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구원

사람이 고칠 수 없는 병()

구약과 신약에서 문둥병이란 언제나 죄를 상징했으며, 죄를 나타내는 예로 등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단순히 행복을 저하시키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그 무엇입니다. 죄악된 삶을 살아보십시오. 세상 방식대로 살아보십시오. 그러면 불행과 비참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커다란 문제는 여가의 문제라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시간을 수중에 쥐고 있으면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에 가지 말아야 될 곳에 가서 하지 말아야 될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가의 '문제' 입니다!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전혀 중요해보이지 않던 뜻밖의 사람, 비천한 인물이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D. Martyn Lloyd-Jones)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표준새번역 -왕하 5:1 시리아 왕의 군사령관 나아만 장군은, 왕이 아끼는 큰 인물이고,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주께서 그를 시켜 시리아에 구원을 베풀어 주신 일이 있었다. 나아만은 강한 용사였는데, 그만 나병에 걸리고 말았다.(왕하 5:1).

 

본문 말씀은 아람 왕의 군대장관이었던 나아만이라는 사람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5장의 제일 처음 구절입니다. 제가 이 구절에 여러분의 주의를 모으는 것은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한 원리, 또한 그리스도인의 구원과도 총체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한 원리에 대한 대단히 충격적인 사례가 여기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라는 책은 단 한가지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하나의 책이며, 하나의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기록된 참된 목적은 단지 한가지 대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인데. 그 한 가지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인간입니다. 성경은 세계에서 가장 실용적인 책입니다. 간혹 자기들은 너무나 실용적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거나 성경에 대한 설교를 들을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현재 생활이나 아무 탈 없이 영위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합니다. 글쎄요, 분명히 성경은 우리가 생활을 아무 탈 없이 영위하도록 해줄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이론적인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서 있는 그 자리로 찾아와서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의 원인을 설명해주며, 우리가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에 대해 말해주는 책입니다. 신약성경뿐 아니라 구약성경도 이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사이에는 단 한 가지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메시지 전달 양식의 차이입니다. 여러분은 구약에서, 장차 있을 일을 기대하는 모형과 예언들, 그리고 실체를 암시하는 그림자들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위대한 일 그 자체가 완전히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에 작용하는 원리는 동일한 원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서신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은 항상 오직 하나이며, 그 길은 믿음으로만 갈 수 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사도 바울과 같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히브리서 7장에 나타난 위대한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거기에는 이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길과 구원을 받고 악한 세상과 마귀의 손아귀로부터 건져냄을 받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의 길입니다. 여러분은 아벨과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그리고 여러 예언자들 등 구약 곳곳에 나오는 저 위대한 인물들의 삶에서 이 사실을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구약의 구원은 신약의 구원과 같은 구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신약시대와 마찬가지로 구약시대에도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넘어지는 사람들을 보셨을 것입니다.

 

이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가 바로 그같은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우리는 신약에서는 좀더 추상적인 가르침으로 제시되고 있는 원리가, 이 사람에 관한 기사에서는 구약적인 생생한 묘사와 극적인 이야기의 형태로 제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나아만의 기사를 살펴볼 계획을 세운 것은, 이해를 돕는 데에는 사례가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주일 저녁을 교리와 가르침과 원리들에 주의를 집중하면서 보냈습니다. 이제는 구체적인 사건과 사례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우리를 도우시려는 그분의 관심은 너무나 크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추상적인 가르침만 주시지 않고 이렇게 사건들과 사례들 및 이야기들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아람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와 모습을 보면서 이 중요한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삶을 망치는 죄

 

이 구절을 보면서, 우리는 첫째로 죄가 삶을 망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다음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더라. 나아만은 왕이 높여주는 사람이었으며, 능력과 힘을 타고난 대단히 용맹스러운 사람이었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걸출한 인물로서 영광을 한 몸에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주인 앞에서 큰 자’였습니다.

