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함과 얻음(기도)

(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기도가 그와 같이 자기의 처지를 끈질기게 하나님께 호소해야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나님을 상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으로서, 항상 바르고 공정한 심판만을 내리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끈질긴 호소만으로 움직일 수 있었는데, 공의의 하나님이시자 우리를 사랑하시는 천부께서야 얼마나 더 속히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시겠느냐는 말씀을 예수님께서는 대조를 통해 제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나의 목숨을 가져간다 해도, 나는 예수님께서 억제하실 수 없는 폭소를 터뜨리며 돌아다니셨다든지, 술 취한 사람마냥 비틀거리며 혀꼬부라진 말들을 중얼거리고 계셨다든지, 혹은 개처럼 짖고 다니시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성령은 나로 하여금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아 그분의 모습을 닮아가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것이므로, 그 성령을 받은 내게서 나타날 현상이란 저와 같이 해괴한 모습들이 아니고, 다름 아닌 나의 삶을 통해서 세상으로 넘쳐흐르는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선하심,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걱정과 염려의 모습, 그 은은한 향기일 것입니다.)

 

 

·척 스미스,번역/ 신동철 목사 (미국 갈보리채플 담임목사 )

 

오늘 말씀은 누가복음 11장의 1절로 시작합니다. 말씀의 내용은 기도입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라고 되어 있는데,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기도생활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옵니다. 이들 기록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시기 전에 꼭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며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그 기도하실 때에 성령이 강림하셨으며, 또 변형산에서 제자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을 때에도 기도 중이셨고, 열두 제자를 불러 세우시기 전에도 밤새도록 기도하셨었지요.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철저한 기도의 사람이셨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기도생활을 주욱 목격해 왔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예수님께서는 한 곳에서 기도를 하셨고, 그 기도가 끝나자 제자 중 하나가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하며 기도하는 방법을 구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생활 속에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는가를 눈으로 직접 보아서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 예수님의 기도를 배우고자 하였습니다. 이렇게 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먼저 한 모델기도를 가르쳐 주셨는데, 이 모델기도는 마태복음 6장에서 산상수훈 때 주셨던 소위 주기도문과 매우 흡사한 것이었습니다.

이 모델기도는 말 그대로 우리들이 드릴 수 있는 기도의 한 모델이 되는 것으로, 중요한 그 첫 부분에 기도의 주소, 즉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이냐에 대한 문제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드리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 같으면서도 막상 들어보면 사람 들으라고 하는 듯한 기도가 참 많이 있습니다. 저 자신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기도를 들으면서저 기도는 나 들으라고 하는 기도구나…’라고 생각했던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도 가운데에는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내게 인식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여실히 드러나 있어서 하나님보다는 오히려 사람인 나에게 호소하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기도를 할 때 가장 힘든 점 중 하나는 기도를 받을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확실히 함으로써 사람 들으라고 하는 기도가 되지 않도록 하는 일입니다. 실로 사람 들으라고 하는 기도가 하나님 들으시라고 드리는 기도보다 휠씬 더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또한 많은 기도가 불특정 주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기도를 하면서, 우주를 채우고 있는 무궁한 기운이시여!’라고 시작하는 따위가 그렇습니다. ‘우주의 제일신(第一神), 만물의 근원등등으로 시작되는 기도 역시 불특정 주소로 보내는 기도이며, 인격(人格)을 가지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에 비하여 예수님께서 주신 기도의 첫마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KJV)는 얼마나 아름답고 친근합니까?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기에 참으로 합당하신 주소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KJV),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는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기도란 이와 같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달려가서 안전함과 피난처, 그리고 도움을 얻는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드리고 있는 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그분이 바로 천지와 그 안의 모든 만물들을 다 창조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상기해 볼 때,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가지고 있던 기도제목들은 이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도움을 주실 하나님 앞에서 갑자기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일들로 바뀌게 됩니다.
기도의 주소는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역시 무언가를 구하는 기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모델기도의 첫 번째 기원은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람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KJV).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는 현재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시사해 주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고 있는 세상이라는 말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것들을 사람들은 행하고, 또 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반역하고 있는 세상! 우리의 기도는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이 땅위에 임하소서!’하는 것이며, 하나님에게 반기를 듦으로써 야기된 모든 고통, 모둔, 불행, 재난 등의 끝나는 것을 보게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뉴스를 통해 사람의 손에 의해 저질러진 또 하나의 참상을 접할 때마다, 사실 우리 입에서는주여, 주님 나라가 임하옵시며…’하는 기도가 저절로 나와야 합니다. 어찌어찌하여 갑자기 경제가 악화될 것이며, 해외에 이러저러한 일들이 생기고 그 결과로 전쟁이 발발했다는 따위의 뉴스를 접하게 되면서 두려움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마다 우리는
‘주여, 주님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주여, 주님의 나라가 속히 임하옵소서!’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사고들, 하나님께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불순종의 열매들, 폭력과 살상, 기타 인류의 재난들은 하나같이 더 많은 기도로 연결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기원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급선무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라면 이 죄 사함이야말로 영혼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위해 없어서는 안될 것이므로 사실 일용할 양식보다 더 소중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그리고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KJV)를 끝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모델기도를 마치셨습니다.

