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와 신(新)에큐메니즘(1)에 대한 비판적 논의

- 한국교회의 선교현실 -

 

이광호(철학박사)

 

                                                                       

[서론]

1. 서구철학과 상대주의에 대한 위험

2. 서구기독교의 반성과 종교간 대화의

3. '선교제국주의'

4. 선교모체인 한국교회의 선교지

5. 선교현장에서의 양상

[결론]

 

 

[서론]

 

현대를 흔히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 일컫는다. 과거의 전통적 사회의 규범적 가치가 이상 절대성을 가지지 못하고 모든 것은 상대적 가치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은 급기야 기독교에도 마각을 뻗치고 있다. 일반 신학뿐 아니라 기독교 분야와 '선교' 선교학에서도 그렇다. 따라서 세계선교를 지향하는 현재의 한국교회도 선교적 신에큐메니즘에 빠져 있다.

 

현재 한국교회의 선교구도는 신학적 입장을 뒤로 하고 <협력과 연합>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틀을 그려놓고 있다. 최근 한국의 대표적인 9 교단 선교부가 선교협력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바는 선교실무 행정적 협력과 더불어 구체적인 선교시행에 대한 협력방안이다.(2)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정작 중요한 선교신학이나 신앙고백에 관한 문제들은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한국교회는 선교정책이나 재정, 파송선교사수 외형적인 것에는 관심을 가지면서도 가장 중요한 선교신학의 문제에 대한 검증이나 지적은 거의 전무한 형편이다.

 

일반 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선교신학에서 역시 <협력> 보다는 <신앙고백> 앞서 있어야만 한다. '선교'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택교리의 범주를 벗어날 없다. 하나님의 선택을 무시한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를 확장하기 위한 것이라면 전통적 의미에서의 선교를 벗어나는 것이다.

 

선교는 '인간의 종교적 성공'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올바른 선포' 중요한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복음적 사상이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교란 복음전파를 의미한다. 죄로 말미암아 참된 생명을 상실한 인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전함으로서 생명을 선포하는 것이다. 물론 선포는 동시에 하나님 나라 밖의 인간들에게는 사망을 선포하고 있다.

 

금세기에 들어와서는 '선교'라는 말의 의미가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개혁주의의 입장에 있는 학자들은 선교를 말씀의 활동, 하나님의 뜻에 따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활동으로 개별인간에 관련된 구원론적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소위 '하나님의 선교'(Mission Dei) 주장하며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변혁을 선교의 핵심과제로 이해하고 있다.(3)

 

개념은 1950년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하여 1961 뉴델리 선교대회 이후 적극적이 되었다. 이후 WCC 개인의 영혼 구원 보다는 사회구원을 앞세우는 해방신학이 WCC 공식적인 선교신학 사상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선교신학의 신에큐메니즘적 경향은 일차적으로 서구의 자유주의 신학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는 특색이 있다. 이는 한국신학의 다양성과 비교할 상당히 대비되는 대목이다. 한국 선교사들은 대부분 성경을 고등비평하는 자유주의의 입장에 있지 않다. 한국출신의 선교사들은 대개 자신의 보수 혹은 자유주의의 신학적 입장을 잠재적으로 소유하고 있으며 외적으로는 포괄적/세속적 복음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포괄적 복음주의적 경향이 현대적 철학의 영향을 분별없이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다수의 선교사들은 선교신학에 대한 냉철한 성경적 신학사상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일반 세속적 사조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고 말하는 바를 따라 순종하기 보다는 세속화시킨 자의적 선교에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1. 서구철학과 상대주의에 대한 위험

 

세상은 불과 수십년 전과 비교해 봐도 한없이 좁아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을 한없이 넓은 지역의 공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커다란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지구촌이라 표현하기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좁아진 세계 속에 살면서 타인의 세계를 경험함과 동시에 타인의 모든 것을 인정하려는 풍조에 빠져들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사상적 풍조는 오늘에 이르러서 생성된 것만은 아니다.

 

서구의 철학에서 시작된 현대 사상의 풍조는 이제 우리의 영역과 모든 사람들의 사고내에 거침없이 들어와 있다. 사람들이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동안 사상들이 서서히 우리를 지배해 가고 있는 것이다.

