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진 휘장(1) - Horatius Bonar

2012.11.20 16:27

서성필 조회 수:3558

찢어진 휘장

1

열린 하나님과의 교제

- Open Intercourse with God -

호라티우스 보나르 () / 김 세창 (옮김)

  

피조물이 창조주와 얼굴을 마주 대하며 아무런 장애물 없이 교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과 보이는 자 사이의 의사소통 방식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청각과 시각과 촉각을 통해 우리와 의사소통을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분 역시 우리의 말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리는 함께 나와서 서로 생각과 애정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시고 우리는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기뻐하시고,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기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수 있으며, 우리도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눈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32:8), 우리도 자녀로서 아버지의 눈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아버지의 얼굴에서 빛나는 모든 인자와 사랑의 광채를 받아, 그분의 자녀로서의 확신과 사랑을 그분께 올려드립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육신의 눈을 가지고 계시거나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시지는 않지만( 10:4), 그분의 방식으로 우리를 향해 시선을 두실 수 있으며, 다정한 친구가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듯이, 실제적으로 그분께서 바라보고 계심을 느낄 수 있게 하십니다. "눈을 지어 주신 분이 보지 않으시겠느냐?"( 94:9). 하나님께서는 몸 안으로 빛을 비추는 기관으로 사람의 눈을 "몸의 광체(光體)"로 만드셔서( 6:22), 그 눈을 통하여 자신의 해와 달과 별들의 광채를 우리 안에 비치게 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본 일도 없고 볼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딤전 6:16), "보이지 아니하시는 왕"이시요(딤전 1:17),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1:15), 그분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고 이름조차 모르는 어떤 내적인 눈을 통하여 자신의 무한한 영광의 광채를 우리 안에 비추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만지실 수도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손을 내밀어 그분을 잡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까이 있는 그 어느 것보다도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계시며,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그 어느 것보다도 가장 쉽게 만질 수 있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마치 그분과 우리가 소유한 필수품처럼,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과의 열려 있고 자유로우며 친밀한 교제는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우리의 어떠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우리와 분리되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분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면, 이 역시 지극히 부자연스럽고 있을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됩니다. 친교와 교제와 상호간의 사랑은 우리에 대한 그분의 어떠하심의 모든 것과 그분에 대한 우리의 어떠함의 모든 것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대로 있는 한, 이러한 모든 것에서 어떠한 장애물이나 어려움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서로 공감하는 마음과 밀물과 썰물처럼 오가며 흐르는 거룩한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께 아무런 방해 없이 나아가는 것은 우리 본성이 필요로 하는 조건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피조물이 지닌 어떤 가치나 공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적합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사물의 특성, 창조하신 분께 대한 순응, 그리고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분리될 수 없는 속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위에 있는 생명과 아래에 있는 생명은 반드시 함께 모여야 합니다. 어떤 것이 끼어 들어서 본성의 필요에 의해 결합된 것을 떼어놓지 않는 한,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은 절대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거리가 생기는 것은 우리의 창조에 속하는 일이 아니라 부자연스러운 것이 끼어 드는 것으로서, 창조된 사랑과는 상반되는 것이며, 우리를 존재케 하는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법칙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뿌리로부터 분리된 나무와 가지에서 꺾인 꽃은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인간을 가장 잘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그러한 분리는 전적으로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래 창조된 상태로부터 생명의 원천이 되는 관계가 단절되거나 공감을 나누지 못하는 것은 작품에 결함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더욱이 위대한 조각가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하여 우리를 만드셔서, 우리 안에서 기뻐하시며, 우리도 그분 안에서 기뻐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속의 몫이 되시고, 우리도 그분의 소유가 되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보배가 되시고, 우리도 그분의 보배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양을 따라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각 부분은 하나님의 각 부분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우리의 애정과 사랑과 감정은 하나님의 것을 모델로 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감정이 없고, 추상적이며, 비현실적인 분으로 생각하고, 우리 자신은 감정을 지닌 인격적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큰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감정을 갖고 계실 뿐 아니라 추상적이지 않고 비인격적이지도 않으신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반대의 시선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람의 본성에 속한 실재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본성에 속한 실재와 비교할 때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무한한 자가 유한한 자를 능가하는 한,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실제라고 부르는 것은 사람 안에서 동일한 용어로 알려진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우리는 그림자들이며, 그분께서 실체(實體)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무한한 실재이시며, 진리이시며, 인격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반드시 이와 같이 이해해야 합니다. 철학이 논하는 하나님은 감정이 없는 추상적인 분으로서, 인간의 생각으로 붙잡을 수 없으며,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할 수 없는 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 곧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 마음의 실재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복을 주시고, 자신에게 가까이 나아와서 자신과 동행하며 교제하라고 명하시는 분은 바로 무한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유한한 마음을 채우시는 분은 무한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을 그분 자신으로 채우시고자 하는 바로 그 목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기쁨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쁨도 그분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 안에서 우리에 대해 안식하고 계시며, 우리에게 자신 안에서 안식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분과 떨어진 피조물은 안정과 복을 상실한 것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과의 자유롭고 열려진 교제는 우리 존재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것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과 그분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바로 피조된 존재의 삶입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우리의 존재를 갖는 한, 하나님을 모르는 것보다는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편이 더 낫습니다. 그분 안에서 기뻐하거나 그분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을 멈추는 것보다는 차라리 무의식(無意識)이나 무() 속으로 사라지는 편이 더 낫습니다.

