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안식에 거하는 삶


믿음으로 안식에 거하는 삶의 원리



한때는 음속보다 빨리 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과학의 발달은 이것을 가능하게 했고 인간은 소리의 장벽을 깼습니다; 인간은 그들이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문제의 범위를 넘어서 진보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에게 문제로 제기된 또 다른 장벽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믿음의 장벽’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소리의 장벽을 부수기 위해서는 상당한 속력이 필요하지만 믿음의 장벽을 부수기 위해서는 엄청난 스피드가 아니라 단순히 가만히 서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포함된 일이나 동작은 전혀 없습니다. 단지 주님을 믿거나 신뢰하고 그분을 계속 의지하고 기다리십시오. 이것은 경험적으로 제공되는 모든 신자들 위한 훌륭한 기술입니다. 우리는 이미 모든 신자들, “주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 을 위한 지위(신분)적으로 멋진 장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8:1 전반부)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란 것을 압니다. 우리는 그분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입니다(창세기 2:23; 에베소서 5:29 참조).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인 그리스도의 생명을 공유합니다. 우리는 완전한 의() 즉 그리스도의 의를 공유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운명을 공유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상속권을 공유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 (자녀)의 신분을 공유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선택(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선택하심)을 공유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제사장 직분과 다른 많은 것들을 공유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지위를 가진 것을 압니다.


우리는 행복을 찾느라 매우 바쁘고 만족을 가져다 줄 것을 찾으려고 서두르느라 매우 바빠서 완벽한 평안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기쁨 또는 내적인 행복이 있는 곳!, 능력이 있는 곳! 안정이 있는 곳! 힘이 있는 곳! 영향력이 있는 곳!) 안에 있는 위대한 것 들 중에 하나를 무시합니다! 무슨 일이 생겨도 주위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인생의 압박과 재난이나 문제들이 아무리 커도 우리는 이 “모든 지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 (빌립보서 4:7), 혹은 누군가가 표현한 것처럼 “대개 사람들에 의해 왜곡된 하나님의 평강”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완벽한 평안이 있는 곳, 힘이 있는 곳, 우리의 인생이 그분께 중요하게 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가끔 성경은 그것을 “안식일”이라고 설명합니다. 주일, 주의 제7일 이나 안식년이 아니라 커다란 인생의 역경 한 가운데서의 순간순간의 안식을, 믿음의 안식입니다. 그것은 외부 환난의 면전에서 완벽한 내적 평안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번 공부에서 살펴보게 될 4개의 구절에 우리들을 위해 설명되어 있습니다(출애굽기 17, 민수기 20, 그리고 히브리서 3장과 4). 히브리서 4장이 단계(과정)들을 분석하는 반면에 처음 3개의 구절들은 믿음의 안식에 관한 원리들을 설명할 것입니다.


첫 번째 므리바 사건


출애굽기 17


출애굽기 17장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자녀들이 처했던 역사적인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영적 죽음을 대신하는 것을 예시하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 흘림을 통하여 이집트에서 해방되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를 통하여 홍해를 통과하였고 이제 그들은 모든 신자들이 그들의 삶에서 직면해야 하는 중대한 쟁점에 직면해 있습니다. “신자로서,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으로서 만약 내가 중대한 것(구원)에 대해 그리스도를 신뢰하였다면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들, 해결해야 할 문제들, 그리고 날마다 삶 속에서 일어나는 힘든 것들로부터의 구원 (해결)에 대해 그분을 의지할 수 있을까? 나는 그분의 가장 위대한 증거를 신뢰했다. 그러면 자비롭게 그분께서 내 삶에서 날마다 존재하는 문제들, 어려움들, 그리고 여러 상황들을 성공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주님께서는 정말로 이런 모든 문제들에 대한 답을 알고 계실까?


