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사역의 동기와 방법(고전9:22)

(목적이 방법을 정당화시킨다는 생각에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문제에 있어서는 목적이 필연적으로 방법들을 제어하고 결정하며 또한 목적과 수단의 본질이 일치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입니다. 기계의 횡포에 대해서 많은 말을 듣고 있습니다. 교회사역에 있어서의 기구 또는 조직 역시 이와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방 사람들의 심리를 알아야 하고, 그들의 신앙을 알아야 하며, 그들의 생활 양식을 알아야 하고, 그리고 그들의 고정관념들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들에게 무조건 그들이 잘못되었으며 암흑 가운데에 빠져 있다고 단정지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종교가 강조하고 있는 진리의 일면을 일단 인정한 다음에 우리의 종교가 강조하고 있는 진리의 또 다른 면들을 고찰해 볼 것을 권고하여야 합니다.  )

 

 David Martyn Lloyd-Jones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9:22)

 

교회생활 전체와 그리스도인의 개인생활 전체를 망라해서, 교회의 선교사역 문제만큼 그렇게도 많은 근본적인 문제와 질문을 야기시키는 것은 정말로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의 신앙고백을 철저하게 검토하는 데 있어서 종국적으로는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규명하는 것보다 더 명확한 것은 없으리라고 저는 주저 없이 말하고 싶습니다.

 

과거 교회의 역사는 우리의 이런 주장을 얼마든지 보증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이 전해주는 초기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든 진정한 신앙의 부흥과 모든 영적 삶의 각성, 그리고 교회의 자각은 예외 없이 선교사역을 이루어왔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의 은총들을 경험하고 즐기게 되면 그들은 이 복된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자하는 타오르는 열망과 욕망을 끊임없이 가져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관례가 이렇기 때문에 선교사역을 우리 현 상태의 시금석으로 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필연적 결과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와 동일한 열망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와 동일한 형태로 반응합니까?

 

그러나 이 테스트와는 별문제로, 우리는 선교사역을 당면하거나 또는 어떤 모임이나 책에서 선교사역에 대해서 직면할 수밖에 없을 때에 필연적으로 궁극적인 질문을 고려해 보게 됩니다. 우리들은 아마도 기독교적인 환경 가운데서 자라왔을 것이며, 복음과 그 교훈을 받아왔을 것이고, 또한 우리의 전체 삶을 복음의 기준에 부합되게 살려고 최선을 다해왔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태도는 여전히 소극적이며, 사실 상당 부분에 있어서 무분별합니다. 이러한 삶은 우리 자신이 결정한 것이며, 우리가 해온 최선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삶을 즐겨왔고 그 안에서 만족해했습니다. 위험한 일은 우리가 이런 삶에 대해서 다시 한번 심각하게 재고해 봄이 없이 무방비적으로 이런 식의 삶에 익숙해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로부터 우리들을 일깨우고 기독교 신앙의 기본 진리를 심사숙고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는 것으로써 선교사역보다 더 나은 것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선교사역은 답변을 요구하는 질문을 제기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을 외국에 보내서 복음을 가르치게 합니까? 왜 만반의 준비가 갖춰진 기구들을 설립하고 그것들을 유지하기 위해서 온갖 정성을 다 쏟아 붓습니까? 왜 타종족들의 생활과 관습에 관여합니까? 타종족들이 오랜 세기동안 만족하며 누려왔던 전통들과 신앙들을 뒤집어엎으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무슨 권리로 그런 일을 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신앙과 신념이 우리로 하여금 무슨 권리로 그런 일을 할 수 있게 하며 또 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합니까? 이와 같은 질문들이 제기될 것이며, 이에 대한 답변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 신앙고백의 전반적인 근거를 포함할 것입니다.

