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사고의 중요성(73:16-20)

비록 우리가 기독교인들이며 거듭난 자들이고 우리 자신 안에 성령을 모시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독교와는 전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고방식에 빠져서 그 안에 안주해 버릴 끊임없는 위험 가운데 처하여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새로운 유형의 사고를 지녀야만 합니다. 즉 기독교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영적인 사고를 지녀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기 기독교인이 될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첫 번째 사건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 예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영적으로 생각하게 되자마자 기적과 거듭남과 대속의 교리는 우리에게 더 이상 아무런 문제 거리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영적으로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예전과는 다른 이해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 뵙고 그에 대하여 깊이 명상할 때에 비로소 궁극적으로 우리의 이성적인 수준에서 구출되어 다시금 영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기도를 드릴 수 있기 위해서는 그전에 먼저 영적으로 생각하여야만 합니다. 마치 기도가 항상 즉각적으로 행해질 수 있는 것인 양 기도에 대하여 피상적으로 말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David Martyn Lloyd-Jones 

 

(73:16-20)

16    내가 이 얽힌 문제를 풀어 보려고,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은 내가 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17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8    주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세우시며, 거기에서 넘어져서 멸망에 이르게 하십니다.
19    그들이 갑자기 놀라운 일을 당하고, 공포에 떨면서 자취를 감추며, 마침내 끝장을 맞이합니다.

20    아침이 되어서 일어나면 악몽이 다 사라져 없어지듯이, 주님, 주께서 깨어나실 때에, 그들은 한낱 꿈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집니다 

 

  

우리는 시편 73편을 자세히 고찰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여기서 전번에 고찰해 보았던 것을 다시 요약해 보도록 합시다. 이 시편 속에는 이 시편 기자가 겪었던 체험이 진술되어 있는데, 그는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도다( 나는 그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했구나. 그 믿음을 버리고 미끄러질 뻔했구나.)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무서운 시련을 당하였었습니다. 그러면 그가 당하였던 시련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그 유래가 매우 오랜 것으로써,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 시편 기자는 사악한 자들이 번영을 누리는 것을 보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 그 자신이 매우 큰 역경을 당하고 있는 만면에 하나님을 멸시하는 오만한 자들이 놀랄 만큼 안락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을 보았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멸시하는 오만한 자들이 항상 풍요로움을 누려고 있던 반면에 그는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받았노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처럼 사악한 자들이 아무런 재앙도 당하고 있지 않은 반면에 그 자신이 재앙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였으며 그러한 사실이 강박적으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기까지 그 사실에 대하여 깊이 숙고하기 시작하였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자신의 마음과 행실을 깨끗이 하였던 그의 모든 행위와 노력이 헛된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결론에 거의 도달하였었습니다. 즉 그는 이와 같은 그의 생각을 말로 표현할 지경에 도달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말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말이 거의 미끄러질뻔 하였던 매우 위험한 경사지였습니다. 즉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설한 삶을 사는 것에 무슨 유익이 있는가 모든 풍요로움과 번영은 전적으로 악인들 편에 있는 것으로 보이고 나와 같은 사람들은 끊임없는 재앙과 곤고 가운데 있는 것으로 보이는구나”라고 말할 지경에 처하여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사실에 입각하여 선한 사람은 이러한 자신의 사고를 깊이 숙고해 보고 결국 “참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선을 행하시도다” -이 말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항상 선을 행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기까지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즉 선한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도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안간에 대한 사탄의 유혹이 얼마나 교묘하며 강한가 하는 것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 유혹은 우리의 환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사단은 우리를 유혹할 기회를 포착하여 짐짓 우리의 친구인양 우리에게 찾아와서 “너희의 하나님은 외로우신 하나님인가? 