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 아니라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새로운 어떤 것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각 선교사들이 해야 할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신약 성경으로 돌아가서 사도의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고대 세계의 복음 전파에는 두 번째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믿은 사람들의 삶과 증거였습니다.   기독교의 선포는 심지어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도 시작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부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합니다.  )

David Martyn Lloyd-Jones

 

그것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말로만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서 여러분을 위하여 어떻게 처신하였는지를,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살전1:5)

 

 

내가 여러분의 주의를 끌고자 하는 말씀은 바울의 데살로니가전서 1장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강조하고자 하는 구절은 5절인데 그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그러면 내가 이 구절을 특별히 강조하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나는 이 구절만 생각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을 읽는 가운데 여러분도 주목하셨듯이, 이 장의 진짜 주제는 하나이며, 그것은 복음의 계시라는 전체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이것보다 더욱 중요한 주제가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교회와 세계의 전체적인 상황이 복음의 제시라는 문제에 대해 우리에게 특별히 진지한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오늘밤 이 세상을 위한 유일한 소망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필요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여기에 있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세상의 모든 시대의 사람에게 이 메시지가 어떻게 도달되도록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교회의 모든 분파가 인식하고 인정하는 문제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오늘날 바로 이 문제를 긴급하게 생각하지 않는 기독교의 분파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를 표현하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냈습니다. 오늘날 그들은 그것을 '의사 전달의 문제'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우리는 표어를 만들어 내고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용어들 가운데, 기독교 교회와 온갖 종류의 집회와 종교 회의에 내걸린 용어가 바로 의사 전달의 문제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이 아닌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모든 나라의 국내적인 문제입니다. 또한 선교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날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이것이 새로운 문제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20세기 중반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거의 지겨울 정도로 상기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원자 시대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전후 시대의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기독교 이후 시대의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지식의 발전, 특별히 과학의 발전으로 인하여, 위대하고 긴 전체 교회사의 어느 시기에도 직면한 적이 없었던 문제들에 오늘날 교회들이 직면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문제는 더  이상 우리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많은 남녀들에게 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칭의, 성화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는 다른 용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런 용어들에 대한 지식을 잃어버렸습니다. 따라서 이 의사 전달의 문제는 매우 새로운 어떤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큰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성경 번역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새 영어 성경’의 논리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성경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흠정역의 고어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사람들의 언어로 된 번역판을 갖춤으로써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결국 그 말씀을 이해한다면 그들은 그 의미를 이해하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앞에는 온갖 종류의 제안들이 제시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방법을 완성해야 한다고 이야기들을 합니다. 큰 사업체의 광고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도 합니다. 모든 것을 현대화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기독교 교회 밖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메시지가 도달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이 이런 논리를 잘 알고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이것입니다. 즉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며, 우리가 이 사실을 빨리 인식할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기독교 교회가 항상 직면해 온 것과 매우 동일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이 결코 달라지지 않음을 압니다. 세상은 항상 동일합니다. 세상에는 항상 하나님이 없습니다. 항상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세상은 항상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 나는 그것이 다른 옷을 입는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세상이 시대와 나라에 따라서 다른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겉으로만 그런 것입니다. 세상과 그것의 정신과 사곡한 마음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불행하게도 변하는 것은 오직 교회의 상황과 상태뿐입니다. 세상은 그 자세에 있어서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 문제가 새롭다거나 기이하다거나 독특하다고 느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나는 단지 열 절뿐인 이 장으로부터,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초대 교회가 직면했던 문제, 사도들이 직면했던 문제, 최초의 복음 전파자들이 직면했던 문제와 매우 동일함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이제 사도는 가장 흥미 있는 방식으로 그 문제를 우리 앞에 제시합니다. 성경 학자들은 이 서신이 사도가 최초로 쓴 서신이라고 합니다. 그 사실 자체도 흥미 있지만, 더욱 흥미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즉 이 장에서 그가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도들에게 복음이 그들에게 어떻게 전파되었는지를 상기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그러면서 그는 그것이 그들에게 어떻게 이르렀는지를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바로 이 점에 관심을 집중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사도가 직면하고 있었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나는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과 정확하게 동일하였다는 것을 보이고자 합니다. 이 위대한 사도는 이 나라 저 나라를 함께 여행하는 동행인 단 몇 명하고만 있었습니다. 그 곳은 이방 사회였습니다. 그는 오늘날 그리스의 일부인 마게도냐에 있었으며, 그 곳 사람들은 이교도들로서 히브리 문헌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성경 용어에 대해서도 몰랐으며, 죄악과 타락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오늘날의 세계와 똑같습니다. 이렇듯 완전히 이교적이며 하나님 없는 사회에서 사도는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그것이 캐나다, 미국, 영국 등 현재 해 아래 있는 모든 나라에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과 완전히 유사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는 그가 그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였으며, 그 결과 어떻게 데살로니가에 놀라운 증거를 내놓은 교회가 섰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새로운 어떤 것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각 선교사들이 해야 할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신약 성경으로 돌아가서 사도의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현 상황의 비극은,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옛 사도적 방식을 따라서 옛 방식으로 전파되는 옛 복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새로운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매우 단순하고 명확한 용어로 그것을 우리 앞에 제시합니다. 사도는
고대 세계의 복음 전파에서 두 가지 중요한 요인이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 것은 사도의 설교였습니다. 그것은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지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사명을 주었습니다. 주님이 그들을 부르셨고 파송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사도적인 설교, 이것은 분명히 가장 먼저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가 그것이 유일한 요소는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고대 세계의 복음 전파에는
두 번째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믿은 사람들의 삶과 증거였습니다. 사도는 그것에 크게 주의를 기울입니다. 여러분에게 그것을 보이겠습니다. 6절에서 9절을 읽겠습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또한 여러분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이 주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이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서부터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만 울려 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두루 퍼졌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두고는, 우리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어떠한 영접을 받았는지, 어떻게 해서 여러분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