 

그에 대한 기록을 읽어보면, 나아만은 한걸음 한걸음씩 경력을 쌓아나가다가 마침내 거의 완벽한 장군의 자리에 오른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기록이 끝나면서 '그러나' 라는 한마디가 덧붙여집니다. 그러나 그는 문둥병자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성경이 지금 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문둥병을 묘사하는 말에서 그같은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문둥병이란 언제나 죄를 상징했으며, 죄를 나타내는 예로 등장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삶을 망치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말입니다. 오늘날은 삶에 유익이 되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삶을 망치는 무언가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지 못했다면, 우리 중 누구도 이 순간 이 자리에 와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삶에 대해서도 알고 있으며, 또한 우리의 개인적인 생활과 경험으로서의 삶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모든 지식, 특히 과학지식의 진보, 의약 및 질병 치료에서의 굉장한 발전, 건축과 교육과 문화에서의 진보 등 20세기에 성취된 위대한 일들을 여러분 앞에 나열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오늘날은 모든 사람들이 풍족합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부유한 시절'은 결코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모든 것이 잘되어가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숙명적인 '그러나'가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이 ‘그러나’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으며, 20세기에도 내내 그곳에 있어왔습니다. 우리 가운데 1930년대를 회고할 수 있을 만한 연배이신 분들은 “모든 것이 괜찮다. 그러나 이 히틀러라는 사람만 없으면 정말로 모든 것이 좋을 텐데”라고 말하는 것이 당시의 유행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언제나 그래왔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그러나…라는 것입니다. 항상 ‘그러나’ 가 있었습니다. 지금 세계는 이 아람사람 나아만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모로 그렇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세계가 이렇게까지 발전했던 때는 결코 없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편의시설이 있었던 적도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형편이 나아지고 있습니다. 환경, 상황, 모든 것이 예전보다 좋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완벽합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 있는 것입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습니다. 이 문둥병처럼 모든 것을 망쳐버릴 것 같은 무언가가 있습니다. 미래는 불확실합니다. 이 모든 번영이 끝까지 계속될까요? 세계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모든 것이 거의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때에 이 '그러나' 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의 일반적인 성격을 알기 위해서는 특별한 사례를 살펴보면 됩니다. 성경에 의하면 죄가 들어온 이후 사람의 삶은 결코 흠이 없지도 않았고 완전하지도 않았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은 완전했으며 그의 삶에는 흠이 없었습니다. 에덴 동산에는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처럼 완벽한 존재로 창조되었으며 만물을 누릴 수 있는 삶을 부여받았습니다. 부족한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낙심도 불행도 없었으며 잘못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보시고 좋다고 하셨습니다. 삶이란, 흠도 없고 타락하게 만드는 것도 전혀 없는 이 완전성과 완벽성으로 특징지워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죄라고 하는 저 치명적인 것이 들어왔습니다. 죄는 삶의 완전성과 완결성, 완벽성을 박탈해갔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모두의 삶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고 저런 사람들이다. ‘그러나’…”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죄로 인해 삶이 망쳐지고 황폐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을 했다 하더라도 완벽하고 완결된 성공. 완전한 평화란 없습니다. 저는 세계 위인들의 전기나 자서전을 읽을때 이 '그러나'의 상황이 나오는 지점을 찾아보면서 큰 교훈을 얻곤 합니다.

 

여러분은 여기 능력있고 야망에 찬 한 사람을 보고 계십니다. 그는 자기 자신과 가족들에게 '저기까지만 도달하면 모든 것이 잘될거야' 라고 말합니다. 결국 그는 거기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잘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저는 비관주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러한 자서전들을 읽으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들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읽는 소설의 작가가 인기만을 노리는 사람이 아니라 진정한 소설가라면 여러분은 소설을 읽으면서도 이것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달리 말해서, 이것이 바로 어느 철학자가 말한 '생의 비극적 의미' 인 것입니다. 옥에 티는 언제나 있습니다. 우리가 완벽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그 속에는 분명 불완전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저 훌륭한 지위에 이미 도달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시기하고 질투한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여러분이 실수하기를 기대하고 있으며 여러분의 자리를 자신들이 차지하기 위해서 여러분의 몰락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들은 여러분이 병에 걸리거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어도 전혀 실망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이러한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이런 현실이 모든 것을 망쳐놓습니다.

 

어느 시인은 '왕관을 쓴 머리에는 곤고가 머무는도다' 라는 말로 이같은 상황을 노래했습니다. 왕관을 쓴 사람은 곤고합니다. 왜냐하면 그 왕관을 찬탈하기를 갈망하면서 단검을 숨겨놓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왕좌에 올랐습니다. 그는 왕관을 쓰고 있습니다. 그는 최고에 도달했습니다. 그래도 그에게는 이 '그러나'가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무언가 잘못된 부분이 있는 법입니다.

