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구원

★긍휼과 사랑을 보여 주시기 전에 먼저 비참을 깨닫게 하심()

(사람들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푸시기 전에 자기들의 비참과 무가치함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라는 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사람들을 감화시켜 자기들의 본래의 비참한 조건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시며, 자기 스스로에게서 어떤 도움도 기대할 수 없다는 절망적인 생각을 갖게 해서, 아니면 육체의 힘을 통해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런 후에 그들에게 나타나십니다. 또한 자기들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만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자신들의 조건을 알게 하십니다. 이 점은 성경에 나타난 바, 당신의 백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식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

 

죠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1703-1758))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표준새번역 -  나는 이제 내 곳으로 돌아간다. 그들이 지은 죄를 다 뉘우치고, 나를 찾을 때까지 기다리겠다. 환난을 당할 때에는, 그들이 애타게 나를 찾아 나설 것이다.) (5:15).

 

 

호세아 5장의 앞 부분에는 에브라임을 멸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위협이 나타나 있습니다. 선지서들에서 에브라임은 유다 나라와 구별되는 이스라엘 나라, 곧 열 지파를 뜻하며, 에브라임과 유다에 대해서 말할 경우에는, 열 두 지파 전체를 가리킵니다. 이 호세아 5 12절에서 그러므로 나는 에브라임에게는 좀으로 유다 가문에게는 썩이는 것으로 칠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유다는 이스라엘 지파 중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를 가리킵니다. 그 두 지파는 유다 왕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에브라임은 이스라엘 왕의 통치를 받고 있는 지파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나라 전체를 가리켜 에브라임이라 하는 것은 그 나라의 수도인 사마리아가 그 지파 중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에 있는 1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에 대하여 얼마나 무서운 방식으로 대하실 것인지에 대한 경고가 선언되어 있습니다. 내가 사자처럼 에브라임에게 달려들고, 젊은 사자처럼 유다 가문에 달려들어 그들을 물어다가 갈기갈기 찢을 것이니, 아무도 내 입에서 그들을 빼내어 건져 주지 못할 것이다.. 1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사자처럼 그들을 찢으신 다음에 어떻게 그들을 다루실 것인지를 선언하십니다. 그래서 여기서 다음과 같은 요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그들로부터 얼굴을 돌리실 것을 선언하십니다.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 사자처럼 그 백성들을 찢으십니다. “나는 떠나가리라. 나는 그런 조건에 그들을 내버려 둘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서 떠나고 그들은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2.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해 돌아오시기 전에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것인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세 가지 요점이 지적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이 죄책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라고 하였는데, 원어에는 “그들이 죄책감을 느끼기까지”로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들이 죄지었음을 깨닫게 되고 자기들의 죄책을 인식하기까지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입니다.

 

   둘째로,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라는 말씀 속에 함축되어 있는 뜻은 그들이 비참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찢고 그들을 내버려두시기 전에 이미 큰 재앙이 그들에게 밀어 닥쳤습니다. 그러나 교만과 부패함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의 비참한 조건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바로 이 호세아 7 9에서 온갖 외세가 국력을 삼키는데도 에브라임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도 깨닫지 못한다.라고 이 선지자가 주목하는 바와 같습니다.

 

   셋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신들의 입장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간절히 찾는다는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크게 염려하면서 간절하게 하나님의 얼굴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에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무능한 처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5 13절에서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저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라고 말하는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야렙 왕은 에브라임을 치료하지 못했고 고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모든 도움을 베풀어주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백성에게 상처를 내셨고, 젊은 사자처럼 그들을 찢으셨습니다. 그리고 선언하시는 어느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을 그만두고, 그 누구도 자신을 치료할 수 없음을 깨닫고 치료할 이는 오직 하나님뿐임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교리

 

사람들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푸시기 전에 자기들의 비참과 무가치함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라는 교리입니다.

 

. 표적적인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방식도 특이함

 

바로 그것이 당신의 긍휼과 은총을 이적적으로 베풀어주시기 전에 취하시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의 섭리를 매우 보편적으로 밟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사람들을 감화시켜 자기들의 본래의 비참한 조건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시며, 자기 스스로에게서 어떤 도움도 기대할 수 없다는 절망적인 생각을 갖게 해서, 아니면 육체의 힘을 통해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런 후에 그들에게 나타나십니다. 또한 자기들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만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자신들의 조건을 알게 하십니다. 이 점은 성경에 나타난 바, 당신의 백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식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큰 지위에 오르기 전에 먼저 그를 겸비케 하는 구덩이에 던져져야 했습니다. 그는 그 구덩이에서 그처럼 명예롭고 큰 번영을 누리게 될 때를 준비한 것입니다. 요셉이 자기 형제들을 만났을 때, 그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혀 그들로 큰 기쁨을 누리게 하고 큰 명예와 번영을 누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 야곱의 아들들은 혹독하고 어려운 난제들과 큰 염려의 골짜기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깊은 절망의 나락에 서야했고, 지난 날 요셉에게 행한 자기들의 죄를 반성하면서 “우리가 우리의 동생에게 큰 잘못을 행했다”는 말을 하는 입장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섭리를 통해 그들을 겸비케 하셨고, 결국 그들의 모든 난관을 끝내시고, 요셉이 자기의 신분을 밝힘으로써 그들의 슬픔을 큰 기쁨으로 변하게 하셨습니다.

야곱은 요셉이 아직 살아 있다는 기쁜 소식을 듣기 전에 먼저 베냐민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 큰 고통을 감수해야 했고 시므온마저 잃어 버렸다는 깊은 절망감에 빠져야 했습니다. 야곱은 말로 할 수 없는 깊은 조바심을 갖기까지 하였습니다 창세기 42 36절에 보면 야곱은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후에 금방 참으로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의 소식, ,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을 묶은 결박이 점점 더 조여들었습니다. 그들을 얽매는 그 멍에가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더 많은 일을 그들에게 시킬 것을 명했고, 사역을 감독하는 자들은 벽돌을 찍을 때 짚을 그들 스스로 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런 후에 그들에게 구원이 주어졌습니다.

그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이 홍해에 이르게 되었을 때, 애굽 사람들이 그들의 발꿈치를 닿을 지점까지 추격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크게 당황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적을 베풀지 않으시면 영락없이 죽게 되었음을 그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방으로 갇혀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앞에는 홍해가 가로놓여 있었고, 그들 뒤에는 애굽 군사들이 진 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돕기 위해서 놀랍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홍해를 통과하게 하시고, 구원의 노래를 그들의 입에 두셨습니다.

그렇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기 전에 사십 년 동안 무서운 광야에서 헤매며 계속되는 고통과 시험을 겪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존재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배우게 하셨고, 그들의 마음이 죄악스러움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32:10)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그런 시련과 어려움을 겪게 하사 그들을 낮추시고, 그들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그들로 알게 하셨습니다.

그런 시험을 당했을 때 그들 마음속에 있는 부패가 드러나게 하여 정말 자기들의 악함을 온전히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백성으로 삼으시어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이 자기들의 의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 이스라엘 자손들은 완고한 백성들임을 아주 명백하게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에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라”(8:2,3).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8:15-17).

