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교회와 목회자 생활비

 

이광호

 

 

[시작하는 말]

 

한국교회 목회자의 생활비 문제는 이미 오래 전 부터 문제가 되어 왔다. 같은 목회자들 사이에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목회자들 상호간에 그런 불균형이 두드러진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할 뿐더러 교회의 본질적 위기마저 불러일으킬 수 있다. 더구나 동일한 교단에 속한 목회자들의 생활비 혹은 급여에 엄청난 차등을 보인다면 그것은 보편교회의 원리를 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한 하나님을 믿는 형제라 고백하고 있다. 이는 목회자들 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서로간 살펴봄으로써 평균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요구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물며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직분자라 하는 목회자들 사이에 극심한 경제적 차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어떤 목회자는 수억의 연봉을 받고 고급스럽고 화려한 생활을 하는 가 하면 또 다른 어떤 목회자는 연봉 몇 백 만원에 극심한 궁핍을 겪고 있다면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한국에는 국가 기관마다 많은 공무원들이 있으며 각급 학교에는 교사들이 있다. 같은 국가 공무원이며 학교의 교사인데도 지역이나 학교의 규모, 혹은 부서에 따라 수 십배라는 엄청난 차이가 나는 급여제도가 존재한다면 그것을 두고 정상적이라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만일 그런 문제가 실제로 발생한다면 한국정부의 기강은 금방 무너지고 말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에서 일고 있는 목사의 급여 문제는 심각하다. 이는 비단 목회자 뿐 아니라 교회의 관리집사 등 다른 전임 직원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문제이다.

우리 시대에 목회자 생활비에 대한 이런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 것은 결국 교회가 본질을 벗어나 개교회주의와 물량주의로 치달음으로 인한 폐단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기보다 자본주의적 속성에 익숙해 있으며 세속주의에 대한 경계에 둔감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대한 문제점을 명확히 알고 지금이라도 그에 대한 원리와 더불어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교회와 목회자 생활비]

 

교회는 원칙적으로 청빙한 목회자의 생활을 성도들과 같은 수준에서 책임진다. 목회자의 생활을 교회가 책임을 진다는 의미는 우선 목회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지교회에 속한 성도들 자신을 위한 방편이다. 교회는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연구해서 선포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장로교에서는 노회의 허락에 따라 지교회가 목회자 청빙과 생활비의 지급정도를 결정하고 있다. 즉 목회자 청빙은 지 교회가 단독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 교회의 의사와 더불어 노회의 허락에 의해 그 청빙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회에서 목사를 청빙할 때 지 교회가 노회에 제출해야 할 필수적인 두가지 서류가 있다. 하나는 목사청빙 공동의회 결과 서류이며 다른 하나는 생활비 약정서류이다.

 

목회자 청빙에 이러한 요구사항이 필수적인 것에 대한 원리적 정신은, 목회자를 청빙할 때 처음 한번만 노회에서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노회 산하 목회자들의 생활비에 대한 관여가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목회자의 생활비 지급에 관해 특정한 지교회에서 정당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할 경우 노회는 그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만일 어떤 목회자가 생활비를 받지 못해 어려움을 당하거나 혹은 생활비가 여러 정황에 비추어 보아 과다한 것으로 판단되면 그에 대해서도 관여해야 한다. 물론 그것은 부정적인 간섭이 아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선한 관여여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물론 지교회의 책임이 크다. 한국교회의 장로들은 교회 내에서 귀족적인 위치에 있는 이들인 것이 일반적이라 할 수 있다. 대개 그들은 교육 정도나 직업, 생활의 여건이 다른 교인들 보다 상대적으로 나은 형편이다. 한국교회에서는 당회원들을 비롯한 교회의 중직자들이 목회자의 생활비를 책정하는 것이 상례화 되어 있으므로, 교회의 모든 성도들의 평균이 아니라 자기들의 수입을 기준으로 목회자의 생활비를 책정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많은 경우 목회자의 생활비가 상향조정되고 있는 데는 그러한 이유가 클 것이다. 만일 어느 지 교회에서 “우리 교회에서 우리 마음대로 목회자 생활비를 책정하는데 웬 간섭이냐? 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보편교회의 의미는 물론 노회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목회자 생활비를 얼마나 지급할 것인가]

 

목회자의 생활비는 다른 성도들의 생활에 비추어 보아 상식에 따른 적절한 액수를 필요에 맞추어 책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교회에서 받는 돈은 사례비나 단순한 급여가 아니다. 즉 목회자에게 감사해서 교회가 드리는 돈이 아닐뿐더러, 일한 만큼의 노동에 따른 대가성 급여가 아니라는 의미다. 목회자의 생활비는 말 그대로 생활비이다. 교회에서 목회자를 청빙할 때 일반적으로는, 모든 생활비를 교회가 부담할 것이니 목회자는 말씀연구와 목회에 전념해 달라는 상호간의 약속이다. 그 약속은 지 교회와 목회자 쌍방간의 약속이 아니라 노회의 허락 아래서 이루어지는 약정이다.

