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사고의 중요성(기도하는 방법)

(, 악인이 잘되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반면에, 불경건한 사람들은 기막히게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잘도 되는데, 나 같은 사람들은 늘 어려움에 처하고 고난 가운데 지내지 않는가!      합리적인 사고는 일차적인 합리성만을 가지고 있는 사고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고는 똑같은 합리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 높은 수준의 합리성과 낮은 수준의 합리성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사고는 몇 가지 사실만을 포괄하는 사고가 아니라, 모든 사실들을 포괄하는 사고입니다.   우리가 일단 영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하면 기적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고, 거듭남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으며, 속죄의 교리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부분은 영적인 각도에서 보아져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적으로 영적인 삶입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길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할 때 여러분은 반드시 이 기본 공리, 즉 하나님의 생각은 여러분의 생각과 다르며 그분의 길은 여러분의 길과 다르다는 공리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합니다. 이 두가지 길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와 같은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를 드리기 전에 먼저 우리의 생각이 영적인 생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마치 기도라는 것이 언제라도 즉각 몰두할 수 있는 일이라도 되는 양 무조건 기도를 하라고 그럴 듯 하게 충고하는 것보다 더 우둔한 일은 없습니다. )

 

 

David Martyn Lloyd-Jones

 

(73:16~20)

16    내가 이 얽힌 문제를 풀어 보려고,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은 내가 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17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8    주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세우시며, 거기에서 넘어져서 멸망에 이르게 하십니다.
19    그들이 갑자기 놀라운 일을 당하고, 공포에 떨면서 자취를 감추며, 마침내 끝장을 맞이합니다.

20    아침이 되어서 일어나면 악몽이 다 사라져 없어지듯이, 주님, 주께서 깨어나실 때에, 그들은 한낱 꿈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동안 우리는 시편 73편을 다루면서 시편 기자의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엄청난 곤경에 빠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으며, 그 같은 처지에서 “거의 실족할 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처해 있던 곤경이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가 빠져 있던 곤경은 아주 오래된 문제요, 우리에게 언제나 있어 왔던 문제였습니다.

, 악인이 잘되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반면에, 불경건한 사람들은 기막히게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불경건한 사람들에게는 잘못되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보였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는 자신은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고 말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는 이같은 현실 - 자신은 큰 곤경에 빠져있고 저 악인들은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는 현실 -을 주시할 뿐만 아니라, 이 현실에 대해서 생각하고 명상하고 사고하기 시작했는데, 그러다가 그는 급기야 어떤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버렸고 그 강박관념을 몰아 낼 수가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마음을 정결케 하고 행동을 바르게 한 것이 정말 아무소용도 없는 짓이었다고 하는 결론을 내릴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내어 뱉고 싶은 막다른 순간까지 다다랐습니다. 그가 발견한 자신은 너무도 불안정한 비탈길위에 서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실족할 것만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정말 무슨 의미가 있기나 한 것일까?