 
이것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도 알듯이 선한 여러분, 곧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인 여러분은 내 복음 사명을 매우 쉽게 하였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한 이후, 여러분이 복음을 믿고 교회의 지체들이 된 이후 내가 발견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어떤 곳에 가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들은 내 말을 막고서 말하기를, ‘좋소, 우리는 당신에 대하여 알고 있소 우리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소 우리는 저 아래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들었소 우리는 당신이 전파한 결과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고 있소’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알듯이, 그 소문이 온 세상으로 퍼졌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위하여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여러분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당신은 바울이 전파한 결과, 데살로니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압니까?’ 그들은 온 세상이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곳을 방문할 때 나는 거기서 기꺼이 내 이야기를 들으려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여러분의 삶과 생활방식 전체에 그런 변화를 일으킨 이 메시지에 대하여 듣고자 합니다.

바로 이것이
두 번째 요소입니다. 나는 오늘 밤 이 두 요소를 강조하고자 합니다.

이 영광스러운 메시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많은 사람에게 전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내가 가장 먼저 하고자 하는 말은
강단이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전하며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의 설교는 직장에서, 공장에서 혹은 어떤 전문 직종에서 일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여러 선한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입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메시지의 진실성에 대한 살아 있는 증거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1세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복음은 데살로니가인들의 생활과 삶에 의하여 참된 것으로 입증되었으며, 모든 사람이 그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의 이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메시지를 위한 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좋습니다. 이제 이 두 가지를 함께 보십시다. 왜냐하면 사도가 이 두 요소에 공통된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전파된 메시지입니다.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이것이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 다른 요소가 있습니다.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그러므로 여기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메시지와 그 위에 임한 성령의 능력인 것입니다! 사도에게서 그것이 보입니다. 이것은 또한 그 메시지를 믿었고 그래서 교회의 지체가 된 사람들 속에서도 동일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밤에 나는 여러분 앞에 이 두 가지를 제시하려 합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만약 이 두 가지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차라리 포기하여야 합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렇게 시작되고 계속되어 왔습니다. 역사상 모든 위대한 부흥과 종교개혁을 보십시오. 그것들이 무엇입니까? 그것들은 그저 사도행전으로 돌아오는 것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이 부흥과 새로운 각성을 얻고, 하나님에게 돌아와서 생명을 다하여 그 분을 섬기게 되는 것은 교회가 이것으로, 즉 그 위에 임한 메시지와 성령의 능력으로 돌아올 때입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함께 그 두 가지 메시지를 살펴봅시다. 우리가 전파할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기독교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질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섬뜩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 질문을 제기해야 합니다. 오늘날 온갖 종류의 것들이 기독교라고 통용되고 있으므로, 나는 그 어느 것도 기독교라고 인식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사도가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우리 메시지의 첫 번째 본질적인 성격은, 그것이 사람이 지금까지 들은 것 중 가장 위대한 좋은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 메시지에 복음이 들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기독교 메시지를 전파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은 그 메시지가 원자탄이나 수소탄 그리고 전쟁 등에 대한 계속되는 이야기, 그것들에 대한 저항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신문이나 텔레비전, 라디오에서 기독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인상을 얻기로 한다면, 아마 여러분은 기독교란 전쟁과 무장에 대한 저항 그리고 인종 문제와 다양한 정치적.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저항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나는 지금 기독교가 그런 문제들과 무관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그것이 복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메시지를 복음으로 만드는 것은 좋은 소식의 선포입니다.