 

성경은 이 ‘그러나’ 로 가득차 있습니다. 에스더서에는 아하수에로 왕의 총애를 받았던 하만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하만은 높은 지위에 올랐으며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은 너무나 위대하기 때문에 어떤 것도 자신을 망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어느 곳에서든지 백성들은 자기에게 경배해야 한다고 공표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경배했지만 단 한 사람, 모르드개만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경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만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에게 불평했습니다. 그는 비참했으며 불행했습니다. 왕의 총애를 받아 최고의 지위에 오른 이사람, 칙령을 선포하고 그것을 실행시킬 권세를 가진 이 사람, 사실상 왕과 같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이 사람, 모든 사람들의 경배를 받는 이 사람이 비참하고 불행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에게 경배하지 않은 단 한 사람이 전부를 망쳐버렸던 것입니다. 그의 아내가 "무슨 일이예요?"라고 묻자 하만은 “모르드개 때문이야, 그가 내게 경배를 하지 않는단 말이야”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얼마나 적절한 비유이며 예화입니까! 삶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아만을 통해서 아람을 구원해주심으로 나아만은 왕의 총애를 받는 위대하고 명예로운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용기있는 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문둥병자였으며 그 병이 그의 모든 것을 망쳐놓았습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이 문제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기질, 자신의 건강이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어떤 일이든 자신의 분야에서 특출했던 인물들에 관한 기록을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알려지지 않은 배후의 이야기들을 알게 될 것이고, 그 특출했던 인물들은 자신의 기질의 희생양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위대한 배우를 보고는 “얼마나 놀라운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그들이 무대에 서기 전 또는 연기를 하는 동안에 어떤 일을 겪는지, 그리고 연기가 끝난 후에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게 된다면 아마 믿을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내내 건강상의 문제, 신경과민, 긴장감 등에 시달립니다. 그들의 성공은 끝없이 계속될 것 같고 거의 완벽해 보이지만 여러분이 정말 개인적으로 그들을 알게 되면 여러분은 그들에게서 이 문둥병, 이 고름나는 종기를 발견하게 되실 것입니다!

 

아니면 때로는 가정에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가정에 대해서 "이렇게만 된다면", "이것만 된다면"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언제나 전체를 망쳐버리는 그 무언가, 그 무언가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의 커다란 문제입니다. 이것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혼을 하는 진짜 이유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나는 이것도 해냈고 저것도 해냈다. 그러나 나는 불행히도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나의 아내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녀는 나를 따라오지 못한다. 아내가 나를 이해해주기만 한다면 좋을 텐데”라고 말입니다.

 

'그러나'가 있습니다. 언제나 다가와서 삶을 망쳐놓는 치명적인 문둥병이 있는 것입니다.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57:21). 그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고 아무리 성공을 했어도 죄는 문둥병과 같이 다가와서 모든 것을 망쳐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단순히 행복을 저하시키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그 무엇입니다. 죄악된 삶을 살아보십시오. 세상 방식대로 살아보십시오. 그러면 불행과 비참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실 것입니다.

여러분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살면 후회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과 타인에게 고통을 주게 될 것입니다. 죄는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불행을 가져다줍니다. 이 사람 나아만이 괴로워한 것은, 단순히 문둥병 때문에 그가 누리던 모든 행복이 저하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문둥병이 그를 극도로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디든지 죄가 있는 곳에는 고통과 슬픔도 있습니다. '휴머니티' 라는 여전히 슬픈 노래, 생의 애수, 생의 비극적 의미, 이런 것들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죄 때문이라고 생이란 원래 이렇게 되도록 창조된 것이 결코 아니라고, 그리고 언제나 곤경을 가져오는 것은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의 비극을 추악하고 공격적인 죄의 특질과 관련해서 바라보십시오. 문둥병! 끔찍하고 불쾌하며 무서운 것입니다. 바로 이 병을 나아만이 않고 있었습니다. 죄는 추악하고 더러운 것입니다. 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십시오. 예를 들어 신문을 읽을 때 무감각하게 읽기보다는 그 안에 묘사되어있는 것들을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불성실, 허세, 허위, 교활, 은밀한 일들 -이 모든 것들 속에 죄가 웅크리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짓밟아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죄처럼 추악하고 공격적이며 더러운 것이 또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현대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이러한 문제들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여기 답변이 있습니다. 문제들의 원인은 죄라는 문둥병입니다.

