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계속성 (1:2)

(신약의 어느지점이나 어느 국면에서도 신약이 구약의 완성임을 보여주지 못하는 식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

 

 

David Martyn Lloyd-Jones

(1:2)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시켜서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으로

 

 

1. 주님의 오심이 더딘 이유.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타락한 때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구속하고 구원한 때 사이의 시간적인 간격이 왜 그처럼 긴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즉각 단번에 이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셨음을 우리는 잘 아는데, 어째서 이러한 모든 구약의 역사가 필요했습니까? 여기에 대한 해답은 어느 의미에서는 완전한 답을 찾아내려 시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의 도움을 받아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는 것이 항상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1) 죄의 깊이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것은 죄의 깊이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방식이요, 인간을 폭로시키시는 하나님의 방식이요, 죄의 실상이 어떠한 것이며,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죄가 단순히 어떤 가벼운 불순종의 행동이나 실수가 아니라, 무섭고 끔찍한 귀추들을 가져오는 무서운 영혼의 질병임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것이 첫 번째 대답입니다.

요한복음 5장이 바로 이 대답에 대한 예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해 참으로 무서운 일은, 죄는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사도바울은 고후3장에서 동일한 요점을 거론합니다. 유대인들의 비극은, 매 안식일마다 모세의 글을 읽으면서도 진리를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들의 눈은 감겨있고 그들의 마음에 수건이 씌워 있습니다. 죄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로마서1장 하반부에서도 죄의 동일한 효력을 발견합니다. 세상은 정말 그러한 비참한 차원으로 가라앉아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본빌을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의 일부라고 저는 말씀드리겠습니다.

 

2) 인간 스스로의 구원이 불가능함을 알리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인간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무리 애쓴다 할지라도 소용없음을 인간들에게 최종적으로 입증하고 계신 셈입니다. 사도바울은 고전1장에서 기념할만한 어구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상이 자기 지혜로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어떻게 삶을 영위하는가에 대해서도 스스로 가르칠 수 없었습니다.

로마서 8:3절에서 말합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좆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표준새번역 -육신이 연약하므로, 율법이 할 수 없던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자기의 아들을 죄된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보내셔서, 육신에다 죄를 정하셨습니다.) 이 논증의 요점은 바로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율법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지킬 수 없었고 오직 하나님을 떠나 방황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인간은 정죄당하며 인간의 무능이 절대로 사실임을 드러난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주권을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만물에 대한 자신의 주권을 보여주고, 자신의 절대적 통제권과 자신의 최종적 권위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고 대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해서 구약역사를 보면 구약역사를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자의적인 행동들과 하나님의 허용입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엄청난 활동의 기록이 있습니다-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스라엘로 홍해 건너게 하심, 가나안의 입성, 요단강물이 갈라진 일 등 하나님의 능한 행위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시고 모든 일을 제멋대로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 같은 기간이 오랫동안 계속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너희 하나님이 어디있느냐?’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아들이 온 그때 사이에 엄청나게 긴 시간적인 간격은 이 모든 것들을 드러내고 입증하였습니다. 그처럼 오랜 기간이 걸리고 시간적인 간격이 컸던 데는 마귀의 입을 막으려는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다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구원해 볼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바로 잡고 인류 세계를 질서있게 하고 스스로를 해방시켜 볼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인간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한 백성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노력과 열심을 다 기울여 보도록 허용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노력들이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마귀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났습니다.

 

2. 복음의 계속성

 

사도는 이 복음이 과거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고, 구약성경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바울의 전체요지는,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고 계신 일의 한 연속에 불과함을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그것은 에덴 동산에서부터 발원한 하나님의 장엄한 목적임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 내내 그것을 해 오셨습니다. 복음은 같은 드라마 속에 나오는 또 다른 연기에 불과합니다- 전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드라마의 연속이요, 끝입니다.

 

우리가 로마서를 분해할 때 이미 알았듯이, 로마서 4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사용하시던 방식을 여전히 사용하고 계신다고 논증합니다. 곧 믿음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사람도 공로를 근거로 해서 의롭다 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언제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셨습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다윗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시편32편에서 다윗은 그 점을 가르쳤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렇게 하고 계시다고 말합니다-하나님도 같고, 목적도 같고, 구원도 같고, 구원의 방식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을 아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요.

 

3. 고난받은 그리스도, 남은자

 

유대인들의 메시야 개념은 물질적인 것이었고, 돈을 받고 일하는 것 같은 고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순전히 그러한 차원, 민족주의적인 방식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연약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나사렛의 이 목수가 메시야라는 생각은 꿈에도 그려볼 수 없는 넌센스처럼 보였습니다. 그것은 거침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유대인들에게 설교하면서 다루어야 하는 첫 번째 요점은, 그들이 가진 성경으로부터 메시야는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입증하고, 구약성경은 언제나 메시야를 고난받은 종으로, 배척받아 죽음을 당하는 종으로 가르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고난받아 죽음을 당한 뒤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만일 바울이 이 점을 확신시키지 못했으면 어떻게 그들을 확신시켰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그것부터 먼저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들을 인도하여 성경 속으로 들어가 그 성경이 메시야가 그런 방식으로 고난을 받아 심지어 죽음을 당하게 될 것임을 어떻게 예언하고 있는 지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롬9,10,11장에서 구약성경을 훑어나가는 일만 가지고도 구약성경의 교리가 궁극적으로 남은자의 교리임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혈육을 따른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영을 따른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그는 그 점을 성경에서 입증합니다.