복음은 신문에 보도된 최근의 추문에 대한 주제적 논평 혹은 최근의 어떤 뉴스에 대한 언급이 아닙니다. 우리는 왕들과 왕자들과 대통령들과 수상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나라를 이끌어 가고 있으며 국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가에 대해 시간을 들여 이야기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도 못합니다.

 
내가 오늘 밤 여기에 온 것은 영국 여왕과 그녀의 내각 혹은 미국의 대통령 혹은 다른 어떤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나는 그런 사실들은 잘 알지 못하며 그런 자료들을 준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하여야 할지를 그들에게 이야기하거나, 충고한다는 것은 내게 주제 넘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제 소명이 아닙니다.
설교자의 임무는 선포입니다. 좋은 소식, 복음, 세상이 지금까지 들은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좋은 소식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계속해서 그 좋은 소식을 정의합니다. 이 좋은 소식, 이 복음은 ‘말로’ 진술되고 선포된 것입니다. ‘말로’ 이제 여러분은 사도가 그것을 매우 흥미 있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드는 말하기를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복음이 ‘말로만’ 오지 않았다고 말할 때, 그는 또한 그것이 실제로는 ‘말로’ 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어떤 사건이 발생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말은 그것이 그렇게 발생하기는 했지만 거기에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복음이 당신들에게 말로 왔습니다. 그것은 말로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로만 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능력 안에서 그리고 성령 안에서 그리고 큰 확신 안에서 온 것입니다.


내가 힘을 들여서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우리는 지금 교리를 싫어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신학을 싫어합니다. 정의를 싫어합니다. 우리는 엄밀성을 싫어하는 연약하고 나약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기독교는 너무나 훌륭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정의될 수 없다고 말해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무엇이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듭니까? 그러면 사람들은 말하기를 당신도 알다시피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 속에 들어 있는 훌륭한 정신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놀라운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무엇입니까? 기독교는 선한 행동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모든 본질적인 가르침을 부인하면서도 금세기에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칭찬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위대한 그리스도인으로 여겨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희생하였고 착한 일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독교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정의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정의할 수 없습니까? 우리는 끔찍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혼돈의 시대, 혼란의 시대,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기독교 신앙의 정의들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명제적 계시(prepositional revelation)를 싫어합니다. 몇 년 전에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 표어가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잡히는 것이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임하는 놀라운 성령이다. 당신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것을 설명하거나 정의하지 못하지만, 그것이 놀랍다는 사실을 느낀다. “그것은 잡히는 것이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다”(It is caught not taught). 바로 이것이 명제적 계시 혹은 명제적 진리에 대한 오늘날의 큰 반대 개념입니다. 그들은 당신은 기독교 신앙을 정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려고 시도해서도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꽃의 향기를 분석하는 일과도 같다고 합니다. 그것은 놀랍지만 신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용어와 정의들로 축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실례를 들겠습니다. 나는 약5년 전에 매우 훌륭한 제목을 가진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é궁극적 질문들û(Ultimate Questions)이었는데 기독교 신앙의 전체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기독교가 이와 비슷한 어떤 것임을 알고 잇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만약 그가 어떤 큰 산의 꼭대기에 올라가기만 하면 거기서 놀라운 경치를 볼 수 있으리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다. 만약 당신이 그 산의 정상까지 올라가기만 하면 당신은 거기서 당신 생애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거대한 장관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볼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그는 그것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일찍 일어나서 차를 타고 여행을 합니다. 그러나 그는 차에서 내려야 합니다. 그는 길을 따라서 걷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그는 그 길마저 떠나야 합니다. 그는 들과 오솔길을 가로지르기 시작하며, 마침내 산등성이에 도달하고, 이제 그것을 기어오르면서 산꼭대기를 가늠해 봅니다. 하늘에서는 태양이 내리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는 그 경치를 보고자 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올라갑니다. 마침내 손과 무릎으로 덤불을 잡고 바위 벼랑을 기면서, 손과 무릎을 베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문제도 아닙니다. 계속해서 올라간 결과 마침내 그는 정상에 도달합니다. 그의 앞에는 그 영광스러운 장관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는 그 광경을 본 후에 어떻게 합니까? 그 책 저자는,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정의하거나, 그것이 ‘이것과 같다’거나 ‘저것과 같지 않다’고 말함으로써 그 광경을 어떤 명제들로 축소시키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게 하는 것은 비웃음을 살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한 일은 이것이다. 그는 단지 산꼭대기에 서서 눈과 입을 넓게 열고, 놀라움과 감탄과 기이함에 넋을 잃었던 것이다.” “아니, 아니. 그는 그것을 정의하거나 묘사하거나 분석하지 않는다. 나는 그가 노래를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있지만, 그 광경을 몇 개의 명제들로 축소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바로 이것이 유행하는 설교입니다.

