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마태복음11 16절∼19)

(그것은 사람들이 죄의 결과에서 오는 냉담과 무관심과 약물 중독과 같은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불신은 죄의 한 표출이다. 그것은 저 잔혹하고 악질적인 질병의 한 증상이다.불신은 항상 바뀌고 모순됩니다. 우리는 불신이 다음 순간에 무슨 말로 바뀔는지 전혀 예측하지 못합니다.  )

 

  David Martyn Lloyd-Jones

 

 

(마태복음11 16절∼19)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까? 마치 어린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다른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17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애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18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는 귀신이 들렸다' 하고,

19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보아라, 저 사람은 먹기를 탐하는 자요, 포도주를 즐기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한다. 그러나 지혜는 그것이  한 일로(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자녀들로') 그 옳음이 증명된다.

 

본문에서도 우리들은 앞에서 던졌던 똑같은 질문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어째서 우리 주님이 사역하셨던 당신의 대다수가 주님께 대해 거부감을 느끼고 주님을 믿지 않았을까요? 왜 앞장에 나왔던 침노하는 자들과는 달리 절대 다수가 주께서 제공하는 은혜로운 구원을 보지  못하고 받지 못한 것일까요? 주님은 이 주제를 본문에서 다시 거론하십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주님이 육신으로 계셨을 때 제기하셨던 것이지만 현대인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현대인들은 온갖 분쟁과 불행과 혼란과 방종 속에서 하나님을 참되게 알지 못하면서 살아갑니다. 왜 인류는 복음의 메시지를  이 참된 사실을 고려하지 않을까요?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인간들은 복음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당대 인간들이 주님자신을 배척했듯이 현대인들도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복음 속에는 우리들의 모든 질문들과 우리들의 온갖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복음을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는단 말입니까? 이것은 큰 질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앞에서 보았듯이 이 질문에 대한 커다란 답변을 이미 하나 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죄의 결과에서 오는 냉담과 무관심과 약물 중독과 같은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주님을 믿지 않는 유일한 원인은 아닙니다. 주님은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이 세대에 분명 문제가 있다는 말씀인데, 주님은 하나의 유명한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가 장터에 앉아서 친구들을 부르며 다음과 같이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우리는 이 광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세대가 이 장터의 어린이들에 비교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복음을 믿지 않고 복음의 유익을 거절하는  모든 사람들도 이 어린아이들에게 똑같이 비교될 수 있습니다. 주님 당시의 아이들도 요즘 아이들처럼 크고 넓은 곳으로 나가 놀았는데 그 당시의 놀이터는 장터였습니다. 시장이 끝나고 넓은 공간이 비기 때문에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며 일종의 게임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아들과 함께 놀지 않고 따로 서서 바라만 보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함께 놀던 다른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의논하였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자. 그리고 저기 따로 서 있는 아이들을 불러 우리와 함께 게임을 하도록 하자. 그들과 함께 춤추며 즐겁게 놀자.” 그러나 따로 서 있던 아이들은 함께 놀아 주기를 거절했습니다. 놀던 아이들은 다른 제안을 했습니다. “상여 놀이를 하자꾸나. 우리들이 곡을 하는 사람들처럼 울자. 초상집 사람들 같이 검은 빛깔의 옷을 입고 울어보자. 그러면 저 따로 서 있는 아이들이 우리와 함께 놀이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딴 아이들은 상여 놀이에도 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마음이 상해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너희들에게 같이 춤추자고 청해도 듣지 않고, 우리가 너희들에게 상여놀이를 하자고 해도 너희가 원치 않는다. 우리들이 같이 하자고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너희들은 원치 않고 꼭 반대되는 것만 하려고 하는 듯하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꼭 이 어린아이들과 같다. 이 세대의 자녀들, 하나님의 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은 장터에서 놀이를 청하는 아이들처럼 행동한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환언하면 ‘이 세대’는 세례 요한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 같이 즐기며 기뻐합시다.”요한은 대답하였습니다. “회개하고 다가올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피하시오” 그러자 그들은 우리 주님을 보고 말했습니다. “어떤 일들은 심각하게 처리해야 하요. 당신이 절대로 상관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있소.  그런데  당신은 그들과 함께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소 당신은 죄인들과 세리들의 친구요”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너무 즐거워하고 먹는 것과 포도주 마시기를 좋아하는 인물”이라고 평하였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요한과 예수님이 거절하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분이 상하여 복음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 밖에 머물러 있습니다. 의심할 나위 없이 이것이 본 비유를 설명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요한이 그리스도 앞에 왔기 때문에 아무도 요한이 피리를 불면서 사람들을 초대하여 함께 즐기며 춤추자고 제안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즐기기를 원한 자들은 요한이 아니고 사람들이었습니다. 요한은 그들의 제안대로 즐기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같은 사람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그리스도께 다른 요구를 했지만 주님은 거절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나라 밖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관점이며 사고방식입니다. 본 비유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렇게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여기서 불신 상태를 분석하고 계십니다. 본인은 성경 전체에서 불신 상태를 본 비유에서처럼 비난적으로 분석한 곳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 밖에 머물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냉담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불신 상태가 있습니다. 불신 상태에 대해서 우리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첫째.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의 굳어진 사고 형태 내지는 하나의 고착된 정신입니다. 불신은 소극적인 것이 아니고 활동적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불신을 믿지 않으려는 인간의 부정적인 상태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서역은 전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불신은 매우 적극적이고 활동적입니다. 그것은 아주 확정적인 사고형태를 지닌 영원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성경은 불신을 내용적으로 이렇게 묘사합니다. “불신은 죄의 한 표출이다. 그것은 저 잔혹하고 악질적인 질병의 한 증상이다.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4절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습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불신은 매우 무서운 상태입니다. 불신은 단순히 믿기를 거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물론 그런 것이 불신이라면서 우리를 속이려 듭니다. 마귀는 현대 불신자들을 설득시켜서 그들이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은 그들이 지성인들이며 아는 것이 많고 매우 머리가 좋아서 그런 것처럼 오도합니다.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자기들만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신자들은 자기들의 두뇌가 탁월하고 과학적인 지식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장터의 어린아이들과 같다는 것이 주님의 지적입니다. 여러분은 그 아이들의 정신을 유의해서 보았습니까? 그들에게는 언짢은 기분이 있고 매우 적극적인 활동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소극적이지 않습니다. 불신이란 대단히 활동적이라는 것이 성경 전체의 지적입니다.