일주일 동안 보통의 목사님은 우리가 나쁜 소식이라 부르는 다방면의 것들을 그와 관련 있는 사람들로부터 듣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 모든 나쁜 소식들에 대한 답변을 모른다면 그는 사역을 계속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고민, 문제, 재난, 좌절, 어려움, 그리고 근심들에 대한 실제적 답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 어떤 목사님이라 할지라도  오래 동안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되어가면 사람들은 목사님에게 (조언을 구하러) 오지않습니다. 사람들이 행복할 때 목사님을 찾는 유일한 때는 그들이 결혼하려고 할 때입니다. 따라서 목사는 그의 회중들로부터 좋은 소식을 거의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말씀을 (지속적으로) 공부하는 목사라면 그는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 어려움, 그리고 역경에 대한 해답들을 제공해 줄 방법이 있음을 압니다. 어떠한 상황이든 성경의 교훈의 말씀에 관련되어 있는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위안이며, 축복이며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매우 많은 신자들이 범하는 실수는 그들은 그들의 독특한 문제에 대한 안성맞춤인 대답인 예 혹은 아니오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회중들은 목사님이 그들에게 어느쪽으로 뛰어야 하는지 말해주기를 원합니다.  말하자면, “키를 우현으로 90도 돌리고 좌현으로 3도 돌리면 당신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라는 식입니다.


하지만 목사가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시오라고 말하는 것처럼 목사님이 구체적인 도표로 윤곽을 잡아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어느 특정한 일에 특정한 방법으로 윤곽을 잡아주는 도표가 되기까지는 반드시 따라야할 원칙이 있습니다. 이 원칙은 신자 누구든지 어느 때고 직면하게 될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해결책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문제들을 만나게 되면 여러분의 삶 속에서 가장 큰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 문제는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이미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5:21)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이 지금껏 범한 모든 죄를 지셨으며 그 죄의 문제를완전히 해결하셨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우리를 대신한 희생은 (베드로전서 2:24) 죄와 죄에 대한 형벌인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의 장벽을 제거하였습니다 (에베소서 1:7, 골로새서 2:14).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을 때 여러분들의 과거의 죄들은 사하심을 받고 현재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여러분이 (하늘 나라에서의) 영원한 관계의 결과들에 대해 이해하시겠지만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이 땅에서의) 일시적인 관계의 결과들을 아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속해 있는 확실한 일들이 있습니다. 구원 후에 범하는 죄들과 불의들로부터 여러분들은 깨끗하게 하는 리바운드 / 자백의 기술 (요한일서 1:9)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날마다 주님과 교제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분을 명예롭게 하고 그분을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이 그분에게 가치 있게 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 것은 상관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낙심해 있을지라도 여러분들이 살아 있는 한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삶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계속 살도록 하신 것에 대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들이 그분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시고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대사로서의 책임을 다하기를 원하십니다 (고린도후서 5:20).  여러분과 저는 이스라엘 자녀들이 수 천년 전에 직면했던 것과 꼭 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그들 각각에게 개인적으로 영향을 끼쳤습니다. 성령님께서는 그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을 모세의 펜을 통해 확실히 기록되도록 하셨습니다. 실제로는 (그들이 직면한 문제들은) 애굽에서의 그들의 엄청난 구원에 비추어볼 때 그것은 전혀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주님께서 그들을 이곳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그들이 “주님의 명령대로”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주님의 뜻 안에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다음과 같은 복음 전도자의 외판원 같은 강매조의 설득(선전)에 현혹된 적이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믿으면 다시는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어떤 것도 진리로부터 멀어져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복음 전도자의 말과 반대의 경우가 더 자주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33)