경건한 삶을 살려고 애쓰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잘도 되는데, 나 같은 사람들은 늘 어려움에 처하고 고난 가운데 지내지 않는가!라는 말이 그의 입 밖으로 뛰쳐나올 찰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그 사람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아무말도하지 않다가 “하나님은 참으로 이스라엘 마음이 정결한자에게 선을 행하신다”고 입을 열어 고백합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시편 기자가 보았던 문제점들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유혹이 얼마나 교묘하며,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도 알고 있습니다. 유혹은 우리의 상황을 통해서 다가옵니다. 마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치 친구처럼 다가와서 말합니다. “너의 하나님이 그렇게 행하시고도 의로우신 분이냐? 그분이 사랑의 하나님이냐?'” 마귀는 의심을 불어넣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시편 기자가 자신이 처한 이 괴로운 상황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의심의 말을 할 뻔한 위험스러운 상황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나도 그들처럼 말하면서 살아야지" 하고 말했다면, 나도 주의 백성 가운데 한 사람처럼 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15)라고 말합니다. 그를 사로잡고 있던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위태로운 비탈길 위에 서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마치 등반 중에서도 의지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오직 얼음만이 덮여 있는 산을 오르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갑자기 든든한 발판을 찾아내었고, 그 위에 굳게 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주목하는 그 문제 자체를 다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일이라는 것만은 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미 우리는 이 같은 사실을 자세히 살펴보았으며, 이 같은 사실로부터
우리가 영적인 삶에서 반드시 지켜야만 할 몇 가지 명확한 원리들을 추출해 낸바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준수해야만 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자주곤경에 처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 원리들을 교묘한 편법을 써서 어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도덕적으로 곤경에 빠지는 사람들은 명백히 해서는 안될 일을 가지고도 계속 이러쿵저러쿵 궁리를 하고 편법을 찾다가 결국은 대부분 곤경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논쟁의 여지도 없이 분명한 것들이 있습니다. 명백히 옳지 못한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 원리에 따라 행동했으며, 이 원리가 그를 붙잡아주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저는 만일 여러분이 스스로 마음을 지키고 있다면 여러분의 영적인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못된다는 말씀까지를 전하고 마쳤었습니다. 낮은 수준의 영성을 경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영적인 우월감을 가진 사람보다 비록 낮은 수준일지라도 영적인 삶 가운데 거하십시오. 왜냐하면 사다리의 맨 아래 칸에라도 발을 올려놓는 것이 그냥 땅위에 서있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입니다. 후에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다면, 거기에서부터 위로 올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우리가 맨 아래 칸보다는 더 나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시편 기자가 분명 그 맨 아래 칸에서 멈추어서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거기에서 멈추어 섰었다면 아예 시편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언제나 선을 행하신다”고 고백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같은 고백은 단지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실족할 것 같을 때는 멈추어서면 됩니다. 시편 기자가 바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이 그 윗부분의 여러 단계들을 두루 거치도록 인도할 것입니다. 시편 기자만 해도 일단 실족치 아니할 정도의 발판은 마련했었지만, 이후 그 윗단계로 올라가기 전까지는 계속 불행한 상태로 지냈었던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그러면서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보십시오. 비록 이제 그의 걸음이 더 이상 미끄러질 지경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그는 자신의 가장 큰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나락으로 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그의 입으로 하나님의 모독할 위험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문제를 깨끗이 해결했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는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말합니다. 그는 커다란 정신적, 심정적 고뇌에 빠져있었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하시는 방식에 대해서 여전히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 고통과 혼란은 그가 이전에 처해 있던 단계에서 느꼈던 것 만큼이나 큰 것이였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 같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물론 더 이상 실족하지 않는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실족하지 않는다는 것이 곧 여러분의 모든 것이 잘되어 간다든지, 여러분의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었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여전히 참으로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그에게는 더 이상 나락으로 추락하지 않을 만큼의 영적인 지식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 자체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첨예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시편 기자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아시겠습니까? 여러분도 그러한 상황에 처한 일이 있습니까? 저는 여러 번 그런 상황에 처해 보았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실족치 않도록 여러분을 결정적으로 붙들어주고 있는 무언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여러분의 본래 문제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생생하게 여러분과 함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처해 있던 상황이 바로 이러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실족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똑같은 첫 바퀴 속에서 계속 맴돌고 있었으며 그는 정신적, 심적으로 커다란 고뇌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내내 이러한 상태에 있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 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깨달았나이다”. 저는 이것을 설명하기 전에 한 가지 분명하게 지적하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시편 73편을 다양한 번역본으로 살펴보면 이 구절을
“하나님의 비밀에 들어가기 전까지 나는 너무나 고통스러웠나이다”라고 옮긴 번역본도 발견 하실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성소'를 ‘하나님의 비밀'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부분을 성소 라고 번역한데에는 참으로 중대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시편73편 부근의 시편들은 모두다 예배용 성가들이었으며, 이 같은 시편들에서 성소란 문자적으로 예배 장소를 가리켰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입니다. 73편 다음에 나오는 시편들을 읽어보십시오. 여러분은 그 각 시편들에서 문자적, 물질적, 구체적인 성소인 성막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다른 증거들도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것이 결정적인 증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문자적, 물질적인 성소에 대한 이 같은 언급자체가 그 성격에 있어 대단히 비물질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간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간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섭리 아래 살던 사람들에게 있어 성전에 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러 간다는 뜻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곳이었으며, 하나님이 현현하시는 영광스러운 임재의 장소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바로 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미 말한 것처럼 여기에서는 성소가 문자적으로 하나의 건물을 의미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그 건물에 들어간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내가 깨달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전에 그는 불행했으며, 혼란스러웠습니다. 그것은 무서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소로 나아가자 모든 것이 그에게 명료해졌습니다. 그는 자세를 가다듬고 다시 한번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으며, 결국은 정상에 도달해서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언제나 선을 행하신다." 이 선에는 예외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우리가
배워야 할 대단히 중요한 몇 가지 교훈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발판을 얻은 시점이 있습니다. 그는 이제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무슨 교훈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첫 번째 교훈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기 위해서는 영적인 사고, 혹은 영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시편 기자가 곤경에 처했던 것은 오로지 자신의 사상, 자신의 생각만 가지고 자기의 문제를 사유하고, 그 같은 자세로 문제를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 같은 시도가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그의 눈 앞에는 두 가지 상황-불경건한 자들의 번영과 경건한자들, 특히 자신의 곤경과 문제와 비참함-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생각의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문제는 너무나 분명하다. 복잡할 것이 전혀 없다. 이런 식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결국 사실은 사실이고, 사실을 없애버릴 수는 없다. 이 세상에서 소용이 닿는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사실을 바로 보는 법이다. 좋다. 나는 이런 처지에 있다. 논쟁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분명하다. 뭔가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하신 약속들을 다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약속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고 진실 되다면 내가 어떻게 이 지경에 처할 수 있으며,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잘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되었다고 엄숙하게 결론을 내렸었습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사고를 전개하였으며, 이 생각을 하고 또 하고, 하고 또 했습니다. 여러분도 모두 다 이런 식의 사고과정에 대해서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시편 기자와 같은 지점에서 출발하여 똑같은 원을 계속 돌고 또 돌고 하신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는 일이나 오락이나 아니면 다른 것에 몰두함으로써 이 문제를 잊어보려고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면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나한테는 되는 일이 없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한테는 모든 일이 잘 되는구나”라는 생각에서부터 시작해서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또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나? 아니다. 잘못한 것은 없다. 나는 전혀 올바른 행동만 한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다”는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 기자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는 중요한 사실이 간과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처해 있는 곤경의 본질은, 그가 영적인 생각은 하지 않고 합리적인 생각만 했다는데 있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원리입니다.


