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의 긴박성(9:28-29)(프로그램,철학)

 

(많은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 그 난제의 깊이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은 언젠가 한번 성공한 어떤 방식을 가지고 일을 해 나갑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믿음을 바로 그 방식에 붙잡아 맵니다. 자기들이 성공하지 못할 뿐 아니라 성공할 수도 없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부닥친 그 난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보편적인 유의 부족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볼 때 영적인 것을 철저하게 모르고 있고, 심지어 영적인 것을 부인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니 영적인 것에 대한 개념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신념 자체가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

 

David Martyn Lloyd-Jones 

 

예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따로 그에게 물어 보았다. "왜 우리는 귀신을 내쫓지 못했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런 부류는  기도로 내쫓지 않고는, 어떤 수로도 내쫓을 수 없다.(9:28-29)

 

제가 이 두 구절, 특히 29절 말씀에 여러분의 주의를 집중시켜 드리는 것은 복음의 위대한 주제와,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가 안고 있는 부흥의 긴박성을 함께 숙고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이 문제야말로 매우 긴박하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모든 설교는 다 부흥을 확신하는 것이어야 하며, 그리스도인들인 우리가 기독교 신앙의 교리를 이해할 때만이 부흥의 필요성을 진실로 알고 싶어하여 그 부흥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는 지금 이 주제와 관련하여 특별하고 비상하게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어떤 요점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관련사항들 가운데 첫째 되는 것은 섬뜩할 정도의 궁핍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러한 문제들에 여러분의 주의를 환기시켜 드리는 데 또 다른 부수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올해가 1959년이기 때문입니다. 이해에 많은 사람들은 백 년 전, 그러니까 1859년에 일어났던 위대한 부흥, 종교적 대각성 운동, 하나님의 성령의 비상한 역사 등을 기념하고 축하할 것입니다. 1859년에 부흥이 일어났는데 처음에는 미국에서, 그 다음에는 북아일랜드로 퍼져 나갔고, 그리고 나서 웨일즈와 스코틀랜드의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갔습니다. 심지어 잉글랜드의 여러 지역에까지 그 부흥의 물결이 파급되어 나갔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백 년 전에 일어난 부흥을 기념하는 일에 참여하여, 어째서 그러한 일이 일어났으며, 어째서 오늘 이 중대한 시기에 하나님의 교회가 그 일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아는 것은 합당한 일이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일은 전체 교회의 문제이지 교회의 몇몇 지도자들에게만 국한된 관심거리가 아님에 틀림없습니다.

 

부흥의 역사는 그 점을 명백히 밝혀 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때로 가장 비상한 방식으로 행동하시고, 반드시 목사들을 통해서 부흥을 일으키고 촉진시키며, 그 부흥의 열기를 유지시키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매우 비천하고 기독교회 내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지체들로 자처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러한 일을 행하시기도 합니다.

 

