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 청소년들의 반항 문제

(만일 냉정하고도 정직한 심사숙고를 통해 부모로서 자신의 허물을 깨닫게 되었다면, 주님께 자백하여야 하며, 또 어떤 경우에는 자녀들에게도 사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부모와 자녀간에 불필요한 불화를 일으키는 차이점들을 정직하게 해결할 때, 이 일은 부모에게나 자녀들에게 큰 위안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자식이 마음이 변화되어 돌아올 때 그를 기꺼이 환영하기 위해 문을 활짝 열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짐 비티

 

십대 반항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다룬 탁월한 글


십대는 자녀 양육의 모든 단계 가운데 문제는 많고 해답은 거의 없는 시기입니다. 각 상황마다 다르고, 그에 대한 해법도 다 다릅니다. 십대는 가장 지혜로운 부모들조차도 섬뜩하게 놀랄 수 있는 성인 욕구와, 무서울 정도로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십대들의 반항문제를 다룰 때에도 예외는 아닙니다. 결코 단순한 해결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대 반항문제로 인해 생기는 짐들을 덜 수 있는 몇 가지 지침들은 제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십대 문제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는 부모들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반항이 심각한 것이라면, 우리가 제시하는 원칙뿐 아니라 우리의 인내도 한계의 시험을 받게 될 것입니다. 평안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전 어느 때보다 주님을 더욱 의지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주님께 의지하는 사람들은 늘 한결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니, 그들에게 완전한 평화를 주시기 바랍니다"( 26:3)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십대 반항이 불러일으키는 어두운 시기에, 주님을 의뢰하는 것이 절망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줄 것입니다.


우리가 위를 바라보는 동안 뒤로 물러나 침륜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십대의 반항이 꼭 부모의 잘못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닙니다. 반항은 타락한 본성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일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를 받지 않는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훌륭한 가정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자녀들이 하나님을 위해 살게 될 것이라고 절대적으로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도 "내가 자식이라고 기르고 키웠는데,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다"( 1:2)라며 애통해 하셨습니다. 어떤 경건한 부모들은 자식들로 인해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부모된 우리가 성경적인 훈육방법을 따라 할 만큼 다 했다고 해서 우리 자녀들이 다른 그리스도인 자녀들처럼 잘 자라줄 것으로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실패가 더 커 보일 수가 있고, 이로 인해 마음의 평안을 빼앗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우리의 모든 상황을 주님의 주권에 내어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모든 권세는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28:18)라는 말씀으로 우리를 안돈시키고 계십니다. 우리 자녀에 대한 권세가 부모에게 있다고 해서 자녀에 대한 주님의 권세가 상실된 것은 아닙니다. 자녀들의 삶에 있어서 지극히 작은 일도 하나님이 알지 못하시거나 허락이 없이는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주님은 어느 곳에나 주님의 종들을 두시기에 우리의 십대 자녀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인생의 폭풍을 일으키셔서 우리 자녀들의 지혜로 도저히 어찌할 수 없어 곤고한 중에 주님께 부르짖게 하실 수 있습니다( 107:27-31). 우리는 자녀들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물론 자녀들을 적절히 양육하지 못했을 때에 때때로 불행한 결과가 초래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처럼 어렵고 민감한 주제를 다룰 때 균형을 잃지 않을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의 실패가 명약관화한 때일지라도, 주님은 반항하는 십대의 마음에 은혜의 역사를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과거에 일어난 일은 변경시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현재 상황을 다룰 뿐입니다.


만일 냉정하고도 정직한 심사숙고를 통해 부모로서 자신의 허물을 깨닫게 되었다면, 주님께 자백하여야 하며, 또 어떤 경우에는 자녀들에게도 사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부모와 자녀간에 불필요한 불화를 일으키는 차이점들을 정직하게 해결할 때, 이 일은 부모에게나 자녀들에게 큰 위안이 될 것입니다.


십대의 반항에 대해 생각하면서, 우리는 우선 진짜 반항과 정상적이고 건강한 독립에 대한 욕구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십대의 시기에는 독립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이 독립하기까지 성숙하도록 도와주어야 하며, 성인으로 성숙해짐으로 인해 일어나는 정상적인 분리를 막아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실제로 반항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면,