이런 통합적인 정신과 함께 우리는 오늘날 모든 사람을 들어 올리는 듯한, 또한 만약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마침내 개신교를 로마 가톨릭교로 되돌려 놓고 말 이야기를 듣고 있으며,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놀라운 영이라는 이야기 그리고 만약 공산주의를 반대하기만 한다면 무엇을 믿든지 당신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등등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의를 교묘히 회피하는 어떤 것입니다.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는 오늘 밤 바로 이 질문보다 더 긴급한 질문을 알지 못합니다. 기독교는 정의할 수 있습니까, 정의할 수 없습니까? 사도 바울에 따르면 기독교는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 복음이 말로 너희에게 이르렀다”고 했으며, 이것은 수세기를 통하여 교회가 말해 온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도 비극적이지만 않았다면 그것은 매우 재미있을 뻔했습니다. 나는 기독교가 설명될 수도 없고 정의될 수도 없고 명제들로 진술될 수도 없다는 현대적 견해를 가진 많은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이 주일마다 교회에 가서 예배 중 일정한 시간이 되면 일어나서 함께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일련의 정의입니다. 명제입니다. 그리고 뒤에 그들은 아타나시우스 신조와 니케아 신조를 암송합니다. 이것들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더욱 정교한 진리의 정의들과 설명들인 것입니다.


교회가 항상 이런 신조들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대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교회가 신조들을 만들어 낸 것은 신앙을 정의하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에도 벌써 거짓 가르침들이 스며들어 오기 시작하였고 사도들이 그것을 처리해야 했음을 우리는 봅니다. 사도들은 그것을 비판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위해 싸웠습니다. 사도들의 시대가 지난 다음에는 사태가 더욱 나빠졌습니다. 온갖 종류의 거짓 복음들, 거짓 신조들, 거짓 사상들이 있었고 교회는 끔찍한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성령의 인도와 지시에 따라 위대한 종교 회의들에서 만났던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만났습니까? 그렇습니다. 신앙의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 만난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은 이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저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이단을 정의하고 설명하였으며, 그것을 비판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인도하고 보호하기 위하여 그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듯이, 초대 교회의 종교 회의들, 초기의 범교회적 종교 회의들은 신앙을 정의하기 위해 열렸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범교회적 종교 회의들은 신앙은 정의할 수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해 열립니다. 이런 일은 1세기에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초대 교회 시대로부터 이렇게도 멀리 떠나 있습니다.

 
여러분은 위대한 종교개혁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십니까?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위대한 격발, 성령의 그 위대한 기름부으심이 있은 직후에 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의 신앙을 정의하고 설명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위대한 신앙 고백을 작성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아우스부르그 신앙 고백(Augsburg Confession)을 가지고 계십니다. 여러분에게는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영국 교회의 33개 신조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전 세계의 장로교회들이 믿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이런 위대한 신앙 고백서들이 무엇입니까? 그것들은 신앙의 정의일 뿐입니다. 그것들은 성경을 해석한 것에 비춰 보았을 때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참되지 않은 것인지에 대한 설명일 뿐입니다.

 
이와 같이 그 모든 위대한 시기에 교회는 기독교 신앙을 명제들로 정의되고 진술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보여 주기 위해 매우 열심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 교회의 대다수는 이 모든 영역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그들이 오랜 세월을 통하여 부서지지 않았던 기독교 교회의 전통에서 떠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도들 자신의 가르침을 부인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자 합니다.


이 한 장에서 그것을 여러분에게 보이겠습니다.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임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말로 임했습니다. 그러면 그 말이 무엇입니까? 사도는 매우 괄목할 만한 방식으로 그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이 작은 장의 9절과 10절에서 기독교 교리의 완벽한 개요를 가질 수 있음을 아십니까?