 

목회자의 생활비는 교인들의 생활정도에 맞추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다수의 성도들이 어렵게 살고 있는데 목회자가 평안하게 살수 없다. 반대로 성도들이 평안한 생활을 하는데 목회자가 궁색하게 살 수도 없다. 다른 성도들과 조화되는 생활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물론 교회는 목회자의 형편을 일반 성도들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꼼꼼하게 살펴 볼수 있을 만큼 성숙해야 할 것이다. 목회자의 연령이나 부모님 등 여타의 부양가족이 있는지, 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이 있는지 등의 내용들이 고려되어야 한다. 목회자도 부모님을 모셔야 할 경우가 있고 우리의 문화에서는 친지들의 회갑이라든지 명절 때 찾아 인사해야 할 어른들이 많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성숙한 교회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이웃 교회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성숙미를 갖추어야 한다.

 

위의 경우를 고려하더라도 목회자의 생활비 책정을 위해서는 적절한 원칙과 기준이 마련되어야 한다. 각 교회가 임의대로 판단하고 결정할 일이 아닌 것이다. 전체 한국교회를 염두에 둔다면, 필자의 견해로는, 목회자의 생활비를 책정할 때 중고등학교 교사들을 기준으로 삼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것 같다. 현대 국가 대부분이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도 교사들은 다른 직업인들에 비해 매우 높은 급여를 받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박봉도 아니다. 그리고 일반회사의 경우 급여정도가 천차만별이지만 교사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서울의 중심지의 큰 고등학교 교사의 급여나 산골에 있는 작은 학교의 교사의 급여나 그 정해진 기준에 따라 급여가 지급된다.

교회의 목회자 생활비도 그렇게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준이 마련 된 다음에 실생활에 따른 약간의 변동이 가능할 것이다. 서울에 살면 생활비가 많이 들고 시골에 살면 생활비가 적게들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시골의 목회자가 자녀를 서울에 유학 보내려하니 서울에 살고 있는 목회자들 보다 더 많은 돈이 들어가더라고 하면 무어라 할 것인가?

 

[‘목회비’라는 항목에 대하여]

 

특별히 목회자를 위한 목회비란 별도의 항목이 있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성경에는 물론 초대교회에도 그런 것이 있지 않았다. 당시에도 목회자의 생활비를 교회가 나누어 부담함으로서 목사(교사)로 하여금 말씀을 연구하는 일에 전무하게 하는 예들이 있었지만 목회비라는 항목은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나아가 전통적인 교회의 모습을 지녔던 근래에 이르기까지만 해도 목회비라는 항목이 있지 않았다.

장로교에서는 목회를 목사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목회는 목사들와 장로들이 함께 하는 공동의 직분적 행위이다. 우리 한국교회의 경우 강도사, 전도사들도 일정부분 목회에 참여하고 있다. 성도들을 심방하는 것은 장로들이 해야할 일이며, 목회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목사의 원래적 직분은 말씀을 연구하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며, 성도들이 선포된 말씀대로 사는가에 대한 보살핌인 심방은 장로들이 해야할 직분인 것이다.

 

목회자는 구제, 선교, 손님 대접 등 남 모르게 돈을 써야 할 곳이 많으므로 특별히 목회비가 지급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정당하지 않다. 부목사나 전도사, 관리집사는 물론 장로들에게도 역시 동일한 일들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담임목사에게 특별히 지급되는 소위 개별적인 목회비는 필요하지 않은 항목이다. 목사가 심방을 하다가 보면 필요경비가 든다고 말한다. 그런 논리라면 심방을 위해 세워진 장로들에게도 일정한 목회비가 지급되어야 할 것이다. 심방을 위한 교통비나 식사비, 구제비, 접대비 등에 대한 목회비라는 명목의 항목은 불필요하다. 그런 정도의 경비라면 함께 심방을 하는 성도들이 봉사의 정신으로 조금씩 나누어 부담할 수 있는 정도의 액수일 것이다. 그런 목회적인 일을 하기 위한 목회비가 많이 책정되면 심방이나 구제에 열심을 다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런 목회행위를 소홀히 해도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흔히 목회자가 성도의 가정을 심방하거나 만날 때 어려운 성도들을 보게 되면 비밀리에 구제할 일이 있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목회자만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거나 선행을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교회의 어려운 성도들에 대한 파악은 관리집사가 가장 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논리라면 어려운 성도들에 대한 구제를 위해 관리집사들에게 매월 일정 금액을 지급해야 할 것이다. 물론 장로들이나 강도사, 전도사들에게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되어 그만한 액수의 목회비가 지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달리 목회비라는 항목이 있을 필요가 없다. 일반적인 구제의 필요성을 느낄 경우 목회자 스스로 자기의 형편에서 구제하면 된다. 이는 다른 직분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적으로 도움을 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을 경우에는 그것을 교회에 보고함으로써 교회가 공적으로 구제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장로들이 심방을 하면서 구제의 필요성을 발견할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공적인 구제가 필요할 경우 목사, 장로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하여 교회의 전체적인 재정을 관리하는 집사회에서 구체적인 논의를 하고 지출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전임 직원들에 대한 공평한 대우]