 

또한 죄는 문둥병과 같이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나아만은 자신의 주인 앞에서 큰 자였고 위대한 용사였으며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문둥병자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를 개의치 않습니다. 죄는 보편적인 문제입니다. 왕과 왕비들, 장군들과 수상들의 전기를 읽어보십시오. 각 계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이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죄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 모두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상, 성공자와 실패자가 따로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실패자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끔찍한 영혼의 문둥병에 걸려 있습니다.

 

저는 우선 다음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 성경은 생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만 들고, 생을 망치며, 생을 주관하여 추악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죄’ 라는 끔찍한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이제 여기에서 매우 명확하게 드러나는 두번째 강조점을 살펴보십시오. , 최선을 다하고 최고의 지위에 올라도 인간은 이 문제를 해결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아만 이야기의 본령입니다. 문둥병에 걸림으로써 나아만의 모든 것이 망쳐지고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주치의를 비롯한 모든 의사들을 찾아갔을 것이며 그들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계속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병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경은 왕들조차 당황하였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아만의 주인, 아람 왕이 있습니다. 자기가 가장 총애하는 신하 나아만을 치료하기 위해서 왕이 해보지 많은 방도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나아만을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그는 이스라엘에 문둥병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는 "아주 잘 되었다. 나의 형제인 이스라엘 왕에게 서신을 띄우고 나아만을 보내면 되겠구나"라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나아만은 이 사람을 치료해달라고 요청하는 아람 왕의 서신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향해 출발하여 곧 왕의 궁전 현관에 당도합니다.

 

이때 이스라엘 왕의 반응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이관대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라 저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어 그 문둥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로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이스라엘 왕은 아람 왕과 마찬가지로 나아만을 치료할 수가 없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완전히 무력했습니다. 그들의 모든 마법사들과 모든 의사들, 그들의 모든 고관대작들, 그리고 그들 자신들, 모두가 그 문제에 대해서 전혀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상황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문명의 역사 전체가 이 상황으로 요약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세기들을 거치면서, 우리에게 알려진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인류가 지내온 삶이 바로 이 이야기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라고 질문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제 말씀은 바로, 역사의 여명이 밝은 이래로 인간은 자신의 삶에서 일반적으로든 특별하게든 이러한 문제를 느껴왔으며, 이 문제를 처리해보려고 노력해왔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상과 연구는 이러한 신비를 알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해결책을 찾으려 시도해왔으며 문제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 문명의 역사인데, 오늘날처럼 이 이야기가 적절하게 들어맞는 때도 없었습니다. 저는 오늘날의 세계가 본문이 그리고 있는 바로 그 같은 지경에 처해 있는 모습을 봅니다.

 

여기에 문둥병자 (-우리 모두가 문둥병자입니다. 우리의 사회와 우리 모두는 본성상 문둥병자인 것입니다 -) 인 나아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는 문둥병을 없애려하고 있으나 완전히 실패하였습니다. 세계는 문둥병을 없애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왔습니까? 여러분이 역사상의 어느 원시 사회를 보더라도 그곳에는 부족마다의 법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부족법의 존재가 말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족법이란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리고 혼란과 혼돈의 사회에 어느 정도라도 질서를 도입하기 위해서 서투르게 노력한 흔적입니다. 부족법은 문둥병을 고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눈금을 조금 내려오면 여러분은 왕들과 황제들과 정부들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이들이 주민에 의해 선출된 것이든 아니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든 정부의 존재 의미는 마찬가지입니다. 정부란 이 문제를 처리하고 해결하며 제거함으로써 인간을 치명적인 문둥병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 보려는 하나의 시도인 것입니다. 의회에서 입안하는 법안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다 생활에 질서를 가져오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이 혼돈을 제거하고 주민을 안심시키며 문제에서 해방시켜줌으로써 '주민들의 몫을 늘려주려' 하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전쟁 (2차 세계대전 - 역주)이 끝날 때까지의 한동안은 인류가 겪는 어려움의 진정한 원인, 가장 무서운 원인이 ‘빈곤’이라고들 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기획과 입법으로 빈곤이 퇴치되기만 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그러면 인간은 범죄에서 놓여날 수 있으리라고들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빈곤을 퇴치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회학자들은 이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으며, 그 때문에 범죄와 비행과 범법행위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가장 큰 문제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오늘날은 우리의 ‘풍요로운’ 사회가 문제입니다.