 

  지난 수십 동안 유럽의 철학계에서 가장 논란이 심했던 문제 가운데 하나는 '주체' 대한 담론이었다. 최근의 연구들은 프랑스 철학계의 '주체의 죽음' 대한 논의에서 출발한다.

 

독일철학에서 주체의 절대성을 경험한 것은 칸트에서 시작하여 피히테, 셀링, 후설 등에서 있다. 그리고 헤겔 이후 마르크스, 키에르케고르, 니체 등은 관념적 전통에서 절대화 주체를 비판한다.

 

데카르트로부터 시작한 근대철학은 자아의 동일성을 기점으로 삼았다. 데카르트가 근대 주체철학의 효시라면 그것은 권력주체로서의 모습뿐만 아니라 절대근거로서의 주체와 유한 자아로서의 긴장된 모습을 보여준 점에서 그렇다. 데카르트에 있어서의 주체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확고부동한 토대 완벽한 에고(ego)였다.) (4) 

 

이것은 칸트의 선험적 통각과 후설의 선험적 자아를 거쳐 실존철학의 변형된 모습으로 전개되어 왔다. 근대적 주체중심적 사고로부터 빠져 나오려는 시도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공통된 과제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아의 실체적 동일성을 관계적 다양성으로 해체하고 있는 것이다.(5) 

 

 니체는 '주체는 허구이다' 라는 명제를 내세우면서 데카르트를 비판했다.(6) 

 

그는 절대적 진리나 가치를 부정하고 진리의 다원성과 탈가치화를 주장하게 된다. 그래서 학자들은 니체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전환점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7) 

 

한편 한스큉은, 1980년대 후반 동유럽의 사상적 붕괴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더욱 구체화시켰다고 한다. 이는 1960년대의 미국의 사신(死神)신학에서 이미 시작된 기독교 다원주의가 더욱 본격화되어, 이후 세속화 신학, 해방신학, 혁명신학, 흑인신학, 민중신학, 여성신학, 민족신학 등의 다양한 곡예들을 하다가 급기야는 종교다원주의에서 뿌리를 정착시키게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전반적으로 보수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 신학이 자유주의를 지향할 마저도 대부분의 교회들은 보수성향을 유지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배경들을 통해 한국교회의 선교의 현실과 연결지어 생각할 있다. 서구의 포스트모던 사상들이 한국의 사상을 주도하려 하고 자유주의 신학의 명제들과 다수의 교회가 갈등양상을 보이던 시기에, 한국교회에 선교에 대한 적극적 움직임이 시작되었다고 있다. 이미 서구의 세속사상들이 개방된 기독교 내부를 향해 소극적 자세로 밀려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야 해외파송 선교사의 수를 100 정도 헤아리던 한국교회가 본격적으로 선교를 시작한 것은 소위 88 서울올림픽 이후부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교에 대한 붐을 통해 '선교'라는 단어가 마치 유행어처럼 사용(8)  되기 시작하다가 1980 후반에서부터 해외여행의 자유와 함께 적극적이 것이다. 1999 현재 한국인 선교사의 수가 6000명을 훨씬 넘고 있는 것을 보면 엄청나다. 불과 20 만에 수적으로 60배가 것은 엄청난 증가라 아니할 없다. 문제는 선교가 유행처럼 행해질 교회가 성도들과 선교지망자들을 말씀으로 양육하지 못한 결과 현재의 신에큐메니즘을 더욱 앞당겨 활성화시킨 것이다.

 

2. 서구기독교의 반성과 종교간 대화의 문제

 

(1) 서구기독교의 반성

 

