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기

★복음에 접근하는 자세(3:3-5)

 (모세, 이 사건이 우리 주요 구세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전체 문제와 관련해서 아주 위대한 교훈이요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복음 자체보다도 그 복음에 접근하는 자세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애석한 일은 이런 일이 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났지만 그로 인해 회심까지 체험하게 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에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대신 순복하는 마음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연구 조사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연구 조사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성경 자체가 말씀하고 있듯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합니다"(딤후3:7). 진리와 실재를 찾겠다고 나섰으나 그것을 끝내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의 문제는 바로 복음에 접근하는 자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인간의 지성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출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것을 조사하고 검사함으로써 시작하려는 것은 괜한 시간 낭비 아닐까요?  기독교 신앙의 전체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대면시키는 것,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지식 - 그것이 기독교 신앙과 그 놀라운 구원의 제공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평생 신학에 대해 쟁론하는 사람, 심지어 기독교 신앙을 확고히 사수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몰라 구원 밖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

 

 David Martyn Lloyd-Jones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표준새번역 -모세는, 이 놀라운 광경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어째서 그 떨기가 불에 타지 않는지를 알아 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모세가 그것을 보려고 오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모세가 대답하였다. ",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 (3:3-5)

 

저는 여기 나온 사건 전체를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고 싶지만 우선 이 세 구절을 특별히 강조하는 바입니다. 그 이유는 이 세 구절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 전체 단락과 그 단락에 담겨 있는 커다란 메시지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성경 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를 보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모세 개인의 삶 속에서는 물론이요 이스라엘 백성의 삶 속에서도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특히 그들이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소유하기까지의 역사와 관련지어 볼 때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중추적인 사건이라고 할만큼 중요한 사건입니다. 성경 여러 부분에서 이 사건이 그렇게 자주 언급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역사상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사건에 그토록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이유는, 이 사건이 우리 주요 구세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전체 문제와 관련해서 아주 위대한 교훈이요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이 전하는 위대한 메시지와 신약이 전하는 위대한 메시지는 사실 하나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신약과 구약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입니다. 기독교회가 그 초기에 성령의 인도에 따라 구약과 사복음서와 신약 서신들을 합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 점에 대해 종종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지금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구약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을 가지면 안 된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구약은 유대인의 책이요 신약을 소유하고 있는 우리들과 아무 상관없는 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받았던 초대 교회는 그렇게 보지 않았고 구약을 신약과 합쳐 지금 우리가 성경이라 칭하는 이 한 권의 책으로 만드는 것, 이 두 가지를 다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구약과 신약에서 역사하시되 똑같은 방식으로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동일하신 하나님이요, 동일하게 자비로운 목적이요, 본질적으로 똑같은 메시지입니다. 제가 위에서 모세의 일생과 이스라엘 백성의 삶 속에서 일어난 이 큰 사건을 보며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교훈, 생사가 달린 교훈들을 배우게 될거라고 말씀드린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아주 특별한 교훈 한 가지를 특이하고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우리가 복음에 접근할 때 어떤 자세로 접근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너무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과 복음에 대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복음에 접근하는 자세와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에서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것은 단순히 제가 읽은 성경에 근거해서뿐 아니라 지난 23년간 목회를 해오는 동안 얻은 체험들에 근거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복음 자체보다도 그 복음에 접근하는 자세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잘못된 것은 복음에 접근하는 방법, 즉 그 자세입니다. 자세가 잘못되어 있으니 그 외의 모든 것이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 그것을 이런 식으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여기 이 단락에서 여러분은 모세가 그의 장인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가축들을 돌보고 있는 것을 봅니다. 모세는 여러 해 동안 목자로 지냈습니다. 정말 40년 동안이나 목자 생활을 해왔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반복되는 단조롭고 지루한 생활, 그는 좀더 나은 목초지를 찾아 양떼를 끌고 이리저리 돌아다녔습니다. 그 생활 속에는 로맨틱하거나 신나는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여기 보면 그날도 모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양떼들을 보살피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는 양떼를 이끌고 광야 뒤편쪽으로 가다가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별로 놀랄 것이 없습니다. 다른 목초지에서 양떼들을 먹이다 풀이 다 떨어져 그리로 왔을지도 모릅니다. 그곳에서 양떼에게 먹일 양식이 충분히 있을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늘 하던 대로 그곳으로 양떼를 몰고 가려 하는데, 갑자기 전혀 뜻밖의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모세에게 엄청난 메시지를 전해 주셨습니다. 즉 그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그 잔인한 속박과 포로 생활로부터 건져내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해 들일 것인지에 대해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일찍이 그리스도인이 된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모양이나 방식으로든 일어났던 상황을 완전히 설명해 주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모두 여기 나오는 모세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해야 할 매일 매일의 일과와 과업들을 수행하려고 하는, 평범한 인간으로 아주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어떤 일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진로를 방해하는 일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살아왔을 것이요 또 계속 살아갈 것입니다.

