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를 바라본 베드로(14:28~31)(믿음)

(신앙생활을 하면서 의심으로 인해 번민을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신앙의 기초를 다시 검사해보고 자신이 거짓 평안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주제넘은 신앙주의(저는 이렇게 부르고 싶습니다)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해보는 것이 좋으리라는 말입니다.  즉 신앙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D. Martyn Lloyd-Jones)

 

( 14:28-31).

28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하여 말하기를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하니,

29    예수께서 "오너라" 하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
30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자,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에 그는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31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서, 그를 붙잡고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하셨다.



우리가 지금부터 고찰하고자 하는 이 사건은. 누가복음 8장의 사건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요한 점은. 이 사건이 누가복음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의 본질과 성격에, 그리고 믿음에 대한 바른 시각을 가지는 것의 중요성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물론 그러한 주의 집중의 방식은, 여기 마태복음의 본문과 누가복음의 본문이 약간 다를 수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8장에서 우리가 목도한 주요한 문제점은 믿음이 하나의 행위, 즉 무언가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충만한 신성, 독특한 신격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제자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특정 문제에 이 믿음을 집중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마태복음의 본문에서는 문제가 약간 다른 측면으로부터 발생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일반적인 믿음의 참된 성격 문제를 계속해서 고찰하게 될 것입니다.


한편, 절대적으로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하나의 선결 사항에 주목해보지 않고서는 우리의 주된 고찰점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바다의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사건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우리의 눈에 맨 처음 띄는 것은 복되신 우리 주님의 인격(Person), 즉 ‘정체' 인 것입니다. 혹은 개체성이라 해도 좋습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주님은 충만하신 신성, 독특한 신격을 드러내십니다. 바다에 폭풍이 몰아치고 물결이 요동하고 있었지만 주님은 친히 그 파도 위로 걸어오십니다. 또한 주님은 자신의 종. 사도 베드로도 물 위로 걸어 올 수 있게 하십니다. 그리고 역시 주님이 자연의 요소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그것들을 제어하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지 않는다면 믿음의 문제를 고찰할 수 없으며 믿음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에 대해 아무 종류나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를 고찰하기 전 선결되어야 할 필수적 사항은, 복되신 우리 주님의 인격(정체)을 명료히 파악하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자이며 영광의 주님, 곧 주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메시지를 벗어난, 다른 어떤 기독교 의 메시지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 본문에서 우리가 보다시피 주님은 우주의 주관자, 자연 만물의 주인으로서 영광의 광채를 발현하십니다. 주님은 이를 명료히 드러내시고 실례로 보여주십니다. 사복음서의 전체적 목적이 주님의 모습을 그리는 데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이 신성 발로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어떤 형태로든 깨닫지 못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가진 온갖 고민의 원인을 설명해줍니다. 이 사실을 실증하는 것이 우리의 주제를 고찰하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또 한편. 이 사건 기록의 특별목적이 베드로에게 일어난 이 일에 대한 주의를 촉구하는 데 있다는 것도 역시 명백합니다.


우리는 복음서 도처에서 주님의 영광과 신성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개별적 사건은 나름대로의 독특하고 특이한 무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본문의 특별한 점은. 이 사건이 사도 베드로에게 유달리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에서 아주 훌륭하고. 아주 멋지게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곤란에 빠지고 결국 아주 볼썽사납게 끝납니다. 이것은 생생한 그림입니다. 처음에는 믿음이 충만한 듯이 보였던 베드로가 결국에는 필사적으로 부르짖는 비참한 실패자로 끝을 맺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순식간에 일어났습니까!


흔히 알고 있듯이. 갈릴리 바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폭풍이 갑자기 휘몰아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한순간에는 바다가 잔잔하다가도 다음 순간에 돌연히 성난 폭풍이 불어닥치곤 합니다. 본문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도 이 바다에 그런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또한 이 폭풍이 베드로에게도 일어났습니다. 그는 전반적인 태도의 갑작스런 변화를 일으킨 것입니다.