현재 서구신학의 주류는 전통적 기독교에 대한 반성적 단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8 C.H.Brent '하나님은 지금까지 분열된 기독교 국가들을 썼으나 지금은 분파주의의 죄와 비극을 알릴 '라면서, '연합운동이 선교에만 국한될 것이 아니라 교리문제와 의식문제와 기독교 생활에까지 확대될 ' 제창했다. 이러한 사상은 WCC 신학의 기초가 되는데, 이는 '고백' '교리' 보다 '연합' '조직' 강조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 복음을 떠나 자유주의 혹은 세속주의의 편에 서있는 학자들은 급기야 지난 수천 동안 기독교는 기독교 안에만 진리가 있고 다른 종교에는 진리가 없다고 주장해 허구의 옷을 벗어야 한다고 자성하고 있다. 그들은 과거 '선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생명을 구원할 있으며 기독교 복음만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를 제공할 있다고 주장하며 펼쳐왔던 전통적 선교방법은 잘못이었다고 반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비로소 진리를 해체하기에 이르렀으며 모든 진리에 대한 판단은 개별 인간이 자기 주관에 따라 있을 따름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들에게는 절대진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상대적 진리만 있을 따름이다. 결과 기독교 이외에 불교, 유교, 이슬람교, 힌두교, 각종 무속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나름의 진리가 있으며 그들에게는 그들의 고유한 구원의 방편이 있음을 인정하고 기독교인 들은 그들 앞에서 겸손해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기독교는 종교를 인정하고 그들과 공존을 꾀함으로써 세계평화에 기여할 있다는 것이다.

 

(2) 종교간 대화와 선교

 

  현재는 신학에 있어서도 인간중심의 시대가 되었다. 복음주의 편에 서있는 듯한 일부 신학자들마저도 모든 인간이 평화롭게 사는 것이 마치 지상의 과제인 이해하고 있다. 인간은 서로 싸우지 말고 상호이해하는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며 기독교는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의 존재이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결코 세계 평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기독교 선교는 인류가 공동으로 잘살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선교가 아닌 것이다. 선교와 평화를 연관짓는 이들은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결국 '샬롬'이라고 주장한다. 샬롬을 지상의 모든 인간들이 추구해야 이상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인간 경험의 상층에 속하는 '에이레네' 이해하지 못한 인본주의적 선교에만 치중할 따름이다.

 

  인본화된 선교신학자들에게는 성경말씀이 가르치는 신학사상을 따지지 않고 적절하게 대화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미덕인 되어 있다. 자기 옆의 선교사가 자유주의 사상을 가졌는지 성경을 고등비평하는 신학사상을 가졌는지 따지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3) 한국선교의 반응

 

  한국의 선교에서도 이와 같은 흐름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미 한국의 보수교단의 신학교 마져 교단이나 교파의 신학사상을 따지는 일은 피한 자유주의 문호를 개방할 준비를 하고 있다.(9) 

 

  이는 자유주의 신학교들이 자교단 신학교 출신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동안 고집스러움을 보여오던 보수주의 신학교의 선교학은 서서히 자유주의 신학을 향해 손짓을 하고 있다. 이는 개인의 신학사상이 자유주의 사상이냐 아니면 보수적이냐를 일차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선교신학전반에 대한 교류문제와 연관된다. 이상 보수적인 고백 보다는 현실적 효과나 외양에 치중하게 되는 것이다. 서서히 선교지도자의 신학 사상같은 것은 그다지 문제 삼지 않는 기류가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10) 

 

현재까지도 교회법적인 측면에서는 보수교단과 자유주의 교단 사이에서는 적어도 강단교류가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며 신학대학에서 신학생들을 교수하는 일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했다. 이는 교리적 입장 고수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한국교회는 서서히 벽을 허물어 가고 있다.(11) 

 

이미 다수의 기독교 선교지도자들은 그러한 태도를 관용적 미덕으로 생각하고 있다. 기독교 배타주의를 독선으로 간주하는 자들은 자유주의자들뿐 아니라 보수주의에서도 거의 동일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이외에는 복음이 없음을 가르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무분별한 인간주의적 통합이 아니라 배타성을 지니고 있다.(12) 

  따라서 성경에 의한 가르침이 아닌 것을 신학적으로 주장하는 자들과는 신앙을 같이할 없으며 선교에 있어서도 선을 분명히 해야 한다.

