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예수가 유일한 구주이신가?(4:12)(사랑타령에 대한 글)

(그나마 하나님을 믿을 마음이 조금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자기들처럼 생각해서 “하나님이 계시다면 틀림없이 사랑의 하나님이실 거야. 사랑의 하나님이시니까 늘 우리에게 미소를 보내 주실 거야.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 요즘 부모님들처럼 절대 벌주지 않으실 거야. 그냥 다신 그러지 말라고만 하실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에게는 훈계도 공평함에 대한 의식도 공의도 없습니다. 그저 응석을 받아줄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도덕적이고 깨끗하며 단정하고 순결하게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개념은 영화와 연애소설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 자신의 공평함과 거룩함과 의로움까지 희생시키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율법의 하나님이십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D. Martyn Lloyd-Jones)


  예수 밖에는, 다른 어떤 이에게서도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을 이름은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들 가운데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는 달리 없습니다."( 4:12).

 

이 말씀은 참으로 위대하고도 분명한 단언이자 기독교 메시지를 요약하는 문장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교회의 중추에 해당하는 아주 중대한 단언을 만납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표방하는 무언가가 있을 때 그 진정성을 판별하는 기준이 됩니다. 오늘날 세상은 ‘기독교는 무엇인가’에 대해 큰 혼동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세운다 해도 이 시금석에 맞지 않는 것은 가짜입니다. 이 구절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2:20) 곳인데, 터가 바로 이 구절에 기억하기 좋도록 아주 간결하고 쉬운 형태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복음의 유일성을 양보하려는 풍조


사람들은 무엇보다 복음의 배타적인 주장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당신들은 거만하다. 당신들만 옳다고 하고 당신들한테만 하나님의 진리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힌두교나 유교나 이슬람교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왜 당신들 메시지만 진리라고 말하는가? 그런 식의 주장은 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지요. “우리는 인도나 아프리카나 아시아에 선교사를 보내서 ‘들으라, 오직 이것이 진리다’라고 말해선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우리는 가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들도 좋지만 이것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식으로 말해야 한다. 또 ‘비그리스도인’이라는 말도 쓰면 안 된다.” 또 현대 신학자들은 “우리에게는 다른 종교가 제공하는 통찰력과 철학 및 현대 학문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이 합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또 언제가 되었든 어렴풋하게나마 진리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라는 말을 지치지도 않고 계속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이른바 현대적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지식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 입장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은 인격체로서의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것도 믿지 않고 기적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과학적인 사람들이 되었다. 그러니 지적이고 교양 있고 과학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은 생각이 정말 있다면 이 새롭고 현대적인 기독교를 제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주장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 오늘 이 한 구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 구절은 그런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님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로 그분이 그 일을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바를 저는 두 가지 명제로 말하겠습니다.
첫째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베드로가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첫째 가는 위대한 단언입니다. 이 말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 우리 모두는 천성적으로 그 일을 분별해서 볼 눈이 없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사람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명백한 실례가 있었습니다. 그는 앉은뱅이를 고쳐 주었다는 이유로 재판정에 세워졌습니다. 베드로는 당국자들을 향해 요컨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들은 이 연약한 사람에게 착한 일을 했다고 해서 우리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이 사람이 어떤 방법으로 건강해졌는지 알고 싶어합니다. 내가 말해 주겠습니다. 이것은 우리 힘으로 한 일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이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누가 이 일을 했습니까?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4:10).


무엇이 이 사람을 고쳤습니까? 그리스도의 이름이 고쳤습니다. 성경에서 ‘…의 이름으로’라는 것은 ‘…의 권세(power)로’라는 뜻입니다. 당국자들이 물은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4:7). 베드로는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3:6)고 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이 기적을 일으킨 것은 그리스도의 권세”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이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들으라, 구원도 전적으로 그리스도가 하신 일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가 이 모든 일을 하신다.


