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열매 16: 선함/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

(이것은 다 하나님의 피조물들과 피조세계로 (creatures and creation) 서로가 서로에게 복을 가져다주고 유익을 끼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물은 식물을 키우고, 식물은 동물에게 자신을 먹이로 제공하고, 동물들도 서로에게 생명을 제공하고, 죽고 나면 다시 식물에게 영양을 공급합니다. 모두가 모두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보시고서 “좋았더라”(good)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피조세계와 피조물들에게 복을 주는 분이신 것처럼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복을 주는 그런 자들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즉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우리로 의로우면서도 동시에 선하게 해 주시는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란 말입니다. 교리에서 올바르고 다른 사람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과 제 안에 계신 이유는 엄청난 위대한 일을 하게 하시고자 함도 아니요, 위대한 설교를 하게 하시고자 함도 아니요, 대형 교회를 세우게 하시고자 함도 아니요, 수많은 사람을 구령하게 하고자 함도 아니요, 다만 그분이 없으면 우리가 결코 할 수 없는 그것을 우리로 할 수 있도록 하시려고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선하게 대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선하게 대하지 않는 사람에게 선하게 대해 주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

 

제임스 낙스

 

 

성령의 열매가 지닌 아홉 가지 특성을 대할 때마다 근본주의를 자처하고 복음주의를 자처하는 그룹들에서조차 이런 것들을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것이 우리 모두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사랑, 기쁨, 화평(평안, 평화, 평강)과 같은 단어들이 진리를 고수하는 대신 타협을 일삼는 자유주의자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여겨지는 현실이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사실 사랑과 기쁨과 화평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더라면, 우리 모두는 영원한 멸망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주에 이에 대해 계속해서 묵상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 자리에 앉아 하나님 노릇을 하고 싶어 합니다. 악한 자들을 심판하고 지옥문을 열어 그 안으로 죄인들을 집어던지는 그런 하나님이 된 것처럼 우리는 자주 그렇게 행동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이처럼 하나님 노릇을 하고 싶어 하는 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사탄이 하나님이 되고자 했기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사랑을 나타내기를 원하시고, 또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반면, 우리는 하나님처럼 되어 이 세상의 악을 심판하고 바로잡고 싶어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기쁨을 표현하기 원하시지만 우리는 이단을 정죄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셔야 할 일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의 내적인 모습에 대해 주님께서는 우리가 본래는(by nature)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씀하시고 마귀에게서 난 자들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말씀하신 대로 육으로 난 것은 육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해 주신 위치에 머물지 않으려고 하는 그 무언가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새사람에게는 동시에 그 자리를 고수하고자 하는 그 무언가가 또한 존재합니다.

 

우리는 지난번 메시지를 통해 오래 참음이란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자들을 대하시는 방식임을 배웠습니다. 또한 우리는 부드러움과 온유함이란 잘못이나 부당한 대우를 참아내고 그로 인해 타격을 입거나 상처를 받지 않고 즉시 은혜로운 모습을 갖출 수 있는 능력임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선함(goodness)”에 대해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이 단어 역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의미와는 사뭇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조그마한 아이에게 “자, 말 잘 들어야지. 그래야 착한(good) 아이지.”라고 말합니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을 착하다고 우리는 생각하지만, 그것은 선하거나 착하기보다는 의로운(righteous) 것입니다.

 

좀 더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만약 그분께서 의롭기만 하시고 선하지 않으시다면, 우리 모두는 아마 굶어 죽든지 죄 가운데 죽거나 지옥에 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기만 하시고 선하지 않으시다면, 우리는 어둠 속에 갇혀 고통을 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므로 의로운 일을 하시지만 동시에 선하시므로 복을 베푸십니다. 아마 여러분과 저도 의로운 사람들로만 가득 찬 교회보다는 착하고 선한 사람들로 가득한 교회를 더 좋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로운 사람들은 옷차림도 단정하고, 말도 점잖으며, 영화도 연극도 안 보고, 술도 안 마시고, 올바른 성경도 사용하는 올바른 사람들이지만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 사람은 못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의로운 삶을 살려고 합니다. 저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죄를 짓지 않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의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실 뿐 아니라 우리로 주 안의 다른 형제, 자매들에게 좋은 사람(선한 사람)이 되어 축복을 가져다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의롭기는 하나 선하지는 못한 사람들로부터 구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잘 믿는 사람들 중에는 율법의 글자만 알지 율법 뒤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영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물론 저도 의로운 사람이 되고 싶고 의로운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저는 선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해병대의 교관은 의로운 사람이면 족합니다. 그가 병사들의 친구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강단에 서서 설교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는 의롭고 진리를 가르칠 뿐 아니라 선한 사람이어야 하고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교회학교(주일학교) 교사나, 나이 드신 자매님들, 나이 드신 형제님들은 올바른 행실은 물론 선한 행실도 당연히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분일뿐만 아니라 선하신 분이라는 것이 너무도 기쁩니다.

