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길의 사실과 본질

(우리가 구약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순례의 여정이며, 그 여정은 하늘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T. 오스틴 스팍스 ()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을 멀리 바라보고 즐거워하였으며, 땅 위에서는 손과 나그네로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네가 본향을 찾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들이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좋은 것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11:13-16)

 

얼마 전, 여러 가지 일에서 떠나 조용히 있고 싶은 마음이 있던 차에, 주님의 말씀을 받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시골에 내려갔었습니다. 그 날 아침 이른 시간에 하늘이 열리고 만물이 활기를 띤 것처럼 보였습니다. 모든 말씀이 경이롭게 열려, 이 구절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하늘 길의 개척자들"  이것이 우리가 방금 읽은 구절의 요지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늘 길에 대하여, 그리고 하늘 길을 개척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주로 다루고자 합니다. 우선 하늘 길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반복하여 강조하고 싶은 사실은 하늘 길을 개척한다는 이 엄청난 일이 주님의 관심사라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마땅히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관련된 땅

 

성경은 하늘에서 시작합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이지, "땅과 하늘"이 아닙니다. 하늘이 먼저 나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으로 끝이 납니다( 21:2). 처음과 마지막에 하늘이 있듯이, 그 처음과 마지막 사이에 있는 만물도 하늘로부터 나와 하늘에서 끝납니다. 자연계에서와 같이 영적 세계에서도 그렇습니다. 하늘은 땅과 땅의 것을 지배하며, 땅의 것은 하늘의 것에 맞추어 나가야 합니다. 하늘이 최종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늘의 빛 가운데 있어야 하며, 하늘에 맞추어야 하며, 하늘에 근원을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대요(大要)이며, 성경 전체의 내용입니다.

 

이 세상이나 이 땅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물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땅은 분명히 하늘의 큰 관심 대상입니다. 아마도 우주에서 가장 큰 사건은 이 땅 위에서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며, 이 땅에서 사셨으며, 이 세상을 위하여 자신을 주셨습니다. 영원한 계획의 대 드라마는 이 땅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은 독립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연결되어 있으며, 바로 그 관계성 때문에 땅의 중요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땅은 그 자체보다 큰 하늘에 관련됨으로써 그 의미와 중요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전도서 5:2). 이것은 선포입니다. 성경은 하늘에 최상의 제도와 질서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의 계획들이 완성될 때, 이 땅 위에 하늘의 질서가 그대로 옮겨질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오셨으며 하늘로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은 하늘로부터 났으며, 삶의 중심을 하늘에 두고 있으며, 하늘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걸작품인 교회는 그 근원이 하늘이며, 하늘의 부름을 받았으며, 하늘에 목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과 여러 다른 것들 가운데서 "하늘들이 다스립니다."( 4:26). 하늘이 다스린다는 이 위대한 사실이 모든 것을 지배합니다.

 

하늘에 관련되어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의 모든 것은 하늘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과제 중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우선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모든 것은 하늘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곧바로 깨닫고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하늘에 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출생에 있어서, 그 생명을 이어가는데 있어서, 또 영원한 소명에 있어서 하늘의 왕국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하늘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과 내가 배워야 할 것은 하늘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느냐 하는 것, 곧 주님께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옵나이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배우는 것입니다( 6:10).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배워야 할 모든 것을 포함하는 아주 포괄적인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 기도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되며, 모든 것이 하늘에 있는 그대로 땅에서도 그래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 생애를 걸친 교육과 깊고도 철저한 훈련은 하늘에 일치시키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초기시대에 그리스도인의 성경은 구약이었습니다. 우리가 신약 성경을 읽을 때 "성경기록을 성취하려 함이니라."라는 구절을 종종 보게 되는데, 이는 구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당시 몇 십 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성경은 구약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성경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체험을 증명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구약을 찾아보고, 참고하고, 인용하고, 사용했습니다. 본문으로 읽은 이 히브리서가 바로 좋은 예입니다. 이 서신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구약 성경으로 가득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삶에 대한 의미를 가르치고 설명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구약을 사용했습니다.