 

그들이 전에 가르쳤던 것과는 완전히 반대인 것입니다! 이전에 사회학자들은 과중한 노동량으로 사람들이 녹초가 되고, 따라서 생각하거나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더 많은 여가를 줄 수만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 생각하고 읽을 시간을 좀 줄 수만 있다면, 그러면 그들은 자신들을 고양시키고 더이상 악의 희생양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커다란 문제는 여가의 문제라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시간을 수중에 쥐고 있으면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에 가지 말아야 될 곳에 가서 하지 말아야 될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가의 '문제' 입니다!

우리의 문제들에는 언제나 이런저런 원인이 있어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째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본성대로 행동하며, 우리는 어째서 이러한 전쟁들을 일으키며, 어째서 이러한 불행이 존재하며, 어째서 범죄와 그 밖의 좋지 않은 일들이 증가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인간이 지나간 여러 세기동안 답하려고 노력해온 질문들입니다. 철학의 진정한 책무는 인간과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 세기 동안 우리에게는 위대한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철학자들은 해답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들 자신이 문둥병을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말해주지만 그들 자신이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설사 우리가 그들의 말대로 한다고해도 문제는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계획되고 설립된 기구들이 가득합니다. 이렇게 많은 기구가 있었던 때는 없었으며 이 순간처럼 세계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바빴던 적도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기구들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예컨대 ‘결혼생활 지도협회’는 학교와 집, 형무소 등에까지 심리학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점점 더 분명하게 문제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은 고쳐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옛날의 문둥병자 나아만의 상황과 똑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과 제가 속해 있는 세계는 절망적인 질병에 걸려있습니다. 문둥병에 걸린 것입니다. 문둥병이 우리 면전에서 전염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지난 세기 동안 우리의 의회에서 만든 법안들을 보십시오. 지난 백 년 동안 의회에서 그런 훌륭한 법안들을 가결한 일은 인류 역사에 없었습니다. 제가 그러한 훌륭한 법안들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일은 설교의 책무도 아닙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 고귀하고 유익한 입법도 근본적인 문제를 그대로 남겨두었으며, 따라서 문둥병도 그대로 있고, 인간은 여전히 병들고 여전히 비참하고 불행하며 여전히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이같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당황하여 '사람이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벗어날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 희생당하는 존재' 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만든 법에 의해 인간에게 곤란이 초래되며 이 법을 통해 이루어진 모든 일들은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람과 이스라엘의 왕들은 완전히 실패하였으며 문제는 그들에게 너무나 어렵고 복잡해보였습니다. 병은 너무나 심했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약들은 쓸모가 없었습니다. 이같은 사실에서 우리의 두 번째 강조점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유일한 해답

 

세 번째 강조점은, 인간은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같은 문제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에 대해 주목하십시오. 여기에 문둥병을 않고 있는 위대한 인물이 있습니다. 모든 수단을 다 써보았지만 그것들이 모두 다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희망이 전혀 없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치료책을 발견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치료책이 있었습니다. 사용가능한 치료책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사람들은 그 치료책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해결책은 선지자 엘리사에게 있었습니다만 해결책을 찾고 있던 이 위대한 왕들은 자신들에게 해결책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내내 모르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다시 이 세상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 아무런 해결책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 순간 이 예배당 안에 있지도 않았을 테고 저도 이 설교단에 서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여기에서 하고 있는 일, 제가 여기에 서 있는 이유가 바로 어떤 해결책, 그것도 절대적인 해결책 즉 치료의 방법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는 이 해결책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해결책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딘가에 다른 의사들이 있는 것입니까? 어딘에 위대한 점성술사가 있는 것입니까? 다른 왕이 있는 것입니까? 세계는 지금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언제나 해답은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큰 문제' 라고들 말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에 이같은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세계는 작은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 내용이 어떻든 간에 모든 것은 대규모이어야 합니다. 인간은 항상 자신은 위대하며 따라서 어떤 위대한 해결책이 어울린다고 교만하게 생각하고 그러한 해결책을 찾아다녔습니다. 이 까닭에 모든 것은 대규모가 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두 왕을 보고 계십니다. 그들은 국가의 대사에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큰 군사와 큰 정복 전쟁에 대해서 관심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의 작은 전투에서 붙잡혀온 여종이 있었지만 아람 왕은 그 어린 여종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알겠습니까? 왕이 여종을 알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생각입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왕에게 나아가서 “전하, 우리가 지난번 전투에서 포로로 잡아온 어린 여종을아시지요”라고 말한다면 그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마도 그는 밖으로 내쳐지고 직위를 박탈당할 것입니다. 일개 여종이 왕에게 있어서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까? 해결책이 그곳에 있었지만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은 더 큰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으며 온 세계도 그들과 같았습니다.