교회는 그 모든 지체가 다 서로 연관되도록 구성되어 있으므로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 부흥의 주제를 환기시키는 것입니다. 제가 그 문제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오늘날 기독교회의 지체들이 자기들 스스로는 매우 적은 일밖에 할 수 없다고 느끼거나 생각하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회의 지체들은 자기들을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이 해주기를 바라고 방관하려는 경향을 취합니다. 물론 이것은 오늘날 인생 전체를 특징짓는 요소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직접 운동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사람들은 군중 속에 앉아서 다른 사람들이 경기하는 것을 구경하는 것쯤으로 만족해합니다. 한때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즐거움을 창출해 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등장하여 사람들을 유쾌하게 하는 오락거리와 즐거움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경향이 기독교회에서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니 두려운 일입니다. 사람들이 관중 속에 그저 등을 대고 앉아서 한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향해 나아가기만을 기대하며 쳐다보고 있다는 증거를 가면 갈수록 더 많이 발견합니다. 물론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대한 신약의 교훈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회의 모든 개개 지체마다 책임을 가지고 있으며, 기능을 가지고 있고, 가장 중대한 의미에서 서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교회 교리에 대한 사도의 위대한 강론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보잘것없어 보이는 지체들이 대단해 보이는 지체들과 동등하고 중요하다고 말하는 바울의 입장을 만납니다. 그리고 몸의 각 지체마다 그 나름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주인의 쓰시기에 합당하게 준비되어 있어야 하며, 언제나 유용하다고 말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 이유에서 오늘날 우리 각자가 가장 절실한 긴박감을 가지고 그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실로 저는 서슴없이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개개 그리스도인들로서 오늘날 교회와 세상의 상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한, 우리는 실로 매우 불쌍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입니다. 만일 그저 자기 개인의 어떤 유익을 얻는 것만을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어린 갓난아이에 불과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장했다면 우리는 상황이나, 사회 상태나, 교회 상태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우리 각자가 다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9장에 나오는 이 사건을 숙고하려 합니다. 특별히 그 사건의 진술 마지막에 나오는 두 구절을 중심으로 해서 말입니다. 그 두 구절은 그 이야기에 있어서 일종의 에필로그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 나오는 말씀에서, 우리 주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위에 올라가셨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들은 그 변화 산상에서 일어난 기이한 사건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다음에 그들은 산에서 내려왔고, 남은 제자들 주위에 많은 군중들이 몰려 대단한 논란을 벌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갑자기 어떤 사람이 앞으로 불쑥 나서면서 다음과 같이 말할 때 무슨 영문인지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일은 내 책임이지요. 여기 이 어린 소년은 제 아들입니다. 어릴 때부터 경련을 일으켰고 또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기도 하는 불쌍한 아이입니다."(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제가 당신의 제자들보고 이 아이를 고쳐 달라고 아이를 데려왔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갔더니 그 제자들이 그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해보려고 애를 썼지만 실패했습니다."

 

여러분도 기억하다시피 우리 주님께서는 몇 가지 질문을 던져 어떤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런 단음에 그 아이에게서 즉시 귀신이 나가도록 하셨습니다. 그 아이는 나았고 순간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우리 주님께서 집으로 들어가셨고 제자들도 함께 갔습니다. 집에 들어갔을 때 제자들은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그들의 느낌을 이해하기란 매우 쉬운 일입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보았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많은 경우에서는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께서는 한순간에 극히 쉽게 말씀 한 마디를 하셨고, 그 아이는 나았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기도(와 금식)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 이제 저는 이 이야기를 들어 오늘날 현재의 처지를 매우 완벽하게 나타내고 싶습니다. 정말 여기 이 소년 속에서는 현대 세계를 보는 것 같고, 제자들 속에서는 바로 오늘날 이 시점의 하나님의 교회를 보는 것 같습니다. 교회가 정말 비참하게 실패하고 있으며, 교회가 오늘날 살아 있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좋은 인상으로 남아 있지 못하다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명백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교회는 70-80년 혹은 백 년 전의 모습을 잃어 버렸습니다. 전체의 상황은 그 점을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마치 제자들처럼 무진 애를 쓰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보려 하고는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도 더 활동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대처하는 데 있어서는 여전히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자들의 느낌이 어떠했을지를 너무나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실패감을 가지고 성공할 가능성이 보이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한 데서 오는 실패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던져야 하는 질문, 아니 확실하고 긴박하게 던져야 하는 질문은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실패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 앞에 벌어진 그 일은 어떤 연유에서 비롯된 것입니까?"이어야 합니다.

 