불신자들은 물론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진단입니다. 불신자들은 사탄에게 속은 자들이며 죄와 악의 노예들이기 때문에 불신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이 성경의 주장입니다. 불신자들은 자신들이 성경의 족쇄로부터 해방되고 복음이라는 마약으로부터 풀려났다고 생각하며 기뻐합니다. 이들은 가련한 인간들입니다! 이들은 노예들임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다른 악덕들의 희생자처럼 자신들이 희생물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이들은 마치 어떤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환자와 같습니다.

이 불신자들은 장터에 앉아 “우리가 어떻게 놀 것과 우리들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자”고 말하는 아이들의 무리와 같습니다. 그들은 언제 피리를 불고 언제 울어야 할지를 스스로 결정합니다. 이것이 불신의 한 특징입니다. 이런 상태에 빠진 자들은 들으려거나 어떤 교훈을 받으려거나 무슨 정보를 얻을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인생에 대한 이론을 가졌다고 가정합니다. 우리에게 정확하게 무엇이 필요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복음 앞에서도 자신들의 요구를 듣고 나옵니다. 이것이  배움의 길을 막는 불신의 태도입니다. 불신자는 양팔을 펴고 나오지 않습니다. 불신자들은 이미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나와서 비판하기를 준비합니다.

이제 솔직하게 우리 자신들에 대해서 말해 보십시오. 우리들은 이 불신의 상태를 너무도 잘 압니다. 우리들은 복음을 불신의 자세로 대한 적이 없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성경을 열린 마음으로 읽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마음이 열려있다고 자주 선전합니다. “저는 마음이 열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편견을 가졌을 뿐입니다.” 그러나 당신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마음이 열린 사람들은 듣기도 전에 일축해 버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나는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라는 자세를 취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열린 사람들은 미리 판정을 결정하지 않고 이렇게 묻습니다. “이 복음이란 무엇일까? 복음의 주장은 무엇일까? 복음이 제공하는 것은 무엇이며 인생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어떤 것으로 줄까?

한 가지 간단한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복음에 대한 우리들의 자세는 열린 마음입니까, 아니면 시장터의 어린아이들과 같은 마음입니까? 우리들은 듣지도 않고서 복음을 안다고 말합니다. 내가 만일 이런 자세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장터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그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피리를 불 것을 결정하였고 자기들이 호곡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자기들 이외에는 누구도 말을 못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아이들이 자기들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가 났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진단에 의하면, 이것은 언제나 불신상태의 첫 번째 증상이며 비극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도무지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불신은 사실을 직시하고 공정하고 편견 없는 조사를 해보지 않은 채 결정을 내리고 결론을 짓습니다.