 

(4) 집단적 대화주의(collective dialogism) 개별적 대화(individual conversation)(13)

 

  전통적 개혁교회에서는 타종교와 집단적 대화를 하지 않을뿐더러 신학고백이 같지 않으면 집단적 대화를 하지 않는다. 신앙적 이질 집단과 집단적 대화를 한다는 것은 자기 양보를 피할 없기 때문이다. 진리와 비진리 사이에는 상호 대등한 대화가 있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세속화되고 세상적 목적을 추구하게 되면 집단적 대화에 나서게 된다. 이는 자기 확인을 위한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한편 개혁주의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종교인들과 개별적 대화를 중단하지 않는다. 이는 사실상 복음을 전파할 있는 기초를 이룬다. 한국교회에서, 흔히 신학을 공부하거나 목사가 되면 옛날의 친구와는 관계를 단절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그들과 여전히 만나 대화를 지속함으로써 주님의 복음을 증거할 있는 기회를 가질 있게 되는 것이다.(14) 

 

  우리 한국교회는 이미 집단적 대화 속에 들어와 있다. 개혁주의를 지향하거나 보수주의를 주장하는 교단들도 마찬가지이다. 불교나 유교 등과 동일한 기구 속에서 국가에 대한 논의를 한다거나 기독교 내에서도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하지 아니한 단체구성은 모두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있다.(15) 

 

3. '선교제국주의' 위험

 

전통적 교회에서 '선교', 복음전파는 인간구원과 관련된 교회의 중대한 사명이다. 현대에 와서는 성경의 가르침에 직접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선교가 아니라 문화적, 사회적인 면에 많은 관심을 가지는 선교로 변모해 가고 있다.

 

  사실 선교나 선교학에 있어서는, 선교의 방법이나 전략을 개발하는 보다 성경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고 하나님이 가르치신 세상을 바라보는 정확한 눈을 가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16)  그러므로 선교학에서는 방법론이 우선이 아니라 성경에 대한 본질적 이해가 원천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구체적으로 바탕하지 않은 선교학은 세속 선교학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선교학의 모든 개념들과 방법은 먼저 성경에서 당위성이 찾아져야 한다. 인간의 어떠한 이론이나 사회적 변화를 근거로 선교학은 오래갈 없으며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17) 

 

  우리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단순히 우월한 입장에서 타인에게 주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18) 

 

 그것이 선교의 목적이 아니다. , 장로교는 장로교를 감리교는 감리교를 타종교인들에게 전하는 것을 선교라 하지 않는다. 또한 한국교회는 선교지에 한국교회를 세우고(19)  미국교회는 미국교회를 세우는 것이 선교가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선교지를 어지럽히는 위험한 선교제국주의적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선교현지 지도자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도 바로 점이다.(20) 

 

  전통적 의미에서의 선교란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택함을 받은 성도들을 찾아 주의 몸된교회를 상속하여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21) 

 

  그러므로 기독교 선교의 목적은 기독교 문화전파에 있지 않다. 선교사의 다양한 활동들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도적 명령과 사도적 행위가 오늘날 우리의 선교에 관한 이해 가운데 가장 핵심적 위치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22) 

 

  그러나 선교제국주의적 입장은 그렇지 않다. '복음전파'라는 개념 보다는 '기독교 전파' 개념이 훨씬 앞선다. 자신의 교파적 경험에 따른 기독교라든지 자신의 민족적 기독교를 선교지에 이양하는 것을 일차적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선교사는 선교현지에서 자신의 소속국가나 출신배경이 자랑스러워서는 안된다.(23) 

 

  그것은 선교제국주의적 성향 때문이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복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볼 있는 자세를 가져야 것이다.

 

4. 선교사 파송모체인 현재 한국교회의 선교지향점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 선교계에 일어나고 있는 지향점은 한마디로 '선교협력'이라 있다. 얼마되지 않는 선교 역사 가운데 이미 많은 문제들을 노출시킨 한국교회의 선교는 건전하지만은 않은 일종의 반성적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협력' 앞세운 거기에 문제가 숨어 있다는 것은 대부분의 선교신학자들마저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선교신학자들은 교단의 신앙고백에 따라 신학의 색깔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에비해 선교를 담당하고 있는 실무자들은 거의 초교파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있다. 이는 교단 선교부에 소속된 실무자들도 마찬가지다. 교단정책도 동일하다.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이라 인정받고 있는 교단에서 조차 동일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24) 

 

  우리는 여기서 우선 '협력' '연합' 차이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협력이란 완전한 독립체이면서 형편에 따라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라 있다. 한편 연합이라 하는 것은 '협력' 이상으로 외부적인 끈으로 동일한 울타리 속으로 집합시키는 것이다.