너희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가? ”라고 물음으로써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지난번에 이 시편 기자가 그 무서운 유혹과 시련으로부터 - 즉 하나님께 대한 그의 의혹을 말로 표현하는 무서운 위험으로부터 -어떻게 구출되었는가 하는 것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본문에서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나도 그들처럼 말하면서 살아야지" 하고 말했다면, 나도 주의 백성 가운데 한 사람처럼 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처럼 미끌어지기 쉬운 곳에 - 나는 이 곳을 얼음으로 덮여 있는 산에 비유했었습니다 - 처하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돌연히 확고한 발판을 발견하고 그 위서게 되었으며, 결국 그릇된 것 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에 오히려 “나는 그러한 말을 할 수가 없다. 만일 내가 그러한 말을 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장애물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그가 당연하였던 주요한 문제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는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올바른 것으로 알고 있는 것 위에 굳게 섰으며 그가 선 발판은 그를 미끄러지지 않게 해주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가 우리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 준수해야만 할 몇 가지 긍정적인 원칙들을 추론해 내기도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 우리의 문제와 어려움들은 우리의 삶 속에 빗장이 질러져 있지 않거나 잠겨져 있지 않은 뒷문들이 존재해 있다는 사실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도덕적 문제점들의 대부분은 사람들이 이미 대답이 제시되어 있는 것을 계속적으로 숙고하고 여전히 뒤를 돌아다보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 세상에는 논의할 필요도 없이 명확히 그릇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시편 기자는 바로 이러한 그릇된 원칙에 입각하여 행하였습니다. 나는 이 점에 관하여,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얽어매고 있는 한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을 얼마나 낮은 곳으로 이끌어 내리고 있는가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자기 보다 낮은 수준에 있는 사람들을 멸시하는 바 처음부터 영적으로 우월한 사람이 되고자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확고한 기반 위에서는 것보다 그 곳을 향하여 뻗어있는 사다리의 가장 낮은 계단에 서 있는 편이 더 좋습니다. 여러분들은 바로 그 가장 낮은 계단으로부터 한 걸음씩 위로 올라감으로써 결국 그 꼭대기에 도달해 있는 여러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계속하여 위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편 기자는 그가 서 있는 곳에 결코 그대로 멈추어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가 그곳에 그대로 멈추어 섰더라면 그는 결코 이 시편을 쓸 수 없었을 것이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항상 선을 행하시도다”라고 말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발이 미끄러질 때 여러분들이 해야할 일은 여러분들의 발걸음을 멈추는 것이며, 여러분들은 미끄러지는 여러분의 발길을 멈춤으로써 그곳에서 다시 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편 기자가 행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이 놀랍고도 엄청난 전진을 계속해 나갈 것을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시편 기자는 그의 발판을 찾은 후에도 여전히 매우 불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내가 어찌하면 이를 알까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였더라”( 내가 이 얽힌 문제를 풀어 보려고,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은 내가 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비록 더 이상 미끄러지지는 않았으나 그가 당면하였던 주된 문제점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미끄러지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무서운 생각들을 말로 표현하는 위험에도 더 이상 처하여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자신의 문제점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불행 가운데 있으며 “내게 심히 고통스럽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매우 큰 번민 가운데 있었으며 그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큰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러한 그의 번민과 당혹감은 그가 예전에 느끼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매우 고통스럽고 큰 것이었습니다.