그리스도가 구원을 주신다는 사실을 이처럼 강조하는 것은 이 부분에 심각한 오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인간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방법을 가르쳐 주는 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그래, 예수는 위대한 스승이었지. 나도 산상수훈을 즐겨 읽는다고. 거기엔 내가 원하는 말들이 나와 있어. 난 그의 윤리적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지.” 사람은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적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게 그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의 말과 극도로 배치되는 생각입니다. 여기 나오는 실례가 그 점을 입증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에게 훈련 과정을 시작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좋아, 친구. 자넨 평생 제 발로 걸어 본 적이 없지만 우리가 고쳐 줄 수 있네. , 우리한테는 이런 치료 과정이 준비되어 있다네. 알겠지만 잘못은 자네한테 있는 걸세. 아예 희망을 잃고 근육을 써 볼 생각도 하지 않았지 않나. 자네 자신이 노력해야 하네. 처음엔 아무 소용없는 짓처럼 보이겠지만 그래도 집중하면서 의지력을 동원해야 한단 말일세. 일단 오른쪽 다리 근육을 움직여 보게. 천천히 발을 들어서 조금씩 움직여 보는 거야. 그 다음엔 왼쪽 다리도 똑같이 해 보게나. 그러면 서서히 회복이 되면서 힘이 붙는 걸 느낄 거고, 마침내 설 수 있게 될 걸세. 우리가 장담하지.”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베드로는 정확히 반대되는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의 치료과정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우리 스스로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완전히 마비되어 있던 사람,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에게 사도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걸었습니다. 그 즉시!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그를 고치셨습니다. 복음의 맨 첫 번째 원칙은 그가 구주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하시러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친히 우리를 위해 그 일을 하러 오셨습니다. 우리 스스로 구원할 방법을 가르쳐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친히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구원은 그분의 일입니다. 그가 그 일을 하셨습니다. 그가 구주십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19:10).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사실은 예수가 교사도, 선생도, 본보기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앉은뱅이의 실례에 나타나고 있듯이 또 베드로가 그 실례를 통해 보여 주고 있듯이 예수가 구주이시라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이것이 첫 번째 명제입니다. 이 명제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애쓰고 있습니까? 스스로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훈련과정을 통해 스스로 선해질 수 있으며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고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이 메시지의 출발점은 예수가 그의 이름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가 치료자시며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그가 하시는 일입니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 아무 힘도 없고 어디에서 힘을 끌어낼 수도 없는 사람에게 지시사항이나 규칙들을 부과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기적입니다. 주님은 그 기적을 행하러 오셨습니다.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두 번째로, 베드로는 주님이야말로 유일한 구주시라고 말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베드로는 두 번이나 강조해 말합니다. 이 두 번째 요점 역시 말할 수 없이 중요합니다. 이미 말했듯 이것은 똑똑한 현대인들이 가장 반대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좋다, 우리는 당신네 기독교에 관심이 있다. 하지만 기독교만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이지 교만하고 편협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그러나 지금부터 보여드리겠지만 이것이야말로 복음 전체가 걸려 있는 주장입니다.


주님 자신이 유일한 구주이심을 계속해서 주장하셨습니다. 그는 서슴지 않고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8:12; 9:5).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주장 가운데 가장 배타적인 주장입니다. 또 그는 “나는 세상의 떡”( 6:35, 48)이라고 하셨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4:6)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참이냐 거짓이냐를 떠나서 이것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 중에 가장 터무니없는 헛소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셨고, 베드로와 요한도 똑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훨씬 더 강력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8).


이것은 오늘날 이른바 ‘치우침 없이 균형 잡힌 지식인들’이 보기에 기막히게 교만한 주장일 뿐 아니라 가장 치열한 공방을 일으키는 주장이니 만큼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들이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우리 복되신 주님께서 왜 친히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함께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 구절뿐 아니라 신약의 다른 부분에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가르침을 살펴보면 현대인들이 어느 지점에서 헤매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또 그들이 왜 복음을 거부하는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앞에 아주 간단명료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길이 보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만 구주시라는 말에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문제의 본질과 깊이를 깨닫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거기에 문제점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각 사람은 왜 늘 불행합니까? 왜 나중에 크게 후회할 일을 합니까? 왜 인생을 살면서 실패를 겪습니까? 세상에는 왜 그렇게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까? 세상은 왜 이런 곤경에 빠져 있습니까? 이것은 중대한 질문들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사람들이 유일한 구주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를 믿지 않는 이유는 문제의 본질과 실체를 전혀, 전혀 이해하지 못한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의 본질과 실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경 전체가 전달하고 있는 큰 메시지입니다. 바로 오늘 베드로의 말에 요약되어 있으며 앉은뱅이를 고친 직후에 했던 설교와 오순절 날의 설교에도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하나님으로부터, 그분의 본질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거기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항상 인간과 인간이 처한 상황에서 출발해 거기에서 끝을 냅니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것들을 제안하지만 성과는 없습니다. 말은 엄청나게 잘하지만 우리를 도와주지는 못합니다. 그들의 말이 하나도 쓸모가 없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하나님을 믿을 마음이 조금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자기들처럼 생각해서 “하나님이 계시다면 틀림없이 사랑의 하나님이실 거야. 사랑의 하나님이시니까 늘 우리에게 미소를 보내 주실 거야.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 요즘 부모님들처럼 절대 벌주지 않으실 거야. 그냥 다신 그러지 말라고만 하실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에게는 훈계도 공평함에 대한 의식도 공의도 없습니다. 그저 응석을 받아줄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도덕적이고 깨끗하며 단정하고 순결하게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사랑은 벌주지 않아. 언제나 용서해 주지. 사랑은 언제나 인자하고 온유하고 오래 참고 견디는 거야.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가게 될 거야.” 그들에게 사랑을 이야기할 때 정의를 들먹이면 안 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개념은 영화와 연애소설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 세상에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므로 하나님은 존재할 리가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이 단순한 이유 때문에 세상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습니다. 주님도 생을 마치실 무렵 친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제사장의 기도를 하시면서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7:25).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의 문제를 이해하고 싶다면 여기에서 출발하십시오. 영원하시며 영존하시는 하나님, 거룩하고 순결하며 의롭고 공평하신 하나님에게서 시작하십시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 자신의 공평함과 거룩함과 의로움까지 희생시키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율법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모세에게 율법을 계시하셨습니다. 십계명은 모세가 날조해 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 네 부모를 공경하라. … 살인하지 말지니라. 간음하지 말지니라.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 20:1~17).