 

하늘에 관련되어 있는 순례의 여정

 

우리가 구약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순례의 여정이며, 그 여정은 하늘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늘에서와 같이 이 세상에서도 기쁨과 행복과 안식을 누리실 수 있도록 하늘과 땅이 조화를 이루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하여,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그리고 완전한 만족과 안식과 기쁨 중에 거하시기 위하여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자신이 창조하신 세상에 오시기를 기뻐하셨던 하나님의 모습이 성경의 처음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일이었고,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마치신 후에 안식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안에서 안식을 찾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비극적인 타락 후 하늘과 땅은 조화를 잃었습니다. 이제 하늘과 땅 사이에는 간격이 생겼습니다. 이 세상은 이제 하늘에 대치됩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변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계시거나 세상에 오시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임재하시는 것은 이 땅의 정당한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증거로서 이지 완전한 임재는 아닙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주의 것이로다"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로서( 24:1),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땅을 창조하셨다는 증거로서 임재하실 뿐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오직 이러한 증거로서 여기에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증거를 반드시 유지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 하나님의 임재는 충만하지 않습니다. 매우 실질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 밖에 계시며, 하늘과 이 세상은 갈등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가 이 땅에 있는 동안에도 그것은 이 땅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밖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자들은 이 땅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이 땅에는 그들이 거할 곳이 없습니다. 이 땅에는 그들을 위한 도시가 없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 ''에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입니다. 타락 이후 계속 그래왔습니다.

 

그 증거를 위해 하나님께 붙잡힌바 된 사람들이 거쳐 온 모든 역사는 개인이든 단체이든 하늘에 관련된 영적 개척의 역사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이해했습니까? 다시 한 번 반복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증거를 위하여 하나님께 선택받고 붙잡힌바 된 사람들의 전체 역사는 그들이 개인이든 단체이든, 길을 뚫고 헤쳐 나가며, 이 세상에서는 전혀 새로운 어떤 일을 해 내고, 새로운 터를 닦으며, 하늘에 관련된 새로운 것들을 찾아내는 개척자들의 역사입니다. 그들은 하늘에 속한 영역을 개척하는 자들입니다.

 

순례자들의 초점은 하늘에 있습니다.

 

이제 개척의 소명에 대하여 그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하늘의 목적을 따르라는 부르심을 받고 하늘에 붙잡힌바 된 사람들은 자신들의 관심의 대상이 내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변해서 이 세상에서 하늘로 옮겨진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며, 이 세상은 우리의 안식처가 아니며, 우리의 집이나 우리의 중심이 아니라는 깊은 느낌이 우리 안에 자리 잡습니다. 그리하여 내적으로 우리는 세상에 이끌리지 않습니다. 개척자의 영 안에는 땅에 있는 것과 갈등이 있고, 세상의 것과 간격이 있으며, 세상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내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그들의 중심은 이 세상에서 하늘로 옮겨졌습니다. 이것은 다시 태어나면서 갖는 자각이며, 하늘의 부르심 때문에 오는 첫 번째 의식이며, 위로부터 부르신 부르심이 가져오는 첫 번째 영향이며, 첫 번째 결과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시험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사실입니다. 진정으로 위로부터 태어난 자의 첫 번째 의식은 관심의 대상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내적으로 우리는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겼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와 천연적으로 관계되었던 것들이 더 이상 우리를 붙들지 못합니다. 그것들은 더 이상 우리의 세계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의식이 어떤지 살펴보십시오. 만약 그러한 면이 없다면, 주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은 매우 의심스러운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중심을 가진 이 의식은 계속 커져서 우리가 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떤 모양으로든지 더욱 더 불가능해져야 합니다.

 

본성으로는 알 수 없는 하늘의 영역

 

다시 말하면 우리 마음에 들어온 새로운 자각과 우리의 영 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이끌림은 본성으로는 전혀 알지 못했던 세계입니다. 그것은 본성에 있어서 전혀 다르고, 익숙하지 않으며, 아직 알려지지 않은 영역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앞서 이 길을 걸었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길로 나섰으며, 얼마나 오랫동안 이 길을 밟았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역은 누구에게나 전혀 새로운 세계이며, 체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체험에서 귀한 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체험을 동원해도 이 길에서는 단 한 걸음도 우리를 전진하게 해줄 수 없습니다. 이 길은 우리에게 전해 새롭고 낯선 길입니다. 우리는 이 길에 관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배울 수밖에 없습니다.