 

나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데,  이는 이점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미끄러지는 발걸음을 멈추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 이것은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의 문제점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 시편 기자는 자신의 문제점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여전히 큰 번민과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더 이상 미끄러지지 않았으나 그가 당면하였던 문제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매우 이해하기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영적인 상태를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이러한 영적인 상태에 처한 적이 있습니까? 나는 여러 번 이러한 상태에 처했었습니다. 그 곳은 우리가 처하기에 매우 이상한 곳이지만 여러 가지 점들에 있어서 매우 놀랍고 멋진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매우 의미 있고 중요한 것을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이곳에 있어서 우리의 원초적인 문제점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고통스러운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이 시편 기자가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바로 그곳에서 있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미끄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계속하여 그 곳을 배회하고 있었으며 큰 번민과 고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저희의 결국을 깨닫게” 될 때까지 이러한 배회와 번민이 계속되었던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이 구절에 대하여 자세히 고찰해 보기 전에 한가지 사실을 명확하게 밝히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 시편의 여러 번역본들을 읽어본다면 여러분들은 그 중 몇몇 번역본들이 이 구절이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비밀을 알기까지 내게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것이었다”라고 번역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즉 몇몇 번역본들은 이 구절이 “내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라는 말 대신에 “내가 하나님의 비밀을 알기까지”라는 말로 번역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이 “하나님의 비밀” 대신에 그대로 “하나님의 성소”로 번역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많은 이유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이유는 시편 제 3권에 있는 모든 시편들이 실재적인 장소를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제 3권의 시편들을 읽어 보십시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 모든 시편들이 각기 실재적이고도 구체적인 성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거의 결정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비물질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간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선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 율법 아래 있던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을 뵙기 위하여 성전에 들어갔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존엄과 영광이 거하는 곳이었습니다.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성소가 구체적인 장소를 의미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의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그는 그가 당면하고 있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큰 불행과 혼란 가운데 처하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소에 들어갔을 때 모든 것들은 그에게 명확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자신이 오르고 있던 사다리의 꼭대기에 도달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항상 선을 행하시도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다시금 그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이 구절들에는 우리들에 대한 매우 중요한 교훈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여기 자신의 발판을 발견하고 다시 위로 오르기 시작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주고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나는 그 첫째 교훈이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의 영적인 사고의 필연성 - 혹은 영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의 중요성 - 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나는 이 점을 보다 자세히 여러분들에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 시편 기자가 지니고 있던 난점은 그가 그 자신의 생각과 이해를 통하여 그의 문제점에 대하여 생각하고 그 문제점에 접근해 나갔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그의 태도가 완전히 그릇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악한 자들의 번영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 특히 그 자신의 - 불행과 고통이라는 커다란 문제점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매우 명확한 것이다. 이 문제는 알기 어렵거나 복잡한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사실은 결국 사실일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실재적인 사실을 제거 할 수 없다. 즉 장식을 지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사실을 그대로 직시하는 것일 뿐인 것이다. 이 문제는 논의할 필요조차 없이 매우 명확한 것으로써 그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약속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만약에 하나님의 약속이 참되고 옳은 것이라면 어떻게 내가 이러한 처지에 빠져 있을 수 있으며 악한 자들이 번영을 누리고 있을 수 있겠는가? ”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릇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었습니다.

 

그는 바로 이처럼 생각하였으며 거듭하여 이러한 생각에 몰입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다 이러한 상태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상태 가운데 배회하며, 여러분 자신을 세속적인 업무나 쾌락에 몰두시킴으로써 그것을 잊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잠자리에 들 때 여러분들은 다시금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하며 “악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는데 나에게는 모든 일이 잘 되지 않는다”라고 한탄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내가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 사실은 매우 명약관화한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 시편 기자는 바로 이러한 입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가 지니고 있던 난점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가 지니고 있던 난점의 본질은 그가 영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생각하였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순수히 이성적인 사고와 영적인 사고의 차이점을 말로 표현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이에 대하여 “그렇다. 나는 기독교적 사고는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항상 말해 오고 있다”라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그릇된 추론입니다. 나는 이성적인 사고와 영적인 사고를 구분함에 있어서 영적인 사고가 비이성적이거나 비합리적인 것이라는 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여기서 내가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이성적인 사고와 영적인 사고가 그 수준에 있어서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성적인 사고는 모든 사고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사고도 역시 이성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고는 그 수준의 차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영적인 사고에는 높은 수준의 것과 낮은 수준의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적인 사고는 어떤 일부분의 사건들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건들에 다 적용됩니다. 나는 이에 대하여 나중에 더 자세히 고찰해 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이와 같이 내가 “이성적인 사고”라는 말과 “영적인 사고”라는 말을 통하여 의미하고 있는 바를 간단하게 밝히는 것으로 일단 이에 대한 고찰을 잠시 멈추고자 합니다.

 