 

4. 성경에 대하여

 

1) 성경은 완전성

 

2절의 논증은 구약성경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요, 성령의 감동을 받았던 사람들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로 말미암아 그 성경이 기록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의해서 완성되었습니다. 구약과 신약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 이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이 기준에서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더할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더 많은 진리를 계시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약속한 대로 하셨습니다. 사복음서 이후의 신약성경에서 우리는 그것을 발견합니다. 그로 인해서 계시는 완성되었습니다.

 

2) 성경의 절대적 권위.

 

성경만이 우리의 오직 유일한 법칙이요, 표준입니다. 우리는 모든 방면에서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제 메시지도 언제나 성경에서 나와야지 다른 어느 곳에서 나와서는 안됩니다. 더 나아가서 제 방식도 역시 이 성경책에서 나와야 합니다. 성경으로부터 궁극적으로 유추해 낼 수 없는 것이면 어느 것도 믿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원리 중 어느 하나라도 만족시키지 못하면 저는 그것을 하나님의 진리에 속하지 않은 것으로 거절해야 합니다. 이 성경은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전체입니다. 이것만이 권위일 뿐입니다.

 

3) 성경은 하나의 책.

 

성경의 하나의 책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성경이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것은 오직 하나의 책입니다. 저는 성경을 ‘책들의 한 도서관’이라는 생각을 미워합니다. 성경은 한 책입니다. 성경은 심지어 두 책이 아닙니다. 구약과 신약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진리와 그 위대한 목적에 대하여 구약과 신약은 다같은 근본적인 진리입니다. 신약과 구약이 한 책의 두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구약의 동일적 필요성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고, 신약 세대라고 불리우는 세대 중에 살고 있다고 해서 구약성경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초대교회에는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구약을 전혀 잘못이해 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언제나처럼 오늘날도 구약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구약성경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계시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을 읽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구약을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구약이 신약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계시의 한 부분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5) 구약과 신약은 마찰되어서는 안됨.

 

신약을 해석한 것이 구약의 가르침과 마찰되어서는 안됩니다. 신약을 해석하되 구약과 충돌하는 방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실례를 들어서 속죄교리를 생각해 봅시다.

구약성경의 가르침은 ‘희생제사’에 관한 것입니다. 제사가 드려져야 합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도 없습니다. 그 아들을 죽음에 넘기우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위해서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저 안에 우리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가르침은 속죄-죄의 형벌입니다. 구약성경은 피를 흘리고, 희생제물을 드려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신약안에 있는 죽음을 그러한 희생제사와 속죄제의 차원과 상관없이 해석한다면 그 해석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구약성경을 붙잡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바울이 그의 죽음에 대하여 가진 관점은 감상주의적인 관점이 아니라 ‘성경대로’가진 관점입니다. ‘세상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1:29). 모든 모형들이 지시하는 그 위대한 원형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의 친구들이여, 구약성경을 꼭 붙잡으십시오.

신약의 어느지점이나 어느 국면에서도 신약이 구약의 완성임을 보여주지 못하는 식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6)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을 완성짖고 있음.

 

오늘날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이지 않고도 구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가르치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것같습니다. 그들은 의롭다 하심을 받고도 성화를 받지 못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죄사함을 받고도 성경하지 못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사도는 로마서 3장 마지막에서 그 점을 이렇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으니 율법에 대해서 더 이상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를 믿는 한 하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살 수 있다. 구원은 단순히 사죄에 불과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구원을 보고 있다면, 구원을 전혀 이해한 적이 없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2:6). 그리스도를 주로 받지 않았다면 그리스도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겠지만 나중에 가서 주로 받겠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언제나 주시요, 여러분은 그를 주로 받아야 합니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의 성취입니다.

 

저는 중생의 문제에도 역시 같은 원리가 해당된다고 느낍니다. 구약성도들은 거듭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비성경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다-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믿음의 자녀들이다. 우리가 들어갈 나라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그처럼 오래 전에 들어갔던 바로 그 옛나라이다.’ 여러분은 신약성경이 구약의 성취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7) 구원의 목적으로 주어진 구약성경

 

구약성경을 언제나 눈여겨 보면 세상을 구원할 목적이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다른 모든 교훈과 복음을 차이나게 하는 것은, 복음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선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특별한’ 난제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난제로 되어 있는 이른바 거룩하신 하나님과 거룩한 율법 앞에서 우리가 정죄받고 있다는 문제를 다룹니다. 바로 그것이 복음전도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전도는 가장 우선적으로 회개를 다룹니다. 구약성경은 회개의 문제를 떼어내버릴 수 없음을 부단히 상기시켜 줍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뜻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해야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여러분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일을 부흥시켜십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나님께서 선택한 한 사람이나 여러 인물들을 통해서 그리하신 것입니다. 구약역사는 그방면에서 참 놀랍습니다.

 

15:4‘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 것이며,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로써,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가지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지금 어느 분이 침체되어 있고 용기를 잃고 있습니까? 구약으로 가보십시오. 구약을 읽고 연구하고 마음으로 그 구약을 배우십시오. 하나님의 방식을 보십시오. 구약성경처럼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인내를 연습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 전체가 그런 식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우리는 봅니다.

 

8) 우리가 배워야 할 것 - 순종.

 

우리가 하나님의 방식에 우리를 절대적으로 복종시키고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명백하게 배우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관련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전적으로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의 방식이 이상해 보일 수 있습니다. 이사야의 말을 들으봅시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여자의 후손에 관한 약속을 하신 이후 사천년이란 긴 기간이 흐르고서야 여자의 후손이 실제로 베들레헴에서 아기로 태어나 오셨음을 인식하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그 방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가르침은 그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