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 빛과 소금

(구약(율법과 대언자)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리스도인에게 유익한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을 폐하지 않으셨다.)

(마태복음 5)

                                                                                     R. 라이스 著

그리스도인은 구원하는 소금이다(13)


그리스도인은 땅의 소금이다. 소금이 썩는 것으로부터 음식을 보호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은 방부제이다. 그리스도인의 구원하는 영향력이 없었더라면 오래 전에 무서운 재앙이 땅의 인구를 줄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롯이 있는 소돔을 멸망시킬 수 없으셨다. 만약 열 명의 그리스도인이 있었다면 전체 도시를 구하는데 충분한 소금이 되었을 것이다( 18:23-32; 19:20) 모세의 중보기도가 이스라엘 민족을 멸망에서 구했다( 32:31-34). 지금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님께서는 문명 세계를 보존하셔서 휴거 때 그리스도인과 성령이 들림 받을 때까지 죄의 사람이 나타나지 못하게 하며 세상을 통제하고 계신다.

성경시대에 소금은 오늘날과 같이 순수하고 정련된 것이 아니였다. 그것은 바위 소금으로 만들었거나 증발된 바닷물에서 그러 모았기 때문에 흙과 몇 가지 기타 광물이 함유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소금이 물과 공기에 드러나는 경우 소금기를 잃고 단지 찌끼만 남는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새 사람과 옛 사람의 두 가지 본성을 가진, 곧 부분적으로는 소금이고 부분적으로는 육에 속한 옛 본성인 흙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이다
( 7:14-25). 만약 육적인 본성이 이겨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육적 본성이 나오면 소금은 소금기나 맛을 잃는다. 즉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축복하고 보존하는 능력을 잃으며 기독교는 사람들의 발아래 밟히는 조롱거리가 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다(14-16)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시다
( 1:4-9, 8:12, 9:5). 이 구절에서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빛과 권능으로 빛을 비추어야 한다. 그분은 우리의 본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동일한 사명으로 부름받았다( 14:12, 20:21;요일 4:17). 그리스도인은 소금이요, 빛이요, 영적 축복이 나오는 생수의 강이다( 7:37-39).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빛과 권능의 통로이며, 잃어버린 세상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 구절을 마가복음 4:21과 누가복음 8:16과 비교하라. 그리스도인은 침례 요한과 같이 불타며 빛을 비추며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될 필요가 있다( 5:35).

부셀통 아래에 있는 등잔불은 아무런 선을 행하지 못한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증거를 주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아무런 선을 행하지 못한다. 등잔불은
"등잔대 위에" 두어야 한다(15). 그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 등잔대는 계시록 1:20에서 지역 교회를 대표한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공적 고백, 밥티슴(침례), 공개적 증거, 구령, 복음의 선포, 선행으로 그들의 빛을 비추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비밀스러워서는 안된다. 교회 안에서와 같이 교회 밖에서도 선하게 살 수 있으며, 공적인 증거 없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사탄의 거짓말을 믿지 말라. 이 구절을
마태복음 10:32,33; 로마서 10:9,10; 히브리서 10:25와 비교하라.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위가 과시하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되지만, 그의 선한 삶과 행위가 사람들 앞에서 비추어져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16).


그리스도인과 구약(17-22)


구약(율법과 대언자)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리스도인에게 유익한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을 폐하지 않으셨다. 의식적 명령들 중에 몇 가지는 성취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구약은 풍부한 의미와 그리스도인을 위한 복된 명령들로 가득하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명령들에 대한 의무를
"율법"이라고 말하며 회피하려고 애쓴다. 율법은 없어지지 않았으며, 아직도 그리스도인을 위한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할례(고전 7:18-20), 토요일의 유대 안식일( 2:14-17), 또는 돼지고기, 비늘없는 생선을 금하는 유대인 음식, 등과 같은 의식적 문제를 지킬 의무가 없다(딤전 4:4,5). 그러나 십계명의 다른 계명들과 구약의 다른 부분을 포함하는 모든 도덕적 법은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이 힘써 살아야 할 표준(standard)이다.