 

이 세상에는 참으로 안타까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선함(goodness) 즉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가난한 사람을 돕고, 이웃에게 선하게 대하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처녀 탄생과 신성을 부인하며 엉터리 “성서들”을 사용합니다. 그들에게 선함은 있지만 그들에게 의로움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의로우신 하나님과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로 성령님을 통해 균형을 잡게 해 주셔야만 의로우면서도 선하게 될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근본주의자들처럼 의롭기는 하나 선하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도와주시지 아니하면 그 누구도 균형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도우셔서 저희로 자신을 부인하고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일 없이 우리 자신의 몸을 성령을 통해 죽이도록 하소서. 주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려 우리로 가족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된 사람들과 우리 이웃들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도록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창세기 1 12절을 보십시오.

땅이 풀과 자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자기 종류대로 열매 맺는 나무 곧 열매 속에 씨가 있는 나무를 내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고, 씨를 맺는 식물을 그 종류대로 나게 하고,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를 그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였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여기에 나오는 나무나 씨나 풀은 의롭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죄를 짓지도 않고 깨끗한 삶 또는 더러운 삶을 살지도 않습니다. 이것들은 “옳고 그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 열매, , 나무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들이 복을 가져오고, 도움이 되며 유익이 되는 좋은 것(선한 것)임을 보셨습니다. 주께서 보시니 해, , 별들도 다 좋았다고 하십니다(18). 20, 21절에서는 하늘의 새들, 물 속의 피조물을 다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24, 25절에도 하나님께서 보셨을 때 좋은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만드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떤 분들은 이것을 단순히 진화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먹이사슬 정도로 이해하고, 그것을 생명의 순환이라고 말합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 하나님의 피조물들과 피조세계로 (creatures and creation) 서로가 서로에게 복을 가져다주고 유익을 끼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물은 식물을 키우고, 식물은 동물에게 자신을 먹이로 제공하고, 동물들도 서로에게 생명을 제공하고, 죽고 나면 다시 식물에게 영양을 공급합니다. 모두가 모두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보시고서 “좋았더라”(good)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보시고 “의롭더라”(righteous)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는 피조물들이 그 어떤 계명도 규례도 율법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 18절에 보니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합당한 협력자를 만들리라, 하시니라.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

 

바로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자를 합당한 협력자(help meet)로 만드신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합당한(meet)”이란 단어를 보십시오. 이 단어는 “무엇에 딱 맞는”이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선하지 못하므로 선하게 만들어 줄 무엇인가가 필요했고 이제 그 남자에게 딱 맞는 여자를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결혼 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결혼은 서로가 서로에게 복(blessing)을 가져다주고자 제정하신 것입니다.

누가 가정을 책임지고 누가 속박 아래 놓이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좋지 않은 것(남자가 혼자 있는 것)을 좋게 만들려고 복을 가져오는 것이 결혼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온 몸이… 꼭 맞게 함께(fitly joined together) 결합되고”( 4:16) 여기에 나오는 꼭 맞게(fitly)라는 말은 방금 살펴본 “딱 맞는”(meet), “합당한”(meet)과 같은 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딱 맞는 자들, 즉 축복을 가져오는 자들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피조세계와 피조물들에게 복을 주는 분이신 것처럼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복을 주는 그런 자들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만약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진노와 심판과 규례와 규범에만 근거한 것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랑과 축복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니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분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시니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며 그분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므로 우리는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선하시므로 우리는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서 있는 기초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자신의 수준에 맞는 자, 즉 자신의 거룩한 수준에 맞는 자들과만 관계를 맺으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같은 사람은 그분과 그 어떤 관계도 맺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과 제가 우리와 같은 수준의 사람, 우리의 거룩함에 도달하는 사람과만 관계를 갖고자 한다면 아마 우리는 교회에서나 그 어디에서도 친구를 하나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친구 관계는 의로움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고 선함에 기초한 것입니다. 사람들을 꼭 맞게 결합시켜 주는 것은 각자의 선함(goodness)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선하게 대하면 서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로 단지 의롭기는 하나 선하지 않은 그런 사람들로부터 구출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의로움을 내세우나 선하지는 못한 자들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보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 역시 의로움에 기초하지 않고 선함에 근거해야 함을 보여주십니다.

