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훼방, 용서 받지 못하는 자

자만심 - David Martyn Lloyd-Jones

2012.11.22 12:49

서성필 조회 수:3001

자만심

 

 

David Martyn Lloyd-Jones

 

 

"이에 다섯 사람이 떠나 라이스에 이르러 거기 있는 백성을 본즉 염려 없이 거하여 시돈 사람같이 한가하고 평안하니...." (18:7)

 

사사기 18장에는 그 자체만으로도 숙고할 가치가 있는 구약 성경의 위대한 이야기 중의 하나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내포하고 있는 현대적인 의미에 관해서 저는 상당히 관심이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 관한 정확한 해설과도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거류지를 형성하기 위해서 살고 있던 곳을 떠나 적당한 지역을 찾아 나선 시돈 사람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들이 재촉했던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거류하는 지역(시돈)에 대한 납세나 방어 의무를 피하고 싶었는지, 또는 자기들 땅에 사람이 너무 많이 밀집되는 것을 피하고 싶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본문을 읽노라면, 나는 그들이 적은 노동의 대가로 많은 결실을 얻을 수 있는 땅을 찾고 싶은 욕망, 즉 게으른 정신 상태로 인하여 이주하려 했다고 믿고 싶습니다.

 

어느 정도의 어려움을 겪고 나서 그들은 매우 적합한 장소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그곳에 정착하였습니다. "염려 없이 거하여 시돈 사람같이 한가하고 평안하니"(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땅에는 권세 잡은 자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평화를 사랑하고 또 실제로 평화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누구도 훼방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외부로부터의 있을 법한 공격에 대항하여 자신들을 보호하려는 문제 등에도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첩자들이 그 땅에 나타났는데도 그들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공격한 일도 없었고 들이 타인들의 공격 목표가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시돈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가 또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원래 속했던 집단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온 상태이고 아무 사람과도 상종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고향을 떠난 이래로 그들은 스스로를 완전히 차단시켰습니다. 그들은 친족들과도 교류하지 않았고 그 어느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았음이 틀림없습니다. 전적으로 자급 자족하는 집단으로서 참으로 목가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만약 곤경에 처한 단 지파 사람들이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들은 언제까지나 그런 식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단 지파에서는 영토를 확장시킬 생각으로 적당한 땅을 물색하라고 다섯 명의 정탐꾼들을 파송했습니다. 정탐꾼들이 이 시돈 사람들의 부락으로 들어 왔습니다. 정탐꾼들이 보니 이곳이야말로 자기들이 찾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단 지파로 돌아가서 보고했고 곧 육백 명의 무장 병사들이 파송되어서 아무런 어려움도 없이 완전히 섬멸하고 말았습니다. 시돈 사람들은 다른 지방과 멀리 떨어져 있었고 또한 왕래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도움을 구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순식간에 점령당하고 완전히 패배해서 그 땅은 단 지파의 손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장면을 현대의 보편적 상황에 연결시키고 특별히 신앙적인 상태를 설명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본문을 현대의 다양한 상황에로 연결해 보고 싶기도 하지만 신앙적 상태에 한해서만 고려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근본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적인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형태의 불신앙

 

우리들 모두는 불신앙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쉽게 망각하는 위험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반목이 당연히 특수한 무리들이나 단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취급하는 오류를 언제나 범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지난 세기말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을 감히 비판한다면, 저는 바로 이 점이 그들의 기본적인 실수라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죄를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국한시켰습니다. 그 결과로 특정한 여러 가지 죄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여러 종류의 단체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특정한 죄와 싸우는 동안에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신앙이라는 엄청나고도 심각한 상태에서 고통 당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라는 것을 어떤 종류의 죄악만을 금기하고 절제케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하나의 위험요소로 남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러시아와 같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불신앙이라고 합니다. 독일에서는 경건한 목사들이 정치범수용소에 갇히는 것과 그리스도인들이 종족이나 고대 신화들을 신봉하는 새로운 종교로 개종하라고 회유 당하는 것을 보고는 즉각적으로 불신앙이라고 말합니다. 합리주의 출판 협회(Rationalist Press Association)에서 발간된 문서들을 읽으면 그것들이 하나님을 대항하는 불신앙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제가 시돈 사람 형태라고 부르고자 하는 또 다른 형태의 불신앙과 불경건에 대해서는 거의 의식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와 그리고 다른 외국의 수많은 사람들은, 신앙 영역에서 시돈 사람들이 나타나는 형태와 거의 비슷한 양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믿음 있는 환경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들은 어린 시절에 성경과 성경의 진리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배웠으며, 그들은 나사렛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기적적인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배웠고, 또한 그들이 어떤 종류의 생활을 살아 내고 어떤 종류의 일들은 피하며 또 어떤 종류의 일들은 해도 된다고 배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지난 세기말까지는 신앙이 대중적인 것이었습니다. 예배하는 장소는 대체로 나라 전체에 편만해 있었습니다. 분명히 종교적인 전통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요. 시돈의 무리들과 같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외관상의 신앙 생활에 젖어 있는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된 신앙의 삶을 떠나 유리하며, 자기 자신들만의 옹졸한 삶을 형성하며, 자기 자신들의 사상을 따라서 전적으로 자신들이 계획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요. 그들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은 더 이상 지고의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은 모든 의도와 목적은 불신앙적입니다. 기독교는 그들의 삶에 외관상 드러나는 습관에 불과하지 중심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에 따라서 자신들만의 삶을 영위해 왔습니다.