 

하나님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얻는 것은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넘치는 하나님의 충만이 우리의 상속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함 가운데 그 충만을 누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항상 그 충만이 우리에게로 흐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드릴 때, 항상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뛰어나심에 이끌립니다. 이러한 상호간의 대화는 하늘과 땅 사이의 의사소통을 이루는 매개체를 형성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하나님은 우리를 내려다보십니다. 그리고 서로의 눈이 마주 칠 때,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하심에 참여하는 자가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십니다. 유한한 마음과 무한한 마음이 이렇게 동일한 마음을 교환합니다. 사랑과 사랑이 만나서 함께 섞이고 기뻐합니다. 충만한 존재가 공허한 존재에게 자신을 부어주고, 공허한 존재는 충만한 존재를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교제를 나누는데 있어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조금도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지닌 한 가지 독특한 속성은 피조물이 그 본성에서 제한된 존재이기 때문에, 피조물의 제한성에 맞게 자신을 낮추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나님으로 계셔야 하기에, 인간은 반드시 인간으로 존재해야 하며, 바다는 반드시 바다로 존재해야 하며, 물방울은 반드시 물방울로 존재해야 합니다. 하늘들이 땅을 둘러싸고, 사방을 채우며, 공기가 땅의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듯이, 우리의 제한된 존재를 둘러싸고 계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그분과 완전하고 복된 교제를 누리게 합니다. "모든 생물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사람의 목숨 또한, 모두 그분의 능력 안에 있지 않느냐?"( 12:10). 이것이 바로 그분의 손으로 만드신 피조물들을 향한 하나님의 친밀하심과 친근하심입니다.

 

창조주란 이름이 암시하는 바는 친밀함이지 거리(距離)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다는 이 단순한 사실이 그분께서 우리를 복 주시며 우리와 계속 교제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합니다.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의 교제에는 그러한 창조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손으로 몸소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세우셨으니, 주의 계명을 배울 수 있는 총명도 주십시오"( 119:73). 하나님의 이름이 "신실하신 창조주"이시므로(벧전 4:19), 우리는 그분께 다음과 같이 호소합니다. "주의 손으로 친히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138:8).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것 중에는 무가치하거나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빚으신 "작품"(workmanship)이기에, 그분께서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며,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을 때, 자신과 우리 사이에 어떠한 장벽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그러한 것이 지금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분리는 전적으로 우리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젊은 아들이 집을 떠난 것은 아버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모든 재산을 전부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로 여행을 간" 것은 아들이었습니다( 15:13). 왜냐하면 아들은 아버지의 집과 아버지와의 교제에 싫증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은 하나님 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땅으로부터 등을 돌린 것은 하늘이 아니었습니다. 땅이 하늘로부터 등을 돌린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젊은 아들에게 "내 재물을 가지고 짐을 챙겨 떠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재산 중에서 제게 돌아올 몫을 주소서"라고 요구하고( 15:12), 며칠이 안 되어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을 등지고 먼 나라로 여행을 간 것은 그 아들이었습니다.

 

"오 이스라엘아 네가 네 자신을 파멸시켰도다"(13:9). , 인간이여! 하나님을 버린 것은 그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대를 버리신 적이 없습니다. 그대가 스스로 복되신 창조주와 관계를 끊었으며, 그대가 스스로 그분의 왕좌와 그대를 묶은 사슬을 끊었으며, 그분의 마음과 그대를 묶는 비단 줄을 끊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대가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은혜로우신 계획이 성취되고, 그대가 다시 한번 그분의 사랑 받는 그릇이 되기까지 결코 안식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 Horatius Bonar "Rented Veil"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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