여기서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몇 가지 특별한 사실들을 제시하고자 하는데, 그 첫 번째 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우리의 기독교적 생활에 있어서 마저도 단순히 이성적인 사고에 미끄러져 버릴 계속적인 위험 가운데 처하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미묘한 것입니다. , 비록 우리가 기독교인들이며 거듭난 자들이고 우리 자신 안에 성령을 모시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독교와는 전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고방식에 빠져서 그 안에 안주해 버릴 끊임없는 위험 가운데 처하여 있는 것입니다.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은총을 많이 체험하였던 바 매우 신실하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단순히 이성적인 사고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나는, 우리가 기독교인의 삶 전체가 영적인 것이며 단순히 그 일부분만이 영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워야만 한다고 말함으로써, 이를 보다 명확하게 제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모든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적 삶의 시초가 인생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곧 인정할 것입니다. 나는 이 점에 대하여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서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요. 결국 그는 “세상 사람들아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이 세상의 권세자들은 어찌하여 그가 구세주이심을 알아보지 못하였는가? 라고 묻고 있으며 이에 대하여 “그것은 그들이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이성적인 눈으로만 바라보았습니다. 즉 그들은 바리새인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지 못한 한 사람의 목수만을 보았으며 그에 대하여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일리가 없다”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단순히 이성적인 사고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바로 이 시편 기자가 빠져 있었던 것과 동일한 사고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이 세상의 권세자들과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사고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는 단순히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먹고 마시고 목수 생활을 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평범한 인간에 불과할 뿐이었다. 이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나는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라고 요구  받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릇된 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단지 이성적인 수준에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진화론을 믿고 있으며 “그러한 일들은 진화적 과정 속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한 일들은 전혀 불가능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로 이성적인 사고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중생의 교리에 대하여 말할 때 그들은 “물론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와 같은 기적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자연법칙이 있다. 그러나 당신이 기적에 관하여 말한다면 이는 자연법칙을 깨뜨리는 처사인 것이다. 매튜 아놀드가 말한 바와 같이 ‘기적은 일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기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로 이성적인 사고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다 어떤 사람이든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먼저 이러한 사고를 버려야만 한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새로운 유형의 사고를 지녀야만 합니다. 즉 기독교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영적인 사고를 지녀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기 기독교인이 될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첫 번째 사건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 예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수준에 서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영적으로 생각하게 되자마자 기적과 거듭남과 대속의 교리는 우리에게 더 이상 아무런 문제 거리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영적으로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예전과는 다른 이해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의 방문을 받으셨는데, 니고데모는 밤중에 그리스도께 찾아 와서 “선생님, 나는 당신이 행하신 기적들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선생이심에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행하신 일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 외에는 아우도 행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그러한 일들을 행하신 방법을 내게 알려 주십시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를 보시고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너는 거듭나야만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이 말씀은 실재적으로 다음과 같은 뜻을 지닌 것이었습니다 : “니고데모여. 만약에 네가 이 일이 네게 얼어나기 전에 이 일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는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그러한 방식으로는 결코 기독교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너는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너의 분석적인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너는 그것을 네 자신의 이해력을 통하여 지적으로 파악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너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 비록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일지라도 너는 거듭나야만 한다. 만약에 네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너는 어린아이 같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너는 네가 자연인으로서 지니고 있는 사고력을 의지하지 말고 영적인 새로운 사고의 본질을 안식하여야만 한다. 즉 너는 거듭나야만 하는 것이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이 점에 동의하고 있으며 또한 이 점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기독교인들이 지니고 있는 난점은 바로 그들이 그들 자신이 그 안에서 양육되고 훈련받아 온 바 그들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 맡기고 있는 자연적인 사고방식을 전혀 버리려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생각은 매우 타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우리가 우리의 기독교적 삶의 초기에 있어서 만이 아니라 - 즉 단순히 죄의 용서와 거듭남의 문제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 우리의 삶 전체에 있어서 이성적인 사고를 멈추고 영적인 사고를 지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삶은 단순히 그 일부분이나 그 처음 만이 아니라 그 전체가 다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난점은 이 시편 기자가 지니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삶을 영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특정한 문제점들에 관하여 이성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에 대하여 영적으로 생각하는 대신에 마치 우리가 자연인인 양 다시 이성적인 사고로 돌아가서 그것들을 이성적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나는 종종 커다란 고통과 당혹감 속에 빠져 있는 기독교인들의 이야기를 듣곤 하는데, 나는 그들이 그들의 문제점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때 그들이 지니고 있는 난점이 바로 그들 이 다시 이성적인 수준으로 되돌아갔던 사실에 기안된 것이라는 점을 곧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대한 불만을 느낀다면 그것은 바로 여러분들이 이미 이성적인 수준으로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이성적인 수준에 있게 될 때 여러분은 곧 하나님을 여러분들의 이해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이 시편 기자가 행했던 것입니다. 기독교적 삶의 모든 것을 영적인 관점에서 고찰되어야만 합니다. 기독교적 삶은 그 전체가 다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과 우리 주변에서 얼어나는 모 든 사건들을 영적으로 고찰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를 바꾸어 말하자면 영적인 삶의 모든 문제점들과 어려움들은 모두 다 영적인 것으로써, 우리가 이러한 삶을 시작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문제점들과 어려움들을 영적으로 생각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의 방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특히 더 그러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이 시편 기자가 지니고 있던 문제점이었습니다. 그는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들을 용납하시고 계신가?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번영을 누리고 있는가? 만약에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시라면 어찌하여 그는 사악한 무리들을 이 땅에서 쓸어버리지 않으시는가? 그리고 그가 참된 하나님이실진대 어찌하여. 그는 나에게 이처럼 큰 고통을 주시는가?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지니고 있던 문제점으로써, 그는 하나님의 섭리의 방법을 이해하고자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에 대한 유일한 궁극적인 대답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이사야서 55 8절에 기록되어 있는 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깨달아야만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이 바로 이점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가 나와 나의 방법에 대하여 숙고할 때 너희는 너희들이 익숙해져 있는 낮은 수준에서 나와 나의 방법에 대하여 숙고하지 말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훨씬 더 숭고하고 나의 방법은 너희의 방법보다 훨씬 더 높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들임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이를 어기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여전히 자연인으로서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구원의 문제가 영적으로 고찰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생각함에 있어서 다시 이성적인 사고로 되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의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방법과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의 방법에 대하여 고찰을 시작할 때,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며 하나남의 방법도 우리의 방법과 다르다는 기본적인 원리에 입각하여 우리의 고찰을 시작하여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의 이러한 차이는 바로 하늘과 땅의 차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영적인 체험들을 고찰함에 있어서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나는 이 일을 영적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나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가?