제가 볼 때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그 문제를 다루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그 경우에 설정해 놓은 원리들은 그 특별한 상황에서 주님께서 사용하셨을 때와 똑같이 오늘날도 매우 중차대합니다. 다행히 그 원리들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주요한 세 제목으로 나누어집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첫 번째 대답은 '이런 유"()입니다. 의미 있는 진술입니다. 어째서 우리는 그를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우리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와 금식)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다른 말로 해서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배워야 하는 첫 번째 요점은 경우마다 다른 차이점을 구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분명히 제자들의 질문의 배경에는 이러한 것이 깔려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며 귀신을 쫓아내라고 우리를 보내셨다. 우리는 그 일을 위해 파송 받아 나가서 전도했고 많은 귀신들을 쫓아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어느 경우에는 그들이 성공적으로 그 임무를 수행하여 크게 기뻐하며 돌아와서는 너무나 뽐내는 잘못을 범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시며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10:20)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환호하고 흥분하며 야단이었습니다. 귀신들도 우리들에게 항복하였으며, 말하자면 사단도 우리 앞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그 아들을 자기들에게 데리고 왔을 때 그들은 큰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 그 난제에 접근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설마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있는 모든 힘을 다 동원해 보아도 그 아이는 전혀 낫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 아버지가 그를 그들에게 데리고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난처하게 되었고 우리 주님께서 바로 그때에 그들을 도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유"와 너희가 이제까지 다루어 왔던 유, 너희가 그처럼 성공을 거두었던 유와는 차이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원리야말로 신약을 통독해 나가는 그 어느 누구라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궁극적인 의미에서 난제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이 난제도 다른 경우들에서와 같이 귀신들린 경우였습니다. 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귀신과 귀신 사이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그 악한 나라에도 등급이 있고, 일종의 계급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6장에서 어떻게 말했는지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 그러면 무엇에 대한 것입니까?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6:12). 그 악한 나라에도 등급이 있고, 그 모든 것의 우두머리는 다름 아닌 사단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2:2)입니다. 사단은 자기의 모든 능한 힘을 가지고 존재합니다. 그러나 사단 밑에는 다양한 여러 영()들과 권세들과 세력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그 힘과 능력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약한 등급에 속한 것들은 매우 쉽게 다루어 쫓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 경우는 더 큰 힘을 가진 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영은 너희가 주관할 수 있었던 다른 더 약한 영들과 같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유는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훨씬 더 큰 난제를 수반합니다.

 

바로 이 동일한 원리를 포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오늘날에도 그 원리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숙고해야 하는 첫 번째 요점은 진단의 문제입니다. "이런 유" 제자들에게 있어서 문제 거리는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기 전에 어떤 처방을 황급하게 내리는 것입니다. 오늘 바로 이 시점에서 교회가 정말 너무나 긴급하게 배워야 하는 교훈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그러한 활동주의자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너무나 바쁩니다.

우리는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실제적인 사람들이다. 나는 교리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어떤 일인가를 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황급히 활동을 시작해야 한다. 아마 우리가 실패하는 주요 원인은 바로 그것일 것입니다. 우리는 멈추어 서서 "이런 유"를 생각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벌어진 난제의 참된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도 않고 어떤 유의 처방이든지 쓰려고 하는 것은 순전히 미치광이 짓이나 힘의 낭비입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법칙이요 원리입니다. 물론 무엇인가를 하고 잇다는 것은 큰 위안을 줍니다.