이미 존재하는 폭풍


제가 이 사건을 이해하는 대로라면.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관찰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강조해야 할 점은 이것입니다. 즉 폭풍을 잔잔케 하신 기적과 본문 사건의 큰 차이는, 누가복음 8장의 경우에는 폭풍이 제자들을 당황케 만든 하나의 색다른 요소로 등장한 반면. 여기 이 사건을 겪고 있는 베드로에 관한 한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새로운 것. 색다른 것은 없습니다. 주님이 제자들 근처 혹은 배 근처 어느 곳엔가 오시기 전. 폭풍은 이미 일어나서 격노하고 있었습니다. 배는 바다 한가운데서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었으며 주님은 산허리에서 홀로 기도하고 계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역설해야 할 점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제자들은 주님 없이 배 안에 있었고 폭풍은 날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이 출현하심으로써 이 사건이 발생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베드로가 배 밖으로 걸어 나간 후에 투쟁해야 할 어떤 새로운 요소가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잔잔한 물 위로 걸어 나갔을 때 폭풍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배 근처에 출현하시기 전에 폭풍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대로라면.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누가복음 8장에서 보는 바와 같은 새로운 요소가 여기에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곤란에 빠지고 비참해지며 두려워하고 필사적인 상태로 떨어졌던 것입니다. 의문은 ‘왜 그랬는가? 입니다. 그리고 해답은. 문제가 전적으로 베드로 편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에 관해 정확한 진단을 내리십니다. 문제는 적은 믿음이었습니다
. “믿음이 적은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의심이 들어가도록 만드는 것은 적은 믿음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수많은 중요한 교훈들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배우기만 한다면 수많은 영적 의기소침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맨 먼저 저는 베드로의 심성이라고 묘사할 수밖에 없는 것, 혹 여러분이 원한다면 '베드로적 기질' 이라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여러분의 주의를 촉구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여러 번 강조했듯이
, 사람이 회심하고 구원받고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여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기질은 과거와 똑같이 남아 있습니다. 회심한다고 하여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나’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이렇게 부언할 수 있습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그럼에도 ‘나’는 언제나 동일한 ‘나’입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여러분 자신 그대로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특이한 기질. 나름대로의 특별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는 자신만의 특별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공통적이고 근본적인 일정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자신만의 특별 문제조차도 죄와 아담 타락의 결과라는 일반적 범주에 속합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우리 각자에게 상이한 방식으로, 다양한 형태로 찾아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사실을 숙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각각 동일하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작은 그룹이라 하더라도 그 집단의 구성원들은 모두 다릅니다. 우리는 다. 각자특별하게 예외적으로 주의해야 할 일정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문제들에 전혀 곤란을 겪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자신이 주의해야 할 다른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질이 급한 사람은 그 기질을 매우 면밀하게 감시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점액질적이고 활발하지 못한 사람도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전체적 심성에 있어 지나치게 박력이 없어서 마땅히 일어서야 할 때 일어서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각자는 자신의 특정 문제들을 안고 있으며 그런 문제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신의 특수 기질로부터 일반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폐단


이러한 맥락에서 앞으로 더 나아가. 우리가 가장 크게 주의해야 할 것이 아마도 우리의 장점. 강한 점일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결국 자신의 가장 강한 장점에서 가장 실패하기 쉽습니다. 베드로가 바로 그러하였다고 저는 믿습니다. 베드로의 큰 특징은, 정력과 신속히 결정하는 능력과 적극적인 개성이었습니다. 그는 열정적이고 충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를 끊임없이 곤란으로 인도하는 요소였던 것입니다. 정력적인 천성을 가진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극히 위대한사람들의 성공 비결은 (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제가 그들을 바르게 이해했다면)주로 박력이라는 요소에 의해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지적 능력이나 지혜가 아니라 순전히 정력에 의해서 말입니다. 소위 위인이라는 사람들의 생애를 읽을 때 이 점을 주의해보십시오.


박력은 위대한 특질이고, 그와 함께 일반적으로 병행되는 것은 결정 능력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베드로를 끊임없이 곤란에 빠뜨렸습니다. 이 특질은 종종 불안정한 영적 삶, 균형을 상실한 신앙생활의 원인이 됩니다. 여기 본문이 이에 대한 얼마나 완벽한 실례입니까.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이 사건의 시초에서 주님을 인식합니다. 그는 폭풍의 한가운데서 배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할 만한 충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걸어 나갑니다. 얼마나 멋진 장면입니까!