 

그 어떤 일은 아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우리를 붙잡아 일으켜 우리가 말하는 종교에, 기독교 신앙에, 성경에 주목하게 만드는 그런 일입니다. 그 뜻하지 않았던 일은 질병이라는 형태로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이 자리에도 어떤 의미에 서 질병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된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기독교에 대해 아무 관심이나 생각 없이 살았기 때문에, 그런 일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마 끝까지 그렇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덜컥 병에 걸린 것입니다. 갑자기 병상에 눕게 된 그들은 이 생각 저 생각,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그 결과 이런 것들에 주목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결국 회심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때로 그것은 사건이라는 형태로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전혀 생각지 않았던 일들이 일어나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버리는 그런 사건 말입니다. 예를 들면 죽음이나, 사별, 슬픈 일 또는 사업상의 곤란이라든가, 사업이 부진하거나 완전히 파산하는 것 등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또 세계 대전 같은 것에 충격을 받고 하나님을 찾게 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모세가 이 타는 가시떨기 나무에 사로잡혔던 것처럼 - 아주 평범한 오후였지만 가장 평범한 그 일과 속에서 어떤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무궁 무진하게 많습니다. 그 뜻하지 않았던 일은 갑자기 찾아올 수도 있고 서서히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찾아오든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이런 집회에 참석했을 때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유 때문에 서둘러 이런 집회에 참석했는데 갑자기 우리 영혼을 사로잡는 설교를 듣고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애석한 일은 이런 일이 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났지만 그로 인해 회심까지 체험하게 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어떤 것에 사로잡혔습니다. 생각하도록 자극을 받았습니다. 잠시 서서 심사 숙고해 보는 자리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발전하여 완전한 결실까지 맺지는 못했습니다. 구원의 체험을 실제로 해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 적이 한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바로 이점이 우리가 지금 알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 대다수의 문제는 바로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 태도가 결국 실패의 원인이라고 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이 유명한 사건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바로 이 교훈입니다. 모세도 처음에는 우리 중 대다수의 사람들이 취했을 그런 행동을 하려 했습니다. 갑자기 뜻하지 않게 타는 가시떨기나무를 보았을 때, 그는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책망하시면서 그가 취할 태도를 지시하십니다. 그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렇습니다. 만일 여러분과 제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줄 수 있는 축복들에 대해 진심으로 알고 싶다면, 우리는 그 복음에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대신 순복하는 마음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모세는 지금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 물론, 그것은 뭔가 특이하고, 놀라운 현상이었습니다. - 그래서 모세는 "내가 돌이켜 가서 조사해 보리라"고 말합니다. 모세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 무언가 흥미로운 것이 보이자 호기심이 발동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호기심을 가지고 그것을 보려는데, 그때 이 메시지가 들린 것입니다.

 