 

  한국선교단체들은 필요에 따라 상호 협력할 수는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독자적 입장에서이며 강요할 없다. 연합운동에 가담하지 않는다고 하여 협력의 자세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이웃과 더불어 살고 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이웃과 협력하며 살고 있다. 집밖에서 만나면 인사를 주고 받고 때로 힘을 모아 골목청소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웃 가운데 집이 어려움을 당하면 함께 찾아가 위로도 하며 위로 받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 좋은 이웃의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연합의 개념은 아니며 어디까지나 협력이다. 연합의 의미는 다르다. 어떤 이름을 붙여 연합회를 조직하고 회비를 내어야만 한다. 연합회를 조직하는데 함께 참여하지 않으면 이기적으로 비쳐질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울타리 속으로 들어감을 의미하며 독자적인 것을 상당부분 상실할 우려가 있다. 그렇게 되면 독자적인 자율적 특성보다는 전체적 목적이 우선시 된다.

 

선교에 있어서 '협력' '연합' 명확히 이해되어야 한다. 협력과 연합은 다르다. '협력' 자기 선교신학을 유지하며 이웃 선교단체 등에 도움을 있지만, '연합'하게 되면 자기 선교신학적 입장을 상당부분 약화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협력은 '모두' '' '동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 형편에 따라 유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제도적이거나 강제적이지 않고 순수자발적이다.

 

  현재의 한국 선교계의 추세는 무분별한 연합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연합에 소홀히 하거나 거부하면 비협조적으로 간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선교에 있어서 핵심 부위에 위치하고 있어야 성경이 말하는 '선교신학' 중요성이 간과되면 곤란하다.

 

5. 선교현장에서의 양상

 

  선교현장에는 이미 많은 선교사들이 나가 있다. 대부분의 선교지에는 한국 선교사들이 들어가기 전에 이미 다른 여러나라에서 파송한 성숙한 선교사들이 이미 주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선교 역사적으로 보아 비교적 나중에 선교지에 들어간 한국선교사들은 독자적으로 무엇을 하려 것이 아니라 앞선 신실한 주의 종들이 사역해 것을 조심스럽게 살피고 배움으로서 그들과 동역해야할 것이다.

 

  선교현장에 가면 많은 경우에 한국선교사들의 독특한 양상들을 보게 된다. 한국선교사들은 대개 한국교회의 신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들의 파송기관은 매우 다양하다. 이를 파송기관을 기준으로 하여 교단파송선교사, 외국선교단체와 한국개체교회의 협력파송선교사, 한국자생선교단체파송선교사로 크게 나눌 있다.

 

1) 교단 파송선교사

 

  교단파송선교사들은 신학교육을 받은 목회자들이 많은 수를 차지 한다. 따라서 그들의 신학이나 신앙적 색체가 비교적 뚜렷하다. 개혁주의 신학 사상을 가진 선교사들과 자유주의적 배경을 가진 선교사들과 신학사상이 다르다. 물론 개인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기본적 신학사상은 충분히 검증되어야만 한다.

 

  사실 해외선교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는 이들은 목사선교사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통해 구체적인 신학과 신앙이 선교현지에 그대로 전달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러한 상이한 입장에 서있는 선교사들이 '고백' 보다 '협력' 우선으로 하여 선교적 에큐메니컬 운동을 시도한다면 신학적 혼합주의를 피할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백을 통한 협력은 가능하되 '한국 출신 선교사'라는 이유만으로 연합을 꾀하는 것은 허용되지 말아야 한다.

 

  선교사들의 출신 국가를 통한 연합이 아니라 신학사상과 고백을 통한 연합이 추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2) 외국선교단체와 한국개체교회의 협력 파송선교사

 

  이럴 경우 외국선교단체의 복음적 요소와 선교사 자신의 출신교회 혹은 교단 배경에 따라 신학과 신앙이 정립되어 있다. 외국선교단체의 경우 복음적이지 않은 경우도 상당수 있다.(25) 

 

  그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전파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제공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들 사회복음주의적 경향을 지닌 선교단체들은 물론 병원을 짓고 우물을 파며 실생활에 유익이 될만한 일을 많이 한다.