 

우리는 사사들의 역사 속에서 그와 같은 실례들을 자주 대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반역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원수들 손아귀에 두셨습니다. 그들이 크게 곤고해져서 자기들이 어쩔 수 없던 처지에 있음을 깨닫게 되고 반성하며 여호와께 부르짖기까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원수들의 손에 머물게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한 구원자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들을 낮추시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무가치함을 깨닫게 하시며, 자기들이 정말 하나님의 장중에 있음을 인정하게 하십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사시기 10 10 이하의 말씀은 이러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치 아니하리라.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서 너희 환란 때에 그들로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짜오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의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날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 자기 가운데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를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백성들과 함께 동행하시는 순간부터 바로 그 방식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이 자기 죄와 그 열조의 죄와 그 및 그들이 나를 거스린 허물을 자복하고 또 자기들이 나를 대항하였으므로 나도 그들을 대항하여 그 대적의 땅으로 끌어 갔음을 깨닫고 그 할례 받지 아니한 마음이 낮아져서 그 죄악의 형벌을 순히 받으면,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 그들이 나의 법도를 싫어하며 내 규례를 멸시하였으므로 그 땅을 떠나서 사람이 없을 때에 땅이 황폐하여 안식을 누릴 것이요, 그들은 자기 죄악으로 형벌을 순히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대적의 땅에 거할 때에 내가 싫어 버리지 아니하며 미워하지 아니하며 아주 멸하지 아니하여 나의 그들과 세운 언약을 폐하지 아니하리니, 나는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열방의 목전에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그들의 열조와 맺은 언약을 그들을 위하여 기억하리라 나는 여호와니라.(26:40-45)

 

‘나는 개’, 어찌 자녀의 떡을 먹을 수 있으리요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으로 그런 복락을 부여하실 때 먼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지었음과 곤고함을 인식시키고,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어 그 복락을 구하게 하십니다. 열왕기상 8 38, 39“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이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이 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든지,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여기서 마음의 재앙을 깨닫는다는 말은 자기들의 죄와 비참을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비참을 인식하는 것이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이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과 고통을 깨닫고 이 전(殿)을 향하여 손을 펴고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대하6:29) 이라는 솔로몬의 기도에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바로 이 말씀은 사람이 자기 자신의 죄와 비참을 깨닫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그 기도의 기초가 됩니다.

 

고린도후서 1 9절과 10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일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를 신뢰하지 말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위험한 죽음의 고비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고, 지금도 건져 주십니다. 또 우리는, 앞으로도 건져 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하나님께 둡니다..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절망케 하신 후 큰 구원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나안 여인의 마음을 낮추시어 자기의 무가치하다는 의식을 실제로 표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신 다음에 그녀의 기도에 응답하여 그녀의 딸을 치료하셨습니다. 그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계속 울부짖는 그녀에게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으시고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는 것 같은 모습을 추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녀를 멀리 쫓아보내 주십사고 주님께 아룁니다.

계속 그녀가 주님을 따라오면서 울부짖자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치 않다.라고 멸시하는 투의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냉정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자기는 자녀의 떡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음을 인정하면서 다만 부스러기를 구하였을 때, 그리스도께서 그녀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모든 세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체험은 바로 그런 예들과 부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놀라운 긍휼과 사랑을 베풀어주시기 전에, 특히 영적인 긍휼을 통해 그런 이을 하시기 전에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그들을 겸비케 하십니다. 그들의 곤고함과 자기 자신들이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그들 자신의 비열함과 무가치함을 인식하게 하십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통상적인 방식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주목할 만한 섭리적인 경륜을 통해 그들을 낮추시거나, 성령의 감동을 통해 그들 자신의 무가치함과 비열함을 깨닫게 하시는 일을 먼저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 영적 구원을 이루시는 방식도 마찬가지로 특이함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영혼에 사랑과 긍휼을 베풀어주시기 전에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비참과 무가치함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끄심으로써 그들에게 베풀어주시는 긍휼은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크고 놀라운 사랑과 긍휼의 표증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긍휼과 선하심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실 때 다른 것들도 있습니다. 곧 세상에 있는 동안 필요한 많은 좋은 은총들입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 긍휼은 하나님의 옛 백성들에게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요셉을 높이 들어올리신 것,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건져내신 일,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마른 땅에 이르게 하신 일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신 일, 그들 앞에서 이방인들을 쫓아내신 일, 때때로 그들의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신 일 등은 큰 긍휼입니다.

그러나 그런 긍휼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의 책임과 죄의 지배에서 건져내신 것과 같지 않습니다. 그런 긍휼 가운데 여러 가지가 바로 이것을 모형적으로 드러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비참을 깨닫게 하심으로써 보다 나은 긍휼들을 받을 준비를 하게 하셨다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당신의 큰사랑을 백성들에게 먼저 알리시기 전에 먼저 특별하게 그 일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긍휼을 베풀 의향을 가지실 때, 먼저 그 죄인들을 그렇게 다루십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들을 반성해 복, 자기들이 어떤 존재들인가를 생각하고 깨닫게 하십니다. 또한 자기들이 처한 조건이 어떠한지도 알게 하십니다. 이마 말씀드린 것이 바로 그 점을 입증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적인 경륜들 사이에는 일관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다른 크고 주목할 만한 긍휼을 베풀어주시고 은총의 여러 표증들을 나타내실 때 바로 그런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았습니다. 그와 같은 절차를 취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임을 확증해 주는 것이 바로 그 점이기도 합니다.

 

1. 먼저 죄인임을 깨닫게 함

 

하나님께서는 먼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어떤 죄를 지은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하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 전에 사람들이 그 점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계속 죄를 지으면서도 자기들이 행한 것을 돌아보지 않고, 지기들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전혀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그것으로 인해 괴로운 마음을 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깨닫게 하실 때,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들에 대해 생각하도록 인도하시고, 순서상 자신들의 죄를 보게 하십니다.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지은 과거의 죄들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의 기억력을 새롭게 하여 지금까지 전혀 망각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찮게 여겼던 것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고 이제 그것들을 반성하기에 이릅니다.

 

죄인임을 알도록 죄 가운데 버려 두심

 

사람들은 자기들이 쌓아 놓은 범과가 하늘에 닿기까지 얼마나 많은지를 발견합니다. 특별히 어떤 죄들은 항상 그들 앞에 있었기 때문에 그 마음에서 몰아낼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깨닫지 못할 때 그 죄가 그들을 따라 잡으며, 요괴처럼 그들을 추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마음의 죄가 어떠한지를 깨닫게 하시고, 그들 마음이 얼마나 부패하고 왜곡되어 있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그 한 가지 방식은 그들로 하여금 일상의 죄들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죄가 그들 앞에 낱낱이 드러나고,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죄들이 자기들을 괴롭히는지, 정말 자기들 마음속에 얼마나 지독한 부패의 샘 근원이 있는지를 인식하기에 이릅니다. 그들의 죄악적인 생활을 통해서 죄의 본성이 드러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바르게 생각하도록 인도하시기만 한다면, 각 사람마다 자기가 죄 아래 팔렸으며 자기 마음이 부패로만 가득 찼음을 확실할 정도로 충분한 죄가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용하시는 또 다른 방식은 여러 가지 시험 아래서 부패의 성향이 내면적으로 작용하도록 내버려두시는 방식입니다.

그들은 그 여러 가지 시험을 통해서 지옥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마음이 얼마나 악하고 부패한가를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이와 같은 악을 이용하여 이런 점을 도출해 내십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시험을 받을 때 그 본성이 작용하는 바에 따라서 그 본성의 부패를 알게 하십니다. 영원한 괴로움에 대한 공포심에서 그런 여러 가지 시험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시어 그런 것들을 증험하게 하시며, 자기들의 마음속에 어떤 것이 존재하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때로 사람들로 하여금 악해지도록 내버려두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들의 있는 부패의 작용들에 대한 핑계와 구실을 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로 그들을 선하게 바꾸시기 위해 그들 마음의 부패의 작용을 허용하시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선해지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절대로 악해지는 입장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매우 무모할 뿐만 아니라 참으로 주제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긍휼로 그런 부패한 본성의 작용들과 하나님을 대적하고 미워하는 심령을 이용하여 그들 마음의 비열함을 보여 주심으로써, 그런 것들을 선한 쪽으로 이용하신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때로 그들의 악한 행동을 보시고 격노하셔서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시고 버리시기까지 하십니다. 광야에서 불평하다가 죽은 자들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 대하여 진노하심으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너희가 결단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스스로 그런 자리에 들어가도록 자신을 방임시키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극히 위험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영혼들을 향하여 구속적인 사랑을 나타내시기 전에 먼저 이런 방편을 통해 그들 마음의 재앙을 보여 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죄인들이 죄를 깨닫지 못할 동안에는 죄는 숨어 있습니다. 죄인들은 그 죄를 전혀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효력 있는 율법을 활용하셔서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의 죄악들을 반성하고 되돌아보게 만드십니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전에 전혀 눈 여겨지지 않던 죄가 나타나 잘 보입니다. 요셉이 자기 형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인 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영혼에 자신이 바로 사랑 가운데서 그 영혼을 구속하는 자임을 드러내시는 일에 대한 모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그 형들에게 자신을 나타내기 전에 먼저 그 형들이 스스로를 돌아보며 “우리가 참으로 죄를 지었도다.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2. 위기의식을 느끼게 함