 

아마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닐런지 모릅니다. 당신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인생의 문제들을 놓고 해결해 보려고 애씁니다. 당신은 도대체 기독교의 복음이 나에게 무슨 해답을 줄 수 있겠느냐고 말할런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복음의 메시지를 들으십시오. 한번 기회를 꼭 주시고 복음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복음이 우리들에게 주는 첫 번째 호소의 하나는 인생과 삶에 대한 우리들의 선입관과 결론들을 열린 마음으로 다시 재고해 보라는 것입니다.

 

불신의 상태의 두 번째 특징은 항상 변하고 모순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당연한 귀결이라고 봅니다. 불신은 사고가 아닌 편견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은 참된 이성에 기초한 것이 아니고 느낌과 충동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불신은 비합리적이며 항상 자신의 위치를 바꾸기 때문에 취급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점을 본 비유에서 그대로 표출시켰습니다. 불신자들은 장터의 어린아이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피리를 불며 춤을 추자”고 말합니다. 그들은 금방 마음을 바꾸고 “상여 놀이를 하며 곡을 하자”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다음 순간에 어떻게 바뀔지 모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불신자들의 정확한 상태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불신자에 대한 예수님의 진단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지성주의가 종교나 인생 문제 해결을 위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 보십시오. 비근한 예로서 알더스 헉슬리가 일으킨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지성주의 운동을 들 수 있습니다. 이 그룹은 자신들을 스스로 지성인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문제가 사람들이 느낌에 따라 살기 때문에 생겼다고 하였습니다. 이 점에서 종교가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그들은 주장하고, 인간의 지성을 추켜들었습니다. 인간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지성이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과거로부터 전승되는 것들을 우리 속에서 모두 제거하고 과학적인 지성주의를 강조하게 됐습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볼륨스버리 세트의 두드러진 특징이었습니다. 1920년대의 많은 똑똑한 젊은이들이 인생의 문제를 이성과 사고로 해결할 수 있다는 이 지성주의에 끌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제 와서 알더스 헉슬리는 말하기를 이 세상의 유일한 희망은 신비주의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문제는 아무 쓸모가 없는 지성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는 지성주의를 사용해 보았지만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새로운 주장에 따르면 이 세상의 유일한 희망은 우주의 배면에 깔린 원시적인 정신에 우리가 몰입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에는 피리를 불었지요. 이제는 상여 노래를 부릅니다.불신은 항상 바뀌고 모순됩니다. 우리는 불신이 다음 순간에 무슨 말로 바뀔는지 전혀 예측하지 못합니다. 지난 백년 동안 불신자들이 내세웠던 인생 문제의 해결책들을 훑어보십시오. 본인의 말이 과장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들에 대한 평가를 아주 완벽하고 정하게 내리셨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지성주의라야 한다고 해놓고서 다음 순간에는 반드시 신비주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불신의 특징입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불신의 자세로 봅니다. 복음 메시지를 여자들이나 어린이들에게나 어울리지 그 속에 무슨 지성이나 이지나 사고가 없다고 사람들은 불평합니다. 그 다음에 하는 말은 전혀 딴판입니다. “저 설교자는 지성을 너무 많이 사용해. 설교에 논쟁이 너무 많아 왜 예화를 좀 사용하고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까?” 이들에게는 복음이 어떤 방식으로 전해지더라도 모두 마땅치 않습니다. 불신의 잣대를 가진 자들에게는  복음 메시지가 항상 언짢게 들릴 뿐입니다.

다른 실례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람들은 기독교의 구원을 선행과 자꾸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런 사람들에게 전할 때 이렇게 말해 보십시오.“당신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구원의 선물을 받으십시오. 복음은 당신이 갑자기 무슨 훌륭한 선행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당신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모욕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어떻게 보는 겁니까? 다 큰 사람을 보고 어린아이같이 되라고하니 나의 인격과 본성에 아주 거슬리는 말입니다.