제가 만일 이 자리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접근할 때 바로 이런 식으로 접근하려 한다고 말한다면 너무 불공평한 말이 될까요? 이 세상에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정말 있습니다. 끔찍한 세계 대전을 두 번이나 치른 후 - 현대 세상을 바라보며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것들이 거의 다 실패하고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볼 때 - 이런 관심이 일어난다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마침내 결국 기독교 안에 뭔가가 있는 거 아니냐고, 혹시 기독교 신앙과 복음이 그 해답은 아니냐며 생각에 잠긴 듯 묻기 시작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이런 처지에 있다면, 바른 방법으로 이런 문제에 직면하고 바른 자세로 이런 문제에 접근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릇된 접근 방법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는 기독교에 매력을 느낀 많은 사람들 속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논하고, 기독교에 관한 것을 읽고, 기독교에 대해 논쟁하는 것 속에서 대단한 즐거움을 발견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얼마든지 조사, 탐구할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여러분도 아마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일반적으로 지적이며 생각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와서 그런 식으로 말하며 "알다시피 나는 정말 이 문제에 대해 굉장한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이런 말을 얼마나 자주 듣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기독교가 엄청나게 흥미롭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느니, 한번 설교 좀 들어보았으면 좋겠다느니, 이런 종교적 신념들에 대해 토론하는 방송을 들어보았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말들을 합니다. 아마 그들은 그것에 대해 읽고, 논하고, 쟁론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심지어 신학에 관한 책이나 소위 비교 종교학에 관한 책들도 읽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그것에 대해 심리학적으로 접근하거나 황홀할 만큼 자기들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철학에 관한 책들을 읽을지도 모릅니다. 확실히 그들은 흥미 - 타는 가시떨기나무 -를 갖고 있습니다. "내가 돌이켜 가서 조사해 보고 이것을 보리라!" 세상에는 이런 식으로 기독교 신앙에 접근하며 자기 인생을 다 허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 인생에서 아주 큰 흥미거리가 됩니다. 그들은 항상 그것에 대해 읽고 이야기하며 아무튼 그것과 관련하여 엄청나게 많은 무언가를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죽을 것에 대해서도 여전히 관심을 갖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그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즉 사망에 대해 알기는 알되, 행복하고 승리에 차서 영광스럽게 죽을 수 잇는 방법은 모릅니다. 그들에게는 "죽는 것도 유익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 그것이 훨씬 더 낫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절대 그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연구 조사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연구 조사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성경 자체가 말씀하고 있듯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합니다"(딤후3:7). 진리와 실재를 찾겠다고 나섰으나 그것을 끝내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의 문제는 바로 복음에 접근하는 자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 한번 더 들어보십시오. 모세가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라고 말했을 때 - 그 사건은 한 목자의 단조로운 삶 속에서 아주 놀라운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그리고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 직면해서 그것이 흥미진진하다고 말할 때, 이것이 모세와 우리에게 찾아오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 너의 조사를 포기하라.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야, 그런 자세를 버려라. 나를 연구 조사하려는 그런 자세를 버려라. 그 객관적인 자세를 버리고 네 발에서 신을 벗고 네가 있는 곳에서 내게 순복하라".

 

제가 이것을 가지고 시작한 이유는 이것이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나오는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제삼자적인 자세로 성경을 조사하는 단순한 조사원이나 검사관이라면, 여러분은 절대 성경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여러분의 호기심이나 불러일으키는 분 정도로 생각한다면, 여러분이 사색하고 추측해 볼 수 있는 분 정도로 생각한다면, 계속해서 그분을 연구 조사해 보십시오. 그러나 진노 안에서 밖에는 하나님을 절대 알지 못하게 될거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은 그의 생명 밖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접근하면 안됩니다! 여러분은 처음부터 이런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준비 단계입니다. , 그렇습니다. 반드시 필요한 단계입니다.

우리 주님도 니고데모에게 이와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큰 선생인 니고데모가 우리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가 한 말을 쉽게 표현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선생님에 대해 대단히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 동안 선생님의 설교도 들었고 선생님이 행하신 놀라운 이적들도 보았습니다. 선생님은 저보다 한 수 위인 것 같았습니다." - 그러나 니고데모에게도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 즉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너와 토론할 수 없다. 너는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동등한 사람이 아니다. 내려가서 너의 신을 벗어라. 내게 접근하는 너의 자세는 아주 잘못되어 있다" - 똑같은 메시지였습니다. 이것은 성경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잇는 메시지입니다. 다소의 사울은 사도 바울이 된 후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26:9). 그런데 그때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갑자기 나타나 그를 치셨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장님이 되어 힘없이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똑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글세, 그 태도가 어떻단 말입니까? 왜 유독 이 문제들에 대해서만은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과 다른 자세로 접근해야 한단 말입니까? 왜 나 자신을 순복시킴으로써 접근해야 한단 말입니까?"

여기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몇 가지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설교할 특권을 누리고 있는 이 복음은 주로 계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이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은 거의 다 조사해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복음에 대해 그렇게 잘못된 자세를 취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즉 복음에까지 그런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그것이 현대인의 주장 아닙니까? 현대인은 이렇게 묻습니다."모든 진리는 과학과 자연에 의해 연구 조사한 결과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 왜 여기서는 그렇게 하면 안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조사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를 가지고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검사나 탐색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11:7). 절대 발견할 수 없습니다!