 

개척한다는 것은 항상 그러하듯이 외로운 것입니다. 개척에 관한 한 그 누구도 우리에게 상속을 물려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낯설고 알려지지 않은 그 세계에서 스스로 우리의 것을 확보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그 영역에 일치되는 인격과 우리의 본성과 상관없는 어떤 능력들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을 찾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1:7). 우리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습니다. 하늘에서 그 능력이 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과 관계를 맺으신 모든 면에서 각자 하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증거와 성경을 통해서 빛이 올 수 있고, 상담을 통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앞서 걸어간 개척자들에게서 영감을 받을 수 있지만, 결국 각자가 하늘의 영역에서 자신의 영적 밭을 취하고, 다스리고, 개발하고, 사용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영적 생활에 있어서 여러분이 바로 그런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각자 발견해 가야 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를 데려다가 그들의 훌륭했던 체험을 하게 해주기를 바랄 때가 많습니다. 주님은 절대로 그것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늘 길을 가고 있으며, 주저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하늘 길에서 전진하고 있다면, 우리는 모두 개척자들입니다. 우리의 개척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귀한 것들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누구나 전진한 거리와 상관없이, 각자 개척해야 한다는 의식을 갖아야 합니다. 영적인 삶에는 간접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대가와 갈등의 연속인 개척

 

이제 개척의 세 번째 특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개척은 엄청난 대가와 고통으로 가득한 영적인 노정이며 영에 속한 길이기에, 주로 내적으로 대가를 치릅니다.

 

나는 한 형제가 전한 메시지를 읽고 있는데, 그 메시지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한 동안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해 고상한 개념을 갖고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혼란에 빠지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우울해지거나 낙심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 자신도 혼란에 빠졌고, 근심했고, 낙심했다고 말하는 구절을 읽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에 대하여 스스로 깨우쳤던 빛 안에서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나는 결국 그리스도인이 혼란에 빠지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님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사도 바울과 같은 그리스도인도 혼돈에 빠졌고, 우울해 했고, 낙심했습니다. 이것이 개척자들의 길입니다.

 

혼란이란 말이 암시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 어떤 영역에 있는 것을 수용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여러분을 초월하는 영역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동일한 것을 가지며, 항상 동일한 크기의 혼란에 빠지게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한 문제에 대한 혼란에서 벗어나면서 그것을 이해하게 되지만, 또 다른 혼란이 계속해서 찾아올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늘은 이 세상보다 크고, 이 자연계보다 더 광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라고 또 자라야 합니다. 개척자들에게는 반드시 혼란의 과정이 계속됩니다.

 

바울은 연약함에 대하여, 특별히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 여러 번 언급했는데, 그것은 비록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 안에서 찾아내야 하는 다른 능력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한때 혼란을 주며 우리를 초월하여 존재했던 능력을 얻는 것, 이것이 개척자의 길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배우고 있다는 것, 이것이 개척의 전부입니다. 이것이 개척자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큰 대가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이같이 내적인 것입니다.

 

그 대가는 내적인 동시에 또한 외적이기도 합니다. 이 히브리서는 순례 여정의 이 두 가지 방면으로 가득합니다. "이들은 땅 위에서는 손과 나그네로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 11:13). 사도의 이 기록은 하나의 영적 여정, 곧 땅에 속한 것에서 하늘에 속한 것으로 전환하는 내용입니다.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자연계는 그대로 놔두면 점점 퇴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원을 가꾸지 않으면, 곧 거친 황야가 되고, 무성한 풀밭이 되며, 무질서해질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도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항상 땅에 속한 것에 마음을 뺏기고, 항상 안주하려 하며, 항상 갈등과 싸움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영적인 삶의 긴장된 분위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의 전() 역사는 이 땅에 안주하려 하며, 세상과 짝하며, 이 땅에서 환영받고 인기를 얻으며, 갈등과 순례의 원인을 없애려는 경향을 보여주는 긴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만물의 진행 방향이며 경향입니다. 그러므로 개척하는 것은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큰 대가를 요구하는 일입니다.

 