지난 세계 제2차 대전 중 정말 참을 수 없던 일은 공습 대피소에서 그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것이라고 고백하곤 했던 사람들을 늘 기억합니다. 그 사람들은 극도의 긴장에 참을 수 없어서 미칠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일어나서 어디론가 거닐 수 있거나 아니면 할 일이 있으면 그들 모두는 즉시 보다 더 좋게 느낄 것입니다. 할 일이 있다는 것은 큰 위안거리입니다. 그러나 어떤 일만 하고 잇는 것은 언제나 아주 영리한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난제의 본질을 충분히 인식하기 전에 행동으로 옮기는 그러한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유"라는 표현을 살펴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난제의 진정한 깊이를 알고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제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까닭은 많은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 그 난제의 깊이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은 언젠가 한번 성공한 어떤 방식을 가지고 일을 해 나갑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믿음을 바로 그 방식에 붙잡아 맵니다. 자기들이 성공하지 못할 뿐 아니라 성공할 수도 없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부닥친 그 난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보편적인 유의 부족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자기 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려왔을 때 거기에는 분명히 어떤 부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공했던 다른 경우들에서도 그것은 해당되었습니다. 부족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을 인식했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는 아무 것도 말해 주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문제거리는 이 부족의 정확한 본질이 무엇인가, 그 정확한 성격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생각해야 하고 바른 진단을 내리기 위해서 접근할 때, 약간의 섬세함과 총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는 요점이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을 예를 들어 설명 드리겠습니다. 가령 여러분이 시골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합시다. 길을 걷고 있다가 갑자기 길가에 어떤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 사람에게 가까이 가 보아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분명히 그 사람은 여러분의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의식이 없는 상태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지요. 거기까지는 아마 누구나 다 의견을 같이합니다. 그러나 진실로 중요한 문제는 어째서 그 사람이 그러한 무의식의 상태에 빠져 누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아주 먼길을 걸어와서 그만 갑자기 피곤함을 느껴 더 이상 길을 갈 수 없을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휴식을 취하여 깊은 잠에 빠져 너무나 깊이 잠든 나머지 그 옆에 와서 불러도 그 말을 들을 수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가능성을 두고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갑자기 병이 나 그런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뇌출혈을 일으켜 의식을 잃어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약에 중독되어 그러한 무의식의 상태에 빠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또 너무 술을 많이 마셨거나 어떤 약을 복용한 것이 잘못되어 그렇게 누워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중독이 된 것입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더 이상 생각해 볼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요지는 만일 이 사람을 돕기 원하면 그 사람이 무의식 상태에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무의식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발견해야 합니다. 그가 그저 잠든 것에 불과하다면 비가 와서 비에 젖어 감기에 걸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 사람을 도우려면 그를 흔들어 깨우며 큰소리로 일어나라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가 올 때 누워 잠들어 있으면 건강을 해치게 될 것이라고 말해 주면 그 사람은 아마 감사한 마음을 표할 것이고, 그래서 다른 어떤 일을 하지 않더라도 그 문제를 해결한 셈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사람의 몸에 약물이 들어 있고 또 어떤 독소로 인하여 중독되어 있다면, 소리를 친다든지 그를 흔들어 보았자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상황은 보다 심각합니다. 그 사람에게 도움을 줄 만한 어떤 일을 진정으로 하고 싶으면 그의 몸의 조직 속에서 독소를 제거할 방도를 강구해야 합니다. 어떤 해독제를 써서 그 경우에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아니면 그 사람이 어떤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처방은 전혀 달라질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러한 경우에 분명한 진단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인식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어떤 부족이 잇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부족이 무엇이냐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가장 긴급한 주의를 요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독교회와 교회 내의 개개 그리스도인들이 난제의 본질을 인식하기까지는 마땅한 바대로 그 난제를 다루어 나가기 위해 손댈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서 오늘날과 200여 년 전, 아니 불과 100여 년 전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음을 주목합니다. 그러한 과거 시대에 있어서의 난제는 사람들이 무관심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소 잠들어 있었습니다. 좀 뒤로 물러가 200여 년 전에는 기독교 진리를 보편적으로 부인하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사람들은 그 진리를 실행에 옮기려고 애쓰지 않았다는 것뿐입니다. 그들은 다소간에 기독교 진리를 습관적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경우에는 다만 그들을 깨우치고, 일으키고, 무감각한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해주기만 하면 됩니다. 백 년 전이나 빅토리아 시대 말기의 처지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때때로 어떤 캠페인을 벌여 사람들을 일으켜 주고 각성시켜 주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것 만이면 충분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런 입장이냐가 문제입니다. 오늘 현시점에 있어서 상황이 그러하다고 진단을 내리면 옳으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앞에 직면한 난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것을 진실로 시험해 보면 우리가 직면한 난제의 종류는 수세기 전 기독교회가 직면했던 것보다 더 깊고 훨씬 더 절망적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가면 갈수록 그것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의 난제는 무관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관심이 없거나 흥미가 없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훨씬 더 깊습니다.

제가 볼 때 영적인 것을 철저하게 모르고 있고, 심지어 영적인 것을 부인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냉담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진실로 자기 생각의 배경이 옳고 참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옳고 참된 것에 대하여 어떠한 일도 하지 않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니 영적인 것에 대한 개념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신념 자체가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이 시점에서는 이것의 원인들을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오늘날 평범한 사람들도 자기가 어떤 과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의식 아래 하나님이나 종교나 구원에 관한 이러한 모든 믿음과 교회의 영역에 속한 모든 것은 다 완전히 버리고 망각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날 평범한 사람조차도, 그러한 것이 수세기에 걸쳐 인간 본성을 억눌러온 악몽 같은 존재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발전과 진보를 저해한 장본인이 바로 그것이며, 그래서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그러한 것들 모두를 참아 내지 못합니다. 싫어하고 철저하게 기각시켜 버립니다.