나는 이 점에 있어서 나의 생각이 영적인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나는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라고 물어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는 이에 대한 매우 명확한 한가지 예를 여러분에게 제시하고자 합니다. 나는 기독교인들이 정치적인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게 될 때 영적인 사고에서 완전히 떠나서 이성적인 사고로 되돌아가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들이 정치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될 때 그들은 더 이상 영적인 사람인 것으로 보이지 않게 되고 맙니다. 즉 그들이 정치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눌 때 그들은 자연인이 지니고 있는 모든 편견들과 계급 차별과 세속적인 논쟁으로써 그들 자신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신다면 여러분들은 그들이 영적인 사람들이라는 점을 조금도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구원에 대하여 말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구원에 대하여 영적으로 생각하고 또한  영적으로 이에 대하여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정치에 대하여 말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자연인이 지니고 있는 편견과 모든 것에 대한 세속적인 관점과 이에 대한 오만함을 여지없이 드러낼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뿐인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권면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느 곳에서나 항상 영적인 것이어야만 하며, 이러한 영적인 삶은 결코 단절되지 말아야만 합니다. 즉 기독교인들은 모든 것을 영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관한 스펄전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교회의 역사는 그가 말하였던 것이 너무나도 일반적인 것이라는 점을 입증해 주고 있는데, 스펄전은 그의 제자들에게 “여러분들은 기도 모임에서 참으로 성자 같이 기도하고 또한 일반적으로 위대한 성자 같이 행동하지만 교회 안에서 갑자기 마귀로 변하는 사람들을 보게 될 것  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스펄전의 이러한 말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영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의 업무들을 다루기 시작할 때 그들은 마귀로 변해 버리고 맙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비영적 태도로 교회의 업무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 안에 파당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모든 일들에 대하여 영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첫 번째 원칙은 바로 우리가 항상 영적으로 생각하기를 배워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배우지 않을 경우 우리는 곧 이 시편 기자가 그처럼 생생하게 서술하고 있는 위험과 동일한 위험에 빠져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첫 번째 원칙은 우리를 두 번째 원칙으로 인도해주는데, 이 두 벤째 - 원칙은 순수히 실천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영적인 사고를 촉진시킬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영적으로 생각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그것은 우리들이 가장 크게 필요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편 기자는 이에 대하여 “내가 어찌하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의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나는 이 말이 우리가 우리의 모든 행위와 사고를 영적인 영역 안으로 접어 넣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편 기자에게 이러한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하는 점은 매우 명확하게 나다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모두 그가 겪었던 심리적인 과정을 자세히 고찰해 보도록 합시다.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영적, 성서적 심리학이 - 비록 이것이 흔히 이러한 명칭으로 불리 우고 있지는 않지만 - 있는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그의 모든 행위와 사고를 영적인 영역 안에 접어 넣는 것을 배웠습니까? 나는 이 일이 다음과 같이 일어났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결코 말하지 말아야만 할 것을 말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 때 그는 그의 동료 신자들에 대하여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미끄러지는 발걸음을 멈추어 주었는데, 다행히도 그는 거기에서 멈추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 ! 나는 나의 동료 신자들을 고려해야만 한다. 나는 어디서 그들을 만날 수 있는가? 나는 그들을 항상 성소에서 만나고 있다”라고 생각하였으며, 곧바로 성소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우리도 그가 당면하였던 것과 같은 어려운 문제점에 부딪힐 때 그와 같이 행동하기 쉬운 바와‘같이, 성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가 지니고 있던 난점은 바로 그가 성소를 떠나서 이 세상에서 배회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처럼 성소를 떠나 있을 때 여러분들은 불행하고 비참하게 되며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게 됩니다. 즉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성소를 떠나 있을 때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있기를 싫어하게 되고 여러분 자신만을 생각하게 되며 여러분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하여 하나님께 불만을 품고 이 세상을 배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할 때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을 애처롭게 느끼게 되고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의 핵심은 항상 바로 인간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때 여러분들이 해야할 일은 무엇보다도 먼저 여러분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배회에서 벗어나도록 하십시오 ! 그리고 이성적인 수준에서 방황하기를 멈추고 그 곳에서 벗어나도록 하십시요.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것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세 가지 필수적인 요건들이 있는데, 그 첫 번째 것은 이 시편 기자가 제일 처음에 행하였던 것으로써,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얼마나 아름답고도 복된 곳입니까 ! 여러분들은 종종 단순히 하나님의 집에 들어감으로써 참된 안식과 평안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집에 대하여 하나님께 수없이 많이 감사해 오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집에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서로 친교를 나눌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무한히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영혼의 질병으로부터 나를 수없이 많이 치유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일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나는 이 세상에 우리들이 들어 갈 하나님의 집이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을 말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집은 어떻게 존재케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집을 설계하시고 그것을 만드신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시인하는 것은 곧 여러분들을 보다 더 건전한 상태로 인도해 줍니다. 또한 여러분들이 인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때  여러분들은 몇 가지 특정한 진리들을 안식하게 됩니다. 나는 현재 이 자리에서 매우 두렵고도 고통스러운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회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러한 두렵고도 고통스러운 문제들을 겪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집의 기원은 수세기를 거쳐 우리 주님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 여러분들은 놀랍게도 이미 그곳에 다른 많은 사람들이 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예전에 이미 종교에는 의미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였었던 까닭에 이에 대하여 한층 더 놀라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집에는 하나님과 계속적으로 교제를 나누는 것을 매우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집에 거하면서 여러분 자신이 보다 나아지는 것을 느끼게 되며 “나는 내가 잘못 생각했었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사람들은 분명히 옳은 사람들이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로써 여러분들의 영혼의 질병은 완전히 치유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거기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여러분들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 불 때 여러분들이 당하고 있는 것보다 무한히 더 큰 고통과 불행을 당했던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당면하였던 문제를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그 누구도 그러한 것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집에서 여러분들보다 더 가련하고 비참한 사람들을 - 예를 들면 하나밖에 없는 자녀와 사별한 과부와 같은 사람을 -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실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여러분 자신의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도록 해줍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하여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고전10:l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우리에게 아무도 예전에 이러한 시련을 당한 적이 없노라고 속삭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너희가 당하는 시험들 중에서 다른 사람들이 당하지 않은 시험은 하나도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 사실을 인지한다면 여러분들의 상태는 한층 더 좋아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매우 기이한 피조물들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역시 우리가 당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크게 위안을 받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것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것에 대해서도 참된 것입니다. 여러분들만이 그러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여러분들 자신의 고통을 새롭고도 올바른 시각에서 바라보도록 해줍니다. 즉 여러분들은 수많은 사람들과 동일한 상황에 처하여 있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집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매우 명확하게, 상기시켜 줍니다.