그러나 다음 순간의 베드로는 두려움 가운데서 부르짖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언제나 이러했던 것이 특징입니다. 주님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버림받을 것인가에 대해 말씀하고 계실 때 베드로는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하지만 곧바로 그는 주님을 모른다며 맹세와 저주로써 주님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베드로적 심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심성은 한결같지 못합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한순간 산 꼭대기에 있다가 다음 순간 깊은 심연으로 내려가고. 곁에 있는 우리 모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느낄 만큼 열정과 흥분이 가득했다가도 기독교적인 삶 자체를 포기할 우려가 있을 만큼 극도로 의기소침해집니다. 여러분은 그런 유형의 사람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어디에 기인하고 있는 것입니까? 황홀함과 비참한 실패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이런 현상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 답은. 기질에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이 가진 병폐는,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경향입니다. 그런 사람의 신앙은 충분한 사고에 근거를 두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의 난점은. 사물을 처음부터 끝까지 꿰뚫어 생각하지 않고 사물을 마지막까지 철저히 궁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단점이었습니다. 복음서들을 보면 베드로는 언제나 맨 먼저 자원해서 나섭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21장의 사건을 보면, 제자들은 밤새 밖에서 고기잡이를 하였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주님이 해안가에 나타나십니다. 요한이
“주시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어부들이 입는 그의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려 주님께로 갔습니다. 그는 매사에 언제나 첫째였습니다. 그것이 그의 폐단이었습니다.

오순절 사건 이후에도, 갈라디아서 2장에서 베드로의 이런 점에 대한 완벽한 사례가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예전과 동일한 충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응당 이신칭의 문제를 철저하게 궁구해 행동으로 완성시켜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했으므로 바울이 그를 책망해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바울 앞에서 변명할 말이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바로, 이방인들을 그리스도의 교회 안으로 맨 먼저 받아들인 장본인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고넬료의 사건을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10장을 읽어보면 베드로가 장엄한 고지에 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유대인이 이방인을 기독교회 안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은 굉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안디옥에서 그런 소신을 끝까지 견지하지 못하였습니다.

야고보로부터 사자들이 내려왔을 때 베드로는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다가 시치미를 뚝 떼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바울은 면전에서 그에게 항의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그의 해묵은 병폐였습니다. 그는 어떤 입장을 받아들이더라도 그 입장에 함축된 모든 의미를 철저히 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이런 유형의 사람에게 변함없이 존재하는 병폐입니다. 이 박력, 이 결단 능력, 이 충동적 추진력이 그런 사람들로 하여금 사태를 아주 철저히 생각하고 이해하고 파악하게 하는 대신 직관적으로 행동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영적인 생활에는 이런 격렬한 기복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적의기 소침의 매우 흔한 원인입니다. 우리가 그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의심에 관한 가르침


이제 제가 강조하고 싶은 두 번째 요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의심에 관한 이 사건의 가르침’ 입니다.
“밀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이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스스로 만들어내는 의심


우리가 여기에서 배우는 첫째 사실은, 우리가 때로 자신의 의심을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베드로의 병폐였던 것을 제외하고 쟁점이 될 만한 것은 없습니다. 베드로는 물결을 바라봄으로써 의심을 생성시켰습니다. 그는 일어날 필요가 없는 난국 속으로 자신을 끌고 갔던 것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베드로야, 조심해라! 네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


그렇습니다.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스스로 물결을 바라봄으로써 의심을 생성시킨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의하십시오. 우리는 종종 스스로를 의기소침한 가운데로 이끌고 갑니다. 피해야 할 무언가를 시험 삼아 해봄으로써 자신을 의심 속에 몰아넣는 것입니다. 모종의 문헌을 살펴본다든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논증 속으로 감히 파고드는 것 따위가 그렇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은 과학에 대해 거의, 혹은 전혀 알지 못하면서 과학에 대한 어떤 주장을 들여다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속으로 돌진해 들어갑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앙이 흔들리게 된 사람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 위에만 굳게 서서 스스로가 다를 역량이 없는 과학적 문제들에 관여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이와 같이 하여 스스로를 의심 속에 몰아넣지 않도록 언제나 주의해야 합니다.