복음 메시지가 거룩함으로 시작되어도 사람들은 동일한 반응을 보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개인의 죄나 사회의 죄악을 외쳐 보십시오. 혹은 십계명이나 도덕 율법이나 산상 설교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 보십시오. 그들의 반응은 여전합니다. “이것은 도대체  불가능한 종교요. 복음은 너무 폐쇄적이고 좁으며 모욕적입니다.” 피리를 불고 상여 노래를 하는 것은 언제나 모순입니다. 불신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복음이 어떤 형태로 나가도 싫어합니다. 자기들의 마음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열심에 대해서 언급해 보십시오. 인간의 구원이 우리들의 열심에 달린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또 모욕을 받는다고 불쾌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다른 문맥에서 열심을 내어 주를 섬기라고 하면 “우리를 광신도로 만들려는 것입니까?” 라고 항의합니다.

어떤 비종교적인 사람이 제게 찾아와서 자기 옆집에 사는 한 목사님에 대해서 불평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과 같은 동료인 그 목사는 내 영혼에 대해서 내게 한마디도 언급한 일이 없습니다. 마치 내게는 영혼이 없기라도 한 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떠나기가 무섭게 또 한사람이 와서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당신과 같은 직업을 가진 그 목사는 나만 보면 항상 복음과 내 영혼에 대해서만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무슨 말을 하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항상 그릇된 것으로 비쳐집니다. 이 불신의 상태는 고쳐질 줄을 모릅니다.

 

불신 상태의 또 다른 특징은 만족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큰 문제입니다. 불신은 자기 나름의 요구들로 시작됩니다. 그것은 요청하는 것들이 있지만 만족을 찾지 못하고 안식과 화평을 얻지 못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한 주제입니다. 성경은 죄에 빠진 인간의 운명은 난민처럼 지상에서 방황하기만 한다고 증언합니다. 본인은 다음 구절을 아무리 자주 인용해도 지루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하셨느니라”

현대인들은 복음을 비판하고 듣지 않습니다.

현세대는 모든 것을 다 아는 듯이 여깁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그 대답은 현세대가 이 세상에서 평안을 못 찾는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에게는 지적인 만족도 없습니다. 어째서 그 많은 이혼들과 가설들이 끝없이 바뀌고 있습니까? 왜 쓸데없이 탐색만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에 급급합니까? 어째서 각종 종파와 유사 종교에 사람들이 쏠려 다닙니까? 오늘날의 이 세상은 결코 알고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이 세상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남녀 인간들은 인생의 해답이 무엇인지 묻고 있습니다. 이 세대는 그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복음의 길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더구나 불신은 지적 만족도 찾을 수 없듯이 도덕적 만족도 얻지 못합니다. 온갖 쾌락을 추구하는 광적인 이 세상의 불안정을 보십시오. 무슨 안식이 있습니까? 본인은 이것을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인간들의 안식 없는 가련한 모습을 비극의 한 증상으로 지적할 뿐입니다. 어떤 점에서 본인은 이렇게 사는 사람들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한 가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저녁이 되어 가족이 모여 함께 부부와 자녀들이 서로를 바라본다면 무슨 말을 할까요? “앞으로의 전망은 어떤 것일까? 우리 각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사람들은 이 같은 질문에 대해 만족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이런 저런 일들과 생각을 하면서 넘어갑니다. 극장이나 기타 유흥 장소들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라든지 향락을 좇는 광적인 쾌락 추구가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남녀 인간들은 만족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닙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구하는 것을 찾지 못합니다. 이 세상은 극도로 불행합니다. 피리를 불고, 상여 노래를 부릅니다. 처음에는 이것을 해보고 그 다음에는 저것을 해봅니다. 항상 바꾸어 보지만, 자기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찾지 못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불신 속에서 죽는 사람들은 영원토록 계속 그런 상태로 머물게 됩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불신자들이 영원의 시간 속에서도 자기들이 찾을 수 없는 만족을 구하느라고 애쓰게 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 주님은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이 사실을 가르쳤습니다. 본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세상에서 호화를 누렸지만 자기 때문 앞의 나사로라는 가난한 거지를 무시했습니다. 이제 그 부자는 지옥에 있습니다. 거기서 무엇을 할까요? 그의 영혼은 만족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본인이 이 가르침을 이해한 대로는 이것이 지옥입니다.