20은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설명한다. 바리새인들은 외적으로는 율법의 문자를 지켰으나, 내적으로는 위선자였다( 23, 18:9-14).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그들의 마음에 새겨야 한다( 31:33). 그것은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명령의 정신을 지키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율법을 성취한다( 22:37-40; 13:8-10; 5:14). 달리 말하면 20은 새로운 마음, 곧 그리스도의 의와 하나님을 뜻을 위하여 심겨진 신성한 사랑을 가진 마음이 없이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의는 다시 태어남으로 얻는 의()로서 인간의 도덕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21절과 22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율법을 해석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실제적으로 그리고 문자적으로 살인한 자 뿐만 아니라, "까닭없이 형제에게 화를 내거나" 자기 형제를 "라카"(또는 저능아) "바보"라고 부르는 자도 범죄자이다. 자기 형제를 바보라고까지 부르면서 조롱하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살인자요, 율법을 어긴 자로서 지옥에서 벌을 받을 것이다. 이 구절을 27절과 28에서 그리스도께서 간통에 관한 명령을 해석하시는 것과 비교하라. 증오는 살인과 동등한 것이다(요일 3:15).


십계명은
"너는 살인하지 말라"라고 말하지만, 자기 마음에서 미워하는 자는 살인을 범한 자이며(요일 3:15), 심지어 자기 형제를 바보라고 부르면서 멸시하는 자는 지옥불의 위험에 처해 있는 자이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을 부인하거나 취소하지 않으셨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구약을 확증하시며 증명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17에서 "율법"이란 용어는 모세오경을 가리킨다. "대언자"란 용어는 구약의 대() 대언서와 소() 대언서를 가리킨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곳의 두 용어는 구약 전체를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을 파괴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성취하려 오셨다. 창세기의 창조 기사, 홍수 이야기, 출이집트기의 기적들을 거부하는 자는 히브리어의 일점 일획과 가장 작은 글자 하나도 모두 성취되기 전에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필히 뵈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 다시 대언자가 말한 모든 것을 그 마음에 쉽게 믿지 못하는 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선언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참 어리석습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참 무딥니다. 그리스도가 반드시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자기에 관하여 쓴 일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 24:25-27). 주 예수님은 "성경 전체"를 의미하셨다. 구약 성경 전체는 영감받았고,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몇몇 현대주의자들은 "점진적인 계시(progressive revelation)"를 가르친다. 이 주장이 의미하는 바는 성경의 어떤 부분은 완전하지만 어떤 부분은 완전하지 못하며, 성경은 단순히 유대 민족의 종교적 사상과 성장을 기록한 것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몇 가지 계시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현대주의자들은 구약이 하나님의 참된 그림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주장하며, 더 나아가서 스스로 자신들을 구약의 도덕적 표준의 재판관으로 세운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의 분명한 말씀과 모순된다.


성경 안의 계시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추가적인 계시로 보다 더 계시하셨다는 의미에서만 점진적(progressive)일 뿐이다. 창세기의 첫 문장은
요한복음 3:16과 같이 오류가 없고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몇몇 천박한 학자들은
마태복음 5 에 있는 주 예수님의 가르침에 모순이 있는 것처럼 만들려고 애쓰곤 한다. 어리석게도 그들은 주장하기를 예수님께서 율법과 대언자는 멸하지 않으며 구약을 폐하러 오시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씀하신 후에 구약의 어떤 가르침을 정죄하셨다고 한다. 그러한 학자들은 이 장에서 "옛사람이 말한 바....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이나 또는 유사한 용어를 여섯 번 말씀하신 것을 주의하면서 마치 예수님께서 구약을 부인하신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다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1.
21절과 22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한 구약의 명령 "너는 살인하지 말라..."를 확증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형제에게 화를 내거나 무시하는 것은 심판을 가져올 죄라는 자신의 해석을 부언하신다. 여기서 예수님이 구약을 부인하신다는 암시는 전혀 없다!


2.
27,28에서 예수님께서는 간통에 관한 구약 율법을 확증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죄에 관하여 사람의 마음까지도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3.
31,32에서 예수님께서는 이혼에 관한 모세의 제한 사항을 확증하셨을 뿐 아니라 더한 제한 사항들을 부언하셨다.