믿음과 양립하는 의심


두 번째 사실은(이것에 대해서도 저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의심이 믿음과 양립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목회 경험을 통해. 이 원리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매우 불행한 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일단 그리스도인이 되면 결코 의심에 의해 공격을 당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의심하는 것을 보니 네게 믿음이 전혀 없구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무지하게도 이렇게 생각하고 말합니다. 이는 매우 잘못된 시각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의심으로 인해 곤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이런 예는 성경뿐만 아니라 그 후의 기독교회 역사에서도 나타납니다.


저는 오해의 위험을 무릅쓰고 심지어 다음과 같은 말까지도 하고 싶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의심으로 인해 번민을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신앙의 기초를 다시 검사해보고 자신이 거짓 평안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주제넘은 신앙주의(저는 이렇게 부르고 싶습니다)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해보는 것이 좋으리라는 말입니다. 일찍이 이 땅을 밟았던 일부 위대한 성인들의 생애를 읽어보십시오. 그들도 의심이라는 강한 습격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여기에서 의심에 관해 결정적인 단언을 하십니다. “의심은 믿음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의심을 가질 수도 있으나 그래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믿음. 연약한 믿음이 있는 것이다.


믿음을 지배하는 의심

 

이를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이것은 의심에 관한 세 번째 원리가 될 것입니다. 만일 다시 의심이 우리를 제어한다면 이것은 믿음이 약하다는 표시입니다. 바로 이런 일이 베드로에게 일어났습니다. 그의 믿음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믿음이 약하였기 때문에 의심이 그를 지배하고 압도하였으며 따라서 그는 흔들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베드로가 공포와 놀람의 상태에 있던 바로 그 순간에 그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면 그는 매 질문마다 정통주의적 답변을 주었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님의 인격에 대해 베드로에게 질문을 했다면 내가 확신하건대 그는 바른 답변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그가 의심에 의해 지배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여전히 존재하였습니다. 따라서 여기 주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의심이 우리를 좌우할 때는 곧 우리의 믿음이 약하다는 암시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의심은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의심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허용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결코 이를 허용하면 안 됩니다.



큰 믿음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의심의 지배를 피할 수 있을까요? 치유제는 ‘큰 믿음’ 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의심의 지배를 받도록 길을 터주는 것은 적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그 해독제는 큰 믿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 본문에서 그 무엇보다도 강조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큰 믿음입니다. 그러면 이 큰 믿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신뢰와 확신으로


첫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권능에 대한 지식 및 그 사실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뢰와 확신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베드로의 출발은 좋았습니다. 이런 출발은 참된 신앙의 본질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폭풍이 노호하는 바다 위에서 그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배 안에 있었습니다. 바다와 바람은 거칠었고 배는 파도에 이리저리 요동하고 있었으며 사태는 거의 절망적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홀연히 주님께서 출현하셨습니다. 그를 보고 제자들은 말합니다. “지금 사람이 물위로 걸어오는 건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건 틀림없이 유령일 것이다!” 그들이 두려워 소리를 지르자 예수께서 곧장 오시며‘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참 신앙의 본질을 멋지게 나타냅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말했습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이 말은 참 신앙의 표시였습니다.


여러분은 베드로의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실상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정말로 주님이시라면 주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음을 저는 압니다. 나에게 명하사, 이 격노하는 바다 위의 배에서 나와, 풍랑 위를 걸을 수 있게 하심으로써 그에 관한 증거를 보여주소서.” 베드로는 주님을 믿었습니다.


주의 권세,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주의 신분, 주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것들을 단지 이론적으로만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시험해보았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주여 만일 주시어든…’ 베드로의 이 말에는 신앙의 본질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 신앙은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로 주님이시라면 주께서 나를 물 위로 걷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명하여 물 위로 걷게 하소서.