느헤미야 9 25절을 보십시오.

자손은 요새화된 성채들과 기름진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온갖 좋은 것으로 가득 찬 집과 이미 파 놓은 우물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과 과일이 흐드러지게 열리는 나무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들은 먹고 만족하게 생각했으며, 살이 쪘습니다. 주께서 주신 그 큰 복을 한껏 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끝부분에 주의 큰 선하심(great goodness)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주의 큰 선하심은 어떤 선하심이었을까요? 확인해 보겠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나라를 세우고 주께서 베푸신 큰 복을 누리면서도, 눈 앞에 펼쳐 주신 넓고 기름진 땅에 살면서도, 주를 섬기지도 않고,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과 그 땅이 가져다주는 복을 말하고 원수들에 대해 승리할 수 있게 해 주신 그것을 말합니다. 에베소서 5장을 보십시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선하심과 의로우심 간의 차이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9절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모든 선함과 의와 진리 안에 있느니라.(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와 진실입니다.))

 

9절을 보면 두 가지가 다르다는 것이 확실해 집니다. 우리는 의롭지만 선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의롭지 못하지만 선할 수도 있습니다.

즉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우리로 의로우면서도 동시에 선하게 해 주시는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란 말입니다. 교리에서 올바르고 다른 사람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진리를 사모합니다. 그런데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정말 없습니다. 아무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요.” 혹은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오! 저는 친구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은 제가 하나님 앞에 올바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둘 다 잘못됐습니다. 이 둘 사이의 중간이 존재하고 거기가 바로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올바른 사람인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람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럴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 19장과 전도서 7장 그리고 로마서 3장을 보겠습니다. 만약 바리새인들이 오늘의 메시지를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바리새인들의 관심사는 “의로움”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이 메시지를 들으면 “오, 그래요. 만약 내가 의로운 동시에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맞다면 좋습니다. 저는 선한 사람이 되렵니다.”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명령(계명)에 의해 선한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규례를 정해 놓고 지키겠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지금부터 좀 더 많은 미소를 짓고 조금 더 친절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잘 해 주어야지. 그래야 내가 선한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될 테니까.” 이런 식으로 선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기적인 사람이며 우리는 아담의 후손입니다. 우리는 옛사람 아담을 선한 사람으로 만들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할 수도 없습니다. 비록 아담이 선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손 치더라도 2주일도 못되어 자신의 선한 모습을 인정해 주지 않는 모든 사람을 미워하고 말 것입니다. 선하고자 노력한다는 것 그것은 전혀 먹혀들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9 16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한 사람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오늘 저는 여러분께 아마 이제껏 여러분이 생각지 못했을 그 무엇을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17절부터 예수님의 답변이 나옵니다.

1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한 분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고자 하거든, 계명들을 지켜라."

18    그러자 그는 예수께 "어느 계명들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19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4)'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계명들이 있지 않으냐?

 

20절에 그 청년이 이렇게 답변합니다.