사람들이 영원토록 만족과 평안을 찾지만 절대로 구하지 못하는 곳이 지옥입니다. 이것은 너무도 끔찍하여 생각하기조차 무섭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입니다. 만족은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아집니다. 불신은 인간들이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 불신의 상태에서는 아주 높은 곳에 닿기도 하고 저 밑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불신자들은 돈도 많이 벌고 영향력도 크게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없는 것이 없이 다 소유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불신 상태에 있는 한 그들은 자기들의 머리와 마음속에 안식과 평안을 절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끝으로 불신의 가장 큰 비극은 영광스러운 진리에 눈멀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신은 최고. 최선의 유익을 차단시킵니다. 장터의 어린아이들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안아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불신이 하는 일이 무엇이지 다시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사람들로 세례 요한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체에 대해서 눈이 멀게 합니다. 사람들은 세례요한을 보고서 말했습니다. “힘을 내시오! 사람이 좀 밝아야 하지 않소? 당신은 여기서 메뚜기와 야생 꿀만 먹고 사는 데 그래서야 어디 쓰겠소. 너무 그렇게 불행한 모습을 보이지 말고 좀 어깨를 펴고 사시오.” 사람들은 요한이 행복하기를 바랐지만 요한이 거절하자 욕질을 했습니다. “그는 귀신이 들렸어. 정신이 나간 사람이야. 그는 회개를 외치는데 광신이야 광신!” 이것이 하나님의 마지막 선지자이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전주자로서 달렸던 전능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대사자를 보고 사람들이 던진 말입니다. , 불신이란 얼마나 괴악한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종을 병신이라고 하고 귀신이 들린 광인이라고 부르게 합니다.

이제 에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과 함께 먹고 교제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그들과 함께 계셨는데도  그분을 ‘이 목수’라고 불렀습니다. 영존하시는 하나님이 사람으로 세상 땅을 밟으시며 능력 있는 기적들을 행하시고 그의 손에 모든 능력들을 쥐고 계셨는데도 사람들은 그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불신은 이 세상이 아는 최대의 은인들에게 등을 돌리게 하는 너무도 사악한 행위입니다.

불신은 동시에 이 은인들의 메시지에도 귀를 먹게 합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의 교리를 설교했습니다. 그가 이 세상에 왔을 때 사람들은 그가 춤을 추고 피리 불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에게 다가올 하나님의 진노에서 피하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이 복음이 맨 먼저 말하는 것은 당신이 웃어 대고 춤을 출 처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세계를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한 당신의 모습을 직시하십시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십시오! 늦기 전에 회개하십시오. 춤을 추면서 당신이 행복한 것처럼 느낄 때가 아닙니다. 당신이 제일 먼저 할 일은 베옷을 입고 재를 쓰고 무릎을 하나님 앞에 꿇는 것입니다. 당시는 자기 죄를 놓고 곡을 하고 애통해야 합니다. 이것이 당신이 귀에 즐겁게 들리든지 않든지 복음의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감사하게도 복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이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위험한 처지에 있으며 또한 그들에게 닥칠 운명이 어떤 것인지를 알면 자신들이 아무 쓸모없는 죄인들임을 느끼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서 어떻게 할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았습니다. 나는 그분이 내게 내리신 모든 자비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무슨 얼굴로 그 분께 돌아가겠습니까? 내게는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다만 애곡할 뿐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면 주님께서 오셔서 “괜찮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에게 베풀었던 일을 우리를 위해 해 주십니다. 복음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의 회개의 촉구가 있고 용서의 제공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구원입니다. 우리들이 천국과 영원한 복락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눈멀게 하여 복음의 메시지를 배척하게 하는 불신은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복음 메시지에 모순이 있다고 말합니다. “절반쯤은 회개하라고 말하고 절반쯤은 기뻐하라고 말하니 완전히 모순입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각자에게 선행되어야 할 것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지적받고서 자기 죄를 확실히 깨닫고 인정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자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눈에 속절없는 죄인이며 아직 그리스도인으로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절대적이시며 영원하십니다.

“의인인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이 아는 최선의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죄와 무가치함을 철저히 인식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일단 죄를 확신하면 주님이 당신에게 평안을 부어주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시고 주님의 기쁨 속으로 들어오라고 초대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과 함께 거룩한 춤을 추시고 당신을 위해 잔치를 벌이며 같이 잡수실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을 받을 수 있으며 죽음과 무덤을 넘어 영원한 세월을 주님과 함께 즐거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위에서 불신에 대한 주님의 분석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불신으로부터 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 밖에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사탄에 의해 눈이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저 추악한 불신의 손아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불신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최대 은인이시며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선물이신 그리스도 사이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우리가 직시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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