅡ 내것을 위해서만 기도합니다.

 

제가 지금 냉엄하고 몰인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난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우리의 기도와 중보 기도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과 우리 가정 이상의 자리를 차지 합니까?

 

우리는 세상 앞에 서서, 세상을 위한 유일한 소망은 기독교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교회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회의 난제들을 봅니다. 그 난제들은 우리를 향해 소리치고 있습니다. 주가 바뀔때마다 그 난제들은 더 증가합니다. 이것이 유일한 해답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알고, 그것을 믿는다면, 저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묻고 싶습니다.

 

교회가 이것을 전할 능력을 가지되,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나는 이 모든 아성들이 무너져 내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속에서 완전히 압도당할 그러한 방식으로 전할 능력을 갖기 위해서 얼마나 자주 기도합니까?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들이 성령의 권능으로 옷입기 위해 드리는 기도의 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은 이것에 대해서 중보기도를 드립니까? 여러분은 그것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까? 제가 말씀드리지만 모세는 자기 자신보다 이 점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혼자만 약속된 땅으로 올라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혼자만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교회를 중히 여깁니다. 온 교회가 저와 함께 가지 아니하고, 아버지께서 우리 중에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저는 결코 나아가지 않겠습니다. "

 

우리는 기독교회에 관해서 다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접근 방식은 너무 주관적(자기의 견해나 관점을 기초로 하는. 또는 그런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복음 전도에 있어서도, 성화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도, 주관적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적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출발하고, 우리 자신의 필요와 난제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을 그저 우리에게 해답을 제시하시는 대리인쯤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시는 공급자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복음 전도나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과 그 영광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모든 것보다 뛰어나신 하나님, 그분에게 모든 만물이 속해 있습니다. 사람들이 구원받을 필요가 있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작은 개인적인 난제를 풀기 위해서 구원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복음 전도의 동기가 교회를 채우려는 데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실패합니다. 물론 교회를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에게 도움을 주지 않고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주된 문제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못할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달고 다니며 하나님에 의해서 존재케 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무리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제도나 기관들의 집합으로 생각하는 일을 멈춰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 개념을 다시 되찾아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존재한다는 개념도 되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위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위해서 간청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영광과 영예를 위해서 간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기도한 세번째 동기는 밖에 있는 이방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이 알기를 바랐습니다.

"모세가 주께 아뢰었다. "주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시려면, 우리를 이 곳에서 떠나 올려 보내지 마십시오.   주께서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시면, 주께서 주의 백성이나 저를 좋아하신다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저 자신과 주의 백성이 땅 위에 있는 모든 백성과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까?""(33:15-16)

 

이상이 부흥을 위해 기도한 동기들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영예와 영광과 하나님의 소유인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다음에, 밖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은 조롱하고 비웃고 있습니다. 그의 백성들이 연달아 일어나 말합니다. "오 하나님, 일어나셔서 저들을 침묵시키소서, 우리에게 큰 일을 행하사 저들에게 "잠잠하라, 고요하라, 가만히 있으라"고 말할수 있게 하소서."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46:10).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입니다. 그들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두었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전체를 통해서 이것에 대한 여러 실례들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또한 교회의 상태를 생각하며 소명감을 느끼고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됨을 보고 마음이 상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역시 해당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여기 이 성경에 매우 강한 어조로 표현된 것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때로는 너무 강하여 어떤 소수의 사람들은 저주를 발하는 시편들을 보고 고민에 빠질 정도입니다.

 

그러나 저주를 발하는 시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사람들이 가진 열심의 표현에 불과합니다.

시편 104편에 나오는 사람은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시며"라고 말합니다. 그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피조계를 더럽히고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산들과 골짜기와 시냇물을 봅니다. 수액으로 가득 찬 하나님의 수목들을 봅니다 .....그는 새들과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어우러져 하나님의 기이함과 영광을 보여주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하나님께서 선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욕하고 배역하며 모독하는 죄인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시편 기자는 의분과 열심을 가지고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제가 말씀드리지만, 이것이 이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설명입니다. 그들은 개인적인 복수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 영광과 그의 위대한 이름을 위한 열정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속에서 이러한 바람을 느끼지 못한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곧 라디오나 텔레비젼에서 점잖게 말하는 사람들, 소위 철학자들이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거만한 사람들의 입을 막고 그 거만한 신성 모독자들의 혀를 저지할 만한 어떤 일을 하나님께서 일어나 행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 없다면 말입니다. 때로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하나님이 영원한 하나님이심을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느낍니까?