 

3) 한국 자생선교단체 파송선교사

 

한국자생 선교단체들은 대부분 한국식 복음주의적이다. 신학적 명확한 색체보다는 복음을 '많이' 전해야 한다는 기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엄밀히 따져보면 인본주의적 선교일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선택' 대한 의미 보다 '인간의 노력' 따른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문제 때문이다.

 

  현재 한국 기독교의 선교의 흐름은 하나님의 섭리나 선택, 예정 보다는 인간의 열심이나 노력에 치중하고 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많은 선교단체들에서는 전반적인 성경의 가르침 보다는 선교 방법적인 면을 훈련하여 어린 성도들을 선교지로 내보내는 것이다. (26)

 

4) 평가 반성

 

  선교현장에는 이렇듯 다양한 신학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좋은 일을 함에 있어서는 서로 협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 교회 형편(27) 마찬가지로 선교지에 나가있는 교인들의 말씀에 대한 이해 정도는 지극히 미약하다. 선교사 파송국 교회의 신학과 신앙이 건강해야 파송된 선교현지의 선교사들이 영적으로 건강할 있다. 가르치는 교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풍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면 여간 문제가 아니다. 그들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현지 교인들은 처음부터 부실한 신학적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교지에서 자기 자신의 것으로 일시적인 도움을 주는 자로서가 아니라, 훗날 우리를 통해 지역에 교회가 세워졌을 어떤 신학과 신앙을 가진 교회여야 하는가 하는 것을 고려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선교사가 선교지의 주민들에게 주는 도움은 결코 일시적이지 않다. '오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이 일차적이 아니라 어떻게 그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삶을 소개할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경말씀의 구체적 가르침에 의한 선교신학을 바로 정립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선교적 노력 사운데 많은 부분이 허사가 수도 있다.

 

[결론]

 

우리 시대의 선교는 신에큐메니즘의 시대가 되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크게 논란이 되었던 신학적 논쟁인 WCC 에큐메니컬 운동은 신학적 해석을 무시한 또다시 신에큐메니칼 운동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보수주의를 지향하는 많은 선교 지도자들은 '협력'이라는 명분아래 분별없는 대화와 연합을 시도하고 있다. 많은 연약한 성도들은 외형상의 연합에만 관심을 기울일 진리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무지 가운데서 책임질 없는 박수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일반 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선교신학에서 역시 <협력> 보다는 <신앙고백> 항상 앞서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필자는 글에서 막연한 교파주의를 주장하지 않는다. 장로교가 아니라 침례교, 성결교와도 우리는 연합할 있다. 그러나 조건은 WCC 에큐메니컬 운동이 비성경적인 연합운동임을 명백히 고백하는 교파여야만 한다.

 

선교단체도 마찬가지다. 외국의 건전한 단체들과 얼마든지 협력할 있다. 때도 선교단체의 신앙고백은 명확해야 한다. 이미 신에큐메니즘에 빠져있는 한국교회의 선교가 거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유일한 방편은 다시금 말씀을 회복하여 세속주의로 부터의 사상을 차단하는 것이다.

 

선교는 그리스도의 사역이요 말씀의 사역이며 주님의 몸된 교회의 일이다. 선교의 기본적 개념은 인간의 노력의 결과를 통해 구원받을 자의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와 있어야 자들을 말씀의 선포를 통해 찾아나서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는 비유' '등불을 가지고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비유' 통해 우리는 선교의 의미를 있는 것이다.

 

이에 지나서 어떤 선교적 작전 혹은 전략을 통해서 통해서 많은 수를 얻어 공적을 세우려 하는 것은 선교의 신에큐메니즘적 경향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선교에 있어서 올바른 선교신학적 바탕을 확립하지 않는다면, 한국교회의 선교는 세계의 건전한 선교 사역자들로부터 문제아로 낙인 찍힐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유념해야 한다. (28)

 

  우리는 현재의 에큐메니즘적 경향에 빠져있는 선교현실을 냉철하게 비판함으로써 하루 빨리 올바른 선교신학을 확립해 가야 것이다.