 

현대의 시돈 사람들

 

현대적인 시돈 사람들이 종교나 하나님을 언어로써 비판하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자기들이 속해있던 곳을 비난하는 케케묵은 시돈 사람들을 찾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고향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이나 글로써 종교를 비난한다면 우리는 그가 하나님을 적대하고 종교를 적대하는 사람이라고 분명히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인식에 대해서 민감하지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마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시는 분인 것처럼 생각하고 생활해 나갑니다. 이것은 종교를 반대하는 적극적인 발언이나 행동, 결사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이야기의 신앙적인 적용은 이야기 자체보다 좀 더 미묘합니다. 성경에서 시돈 사람들은 실제로 고향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신앙적으로 적용하여, 이들이 더 이상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예배에 참석했지만 실제적인 시련에 맞닥뜨렸을 때 불경건하고 불신앙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의 중심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생애가 하나님의 명령과 거룩한 율법에 기초하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사기의 시돈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겉으로만 본다면 그들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점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매력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웃과 분쟁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겐 지도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가만히 내버려두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와 비교해 보건대, 현대의 시돈 사람들은 개론적으로만 보자면 신앙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 신앙이 그들의 일상적인 생활에 개입하고 죄를 지적하며 십자가를 지라고 호소하는 것을 싫어할 뿐입니다. 그들이 정말로 바라는 것은 자기들 마음대로 살아가도록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무관심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겠습니까? 제가 무엇보다도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들의 삶은 극도로 이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시돈 사람들에게도 이 면이 두드러집니다. 그들은 다른 지역에 정착하려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도 전혀 교류가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들 방식대로만 살아가고자 합니다. 이것이 반드시 이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이기주의를 언제나 공격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기심에는 능동적인 면뿐 아니라 수동적인 면도 있습니다. 이기주의자라고 항상 타인의 것을 탐내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기주의는 다른 사람의 필요에 무관심 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 만연해 있는 소름끼치는 모습들이 아닙니까? 국제적으로도 이러한 양상이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만 괜찮다면 다른 나라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상관없습니다."라는 태도를 대부분의 국가들이 취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자신들의 삶만 꾸려갑시다. 다른 국가들로부터 격리됩시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버텨 나갑시다"라고 하는 가공할 민족주의가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계 전쟁을 겪은 이후에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큰 고민거리가 이것이 아닙니까?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을 들어보십시오. 사람들은 최소한의 일을 하고 최대한으로 즐기고 누렸던 '멋진 시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의무와 명예, 책임에 대해 논쟁하기란 얼마나 힘든지요.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을 추구하기에 전력을 다합니다. 모두가 편하고 안일하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자기만의 삶을 영위하고, "삶에 안주하라"는 말이 일반적인 말이 되어 왔습니다. 각자는 자기 이익만을 위하여 삽니다. 폭넓은 관계성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만의 좁은 테두리 안에서 우리 자신만의 삶을 살고자 하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 근본 원인이 무엇입니까?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제가 이미 제시했던 바와 같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을 통털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동떨어진 채 우리 멋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 스스로는 아무 것도 소유해선 안 되고, 단지 우리는 청지기이며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성경은 사람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의 살 주변에 울타리를 치라고 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아가서 그의 능욕을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그리고 하나님의 지배 아래에서 사는 비이기적인 삶 말입니다.