물론 순전히 합리적인 사고와 영적인 사고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아, 알았어요. 바로 그거군요. 그러길래 그리스도인의 생각은 불합리한 것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어요”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아주 잘못된 추론입니다. 합리적인 사고와 영적인 사고를 구별한다고 해서 영적인 사고가 불합리한 것이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단순히 합리적이기만 한 사고와 영적인 사고의 차이란, 말하자면 차원이나 수준의 차이와도 같은 것입니다.
합리적인 사고는 일차적인 합리성만을 가지고 있는 사고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고는 똑같은 합리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 높은 수준의 합리성과 낮은 수준의 합리성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사고는 몇 가지 사실만을 포괄하는 사고가 아니라, 모든 사실들을 포괄하는 사고입니다. 이 부분은 좀더 후에 자세히 다루겠습니다만, 여기서는 단순히 합리적이기만한 사고와 영적인 사고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 이러한 설명을 덧붙인 것입니다.


이제 몇 가지 원리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첫 번째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 그리스도인들도 생활 가운데서 단순히 합리적이기만 한 사고를 함으로써 실족할 위험성이 언제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미묘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며 거듭난 존재이지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시 의식조차 못하는 사이에 기독교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그러한 사고 방식에 빠져들 위험성이 언제든지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의식조차 못하는 사이에 그같은 사고 방식이 우리 안에 뿌리를 내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시편 기자는 대단히 헌신되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이루시는 위대한 역사들을 많이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저 단순히 합리적이기만 한사고 방식으로 돌아서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어느 한부분만이 아니라 그 전체가 영적인 삶이라는 사실을 배워야합니다.