우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를 드려야 하며, 그분의 나라를 먼저 구하고 나서,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관한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는데, 이 비유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표면적 인상은끈질긴 강청(强請)’이지만 그것을 우리가 실제 생활에 적용하는 면에 있어서는 아마도 여러 성도님들이 생각하시는 바와 조금 틀려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대략 이렇습니다.
자정쯤 되는 한 밤중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동양의 관습상 손님치레는 무엇보다 중요한 예절입니다. 그리고 이 손님치레 가운데에는 정성껏 상을 보아 식사대접을 하는 것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밤중에 손님이 찾아와 다 늦게 저녁상을 보는데, 그만 부엌에 먹을 것이 변변히 없습니다. 그래 옆집으로 양식을 꾸러 가서는, 오밤중이지만 손님대접을 해야 한다는 일념에 실례를 무릅쓰고 그 집 문을 가만히 두드립니다. 그 때 안에서 소리가 들리기를뉘시우?’합니다.

, 저 옆집 사는 아무개올시다.”

그래 이 밤중에 웬일이요?”

저 손님이 오셨는데 대접할 양식이 딱 떨어져서요…”

아니, 뭐요? 이 밤중에 양식이라니? 난 모르겠수! 애들하고 다들 잠들었단 말이요. 지금 집사람을 깨우면 애들이 죄다 따라 일어나서 다시 재우기가 어려워요. 그냥 가보슈. 나 원 참, 세상에 별…”

그래도 이 사람은 계속해서 사정합니다. 여기 보면 강청(强請)했다고 하는데 다른 번역에는 철면피처럼 늘러 붙어 통사정하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표현을 썼습니다. 끈질기게 문을 두드렸다는 말입니다. 이에 그 집 주인이 나타나서 이 사람이 원하는 대로 양식을 잔뜩 가져다 안겨 주면서 여기 있으니 얼른 갖고 꺼지라고 하더라는 비유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우리도 이와 같이 하나님께 늘러붙어서 통사정하라고 가르쳐 주시기 위해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것이 아닙니다. 비유에서는 종종 대조를 통해 그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강조하게 됩니다. 즉 비유가 되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나서는 진짜 전하고자 하는 요지를 그 이야기와 대조시켜 가면서 요점을 전달하는 방법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이와 비슷한 비유가 또 하나 나오는데, 그 비유 또한 언뜻 보면 하나님께 계속해서 졸라대야 한다는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는 듯 합니다. 바로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로 그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마디로 말해 못돼먹은 영감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보잘것없는 과부가 이 재판관이 재판하는 장소에 매일같이 나타나 자기의 원한을 풀어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렇게 매일같이 나타나서 끈질기게 자기의 처지를 호소하니까, 얼마 후에 이 재판관이 속으로 생각하기를비록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하는 모양을 보니 머지않아 나를 미치게 할 여자로다하면서 그 과부가 원하는 판결을 내려 주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기도가 그와 같이 자기의 처지를 끈질기게 하나님께 호소해야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나님을 상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으로서, 항상 바르고 공정한 심판만을 내리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대조를 통해 드러난 요점은 무언고 하니,
이렇게 하늘 두려운 줄 모르게 못돼먹은 영감쟁이도 한 과부의 끈질긴 호소에 못이겨 그 과부가 바라는 대로 해주었거늘, 하물며 하나님께서야 얼마나 속히 그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끈질긴 호소만으로 움직일 수 있었는데, 공의의 하나님이시자 우리를 사랑하시는 천부께서야 얼마나 더 속히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시겠느냐는 말씀을 예수님께서는 대조를 통해 제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의 비유 속에 나오는 사람이 오밤중에 옆집에서 찾아와 철면피처럼 통사정하는 사람에게 그가 집요하게 강청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잠자리에서 일어나 그 사람이 구하는 것들을 내주었다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야 주무시지도 않고 문을 걸어 잠그고 계시는 것도 아닌데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항상 준비해 놓고 계시던 우리들의 일용할 양식을 얼마나 더 잘 내주시겠느냐 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 바로 전에 제자들에게 이리 기도하라 하셨지요?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렇게 우리들의 아버지는 항상 우리들의 일용할 양식을 준비해 놓고 우리들에게 그것들을 공급해 주시기 위해 늘 기다리고 계십니다. , 늘 문을 열어 놓고 계시므로 우리들이 계속해서 강청할 필요도 없고, 그 앞에 나아갈 길을 졸라가면서 얻어내려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지요. 그냥 구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르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요.