종교에도 그러한 경향이 나타납니다. 다시 한번 히브리서를 보십시오. 그러한 힘이 기독교를 땅에 속한 종교 제도로 만들려고 뒤로 또는 아래로 끌어당깁니다. 외적인 것, 형식, 의식, 예식, 복장 등, 눈으로 보고 알아낼 수 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거세게 잡아당기는 힘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 힘은 혼과 본성에 큰 호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것을 떠나 계속 나아가자"는 권면을 주기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우리는 순례자요, 나그네입니다. 하늘에 속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늘의 예루살렘에 이른다는 위대한 성구를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12:18-24).여러분이 나아가서 이른 곳은 시내 산 같은 곳이 아닙니다. , 만져 볼 수 있고, 불이 타오르고, 흑암과 침침함이 뒤덮이고, 폭풍이 일고,   나팔이 울리고,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리는, 그러한 곳이 아닙니다. 그 말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더 말씀하시지 않기를 간청하였습니다.  그들은  "비록 짐승이라도 그 산에 닿으면, 돌로 쳐죽여야 한다" 하신 명령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그 광경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모세도 "나는 너무도 무서워 떨린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이 나아가서 이른 곳은 시온 산,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시인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여러분은 축하 행사에 모인 수많은 천사들과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집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예수께 나아왔고,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하게 말하는, 그가 뿌리신 피 앞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정착해 버린" 종교 제도에 부딪히는 것은 큰 대가를 치르는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세상 세력에 부딪히는 것보다 세상에 정착한 종교제도에 부딪히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종교 제도가 세상보다 더 냉혹하고 잔인하며 매정할 수 있습니다. 때때로 유발되는 종교 제도의 비열함, 경멸스러움, 편견, 공연한 의심은 세상의 예절바른 사람들 가운데서조차 찾아보기 힘든 것들입니다. 하늘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는 것은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개척자의 길입니다. 개척자의 길은 그러한 길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져야 합니다. 히브리서에서 한 구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진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 13:13).  여기서 진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여러분의 결정에 맡기겠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아닙니다. "진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라는 말은 추방되어 매장 당하는 것, 공연한 혐의로 의심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 안에서 죽었으며, 약속된 것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멀리 떨어져서 그것들을 보고, 확신하며, 기꺼이 받아들이며"  바로 이것이 개척자의 이상(異象)이 아니겠습니까? 멀리서 항상 바라보고, 기꺼이 받아들이며, 비록 그것이 이 땅에서의 짧은 생애 너머에 있을지라도 그것이 이루어 질 날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개척자의 이상이 아니겠습니까?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을 멀리 바라보고 즐거워하였으며, 땅 위에서는 손과 나그네로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네가 본향을 찾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들이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좋은 것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 하나님은 자신과 함께 그분의 목적을 향하여 순례의 길을 나선 백성들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자신의 것이라고 하시며, 친히 "그들의 하나님"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예비하셨습니다"( 11:13-16).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결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에서 이 ""라는 말은 얼마나 포괄적인 말입니까! 이는 이들 모두를 가리키며, 그들이 무언가를 보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바로 그들이 본 그것 때문에 그들은 이 땅에서 숨을 거두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안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는 순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만히 앉아 쉴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르신 이 부르심이 그들 안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하늘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부르심이 하늘로부터 우리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여러분 안에 이 부르심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그러한 굶주림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그러한 갈망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아직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 있습니까? 그것은 올 것이 더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땅에서 만족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이미 정착해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비전이 짧고 좁은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은 이 땅에 정착하여 그럭저럭 살아가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땅에 버려질 것이고, 얼마 전진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순례자들의 하나님이라 부르십니다. 그분은 순례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순례에 대한 사고방식이나 하늘에 대한 개념을 일단 제쳐두고 아주 실제적이고 영적인 면을 보도록 하십시오. 왜냐하면 하늘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하늘에 속한 만물에 질서가 있다는 것과 매일의 삶에서 내가 하늘의 질서에 관련하여 다루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순례의 정신을 우리 안에 강하게 넣어 주시기를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이 그 길을 계속 가는 동안, 어떤 때는 모든 것이 아주 놀랍고 충만하여 영적 삶에서 완성에 도달했다고 느꼈을 때가 있는가 하면, 그것을 뒤돌아보며,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며, 단지 어린아이 단계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그 당시에 읽고 공급받았던 것들을 보며 "내가 이런 것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었단 말인가?"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 말에는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단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더 전진했다면, 여러분은 이제 더 많은 것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는 계속 자라서 그 너머로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계속 넘어가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히브리"라는 말의 의미일 것입니다. 이 서신서는 "히브리서"라고 불립니다. 이 책은 순례자와 나그네에 대하여 말합니다. 만일 "히브리"라는 단어가 넘어온 사람을 의미한다면 우리가 바로 넘어 온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본향, 우리 마음의 중심이 저 너머에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순례자들이며, 저 너머로 넘어가야 할 순례자들입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우리를 어떤 무기력함이나 거짓된 만족이나, 이 땅에 사는 동안 그 목적에 도달해 보려는 부당한 갈망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보다 앞서서 보고 기꺼이 받아들이고 주님이 원하시면 믿음 안에서 죽음마저도 개의치 않고 개척해 나간 사람들처럼 우리의 눈과 마음을 지켜주시기를 기도합니다.

 

 

- T. Austin Sparks "Pioneers of the Heavenly Way"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