이것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을 통해 우리에게 하고 있는 말에 주목해보십시오. 바울은
왜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있지 않은지, 왜 이 세상의 관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말해 주는데, 그 답이란 그들이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합리적인 수준에서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시골뜨기 한명 밖에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목수 한 명 밖에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의 학당에서 교육받은 경력이 없는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일 수는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왜 이렇게 말했습니까? 그들은 순전히 합리적인 사고에 젖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시편 기자가 처음에는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취했었다고 말했는데, 그들 역시 시편 기자와 똑같은 길을 걷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 관원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이런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는 태어나자마자 말구유에 놓여졌으며 다른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고, 먹고 마셨으며 목수로 일했고 너무나 나약하게 십자가에 못 박혔던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으라는 말입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그들의 문제일까요? 그들은 오직 합리적인 수준에서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진화론을 믿기에 “이 진화 과정 속에서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일들은 불가능한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합리적인 사고입니다. 여러분이 그들에게 거듭남의 교리에 대해서 말해준다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것입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적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법칙들을 봅니다. 기적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을 범하는 것입니다. 매튜 아놀드가 말한 것처럼 ‘기적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은 일어난 일이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합리적인 사고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제 어떤 한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먼저 이같은 사고를 중지해야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유형의 사고, 즉 영적인 사고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단 그리스도인이 된 후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는 자신의 모습입니다. 이전과는 다른 수준에서 사고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일단 영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하면 기적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고, 거듭남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으며, 속죄의 교리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이해력을 가지고 영적으로 사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모두가 이같은 사실을 인정하고 동의하실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밤중에 우리 주님을 찾아와서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기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분명히 “어떻게 그런 일을 행하실 수 있습니까? 설명해 주십시오”라고 여쭈어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를 바라보시고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너도 거듭나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니고데모에게 하셨던 말씀의 뜻은 이렇습니다. “니고데모, 네가 체험하지도 않고 이런 일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그런 식으로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될 수없다. 너는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있어. 너는 이것을 분석적 정신으로 이해해 보려고 하고 있을 뿐, 너의 이성으로 지적인 이해를 하려하고 있다. 그러나 너는 성공하지 못한다. 네가 이스라엘의 스승이기는 하지만 너도 거듭나야만 한다. 네가 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원한다면 어린아이처럼 되어야한다. 너는 자연인으로서 사고의 힘을 의지하고 있지만 그 의지하는 것을 중지하고, 영적으로 사고하는 이 새로운 사고의 본질을 깨달아야 한다. 말하자면 너는 거듭나야만 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에 동의하고, 이 말씀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오직 그들이 계속적으로 교육받고 훈련을 받아온, 온 몸으로 지켜온 자연적인 사고방식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 자신도 저 자연적인 사고방식을 포기해야 할 사람들이며, 포기하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할 때 한번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즉 죄를 용서받고 거듭날 때 뿐만이 아니라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삶 전체에 걸쳐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 전체가 영적인 것이지, 일부분만, 혹은 그 시작에서만 영적인 것은 아닙니다. 옛날 시편 기자도 그렇고,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이 곤경에 처하는 이유는 일단그리스도인이 되어 영적인 수준의 사고를 시작을 한 이후에도 어떤 특정한 문제들을 만나면 다시 합리적인 수준의 사고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영적으로 생각하는 대신에 마치 우리가 자연적인 사람들인 것처럼 옛날로 돌아가서 옛날방식으로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저는 혼란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종종 있습니다. 그들이 제게 와서 자신들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저는 그들이 어려움에 빠지게 된 것은 그들의 사고가 이전의 합리적인 사고 수준으로 되돌아가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을 때 하나님에 대해서 섭섭한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었다면 그것은 벌써 여러분이 합리적인 사고의 수준으로 되돌아갔다는 반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판단하는 것은 공정치 못하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을 가진 순간 여러분은 합리적인 수준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여러분의 이해 수준으로 끌어내린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했던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부분은 영적인 각도에서 보아져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적으로 영적인 삶입니다. 따라서 우리 삶의 모든 것은 영적으로 바라보아져야만 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단계들, 모든 국면들, 모든 관심들. 모든 발전들은 영적으로 바라보아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단 이 영적인 영역에 들어가는 그 순간, 다른 차원은 뒤에 남겨두고 떠나야하며 영적인 방식으로만 생각해야만 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길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이같은 방식이 필요합니다. 시편 기자의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왜 이러한 일들을 허락하시는가? 어째서 믿지 않는 이들이 번영하는 것을 허락하시는가?”라고 묻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이시라면 왜 이런 자들을 땅에서 쓸어내 버리지 않으시는가?” 또한, “만약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이시라면 왜 내가 고통당하도록 내버려두시는가?” 이것이 그의 문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길을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이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은 오직 하나밖에 없으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사야 558절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나와 나의 길을 생각할 때면 너희에게 익숙한 저 낮은 수준에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는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고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이러한 잘못을 계속 저지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연인으로서의 우리 자신은 끊임없이 이러한 자세를 고집할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 문제 같은 것을 생각할 때면 영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에 대해서는 우리의 사고가 다시 합리적인 수준에 머물러 버립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과 전혀 다릅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길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할 때 여러분은 반드시 이 기본 공리, 즉 하나님의 생각은 여러분의 생각과 다르며 그분의 길은 여러분의 길과 다르다는 공리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합니다. 이 두가지 길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해하지 못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서, 우리가 자신과 자신의 영적인 체험에 대해서 뭔가를 생각을 하게 된다면, 맨 처음에 이렇게 자문해 보아야합니다. “나는 이것을 영적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문제가 되는 것은 나와 하나님의 관계라는 것을 상기하고 있는가? 지금 내 자신이 영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고 확신하는가? 아니면 부지중에 자연적인 사고방식으로 되돌아가서 문제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주 명확한 예화를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나서 대화를 하던 중에 갑자기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질문을 하곤 하는데, 그럴 때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사고를 버리고 완전히 합리적인 사고로 돌아서서 답변을 합니다. 그들이 정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듣다보면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자연인의 모든 편견들이 들어오고, 모든 계층차별적인 생각이 들어오고 모든 세속적인 주장들이 들어와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생각들을 입으로 토해내는 것입니다. 그들이 영적인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정도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그들은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 같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그들은 자연인의 모든 편견들과 이생의 자랑, 그리고 모든 것을 세속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습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 자기분열을 일으켜서는 안됩니다.
여기에서 스펄젼 목사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합니다. 그분은 기도회에서는 진정한 성자처럼 기도하고 보통 때도 위대한 성자처럼 행동하지만 일단 교회회의에만 참석하면 갑자기 악마로 변하는 사람들을 보게 될 것이라고 자기 학생들에게 말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영적인 모습을 보이다가도 교회의 사업을 다를 때면 악마가 되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그들이 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일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들 안에 있는 당짓는 영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오직 그들이 매사에 영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영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배워야한다는 것을 첫 번째 원칙으로 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도 시편 기자가 그토록 생생하게 그리고 있는 저 위험스러운 지경에 빠져버리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두 번째 원리가 나옵니다. 두 번째 원리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영적인 사고를 증진하고 촉진시킬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을 영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주는, 대단히 실천적인 원리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 시편 기자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그는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 의미는 우리가 우리의 행동방식이나 사고방식을 영적인 차원에서 이끌어 나가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이제 시편 기자가 어떻게 해서 그 방법을 배우게 되었는지가 아주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제 시편 기자가 거쳤던 심리적인 과정들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시편 기자의 심리 과정을 어떻게 분석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시편 기자는 결코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말들을 내뱉을 뻔한 바로 그 시점에 자신의 신앙동료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에 대한 생각이 시편 기자를 잡아끌었으며 그를 안정시켜주었고 그를 붙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 나의 신앙 동료들을 생각해야지. 그들을 어디에서 만나지? 항상 성전에서 만났었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성전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우리도 문제를 만나면 성전을 멀리하는 경향이 있듯이, 시편 기자 역시 성소를 멀리하고 지내왔었습니다. 이 사람의 문제는 혼자만의 삶을 살며, 잘못된 생각의 쳇바퀴에 갇혀 지내왔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식의 생각을 하게 되면 비참하고 불행해지며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 너무나 몰두해 있는 탓입니다. “나는 어려운 시간을 지나고 있고, 하나님은 나에게 불공평하시다”는 생각에 너무나 빠져있는 것입니다. 생각의 쳇바퀴 속에서 돌고 도는 것입니다. 이 쳇바퀴에 갇히면 비참해지게 됩니다. 자신이 싫어지게 되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너무나 막 대하신다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또한 언제나 자기 자신이 문제의 중심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일은
'여러분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잘못된 생각의 쳇바퀴에서 벗어나십시오! 합리적인 수준의 쳇바퀴에서 돌고 도는 일을 멈추십시오! 거기서 탈출 하십시오!