 

분명한 것은 바로 이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의 정신 구조와 자세를 인식한다는 것은 우리에겐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고 그러한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를 제안하여 드리고자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오늘날 성경의 권위가 사람들에게 더 이상 인정받고 있지 못합니다. 과거에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그 성경 말씀대로 행하거나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성경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던지면 그들은 참 좋은 고전(古典)이요, 하나님의 책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마 그들은 자기들이 죄인이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렇지가 못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성경을 보통 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른 책과 똑같이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저 비평을 받고 분석을 당하고, 우리의 지식에 복종해야 하는 단순한 문학 정도로밖에는 생각지 않습니다. 또한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다른 모든 책과 같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성경이 신적이고 영감받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본질적인 진리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전처럼 사람들이 그 진리들을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 중에 포함시켜 그저 위대한 사람 정도로만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 이상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동정녀 탄생도 부인하며, 속죄 죽음도 부인합니다. 또 예수님을 사회개혁자 정도로만 알고 있고 다만 정치적인 선동자나, 단순히 우리가 잘 따라 준행해야 할 인생에 대한 윤리적 관점을 제시한 선생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보여 주는 한 실례를 들겠습니다.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같은 사람은 기독교회는 나라들과 정부들에 대하여 말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곧 핵폭탄의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말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어째서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가?(Why I am not a Christian)라는 책을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보는 유의 상황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주님에 대하여 진정으로 가치 있는 모든 것이 부인당하고 있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단순한 인간 선생의 차원이나 어떤 위대한 본을 보인 유에 속한 사람쯤으로 하락시켜 보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부도덕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 사회는 초도덕(超道德), 아니면 도덕 부재의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도덕률이라는 범주 자체가 매우 무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실상 "너 악()이여 내 선()이로다"라고 말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지성적인 눈을 가지고 신문을 읽어보면 우리는 다 그 점을 발견합니다. 말하자면 부도덕을 옹호하는 말이나, 의학의 차원에서 그 부도덕을 정당화시키는 논리나, 인간 체질이나, 과거에 금기로 정해졌던 것이라는 식의 어투로 그 부도덕을 옹호하는 소리들을 듣습니다. 결코 언급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버젓이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도록 허용되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어떤 예절의 범주를 어기지 않는 한 말입니다. 오늘 이 시대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늘 우리에게 당면한 처지, 곧 사회 상태에 대한 살아 잇는 지각을 가져야 하는 시대입니다. 이제 우리가 쓰는 전문 용어는 더 이상 많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대중들은 풍성하고 돈이 많으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잇는 상황에 있어서 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영혼에 대하여서나 인생의 더 높은 차원의 문제들에 대해서 하등 흥미가 없습니다. 다만 먹고 마시고 즐기면 그뿐입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들은 다만 그 가진 것을 꼭 붙잡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런 유"에 속한 어떤 것이 존재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부닥친 난제 말입니다. 우리가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진수가 되는 요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두 번째로 "...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가 없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유"에 적용시키면 전혀 쓸모가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곧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란 뜻입니다."너희가 바로 이 경우에 실패한 것은 다른 경우에서는 충분하고 알맞았던 이른바 너희가 가진 그 능력이 여기 이 경우에는 적합치 못하고 전혀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는 너희는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고 또 소망도 가지지 못한다. 그것은 이 고통에 빠져 무력한 조건에 처해 있는 소년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다."