타는 가시 떨기나무 사건 전체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모세가 이런 것 중 어느 것에 대해서도 생각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양떼들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을 때, 가장 좋은 목초지를 발견할 수 있는 곳만 생각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갑자기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떨기나무 속에서 타는 불꽃으로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항상 이런 식입니다. 만일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가 아니라면 여러분에게 드릴 메시지도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학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인생에 대해, 이 세상에 대해 생각해 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어떤 것들에 대해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시입니다. 우리가 연구 조사하는 정신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고 들어야 할 계시입니다.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나오는 전체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찾아오시는 하나님, 갑자기 침입해 들어오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범하는 바람에 모든 것이 다 잘못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서늘한 저녁에 그 동산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갑자기 그곳을 침입해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 이것이 계시입니다. 그것이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것은그 때처럼 그 후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할 일을 일러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불러 내셨습니다. 이 모든 위대한 역사들을 보십시오. 어느 곳 - 사사기, 열왕기, 선지서 - 에서나 하나님이 활동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4:4)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의 정수입니다.  

계시는 하나님이 행하시고 하나님이 자신의 자비로운 목적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전기(電氣)는 그런 식으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많은 생각과 연구 조사를 통해 발견되었으며 인생의 다른 모든 것도 그와 같이 발견됩니다. 그러나 여기 전적으로 다른 질서에 속한 진리, 독특하고 이질적이며 확실히 다른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언가 말씀하시고 자신을 계시하시며 나타내십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 접근할 때 전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 주어진 계시가 기이하고 놀랍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기이하고 초자연적입니다. 모세가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봐야겠다. 저 가시떨기나무는 왜 타지 않는 걸까. 이건 기적이다. 이건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상당히 옳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 비록 그 자신은 자기가 얼마나 옳은지 깨닫고 있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초자연적인 것과 함께 시작된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출발해야 합니다. 그것은 가장 위대한 인간의 머리로도 이해할 수 없으며 온 인류의 머리를 다 합쳐도 이해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독특하며 불가해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1950년인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기적적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인간의 지성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출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것을 조사하고 검사함으로써 시작하려는 것은 괜한 시간 낭비 아닐까요? 여러분은 이 딱한 사람들이 왜 80년이나 조사하고서도 결국은 맨 처음처럼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지 그 이유를 모르시겠습니까? 누가 자기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고 "나는 틀림없이 그것을 파악할 수 있을거야"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절대 조사원 이상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인간의 지성이 아무리 높고 훌륭하다 해도 그것은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 이제 보다 더 중요한 다음 요점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우리 발에서 신을 벗어야 할 세 번째 이유는 기독교 복음의 전체 요점과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중요한 사실을 망각한 것이 모세의 큰 실책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이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타는 가시떨기나무, 어쩌면 초자연적인 현상일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이 불꽃이 아닌 한 인격과의 만남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발에서 신을 벗어야 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전체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대면시키는 것,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지식 - 그것이 기독교 신앙과 그 놀라운 구원의 제공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부정적으로 표현해서, 우리는 심지어 하나님에 관한 진리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이 하는 일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관한 것들을 알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에 대해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인생에 관한 진리들을 알게 해주고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알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더 나은 삶을 사는 법을 알고 싶다. 그러니 그에 대한 지시와 인도를 받기 위해 복음으로 돌아서자." 물론 어떤 점에서는 복음이 그런 일에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이 하는 핵심적인 일이 아닙니다. 복음이 하는 중추적인 일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하는 일은 우리에게 신학적인 지식을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학적으로 위대한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모를 수 있습니다. 저는 절대 신학을 비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실 가장 골치 아픈 일 중 하나는 신학적 지식의 결여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신학 지식은 갖고 있으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평생 신학에 대해 쟁론하는 사람, 심지어 기독교 신앙을 확고히 사수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몰라 구원 밖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또 이 기독교 복음은 어떤 관념이나 도덕 및 윤리에 관한 행동 원리와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개념이나 철학의 문제가 아닙니다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하나님을 직접 인격적으로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만 더 첨언하겠습니다. 기독교 신앙과 그 메시지에 접근하는 사람들은 체험 같은 현상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면 안 됩니다. 오늘날 체험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많고 또 그런 사람들을 다루어야 할 때도 종종 있는데,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신학과 철학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 없지만 체험에는 관심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의 삶 속에서 대단한 변화를 보았는데, 어떻게 하면 저도 그러한 체험을 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체험에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을 알아야만 한다는 사실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것이 체험입니다. 감사하게도 그것은 영적 체험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영적 체험을 바라보고, 그것에 관심을 가지며, 철학과 영적 체험의 차이점에 흥미를 느낄 뿐 거기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면, 절대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타는 가시 떨기나무를 잘못된 자세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 영적 체험에 관심을 가지면 안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성경책이 하는 중점적인 일은 우리를 어떤 지식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을 벗고 순복하는 자세로 접근해야 할 마지막 이유는 우리가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시는 무엇입니까?