그러나 어떻게 하면 나을 수 있습니까? 크게 보면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시편 기자가 가장 먼저 택한 방법으로서,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집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얼마나 놀라운 곳입니까. 그저 하나님의 집에 가는 것만으로도 고통에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집으로 인해 감사를 드린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교제하고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공간을 허락하신 것에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집은 수천번씩이나 저를 “영혼의 우울증과 홍역”에서 구해주었습니다. 그저 그곳에 가기만하는 것으로도 이러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갈수 있는 하나님의 집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집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습니까? 그것을 계획하시고 조성하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 하나만 깨달아도 여러분의 상태는 보다 나아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가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에 앞서 와있는 것을 보고 놀라실 것입니다. 또한 종교에는 아무런 뜻도 없으며, 종교는 지속되어야 할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스스로 말해왔던 자신의 모습에 놀라실 것입니다. 여기에 종교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 여러분의 기분도 조금 나아질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 이 사람들이 옳은 것이다”라고 말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면 치료가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완전히 치유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여러분은 한걸음 더 나아가, 여러분 보다 훨씬 더, 너무나 어려운 처지에 있었던 어떤 사람들을 회중 속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문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문제이며. 이와 같은 고통을 겪었던 사람은 이전에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던 여러분이 한 불쌍한 여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남편을 잃은 여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아들은 죽었거나 살해를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여전히 하나님의 집에 있습니다. 그러한 광경이 홀연히 여러분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줄 것입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은 다른 문제에 대해서 그랬듯이, 이 문제에 대해서도 올바른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고전 10:13).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는 것도 바로 이 대목입니다. 마귀는 우리 이전에는 누구도 이같은 시련을 겪은 일이 없었다고 우리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라고 말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은 위로를 받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이같은 체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특별한 피조물입니다. 그리고 죄는 우리에게 특별한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고통 중에 있는데 , 다른 어떤 사람도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우리는 힘을 얻게 됩니다. 이것은 육체적인 면에서나 영적인 면에서나 마찬가지 입니다. 이같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사태를 보다 적절한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많은 고통당하는 이들 가운데 한사람일 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고통은 본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일어나곤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가면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들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집은 훨씬 오래 전의 일들도 생각나게 합니다. 오랜 세월을 거쳐 온 교회의 역사를 공부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해 전에 읽었던 책들이 다시 생각날 것이고 그 가운데 있던 성인들의 삶에 대한 내용도 떠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다시 떠올리다 보면 교회의 역사를 빛낸 위대한 성인들 가운데는 여러분의 작은 문제들은 너무나 보잘것없고 하찮은 문제로 생각될 만큼 커다란 시련과 고난과 역경을 경험한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소는 이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생각나게 해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순식간에 문제의 산을 올라 정상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이며. 이제 문제를 제대로 다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 주님의 성소는 우리에게 이모든 교훈들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집에 출석하는 일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비성경적으로 사는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솔직히 말해서 바보들입니다. 저는 목회 현장의 경험을 통해서 교회 출석을 가장 게을리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문제와 혼란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하나님의 집의 분위기가 흐르며, 그 속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나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항입니다. 우리가 아니라 그분이 정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서로 만날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에서 그분을 더 잘 알 수 있도록 정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언젠가는 다시 오실텐데, 그때 그들은 그 자리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가능한 한 자주 나아가고, 그렇게 할 수 없을 때 슬퍼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너무나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두 번째 요소는 성경입니다. 시편 기자가 살았던 시대에는 우리가 보는 것 같은 성경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는 이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말씀책입니다. 성경은 이제 성소 안에만 있는 책이 아니라 어디서든지 펼쳐볼 수 있는 책입니다. 집에서든지 교회에서든지 성경을 보십시오. 장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디서든지 성경을 펼쳐보면 성경은 즉시 여러분을 영적인 사고로 인도해줄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를 영적인 사고로 이끌어주는 방법은 너무나 다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왜 이같은 말씀을 주셨을까요? 그것은 분명 우리가 고심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성경에는 다른 아무 설명도 없이 역사만 기록되어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만, 그 같은 부분조차도 무한히 귀하고 귀합니다. 역사 기록을 읽듯이 시편 한 편을 읽어보십시오. 거기 기록된 이야기를 읽어보십시오. 그 속에 등장하는 사람이 어떤 일을 겪었는가를 읽기만 해도 나 자신이 올바른 모습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역사는 이러한 일들을 일으킵니다. 성경을 읽고 그 말씀 속에 있는 위대한 가르침과 교리들을 읽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목적이 다시 한번 떠오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순간 여러분의 잘못된 생각들이 부끄럽게 느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당신 자신을 계시해주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성경을 통해서 계시되시는 분입니다.