 

분명히 바로 현시점에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두 번째 단계가 그것입니다. 우리가 의뢰했고 그래서 우리의 믿음을 지탱시켜 주는 지주로 사용했던 그 수많은 것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으로 판명난 것은 결국 분명히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제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일들 자체가 무슨 잘못을 가지고 잇다는 뜻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이 가진 능력은 훌륭한 능력이었습니다. 또 약한 귀신들을 쫓아내는데는 능하게 일을 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년의 경우에는 그 능력이 아무런 가치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논리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언급하려 하는 모든 것들은 그것들만을 감당할 수 있는 한에서만 옳다는 말입니다. 그것들이 나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충분하지 못하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그 점을 알지 못하거나 더 큰 부족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여전히 계속해서 전적인 무력함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온 힘을 다 기울이거나 조직을 강화시키거나 애를 쓴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소용없는 것으로 판명된 이것들 중에 속한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그것들 몇 가지를 여러분에게 지적해 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아직도 기독교회가 의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것들을 지주 삼아 자기들의 믿음을 지탱시키고 있습니다. 변증(辨證)부터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 "우리가 진실로 해야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권하여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다"라는 신념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여러 권의 책이 쓰여졌고 많은 특강들이 개설됩니다.

또 그런 목적을 위한 설교도 행해집니다. 그래서 현대인에게 철학적인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산출해 주고 나타내 주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 여러분은 종교철학을 다루는 책들도 동원시킵니다. 과거 철학자들의 위대한 역작도 동원시킵니다. 위대한 헬라 철학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책도 동원시킵니다. 그리고 나서 기독교를 그것에 짜 맞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이 완전히 합리적임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철학의 형태로 모습을 취하고 잇는 변증학입니다.

 

특히 오늘날에 있어서, 과학의 차원에서 이런 일에 많은 흥미를 가지고 과학과 종교를 조화시키려고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과학적인 사고방식과 과학적인 사고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논증하면서, 물론 그들은 복음과 성경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복음과 성경이 그들의 눈에는 과학적 사실들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며 특히 이적이나 그와 같은 경우에 더욱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과학과 종교를 조화시켜야 한다고 교회는 주장합니다. 그래서 먼발치에서나마 희미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조짐을 보이는 과학자가 있다면 그가 누구라도 그를 부여잡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리스 강좌(Reith lecture)의 연사인 한 과학자가 결국 태초에 세상을 창조했을지도 모르는 신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믿음을 은근히 시사하는 것처럼 보였을 때 얼마나들 흥분했습니까. 참 이상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빠져든 흥분상태가 어떠한 것이었음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위대한 과학자마저도 한 신이나 한 조물주가 계실 가능성이 있음을 천명한 것처럼 보일 때 우리가 그처럼 흥분하게 되다니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즐거웠고, 그래서 우리 모두 그것을 서로 이야기하였고 참 놀랍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그러한 유의 일에 지탱시키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말해야 하는 것은 "정말 그래? 그것 참 어떤 유의 사람이지? 참 얼마나 멋진가!"이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잠시 동안 멈춰서 "어째서 그러한 놀라운 결론에 이르는 데 그처럼 오랜 세월이 그에겐 걸렸을까?"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체 자세는 그들이 누구든지, 그들이 아무리 희미한 진술을 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들을 부여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현대의 상황을 변증학을 통해서 대처해야 한다고 믿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이 과학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과학은 권위이며, 성경을 그 권위에 짜 맞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러한 노력과 수고는 현재의 상황을 대처해 주는 방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고고학의 차원에서 그러한 일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제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고고학은 매우 가치가 있습니다. 