그 청년이 그분께 이르기를, 이 모든 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지켰사오니 아직도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니이까? ( 그 젊은이가 예수께 말하였다. "나는 5)이 모든 것을 다 지켰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이 답변의 내용은 한 마디로 “저는 계명(명령)을 지켰습니다. 저는 의로운 사람입니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1절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고자 하거든,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런데 2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선하지 못함을 입증하고 맙니다. 그는 의로웠습니다. 율법의 명령들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율법을 넘어서서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네가 다른 사람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오! 그럴 수 없습니다. 내 재산은 내 것입니다.”라고 반응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안 계신다고 하셨는데 이 청년은 자신이 선한 사람(좋은 사람)인 줄 알고 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 시험을 하십니다. “간음했느냐?, “아닙니다., “도둑질은?, “안 했습니다., “부모님은 공경하였느냐?, “물론입니다., “좋다. 너는 의로운 자로구나. 그러나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자가 없느니라. 그러니 네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네 자신이 그들에게 복이 되도록 하라.” 결국 청년은 이 말씀에는 순종치 못하고 떠나 버렸습니다.

 

우리는 의로운 사람인 동시에 선한 사람이 되고자 하나 육신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안 마시고, 욕설도 안 하고, 속임수도 안 쓰는 착실한 몰몬교도들을 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지옥에 갑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님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거듭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 안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의롭게 살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없이도 성령님 없이도 얼마든지 의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 없이는 결코 선하게 될 수는 없습니다.

전도서 7장을 보십시오. 20절입니다.

선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은 땅 위에 하나도 없느니라. (좋은 일만 하고, 잘못을 전혀 저지르지 않는 의인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이 말씀을 이해하십니까? 의롭지 못한 것은 죄입니다. 선하지 않은 것도 죄입니다. 예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지옥에 가야 합니다. 오직 은혜로만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어떤 날은 제가 선할 때도 있지만 의롭지 못합니다. 반대로 어떤 날은 의롭기는 한데 선하지는 못합니다. 의로우면서 동시에 선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전도서 7 20절이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세상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3 12절을 보십시오.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하나님 말씀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자기의 선함(goodness)을 선언한다고 합니다.

잠언 20 6절을 보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의 선함을 외치려니와 누가 신실한 사람을 찾을 수 있으리요?( 스스로를 성실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으나, 누가 참으로 믿을 만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느냐?)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는 자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하십니다. 인간의 선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로마서 7 18절을 보십시오. 바울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성령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내 안에(곧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그것을 어떻게 행할는지는 내가 찾지 못하노라.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to will)은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의로운(올바른) 마음 자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행함은 없다고 했습니다. 구원받고 거듭났지만, 여전히 육신적인 영적 아기들이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 보신 적 있습니까? 새사람의 모습을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선한 사람이 되고자 애쓰고 선한 행위를 하려고 애쓰나 늘 결과는 “아니올씨다”입니다. 선하게 사는 것이 마땅하기에 선하게 살려고 결단하는 것은 의로운 결단입니다. 문제는 나에게 동의해 주고 나에게 반응해 주는 사람과는 잘 지내지만 나에게 수군대거나 나의 선함에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우리 자신도 그들을 비판하고 지적하며 때론 정죄를 해 버립니다. 즉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긴 하나 그들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선한 사람은 못 된다는 것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도 옳고 그름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과 악이 무엇인지는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실제 행동은 어떤가요? 하고자 하는 것은 안 하고, 반대로 원하지 않는 그것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대해주시는 그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선하게 대해 주는 그것은 우리 육신 안에 거하지 않는다고 바울의 고백을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아담의 본성과 다릅니다. 그렇다면 그 선함을 누가 행할 수 있을까요? 출애굽기 33 17절과 18절입니다.

17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잘 알고, 또 너에게 은총을 베풀어서, 네가 요청한 이 모든 것을 다 들어 주마."