여기서 그 내용이 어떻게 진전되는지를 보십시오.
특별히 애를 쓰거나 졸라댈 필요가 없다는 얘깁니다. 그냥 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면 찾아질 것이라 이겁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이제 예수님께서는일용할 양식(KJV­)을 주옵시고…’의 마지막 적용을 이야기하고 계시는데, 이번에도 역시 같은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떡, 즉 양식을 달라하는 아들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좀 전에 손님 대접할 양식이 없어 옆집으로 꾸러간 사람 얘기도 역시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를 설명한 비유였지요.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KJV),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 이제 또 한번 대조가 나오는 것을 보십시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여러분의 아들이 떡을 달라고 하는데 여러분 중 어느 아버지가 비록 자기는 악할지언정 자기 아들에게 돌을 먹으라고 주겠습니까? 아버지의 임무는 아이들의 부양을 위해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하는 것이 아닙니까? 떡은 육신의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떡이 육신의 건강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성령은 영혼의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땅 위에 자녀들이 영적으로 건강해지기 위해 꼭 필요한 성령을 공급해 주시는 것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임무인데, 너희 육신의 아버지들이 비록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들에게 줄 줄 알거늘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야 너희들에게 얼마나 더 잘 성령을 주시어 그 영혼들을 보살펴 주시겠느냐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중에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셨습니다.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권능(power, 능력)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말을 통해서보다 삶을 통해서 훨씬 더 나은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여러분의 삶이 전해주는 모습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전하는 말씀이 신뢰도를 잃고, 그 가치가 땅에 떨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삶이 예수님을 닮은 삶,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제로 행하는 본보기가 된다면 전도의 말을 단 한마디도 전하지 않을지라도 여러분은 참으로 권능에 찬 참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은 그 안에 너희의 삶이 내 증인이 되는 권능을 받으리라는 뜻을 감추고 있습니다.

계시록에는 예수님을 지칭하여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라고 부르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아버지에 대하여 증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 신가가 궁금하십니까?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의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이제
성령의 권능으로 바로 여러분의 삶이 예수님의 증인이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의 힘으로 여러분의 삶이 변화를 받아 여러분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썼듯이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 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께서 하시는 일입니다.그리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성령이 역사는 우선 우리들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역시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요,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바는 먼저 나 자신이 예수님의 모습이 되고, 그 다음에 그런 내가 이 세상을 향해 그분을 증거하기를 그분께서 사랑하셨듯이 용서하고, 그분께서 인자하셨듯이 인자하고, 그분께서 남을 위하셨듯이 남을 위하고, 그분께서 세상을 불쌍히 여기셨듯이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예수님과 같아지고, 예수님의 축소판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나의 삶이 예수님을 닮고, 나의 모습이 그분의 형상을 본받게 되는 그 변화를 사람들이 보고 그들도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도록 말입니다. 바로 그러한 목적과 이유로 하나님은 내게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그러한 성령을 필요로 하는 것과 성령의 권능을 재삼 재사 절실히 사모하는 것은,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예수님의 삶을 본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를 거치지 않고는 달리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심각한 문제점에 대해 경고 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오늘날 이 성경구절을 대단히 잘못 적용하고 있는 교회들, 혹은 교제의 한 구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위험천만한 여러 가지 기이한 현상들이 이러한 교회들, 혹은 교계일각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짐승 울음소리를 내며, 개처럼 짖어댄다든가, 수탉처럼꼬끼요―’하는 소리를 낸다든가, 사자처럼 으르렁댄다든가, 아니면 발작성 웃음을 터뜨리며 뒹굴고, 때로는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면서 이러한 현상들이 모두 진짜 성령의 은사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그 주장을 뒷받침 한답시며어찌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떡을 달라 하는 아들에게 돌을 주시지 않는 천부께서 성령을 구하는 저들에게 얼마나 더 잘 성령을 공급해 주시겠느냐?’는 논리인데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저들은 성령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저들이 구했던 것은 어떤 외적 현상으로서 눈에 보이는 그 무엇이었지,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령의 이름 아래 오만가지 해괴한 작태를 부리게 되면서 모두 다 자기들이 구한 결과로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은사들이라고 하는데, 사실 성령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짓들일 뿐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를 정도로 성숙해지고 나면 그때부터는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여서,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그 때 그 때 새롭게 불어대는 여러 가지 교훈들의 유행바람에 밀려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는 일이 없게 되리라고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그동안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여 영적으로 충분히 성숙해진 결과, 온 나라 안을 휩쓸고 지나가는 이러한 유행교훈들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고, 그 궤술과 유혹에 빠지지 않는 모습을 보는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크게 복 주심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탐심으로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여러분들로 이()를 삼아 자기 주머니들을 채우려 하는 저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목적은 개처럼 짖거나, 고양이처럼 울거나, 닭처럼 꼬꼬댁거리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나를 예수님의 형상과 닮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목숨을 가져간다 해도, 나는 예수님께서 억제하실 수 없는 폭소를 터뜨리며 돌아다니셨다든지, 술 취한 사람마냥 비틀거리며 혀꼬부라진 말들을 중얼거리고 계셨다든지, 혹은 개처럼 짖고 다니시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성령은 나로 하여금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아 그분의 모습을 닮아가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것이므로, 그 성령을 받은 내게서 나타날 현상이란 저와 같이 해괴한 모습들이 아니고, 다름 아닌 나의 삶을 통해서 세상으로 넘쳐흐르는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선하심,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걱정과 염려의 모습, 그 은은한 향기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면 찾아질 것이요, 두드리면 우리 위로 하늘 문이 열리고 아버지께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그 소용대로 얼마든지 우리에게 퍼부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삶이 이 세상을 향하여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