 

또한 그것은 먼 과거의 것들도 여러분들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즉 여러분들이 교회의 역사를 연구하거나 과거의 성자들의 생애에 대한 서적들을 읽을 때 여러분들은 교회의 생명을 가꾸어 온 몇몇 위대한 성자들이 여러분들이 당하고 있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큰 시련과 재앙을 당하였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 즉 하나님의 성소는 이 모든 것들을 여러분들에게 상기시켜 주며, 이때 여러 분들은 곧 바로 다시 여러분들의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하게 되며 여러분들의 문제를 올바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집, 즉 하나님의 성소는 바로 이러한 모든 교훈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집에 참여하기를 무시하는 자들은 비성서적인 자들일 뿐만이 아니라 매우

어리석은 자들이기도 합니다. 나의 목회 경험은 나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즉 하나님의 집에 정기적으로 모이지 않는 사람들은 많은 문제들로 인하여 크게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의 분위기에는 매우 의미 있고 중대한 것이 깃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나기 위하여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법령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볍령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서 서로 만나도록 정해 놓으셨을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러한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보다 더 잘 알도록 정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장차 큰 좌절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질 때 그들은 주님을 만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능한 한 자주 하나님의 성소에 참여하지 않고 또한 하나님의 성소에 참여할 수 없을 때 이를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기독교인은 매우 어리석은 기독교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성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서 영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두 번째 것은 성경입니다.