 

우리 사회는 '왕립심의회'(법의 운용, 사회, 교육사정 등을 조사, 보고하는 영국의 기구 - 역주)를 만들고 법안을 입안하며, 위대한 철학자의 심오한 이론을 연구하고 과학 분야에서 놀라운 발견을 이루기 위한 연구에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세계는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무언가 크고 위대한 것을 찾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계가 항상 관심을 기울이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기 때문에 세계는 바로 가까이에 있는 해결책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일하고 참된 해결책은 세계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세계는 이 해결책을 알지도 못하며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말해주는 것이 바로 이같은 사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성경의 메시지 전체가,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모든 구원이, 또한 이 구원이 오늘 밤 우리에게 말해주는 모든 것이 이 어린 여종에게 집약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상황을 묘사하는 성경의 방식을 좋아합니다.
"전에 아람 사집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계집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왕하5:2). 아무도 그 여종에 대해서 알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너무도 보잘 것없는 존재였고 어떤 의미에서도 중요하거나 문제가 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이 복음의 영광이 있습니다. 열왕기하의 메시지는 아이러니컬한 메시지이며 거기에는 특별한 역설이 있습니다. 위대한 장군이 위대한 왕을 찾아갔습니다. 왕은 치료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 문둥병자 장군을 이스라엘의 왕에게 보내면서 그를 치료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해결책과 해답은 나아만의 부인을 수종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어린 여종에게 있었습니다. 문제의 해답은 왕궁에도, 법정에도, 조신들과 아첨꾼들 가운데에도 없었습니다. 해답은 부엌, 즉 그 사회 체제에서 가장 낮고 비천한 곳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성경으로부터 시종일관 듣고 있는 메시지라는 사실을 느껴본 일이 있으십니까? 여기에 애굽과 바벨론, 앗수르 그리고 갈대아라는 위대한 왕조들과 위대한 왕국들이 있으며 또 다른 이런저런 위대한 나라들도 있습니다. 여기에 위대한 왕들과 장군들, 점성술사와 현인들이 있습니다. 세속적인 역사는 바로 이런 것들과 이런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세계 역사의 진정한 열쇠는 팔레스틴이라고 불리우는 아주 작은 나라, 위대하게 뻗어나가는 제국들 옆에 있는 이 작고 보잘 것없는 나라에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 구석구석에 이 작은 나라가 등장합니다. 언제나 이 나라가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이 작은 나라가 모든 것들을 뒤집어 엎고 위대하고 권세있는 사람들이 찾는 대답들을 줍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분은 가장 작은 나라를 택하셨습니다. 항상 이 작은 나라의 이 작은 민족이 해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다신론에 빠져 정령과 자신들이 만든 많은 신들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민족은 유일하시고 홀로 진리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 작은 나라의 증언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이들의 증언을 비웃었지만 결국 그들의 증언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에서 이와 똑같은 요지의 놀라운 이야기들을 많이 발견하실 것입니다.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전혀 중요해보이지 않던 뜻밖의 사람, 비천한 인물이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여기 애굽의 위대한 인물 바로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한없는 재산과 권력이 있었습니다. 그의 권위와 그의 성공에는 한계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어떤 명령이라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섭고 파괴적인 문제가 그를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기근이 다가오고 있는데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꿈을 꾸었는데 자신의 꿈을 해몽하지를 못했습니다. 현자들과 점성술사들을 불러 보았지만 그 사람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완전히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꿈의 뜻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애굽의 모든 힘과 지식이 이 문제에 투입되어 위원회와 위원회가 꼬리를 물고 결성되었으며 정묘한 과학과 예술, 가능한 모든 수단들이 이 문제에 달려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들 중 어떤 것도 해답을 제시해주지 못했습니다. 어디에서 해답이 나올까요? 해답은 감옥에 갇힌 한 죄수로부터 나왔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 그는 여행 중인 상인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온 사람입니다. 그는 궁정에 들어가본 일도 전혀 없었고 바로에게 전혀 알려지지도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감옥에서 바로의 꿈을 올바르게 해몽해 내었으며, 이 알려지지 않은 요셉을 통해서 애굽은 기근을 겪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41)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에도 같은 진리가 적용됩니다. 여기에 땅 위를 활보하는 거인이 있는데 모든 사람들이 그의 발 앞에서 떨며 두려워합니다. 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누구란 말입니까? 군대의 위대한 장군이 아니라 다윗이라는 작은 목동이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 그는, 군인들에게 제공되는 장비들로 무장을 하고서는 걸을 수도 칼을 휘두를 수도 없는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돌팔매를 사용했습니다. 돌 하나,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세계는 해답을 모릅니다. 그러나 언제나 해답은 있어왔습니다. 사람들은 위대한 것들을 찾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해답의 절정을 보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본다는 겁니까?"라고 묻는 분이 계십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온 세계가 메시아를 찾고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온 하늘을 샅샅이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한 장소가 있었습니다. 베들레헴, 예수님께서는 유대에서 멸시받는 도시 중에서도 가장 보잘것 없었던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세상의 구세주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2장에서 인구 조사와 세금 징수법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 세금과 정치에 대해서. 그리고 이런저런 일들이 어떻게 해야 올바르게 바로잡아질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세상의 구세주께서 그들 가운데로 막 오시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기를 낳으려고 하는 한 여인에게 방을 주기 위해서 여관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안돼, 안돼, 우리는 방을 옮기지 않을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여인은 마굿간에 가서 자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난 곳이 되었습니다. 주변에는 가축들이 있는 가운데, 짚단 위에서 태어나 구유에 누워있는 자그맣고 의지할 데 없는 아기가 세상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었습니다.