그리고 베드로는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언제나 확고부동하게 붙잡지 않으면 안 될 위대한 원리가 있습니다. 기독교신앙은 주님에 대한 지식에서 시작하고 끝납니다. 기독교 신앙은 감정이나 의지의 행위가 아닌 주님의 복되신 인격(신분, 정체)에 대한 지식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감정이 이 지식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다면 그 감정은 전혀 가치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곧 그리스도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그리스도에 대하여 일정한 것들을 믿는 것입니다.
즉 신앙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 인간 가운데 내려오신 영광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고 성육신과 동정녀탄생에 대하여 무언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왜 오셨는지를 아는 것이고 그가 와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아는 것입니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듯이, 주가 오신 것은 의인을 부르기 위함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신앙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데있다.는 주의 말씀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졌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라는 말씀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영적인 의기소침 상태에서 저에게 찾아올 때 거의 변함없이 제가 깨닫게 되는 사실은. 그들이 이상에 열거한 바와 같은 것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우울증의 상태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나는 아주 비참한 죄인입니다. 나의 생활이 지금까지 어떠했는지.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박사님은 모르실 거예요.”그들이 왜 저에게 이런 말을 할까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라는 말씀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자기 정죄에 빠져 말하고 있는 내용 그 자체가 그들로 하여금 주님께 올 수 있 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며, 주께서 확실하게 그들을 받아들이도록 보장하는 것입니다. 주님에 관해 전술한 성경적 사실들을 배우지 못하고 믿지 못할 경우. 신앙은 약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강한 신앙이란, 그런 사실들을 안다는 것을 뜻합니다.


저는 이런 진리들을 끊임없이 말하고 이 진리들에 관해 끊임없이 글을 썼습니다. 언젠가 저는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어떤 사람에게 바로 이 사실, 즉 그리스도가 죄인을 부르러왔다는 사실에 대한 장문의 편지를 보낸 바 있습니다. 그 가련한 사람은 불행감에 빠진 채 속박 상태에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그리스도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이며 그러한 사람들을 위해 죽으러 오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대해, 그 복되신 주님의 사역에 대해 명료하게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신앙은 약하였으며 그 때문에 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구원의 진리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하고 비참한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죄인이라야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자신들의 자기 정죄 자체가 회개의 보증이며 궁극적 해방으로 가는 길임을 발견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영적 우울증의 위대한 치료제는 성경 교리. 기독교 교리에 대한 지식입니다. 치유제는, 어떤 집회 등에서 감정을 고조시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원리를 알며 교리를 알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방법이고 그리스도의 방법이며 또한 사도들의 방법입니다. 영적 의기소침의 치유 수단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지식을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얻었습니다. 여러분은 애써서 그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말씀을 배우는 일은 어려운 것이지만 우리는 이를 공부해야 하고 이 말씀에 전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복을 지나치게 집회에만 의존하는 데에 오늘날의 비극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은 기나긴 세월 동안 기독교의 병폐가 되어왔습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비참에 빠진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그런 사람들의 지식은 결함을 안고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주님을 믿었던 어떤 사람들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도 바로 이런 결함을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8:31-32).

의심이나 두려움으로부터, 영적 의기소침으로부터. 여러분을 낙심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으십시오.
자유케 하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 그리스도의 인격(신분), 그의 사역, 그의 직무, 그리스도 그 자체에 관한 진리가 자유를 줍니다.

의심에의 유혹을 이기기


이제
두 번째 것을 살펴봅시다. 첫 번째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런 올바른 지식과 믿음에서 출발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출발한 후에 두 번째 것을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행히도 베드로는 그것을 망각하고 말았습니다.

이 두 번째 것은 바로, 뒷 궁리 즉 사후의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 하지만 다시 생각해본다는 것은 좋은 일이잖아요”라고 여러분은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한번 믿은 후에 뒷 궁리를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의심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의심이 얼마나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지를 우리가 바로 깨닫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서 출발한 후, 다음 순간 우리가 의심에의 유혹을 받을 때 베드로를 기억하도록 합시다.