 

제가 다시금 여러분들에게 상기시킬 필요도 없이 이상(以上)에서 언급한 바는 현금(現今)의 교회 내에서 제기되고 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선교에 관한 질문은 우리가 생각해 본 것처럼 순전히 실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대부분인데, 여러 가지 다양한 이유로 인해서 오랫동안 교회에서 지대한 관심을 끌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가 다각도로 고찰되어 왔는데, 결국 메시지와 방법이라는 두 가지 심의사안으로 풀이된다는 데에 의견이 일치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질문들을 고찰함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가 알아야 할 주제가 지니고 있는 위대한 권위를 다시 한 번 음미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바울이야말로 열성으로 보나 경험으로 보나 또는 결과로 보나, 어느 모로 보든지 모든 시대에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우뚝 선 인물입니다. 또한 여기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이 문제에 관해서 특별히 드러내어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 메시지에 관해서 가르치고 있는 바는 물론 그가 쓴 모든 서신에서도 발견됩니다. 여기에서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내용 중에 방법론까지도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변론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매우 격렬한 방법으로 바울을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자신을 사도라고 일컫는 것이 매우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지식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는데, 사실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이외에는 전혀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이 그 외에는 전혀 아는 것이 없다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결론 지었던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바울의 강론 방식에 대해서도 비난했습니다. 이를테면 대개 수사적이고 웅변적인 방법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심지어 바울이 그들로부터 전혀 사례를 받지 않는 것조차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겉과 속이 다른 치밀한 성격 탓으로 오해받곤 했습니다. 다시 말해 고린도인들로부터 복음 전도자로서의 처신에 대하여 의심받았던 것입니다.

 

바울의 고린도서 집필의 중요한 동기가 교회 내에 질서를 회복시키고 교회를 위협하고 있던 모든 위험으로부터 교회를 건지는 것이었으므로 단순히 바울 자신에 대한 변호가 이 서신 집필의 동기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자신에 대한 험담에의 반박이 중요 내용의 일면으로써 서신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9장 중에서도 특별히 마지막 부분에서는 선교사역의 전파 내용과 수단이라는 문제의 양면에 대한 사도의 분명하고도 명석한 설명이 나옵니다. 하나의 문장이 이것을 완전하게 발췌 요약하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9;22). 계속해서 이 구절을 숙고해 보겠습니다.

 

목적

 

우리는 먼저 선교사의 노력 또는 노고의 목적을 규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겠습니다. 제가 여기서 '시작해야겠다'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목적이 방법을 정당화시킨다는 생각에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문제에 있어서는 목적이 필연적으로 방법들을 제어하고 결정하며 또한 목적과 수단의 본질이 일치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입니다.

네 개의 절 속에서 바울은 그의 선교사로서의 분투의 목적과 목표를 여섯 번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다섯 차례나 바울은 그 목적을 '몇몇 사람들을 얻고자 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목표를 향해 출발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가 표현한 대로 여러 모양으로 준비를 한 이유도 바로 이 목적 때문입니다. 그가 이 목적에서 벗어나는 경우는 절대로 없었습니다.

 

저는 이 식민지 선교사의 강론에 나타난 강론자의 기능 가운데 하나가 사람들로 하여금 이 목표에 주의를 돌리게 하는 것이며, 또한 사회와 그 구성원들과 진정으로 전체 교회를 도와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과 자신의 진정한 동기를 진단해 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전체 사상은 처음부터 끝가지,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의 궁극적인 이상이 무시된 채 다른 것으로 만족하고 거기에 정착하지 않도록 각성시키는 경고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들의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도 이런 권고가 언제나 필요하며 교회 전체에 있어서도 다양한 활동을 위해서 마찬가지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늘 부차적인 문제로 미뤄져 왔고 현실을 합리화시키려는 시도 등 위험 요소가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고의적으로 부정직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천성적으로 절망적이며 사악하고 거짓되기 때문이고,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기 때문입니다(6:12). 여러분에게는 절대적으로 여러분의 동기와 여러분 자신을 순간순간 재평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에는 현대 심리학이 알아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교사역에 끊임없이 침투하려고 하는 저급하고 그릇된 동기들을 때때로 주시하도록 합시다.

 

동기

 

기계로부터 발생하는 위험은 항상 있습니다. 일반 세상에서는 이 위험이 점점 더 표출되고 있습니다.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할 기계류가 급속도로 사람을 지배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계의 횡포에 대해서 많은 말을 듣고 있습니다. 교회사역에 있어서의 기구 또는 조직 역시 이와 동일한 것입니다.