하나님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셨습니다. 우리가 그의 명령을 준행하지 않으면 벌을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어떤 의미에서 택한 백성이 율법을 어겼을 때 그들을 벌하신 기록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 낙원이라고 불리는 곳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면 그를 아는 지식이 자라게 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지만 죄를 지으면 쫓아내겠다고 아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반역하여 죄를 짓자 쫓아내셨습니다.

여기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빛과 어두움을 섞을 수 없습니다. 거룩함과 죄를 섞을 수 없습니다. 영원한 순결함과 더러움을 섞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참으실 수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현대인의 개념은 엉터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악한 마음의 투영물일 뿐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해서 손쉽게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실 수 없습니다. 그는 “빛들의 아버지”십니다.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입니다( 1:17).



인간의 참된 상태에 대한 성경의 교훈


세상은 인간의 상태와 그 결과 야기된 문제 또한 똑같이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아주 선하다고 조상들보다 훨씬 더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이처럼 자신감과 자부심과 확신에 차 있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깨닫지 못한 탓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인간의 참된 상태는 성경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는데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잊어버렸고 그를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해 신성 모독적인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있습니다. 그의 거룩한 계명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죄인들입니다. 자기들도 마음속으로는 그것을 압니다. 양심의 소리가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죄책감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 감정을 억눌러 버립니다.


현대인들은 단순히 죄만 있는 것이 아니라 타락했습니다. 우리 각 사람의 본질은 오염되어 있습니다. 교훈과 교육과 지도와 본보기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은 바로 이 지점에서 완전히 무너져 버립니다. 사람은 단순히 죄를 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좋아합니다. 그들은 죄를 지으면서 반역을 합니다. 우리 복되신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3:19). 사람은 선하지 않습니다. 순수하지 않습니다. 타락했고 오염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두움을 사랑합니다. 어두움을 기뻐합니다. 어두움에서 황홀감을 느낍니다. 사람은 뒤틀리고 왜곡된 피조물입니다.

 
이 모든 것의 결과로 우리는 죄와 마귀, 세상과 육신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정직하게 자신을 대면하기만 하면 명백히 드러나는 사실입니다.

항상 후회하면서도 똑같은 죄를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잘못인 줄 알면서 저지릅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고서 같은 짓을 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가 오염되어 있으며 마귀와 세상과 육신의 압제를 받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우리는 연약하고 무력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7:18, 22~23). 이 외에도 우리에게는 죽음과 무덤에 대한 두려움, 스러지는 생명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무 대비 없이 혼자 버려진 느낌, 길을 잃고 의지할 데 없이 헤매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상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말이 맞다면 그 다음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도 베드로의 말처럼 ‘구원’입니다. 무엇이 필요합니까? 도움이나 조언이나 좋은 본보기나 개선이 아닙니다. 해방입니다. 구원입니다. 인간의 상태에 대한 성경의 진단을 제가 바로 이해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말고 또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말씀드려 줄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까? 나는 나의 잘못과 실망과 불행과 실패를 보게 되었고 오,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분께 말을 걸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데 나는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지만 나는 무가치하고 비천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지만 나는 어두움입니다.


그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내 죄의 사실을 없애는 것입니다. 나는 과거를 무효로 돌릴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의 책에 찍힌 오점들을 지울 수 없습니다.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율법의 정죄를 받고 있으며, 스스로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철학자들은 나를 돕지 못합니다. 그들도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나를 돕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다 실패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나를 도울 수 있습니까?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9:2). 나는 어떻게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습니까? 나는 그 대답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밖에 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내게는 확실히 새로운 본성이 필요합니다. 나는 비교적 상황이 괜찮을 때에도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며 “좀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 좀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와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납니다. 나는 그의 관이나 무덤 곁에 서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아야겠다고 말합니다. 나는 변하기로 결심하지만 내 속에 무언가 잘못된 부분이 있어서 모든 결심이 무위로 돌아가 버립니다.