 

일부 한국교회들이 점차 대형화 되어 가면서 직분이 마치 계급처럼 이해되기 시작했다. 개 교회 안에서도 그렇거니와 노회나 총회는 물론 교회와 교회 사이에도 그런 잘못된 인식이 싹트게 된다. 그것은 일반적인 통치원리에서 있을 법한 일이며 교회에서는 어떠한 계급적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고는 급속히 퍼져나가게 되었으며 교회가 마치 기업적 형태인 것처럼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들 중에서 소위 유능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은 급여를 많이 받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상식에 벗어난 적은 액수의 급여를 받아도 그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된 것이다.

 

교회의 전임직원이라 함은 목사, 강도사, 관리집사, 일반 행정직원 등이다. 교회가 그들을 청빙하는 것은 그들의 일상생활을 위한 경비를 교회가 부담하겠다는 의사와 함께 그것을 위한 적절한 급여를 지급하겠다는 일종의 계약관계로 말미암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수의 성도들이 해야할 일을 은사를 가진 소수의 다른 성도들에게 맡김으로써 함께 교회를 세워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목사, 강도사, 관리집사, 행정직원의 직분적 성격이나 청빙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논외로 한다.)

 

현대 한국교회의 물량화는 염려할 만한 수준이다. 이는 교회의 전담 사역자들에게 생활비가 아니라 직능에 따른 급여를 지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녀가 모두 독립하여 부부만 생활하는 담임목사와 학교에 다니는 여러 자녀를 둔 부 목사나 강도사들이 있을 경우에도 담임목사에게는 많은 급여가 책정이 되고 씀씀이가 많을 부목사나 강도사에게는 적은 액수의 급여가 지급되는 것을 보며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관리집사나 아직 신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하는 전도사들에게 지급되는 급여는 매우 낮은 것이 일반적이다.

교회의 모든 전임직원들에 대한 급여는 공평을 유지해야 한다. 그것이 성숙한 교회가 취할 수 있는 방편이다. 목사의 자녀 교육비를 교회가 전적으로 부담한다면 강도사나, 전도사, 관리집사, 행정직원의 경우에도 동일한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목사의 자녀를 외국 유학을 보내면서 교회가 그 학비를 부담한다면 관리집사나 행정직원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목회자들의 청빈에 대한 오해]

 

목회자가 가난한 것이 미덕인가? 수중에 재산도 돈도 없는 것이 목회자다운 삶인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바 청빈사상이란 과거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가능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시대에는 청빈이 미덕인 것은 불가능한 시대이다. 청빈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도리어 위선일 수 있다. 소위 청빈하게 산다는 사람들은 남들이 알지 못하는 다른 그 무엇이 있는 자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남들과 비교해 보다 나은 특별한 다른 능력이 있든지 힘(권력)이 있으면 그것이 가능할지 모른다. 돈이 필요할 때 누군가가 그것을 채워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어느 목회자가 자기에게 있는 돈을 모두 좋은 일에 써 버렸다고 가정하자. 그래서 가진 재산이나 돈은 하나도 없다. 그에게 여러 자녀가 있다면 학교 교육이나 혼인을 시킬 경우 그에 드는 경비는 누가 충당할 것인가? 마냥 누군가가 자신에게 필요한 경비를 채워주기를 바라는 것은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을 기대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다른 누군가가 주기를 바라는 것 이상 되지 않기 때문이다. 목회자도 다른 성도들과 동일한 일상적인 경제생활을 해야하는 자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할수 있다면 목회자들도 생활비를 절약해서 저축을 하며 건전한 경제생활을 해야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누구나 먹고 마시고 생활해 가는 것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것 자체를 미덕으로 생각하는 것은 신앙의 미성숙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도 다른 성도들처럼 자기집을 장만할 수 있다면 좋다. 교회에서 받은 생활비를 아껴 저축하여 집을 살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목회자들도 형편에 따라 저축해 둔 돈이 있어서 정말 필요할 때 요긴하게 잘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이 목회자의 바람직한 태도이다. 물론 그런 것은 부를 추구하거나 재산에 욕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삶을 위한 방편으로서 생활인 것이다.