 

하나님께서는 죄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처한 무서운 위험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보게 하시고, 그들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 비참과 연관되어 있는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 죄인들이 자기들의 위험을 깨달을 때 두 가지 사항에 대해서 깨닫게 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불쾌하심이 매우 무섭다는 것을 그들로 인식하게 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자주 들었고, 그 진노의 맹렬함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들었어도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지옥의 가공할 만한 무서움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을 대적한 자신들에게 다가올 영혼의 비참함과 하나님과의 원수 됨이 얼마나 끔직한 것인가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망 없이 영원토록 그런 고통 속에 거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도 알게 됩니다. “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며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 떨며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곳과 함께 거하리요 하도다.(33:14)라는 성경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깨닫고 뉘우치는 죄인들은 지옥이 마치 자기 눈앞에 있는 것처럼 느끼는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들은 그 지옥의 비참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생각하고 깊은 인상을 받게 되며, 자주 그들의 상상 속에서 지옥의 비참을 연상케 합니다. 마치 자기들이 지옥의 무서운 불꽃을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때때로 꺼지지 않는 분노의 화염을 자기들에게 쏟아 부으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과도 같고, 저주받은 자들이 울부짖고 소리치며 아우성대는 소리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둘째로, 그들은 어느 정도 자기들의 죄와 그 진노 사이에 관련이 있음을 깨닫게 되고, 자기들의 죄로 인해 그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그 진노의 무시무시함에 대하여 생생하게 인식하고 그래서 그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게 됩니다. 바로 그 진노가 자기들의 몫이 될 것임을 생각하며 무서워합니다. 죄 때문에 그 비참하고 끔찍한 조건에 자기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죄 때문에 그 비참하고 끔찍한 조건에 자기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내용들이 하나님의 방식이 그러함을 명백하게 보여 줍니다. 우리의 첫 조상들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그것을 확증합니다.

 

두려워하는 까닭을 물으셨던 하나님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계시되기 전에 죄책감과 자기들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의식하였습니다. 그들은 죄책감을 느끼고, 하나님의 진노가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하나님이 오셨을 때 그들은 떨며 무서워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불려 나갔을 때 어째서 그런 두려움과 죄책감을 갖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라는 하나님의 요청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그들이 그 나무의 실과를 먹었는지 하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나무 실과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런 것을 물으셨던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긍휼의 길을 준비케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언약을 그들에게 나타내시기 전에 먼저 그들의 죄책과 위험을 알게 하셨습니다. 아마 그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여인의 후손’에 관해 생각하자마자 금방 믿음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하신 그 긍휼 어린 계획이 자기들에게 참된 위안과 소망을 주는 것임을 금방 발견하였을 것입니다.

요셉이 그 형들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전에 그 형들은 큰 곤고함에 빠져, 사는 것이 두려울 정도였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사람들은 먼저 죄책감과 자기들이 처한 위험을 생각하고 찔렀습니다(2:37). 바울이 처음 위안을 받기 전에 먼저 두려워 떨고 놀랬습니다((:6). 삼일 간 밤낮으로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큰 곤고함에 처해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는 회심하기 전에 먼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가 등불을 준비하여 두려워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스도의 초청의 말씀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더욱더 특별하게 주어졌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 초청의 말씀은 죄책감과 자기들이 처한 위험 때문에 수고하고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곤고함에 처한 각 사람이 다윗에게 몰려왔을 때가 바로 다윗이 동굴 속에 있었을 때였습니다(삼상22:1). 이것이 기록된 것은 틀림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것이며, 그리고 떨며 곤고하며 그리스도께서 피한 자들을 가리키기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피난처로 날쌔게 피한다는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오는 것을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인데, 그들이 오려면 먼저 마음속에 어떤 불행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야 함을 함축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들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고, 바로 이 두려움이 달아나게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18: 10)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참으로 위안을 주실 때 그 들려주시는 음성은 여전히 작은 소리입니다. 그러나 이 소리보다 먼저 강한 바람과 무서운 지진과 불이 앞섭니다. 엘리야가 호렙산에 있을 때 그러하였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곧 나 주가 지나갈 것이니, 너는 나가서, 산 위에, 주 앞에 서 있어라." 크고 강한 바람이 주 앞에서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그 바람 속에 주께서 계시지 않았다.그 바람이 지나가고 난 뒤에, 지진이 일었지만, 그 지진 속에도 주께서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가고 난 뒤에, 불이 났지만, 그 불 속에도 주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불이 난 뒤에,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왕상19:11,12).

 

성경에는 이 점을 확증해 주는 요점이 또 있습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낳는 것과 한 여인이 곤고함에 처해서 구원을 필요로 하는 것 사이의 대조가 그것입니다(16:21, 12:2). 죄인의 회심 또한 동일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마음 속으로 낳은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 19절에서 사람들의 거듭남을 그리스도를 해산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자기 어머니라 부르셨습니다.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내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 12:49, 50)라는 성경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호세아 5 15에서는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원어에는 저희가 죄책감을 느끼게 될 때까지라는 식으로 되어 있음)라고 말씀합니다.

앞의 ‘교리’에서, 사람들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풀어주시기 위해 나타나실 때 그전에 먼저 그들 자신의 비참함과 무가치함에 대해 알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라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 죄를 깨닫게 한 후 벌의 무서움을 깨닫게 함

 

그들은 자기들의 죄가 응당 어떤 보응을 받아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자기들의 죄는 마땅히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만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무섭다는 것을 압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안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죄와 그 하나님의 진노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맹렬한 분노가 영원토록 부어지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죄가 그 하나님의 진노를 얼마나 무섭게 받게 하는지도 압니다.

그러나 그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늘상 그들에게 위로를 주시기 전에 먼저 그들의 죄가 이 진노를 받을 만하다는 것을 보여 주시곤 하십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 사이에 분명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자기들이 지옥에 던져질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자기들이 지옥에 갈 만한 죄를 지었음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많은 이들이 어느 정도 그 지옥의 위험에 대해서 알고는 있습니다.

 

무일푼의 일만 달란트 빚진 자

율법의 위협들이 그들을 두렵게 만들어, 하나님께서 그 죄들을 심판하실 것을 알게 합니다. 그러나 그 율법이 위협하는 심판을 자기들이 받을 만하다는 것을 철저하게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지옥을 두려워하면서도 하나님께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하나님께서 완고하시고 잔인하신 분이라고 도전적인 발언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평안을 끼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구속적인 사랑과 긍휼을 나타내시기 전에 먼저 그들로 하여금 마땅히 지옥에 가야만 하는 자신들의 위치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것아 바로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왕이 셈을 가리기 시작하니, 만 달란트 빚진 종 하나가 왕 앞에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몸과 아내와 자녀들과 그 밖에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랬더니, 그 종이 엎드려서 무릎을 꿇어 애원하기를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하였다.(18:24-26).

 

매우 흔한 일이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위험을 처음 인식할 때 입을 벌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처사를 비난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 마음에 불만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 긍휼과 사랑을 나타내시고 위로하시기 전에 먼저 그들의 입을 막으시고, 자기들의 죄인 됨을 스스로 인정하게 하시며, 경고 받은 그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입장을 알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율법에 있는 모든 말씀이 율법 아래 사는 사람에게 말한 것임을 압니다. 그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내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3:19,20).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용서하시기 전에 그들의 죄지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자기가 지옥에 갈 만한 죄인임을 인식하기 전에는 자기들의 죄책을 철저하게 의식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죄에서의 자유로워짐을 계시하시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이 죽을죄를 지었거나, 저주받을 죄를 지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성경적인 표현 양식을 빌면 그렇게 나타낼 수 있습니다.

 

죄책감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죄 의식과, 그 죄와 형벌과의 관계를 의식하는 것입니다. 죄가 형벌과 가지는 관계는 이중적입니다.

첫째는, 그 죄가 형벌과 가진 관계로써 그 죄가 형벌을 받도록 노출되어 나타남을 말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그 죄가 마땅히 형벌을 받을 만한 점을 나타냅니다.