성경 역사를 확증한 고고학의 모든 자료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고고학을 의존하려 한다면 그런 경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 주셔야 합니다. 고고학자들 가운데에도 서로 다양한 학파가 존재합니다. 그들은 상이한 해석을 내립니다. 그러나 그저 지푸라기라도 있으면 잡겠다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진리임을 증거하는 것이라는 느낌에서 말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매우 유명한 사람들을 붙잡습니다. 최근에 조우드(Joad) 교수가 한 책을 썼는데 그 책에서 그는 전쟁을 통해서 자기는 악과 하나님을 믿게 되었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때 얼마나 흥분했습니까! 그러나 어째서 사람들이 그렇게 흥분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감상적인 믿음, 변증학에 불과한 이러한 방식들을 의존하는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18세기 초엽에도 역시 방식은 동일하였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버틀러 감독(Bishop Butler)과 그의 위대한 종교의 유추, 그리고 보일 강좌(Boyle lectures)에 자기들의 믿음을 지탱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이것들이야말로 기독교의 진리를 보여 주는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유"는 그런 노선을 따르면 전혀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 방식의 문제들로 나아가 봅시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믿음을 어떤 특별한 방식에 고착시키고 있는 태도를 보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입니까? 이 방식 중 하나가 새로운 번역 성경이 나오는 것을 아주 대단한 일로 여기며 흥분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오늘날의 사람이 교회 밖에 있는 것은 흠정역(Authorised Version)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행동입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언어인 이 전문적인 용어, 곧 칭의(稱義)나 성화(聖化) 같은 말을 현대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인에겐 아무런 의미를 가져오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현대인이 원하는 것은 현대어로 된 성경, 현대의 속어나 현대의 관용구로 된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것이며 그리고 나면 사람들은 "이것이 기독교로구나"하고 말하면서 기독교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새로 번역된 성경들이 앞을 다투어 선을 보이고 있습니다. 누구나 다 그 성경들을 삽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단지 최근의 언어로 된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극이 아닙니까?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것입니까? 백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오늘날의 사람들보다 칭의나 성화에 대해서 무엇인가 더 많은 것을 알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말들이 천 년 전에 평상적으로 쓰여졌던 언어들이었습니까? 그것이 문제의 핵심입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사람의 마음, 사람 속에 있는 악이 문제입니다. 언어의 문제나 용어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문제에 우리 믿음을 귀착시킵니다. 제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현대어로 된 번역이 어느 정도 가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도만큼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라도 말입니다. 이 흠정역을 보완시키려면 한참 걸릴 것입니다. 현대 번역 성경들에 대해서 극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오도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현대 번역 성경들이 아무리 가치가 있다고 할지라도 난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면 다른 무엇이 있습니까? 바로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매체를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다 그것을 청취하고 시청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안방까지 들이밀라. 짧은 막간을 이용해서 메시지를 전하라. 그 매체들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광고의 문제가 있습니다. 큰 사업체가 성공하는 것은 광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교회를 광고해야 합니다. 교회 내에 광고 기구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교회가 무엇인지, 무엇을 하는 곳인지를 알려서 그들에게 진리만 말한다면 그들이 즉각 그 진리를 듣고 좋아서 그것을 원하여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이러한 방식으로 광고하는 여러 편리한 문명의 이기들을 사람들이 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유"가 그와 같은 방식을 통해서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주장합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새로운 잡지, 새로운 문학지, 새로운 소책자 등입니다. 그 모든 것을 배포하라. () 대중적인 형태로 기사를 써 보라 - 그러면 사람들은 그 메시지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우리는 말을 합니다.