 
그들은 우리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어떠한 영접을 받았는지, 어떻게 해서 여러분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  어떻게 해서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신 그분의 아들, 곧 장차 닥쳐 올 진노에서 우리를 건져 주실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시기를 기다리는지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사도는 무엇을 전파했습니까? 이 사람들에게 정치학을 설교했습니까? 그들에게 이제 로마 제국의 멍에를 벗어 버리기 위해 무장 봉기를 감행할 때가 되었다고 말했습니까? 그가 세금 납부를 거절하였습니까? 당시 일어나고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에 저항하였습니까? 이런 것들은 전혀 그의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의 설교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는 어디서 출발했습니까? 어떻게 시작하였습니까? 일차적 요점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하나님’이라고 대답합니다! 사도의 설교는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시작합니다! , 나는 이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듯이 기독교 설교는 사람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사람으로부터 출발하는 설교자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무 주관적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 우리의 필요들로부터 출발하며, 그런 연후에 항상 우리를 만족시킬 무엇인가를 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결코 사람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오해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이것을 말하겠습니다.
기독교의 선포는 심지어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도 시작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부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현재 우리의 큰 문제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예수께로 오시오. 그러면 당신은 이것 저것 등등을 얻을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포교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포교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이 사도가 포교한 방식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며, 자신들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때때로 나무나 돌이나 보석으로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들을 위하여 성전을 만들고 거기서 그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그 신들에게 예배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신들에게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들은 우상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사도가 그들에게 한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알듯이 여러분이 섬기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우상들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그것들은 여러분이 만든 것이며, 그것들에게는 생명도 없고 능력도 없으며, 그것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거짓말쟁이이고, 공허이고, 멍청이며,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도는 그들에게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을 폭로하였고, 이 사람들이 어떻게 아무것도 아닌 것에게, 거짓에게, 추측에게, 인간의 마음의 투사물에게, 인간 자신의 개념이 만들어 낸 것에게 절을 하고 있었는지를 폭로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상들은 공허합니다.( PIl – 믿는다고 자칭하는 사람들을 향한 말)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것은 그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합니다.

심각한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이 말 못하는 우상들, 이 공허한 것들, 이 빈 것들을 경배하고 있는 동안, 그들이 유일하게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 예배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 그는 그들에게 그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에 참되신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저 우상들, 저것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저것들을 내다 버려야 합니다. 그것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생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는 그들에게 태초에 아무것도 없는 데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은’ 그 하나님,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인간은 그 모든 것의 영광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의 주인으로 만드셨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히브리인의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 유일하게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하여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계속해서 이 모든 것의 치명적인 중요성을 이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을 위하여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것은 그를 통하여 우주를 다스리기 위함이었으며, 사람을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웨스터민스터 신앙 고백 소요리 문답의 첫 번째 질문과 대답이 그것을 나타냅니다. ‘사람이 주된 목적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기는 것이다’ 입니다. 사도는 이것을 그들에게 설교하였습니다. 그는 “여러분도 알듯이 사람은 단순한 동물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고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법을 주셨고, 사람은 그것에 따라서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사람은 책임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그의 삶은 하나님 아래서의 삶이며, 그 삶이 끝난다고 해서 마지막이 아닙니다. 사람은 계속해서 존재하며 그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구절의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는 말씀을 보셨습니까?


이것이 사도의 설교였습니다. 사도는 이 사람들을 주목하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를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 헛것들을 섬기고, 유일하게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은 예배하고 섬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 분 앞에 설 것입니다. 이는 여러분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남자들과 여자들이며,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책임을 지워 놓으셨기 때문에 그 책임에 비추어서 여러분을 살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 속에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에게 설명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그렇게 살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될 것이며 심지어 바로 지금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는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에게로 돌아서시오. 이는 당신의 영원한 미래가 하나님과 당신의 관계에 의하여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 유대인들을 통하여, 수세기를 내려오면서 자신은 거룩한 신이며, 정당한 신이며, 의로운 신이며, 죄를 미워하는 신이며, 그 얼굴에 너무나 순결하기 때문에 악을 보실 수도 없는 신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여러분이 모두 그 분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으며, 최후의 심판 날에 그 분 앞에 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는 바로 이렇게 설교하였습니다. 이것이 사도의 메시지입니다. 로마 제국의 정치적 상황, 이런 저런 불의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래,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불결한 존재인 인간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 말 좀 들어 보시오. 나는 이 기독교 교회의 메시지가 복음, 좋은 소식이라고 말하기 위하여 당신이 시간을 낸 것이라고 생각했소. 그런데 지금 내게는 그것이 별로 좋은 소식이 아닌 것같이 들립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합니다. 이것은 오직 설교의 서론일 뿐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듯이, 나는 교회의 문제의 절반이 우리가 이 서론을 망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렇게도 서둘러서 예수께로 오지만 사람들은 예수께 오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 이유를 아십니까? 나는 여러분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필요성을 한 번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한 진실을 한 번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슬프고 불행하면, 신체적 치료를 원하며, 인도를 원하면, 그들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하면 예수께로 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께로 오는 길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그저 ‘예수께 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이 그 분이 필요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복음으로 오기 전에 율법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구원에 대하여 말하기 전에 하나님에 대하여 선포합니다. 오늘날 세계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우주의 중심입니다. 사람의 필요가 처음이요 나중입니다. 하나님, 전능자, 항상 계신 이, 영원한 하나님, 모든 것 위에 계시며 여전히 다스리시는 그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십시오. 메시지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도는 이렇게 그들의 필요와 절망적인 궁지의 상태를 보여 준 후에 계속해서 그들에게 복음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그 전체가 10절에 들어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사도는 이제 그들에게 예수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 목수,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입니다. 그는 나이 서른에 갑자기 무대에 나타나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이 젊은 갈릴리 사람에 대하여 그들에게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나이가 열두 살 되던 어느 해에 성전에서 율법의 박사들과 논쟁하여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도는 그들에게 이 놀라운 사람, 그의 충격적인 가르침, 그의 기적들, 그의 기이한 행적들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예수! 그가 누구입니까? 그는 그들에게 이 사람이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 하늘로부터 온 그의 아들, 예수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의 설교가 무엇입니까? 성육신의 교리입니다. 친구 여러분, 여러분은 교리가 없이는 안 됩니다. 만약 교리가 없이 해 보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아무런 복음도 듣지 못하게 될 것이며, 기독교가 아닌 영화된 인본주의의 어떤 종류에 불과한 것을 설교하고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교리적입니다. 그것은 정의의 문제이며, 말이며, 신학입니다. 그 신학이 여기에 있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 동정녀 탄생, 기적적인 탄생!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필수적인 교리입니다. 그의 인격의 교리, 한 인격 속에 두 본성이 있는 교리입니다. 여러분은 이해가 안 되실 것입니다. 저도 이해를 못합니다! 여러분은 그것(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두 본성, 한 인격)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 적이 있습니까? 이것이 교리입니다.