 

왕들은 그 아기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위대한 민족들도 이 아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위대한 사상가들도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철학자들도 해답을 알지 못해 여전히 무언가 기이하고 새로우며 놀라운 것을 찾고 있었는데, 정작 그들이 찾는 것은 그분이 오신 곳에 있었습니다. 원리는 언제나 같습니다. 어린 여종, 알려지지 않은 뜻밖의 사람-거기에 해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 오신 후 어디에서 지내셨을까요? 그분은 갈릴리에서 지내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사실이 많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었으며 그들의 마음 속에 거리끼는 요소로 작용했다는 이야기를 성경에서 읽은 바 있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이 스스로를 특별한 선생이라고 주장했다고 말하면서,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러한 선생이 어째서 가난하고 비속한 무리들에게 설교나 하면서 갈릴리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느냐고 묻습니다. “그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어째서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는가, 어째서 왕위에 오르지 않는가, 어째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모아 우리를 로마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켜주지 않는가, 왜 그렇게 하지 않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 ‘이 목수’ 는 언제나 그곳 갈릴리에서 평범한 무리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는 철학자나 위대한 인물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그가 나무에 못박혀서 아주 나약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의 시신이 나무에서 내려지고 무덤에 묻히는 것을 보면서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당신의 구세주요? 이것이 당신의 구원이요? 아니오, 이런 것은 구원이 아니오." 그들은 “부엌에서나 마굿간에서는 구원이 나을 수 없소. 우리는 무언가 크고 위대한 것을 원하오.”라고 말합니다.

 

아시다시피 세상은 언제나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지 못했으며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줄 유일한 방법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분이 이 땅에 오셨을 때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그 이후의 교회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의 모습을 보십시오. 노동자, 어부 등 평범한 사람들 몇몇이 모였고 주님께서 바로 그들에게 당신의 나라를 맡기셨지만 세상은 그것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세상을 뒤흔들어 놓을 지경에까지 이르자 세상도 그들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위대한 로마 제국이 고트족과 반달 족과 바바리안 족의 공격으로 비틀거리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때에도 문명과 진리의 유산을 지켜온 것은 바로 기독교회였습니다. 기독교는 부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제국의 궁정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라 카타콤에 있던 사람들, 그들이 바로 황제들이 알지 못하고 볼 수 없었던 해결책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독교회는 그런 모습으로 여러 세기들을 지내왔습니다. 해결책이 거기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절망할 때면 마치 나아만이 어린 여종에게 눈을 돌렸던 것처럼 교회로 눈을 돌렸습니다.