사람이 진실로 자기 죄 때문에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충분한 확신을 하게 될 때, 자기 죄책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이 호세아 5 15절에서 말씀하는 의미의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고 로마서 3 20절의 말씀이 뜻하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죄인이 자기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만하다는 것을 어떻게 깨닫게 되는 것인가? 거듭나지 않은 사람도 이런 의식을 어느 정도 가질 수 있지만 회심한 다음에 의식하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죄에 대한 분명한 안목을 가질 수가 없으며, 그 죄가 나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 탁월함을 발견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는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도 알 수 있다면 하나님을 거스려 죄를 짓는 것이 얼마나 악하다는 것을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도 깨달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도 자기들이 지옥에 갈 만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라는 깨달음을 희미하게는 가질 수 있습니다. 그들의 양심이 하나님의 영광을 알 수 있는 안목이 없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무언가를 희미하게 알 수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악한 사람들의 양심도 심판 날에 자기들에게 내려지는 선고와 그 형벌의 정당성에 대해서 인정할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의 양심도 재판장의 선고와 같은 소리를 낼 것이고 자신들을 정죄하여 같은 형벌을 선고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해서 이것을 알게 되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거기에 대해 어떤 원리가 작용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원리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또한 이 원리와 부합되게 사용되는 주요한 외적인 방편들이 어떠한 것인가도 주목해야만 합니다.

 

1. 죄를 깨닫게 하는 원리는 무엇인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가 영원한 심판을 받을 만한 존재임을 확신케 하는 데 어떤 원리가 작용합니까? 새로운 원리가 전혀 주입되지는 않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오직 본성적인 원리들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전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은 다 그 자연적인 본성적 원리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요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진노를 받을 만한 자기 자신들의 입장을 깨닫게 하는 데 적용되는 원리는 ‘본성적인 양심’입니다. 비록 사람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사랑하는 원리를 잃어버리고 모든 영적인 원리들을 상실하였지만, 여전히 본성적인 양심은 남아 있습니다.

본성적인 양심이 행하는 두 가지 고유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옳고 그른 것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덕행이 아름답고 호감어리다는 의식을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악행이 비열하고 괴이하다는 의식도 전혀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각 사람은 본성적으로 어떤 것들이 좋고 그른지를 증거하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도적질을 하거나 살인을 하면, 그 속에서 네가 악을 행하였다고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옳지 않은 일을 행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율법을 가지지 않은 이방 사람이, 사람의 본성을 따라 율법이 명하는 바를 실천하면,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됩니다. 그런 사람은, 율법이 요구하는 일이 자기의 마음에 적혀 있음을 드러내 보입니다. 그들의 양심도 이 사실을 증언합니다. 그들의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호하기도 합니다.(2:14,15).

 

본성적인 양심이 행하는 또 다른 일은 옳고 그른 것의 관계와 보응을 암시하는 일입니다. 악한 일을 행했을 때 그 약한 일과 형벌과의 관계를 암시해 주는 것이 그 사람 속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양심이 악하고 부당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을 행하였다면, 그의 양심은 그에게 형벌 받을 짓을 했다고 말합니다.

 

먼저 양심의 작용을 도우시는 하나님

본성적인 양심은 이중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가르치고 송사 하는 힘이요, 하나는 정죄하는 권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그 본성적인 양심을 도와서 이 일을 더욱 철저하게 행하게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는 어떤 악을 행하였다면 양심은 마땅히 네가 벌받을 짓을 했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그 양심이 철저하게 작용할 때, 그 사람은 자기가 영원한 심판을 받을 만한 사람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물론 본성적인 양심이 타락 이후에 사람 속에 여전히 남아 있더라도 그 양심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도움을 크게 필요로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그 양심이 작용하는 데 큰 방해를 받습니다. 사람 속에 있는 모든 것은 다 그의 완전함의 부분인데 죄로 말미암아 손상되거나 장애를 입었습니다. 이성의 기능이 타락 이후에도 존재하지만 크게 훼손되고 눈멀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인의 양심은 존재하면서도 죄 때문에 크게 무디어졌고, 죄 때문에 그 마땅한 작용을 하는 데 방해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깨달음을 주실 때 그의 양심을 도와서 죄가 양심을 마비시키지 못하게 하고, 그 양심이 보다 자유롭고 온전하게 작용하도록 도우십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즉시 사람들의 양심에 대하여 일하십니다. 죄를 깨닫게 하는데 그들의 양심이 각성을 받습니다. 그들은 양심 속에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들의 양심이 그들을 치고 정죄합니다.

 

2. 그 원리는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가

 

우리가 또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죄인으로 하여금 자기가 지옥에 가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깨달을 정도로 본성적인 양심을 도우실 때 어떻게 도우시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말씀드립니다.

첫째, 보편적으로 그것은 빛으로 말미암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죄를 깨닫게 하심으로부터 시작해서 회심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전체의 일은 빛으로 말미암아 진행됩니다. 그것은 그 영혼이 발견하게 될 여러 가지로 인하여 비롯됩니다. 그러나 죄인이 자기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만하다는 것을 인식할 때 어떤 빛으로 말미암습니까? 그가 어떤 것을 발견하여 자기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극악한 일을 하였으며 하나님을 경멸했던 잘못을 깨닫게 됩니다.

그 빛은 복음적인 겸손함을 주며, 사람으로 하여금 죄가 가진 혐오스럽고 괴이한 성질을 깨닫게 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영광과 탁월하심과 은혜로우심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알길래, 하나님을 거스려 죄를 지은 것이 그의 진노를 받아 마땅하다고 깨닫게 해줍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탁월함과 사랑스러움에 대해 그 어느 것도 알지 못하지 않습니까? 여기에 대한 답변을 말씀드립니다.

 

둘째, 그것은 하나님의 경외스럽고 가공스러운 위대함을 대한 특별한 발견인 것 같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스러움과 그 영광스럽고 온후한 은혜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또한 그들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이끄는 어떤 것도 볼 수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의 가공스러운 위대하심을 알고서, 그 공포심을 더 크게 가질 분입니다.

저 세상에 간악한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랑스러우심과 은혜로우심은 전혀 보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외경스러운 위대함만 봅니다. 그것이 그리로 간 사람들로 하여금 죄의 극악성을 깨닫게 할 것입니다. 지옥에 있는 저주받은 사람들도 자기들의 죄의 극악성을 인식합니다. 그들의 양심이 그것을 선포해 줍니다. 그들은 그 존재의 외경스러운 위대하심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그 죄의 극악성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이 바로 그분을 거스려 범죄 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악한 사람들도 동일한 방식으로 죄의 극악성을 의식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악한 영혼이 저 세상에서 하나님의 무서운 위엄에 대해 여러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영혼이 이 세상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악한 사람들도 바로 이 세상에서 그와 같은 것을 알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도 죄의 극악성을 깨닫게 되어, 자기들이 지옥에 가기에 합당한 자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이런 방편을 통해서 악한 사람들이 저 세상에서와 삼판날에 자기들이 받는 형벌의 정당성을 알게 될 것은 명백하니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대 악인들은 심판장이신 하나님의 경외스러운 위대하심을 너무나 많이 알게 된 나머지 그런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멸시하는 것이 얼마나 극악한 일이었는가를 그들의 양심이 확실히 알게 되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합당함을 확실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악인들도 같은 방식으로 깨우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악인이라도 시내산에서 울려 퍼지는 뇌성을 들을 수 있었고, 소멸하는 불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무서운 위엄과 위대하심에 대해서 인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주실 때 바로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무서운 엄위가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과 같은 요점으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3. 그 원리들과 부합되게 사용되는 주요한 외적 방편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의 성령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지옥에 가기에 합당한 자들임을 깨닫게 하실 때 활용하시는 가장 주도적인 외적 방편들을 주목해야만 합니다.

 

① 율법의 작용 : 그것은 다름아닌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사람들의 영혼에 역사하실 때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항상 일하십니다. 죄를 깨닫게 하시는 이 전체 역사에 있어서 말씀 중 바로 그 부분 곧 율법이 주로 활용됩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들의 죄를 깨닫게 만드는 것은 율법입니다. 무서운 위협과 저주가 단서로 붙여진 율법은 하나님의 무서운 위대함과 권위와 권세와 질투를 의식하게 해줍니다.