 
여기 그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여러분은 특히 이 진리, 즉 동정녀 탄생의 성육신의 전체 교리 이 명제를 믿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것을 떠나서는 기독교는 없습니다.


만약 그가 여러분에게 단순한 한 인간이라면, 한 선한 사람, 정치적 선동가 혹은 창백한 갈릴리 사람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성육신의 교리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4:4-5)


이것이 바울이 전파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는 우리를 장차 올 진노에서 건진, 그의 십자가의 죽음에 관한 그 놀라운 일에 대하여 계속해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사도는 그들에게 이 놀라운 인물, 나사렛 예수,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그들에게 전파한 것이 ‘그가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신다’는 것임을 주목하실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 분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우리에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우리의 열심을 위한 모범, 전형, 자극을 주기 위해서만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그저 우리 자신을 희생하라고 말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를 위하여 어떤 일을 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를 건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들에게 대속의 교리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없이는 기독교는 없는 것입니다.

 
사도는 어떻게 그 분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죄와 형벌을 담당하셨는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는 고린도인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고후 5:19)


혹은 사도 베드로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그는 우리 죄를 그의 몸에 몸소 지시고,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가 매를 맞아 상함으로, 여러분이 나음을 얻었습니다.(벧전 2:24)


십자가의 메시지! 우리는 이것에 대하여 명확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비록 네가 내 아들에 대하여 이렇게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대속이 있습니다. 형벌이 있습니다. 그 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그가 매를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하나님에게 맞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죄악과 내 죄악을 자기 아들에게 담당시켜서 그를 때리고 우리 대신 그를 벌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값없는 사죄와 구원을 제공하는 위대한 거래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하셨습니다. 그 모든 것은 그 분 안에 있습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 말해 주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를 위하여 그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셨습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것을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 죄악의 형벌을 담당하셨습니다. 그것이 사도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말로 온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특정한 교리입니다. 그것은 특정한 것이며 정의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고 나서 당신은 그가 계속해서 하나님이 죽음에서 일으키신 그 아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것을 기다려야 할 것을 상기시키는 것에 주목하게 됩니다.


부활! 이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나는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문자적이고 육체적인 부활을 더 이상 믿지 않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아니, 아니, 중요한 것은 예수가 오늘날까지 살아서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문자적으로 무덤에서 살아났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문제가 안 된다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을 썼겠습니까? 그는 만약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살아나지 않았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고 여러분들의 믿음도 헛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생에서만 그리스도께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가 계십니다. 이것이 부활의 교리입니다!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사람들이 복음은 말로 오지 않으며, 정의를 내리는 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당신이 착하고 친절한 사람이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한 당신이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은 문제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입니까? 결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육체의 부활이 없다면 복음은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다면 복음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4:25에서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시고, 또한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고 말합니다.