 

 

[후주]

(1)  ()에큐메니즘은 WCC 에큐메니칼 운동과 구분되는 개념이다. 우리 한국교회는 과거 WCC운동을 두고 상호간 강단을 통한 대화를 중단했었다.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는 신학적 해석을 뒤로 한채 한국에 속한 소위 '한국교회'니까 무조건 일치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이 팽배해 있다. 이를 필자는 한국적 신에큐 메니즘이라 본다.

(2)  지난 9 2일 예장 고신, 합동, 통합 등 9개 교단의 선교실무지도자들이 모여, 한국교회 선교협력의 필요 성을 확인하고 첫단계로 '선교비 통일기준안'마련을 위한 공청회를 열었다.(서울 명성교회당, 1999 9 11일자 기독교보. 참조))

(3)  이광호, "Missio Dei 사상 비판", 세계선교의 새로운 과제들, 서울: 예영 커뮤니케이션, 1999, pp. 131-137. 참조.)

(4) 데카르트의 사유체계의 중심이었으며 근대철학의 중심역할을 했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주체는 허망한 환상이 아닌 완벽한 에고(ego)였다.

(5) 김영필, 현대성의 전개, 대구: 이문출판사, 1998, pp.129-130. 참조.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근대의 이성적 주체는 이성을 둘러싸고 있는 관계와 구조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관계가 실재를 규정한다'는 니 체의 말을 그들 사상의 격언으로 신봉한다).

(6) 니체는 '세상에는 다양한 눈들이 있다. 다양한 눈들이 있으면 다양한 진리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어떤 절대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7)  하버마스는 니체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이진우, '진리의 허구성과 허구의 진실성' 250회 목요철학 세미나 및 니체 탄생 105주년 기념 심포지움, 계명대학교 부설철학연구소, 1994. 10. 8. pp.36-37)

(8)이 때 부터 어린이 선교원이 생기게 되었으며, 이전의 남전도회가 남선교회로, 여전도회가 여선교회 등으 로 바뀌는 경향들이 생겨났다. (이광호, 세계선교의 새로운 과제들, 서울: 예영커뮤니케이션, 1998, p.23. 참조)

(9) 이광호, 고신교단을 향하여, 대구: 실로암, 1999. 참조.)

(10) 지난해 고신대학교에서는 미국의 풀러 신학교의 총장인 선교신학자 리쳐드 마우 박사를 초빙하여 아무 런 비판적 설명없이 강연을 시킨 적이 있다. 그는 미국의 저명한 학자로서 한국교회의 커다란 환영을 받기는 했지만 건전한 신학을 소유한 학자는 아니다. 그는 외계인의 존재를 어느정도 인정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그들도 선교의 대상이 된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할 수 있는 학자이다. (리처드 마우, '만약 화성에 생명체개 있다면', 리더스 라이프, 서울: 예영 커뮤니케이션, 1999. 7.8, pp.78-79. 참조).

(11) 이광호, 같은 책. 참조.

(12)  이에 대해서는 R.N.Nash Is Jesus the only Savior? Grand Rapids: Zondervan, 1994. 참조. (이승구, "기독교 배타주의의 강력한 변증을 칭송하면서" 교회와 문화, 창간호, 서울: 한국신학연구회, 1998, pp.82-97).

(13) 필자는 여기서 '대화주의' '대화'를 구분 짓는다. '대화주의'란 위의 '집단적 대화'에 해당되며 '대화'란 개별적 대화를 의미한다. 집단적 대화는 종파와 종파 사이 혹은 기독교 내에서도 신앙고백에 관계없이 하는 대화주의를 의미하며, 개별적 대화란 그야말로 개별적 인간관계 속에서의 일반적인 대화를 뜻한다.

(14) 많은 성도들이 불신 가정을 가지고 있다. 목사라 할지라도 그 부모님이나 친척들 중 불신자들이 있을 수 있다. 성도들은 여전히 그들과 교제를 나누며 대화를 한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에서, 착실한 교인 이 되거나 목사가 되면 옛날의 불신 친구들을 멀리하는 것 자체가 미덕이라 여기는 것은 아직 어리기 때문이며 '성속'에 대한 잘못된 구분 개념 때문이다.