그는 절대로 파도를 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왜 그런가요? 베드로는 배 밖으로 나가기 전에 그 문제를 이미 해결했었기 때문입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여러분은 알 것입니다.주님께서 배 가까이 오시기 전에 이미 폭풍이 격노하고 있었다는 그 중요한 사항을 저는 앞에서 누누이 강조하였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잔잔한 바다 위로 뛰어내리고 그 다음 순간에 폭풍이 일어났다고 하면 사정은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만일 그했다면 베드로에게도 변명거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했을 때는 이미 베드로 자신이 파도의 문제를 해결한 상태였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한동안 배 안에서 파도와 투쟁을 벌였었습니다. 그는 배가 가랑잎처럼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주님께 한 말은, 바다가 어떠하든 나는 개의치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바다의 흉용함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이미 해결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배 밖으로 나가 바다위로 걸어갔던 것입니다. 물결은 전혀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파도에 어떤 새로운 요인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모종의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던 것은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그에게 요동하는 파도 위를 걸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왜 파도를 바라보았습니까? 거친 물결을 바라보아야 할 만한 무슨 이유라도 있었던 것인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연약한 신앙에는 언제나 이런 말썽이 일어납니다.
연약한 믿음은, 이미 해결을 보고 답을 얻은 의문으로 다시 되돌아가곤 합니다. 여러분이 현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면. 그렇게 믿게 되기까지 틀림없이 어떤 형태로든 난관을 만나 해결을 보았을 것입니다. 만일해결을 보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신앙에 도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되돌아가야 합니까? 그것은 아주 바보 같은 짓입니다. 그것은 불신앙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행동과 거동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어찌하여 주저앉아. 배 밖으로 나가기 전에 이미 부딪혀 해결을 본 그 곤란한 문제에 다시 직면하려 합니까? 믿음의 이 부정적 측면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저는 거듭 강조하고 싶습니다.


일단 그리스도를 믿었다면 여러분은 일정한 것들에 대해 문을 닫고 그것들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 문제들을 이미 처리했다면 그것들을 다시 뒤돌아보지 마십시오. 우리가 다시 뒤돌아봄으로 인해 곤란거리가 얼마나 빈번히 발생합니까!


베드로는 결코 파도를 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런 변명거리도 없었습니다. 그가 고려해야 할 새로운 요소는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뒷 궁리를 하지 않는 것은 신앙에서 지극히 중요한.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거부하십시오. 예전의 문제에 일체개입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런 문제들에 대해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나는 너를 이미 처리하였다!

끊임없는 전진


이것은 자연스럽게 또 한 가지 신앙의 원리로 이어집니다. 믿음의 다음 특징은, 끈질기고 변함없이 견실하게 그리스도를 앙망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저는 이 원리를 두세 가지 간단한 원리로 세분해 보고자 합니다. 신앙은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친히 시작하신 일을 계속하여 행하실 수 있다. 그 일의 시작은 기적이었다. 주님이 기적적인 일을 개시할 수 있다면 이를 계속하여 견지할 수도 있다. 주님은 이미 시작하신 일을 계속 행하실 수 있다.

또한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1:6)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톱레이디(Toplady)도 말했습니다. “그의 선하심이 시작하신 일을, 그의 강한 팔이 완성하시리라.” 이것은 반박할 수 없는 논증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한 여러분과 저는 결코 의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랫동안 해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그리스도께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행할 수없습니다.


견실하게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우리의 난제들을 바라보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의심을 정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심들에 대해 답변을 얻을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영광을 알면 알수록 그런 의심들은 더욱 우스꽝스러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속하여 착실하게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시초의 믿음에 의존하여 언제까지나 살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해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큰 믿음으로 출발하였으나 믿음을 가지고 계속 전진하는 대신 거기에 안주하려 하였습니다. 여러분 또한 어떤 초기적 믿음만을 의존하여 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회심에 의존하여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상황이 어떠한지도 알지 못한 채 끝장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절정의 경험에 의존하여 살수 없습니다. 날마다 계속하여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걸어가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여러분이 회심하던 그 밤과 마찬가지로 죽어가는 침상에서도 여러분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를 가르치는 사례가 가득 차 있습니다. 가장 완벽한 실례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안식일을 제외하고 매일 만나를 모아야 했던 일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방법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한 달 동안 지낼 만한 양을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매일 신선한 공급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루를 시작하고 그리스도와 계속 접촉하십시오.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베드로의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 외의 다른 것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싸움 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요동하는 물결 위를 걷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계속 그 위를 걸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를 계속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손 내미시는 주님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한 마디 위로의 말을 하기 원합니다. 그 위로는 본문의 사건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결코 여러분을 바다에 가라앉지 않게 하시리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공포와 놀람 가운데 소리를 질렀습니다.“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예수님은 즉시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그리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이런 위안의 사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스도는 여러분을 결코 가라앉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실망시킬 수도 있고, 여러분 자신이 최종적으로 영구히 넘어질 위험에 처해 있다고 느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8:38-39).