 

[목회자의 은급비]

 

목회자의 노후를 누가 염려하며 책임질 것인가? 목회자의 노후는 기본적으로 목회자 스스로 준비할 수 있도록 교회가 배려해야 한다. 이는 장로나 집사 등 일반 성도들의 노후를 교회가 염려하지 않는 것처럼 목회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교회에서는 목회자의 노후를 위해 은급비를 지원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일단은 바람직하다고 본다. 현재 여러 교단들에서 은급제도를 두고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원리를 따르기 보다 철저히 자본주의적 방식에 의한 은급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즉 은급비를 많이 내는 목회자는 은퇴 후 많은 액수의 돈을 받게 되며, 적게 내는 목회자들은 적은 액수의 돈을 받게 된다. 그러나 현재의 가난한 형편으로 인해 은급비를 전혀 낼 형편이 되지 못하는 목회자들은 지금도 가난하거니와 앞으로도 받을 만한 돈이 없다. 이는 결국 지금보다 훨씬 더 심한 또 다른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초래될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기본적인 측면에서 다시 생각해 보자. 지금 생활비를 수 억원을 받는 목회자들에게는 은급제도가 달리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이 은급비를 낸다면 상당히 고액을 낼 것이며 그들은 많은 은급비를 내지만 나머지 돈만으로도 여전히 고급스런 생활을 누릴 수 있다. 한편 매월 몇 십 만원으로 생활해야 하는 어려운 목회자는 은급비를 제대로 낼 형편이 되지 못할 것이며 은퇴 후에도 받을 돈이 없으니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도 여전히 어려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달리 방법이 없는가? 우리가 보편교회의 원리만 제대로 이해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조금만 자세를 달리하면 얼마든지 방법이 있다는 말이다. 예를들어 지금 각 교회들에서는 상회(노회)에 상회비를 낸다. 큰 교회에서는 비율에 따라 많이 내고 작은 교회들에서는 적게 낸다. 지금 상회비를 내는 대서 배 가량을 더 낸다고 가정을 해 보자. 상향조정된 상회비를 전액 은급비로 총회 차원에서 관리를 하고, 목회자가 은퇴할 때는 퇴직금 혹은 노후에 지급되는 보장성 금액을 모든 목회자들이 동등하게 받도록 법제화하면 된다. 다시말해 도시의 부유한 교회에서 천만원을 상회비로 내는 교회나 시골의 경제적으로 어려운 교회에서 10만원을 상회비를 내는 교회의 목회자나 혹은 형편이 어려워 상회비를 내지 못하는 교회의 목회자나 은퇴 후에는 모두 동일한 액수를 받게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예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보편교회의 원리 가운데서 적용될 수 있다.

 

[맺음말]

 

한국교회가 거듭 태어나기 위해서는 본질적인 측면에서 많은 변화가 요구되지만 돈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다시금 정립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물질관은 거의 자본주의적 경향에 치중해 있다. 그것은 물신주의에 빠져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에게 다양한 방법들을 동원해 연보를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돈을 필요로 하되 돈으로부터 벗어난 객관적인 신학적 사고를 정립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에 대한 사고가 명확해야 한다. 현재 한국교회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위기라 일컬어도 좋을 만큼 심각하다.

우리가 보편교회에 속한 건전한 교회의 성도들이라면 우선 개교회주의를 탈피해야 한다.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목사)들 가운데 발생하는 극심한 경제적 생활의 격차를 뻔히 보면서 교회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부유한 목회자들이 상식에 맞지 않은 고액의 연봉을 받으면서 그것을 구제를 비롯한 좋은 일에 쓰면 문제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는 사이 가난하고 어려운 목회자들에게는 소위 선행을 할 기회조차 가지지 못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넉넉하지 않은 생활 가운데서 가난한 이웃과 조그마한 것을 나누는 것이 성도의 삶의 원리이지 풍족한 가운데 남을 도와줌으로써 가슴 뿌듯해 하는 사고는 자본주의적 소비원리에 의한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한국교회에 목회자 생활비와 관련하여 이러한 문제가 공론화 되었으니 이제는 신학으로 부터 원리적 접근이 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각 교단의 건전한 신학교수들이 그 문제를 다시 공론화 하고 모든 신학생들이 그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이에 대한 신학적 검증작업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러한 신학적 정립이 우리 한국교회에 스며듦으로써 발생하는 회복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바랄 수 밖에 없지만 말이다. (복음과 상황, 2003,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