악한 사람들도 이스라엘 자손들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위대성을 깨닫게 됩니다. 뇌성과 진노가 소멸하는 불과 나팔소리와 시내산에서 들리는 무서운 음성으로 말미암아 그 거대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았던 것입니다. 진영에 있던 모든 백성들이 떨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라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그렇듯이 자연인의 양심을 도와서 그 작용을 하도록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을 사용하십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3:24)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우리는, 율법에 있는 모든 말씀이 율법 아래 사는 사람에게 말한 것임을 압니다. 그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내시려는 것입니다.(3:19)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을 사용하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죄책을 깨닫게 하고 그들의 입을 막게 하십니다.

자기 자신의 의에 의뢰하는 자세를 죽이는 것도 율법입니다. 전에는 율법이 없어서 내가 살아 있었는데, 계명이 들어오니까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습니다.( 7:9)라고 하였으며,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2:9)라고도 하였습니다.

 

영락없이 갇혔음을 인정해야 하는 죄인

회심보다 먼저 오는 것은 죄와 그 비참에 대한 깨달음과 확신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옥에 가기에 합당한 자들임을 인식하기까지는 자기들의 죄책에 대해 철저하게 알지 못합니다. 또한 자기들이 전혀 무능하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들의 비참을 철저하게 안 것이 아닙니다.

 

② 자기 무능의 인식 :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죄인들이 지옥의 위험을 처음 인식하게 되었을 때는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해 보려고 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죄인들은 어느 정도 자기들의 위험을 인식하고, 그 위험에서 자신들을 구출하려고 애를 써 봅니다.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 자기 자신들을 개선시키려고 합니다.

또한 자기들의 마음을 믿는 믿음을 체질을 바꾸려고 애를 쓰고,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받을 마한 믿음을 행사하려고 노력합니다. 오직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께 자신들을 맡겨야 하고 그리스도만 믿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이제부터는 그리스도를 믿고 자기 영혼을 그리스도께 위탁시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 자신의 힘으로 그런 일을 해 내려고 노력합니다.

병상에 누워있는 사람이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될 때 보통 그런 모습을 띕니다. 그들은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 믿어야 된다는 소시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그런 일을 해 보려고 애를 씁니다. 따라서 죄인들은 자기 자신들 속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거나, 그리스도를 자기의 분깃으로 선택하고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기에 충분한 힘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생각지 못하고 그렇게 애를 쓸 것입니다.

아니면 죄인들은 자신들을 더 선하게 만들려고 노력하여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회심시키고 그 은혜를 베풀어주실 의향을 더 갖게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자신들의 보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이끄시고,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도록 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주시기를 기대하면서 그렇게 애를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시기 전에 먼저 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전혀 무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 자신들로부터는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하게 됩니다. 자신들에게서 어떤 소망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7:9 전에는 율법이 없어서 내가 살아 있었는데, 계명이 들어오니까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옥 문을 여시기 전에 먼저 그들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며, 그들이 밀폐된 감옥 속에 영락없이 갇혀 있는 죄수들이며, 빠져나갈 길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사야서 61 1절에서 상한 심령을 싸매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옥에 갇힌 자이게 자유를 주기 위해 보내심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보내심 받은 것은 실제로 매인 자들이게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매인 자에게 자유함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의 감시를 받으면서, 장차 올 믿음이 나타날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3:23)라고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버림받아 곤고하고 비참하고 눈먼 상태에 있으며 벌거벗은 상태에 있음을 깨닫게 한 다음에야 그들을 위로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 9 39에서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보는 자’는 스스로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고, 자기들의 지식을 자랑하던 바리새인들을 두고 하는 말씀이며, ‘보지 못하는 자들’이란 영적으로 눈먼 자들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사울이 먼저 위로를 받기 전에 눈먼 사실을 통해서 상징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아나니아가 그에게 와서 눈을 열어 주기까지 그는 눈멀어 있었습니다. 아마 그가 그렇게 된 것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시사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회심의 눈을 열기 전에 먼저 그들로 하여금 의식적으로 눈을 멀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의 힘에 대해 절망감을 갖도록 이런 방식으로 인도하십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때로 사람들의 체험을 이용해 자기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도록 자신들을 쉽게 몰아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일에 성공할 희망을 품고, 있는 힘을 다해 그 일에 힘씁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눈을 스스로 열어 보도록 내버려두시고, 자신들의 마음을 스스로의 힘으로 고쳐보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성공하지 못합니다. 한동안 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이 애굽 사람들이 경험했던 어둠이었습니다. 그들은 선해지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처럼 강퍅했습니다. 그들은 자주 선한 것을 하려고 애를 썼고, 좋은 마음으로 행사하려고 힘을 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아름답게 받아들여지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볼 때는 더 나아지기는 커녕 더욱 더 나빠져 갔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처음보다 더 악한 생각들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회개하는 문제에 있어서 처음보다 더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힘으로 애를 쓰게 내버려두십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이 절망하게 되고 자기 자신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탕자는 먼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자기 배를 채우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도움을 얻을 수 없다는 절망적인 생각을 가졌을 때에야 자신을 돌아보면서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비참의 눈물 흘리는 자에게 긍휼이

둘째, 하나님께서는 때로 총명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마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도록 하시어, 대번에 자기 자신들은 어쩔 수 없는 사람들임을 깨닫고 절망하게 만드십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그들 자신의 시련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 자기 자신의 구원을 가져올 방도를 오랫동안 간구 하도록 내버려두심으로써 급기야는 용기를 잃어버리게 만드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그런 노력을 하지 않고도 자신들의 상태를 깨닫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때때로 그렇게 하십니다. 갑작스럽게 회심하는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 경우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경우가 그렇게 드물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자신의 마음을 밝게 보도록 하심으로써 자기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서 너무나 멀고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의 은혜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영적인 빛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시면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부터 영적 빛을 기대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기 영혼들 속에는 어두움 그 자체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직 죽음의 그림자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빛을 발하기에는 너무나도 그 어두움이 강하다는 것을 압니다. 선한 것에 대해서 자신들은 완전히 죽어있는 상태요, 그래서 은혜로운 행위를 이끌어 내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방식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영혼에 구속적이 긍휼을 나타내시기 전에 그들 자신의 죄악됨과 위험을 깨닫게 하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만한 자들임을 알게 하시며, 그들 스스로 어떤 일도 인도할 수 없는 전적인 무능한 존재임을 인식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식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과도 매우 부합하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아직 사람들의 죄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 어떠하며, 그 경우에 어떤 방편을 사용하는지에 대해서 온전히 살피지를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을 성령께 속한 것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라고 사람들로 하여금 의를 깨닫게 하시기 전에 먼저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4. 교리가 지닌 이유들  

 

저는 이제 그 교리의 이유들을 몇 가지 말씀드리려 합니다.

그런 절차를 취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 매우 명백합니다. 죄인이 자기가 처한 위험과 비참을 그런 식으로 깨달아서 자신의 힘으로나 노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전적 무능한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더 나아가 자기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만한 가치가 전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진노만 받을 만하다고 깨닫게 하시는 것이 신적 지혜에 얼마나 부합하게 보이는지요. 그리하여 죄인이 하나님께서 거룩한 주권을 행사하셔서 자기가 완전한 공의로 다루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나서, 죄인을 돕고 용서하시는 긍휼과 사랑을 보여 주시는 것이 죄인의 친구가 되시는 하나님의 지혜에 아주 합당한 것입니다.

회심하게 되는 사람은 논리적으로 지극히 다른 상태에 처하게 됩니다. 먼저 그는, 매우 비참하고 곤고한 정죄함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 복된 상태, 곧 의롭다 하심을 받는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 복된 상태, 곧 의롭다 하심을 받는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이 이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에 얼마나 부합한 일인지요.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의 비참하고 정죄된 상태를 깨닫고 나서 자기의 죄 된 상태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자기가 정말 죄책을 지고 있으며 지옥에 가기에 합당한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자기가 사실상 용서받았으며 하나님의 은총을 받도록 허락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기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 지옥에 가기에 합당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야 자기가 용서하시고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받는 대상임을 인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영혼을 그렇게 다르시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에서 훨씬 더 잘 드러날 것입니다.