4.
33,34에서 예수님께서는 맹세를 어기지 말라는 구약의 명령을 확증하셨을 뿐 아니라 "전혀 맹세하지 말라"고 부언하셨다.


5.
38,39에서 예수님께서는 "눈에는 눈으로"라는 구약의 명령을 확증하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즉시 두 배의 배상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만약 그가 한 쪽 뺨을 맞을만하다면, 두 뺨을 다 돌려대어야 한다. 만약 그가 덧옷에 대하여 법에 고소를 당하면 겉옷까지도 주어야 한다. 만약 법이 구약의 명령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그로 하여금 억지로 일 마일을 가라고 하면, 그는 이 마일을 가야 한다.


6.
43,44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분명한 구약의 명령을 확증하실 뿐 아니라, 구약의 율법과 모순되는 "네 적들을 미워하라"라고 가르치는 서기관이 추가한 항목을 공개적으로 폐하신다. 레위기 19:17,18을 보라. 구약의 어느 곳에도 네 적들을 미워하라고 명령하는 곳은 없다. 이는 유대 교사들이 추가한 것이었다.


각각의 경우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구약 율법을 증명하셨을 뿐 아니라, 더 폭넓게 영적으로 적용하셨다.

배상과 기도에 관하여(23-26)


이 구절들은 왜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가를 보여주는데 중요하다. 유대인이 희생단에 희생물을 가져오듯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자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 6:15, 18:35, 11:25,26). 본문에 따르면, 그리스도인 형제간의 화평이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갖지 않고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다(요일 2:9, 4:20).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적대자와 속히 합의해야" 한다. 누가 비난받아야 하든지 간에 길의 반 뿐만 아니라 화평을 이루는 모든 길을 가라. 이 구절과 연관되어 역시 배상을 가리키는 38-42을 보라. 사랑, 용서, 겸손, "진노를 가져가는" 부드러운 응답( 15:1), 악을 선으로 갚음, 등은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고도 화평을 이룰 것이며,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아무 것도 잃지 않게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본인이 어떤 사악한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 화평을 이루는데
잠언 16:7이 큰 축복이 된 적이 있다.


죄는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마음 안에 있다(27-30)


사람은 외모로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
(삼상 16:7). 그와 같이 모든 죄는 실지로 마음에서 생긴다.( 12:34,35, 15:18,19; 6:45). 따라서 "존경할만한(respectable)" 사람이 마음속으로는 지독한 간통자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은 정욕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심판해야 한다(29).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취하려고 근질거리는 손은(30) 그의 마음의 사악함을 모든 사람들이 알게 한다. 예수님께서 항상 구약의 명령을 어떻게 강화시켰는지를 보라.

이 구절들은 구원받는 것이 눈을 갖거나 손을 갖거나 발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옥에 던져지지 않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눈을 빼어 내버리거나 손을 잘라서 내버리거나 발을 잘라서 내버려야 함을 뜻한다. 물론, 실지로 눈을 빼어버릴 필요는 절대로 없다. 구원받기 위하여 손이나 발을 자를 필요는 절대로 없다. 그러나 때로 잃어버린 죄인이 주님께 돌아설 때, 그는 눈이나 손이나 발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 어떤 이가 예수님께 돌아서서 회심하고 구원받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반드시 포기해야만 할 때, 그 대가가 어떠한 것이든지 구원받는 것이 더할 나위없이 가장 값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기 혼의 안전을 위협하는 어떠한 것도 내버려 두어서는 않된다.


우리 모두는 죄있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 중 누구도 유일한 소망은 긍휼이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마음속의 무서운 죄에 대한 유죄를 변호해야 한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선생임을 기억하라
( 3:24). 그러므로 이들 구절은 우리에게 구주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보여준다.


29절과 30은 온 몸이 지옥에 던져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몸에는 육체적인 몸 만 있을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28에서 동일한 것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 물론 몸을 지옥에 던지는 일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부활 후에 일어날 것이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부활과 심판이 계시록 20:1115에 설명되어 있다. 죽은 죄인의 영은 지금 지옥에 있으나, 그들의 몸은 아마도 무덤이나 바다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몸이 부활할 때 그들을 심판을 받을 것이며 그 때 혼과 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 같이 지옥으로 던져질 것이다.