여러분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 여러분들은 영생을 소유하고, 부활된 몸을 입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영원히 살 신분을 받았음에도 여러분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또한 평온하게 모든 문제와 어려움들을 안정되게 하고 대처하는 수단들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의지할 데가 없고 시내가 말라버리고(열왕기상 17:7) 인간적인 해결책은 없고 여러분들이 뭔가를 하거나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압박의 충격으로부터 너무나 망연자실하게 되어서 기도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보기 전까지는 아직 기독교인으로서의 시험을 감당하며 살아온 삶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그러한 상황에 지내기 전까지는 기독교인으로서 시험을 받는 삶을 살아보지 못했습니다. 조만간 혹은 나중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신자들을 말라버린 시내로 (dried-up brook)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신자들은 사태가 어둡고 절망적이고 인간적인 해결책이 없는 상황들에 직면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이집트의 노예생활로부터 해방시키셨고, 홍해의 물을 통과시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은 르비딤(Rephidim)이라 불리는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이 광야에서 사람들은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장성한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자녀들, 200만 명 정도인 거대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는데 물이 한 방울도 없었습니다. 히브리어로 광야 또는 사막은 ‘מִדְבָּר 미드바 (황무지, 마른모래)’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마른 사막으로 인도되었을 때 그들은 심각한 물 문제에 직면합니다. 그들은 곧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상황을 한가지 목적을 위해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의 신자들인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듯 그 세대(신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신뢰하겠느냐?여러분들은 구원받기 위해 그분을 신뢰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여러분의 주님과 구세주로 받아 들였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로마서 8:32)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하신 것 중 가장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여러분들의 죄를 위해 심판 받도록 십자가로 보내신 것은 하나님께는 그 어떤 것 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그분의 적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위해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모두 그분의 적들이었습니다 (로마서 5:10).] 십자가에서 여러분을 대신하여 돌아가심으로 가장 크고 어려운 것을 행하셨다면 이제 그분의 아들이 된 여러분들을 위해 무엇을 해 주실 수 있을까요(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전보다 (그리스도의 적이 되어 있을 때 보다) 더 못하게 해주실까요? 단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많이 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완전한 평안과 안정이 있는 이 순간 순간의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오직 한가지만 요구하십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믿느냐?” 바로 이러한 목적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글로써 약속 (우리가 믿음으로써 사용하고 믿고 적용할 수 있는 약속들, 우리들 각자를 안정시켜주는 약속들)을 주셨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성경 구절에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시는 것을 누리는, 그분의 완벽한 안식에 들어가는,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제가 2절을 이렇게 읽을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주님 당신을 신뢰할 이 엄청난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겉보기에는 희망이 없어 보이지만 저희들은 바로 여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기다립니다. 저희는 하나님께서 물을 주시리라 믿고 이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기 위해 그저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저희는 모세가 홍해 건너편에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우리는 거기에 서서 지켜보았습니다. 이제 저희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기 위해 가만히 서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안식에 거하는 기법을 적용하는 것은 멋진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저는 설교할 거리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일들이 잘못되어갈 때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극단적인 조치를 취합니까? 얼마나 자주 믿음의 장벽을 넘지 못한 채 남아 있습니까? 얼마나 자주 속상해 하고, 망가지고, 불안해 합니까? 하지만 만약 지구상에서 역경 중에 기쁨과 역경을 견디는 힘과 강력한 영향으로 평온함을 드러내 보이는 침착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 당연히 있어야 한다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구세주로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 어야 합니다.  



2. 하지만 우리는 (저의 희망과는 반대로) 이렇게 읽게 됩니다.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chide / KJV) 이르되...이 구절들의 대부분이 음역으로 되었기 때문에 (외국어를 소리 나는 대로 바꾸어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 저는 “chide” 라는 단어를 그것의 히브리 단어인 מְרִיבָה / meribah (므리바)로 바꾸어 쓰겠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meribah 하였습니다. 오늘날 “chide”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습니다. 셰익스피어와 제임스왕 시대의 이 단어는 현대 영어로 gripe(불평을 해 대다), complain(불평하다), 또는 criticize(비난하다)들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들이 나중에 이해하게 될 몇 가지 이유들로 인해 meribah라는 단어를 사용하겠습니다 (참조 출애굽기 17:7).