 

① 하나님의 가공스러운 엄위와 그 외경스러운 거룩과 공의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것과 병행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존재가 어떤 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으며 자기 자신이 누군가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여러 속성들이 신의 성품 속에 연합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무한한 긍휼과 사랑과 은혜를 가지신 분이시듯이 그는 또한 무한하고 엄청난 위엄을 갖추신 분으로서 외경스러운 거룩과 공의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속성들이 하나님의 성품 속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은, 그 속성들이 영광의 주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외경스럽고 가공한 속성들과, 하나님의 부드럽고 자비로운 속성들이 서로간의 영광을 반사적으로 비추어 줍니다. 한쪽 국면의 속성들이 행사될 때는 다른 국면의 속성들을 빼고 부드럽고 자비로운 속성들만을 행사한다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권위와 공의와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거룩성과 일관되지 않게 사랑과 긍휼과 은혜를 베푸신다면, 그것이야말로 결코 영광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그의 공의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모독한다면, 그 속성들은 하나님께 명예롭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한 국면의 속성들을 드러내셔서 당신 자신을 영화롭게 하실 때는 역시 다른 국면의 속성들도 드러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과 은혜의 속성을 드러내실 때는, 다른 국면의 속성들과 조화를 이루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참된 영광이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면서도 하나님의 다른 속성들을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대해 합당치 못하고 무가치한 이해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은혜로우시지만 다른 한편으로 끝간 데 없이 무섭기만 한 분으로 이해된다거나, 죄를 무한히 미워하시지 않고 그저 은혜스럽기만 한 분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 대한 무가치한 이해를 할 수밖에 없게 되고, 어떤 국면에서 영혼이 하나님께 합당치 못하게 처신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사랑과 기쁨이 조화를 이루는 경외심은 없게 될 것입니다.

 

은혜 주심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

외경(경외(敬畏).)스러운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만 깨닫게 된다면 영혼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당하고도 주제넘은 담력을 가지고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과 의도에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 자들은 역시 하나님의 다른 국면의 속성도 발견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것은 하나님의 권위와 거룩과 공의의 영광을,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일치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당신의 무가치한 긍휼을 나타내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저 다른 속성들에 관하여 어떤 무가치한 생각을 품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르므로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니 우리는 이렇게 결론지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정으로 구속받아 그 영혼으로 그리스도를 참으로 깨달은 자들은 하나님의 가공스러우심과 공의를 발견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깨달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고난이 온전하게 계시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 두 속성이 함께 드러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를 용서하시고 죄인들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이해하되,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할 정도로 이해할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십사고 간청하는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선포하실 때 사실상 긍휼을 선포하신 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앞,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시나”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으시고,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제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녀손 삼 사 대까지 보응하리라.라고 역시 그의 거룩한 공의와 보응하시는 엄위를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십계명에서는 “너희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고 두 국면의 속성이 합쳐져 소개됩니다.

그처럼 우리는 두 국면의 속성들이 함께 연합되어 있는 대목들을 수없이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실 때 먼저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는 무서운 표증들을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기 위한 필요한 준비들을 하게 하셨습니다. 먼저 바위를 가르는 바람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지진, 그런 다음에 소멸하는 불이 있었습니다. (왕상 19:11,12).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마저 용이주도함을 보이십니다. 그러하기에 하늘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아주 드높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례적으로 하나님의 가공하심에 대한 의식과 하나님이 불쾌해 하시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게 하는 방편을 제공하셔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누린다는 사실을 그 무서운 하나님의 저주받은 자들의 비참과 고통에 비추어 보게 하십니다.

심지어 그리스도 예수께서도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를 누리는 높은 위치에 오르시기 전에 하나님의 진노를 아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속적인 사랑을 죄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기 전에 자신들이 죄를 거스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공의를 알게 하시는 한 가지 이유입니다.

 

②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깨닫기 전에 먼저 그 자신의 죄와 비참을 확실히 알지 못하면, 그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온전히 인식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랑이 은혜로 값없이 베풀어지며 또한 주권적인 사랑임을 결코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구속적인 은혜를 사람들에게 계시하시고 참으로 그것을 깨닫게 하실 때, 있는 그대로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죄인들을 구속하시는 것이기에 그 자체가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가 얼만 무섭다는 것을 적당하게 지각하기까지는 그 점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속적인 은혜와 사랑은 값없이 베풀어지고 주권적인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받을 사람의 어떤 공로나 가치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식하기까지는 그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영광스럽고 놀랍습니다. 그것을 받는 자들이 전혀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사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와 불쾌감을 받을 만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받기에 합당한 자들임을 깨닫기 전에는 결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많고 큰 죄에서 사람들을 구원하고 구속하며, 그들이 받을 심판에서 건져주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정말 놀라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의 죄악됨을 인식하고, 자기들이 살아오면서 지은 죄를 반성하면서 자기들의 마음이 정말 악하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 은혜를 감지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처럼 값없이 주어지고 주권적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이야말로 그 은혜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영혼에게 나타내 주실 때 완전하게는 아니나 그 고유한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바르게 알되, 그 은혜가 정말 공로 없이 값없이 주어지며 자기들의 죄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과는 정반대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영적으로 이해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 은혜의 영광을 지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이 가장 아름답게 드러나는 것은, 그 죄인이 영적으로 극한 비참과 곤핍한 상태에 처해 있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이 은혜의 영광을 깨닫기 위해 먼저 자기의 비참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긍휼의 위대함을 알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공로 없이 값없이 주어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그런 것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인식하기까지는 말입니다. 실로 죄와 비참의 깨달음이 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은혜를 깨닫고 받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먼저 죄인은 자기의 죄와 비참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그 죄와 비참에서 자기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무가치함을 알 때 은혜의 행복이 증폭

③ 죄인이 자기와 죄와 비참을 깨닫기까지는 중보자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긍휼과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죄와 비참을 알기까지는 중보자의 필요성을 결코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공의의 만족을 위해 필요한 값을 받지 않고 죄인들을 향하여 긍휼을 절대적이고 즉각적으로 베풀어  주신다면, 그 영혼은 자기의 비참과 죄를 깨닫지 않고도 아마 그 긍휼을 알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죄인들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모든 긍휼은 한 구세주로 말미암습니다.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자비와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비와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세주 안에 있는 긍휼로 밝혀 주시는 것입니다. 구세주께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 의와 공의가 요구하는 것을 만족시킴으로 말미암아 그 긍휼이 주어진다는 것을 온전히 인식하게 하여, 그 구세주로 말미암아, 그 구세주 안에서 긍휼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는 모든 신령한 위로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따라서 영혼들은 다른 어떤 길을 통해서는 그 모든 신령한 위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그 백성들이 그들의 눈을 그리스도께 향하게 하고, 긍휼과 은총을 위해서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을 때마다 그리스도로부터 그것을 받도록 하신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중보자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사람의 구원의 영광이 다 그리스도께 속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듯이 그리스도의 모든 사람들, 그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의 구원이 그리스도께 속한 것으로 알고 받아들이며 그 영광을 다 그리스도께 돌리도록 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또한 구원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는 어느 누구도 그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자기 죄와 비참과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자기의 상태를 인식하고 나서야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것은 정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저는 이런 논리로 도달한 두 가지 다른 결론을 언급할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긍휼과 사랑이 이런 방편을 통해 깨달아질 때만이 그것이 더 높게 칭송되고 더 큰 기쁨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먼저 자기의 위험과 비참과 무능력함과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깨달음으로써, 그 마음은 긍휼을 깨달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무저갱 가에서 두려워 떨면서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절망감을 느끼고 있을 때, 구원의 기쁜 소식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런 때에 당신의 세미한 음성을 듣도록 그 영혼을 열어 주시고 당신을 보이시며 구세주를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기쁨에 차서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신령하게 들려진 복음은 정말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그것은 죄인이 들었던 가장 기쁨 소식일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 특히 자기를 향한 그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놀랍게 여겨질 것이고 그리스도는 가장 존귀한 분으로 인식될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위태로운 지경에 있었던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바다가 어떤지를 기억한 다음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자기가 얼마나 안전한가를 생각하고, 그리스도가 자기를 지켜주기에 얼마나 충분하시고 자기의 모든 부족을 채워주시기에 얼만 합당하신지를 생각하면 영혼은 더 큰 환희에 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당신의 선택한 백성들의 영혼을 다루실 때 당신 자신의 영광뿐만 아니라 선택한 백성들의 행복을 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로하시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들의 비참함과 무가치함을 인식시킴으로써 그들의 행복을 증가시켜 줍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위안을 받을 때 그것이 그처럼 훨씬 더 달콤하게 느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 그렇게 되면 마음은 그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찬미할 준비를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언급한 이유들을 감안하면 그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기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이 얼마나 놀랍게 은혜로 베풀어지고 주권적인 것인가를 인식하게 되고, 자기들을 구원하신 그 하나님의 은혜가 얼만 큰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그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더욱더 높이 칭송합니다. 그 모든 것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을 광대하게 여기도록 만들고, 자기들에게 당신의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높이며, 모든 불의에서 자기들을 구속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더욱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이렇게 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지 않으시고, 나에게 구세주를 주시지 않았다면 나는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 있었을까.