 

그렇습니다. 물론 그들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어 잠잠해질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여기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들이 죄를 깨닫고 각성하여 참으로 진리를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 뒤따라옵니다. 그 바람은 하나님께서 너무나 기이하고 놀라운 일을 행하심으로 그들이 놀라서 "이 어찐일이냐? 결국 이 사람들이 옳은가? 우리의 논증이 무산되는 것 같지 않은가? 우리는 하나님이 실패하셨고 그 사람들을 광야에 버려둔 줄로 생각했다. 모든 것이 저 사람들을 거스르고 있는 것 같았다"고 말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이적적인 일을 갑자기 행하셔서 그들을 인도하시면 그 이방 사람들도 다시 생각하며 ", 그들이 옳았던 것 같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각성과 회심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첫번째 단계입니다. 그들이 관심을 갖고 일어서게 됩니다. 부흥이 일어날 때 언제나 그러한 일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언제나 비웃던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쳐다보게 됩니다. 그러다가 회심하게 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모세는 지금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꼼짝못하게 사로잡혀서, 하나님께 그들을 인도하시고 지도하시는 방향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게 되기를 바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볼 때 우리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 스스로 묻게 됩니다. 교회가 세상에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 매우 멋지고 훌륭한 사람들과, 세상을 모른 체하며 세상의 잔인함과 부정함과 추함을 무서워한 나머지 자기 치마폭에 움츠러드는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을 때, 그 교회는 비참한 상태에 처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사람들이 잠잠해지기만을 바라지 않습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은 이 사람들도 눈을 떠서 자기들의 고통의 원인을 알고, 불의의 사슬에서 건짐을 받으며 사악과 어리석음의 족쇄에서 풀려나기를 바라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이 감화받고 영향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해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까?

 

제가 이해하기는 모세가 이러한 간구들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고무시킨 주요한 세 동기가 바로 그것들입니다. 우리가 주목할만한 다른 것도 있습니다. 그가 기도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그가 무엇을 위해서 기도했는지, 어째서 그것을 위해서 기도했는지 알아보았으니, 이제는 그의 기도방식을 주목해 봅시다. 여기에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모든 위대한 성경의 기도에 언제나 드러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모세의 기도의 첫번째 특징은 담대함과 확신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주저함도 없습니다. 고요한 확신이 있습니다. 저는 거룩한 담대함이 있다고 말씀드리렵니다. 이것이야말로 언제나 승리했던 모든 기도의 위대한 특징입니다. 물론 그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기도가 열납된다는 확신이 없거나 지존자 앞에 나아갈 길을 알지 못한다면 진정으로 기도할 수 없고 중보의 기도는 더더욱 드릴 수가 없습니다. 무릎을 끊을 때 여러분의 죄가 생각나고 그 죄들에 대해서 어떻게 할지 모른다면, 그리고 죄용서를 위해서만 온 시간을 들여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듣고 계신지는 확신할수 없다면, 어떻게 기도할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모세처럼 중보 기도를 드릴수 있겠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하였고, 확신이 있었고, 거룩한 담대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가까이 계시다는 여러가지 암시들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입니다. 지성소로 나아갈 길을 알고 있습니까? 오직 한 길 뿐입니다. 히브리서 4:14에서 그것을 아주 완벽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그런 다음 저자는 계속해서,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체휼하시며 우리와 한결같이 모든 일에 시험을 받으신 분이로되 죄는 없으신 대제사장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도의 문제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4:16).

 

여러분은 "그러므로" 라는 말을 쓰는 히브리서 기자의 의도를 아십니까? "그러므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이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이것은 하늘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관한 모든 진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해질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저 자신을 보면 담대해질수 없고 말할 수 조차 없습니다. 욥처럼 저는 제 손으로 입을 가립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42:5-6).

 

저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중보 기도를 드려야 한다면 말해야 합니다. 어떻게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말할수 있습니까? 답변은 오직 하나입니다. 나의 위대한 대제사장이 하나님 아들 예수시며, 그 피로 인해 내가 지성소로 나아갈 권리를 얻게 되었고, 담대하게 그리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모세가 기도할 때 가진 그 담대함과 확신을 주목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여러 세기에 걸친 여러성도들의 기도문을 읽어 본다면 똑같은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가치 있고 흥미있는 두번째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논리적으로 따지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외람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진리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에게 상기시켜 드리겠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실로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께 따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여러분도 알다시피 모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께 상기시켜 드리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논증을 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모세는 마치 이렇게 하나님께 아뢰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논리적이고 일관성이 있으시니 친히 말씀하신 것을 실행하소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셔 놓고 아무 일도 안하신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 "(그런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데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그런 다음 16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아니하신다면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하고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논쟁을 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하나님께 상기시켜 드렸습니다. 그 약속에 비추어 하나님을 붙들고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 오 하나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께서 행하셔야 한다는 것을 모르시나이까?