첫째,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거룩함을 계시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여러분이 언제나 하나님에 대해 첫 번째로 발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입니다.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만일 하나님의 거룩함에서 출발하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절대 하나님을 안 것이 아닙니다.

간단하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복음서를 읽고 주 하나님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켜보십시오. 주께서 하나님을 얼마나 "거룩하신 아버지"로 말씀하시는지 알아채지 못했습니까? 사실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논하는 소리를 들을 때처럼,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마음대로 이야기하는 것을 볼 때처럼, 제가 겁이 나고 놀라는 때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견해를 발표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닫기나 하고 있습니까? 이 하나님은 바로 소멸하는 불이시오, 거룩하신 하나님이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빛들의 아버지"(1:17)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때면 아주 조심해서 사용하십시오. 저는 옛날 유대인들이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때 왜 그렇게 두려운 마음을 품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거룩함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조차 사용하기를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할 때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분을 거룩하신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은 자신을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습니다. 그것이 십계명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이 말하거나 자신의 견해를 표현할 때 조심하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은 바로 이 하나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것 말고 또 첨언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메시지를 듣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함을 계시하신 후, 계속해서 자신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하심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3:7). ,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대면하고 잇는 그 문제는 지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이 문제입니다 - 여러분의 인생, 여러분이 죄와 사탄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 문제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문제점은 지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치명적인 경향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죄의 노예입니다. 여러분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나쁜 성질의 노예입니다. 질투심,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는 부정직성,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문제는 하나님을 이해하거나 그의 기적들을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점에서 여러분을 넘어뜨리고 여러분과 여러분 인생을 실패자로 만드는 것들로부터 구원받는 것,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가 다음과 같은 메시지 -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를 듣기만 한다면, 신을 벗고 경외심을 품고 주의를 기울일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조사하고 검사해서 그분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그 노력을 포기할 수만 있다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나는 너의 우고를 알고, 나는 너의 불행과 실패를 알며, 나는 너에 관한 모든 것을 안다. 나는 사랑과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8절에서 마지막 메시지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에 이르려 하노라." "내가 내려와서 건져낸다" - 얼마나 완전한 말씀입니까? 제가 처음부터 우리는 구약에서 복음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바로 이것이 신약 전체의 줄거리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성삼위 하나님의 복되신 두 번째 위격이십니다. 그 성장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여러분과 저의 고통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비참함과 불쌍함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와 수치와 실패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잇는 유일한 길은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에서 거룩하고, 흠없고, 죄없는 자기 몸에 여러분과 저의 죄를 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거기서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 속전을 지불하셨습니다. 대속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족하셨고, 율법이 충족되었으며, 지옥과 사탄이 패하고 애굽이 정복되었습니다. 홍해 - 하나님과 새 생명으로 가는 길 - 가 열렸습니다.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과 화해하고, 중생해서, 새로운 힘과 능력을 얻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 영원이라는 무궁 무진한 세월 동안 영적인 젖과 꿀을 마시며 살 수 있다는 복된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소위 조사와 검사라는 제삼자적인 객관적 자세를 취함으로써 단순히 종교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동안에는 이것을 절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대로 죄의 노예로 남아 있을 것이요, 어둠 가운데 있을 것이요, 마침내 지옥에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멈춰 서서

듣기만 하십시오. 여러분 발에서 신을 벗고, 자신의 지적인 교만을 버리고 이와 비슷한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자신을 어린아이처럼 낮추고, 하늘에서 땅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를 들으십시오. 그렇게만 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새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죄와 사탄과 악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 손으로 여러분을 잡아 마침내 흠없이 완전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해 주실 것이요,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하나님을 아십니까?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나는 너의 우고를 안다. 내가 그것에 대해 이 일을 행했다. 내가 너를 구원하기 위해 너를 자유롭게 해주려고 내 아들을 보냈다"고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해방 -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구원해 주셨습니까? 여러분의 모든 죄가 다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새 생명을 받았습니까? - 되었습니까?

이 단순한 메시지를 듣고 믿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말씀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 인생을 모두 하나님께 맡긴다고 말씀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것을 알 뿐 아니라 복된 실재로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아직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발에서 신발을 벗고 그 말씀을 듣고 믿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