나는 분명히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받았을 것이다. 내가 지은 그 큰 모든 죄와 악행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이 주제는 회심하지 않은 죄인들에게 적용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것이 그렇다면, 저는 여러분에게 그런 죄의 깨달음을 구하라고 권면 하는 바입니다. 비록 여러분이 현재에는 죄인들이요 지옥의 가공스러운 위험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여러분 거의 모두가 지옥에 갈 생각은 없는 것이 틀림없다고 저는 주제넘게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여러분이 저 다른 세상에 관해 생각할 때, 이런저런 방식으로 영원한 비참을 피하게 될 것이라고 여러분 스스로 달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영원한 저주를 받지 않으려면 죽기 전에 해야 할 큰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오랫동안 은혜의 방편 아래에 있으면서도 악행의 길에서 살아 온 사람들에게 그렇습니다.

 

머뭇거리는 사이 ‘상황 끝’이 선언된다

만일 여러분이 진실로 회개한다면 자기의 비참과 무가치함을 깨달았어야 합니다. 또한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일을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비참과 무가치함을 깨닫게 되기를 구하십시오. 서두르십시오. 지금 바로 이 일을 시작하십시오. 이제는 너무 늦었다고 하여 머뭇거리며 일을 뒤로 미룰 수도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일에 지체한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진정으로 때가 너무 늦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보다 앞서간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그 일을 착수하기도 전에 죽음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 때는 이미 늦습니다. 죽기 전에 시작한다 해도 그 일을 다 끝낼 기회를 결코 가질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경우에는 너무 때가 늦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회심하기 전에 오랜 기간 동안 죄를 깨닫고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자신들을 구원할 수 없다는 절망적인 인식을 하기 전에 그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어 보려고 오랫동안 애쓰도록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시기도 하십니다. 그들은 여러 해 동안 자기 자신들의 의를 의지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배회하고, 이 골짜기에서 저 골짜기로 방황하면서 안식과 안전을 추구해 나갑니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모래 위에 성을 쌓고 있는 셈입니다. 때로 그들은 어떤 한 가지를 생각하면서 자신들을 달래고, 어떤 때는 또 다른 것들을 생각하녀서 자신들을 위로합니다.

지체하면 시간을 얻지 못할 위험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주를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여러 해를 보내기도 합니다. 그들은 구원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 죽음이 너무 빨리 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인들의 어리석음과 무감각함을 드러내는 기회가 어떤 것인가를 간단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께 자신들의 조를 깨닫게 해주실 것을 간구하는 자들에게 경고할 기회를 가지려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분발케 하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감화를 거스리며 하나님을 격동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격동시켜, 마음의 강퍅한 대로 내버려두시도록 자초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혼자 있게 내버려두시고, 그들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십니다.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4:17).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 마음의 강퍅한 대로 버려 두어 그 임의대로 행케 하였도다”( 81:11,12).

이 강론의 본문은 호세아 5 15,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강론의 교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긍휼과 사랑을 나타내 보이시기 전에 먼저 사람들 자신의 비참함과 무가치함을 깨닫게 하시는 방식을 취하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람들의 영혼에 구속적인 사랑과 긍휼을 나타내실 때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리의 적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죄와 위험에 대하여 어떤 깨달음을 받는 자들에게 권고하니, 그런 이들은 그 깨달음을 상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분발케 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감화를 얻었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만나신 것이고, 여러분의 죄를 반성하게 하신 것이며, 지옥의 위험에 처해있음을 깨닫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방식으로 여러분의 영혼에 관심을 갖게 하시며 구원을 구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죄에 대한 깨달음을 상실하거나 영원한 것들에 관한 의식이 점점 무감각해지거나, 여러분의 영혼의 문제에 나태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이 전의 분별 없는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거나 이전의 죄로 돌아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여기서 생각할 몇 가지 요점을 소개합니다.  

 

1. 상존하는 위험을 경계하라

그것에는 위험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들의 영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령의 분발케 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구원을 추구하게 되었던 모든 사람들이 다 그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경주를 시작은 해놓고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 경주를 시작하고서 끝낼 때까지 주의를 딴 곳으로 돌리게 하거나 그 경주를 중단하게 하는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잘 시작한 많은 사람들은 돌아서게 하는 것들이 중간에 많이 발생합니다.

죄에 강한 깨달음을 가지고 있고 구원을 추구하는데 매우 열심인 것처럼 보였는데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오래 지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상당한 기간 동안 구원에 대해서 매우 큰 관심을 보입니다. 정말 여러 해 동안 그런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점차 그 정도가 사그라져 방심하게 되고 결국 게을러지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자신을 바보스럽게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양심을 우둔하게 만드는 것이 죄와 욕심의 본질적인 성향입니다. 아직 여러분의 마음속에 부패가  왕노릇 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죄에 대한 깨달음을 몰아내기 위해 항상 벼르고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사단은 여러분을 계속 주시하고 온갖 수단을 다 강구하여 여러분의 죄에 대한 깨달음을 사그라뜨리고 빼앗아 가려고 안달합니다.

사단은 여러분의 마음에 나태와 욕심들을 자기와 연합시켜 게으르도록 부추기며 여러분의 생각을 다른 것에 돌리도록 노력합니다. 세상은 영혼에 대한 문제에서 그 생각을 돌리도록 빼앗는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말하자면 세상은 부단히 여러분의 생각을 사로잡으려고 애를 쓰고 있으며, 저 세상에 대한 관심을 없애버리려고 기를 쓰고 있습니다.

 

2. 죄에 대한 자각을 지속하라

만일 여러분이 죄에 대한 깨달음을 상실하면, 그 깨달음을 이전에 가졌었다는 사실이 여러분의 구원을 촉진시키는 데 있어서 어떤 유익도 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걸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저주받는 것에 대해서 아무리 무서운 공포심을 가졌고, 여러분이 죄에 대해서 많은 반성을 하였고, 구원을 향하여 강한 열망을 가졌으며, 또한 간절히 기도하였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다 소용없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두려움과 영혼에 대한 염려로 겪어야 했던 그 고통이 결국 허사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 일, 여러분이 격은 고통이 온전히 상실되어 버릴 것입니다.

 

단 쇠가 식으면 더 강퍅해 진다.

여러분이 죄에 대해 죽을힘을 다해 싸웠고 마땅한 도리를 행하려고 애를 썼고, 물줄기를 차단시키려 하였고, 언덕을 향해서 상당한 높이까지 나아갔고, 하늘나라를 향해서 어느 정도까지 진보하였는데도 여러분이 가졌던 그 깨달음을 상실하고 나면, 구원은 처음 시작할 때와 똑같이 여러분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얻은 모든 땅을 다 상실하게 될 것이며, 여러분은 맨 밑바닥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저항했던 그 물줄기가 즉각적으로 여러분을 뒤로 밀어붙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상실해 버릴 것입니다. 그 깨달음을 가졌다가 잃어버리고 나면 그 깨달음을 전혀 갖지 않았을 때와 똑같이 됩니다.

 

3. 보배로운 기회를 놓치지 말라

여러분은 다시 그런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고 장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을 깨우치고 계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성령의 깨우치심을 상실한다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다시 돌아오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런 죄에 대한 깨달음을 갖고 있다면 여러분은 참으로 귀하고 보배로운 기회를 가진 셈입니다. 그것의 가치를 안다면 어떤 세상적인 이해 관계보다도 그 기회를 더 존귀한 것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정금이나 은보다 더 존귀한 지혜를 여러분이 쥐고 있는 셈입니다.