초기에는 그들 개개인과 단체에 높은 이상이 주어지며, 따라서 그들은 타오르는 열정에 사로잡혀서 선교사역을 성취하기 위해 착수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어떤 종류의 기구나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다른 모든 일도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잠시 시간이 흐르면 꿈은 시들고 열정과 욕망도 식어져 갑니다. 그러나 기구는 여전히 존속하며 유지되고, 사역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진행되고, 그리고 사람들은 그저 일의 진전을 위해서만 일을 진행시키는 경향을 띠게 됩니다. 저는 순전히 기구를 유지하는 일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선교 기금에 기부해 달라는 요청을 종종 받곤 합니다. 사실 때로는 그런 요청이 매우 유치합니다. 교회들은 준다는 그 기준 하나만을 유지하기 위한 단순한 목적을 위해서 요청을 받고 기부를 함으로써 교회로서의 신분만을 유지하려 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안에 있어서 행정적인 동기와 영적인 동기를 혼동하기란 얼마나 쉬운지요. 특별히 우리가 국가를 위한다고 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지나간 세기만큼 오늘날도 그렇게 큰 위험이 되지는 않습니다만, 여전히 지금까지도 그런 위험들이 있음을 듣게 되며, 선교적인 동기들과 제국주의적인 동기들이 동일한 것으로 취급되는 현상을 볼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특별한 감정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합리적인 현상입니다. 그렇지만 신약 성경에 따른다면, 나의 가족이나 나의 민족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스스로 원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그들이 우연히도 나의 가족이고 나의 민족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간주되기를 바라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식민지냐 아니면 일반적 국가냐의 판단 기준은 조직의 성격에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그 조직의 성격은 국가의 체제를 규정지어 주는 차원에서 그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만일 우리가 목적하는 영적인 분야에까지 침투해 들어온다면 그것은 비기독교적이며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항상 등장되고 있는 또 다른 동기가 있는데, 다른 사람들을 돕고 그들의 상황을 개선시키려는 보편적인 희망, 즉 우리의 박애주의적인(인종에 대한 편견이나 국가적 이기심 또는 종교적 차별을 버리고 인류 전체의 복지 증진을 위하여 인류가 서로 평등하게 사랑하여야 한다는 주의.) 본능의 보편적인 발로, 또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정치 철학의 매우 특수한 발로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처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입지인데, 우리는 오해받을 소지를 신중하게 피해야 합니다. 우리들 모두는, 우리가 모든 인류의 기회 균등을 믿듯이, 교육과 의료적인 사역을 믿어야만 하고 또한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러한 활동들을 교회의 제일 되는 사역이나 교회의 최종적인 목표로 삼아오지는 않았습니까?

 

기독교의 성격상 일반적으로 표현할 때 그런 것은 칭찬 받을 만한 일이고도 남습니다.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교회의 최우선적인 사역을 돕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런 일들은 매우 가치 있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런 일들만으로 만족해하고 그런 일들에만 우리의 온 관심과 정력을 쏟는다면, 그런 일들은 우리의 손에 들려진 사단의 도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목표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진정한 목적입니까? 바울의 답변은 모든 세기의 위대한 선교사들의 답변이 그러했듯이 모호하지 않고 명백합니다. 그 목적은 사람들을 얻는 것이고(KJV)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밤낮으로 대륙과 바다를 횡단하며 쉬지 않고 일한 이유는 이 이유 때문이었으며, 오직 이 한 가지 이유만을 위해서였습니다. 사람들은 잃어버린 바 되었고, 어둠과 죄의 종이 되었으며, 하나님에게서 멀어졌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에 저항하고, 그럼으로써 정죄와 진노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상태는 절망적이지만 그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그들은 깨달아야 하며 경성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회개하기에 이르러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여전히 가장 중요한 것이며 그들은 이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출구를 제시받아야만 합니다.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온 메시지는 그들에게 용서와 제사함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생명을 줍니다. 사람들은 사단의 권세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져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에서도 전적으로 새로운 삶이 가능하고, 또한 오는 세상에서도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고전2:9)던 것들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 현세의 삶으로부터 또 다른 새 삶을 얻게 하고, 그들을 그들의 죄로 빚어질 만한 모든 결과로부터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구원하는 것이 사도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또한 이것이 선교의 우선적인 과업인 것입니다.

 

타종교에 대한 우리의 태도

 

우리의 목적이 이와 같다면 우리가 곧 이어서 직면하는 문제는 어떻게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한다면 우리의 방법론, 즉 선교정책을 구상해야만 합니다.