 

물론 대중적인 복음전도의 문제도 나오게 됩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 이 모든 것이 실행에 옮겨집니다. 현대인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현대인에게 부각될 수 있는 말은 총동원시켜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또한 현대의 기술을 가지고 그 일을 하게 되면, 현대인을 잡아 끌 것이라는 신념에서 그러한 주장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시간이야말로 간단한 질문을 던져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현대의 난제가 다 해결되어 가고 있습니까? 물론 이러한 여러 가지 방식들, 변증학이나 다른 것들이 개인적인 회심을 유도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 점을 인식합니다. 여러분이 적용하고 싶은 방식은 어느 방식이든지 그러한 효과를 나타낼 것입니다. 물론 개별적인 회심은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렇습니다. - 상황이 어떠하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떠하며, 이 나라의 노동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어떠하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정말 감동을 받고 영향을 받고 있습니까? 이미 교회 안이나 교회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을 빼눟고는 어느 사람이 그런 것에 감명을 받습니까? 나라의 영적이고 종교적인 상황은 어떠합니까? 사회의 전체 상태는 어떠합니까? 우리의 모든 활동을 통해서 그 모든 것이 영향을 받습니까?

 

저는 대답하겠습니다. 제가 볼 때 그 모든 것은 그 소년에게서 귀신들을 쫓아내려고 애썼던 제자들의 처지로 우리를 몰아가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많은 경우에서는 그처럼 성공적이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년의 경우에는 전혀 문제 해결을 해주지 못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이러한 일 외에는 "이런 유의 일"이 나갈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통해서 그러한 일이 나갈 수 있습니까? "기도(와 금식) 이외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너희는 거기에서 실패했다. 너희가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사용했다. 너희는 그 능력을 매우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너희는 큰 확신을 가지고 그 일을 하였다. 그러한 경우에 처했을 때 예전에는 명수들이어서 너희가 생각하기를 즉시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잠시 멈춰서 생각을 해보아라. 너희가 실패한 것은 이 악한 영들 사이에도 능력이 있어서 여러 등급이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이 순간에 너희로 하여금 그처럼 처참하게 한 것이다. 너희는 충분한 힘을 가지지 못했다. 너희가 할 수 없는 일을 내가 한 것은 내가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게 주신 능력으로 내가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방편을 통해서 내게 성령을 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희가 하나님만이 너희에게 주실 수 있는 능력을 간구하지 않으면 '이런 유'를 결코 다루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너희의 부족과 불능과 무능함을 인식해야 한다. 너희의 방식으로는 제거하거나 처리하기가 너무 깊은 문제에 너희가 봉착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너희는 그 악한 세력을 제압하고 파괴시킬 것을 필요로 한다. 그것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도 역시 그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절망적인 심정이 되기까지 그 점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권위나, 이러한 임무나, 이러한 능력과, 힘과, 권세를 가지지 못하면 어떻게 성공할 수 있을지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철저하고 절대적으로 우리의 부족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모든 방식이나 조직에서 주도 면밀함을 과신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성령에 충만케 하실 수 있음을 동등하게 확신해야 합니다. "이런 유"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며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보다 많은 지식이나, 보다 많은 이해력이나, 보다 많은 변증이나, 철학과 과학과 종교를 보다 더 조화시키거나, 다른 모든 현대적인 기술을 더 요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합니다. - 아니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사람들의 영혼에 침투하여 그 영혼을 깨트리고, 낮추고, 새롭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백여 년 전이나, 이백여 년 전에와 똑같이 바로 오늘날에도 그 능력을 갖고 계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능력을 구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능력을 달라고 간청하며 탄원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런 유"는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려는 주제의 서론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과 관련하여 이러한 질문을 던져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현재의 상황에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에 대해 절망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기도하고 있습니까? 오늘날 하나님의 능력이 교회에 나타나기를 위하여 언제나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저 이러한 여러 가지의 모든 노력들에 대해서 말해 주는 주간 신문을 읽으면서 "아 옳지, 그렇게 해야 말이 되지"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까?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금식이라는 말은 고대 사본에는 전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금식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의 금식, 곧 육체적인 금식뿐 아니라 정신 집중을 함축합니다. 금식의 가치는 금식을 하는 사람이 어떠한 문제에 관심을 총 집중시킬 수 있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기도하되 정신을 차려 기도하며 하나님을 바라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너희를 충만케 하시기까지 그런 유의 난제를 다루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그 능력을 가졌음을 알면 너는 권위 있게 나서게 된다.' 바로 그 방식뿐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성령의 강권적인 부어주심이 아니고는 20세기 중엽에 처해 있는 우리들의 상황을 대처하기에 알맞은 것이 없다는 확신을 누군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아직도 그 밖의 다른 것들을 의뢰하고 있습니까? 여기에 중차대한 문제가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기도의 절실성과 온 교회의 기도가 정말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교회의 각 지체들이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고, 각 가정에서 모이거나 친구들끼리 모이거나 교회에서 모이거나 원하는 어느 곳에 모여서 하나님의 성령을 부어주시되, 백 년 전이나 이백 년 전 또는 어떤 다른 부흥의 시대나 각성의 시대에 부어주셨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부어주시기를 간절하고 긴박하게 기도하지 않는 한 저는 어떠한 소망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 한 어떤 소망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 소망이 들어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을 나타내실 때 이 불쌍한 소년에게 일어났던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아주 쉽게, 그렇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귀신은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그 소년은 나았고 아버지 품에 돌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어나실 때 그 원수들은 흩어집니다. 그 이야기는 모든 부흥 역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유"의 부족과 우리의 모든 노력과 애씀의 쓸데없음과 기도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인식하며,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기까지는 우리는 부흥과 관계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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