(15) 예를 들어, 통일을 위한 모임을 결성할 때 '민족'을 앞세워 범종교적 기구를 결성하는 것이나 신앙고백을 따지지 않고 '기독교'를 앞세워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결성하는 것 따위가 곧 그 예가 될 것이다.

(16) Allan M Harman, Covenant and Missions, Pusan: Kosin University, 1999, pp.101-102.

(17) 박형용, "성경신학에서 본 선교학", 교회와 문화, 창간호, 서울: 한국성경신학연구회, 1998, p.23.

(18) Dr. Pattisson의 서구선교에 대한 반성적 고백을 들어본다. " 200여 년 전 윌리엄 캐리를 비롯한 선교 사들이 인도에서 선교지의 국민들 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복음을 전한 결과를 지금 우리가 보고 있습니 다."(이광호, 세계선교의 새로운 과제들, pp.109-110. 인용문 참조)

(19) 필자가 1995년 여름, 필리핀의 Alliance Bible Seminary를 방문했을 때 그 학교의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T교수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 "만일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필리핀 선교를 원한다면 이제 선교사를 그 만 파송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필리핀 교회를 돕는 것입니다. 필리핀에 한국 스타일의 교회가 건전 한 필리핀 교회와의 대화없이 여기저기 세워지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20)  이광호, '선교지에서 듣는 현지교회 지도자들의 소리', 세계선교의 새로운 과제들, pp.28-33. 참조.

(21) 이광호, 한국교회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 대구: 도서출판 실로암, 1999, pp.12-14. 참조.

(22) Allan M Harman, Covenant and Missions, p.104.

(23)  여기에 알맞은 예를 들 수 있다. 만일 한국 선교사가 우리보다 후진국에 속하는 선교지에 갔을 때 그곳 에서 한국산 자동차나 전자제품 등 한국산 물건들을 보며 자랑으로 생각하여 선교현지의 사람들에게 그 것을 표현하려 한다면 선교제국주의적 속성이 있다는 증거가 된다.

(24) "한국선교 '연합, 협력' 향해 뛰고 있다", 기독교보(대한예수교 장로회 고신: 교단지), 1999 12 18일 자, 455, 7. 참조.

(25)   선교지에서 '복음주의'라는 말의 표현은 때로 아주 모호할 수 있다. 대부분 선교사들은 그들의 신학사상 에 관계없이 훌륭한 희생적 인격을 가진 이들이 많다. 그러나 훌륭한 희생적 인격과 성경말씀에 대한 기본적 고백은 분리되어 해석되어야 한다. 예를들어 슈바이쩌 박사 같은 이는 고매한 인격을 가지고 희 생적으로 일한 아프리카 선교사였다할지라도 그의 자유주의 신학과 사상은 받아들일 수 없으며, 우리는 그러한 부류의 선교사들과 함께 사역할 수 없다.

 (26)  이는 마치 초등학생을 간단히 훈련하여 전쟁터에 내보내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그들이 설령 전쟁터에서 생존한다 하더라도 포로로 잡은(?) 적군을 아군으로 잘 재양육하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27) 이광호, 한국교회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 대구: 도서출판 실로암, 1999, 참조.

(28)  본고 <3. 선교제국주의의 위험> , 각주 19, 20. 참조. (사실, 한국 선교사들에 대한 부정적인 면은 선 교지 곳곳에서 볼수 있다. 1990년 대 후반, 영국의 선교신학교인 All Nations Christian College에서 선 교학을 공부한 권오헌 목사의 이야기를 들어 본다. 그가 ANCC에서 공부하기 위해 갔을 때 그곳에서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사역한 적이 있는 한 외국인 형제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한국 출신 권 목사와 가까이 하는 것을 매우 꺼려했다. 그는 수개월 간이나 권 목사와 대화하기 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나중 에 알게 된 사실은 그 청년이 아프리카에서 선교사역을 하는 동안 몇몇 한국 출신 선교사들의 막무가내 식 무분별한 자세에 엄청난 상처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국인이라면 부정적이었던 것이다. 이는 작은 한 단면이기는 하지만 선교학을 공부하는 학도로서는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