18    그 때에, 모세가 "저에게 주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그런데 주님의 답변은 어떠했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함을 네 앞에 지나가게 하고 주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할 것이요, 또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풀리라, 하시고 (주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의 모든 영광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할 것이다. 나는 주다.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보여달라는 간청에 선함(goodness)을 보여주시겠노라고 하십니다. 모세는 천지개벽할 만한 기상현상이나 하늘의 징조 같은 것을 염두에 두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 지구에 있는 인간들, 술과 담배에 빠져 있는 인간들, 더러운 영화에 탐닉하는 인간들, 저 욕설과 거짓과 저주를 일삼는 인간들, 시기, 질투가 가득한 인간들, 이들 모두에게 내가 오늘 저녁을 제공하리라. 저 농부들에게도 비를 보내 작물을 수확하게 하리라. 자식을 팽개치고, 쾌락에 빠져 있는 여인네들 내가 그들도 돌보리라. 그들에게도 일자리를 주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곧 그분께서 우리 같은 자들을 선하게 대해 주시는 것, 곧 그분의 선하심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하면 곧바로 하늘, 태양, , 무지개와 같은 것들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런 놀라운 것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내 아이가 굶어 죽는 것을 내버려 두고 내가 죄 가운데 죽도록 방치해서 지옥에 가게 한다면 그런 영광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내 대신 죽게 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렇게 좋으신(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천지창조를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면 우리 같은 죄인에게는 너무도 멀기만 한 분이실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싶다고 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염두에 두셨습니다. 그들은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었고 하늘에서 만나를 받아 먹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들은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항변하고 고집부리며 완악한 마음을 보였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내려 보내셨습니다. “모세야, 네가 내 영광을 보고자 하느냐? 잘 보거라. 나는 좋은 하나님이다. 나는 자격이 없는 백성들에게 선하게 대해 주노라. 복 받을 자격도 없고, 그 축복을 존중하지도 않고 거부하려는 자들에게도 복을 주노라. 나는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들에게도 복을 주노라. 이것이 나의 영광이니라.”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과 제 안에 계신 이유는 엄청난 위대한 일을 하게 하시고자 함도 아니요, 위대한 설교를 하게 하시고자 함도 아니요, 대형 교회를 세우게 하시고자 함도 아니요, 수많은 사람을 구령하게 하고자 함도 아니요, 다만 그분이 없으면 우리가 결코 할 수 없는 그것을 우리로 할 수 있도록 하시려고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선하게 대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선하게 대하지 않는 사람에게 선하게 대해 주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술주정뱅이에게 가서 “이봐요, 술은 나쁜 거야. 마귀의 음료수라고. 결국은 당신을 망치게 하고 지옥으로 보내 버린다고. 정신 차려 이 사람아.” 이렇게 말한다면 당신은 옳은(right) 일을 한 것입니다. 진리를 전파했으나 당신이 그 사람에게 선하지 못하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결코 주님께로 인도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그 자에게 갔고 진리를 선포하였습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안 한 것보다는 나은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2 4절을 보십시오.

더구나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베푸셔서 사람을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하심과 관용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업신여기기까지 한다니, 될 말입니까?

 

이 말씀을 보니 죄인을 진정한 회개로 인도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 입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 저는 저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옥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제발 저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고 저를 하늘로 데려가 주세요.”라고 기도했다면 그것은 참 회개라 할 수 없습니다. 참 회개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에게 너무도 큰 죄책감과 부끄러움이 밀려 왔을 때 “나에게 그처럼 선하게 대해 주신 하나님께 내가 어쩌면 그렇게도 악할 수 있었을까? 나를 그토록 사랑하신 그분을 이제껏 거부해 왔다니… 나를 항상 사랑과 친절로 대해 주신 유일한 존재이신 그분을 멸시하고 거부하고 내 멋대로 살아오다니, 오… 이래서는 안 돼지.”라고 마음 먹었다면 이것은 우리로 진정한 회개를 하게 해서 주님께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받은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을 주님께 인도한 사람들은 여러분들에게 좋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해 주고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고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보여 주었을 때, 그 사람은 여러분에게 좋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인정하고, 너무도 더럽고 추하고 악해서 자신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 같은 자를 어찌 그리 선하게 대해 주실 수 있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행한 모든 ‘소행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좋게 대해 주시다니.” 이런 마음이 곧 우리를 회개하도록 만듭니다. “나같이 이기적이고, 욕심 많고, 자신만 알고, 교만하고, 우쭐대고, 내세우고, 결국 이 모양 이 꼴이 되어버린 나를 그렇게도 사랑하시다니… 오, 하나님.” 이것이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물론 우리는 전도지를 들고 나가 목소리를 높여 복음을 전해야 하고 때를 얻든 못 얻든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자동차 범퍼에도, 티셔츠에도 말씀을 새겨 놓는 것도 말씀을 전파하는 방법입니다. 다 올바른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들은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126:5)

 

여기 보니 눈물을 흘린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선한 마음(good heart)을 가지고 말씀을 전한다는 것입니다.(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여( 4:15)) 다른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올바르지만 선하지 못하거나 선하지만 올바르지 못하면 사람들로부터 반응을 얻어 낼 수 없습니다. 의로움(righteousness)과 선함(goodness)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민수기 10 29절에서 32절을 보시겠습니다.

