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목적 - David R. Reid

2012.11.23 16:24

서성필 조회 수:4377

사랑의 목적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 조직에 관한 가르침을 주었다.)

David R. Reid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정신을 팔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한 것들은 믿음 위에 세우신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보다는, 도리어 쓸데없는 변론을 일으킬 뿐입니다.  이 명령의 목적은,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은 이러한 목적에서 벗어나서, 쓸데없는 토론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율법교사가 되려고 하지만, 실상은 자기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딤전 1:4-7)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가르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경건에 부합되는 교훈을 따르지 않으면,  그는 교만해져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요, 병이 들어서 논쟁과 말다툼을 일삼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데서, 시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의심이 생깁니다.  그리고 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어서,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 끊임없는 알력이 생깁니다.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이 큰 이득을 줍니다. "(딤전 6:3-6)

 

그리스도인에게 행해지는 설교와 세미나는 무엇을 그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가? 지식인가? 진리인가? 행위인가? 경배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인가? 디모데전서 1:5에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인의 가르침과 말씀 선포의 목적은 사랑 -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 이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구약 율법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12:30-31). 신약도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이 동일한 것으로 가르친다. 그리고 위의 본문은 우리의 가르침과 말씀 선포에 있어서 우리의 목적이 그 목적에 도달해야 함을 알려준다.

이 구절을 처음 읽을 때 디모데 전서 1 5절의 목적은 삼중(三重) 목적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 (1) 순수한 마음, (2) 선한 양심, (3)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 그러나  이 구절의 원문 구성은 의심할 바 없이 한 가지 목적만 있음을 보여준다(역자주: KJV도 동일하게 정확히 번역되었음). 그것은 사랑, 곧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 구절에 대한 알기 쉬운 번역은, "이제 명령의 목적은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과 선한 양심에서 나오는 사랑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이다.

 

디모데전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첫 번째 투옥된 후 디모데에게 쓴 편지이다. 바울은 석방되자마자, 선교 여행을 계속하였고 에베소에 있는 교회의 목양자를 돕기 위하여 디모데를 그 곳에 남겨 두었다. 에베소에 있는 교회는 그 당시 잘 세워진 교회이다.(에베소 교회가 세워진 것은 이 서신서가 쓰여지기 약 10 년 전이며, 이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18 장을 볼 것) 그러나 교회의 질서와 기능에 관해 몇 가지 문제점들이 발생하였고, 사도는 에베소 교회에서 발생한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디모데를 가르쳤다. 바울이 디모데를 격려하고, 그의 책임을 기억나게 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그의 믿음의 아들에게 썼다는 사실로 보아 이 편지는 마케도니아에서 보내졌던 것 같다(1:3). 바울은 에베소로 돌아 갈 의도였다(3:14, 4:13). 그러나 그 사이에 디모데는 "하나님의 가족 가운데서 사람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가족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 알아야 했다(3:15).

 

편지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 조직에 관한 가르침을 주었다. , 장로들과 집사들(3),  교회 내에서 남자와 역자의 역할의 차이(2 ), 교회가 과부들을 돕는 것에 관한 문제(5), 돈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관하여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에게 충고할 것인가(6), 기타 교회 질서에 관한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그밖에 서신서 전반에 걸쳐 거짓 교사와 그들의 왜곡된 교리의 위험에 관한 경고들이 있다. 진리로부터 벗어난 교사들이 에베소에 모습을 나타냈고, 디모데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관한 조언이 필요했다(1:3, 19, 4:1, 6:3, 20). 에베소 교회의 잘 구성된 조직과 기능을 붕괴시킨 것은 아마도 이들 거짓 교사들이었을 것이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로 하여금 사랑의 궁극적인 목적에 관한 자신의 가르침에 계속하여 집중하도록 일깨우는 내용이 정통과 관련한 본문에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다. 디모데의 책임은 에베소의 자칭 교사들을 가르치고 명령해서라도 그들의 초점이 반드시 왜곡되지 않으며, 교리의 가르침이 사랑의 궁극적인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 구절의 가장 놀라운 관점은, 특별히 문맥이 왜곡된 가르침에 관한 것임을 볼 때,  진리보다 사랑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의 사랑이 거짓 없는 믿음의 결과였기 때문에, 진리를 옆으로 밀어 놓아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 성경기록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가르침과 말씀 선포의 궁극적인 목적은 진리가 아닌 사랑이어야 한다! 이것이 이단적으로 들리지만, 그러나 성령님께서 바울에게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바울은 물론 "우리의 가르침의 목적은 사랑과 함께 하는 진리"라고 쓰거나, 그와 유사하게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종종 선의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진리에 관하여 너무나 관심을 갖는 나머지, 그들의 모든 가르침과 말씀 선포에서 정통 신조가 가장 중요한 사항이 된다. 그들은 회중이 지식으로 무엇을 행할 것인가 보다는 그들이 믿는 바의 세부 사항에 더 관심을 갖는 것 같다. 믿음을 생활 가운데 나타내는 것 보다 신학의 세부항목을 더 중요시한다. 본문에 의하면, 이러한 지도자들은 목적을 잃어버렸다.    

 

이 구절은 신학에서 세부 항목을 다루는 것이 사소하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치는 것이라기보다는 정확한 교리가 좋은 가르침과 말씀 선포의 최종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친다. 사랑이다! 다시 말하건대 정통이 잘못된 목적은 아니지만, 정통만으로는 목적에 도달하기가 부족하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가르침과 말씀 선포의 최종 산물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그분의 명령과 갈망에 대한 경배와 경건한 순종에 의하여 특징 짓는 삶으로 보여진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그분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서서히 채울 것이요 우리는 연민과 배려로 다른 이들을 돌볼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며 우리의 가르침의 목적에 도달하고 있는가?