 

마틴 루터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추기경도 아니었고 독일 변두리의 알려지지 않은 지방에 있던 한 사람의 평범한 사제였을 뿐입니다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자 그에게서 해답이 나왔습니다. 그로부터 위대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밤도 상황은 그때와 똑같습니다.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오직 한 가지 해답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해답은 기독교회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90피센트는 기독교회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10퍼센트의 사람들만이 어떤 관심이든 교회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그들 중 절반만이 자신의 관심을 활발하게 행동으로 옮기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사람들은 위대한 일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버트란트 러셀이 무슨 말을 했습니까? 이 위대한 사상가가 무슨 말을 했습니까? 의회에서 어떤 법안을 통과시킬까요? 어떤 새로운 심의회를 발족시킬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의 과학적 지식으로 해결책을 만들거나 찾아낼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결코 해결책을 찾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죄의 문제에는 오직 한가지 해결책 밖에는 없습니다. 그 해결책이란 바로 구원이라는 기독교의 메시지입니다. 멸시당하고 조롱당하고 잊어버린 바 된 기독교회만이 해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부엌에 있습니다. 신문들은 우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며 세상은 우리의 말에 결코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고, 사람들에게 알려진 바 되지도 못하고 멸시받고 있는 소수이며 , 얼마되지 않은 남은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으며 질병에 대한 치료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만이 멸망에 처해 있는 세상에게 들려줄 우리의 증언인 것입니다.

 

이 증언은 어린 여종이 그 여주인에게 들려주었던 것과 똑같은 내용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고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소녀가 알고 있던 전부였습니다. 그녀 자신은 문둥병을 고칠 수 없었습니다만 치료책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나라에서 왔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설교를 통해서 제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증언할 뿐입니다.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세상이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10:27). 전능한 능력을 가지신 분, 기적적인 능력을 가지신 분이 계십니다.

 

어린양의 보배로운 피에

능력 있네, 능력 있네,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능력 있네

 

오늘 밤 기독교의 이 메시지에는, 죄를 도말하고 사람들을 정결케 하고 깨끗이 하며 그 생명을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켜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한다' 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16)라고 설명합니다. 제가 여기 서 있는 것은 여러분의 문제가 어떤 것이든 간에, 여러분의 영혼 속에서 고름을 내고 있는 종기가 어떤 것이든 간에 거기에는 한 가지 치료책이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적인 치료책이라는 사실, 그것은 바로 하나넘의 치료책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 소녀는 그 능력을 행사하시는 분에 대해서 증거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주 나의 하나님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그 선지자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마리아에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한 선지자를 통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바로 그 한 사람을 지시한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이 강단에 서 있는 것은 저의 특권이며 이 특권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이 자리에 서있는 것은 희미하고 모효한 능력을 선포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저는 한 분을 지시하기 위해서, 즉 신성으로 충만하시며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풍성함과 은혜의 원천과 지혜와 능력을 받은 분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지시하기 위해서 여기에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리고 이 밤에 제가 여러분들께 드릴 말씀은 여러분의 깊은 질병 가운데서, 그리고 여러분이 처해 있는 괴로움 속에서 여러분이 할 일은 오직 한 가지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나사렛 예수께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치료책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죄책을 없애주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이미 그것을 가져가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능력을 주실 수 있으십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치료해주실 것입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새롭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그것뿐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구세주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십니다.

 

세상이 할 수 없는 일을 그분은 하십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 한 가지는 그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혼을 치료하시고, 여러분의 영을 치료하시고, 여러분의 삶을 망쳐놓는 것을 제거해주시고, 여러분에게 참된 생명을 주시되 더욱 풍성히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세상은 자신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어리석음을 통해 믿는 이들을 구원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 밤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지혜있고 능하고 문벌 좋은 자들은 모두 다 복음을 비웃고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병들었습니다. 그들은 문둥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고전1:27). 여종은 왕이 알지 못하던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멸시받는 것들을 존귀케 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왕들도 알지 못했던 해답을 제시한 그 어린 여종의 증언을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 이어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아. 읽는 것을 다 중지하고, 생각하는 것을 다 중지하고 잠시만 기다리라. 이 오래되고 오래된 이야기를 들어보라. 멸시를 당한 예수님의 말씀을, 그분의 사랑을 들어보라. 예수님과 그분의 보혈 이야기를 들어보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나사렛 예수그리스도 너희들을 치료해 주시기 위해 죽으셨다가 너희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너희들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신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그분께 나아가라. 그리하면 너희들이 치료함을 받으리라.

 

(* 1960 2 14,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행해진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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