그렇습니다. 결코 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상실 당하였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의 손이 여러분을 붙잡을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존 뉴톤(John Newton) 처럼 이렇게 노래하십시오.

지난 시절 주의 사랑을 보오니

주가 마침내 날 버려

재난중에 가라앉게 하시리라고

어찌 상상할 수 있으랴.

때마다의 감격스런 에벤에셀,

나 돌이켜보오니

주의 선한 뜻이 저 끝까지

날 도우실 것, 확실하도다.


절망 가운데 있을 때 부르짖으십시오. 거기에서 넘어지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놀랐다면 부르짖으십시오. 그리스도가 그 소리를 들으시고 여러분을 붙들어 올릴 것입니다.


오늘의 설교를 마치기 전에 한 마디만 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사건 전체의 위대한 교훈은.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넘어지지 않도록 우리를 붙드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하여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기만 하면 우리는 그처럼 부르짖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계속 믿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타락하지 않고 곧바로 계속 나아갈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다면 바다위로 계속 걸어갔을 것이며 결코 그 고통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너무나 크신 분이며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주님 스스로가 바다 위를 걸으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로 하여금 바다 위를 걷도록 만드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는 불가능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이 있다면 그를 바라보면서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처럼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믿음, 강한 믿음은 약속을 본다.

오직 약속만을 바라본다.

그리고 불가능을 비웃으며 외친다.

이루어지리라!

이것이 신앙입니다. ‘믿음, 강한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약속을 본다. 오직 약속만을 바라본다.’ 그 밖의 어떤 것도 바라보지 않습니다. 강한 믿음은 불가능, 즉 이 사나운 파도를 비웃으며 외칩니다. ‘이루어지리라’그러므로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24-25).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2 불신앙의 비극 (행4:8-10) - 마틴 로이드 존스 서성필 2012.11.29 3604
41 불신앙의 불합리성 (행5:17-32) - 마틴 로이드 존스 서성필 2012.11.29 4656
40 그리스도의 최초의 유혹(마4:1) - 존 낙스 서성필 2012.11.23 3156
39 믿음의 충만한 확신 - H.A. 아이언사이드 서성필 2012.11.23 3205
38 너희도 가려느냐(요6:66-69) - 로버트 마케인(1813~1843) 서성필 2012.11.23 3131
37 믿음의 탁월성 - 로스 레인니 서성필 2012.11.23 3411
» 파도를 바라본 베드로(마14:28~31) - 마틴 로이드 존스 서성필 2012.11.23 3875
35 신앙에 의한 의인 (롬4:5)(믿음) - 존 웨슬리 서성필 2012.11.23 2769
34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요14:1) - David Martyn Lloyd-Jones 서성필 2012.11.23 4843
33 천국, 우리의 영원한 본향 - 보이드 니콜슨(J. Boyd Nicholson) 서성필 2012.11.23 3096
32 ★ 하나님의 지혜(조건-믿음) - David Martyn Lloyd-Jones 서성필 2012.11.23 3019
31 불신(마태복음11장 16절∼19절) - David Martyn Lloyd-Jones 서성필 2012.11.23 5864
30 불신앙의 비극(행 4:8-10) - David Martyn Lloyd-Jones 서성필 2012.11.23 3189
29 사막의 샘터(사35:7) - David Martyn Lloyd-Jones 서성필 2012.11.23 3167
28 하나님의 약속(히12:27-29) - David Martyn Lloyd-Jones [3] 서성필 2012.11.23 3385
27 ★불신의 장애물(창26:17-18) - David Martyn Lloyd-Jones [11] 서성필 2012.11.23 3167
26 구원에 대한 확신(거짓 겸손)(벧후1:10) - David Martyn Lloyd-Jones 서성필 2012.11.23 2936
25 ★그리스도를 아는 것 - David Martyn Lloyd-Jones 서성필 2012.11.23 3222
24 하나님의 개입 - David Martyn Lloyd-Jones 서성필 2012.11.23 3336
23 믿음을 위하여 싸움 - Robert Haldane 서성필 2012.11.23 2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