해마다 1 1일이 되면 새해의 결심을 다지지만 그것도 며칠뿐입니다. 결심이 채 하루를 못 넘기는 해도 있습니다.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지만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나에게는 새로운 본성이 필요합니다
. 문제는 “내가 무엇을 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냐”에 있습니다. , 나 자신을 새롭게 만들 수만 있다면! 그러나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13:23). 그럴 수가 없습니다.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습니다( 1:15). 세상은 “소용없어. 너는 너일 뿐이야. 그냥 참고 사는 수밖에 없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나는 타락하고 왜곡된 본성을 가진 채 방치되어 있습니다. 나는 새로운 본성을 만들어 낼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나에게 새로운 본성을 줄 수가 없습니다. 세상과 육신과 마귀에 저항할 힘이 필요한데 내게는 그럴 힘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십시오


우리는 모두 패배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굴복했습니다. 교묘한 유혹에 넘어가 마귀에게 정복당한 성인들과 교부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우리도 그들과 똑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힘이 필요합니다. 이 무서운 싸움, 도덕적이고 깨끗하고 선한 삶을 살려는 싸움, 가치 있는 삶을 살려는 싸움, 그리하여 두려움과 불안 없이 죽을 수 있는 삶을 살려는 싸움을 싸울 수 있게 해 줄 힘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것이 필요합니다. 조언이나 가르침이나 교훈이나 본보기는 도움을 제공하기는커녕 공을 우리에게로 되돌려 보내 버립니다. 철학자들은 위대한 사람들이지만 그렇다고 자기들의 지각을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선하게 살았던 위대한 사람들의 본보기를 보면서 “저렇게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도덕성을 우리가 그대로 받을 수 있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 한들 죄에 빠진 우리를 도울 수 있습니까?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줄 수가 없습니다.


혹시 동정은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동정하기보다 비판하기가 더 쉬울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어떤 것도 우리에게 나누어 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여러분이 안고 있는 문제 아닙니까? 이것이야말로 교육이나 좋은 책들이나 대학이나 온갖 문화기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온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 아닙니까? 왜 그런 것들이 있는데도 이렇게 곤경에 빠져 있습니까? 답은 오직 하나, 그런 것들은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인간이 안고 있는 문제의 진정한 본질을 여러분이 깨달았다면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이는 오직 한 분뿐이라는 베드로의 말에도 즉시 동의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그는 “내 말을 들으십시오. 오직 한 분밖에 없습니다. 당신들이 거부한 그분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그가 유일한 구주십니다. 그를 믿으십시오. 아무도 일으킬 수 없었던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것처럼 오직 그만이 당신들 영혼을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분만이 내 필요를 채우십니다. 다른 해결책은 없습니다. 이분뿐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십시오. 그가 다 이루셨습니다. 그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지금 믿으십시오. 죄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하며 남은 삶을 완주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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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두려움에 종언을 고한 하나님의 성육신 - 찰스 스펄전 서성필 2012.11.23 3748
15 ♥ 사랑에 기초한 감정 - 조나단 에드워즈 서성필 2012.11.23 4402
14 사랑이 교리와 분리되고 연합이 진리를 거부할 때 - John C. Whitcomb Jr. 서성필 2012.11.23 3611
13 또 다른 요한복음 3장 16절 - H. P. 바커 [5] 서성필 2012.11.23 9362
12 하나님의 침묵(요한복음 3:16) - 로버트 앤더슨 서성필 2012.11.23 4153
11 그리스도의 사랑 - G. 스타인버거 서성필 2012.11.23 3935
10 사랑의 목적 - David R. Reid 서성필 2012.11.23 4369
9 순 종 - 프랭클린 퍼거슨 서성필 2012.11.23 3695
8 성경적 사랑 - David W. Cloud 서성필 2012.11.23 4554
7 무조건적 사랑과 수용 - David Cloud 서성필 2012.11.23 5925
6 인간 관계 갈등 다루기 지도 & Spiritual Transformation - 장이규 서성필 2012.11.23 5763
5 터프 러브(tough love) - 최영기목사 서성필 2012.11.23 4518
4 사랑의 음성: 딱딱한 음식 - 김승배 담임목사 서성필 2012.11.23 4237
3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 이진학 서성필 2012.11.23 3275
2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 M. H. Reynold, Jr. 서성필 2012.11.23 37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