또한 성경에는 경건한 사람이 고통을 받는 이유에 대한 명쾌한 가르침이 들어있습니다. 바울은 일들이 제대로 되어가지 않아서 투덜대고 불평을 하려고 하는 디모데에게 쓴 편지 속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하나님의 종들이 핍박을 받는 모습을 보고 두려움을 품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 가운데도 디모데와 같이 두려워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우리와 같은 진리를 믿으면서도 핍박을 받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한 사람들은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설교하는 가운데
우리는 “많은 시련을 거친 후에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바울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있다면 여러분에게 어려움이 다가올 때 놀라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난을 보고 놀라는 대신에 “만약 내가 이 곤경을 겪지 않는다면 내게 무슨 잘못이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내가 경건하게 살았다면 어떤 어려움이다가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전적으로 영적인 말씀이므로,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는 더욱더 합리적인 사고의 수준을 벗어나서 더 높은 수준. 즉 모든 것을 영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사고를 하도록 돕는 또 다른 본질적인 요소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묵상과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성소에서 우리가 하는 일이 바로 이 묵상과 기도입니다. 시편 기자는 단순히 한 건물에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에 간 것이었습니다. 성소는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곳이며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만나주시는 곳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보고 그분에 대해서 묵상할 때 비로소 저급한 수준의 합리적 사고에서 궁극적으로 벗어나게 되며 다시 한 번 영적인 사고를 시작하게 됩니다.
묵상 보다 기도를 먼저 언급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하실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이 계시리라고 확신합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모든 질문에 대한 보편적인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자처하는 그리스도들일 것입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질문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그 문제를 놓고 기도 하십시오”라고 말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와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고 해도 그런 분들은 그저 “가서 그 문제를 놓고 기도 하십시오”라고 답변할 것입니다. 얼마나 그럴 듯 하고 피상적이며 잘못된 충고입니까? 저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강단에 서서 이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라도 사람들에게 기도하라고 말하는 것이 잘못된 일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라고 물으실 테지요.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것이 아무런 소용도 없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제 말뜻은 이렇습니다. 이 불쌍한 사람이 곤경에 빠지게 된 이유는,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에 너무나 큰 혼란이 생긴 나머지 하나님께 기도조차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길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여러분의 정신과 마음이 온통 뒤죽박죽이 된다면 기도인들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를 드리기 전에 먼저 우리의 생각이 영적인 생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마치 기도라는 것이 언제라도 즉각 몰두할 수 있는 일이라도 되는 양 무조건 기도를 하라고 그럴 듯 하게 충고하는 것보다 더 우둔한 일은 없습니다.