여기 이 능력 있는 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선포하며, 그의 사역이 충분함을 선언하고 계십니다. 화목은 성취되었습니다. 이 특정한 교리를 믿고 하늘로부터 그의 아들이 오실 것을 기다리지 않는 한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분은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그의 대적들이 그의 발등상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낙망하지 마십시오. 그 분이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 분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분은 앉아서 통치하시며, 그의 대적들이 자신의 발등상이 되며 베들레헴의 아기로서가 아니라 주의 주, 왕 중의 왕으로서 거룩한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하늘 구름을 타고 의로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때까지 기다리실 것입니다. 그 분은 모든 악과 죄를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마귀와 사단과 지옥과 모든 것이 지옥불에 떨어지고, 태양이 연속적인 여행을 하기 앞서서 달이 더 이상 차고 이지러지지 않을 때까지 그의 나라가 해변에서 해변까지 뻗어나가는 그 곳에서 다스리실 것입니다. 그의 백성은 그것을 기다립니다. 우리 몸의 구속을 이루고, 땅에도 바다에도 없었던 그의 나라가 임하여, 의가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그 위대한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의 설교였습니다! 지나가면서 하는 말인데, 여러분은 결코 그것을 20분만에 설교할 수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큰 책임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집에 가서 텔레비전을 보려고 너무나 서두릅니다. 여러분의 설교자들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만약 그들이 복음을 설교한다면 그들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이 강력한 진리를 몇 분 만에 선포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주목하고, 자랑하며, 우리에게 말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사도의 메시지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것을 듣기를 원치 않는다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가 말하지만,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결코 그리스도인이었던 적도 없습니다. 이것들은 영원의 무한 속에서 성도들을 사로잡는 것들입니다. 이것이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여기 그것이 있습니다. 말로, 정의로, 명제들로, 신학으로, 교리로 여러분은 그것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그것을 받았습니까?


그러나 잠깐 기다리십시오. 사도는 그것이 말로만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왔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다른 것들과 함께 이것도 강조하고자 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잡아두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정통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나는 당신이 세상 교회(a world church)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개의치 않습니다. 만약 그것이 이 진리를 선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용하며 익살이 될 것입니다. 정통은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정통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어떤 교회는 완전하게 정통이면서도 동시에 완전하게 죽어 있고 또한 완전하게 무용할 수 있습니다. 사도의 메시지는 정통이었지만 거기에는 그 이외의 무엇이 있었습니다.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그가 말하는 것은 무엇에 관한 것입니까? 그는 일차적으로 그들에게 전하는 자신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도 알듯이 내가 여러분에게 설교할 때 그 말하는 자가 단순히 나 바울이 아니었음을 나는 알았습니다. 성령께서 나를 사용하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나는 내가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나는 그 분이 나를 그 분으로 옷 입혀 주신 사실을 알았습니다. 나는 내가 단지 도구, 통로, 수단에 불과함을 알았습니다. 나는 내가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나는 큰 확신으로 설교하였습니다. 나는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나는 그 분이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계셨음을 알았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듯이 사도는 항상 성령의 능력에 의지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메시지를 확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방법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세심해야 합니다. 사도의 방법은 바로 성령을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두 번째 장에서 그것을 부정적으로 표현한 것을 들어 보십시오. 3절부터 읽겠습니다.


우리의 권면은 잘못된 생각이나 불순한 마음이나 속임수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서, 맡은 그대로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우리는 어느 때든지 아첨하는 말을 한 일이 없고, 구실을 꾸며서 탐욕을 부린 일도 없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증언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또한, 여러분에게서나 다른 사람에게서나,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한 일이 없습니다.(살전 2:3-6)


이 모든 말로 그가 참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가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파했을 때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에 마음을 쓰지 않았음을 여러분이 압니다. 내 유일한 관심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는 결코 그의 회중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강단으로 뛰어올라 가서, 회중을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몇 가지 농담을 지껄이고, 단지 그들의 감정을 달래기 위하여 경솔한 언행으로 그들을 즐겁게 하는 것을 나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은 생각할 수도, 결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이 복스러운 메시지는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 속에 있었습니다.


고린도의 회중에게 편지하면서 그가 이것을 표현한 방식을 들어 보십시오. 그는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아무런 자신감도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큰 군중을 좌지우지하는 예식의 대가가 아니었습니다. 결코 아닙니다!
“약하며 두려워하며 떨었노라. 이는 그가 사람들과 이 복스러운 메시지 사이에 있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는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라고 말합니다.


아무도 그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고린도인들은 그를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그의 모습이 연약하다’고 말했습니다. 사도에게는 볼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 점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다. 그는 인물이 잘 생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키가 작고, 대머리였으며, 매부리코였고, 눈에는 염증이 있었으며, 거의 혐오감을 주고 거슬리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의 외모는 연약하였고 그의 말은 거슬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말은 성령의 나타남과 함께하였습니다.