 

어떤 이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 옳은가? 주제넘는 짓이 아닌가?" 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아닙니다. 이러한 일들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에 대하여 그처럼 많이 말한 히브리서 기자는 동시에 항상 경외심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그렇게 함을 상기시킵니다. 이것은 정말 옳습니다.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 율법을 주신 분에게 말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자식이 자기 아버지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아버지를 부담없이 대할수 있습니다. 자식이 아니라면 다 성장한 사람이라도 감히 그렇게 대할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자기 아버지께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시되 얼굴을 대면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압니다. 그는 사랑과 경외심과 경건한 두려움을 가지고 나아가 따지는 모험을 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은즉....."

 

다시 저는 여러분에게 여러 세기에 걸쳐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사람들의 전기를 읽으라고 권면합니다. 특히 부흥의 시기에 쓰임을 받았던 사람들의 전기 말입니다. 그러면 이와 똑같은 거룩한 담대함과 이러한 논증과 이러한 따짐과 사리를 하나님께 늘어놓은 것과,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떼를 쓰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비밀이라고 저는 가끔 생각합니다.

 

토머스 굿윈(Thomas Goodwein)은 에베소서 1:13의 성령의 인침에 대한 강해 (An exposition of the first Chapter of the Epistle to the Ephesians)에서 놀라운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것을 그에게 청구하라. 그냥 가서 하나님께 조르지 말고 그 약속을 들고 가서 하나님을 성가시게 하라.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아뢰어 드리라. 성경을 하나님께 인용해 드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을 듣기 좋아하실 것이다. 마치 아버지의 말을 분명히 청종한 자식에게서 그러한 요소를 발견하면 아버지가 좋아하듯이 말이다."

 

그것은 아버지를 기쁘게 합니다. 어린아이는 참을성이 거의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것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는 우리가 자신의 약속을 들고 와서 떼를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의 말씀을 인용하며 "이러저러한데 안해주실수 있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을 듣기 좋아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하나님께 청구하십시오!

 

기도에 대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또 하나의 요점은, 기도의 질서와 목표입니다. 분명한 간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여기서 막연하고 명확하지 않은 일반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지 않음을 주목하십시오. 그는 하나의 큰 필요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는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경외심과 경건한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그는 이 한가지 일, 곧 하나님의 임재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문제에서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가시지 않는다면 저는 움직이지않겠습니다. 우리와 함께 가셔야 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는 여러가지 이유를 제시하면서 하나님께 떼를 쓰고 있습니다.

 

저는 교회가 바로 이 한가지, 즉 부흥을 위한 기도에 집중하고 있음을 느끼기까지는 행복감이나 위안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직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위원회에서 이것저것을 하기로 결정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가 행한 일을 축복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한 노선을 따라서는 결코 어떠한 소망도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짐을 느껴야 합니다. 이것을 유일한 소망으로 알아야 하고, 바로 이 문제에만 관심을 집중하며, 언제나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즉 질서와 준비, 집중과 논증, 긴박감이 항상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여기서 창세기 32장에 나오는 야곱과 같습니다. 이 요소는 언제나 참된 중보 기도에 이릅니다. 야곱은 "당신이 네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하지 아니하겠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아침이 밝았습니다. 밤새도록 그는 씨름했던 것입니다.

 

" 나로 가게 하라."

"당신이 네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여기에는 긴박감이 있습니다. 위대한 성경의 기도문을 읽어 보십시오. 그속에는 언제나 그런 요소가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 이제 하나님께서 행하시기를 간구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읽게 됩니다. 그들은 "오 하나님, 이러한 우리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 이제- 이 일을 행하소서"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표증과 암시를 주소서, 이 거룩한 담대함으로 증거할수 있게 하시고, 그들이 우리에게 전하지 말라고 하는 부활을 증거하게 하소서."

 

기도의 긴박함을 보십시오. 모세는 계속 그 기도 제목을 생각하며 되풀이하되. 여러 다른 형태와 다른 시각에서 그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 한가지가 있습니다.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그는 급박하게 떼를 쓰고 있습니다. "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 대목에는 몇 가지 교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해 말하지만 언제나 기도했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나는 것에 대하여 무엇인가 알고 있습니까?

죄를 사함받았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과 자신의 관심사에서 벗어나 중보 기도를 드릴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이름을 위한 진정한 소명감이 있습니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이러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청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였으니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모세와 같은 중보 기도자로 만드십니다. ", 그러나 그는 예외적으로 위대한 사람이 아니었는가"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지난 과거의 부흥 역사 속에서 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사용하셨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보잘것 없는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100년 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제임스 맥퀼킨이라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소명감을 주셨습니다. 그는 북아일랜드의 모세였습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이러한 사람이 될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세와 같은 중보자들이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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