행음, 계속적인 간통 - 이혼에 대해 허용된 유일한 이유(31-32)


이 구절을 더 충분히 기록한
마태복음 19:312와 비교하라. 또한 마가복음 10:212; 고린도전서 7:216을 보라. 31신명기 24:14를 가리킨다. 우리는 이 구절을 매우 신중하게 읽어야 한다. 이혼이 재혼하는 권리를 포함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신명기 24:3,4은 특별히 주의하여 주목하라. 한 남편과 이혼하여 다른 사람과 결혼한 여자는 절대로 첫 남편에게 돌아갈 수 없다. 그는 "그녀의 전 남편"이라고 불리며 실지로 더 이상 그녀의 남편이 아니다. 이혼에 대하여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두 번째 결혼을 파기하는 잘못을 다시 저질러서는 않된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구약의 유대인들의 마음이 단단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허용되었지만 지금은 한 쪽이 행음의 범죄를 저질렀을 때를 제외하고는 허용되지 않는다. 행음이 매춘이나 계속적인 간통을 의미하는 다소 강한 용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는 실제적으로 간통과 동일한 것이다. 간통은 결혼을 깨뜨린다. 술주정, 성격의 불일치, 학대 등은 이혼에 대한 성경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혼한 부부의 한 쪽이 재혼으로 간통을 저지른다면 그것은 분명히 결혼의 서약과 계약을 깨뜨리는 것이다. 신명기 24:3,4에 따르면, 첫 번째 결혼을 회복하기 위하여 두 번째 결혼이 깨질 수 없다. 당신이 그와 같은 죄를 범했다면 고백하고 죄사함을 얻으라. 흔히 죄는 늦추어질 수는 없지만, 용서받을 수는 있다.


어떤 이는 행음이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의 죄이며 간통은 결혼한 사람들의 죄라고 말한다. 그러나 일곱 번째 명령으로 금지된 것이 행음이 아닌가? 행음은 음행을 일삼는 자(wholemonger)와 창녀(harlot)로 번역된 단어와 같은 어근인 pornea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러므로 행음은 계속적인 간통을 의미한다.


금지된 맹세(33-37)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이 그의 단순한 말도 믿을 것이라는 사실에 매우 주의해야 한다
(37).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을 들으라: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혀 맹세하지 말라".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법정에서 맹세하는 사법적 맹세가 잘못된 것이라고 믿는다. 그 이유 때문에 헌법은 "내가 엄숙히 맹세합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내가 엄숙히 확약(確約)합니다"라고 말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역자주:미국)의 헌법은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금지하신 맹세를 양심에 거리끼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법정에서의 맹세는 단지 진실만을 말하겠다는 엄숙한 확약일 뿐이다. 그러한 법적인 맹세조차도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 불쾌한 것이라면, 하물며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가치없는 비그리스도인적인 은밀한 모임에서 맹세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전혀 맹세하지 말라". 그리고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오직 너희의 의사 표시는 예면 예, 아니오면 아니오, 라 하라. 무엇이든 이보다 더한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니라"(37).  하나님의 자녀는 "예 면 예, 아니오면 아니오"라고 말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이가 그 말을 믿을 것이다. 항상 이보다 더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전에 비밀스러운 맹세를 모든 그리스도인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어겼으며 죄를 범한 것이다.


야고보서 5:12에서 이 명령은 너무나 분명해서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하늘이나 땅이나, 그 밖에 무엇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 해야 할 경우에는 오직 "" 라고만 하고, "아니오" 해야 할 경우에는 오직 "아니오" 라고만 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은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 5:12).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다른 어떤 맹세로도 말고"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은 맹세를 해서는 않된다. 명령은 "무엇보다도"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여, 당신이 은밀한 모임에서 불경건하고 야만스러운 맹세를 한 것에 대해 어떤 변명을 하겠는가? 이같이 분명하게 명령하신 주님을 어떻게 대면할 수 있단 말인가? 은밀한 모임에서 맹세를 하는 그리스도인은 분명코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다.