 

오늘날 이 문제는 많은 논쟁의 소지를 내포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의 실마리를 바울의 고백이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바울은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22)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 그리고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20)라는 말과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20)이라는 말과, 그리고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21)이라는 말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답변은 진리를 보는 우리의 견해 - 그것이 절대적이든지 아니면 상대적이든지 간에 - 에 좌우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문제가 되는 일이라고는, 즉 방법상에서의 핵심적인 문제는 우리가 맞부딪혀 사역하려고 하는 그 사람들에 대한 연구보다 더 급한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상대방 사람들의 심리를 알아야 하고, 그들의 신앙을 알아야 하며, 그들의 생활 양식을 알아야 하고, 그리고 그들의 고정관념들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들에게 무조건 그들이 잘못되었으며 암흑 가운데에 빠져 있다고 단정지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종교가 강조하고 있는 진리의 일면을 일단 인정한 다음에 우리의 종교가 강조하고 있는 진리의 또 다른 면들을 고찰해 볼 것을 권고하여야 합니다.

 

저는 이 견해에 조심스럽게 찬동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것이 세상의 그 어떤 종교의 진수보다도 더욱 우등한 것이라는 사실, 즉 나사렛 예수께서 가장 위대한 분이심을 가르쳐줘야 한다고 덧붙이고 싶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이란 세상의 모든 종교들에서 장점들을 발굴해 내고 인정하는 가운데 궁극적인 우리의 목적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가는 한 방편입니다.

 

바울의 답변

 

이와 같은 견해에 대해서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위의 견해들이 바울의 견해라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자격 조건들이 서로 상반된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상한 것은 흠정역 성경에는 이 견해들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데 비해 개역성경을 위시한 현대어 번역본들에서는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율법 없는 자에게는 ...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라고 합니다(20,21)

 

바울이 이 제한적인 자격 조건들을 첨언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그의 목적이 보여주듯이 진리 자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이 실제로 그가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또한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을 가지고 바울이 정말 율법이 없는 사람이라거나 아니면 율법 폐기론자라고 해설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서신에서 사도 바울은 처음에는 자기모순에 빠진 사람처럼 보이는 감이 없지 않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22)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모양으로 호소하고, 이방인들에게는 또 다른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헬라인들이 철학과 지혜와 수사법과 웅변술을 좋아한다는 점을 알면서도 그들 앞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은 헬라인들의 심리 상태를 알고 있었으며, 헬라인들에게 십자가를 전하면 우스갯거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바울은 오직 십자가만 전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일부러 그의 메시지를 십자가에 국한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태도와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이 조화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진리의 위치에 관한 문제이며, 선교사가 정위치를 지키면서 선교사역에 성공을 가져오고자 하는 바람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좀더 살펴본다면, 전통성을 확고하게 고수하려는 사람들과 우리가 방금 고찰해온 관점만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모두 마찬가지로 실수하는 경우가 종종 있음을 첨언해야겠습니다. 그들은 문제를 반대편의 극한 상황까지 몰아붙이면서 말하기를, 진리에 관한 지식 외에는 피선교지 사람들의 심리 상태나 배경 등에 관해서는 전혀 알 필요가 없다 라고 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진리를 희생시키고 방법만을 강조하거나 또는 방법은 무시하고 진리만을 강조하는 이와 같은 경향이 비단 선교 문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질병보다는 환자를 파악하고 연구하는 데에 더 관심을 쏟는 유형의 의사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환자는 제쳐두고 질병을 연구하는 데만 몰두하는 유형의 의사도 있습니다. 전자는 환자에 대한 태도 면에서는 뛰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방문하기만 하면 환자들은 병세가 좋아진 것처럼 느끼고 행복해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만약 이 의사가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능력과 지식이 없다면 의료 과학적인 차원에서 볼 때 그는 완전히 실패한 의사일 뿐 아니라,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의사이기도 합니다. 후자는 대단한 이론 지식가로서 질병의 발전 과정에 대해서는 알아야할 것을 모두 알고 있는 의사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이 의사가 임상의학적인 감각이 없고 환자를 이해하는 능력이 결여되었고 환자 개인의 상태에 자기의 지식을 적용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그 역시 무용지물임에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바울은 이 두 극단을 피합니다. 진리 문제에 있어서 바울은 견고 무비 합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전3:11). 그리스도께서만이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4:12). 여기에는 다른 이름이 개입될 수 없습니다. 다른 이는 있을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이시며 유일한 독생자이십니다. 누구라도 그리고 무엇이라도 그분께서 하신 일에 더할 수 없으며, 그의 복음에 무엇이라도 - 그것이 유대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율법 자체일지라도 - 더하려고 하는 것은 복음으로부터 모든 것을 감하는 행위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진리는 절대 진리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에 대한 핵심 메시지는 종국적인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에는 타협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만,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서는 철저히 타협하셔야만 합니다.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 즉 하나님 앞에서의 사람의 신분에 핵심적으로 관계되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대로 신축성과 융통성을 발휘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이란 진리를 증거 하는 사람일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얻게 하기 위한 방도로써 진리를 증거 하는 사람입니다. 올바른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단지 청지기일 뿐인 줄을 알므로 메시지를 함부로 가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어떤 그리스도인은 너무나도 자신의 정통성에만 집착하고 그것에 긍지를 가진 나머지 자신 스스로가 그만 연약한 형제들에게 거침돌이 되어 형제를 실족케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올바른 그리스도인이라면 단호한 입장을 취해야 할 것입니다.