이 시편 저자의 시대에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은 성경을 지니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과 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서 뿐만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도 성경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어느 곳에서 읽든지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으로 생각하게끔 해줍니다. 또한 성경이 이처럼 우리로 하여금 영적으로 생각하게끔 해주는 방법은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당면해 있는 문제들을 올바르게 처리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경 안에 기록되어 있는 기사들은, 비록 그것들이 매우 단순한 것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말로 다할 수 없이 고귀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 시편을 읽어 보십시요. 이 시편 기자가 겪었던 일들에 대한 기사를 읽는 것은 우리에게 올바른 관점을 부여해 주며 다른 모든 기사들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교훈을 제시해 주시는 유일한 방편은 아닙니다. 성경의 기사들과 그 안에 나타나 있는 큰 교훈들과 교리들을 숙고해 보십시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들을 다시금 상기하게 될 것이며 여러분 자신의 어리석은 생각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계시하시는 방법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그 자신을 계시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은 경건한 자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문제에 대한 명확한 가르침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울은 경건한 자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의혹을 지니고 있던 디모데에게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하였습니다 - 그러나 디모데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들이 박해를 당하는 것을 보고서 크게 두려워하였는데 그 이후로 하나님의 많은 종들도 역시 디모데와 똑같은 생각을 품어 왔습니다. 나는 결코 박해를 받은 적이 없는 경건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핍박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초대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사람은 누구든지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초대 기독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이러한 가르침을 올바로 파악한다면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당하는 고통과 시련에 대하여 조금도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여러분들은 그러한 것들에 대하여 놀라는 대신에 “나에게 이러한 고통과 시련이 없다면 그것은 나에게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어찌하여 모든 일들은 나에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인가? ”라고 자문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모든 분위기는 영적인 것으로써 우리가 성경을 읽을수록 우리는 이성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서 한층 더 높은 영적인 수준으로 고양되며 모든 것을 영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이성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서 영적으로 생각하게끔 해주는 세 번째 것은 기도와 명상으로써,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시편 기자는 단순히 아무런 생각 없이 성소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 뵙기 위하여 그곳에 들어  갔습니다. 성소는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곳이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만나시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 뵙고 그에 대하여 깊이 명상할 때에 비로소 궁극적으로 우리의 이성적인 수준에서 구출되어 다시금 영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아마도 여러분들 중 몇몇 사람들은 내가 명상을 기도보다 먼저 제시한 것에 대하여 다소 이상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오직 한가지 대답만을 지니고 있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어떤 문제에 부딪히든 간에 항상 “그것에 대하여 기도하십시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시편 기자 같은 사람이 그들 중 한 사람에게 찾아갔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가서 그 문제에 대하여 기도하십시오”라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권고는 종종 얼마나 피상적이고 그릇된 것입니까 ! 나는 지금 설교단에서 행해지고 있는 이러한 권고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들은 이에 대하여 “그러면 사람들에게 그들의 문제가 기도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릇된 것이란 말인가? ”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그릇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때때로 그러한 권고는 매우 헛되고 무익한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시편 기자가 지니고 있던 난점이 어떤 의미에서 그가 하나님께 전혀 기도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께 대하여 혼란된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방법에 대하여 혼란된 생각을 지니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과연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할 경우 여러분들은 결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기도를 드릴 수 있기 위해서는 그전에 먼저 영적으로 생각하여야만 합니다. 