29    모세가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모세의 장인은 10:29 1:164:11에서는 호밥이고, 2:21에서는 르우엘이고, 18에서는 이드로이다.)에게 청하였다. 그는 모세의 장인이었다. "우리는 이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곳으로 떠납니다. 장인께서도 우리와 같이 길을 떠나 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이스라엘에게 잘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우리가 장인 어른을 잘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30    호밥이 모세에게 말하였다. "나는 가지 못하네. 나는 내 고향 내 친척에게로 가야 하네."
31    모세가 다시 간청하였다. "제발 우리만 버려 두지 마십시오. 우리가 광야 어디에 진을 쳐야 할지, 장인 어른만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장인께서는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 주셔야 합니다.

32    우리와 함께 가시기만 한다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좋은 것은, 무엇이든지 장인 어른께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나서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 미디안 사람인 모세의 장인은 약속의 백성이 아니요, 하나님의 축복과 언약과는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이 미디안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하신 것처럼 자신들도 그들에게 선하게 대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성령을 통해 이와 같은 일을 행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선하신 분이셨습니다. 저는 선하지 못한 자이나 하나님께서 선하게 대해 주신 대로 당신에게 선하게 대하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앞서 인용한 민수기 구절을 잘 살펴보십시오. “참으로 주께서 우리에게 어떤 선한 일을 행하시든지 우리도 당신에게 그렇게 행하리이다.” 이 말씀,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잘못에 대해 긍휼을 베푸십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쁜 행실을 오래 참고 계십니까? 당신이 실족하거나 실패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다 참고 계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입니다. 모세의 발언 요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대해 주시는 그대로 당신을 대하겠습니다. 그러니 저와 함께 가시면 좋으실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그런 교회에 다니고 싶습니다. 저는 제 가족이 사람들이 기뻐할 그런 가족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 또한 사람들이 “제임스 형제는 내 친구입니다.”라고 말하기를 기뻐하게 될 그런 형제가 되고 싶습니다. 모세는 장인에게 “우리와 함께 가면 기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하셔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실 것이고, 우리는 당신에게 그 율법도 보여주고 가르쳐 줄 것이니까요.”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오히려 “당신은 우리와 함께 가시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도 선하신 분이시므로 우리도 당신에게 선한 사람이 되고 돕는 자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편 16 1, 2절을 보십시오.

1    하나님, 나를 지켜 주십시오. 내가 하나님께로 피합니다.

2    나더러 하나님을 말하라면 "하나님은 나의 주님, 주님 밖에는 나의 행복이 없다" 하겠습니다.

 

말씀을 보니 우리의 선함이 하나님에게는 미치지 못합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 전혀 유익을 가져다 드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만약 당신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여 자기 의를 붙들고 있다면 어쩌면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필요로 하신단 말씀이야.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찾아내 우리 마을에 보내셨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 우리 동네는 엉망이 되었을 거야.”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돕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유익을 드리지는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하신 그 선하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선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게 선하시므로 그분께서 내게 주신 그 선하심이 나에게서 이 땅의 여러 성도들에게 퍼져 나갈 수는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으시어 하시고자 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을 다른 사람들에게 더 확장시키기를 원하십니다.

 

호세아 64절을 보십시오.

 

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오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선함은 아침 구름 같고 사라지는 새벽이슬 같나니

 

말씀에 인간의 선함(goodness)이라고 해 봐야 오래 가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고 합니다. 아침 구름이나 새벽 이슬은 잠시 있다가 없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좋은 설교를 들으면 마음의 결단을 내리는 기도를 종종 드립니다. “주님, 오늘 말씀 너무 좋습니다. 앞에 나가 무릎 꿇고 기도드립니다. 주여! 당신께서 저에게 선하라고 명하시니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는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제부터 선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문제는 이런 결심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한 후 몇 시간도 안 돼서 우리의 못된(나쁜, 악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시편 52 1절을 보십시오.