 

이 위대한 사도의 모본을 교회가 항상 본받아 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나님이여, 우리로 하여금 이 모본을 따르도록 은혜를 주시고, 승리를 위해서 우리 자신의 지혜와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궁극적으로 의지하도록 은혜를 주옵소서.

 

선교사의 열정

 

이제 마지막으로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이 부분에서 굳이 부언 설명하는 이유는, 이 내용이 서신 전체에 숨쉬고 있는 사도의 말씀일 뿐 아니라 그의 서신 전체와 그의 강론 전체를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저는 '선교사의 열정' 또는 '선교사의 열망'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니"(22).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16).

 

이 열정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이 열정을 낳았습니까?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23).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미 사도 바울에게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복음은 바울에게 가치 있는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복음은 바울에게 복음 이외의 모든 것을 무가치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은 그것에 참예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온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전파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복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해야만 합니다. 단지 주님께 대한 의무와 충성이라는 정신만으로도 우리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요일2:2)를 위하신 화목 제물이기도 하십니다. 그러할진대 이 사실을 모르고 잇는 사람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고 믿기만 하면 우리와 한 가지로 기쁨과 복된 소망에 동참하게 될 사람들에게 우리가 이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열정의 근원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면 이 열정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납니까? 바울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자유한 사람이었으나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고전9:19). 바울은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였고 스스로 온갖 종류의 경멸과 환난과 핍박에 자신을 맡겼으며, 한층 더 나아가서 사악한 자신의 본성과 끊임없이 싸움을 벌였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개인적인 삶과 생활 방식은 상을 타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운동 선수의 그것들처럼 혹독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몸을 복종시키기 위해서 그것을 쳐서 부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일을 완벽하게 해내고 자기의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열정은 이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드렸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모두를 들렸습니다. 간헐적으로 억지로 드리는 드림도 아니었고, 간헐적인 모임에 마지못해 끌려감도 아니었으며, 또한 일의 성취를 생각할 때에만 가끔 하는 기도도 아니었습니다. 말할 수 없이 놀라운 은사들과 능력들이 송두리째 모두어진 그의 생명을 바로 이 열정을 위하여 드렸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다른 성도들보다 더욱 더 자신을 드려야만 했던 어떤 다른 이유라도 있었던 것입니까? 우리는 그가 받았던 은총을 요구할 권리도 없고, 사도로 임명된 그의 특별한 소명을 받지도 못했으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그날 만나 뵈었던 부활하신 주님을 눈으로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동일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으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님께 진 빚은 바울이 진 빚만큼이나 크나큽니다.

 

우리들 모두가 외국으로 나가서 거대한 군중들을 대상으로 가르칠 수는 없지만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도와 물질적인 협조로 쉽게 접근할 수는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일들에 솔선 수범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저는 이 질문을 저 자신과 여러분에게 남겨두겠습니다. 여기에 대한 우리들의 응답이,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위하여서 우리들 자신을 기꺼이, 그리고 전적으로 복종시키는 것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도우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