은혜의 방편 아래서 산다는 것은 큰 특권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여러 규례들을 누리고 구원의 길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큰 특권입니다. 매우 교훈적이고 죄를 깨닫게 하는 목회 사역 아래서 은혜의 방편이 매우 강력하게 시행되고 있는 시기에 산다는 것은 더욱더 큰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의 죄를 깨닫게 하시는 감화를 여러분이 받고 있다면 여러분은 보배로운 이점을 쥐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상실하면 다시 그와 이점을 누리게 될지 의문스럽습니다. 이사야서 55 6절에 보면 주를 만날 만한 때에 찾고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그 죄와 위험을 깨닫게 하시는 시간은 죄인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그 날은 특별히 구원의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성령을 부어주실 때에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시다고 말할 수 있는 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실 때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야말로 모든 사람이 취할 분별력 있는 자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사람의 영혼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시고 각성시키실 때는 특별하게 하나님이 가까이 계실 때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일하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지금 존귀한 기회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무슨 수단을 강구해서라도 그 기회가 흘러가지 않도록 하십시오.

복음 아래 살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특별한 기회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제시한 어떤 특별한 시기가 있습니다. 다른 모든 날보다도 그들에게 은혜의 날이 되게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그것에 마음을 두기만 하면 영원한 구원을 얻기에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참으로 비참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 하나님의 시기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혜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비록 장래 일을 몰라서 크게 고통을 당한다 해도, 모든 일에는 알맞은 때가 있고 알맞는 방법이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여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8:6,7).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9:12).

만일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을 깨우치고 계시면, 바로 지금이 여러분의 때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만 주어진 때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우십시오. 여러분의 평안에 속한 것들을 이해하십시오. 그것들이 여러분의 눈에서 사라지기 전에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감화를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도출해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그 죄에 대한 깨달음과 각성을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을 부여하실 때에 하나님은 주권적인 분이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자신을 달래면서 예전에는 내가 나태했지만 다시 각성 받게 될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허망하고 근거 없는 주제넘음입니다. 죄의 길을 계속 가던 사람이 그 길을 개선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철저한 개혁의 길에는 참으로 큰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고쳐진 다음에 다시 예전의 죄로 돌아간다면, 그 죄를 이기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4. 나온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이 주시는 그 깨달음을 상실하고 죄의 길로 나아간다면, 그 어떤 깨달음을 갖기 전보다도 여러분의 구원의 가망이 더 적어질 것입니다. 침륜에 빠지는 것은 사람의 영혼에 매우 위험하고 해로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일에 대해서 자주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 롯의 아내를 소금 기둥이 되게 하신 일은, 종교의 길에서 시작하였다가 뒤를 돌아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 무서운 경륜 속에서 그 점이 드러난 것입니다.

죄에 대한 깨달음을 상실하고 다시 죄에 빠지면, 그 악은 깨달음을 상실한 것만이 아닙니다. 그 깨달음이 그들에게 어떤 유익을 가져다 주는 방편이 전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더 크고 많은 악으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차라리 그런 깨달음을 갖지 않는 것이 나을 뻔하였습니다. 그 전보다 그들은 구원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향해 올라가다가 뒤로 넘어져서 그 전보다 더 낮은 데로 빠집니다. 즉 지옥을 향해서 더 아래로 내려간 것입니다. 결국 전보다 하늘을 향해 가는 길에 더 큰 장애가 있게 됩니다.

그들의 마음은 빛에 대해서 더 굳어지게 되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깨달음을 잃어버리고 나면 그 전보다 마음이 더 완고해 집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을 더 완고하게 하는데 그렇게 큰 기여를 하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마치 달구어졌다가 식으면 더 굳어지는 철과 같이 죄의 깨달음을 상실하고 나면 더 완고해 집니다.

 

잠시 한눈 팔다가 일어나는 큰 사고

만일 각성을 받은 후에 그 깨달음을 상실하고 나면 다시 깨우치기가 어렵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나이가 들면 들수록 다시 각성 받게 될 가능성은 더 적어집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죄에 대한 깨달음은 더 적어지고 죄에 대해 더 회의적인 생각을 갖게 됩니다. 악한 습관은 더 강해지며 그 마음속에서 더 깊은 뿌리를 내립니다. 성령을 소멸하면서 하나님께서 크게 범죄 하였고, 개가 그 토하였던 것을 다시 핥고, 돼지가 씻은 다음에 다시 그 시궁창에 빠지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바로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것일 수 있습니다.

너의 더러운 죄 가운데는 음행이 있다. 음행으로 더러워진 너의 몸을 내가 깨끗하게 하려 하였으나, 네가 너 자신의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되려고 하지 않았으니, 내가 너에게 분노를 다 풀 때까지는, 네가 다시 깨끗하게 되지 못할 것이다.(24:13)

만일 여러분이 악한 길로 다시 돌아가고, 결국 지옥으로 가야 한다면, 여러분의 심판이 그 전보다 더 무겁게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죄에 대한 깨달음을 가졌던 것을 슬퍼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후에 다시 각성을 받고 구원을 위해 애를 쓴다 할지라도, 아마 그 일이 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최면에 빠지면서 스스로 무덤을 판 셈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이미 행하였고, 행했어야 할 일을 다시 해야 할 것이고, 계속 그 일을 해나간다 할지라도 회개를 위하여 새로운 일을 또 해야 할 것입니다. 아마 더 크고 더 무서운 공포가 몰려올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깨우치고 구원을 추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될 것이며 굳어진 여러분의 부패를 위해 더 힘든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침륜에 다시 빠지는 것이 아주 불리하다는 것을 반이라도 인식하고, 그것이 여러분에게 가져올 그 참담한 참화를 반이라도 안다면, 여러분은 그 죄에 대한 깨달음을 상실하지 않으려고 주의를 할 것입니다.

 

5. 부지런히, 일관성 있게 나아가라

계속 구원을 추구하는 데 일관성 있게 나아가라는 격려가 성경에 나와 있음을 생각하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리라 하리라”( 6:3) 라고 기록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이렇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지런히, 부단하게, 끊임없이 회개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그 일에 성공하도록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깨달음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더 잘 지도받기를 원한다면 그 깨달음을 상실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우가 어떠했는지를 아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래서 몇 가지를 여러분에게 간단하게 언급하겠습니다.

 

첫째, 사람들이 죄에 빠지는 것은 흔히 그들의 깨달음을 상실하는 기회가 됩니다.

 어떤 유혹에 빠져서 그들이 죄를 짓게 됩니다. 욕심이 일어나서 사람의 마음을 동요시킵니다. 그들이 감각적인 범죄 행각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심령이 부산해지고, 악의와 복수심으로 달아올라 죄악적으로 행동하고, 죄악적인 표현을 쓰며,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을 몰아냅니다. 이런 경우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깨달음을 종식시키기에 가장 좋은 길입니다.

 

둘째, 때로는 마음을 다른 데로 돌리게 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한동안 생각을 바꾸게 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잠깐 동안 자기들의 임무에서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무리에 합류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세상적인 즐거움과 오락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니면 그들이 다른 일에 그 마음을 돌리게 됩니다. 그런 후 그 전보다 더 부주의하게 행동합니다. 마땅히 그 사람이 행해야 할 여러 가지 의무를 감당하는 일에 엄격하지 못하게 되고, 부주의해지고 우둔해져 그 일에 대한 매력을 사그라뜨립니다. 그래서 그들은 몽땅 그 깨달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셋째, 환경상의 어떤 변화가 자기들의 영혼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는 데서 마음을 돌리게 합니다.

그들의 마음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처지로 말미암아 관심을 바꿉니다. 새로운 즐거움과 쾌락에 마음이 빼앗기고, 아니면 새로운 염려나 다른 사업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들이 더 부해지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번성하고, 세상적인 좋은 것들이 자기들에게 흘러 넘치게 되고, 그것들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아니면 세상적인 염려가 더 많아지고 돌아볼 일들이 너무 많아서 그들의 마음이 빼앗기고, 영혼을 돌볼 시간을 얻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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