오 강한 자여, 어찌하여 네가 해악(害惡)을 자랑하느냐? 하나님의 선하심은 항상 지속되는도다. (강포한 자야, 너는 어찌하여 악한 일을 자랑하느냐? 너는 어찌하여 경건한 사람에게 저지른 악한 일을 언제나 자랑하느냐?)

여기 보니 우리에게 성령님이 왜 필요한지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내 안에 머물면 오래 동안 지속적으로 선한 모습을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이 옳기 때문에 선해지려고 노력한다면 얼마 안 가 나의 선함은 멈추고 맙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선하심은 지속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필요합니다. 이 선하심은 곧 성령의 열매의 특성 중 하나입니다.

 

세 구절만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5 13, 14절을 먼저 보십시오.

13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

14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 마음에 선함이 가득하고, 온갖 지식이 넘쳐서, 서로 권면할 능력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보십시오. 자유주의자들은 선하긴 하나 옳지 못합니다. 반면 근본주의자들은 옳기는 하나 선하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께서만 우리를 옳으면서 선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이 원하시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로마서 15 13, 14절에 보니 지식에 앞서 선함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결과로 서로가 훈계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제가 당신에게 항상 무엇이 옳은 것인지만을 말한다면 저는 당신에게는 선하지 못한 것이고, 이렇게 되면 당신은 제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서로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관계는 결코 서로를 훈계해 줄 수 있는 좋은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옳기도 하고 선하기도 하다면 쇠(iron)가 쇠(iron)를 날카롭게 한다는 말씀대로 서로 훈계를 해도 관계가 나빠지지 않는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끼리 서로 훈계하고 서로에게 의에 대해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서로에게 선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선하다면 제가 당신의 잘못을 지적하여 바로잡아 주더라도 우리의 관계는 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항상 당신에게 의로운 말만을 해댄다면 우리의 관계는 성립되지 않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을 보십시오.

요즘 논쟁거리 중 하나는 우리가 자식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훈련 교관이 되어야 하는가입니다.

이 역시 우리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옳은 말만 해서는 안 되고 동시에 좋은(선한) 부모가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둘 다 갖추지 못하면 실패하고 맙니다. 좋은 아버지이면서 올바른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 11, 12절을 보십시오.

11    우리는 언제나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하시고, 또 모든 선한 뜻과 믿음의 행위를 그의 능력으로 완성해 주시기를 빕니다.
12    그것은,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 가운데서 영광을 받고,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내용이 여기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시내산에서 나누셨던 대화가 기억나십니까? “영광”에 대한 말씀 말입니다. 여기 보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너희 안에서 영광을 받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십니까?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에서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십니까?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가족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십니까? 그러려면 당신이 올바르게(의롭게) 사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의로운 동시에 선하게 사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축복을 가져다주고 유익을 제공하는 삶을 사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시편 107편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저를 통제하셔서 당신에게 축복이 될 수 있을 만큼 하실 수 있을까요? 반대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충분히 통제하셔서 저에게 축복이 되도록 하실 수 있을까요? 시편 107 9절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사모하는 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혼에게 선하심으로 채워 주시는도다.

 

말씀에 따르면 만약 당신의 마음이 성령께서 당신의 삶에서 열매 맺으시기를 갈망한다면 주께서는 그 갈망을 채워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를지라도 일단 “갈망”(desire)은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서 채우실 수 있습니다. 저는 올바른 사람이 되고 싶고, 올바른 성경을 갖고 올바른 교리로 올바른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사람들을 대할 때도 의롭게 대하며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저를 통해 표현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가 더 나아가 선한 자(착한 사람)가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선하게 만들기 원하십니다. 우리 교회 안의 소년소녀들에게 우리가 “그만 둬라” 하면 그만두고, “하지 마라”고 하면 하지 않고, “하라” 하면 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을 잘 듣는 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선하게 대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올바름()과 선함 두 가지가 합쳐져야 우리 인생에 허락하신 그분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둘 중 하나가 빠지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영광을 얻으시려면 우리는 의로운 사람 이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올바른 동시에 선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우리가 노력해서 될 수 있는 그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수 있는 그 수준만큼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엄위한 말씀에 근거하여 말씀드립니다. 만약 당신이 진정 선한 사람이 되기를 갈망한다면,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축복(blessing)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되기를 갈망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능히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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