마치 기도가 항상 즉각적으로 행해질 수 있는 것인 양 기도에 대하여 피상적으로 말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나의 말에 대하여 의혹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도의 위인들 중의 한 사람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하는데, 그는 바로 브리스툴의 조지 뮐러입니다. 조지 뮐러는 목회자들에게 특별히 기도의 문제에 대하여 강의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즉 그는 그가 여러 해 동안 매일 아침마다 제일 먼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었는데 얼마 후에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노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그가 진정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기도를 드릴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성령 가운데 거하고 이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준비시켜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야말로 그에게 가장 크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으며 사람들에게 기도를 하기 전에 먼저 성경과 경건 서적을 읽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준비시킬 것을 매우 강하게 주장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기도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 자신과 그의 영혼을 올바르게 준비시켜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 깨달음은 바로 이 시편 기자가 지녔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합리적인 사고 가운데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사고가 그릇되어 있었던 까닭에 그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다시 영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으며 따라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매우 종종, 우리가 실재적으로 전혀 기도를 도리고 있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우리의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과 태도는 매우 그릇 되어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실재적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하여 그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을 인식하지 않는 한 결코 기도를 시작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고가 올바르지 않는 한 결코 하나님의 현존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할례당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적으로 준비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즉 우리의 사고는 올바르고 영적인 것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계단들을 통하여 - ,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 대한 기도와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를 통하여 - 온전한 곳에 이르게 됩니다. 즉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깨끗이 하고 다른 모든 사고들은 불경스럽고 그릇된 것으로 인식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고 그 곳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걸어나가야 할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 처음 단계에 서 있습니다. 즉 우리의 갈 길은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확고한 발판을 발견할 때 우리는 이러한 단계들을 통하여 결국 온전한 곳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지” 않는 한, 그리고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국 큰 시련과 혼란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영적 감정을 분별하라 - 조나단 에즈워즈 [2] 서성필 2012.11.21 6065
65 영적 감정과 믿음의 의무 - 조나단 에드워드 서성필 2012.11.29 3300
64 영적 감정과 천국 - 조나단 에드워즈 서성필 2012.11.29 2898
63 영적 감정의 실천 - 조나단 에드워드 서성필 2012.11.29 3435
62 영적 감정의 종류 - 조나단 에드워드 서성필 2012.11.29 3436
61 영적 감정의 중요성 - 조나단 에드워드 서성필 2012.11.29 2954
60 영적 감정의 실체 - 조나단 에드워드 서성필 2012.11.29 3490
59 성령의 내주(內住)와 충만(充滿)에 관한 고찰. - 이광호(Ph.D/홍은개혁신학연구원) 서성필 2012.11.23 3067
58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성령) - 로버트 맥체인 (Robert McCheyne, 1813 - 1843) 서성필 2012.11.21 3261
57 ★ 보증 (성령) - 로이드 존스 서성필 2012.11.21 3691
56 성령의 첫 열매(롬8:1-4)(성령) - 존 웨슬리 서성필 2012.11.21 3835
55 ★노예의 영과 아들의 영 (롬8:15)(성령) - 존 웨슬리(1703~1791) [1] 서성필 2012.11.21 3168
54 ★성도의 견인의 의미(성령의 열매) - 존 오웬(John Owen, 1616~1688) [34] 서성필 2012.11.21 4541
53 성령 세례(교회, 유기체) - 어네스트 타담 [12] 서성필 2012.11.21 3743
52 성경이 말씀하시는 부흥 - 알반 더글러스 [1] 서성필 2012.11.21 3548
51 한 본성주의 - 데이빗 던랩 [5] 서성필 2012.11.21 3217
50 율법의 두가지 면을 상고하면서(롬) - C. H. 매킨토쉬 서성필 2012.11.21 2946
49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 있나니(롬) - C. A. Coates 서성필 2012.11.21 2857
» 영적인 사고의 중요성(시73:16-20) - David Martyn Lloyd-Jones 서성필 2012.11.21 2982
47 성령의 열매 16: 선함/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 - 제임스 낙스 [1] 서성필 2012.11.21 4126
46 성령의 열매 15: 믿음/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는 삶 - 제임스 낙스 [3] 서성필 2012.11.21 29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