 

여러분은 위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들의 비이기적인,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위대한 덕목을 발견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전쟁 이후로 우리는 그런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르침은 우리를 귀찮게 했습니다. 우리는 삶에 안주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격리와 하나님 명령으로부터의 격리가 우리를 이기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위대한 성인들 중의 한 사람과 전형적인 현대인을 그들의 삶의 방식과 인생관에 비추어 비교해 보십시오.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제한적인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과, 자기를 거절하는 세상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온전히 내어 주신 나사렛 예수의 삶과 비교해 보십시오. ,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 인간적인 영역 안에서 혼자 살아보려고 애쓰는 불신앙적인 삶은 얼마나 이기적인 태도입니까?

 

편협하고 근시안적인 삶

 

이와 같은 삶은 정말로 근시안적인 삶입니다. 이 시돈 사람들은 본토를 떠나 다른 지역에 거주하면서 모든 것이 형통하였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만족감을 마음껏 누렸습니다. 외부의 공격에 대해서 방어하기 위해 전혀 신경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현재의 상태가 언제까지나 지속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하루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들은 완전하게 행복했습니다만 그 행복이란 자신들의 상황에 대한 잘못된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있을 법한 일들을 직시하기만 했더라도 그들은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대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화산 위에 올라앉아 있으면서도 행복했는데, 왜냐하면 당시로서는 아직 폭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때에 다섯 명의 정탐꾼들이 그들의 영토에 들어 왔고 이어서 철통같이 무장한 육백 명의 군사가 와서 그들을 그 땅에서 완전히 몰아 내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들의 태도를 본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삶의 특징은 부주의함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유형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도 이와 같은 부주의한 삶을 살아 오셨습니까? 여러분은 모든 가능성들을 다 직시해보셨습니까? 여러분은 만일의 경우를 예상해 보셨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을 직시하고 분명한 확신을 보셨습니까? 아니면 혹시 "내가 굳이 복잡하게 살 필요가 있겠는가?" 하면서 그저 순간순간 그리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방어 시설을 확충하고 예비군을 준비시키고 정보망을 갖추어 놓으셨습니까? 여러분은 긴급시에 대피할 누군가를 확보해 놓으셨습니까?

 

"뭘요, 전혀요, 현재로선 모든 일이 순조롭습니다!"라고 여러분은 말합니다. 저는 지금 정탐꾼 다섯 명이 이미 여러분의 영역에 침투했다고 충고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주력 부대에 보고하기 위해서 돌아갔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직업을 잃고 여러분이 생명보다 더 사랑하던 누군가를 잃게 된다면 어떻게 느끼실까요? 만약 전쟁이 발발하고 전면적인 대학살이 발생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지금 끔찍한 위협을 가하는 것입니까? 친구 여러분, 이것은 삶의 실상입니다. 여기에 대비하지 않는 것은 무모한 짓일 뿐입니다. 또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요행수를 바라는 사람들과 한 부류가 되는 것이며 삶의 철학이 결여된 것입니다. 정탐꾼들이 들어왔습니다. 엄청난 일이 임박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무사안일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만약 주의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류의 삶의 마지막 특징으로 제가 직시하는 것이 이 백성들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날 것인데, 그것은 곧 자멸적인 것이 특징입니다. 이런 삶은 이기적이며 편협하고 근시안적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스스로 멸망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들을 구원할 자가 없었으니"(18:28). 이 비참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닥친 재앙에 대해 스스로 책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통을 스스로 두절했고 육백 명의 군사가 들이닥쳤을 때에는 시돈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어느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차단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삶도 일시적으로는 매우 형통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왔고 그 기쁨과 경이로움을 자랑해 왔습니다. 그런데 위기 시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여러분에게는 구원자나 친구가 있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여러분이 엄청난 재난에 빠졌을 때에 피해있을 만한 누군가가 잇습니까? 여러분의 통신망은 항상 열려있습니까? 여러분은 퇴각로를 확보해 두었습니까? 시돈인들은 스스로를 차단시켰는데 이것이 그들의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수 있는 다른 점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구약 성경에 덧붙여져서 신약 성경이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시돈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본래부터 하나님에게서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환난이 닥쳐서야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 돌아섰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이나 하나님을 외면하고 잇다가 필요할 때에만 찾아 나서는 비열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인류가 이룩한 세상은 이런 부정한 집단인데 여기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는 길, 구원의 길, 해방의길, 구출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셨고 하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어떤 긴급한 상황에서든지 어떤 위험에서든지 하나님께서 항상 곁에 기시기 때문에 우리는 버림받지 않습니다. 정탐꾼들이 도착했지만 우리에게는 인류의 구세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곁에 오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가 거룩한 곳으로

나아갈 길이 있으니,

희생제물과

성령님의 역사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보혜사가 계심이라.

 

아직 기회가 있을 때에 구세주를 아십시오. 영원한 도성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시작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