배상에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구약보다 한층 더 요구하신다


38의 참조 구절은 출이집트기 21:2336, 레위기 24:20, 신명기 19:21이다. 이들 참조구절과 5 23,24 을 참조할 때, 주님께서는 여기서 어떤 사람이 잘못 행한 것에 대한 배상에 관하여 말씀하고 계심을 주목하라. 39은 그리스도인이 배상을 하기 위하여 이들 율법을 이용해서는 않된다고 말한다. 오히려 주요한 의미는 "어떤 사람이 생각하기를 당신이 그 사람을 학대하였으며 그로부터 뺨을 맞을 만한 빚을 졌다고 생각하면, 그로 하여금 양 뺨을 치게 하라"는 것이다. 40-42 에서도 동일한 교훈을 가르친다. 요구하는 것보다 더 주더라도 가능하면 모든 문제를 법정 밖에서 해결하라(고전 6:18). 당신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믿는 자들로부터 선의와 우정을 얻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하라. 반 만 동행할 뿐 아니라 전체 길을 동행하라.


본문의 배상의 개념을 놓치지 말라.
42은 내 차를 요구하는 첫 번째 사람에게 차를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구절은 만약 내가 어떤 사람에게 빚을 져서 내 차를 포기하지 않고는 지불할 수 없는 경우, 신속하게 그리고 기꺼이 차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는 그가 생각하기에 내가 그에게 빚졌다면 나는 그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로는 우리가 주는 것이 해가 되기 때문에 주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있다. 또한 돈을 빌려주는 것이 그로 하여금 죄와 사치와 어리석음으로 이끌기 때문에 돈을 빌려주어서는 않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무슨 합법적인 일을 해서라도 빚진 것을 지불해야 하며 그의 죄에 대하여 배상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 성경 구절에 대한 일반적인 정서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주는데 있어서 더 너그러워야 하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더 동정적으로 이끌어야 한다. 그리고 기타 많은 성경 구절들이 우리에게 그러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을 가르친다.


43절에서 47까지를 문자적으로 취하라. 그러면 실지로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와 같게 되며, 그분의 합당한 자녀가 된다. 왜냐하면 당신이 친구뿐만 아니라 대적에 대하여, 죄인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태도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팔복을 기억하라. 특별히 5,7,9,10,11 을 기억하라. 예수님께서 하셨듯이, 당신의 대적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적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들에게 선을 행할 때, 비로소 당신은 당신이 지닌 이름에 합당한 자가 될 것이다. 당신의 대적을 사랑하고, 그들의 악에 대하여 선을 행함으로 그들의 머리에 숯불을 쌓게 될 수 있다( 25:21,22; 12:20,21). 48"그러므로...완전하라"는 이 장 전체가 그러하듯이 완전한 표준을 제시한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는 결코 이것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해야 한다. 우리가 잘못 행할 때 하나님께서 비난을 받으셔서는 않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범할 것을 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완전한 표준을 세우셔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가 잘못 행했을 때 하나님께서 비난을 받으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바울과 같이, 적어도 이 표준을 향하여 달려갈 수 있다( 3:11-15).


  하나님께서는 단순하게 완전한 표준을 세우셨다. 나는 항상 우리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라,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고 말해 왔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죄를 범해도 괜찮다고 말씀하실 수 없다. 왜냐하면 괜찮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과실이요 사악함이다. 죄는 항상 어려움을 가져온다. 우리가 죄를 범한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하나님의 표준은 완전하지만 우리는 그 표준을 지키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가 필히 구주를 모셔야 하는 이유이다.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설명하신 율법임을 기억하라. 산상수훈은 구원을 받기 위한 길로서 결코 인간의 의를 세우지 않는다.


  이 장은 너무나 부요해서 반드시 기도하듯 진지함으로 묵상해야 한다. 부디 성령께서 산상수훈이 당신의 마음과 삶을 부요케하고 변화시키는 메시지가 되게 하기를.


- R. 라이스 著 마태복음 주석에서 - (99.9.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