제 말을 믿을 수가 없으시다면 온 세계가 아는 가장 위대한 기도의 사람이 한 말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제가 지금 말하는 위대한 기도의 사람이란 브리스톨의 조지 뮬러입니다. 조지 뮬러는 목회자들에게 기도에 대해특별 강연을 하는 중에 이렇게 말한 일이 있습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매일 아침 기도를 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오래 전에 그것이 최선의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실 되고 영적인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자신이 성령 안에 거해야하며, 스스로 준비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죠지 뮬러는 먼저 성경을 한 부분 읽고 신앙서적을 조금 읽은 후에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가장 유익하고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이라는 것을 발견했으며, 그 후에는 누구에게든지 이 방법을 강력히 권유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님께 진정한 기도를 드리기에 앞서서 자기 자신을 추스르고 자신의 영을 올바르게 해야 함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시편 기자도 바로 이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잘못된 생각의 쳇바퀴에 갇혀 있었으며, 이렇게 그의 모든 생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기도를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단계들을 거쳐서 자신의 생각을 바로잡게 되자, 그는 기도를 하기에 합당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을 때에도 기도를 하느라고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기도를 강행한다는 것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정신과 자세가 전체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면, 그 같은 상황에서는 기도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분의 임재를 느끼기 전까지는 기도를 시작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올바르게 되기 전까지는 우리는 그분의 임재를 느낄 수 없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준비된 상태에 있어야만 합니다. 영적으로 준비된 상태란, 여러분의 사고가 곧고 진실 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단계들을 순서 그대로 거쳐야 한다는 것은 완전히 옳은 생각입니다. 여러분의 영이 정결케 되고 깨끗게 되고 영적인 생각 외에 다른 모든 생각들은 신성 모독적이고 그릇된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여러분은 하나님께로 향하고 그분과 대면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여러분의 영은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아니,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가는 여정에 있어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 목표점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갈 발판은 마련했습니다. 고통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일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성소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며,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