사람들은 모세를 대항해서 “meribah”했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비난했고, 불평했고, 그의 면전에서 몹시 당황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고 소리쳤습니다. 모세에게 얼마나 이상한 요구를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모세가 무언가를 할거라 생각했을까요? 모세가 허공에 손수건을 흔들며 “Hocus-pocus(요술쟁이들의 라틴말 비슷한 주문)라고 주문을 외고 손수건이 떨어지는 곳에 우리는 우물을 판다” 라고 말할 거라 생각했을까요? 그들은 모세가 어떤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을 거라 생각했을까요? 구원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리고 모세는 항상 그렇게 말했습니다. 상황이 잘되어갔을 때인데도 모세는 결코 어떤 인정도 받지 못했습니다. 상황이 잘 풀려나가지 않았을 때 모세는 항상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옛 죄성 (Old Sin Nature)의 패턴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희생양이 있어야 합니다. 그 희생양은 항상 리더입니다. 모세는 이제 그의 일생 동안 져야 할 리더십이라는 어마어마한 압박의 엄청난 짐을 지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넓은 어깨를 가진 (믿음직한) 모세를 봅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meribah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 어찌하여 주님께서 너희를 이 세상에서 사라지도록 유혹하느냐?]”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힘이 모자라시는 분이시냐? 주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수 없으신 분이시냐? 누가 우리를 이집트의 절망적인 노예생활로부터 구원해주셨느냐? 주님께서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 가장 훌륭한 것을 베풀어주셨다면 (노예로부터 해방), 홍해의 물을 막으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을 충족시켜 주실 수 있으시리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3.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것은 아주 현실적이고 매우 진지한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은 모세를 대항해서 meribah 하며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위기의 때에는 항상 불평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어떤 신자라도 위기의 때에 불평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신자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의 장벽을 부수도록 하나님의 약속들과 믿음을 조화시키기를 의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위기와 고난의 때에 불평하고 비난할 때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불신과 하나님을 신뢰함에 있어서의 실패를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뒤를 잇는 모든 것은 순전히 은혜에 관련한 일입니다. 어떤 신자들은 구원에 있어서 오직 믿음과 그리스도만을 통해 그것(구원)을 획득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의 조항들을 결코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마땅히 받을 만한 것이 아닌 것과 우리가 획득할 수도 없는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들이 마땅히 받을 만하거나 받을 가치가 있는 어떤 일도 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에게 물을 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마땅히 받지 못하는 모든 일들을 했습니다. 모두가 모세에게 말하자면 “불평/맹렬한 비난”을 퍼붓는 동안에 주님의 이 종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4, 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여기에 위대한 사람의 모습이 있습니다. 모세는 반박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정당화 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께 도움을 부르짖어 말하기를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것은 아주 재미있는 응답입니다. 그 사람들은 모세에게 돌질할 준비가 되어있었는데, 주님께서는 "네가 좋은 표적이 되도록 그들 앞으로 나가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모세는 주님께 순종해서 손에 돌들로 가득한 사람들의 앞에 가야만 합니다만 어떻게 그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수행할까요? 모세 자신의 힘에서 나오는 용기로 거기에 나갑니까? 아닙니다. 그는 거인 앞의 다윗처럼 그리로 걸어갈 것입니다. 모세는 그 위기에서 주님을 믿었습니다! 그것이 모세가 리더인 이유입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비난하고 불평하고 소리쳐 저주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모세에게 있었던 그 평온하고, 안정되고, 강하고, 침착한 특성은 없습니다. 모세는 순간순간 주님을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출애굽기 14:14)라고 말씀하실 때 또는 다윗이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사무엘상 17:47) 이라고 표현한 것과 같이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그의 지휘관에게 복종했고 화가 난 폭도 앞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가라..”라고 덧붙이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모세야, 지도자의 임무에 대한 책임을 분담할 다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나를 신뢰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으니, 그들도 사람들의 돌에 표적이 되도록 그들을 거기로 데리고 나가라.“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이것은 특별한 지팡이입니다. 이것은 심판의 지팡이입니다. 


6. 이제 주님의 약속을 따릅니다. “내가 호렙산에 있는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서리니...” 반석을 뜻하는 이 히브리 단어 צוּר (tsuwr/ tsur)는 날카롭고 들쭉날쭉한 바위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진실의 기록뿐만 아니라 예표론을 봅니다. 여기에 십자가 상에서 우리를 위해 엄청난 고통을 받으신 반석 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4). 모세가 그의 손에 지팡이를 잡고 그 삐죽삐죽한 바위를 친 것처럼 성부 하나님께서도 여러분과 저를 위해 십자가에서 성자 하나님을 치셨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부터 구원의 물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이제 그 믿음의 순종을 주목하십시오. 모세는 주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셨던 그대로 행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므리바를 기억하실 테지요? 제가 만약 텍사스 주 사람인 당신에게 “알라모 요새를 기억하세요-텍사스군 부대의 용기와 그들의 희생은 "Remember the Alamo"(알라모를 기억하라)라는 슬로건이 되었음-라고 말한다면 제가 의도하는 것을 정확히 이해할 것입니다. 이제 저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로서 당신에게 말합니다. ”므리바 사건을 기억하세요!” 불신과 믿음의 장벽을 깨는 것에 대한 실패의 경고를 기억하십시오!



*미국 텍사스주 San Antonio에 있음. 1836년 멕시코 군에 포위된 미국인 187명이 전멸된 알라모 요새 전투 



 Bob Thieme 목사님의 믿음으로 안식에 거하는 삶에 대한 한글 번역본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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