 

에베소서 4:15-16은 또한 진리와 사랑의 올바른 관계를 말한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머리이시므로, 온몸은 여러 부분이 결합되고 서로 연결되어서, 각 부분이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각 마디로 영양을 공급받고, 그 몸을 자라게 하여,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세우게 합니다." 우리가 만약 이 성경기록을 쓴다면 우리는 16절을 다음과 같이 썼을지 모른다.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진리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그러나 이것은 성령께서 바울에게 쓰게 하신 것이 아니다. 진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자양분을 위하여 필수적이다. 그러나 적절한 몸의 성장은 반드시 동정뿐만이 아니라 대립도 포옹하는 사랑의 관계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선포되고 가르치는 진리의 목적은 지각, 신조, 그 진리를 고수하는 것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제한되고 균형이 잡히지 않은 영적 성장은 올바른 교리가 목적에 도달하는데 수단이 되지 않고 올바른 교리가 목적인 교회를 낳을 것이다. 올바른 것을 믿는 것은 위대한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신조가 주님과 그분의 백성을 위하여 능동적인 사랑을 낳지 못한다면 그 가르침은 목적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진실로 정통인 교리는 능동적인 사랑을 낳는다. 비정통적이거나 균형이 잡히지 않은 가르침과 대조하여, 올바른 가르침은 단지 "논쟁"이나(1:4) "헛된 말다툼"이 아닌(1:6) 사랑을 낳을 것이다. 동일한 요점이 디모데전서 6:3-5에 있다. "온전한 말씀들"(6:3)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건강하고 건전한 교리를 뜻한다. 온전한 말씀들은 경건 - 단지 경건한 믿음뿐만 아니라 경건한 삶 - 을 낳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경건에 의하여 특징지어질 때 사랑의 목적에 도달할 것이다. 건전하지 않은 교리는 몸을 건강하고 흠없이 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시기와 다툼과 욕설과 악한 추측과 삐뚤어진 논쟁을 낳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슬픈 문제점들이 당신의 교회나 교제 모임에서, 또는 당신의 삶에서 나타난다면, 이것은 건전한 교리의 목적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것이다.

 

디모데의 때에 목적에 대한 시선을 잃어버린 교사들은 믿음에 대하여 사소한 것이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들(6:4에 있는 말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질문과 논쟁)을 꼬치꼬치 캘 뿐 아니라 성경을 벗어난 것들(1:4에 있는 우화와 족보)을 강조했다. 오늘날 우리는 동일한 실수를 범할 수 있다. "성경 밖에 있는" 외경과 위전(僞典)(역자 주: 정경에 포함되지 않은 기록들)(고대의 비성경적 기록들)이나 또는 같은 시대의 베스트 셀러 기독교 서적 등에 관하여 가르치고 선포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모하는 것은 강한 인상을 주거나 흥미로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건전한 교리의 목적을 떠난 것이다. "다른 행성에도 도덕적 존재가 있을까?" 라든지 "예수님은 목공소에서 일하시면서 잘못 측정하신 적은 없는가"와 같은 주제의 설교나 세미나로 흥미를 더하는 것은 회중을 잠들지 못하게 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나, 그것은 분명히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의 목적에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다. "록음악에 대한 찬반 양론"또는 "주님의 재림 일자(日字)"와 같은 부차적인 문제에 관한 연속 강의는 보다 많은 관중을 끌 수는 있으나 성경적 가르침의 목적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일상에 실제적으로 적용되지 않는 매일의 음식과 같은 올바른 교리적 가르침조차도 궁극적으로는 목적에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종류의 말씀 선포와 가르침은 단지 논쟁이나 헛된 말다툼(1:6), 시기와 다툼과 욕설과 악한 추측들과 삐뚤어진 논쟁으로 인도할 뿐이다(6:4).

 

건전한 가르침과 말씀 선포의 목적이 되는 사랑은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이요, 선한 양심에서 나오는 사랑이요,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다.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은 불순한 동기가 감추어진 사랑이 아니다.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은 "여기에는 내게 필요한 것이 있는가?", "어떻게 내가 이 책임을 피할 수 있을까?"와 같이 질문하지 않는다.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은 우리가 쫓아야 할 구주와 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계속하여 높이는 가르침을 낳는다.

 

선한 양심에서 나오는 사랑은 의로우며 예수님을 닮은 삶을 실천하는 사랑이다. 선한 양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대부금을 기일 내에 갚으며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하거나 소득세를 속이지 않는다. 성경의 도덕적 표준을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뉘우침과 교정을 가져오며 궁극적으로는 선한 양심에서 나오는 사랑을 가져오는 말씀 선포와 같은 것이다.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은 가면을 쓰지 않는 사랑이다. 그것은 "교회 다니는 척 하거나", 단순히 위선적인 입술로 하나님을 섬기거나, 간혹 무력한 성경적 생활 양식을 살고자 시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온 마음으로 드리는 순수한 신뢰로 특징지어진다.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목적과 사람을 위한 프로그램에 관한 일관된 사역은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을 낳을 것이다.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은 건전한 교리를 가르치고 배울 책임이 있다. 당신은 성장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인가? 기억하라. 성경적인 가르침과 말씀 선포의 목적은 정확한 교리와 올바른 생각보다 뛰어난 것이다. 그것은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이요, 선한 양심에서 나오는 사랑이요,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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