친구 여러분, 우리의 방법은 우리의 메시지만큼 중요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방법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결과에 너무나 관심을 둔 나머지 정도를 벗어난 의심스러운 방법에 호소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을 우롱하며 그들을 유혹하거나 그들의 마음에 드는 말을 하려고 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결코, 결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 복스러운 말씀의 선포는 성령과 능력의 나타남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바울은 “나는 내가 큰 확신으로 전파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사도의 설교였습니다. 그것은 마틴 루터의 전파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또한 존 칼빈의 설교였습니다. 그것은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을 보좌에서 떨게 만들었으며 영국의 군대보다도 그의 기도를 더 두려워하게 만든, 존 녹스(John Knox)의 설교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디에 갔었습니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우리는 다시 이리로 돌아올 것입니까? 이것은 필요한 것이고 모든 부흥과 개혁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길입니다. 성령과 능력이 나타나는 설교! 이것이 처음에 기독교가 전파된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참으로 여러 세기를 내려오면서 항상 전파된 방식이었습니다.


말을 맺기 전에 다른 측면에서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그것은 사도에 관한 진실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진실이었습니다. 그가 그들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실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신도 여러분 가운데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살전 2:13).


여러분,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거기에는 성령의 능력과 확신으로 설교하는 작은 사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악하고 부도덕한 죄된 삶을 살고 있는 이교도요, 빛이 없으며, 무지한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들으면서 “이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다. 거기에는 무엇인가가 더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달았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게 했을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사도 안에서 역사하시던 그 성령이 동일하게 그들 안에서 역사한 것입니다.

 
죄를 깨닫게 할 수 있는, 어두워진 인간의 마음에 빛을 비출 수 있는 이는 성령뿐입니다. 사람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이는 오직 성령뿐입니다. 바울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설교하고 있을 때, 그 성령은 그들 속에서도 역사하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그들은 그 말씀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완전히 무지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나 성령에 대하여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 무지한 사람들이 믿은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그들에게 빛을 비춘 것입니다. 선교사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배경이나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어떤 나라에서라도 복음이 전파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그들 안에서 역사하셨고, 그들은 믿었으며 받아들였습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라고 그는 말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믿었고, 사도를 본받았으며, 교회에서 연합하였습니다. 그것은 큰 환난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친척과 친구들에게 핍박을 받았으며, 그 사회에서 추방당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비록 많은 환난 가운데 있었지만 그들은 성령의 기쁨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이 진리를 깨닫고서, 그들은 필요하다면 그 진리를 위하여 죽을 각오도 되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 진리를 위하여 죽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영원한 운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도 잔인한 대접을 받았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아무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 환난에 직면하여 얼굴에 미소를 지었으며, 그들 중 어떤 사람은 사자굴에 던져지면서도 자기들이 마침내 그 이름을 위하여 환난을 당하기에 합당하게 여겨진 사실로 인하여 하나님에게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의 결과로 모든 사람이 그들에 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참된 일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참된 일이었음을 압니다. 나는 그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와서 ‘살아있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것은 모임 끝에 강단 앞으로 걸어 나와서 카드에 서명을 하고서는 다음날이나 일 주일 혹은 이 주일 후에 까맣게 잊어버리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결코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거듭났습니다. 성령께서 당신의 일을 하셨고, 그들은 우상에게서 하나님에게로 돌아섰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생명 안으로 들어왔고 교회 안에서 그들의 자리를 잡았으며,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았고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도 알듯이 그들은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을 계속했습니다. 이것이 3절의 위대한 일입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살전 1:3).

그들은 그대로 계속하였습니다. 그것은 냄비가 불에 잠깐 달궈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감정적인 흥분이 아니었습니다.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새로운 남자와 여자들이었고, 그렇게 계속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모든 사람이 그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8). 여러분이 보듯이 이것이 그 결과로 일어난 일입니다.


데살로니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길 모퉁이에 서 있다가 갑자기 한 사람이 어떤 모임에 가는 것을 보고서는 이렇게 말하곤 하였습니다. “저 사람 보이죠? 저 사람이 이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나세요? 그는 술주정꾼이었고 오입쟁이였고 아내를 때리는 사람이었고 바람둥이였고 부끄러운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지금 그 사람을 보세요! 얼굴이 달라졌고 옷 입는 것이 달라졌고 모든 것이 달라졌어요. 그의 아내가 달라졌고 자녀들이 달라졌고 그 가정이 달라졌어요. 도데체 무슨 일이죠?” 그러나 다른 사람이 말합니다. “아, 내가 말해 줄 수 있죠. 저 바울이라는 사람이 와서 설교하기 시작한 이래로 그렇게 되었어요. 그 사람의 말을 들은 이후, 그는 다른 사람이 되었어요.” 내가 이해하는 한,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이 하나뿐인 메시지가 진리임을 확증하고 증명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강력한 부어 주심입니다. 계속해서 진리를 전파하십시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이 하늘을 열고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고 신선하게 우리에게 세례를 베푸시기를 기도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