이 문제를 아버지나 어머니 어느 한쪽만 관여하여 다룰 것이 아니라 부모가 반드시 함께 풀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주셨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부모 모두의 시각을 아우를 때 분명한 해결 방안이 나오게 됩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동안에 각각 독단적으로 행한 이삭과 리브가( 27)는 결국 야곱과 에서의 장래에 있어서 눈물과 분노와 살해 음모, 수년간의 불안과 이별 등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부모가 서로 독단적으로 행할 경우 부부 갈등을 더욱 크게 할 수 있으며, 어려움들이 해결된 오랜 후에도 치유하기 어려운 부부 갈등을 유발시킬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부모는 서로 다투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다만 불에다 기름을 끼얹는 행위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과 같이,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불난 데 부채질을 한다"( 26:21)고 우리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싸움은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솔로몬은 이러한 일에 대해 잘 관찰하고 나서 "지혜로운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걸어서 소송하면, 어리석은 사람이 폭언과 야유로 맞서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안심할 수 없다"( 29:9)고 했습니다. 게다가 주님은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아니하며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아니하며, 다만 세미한 소리 가운데 계신 분이심을 엘리야에게 가르치셨습니다(왕상 19:11-13). 반항하는 십대 문제로 부모가 다투는 것은 실로 어리석고 무익한 일입니다.


잔소리도 무의미한 일입니다.

십대는 일반적으로 처음 듣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입니다. 만일 그들이 옳은 것을 행할 의도가 없다면, 반복해서 귀찮을 정도로 말을 하는 것은 분개심만 키울 뿐이며 아무 문제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자녀들이 반항하는 동안에는 바로 인도할 수 있는 기회는 매우 드뭅니다. 오직 주님만이 기회들을 마련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이 분명히 그러한 기회를 주실 때까지 참고 인내하는 것만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잠언은 "경우에 알맞는 말은, 은쟁반에 담긴 금사과이다"(25:11)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분노를 오래 참으면 지배자도 설득되고, 부드러운 혀는 뼈도 녹일 수 있다"( 25:1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삶 자체만으로도 큰 스승입니다.

종종 어떤 행동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결과는 반항의 무익성을 가르치는 최고의 교사입니다. 자녀의 행위에 대한 결과를 무조건 보호하고 감싸는 것은 확실히 해롭습니다. 이 경우 갈라디아서 6 7절의 원칙이 적용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십대에게 자신을 해롭게 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은 종종 자신의 타락을 방지하는 완충물이 되기도 하지만, 뜻하지 않게 그들의 반항을 연장시키기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반항을 선택할 수는 있지만, 한번 선택한 후에는 그 결과를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고난은 경험을 얻게 하고 성숙을 가져옵니다.

시편 기자는 이 사실을 입증하면서,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까지는 잘못된 길을 걸었으나,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킵니다."( 119:67)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나는 주의 율례를 배웠습니다.( 119:71)고 덧붙였습니다.

한편, 우리가 자녀들의 존경을 얻고 그들을 돕는 일에 인정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어질고 진실하게 살면 죄를 용서받고, 주님을 경외하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 16:6)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이 충분히 결정할만한 위치에 있는, 조금 더 나이 많은 십대들의 결정을 받아 주는 일이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결정을 무조건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그들의 결정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그들의 결정권을 인정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존중하면 그들은 우리를 더욱 존중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원칙을 어디까지 유보할 수 있겠는지 그 한계선을 정해야 합니다. 일단 이것이 분명해지면, 우리의 십대 자녀를 더욱 합리적으로 대할 수 있게 됩니다. 질문을 사용해보면 방침을 정하는데 더욱 유용한 도움이 되곤 합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해봅시다.

1. 우리가 기본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원칙은 무엇이며, 다만 개인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항목은 어떤 것인가?

2. 가정을 와해시키지 않을 정도의 자유를 어느 정도로 설정해 놓았는가?

3. 우리가 정한 원칙을 유보했을 때, 과연 우리 자녀들에게는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겠는가?

4. 자녀들의 인격적인 개발과 독립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자녀들에게 부과한 금지사항은 얼마나 되는가?

5. 우리가 자녀들에게 순종을 강요할 경우, 자녀들은 가정과 부모를 떠날 것인가?

6. 우리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다룰 때 차이를 두고서 다루고 있는가?

7. 우리가 내린 결정으로 인해 어떤 비극이 일어난다면 그것들을 감내하며 살 수 있는가?

8. 자녀들이 가정의 안전지대 안에서 반항하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그들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 것이 좋은가?


이러한 질문들은 이외의 더 많은 항목들도 스스로에게 물어볼 가치가 있습니다. 각 가정은 자신들이 처한 독특한 상황에서 발생한 각각의 문제들에 합당한 답을 찾는데 있어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자식이 마음이 변화되어 돌아올 때 그를 기꺼이 환영하기 위해 문을 활짝 열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제멋대로 집나간 아들을 뒤쫓아가지는 않았지만 아들이 돌아왔을 때 팔을 활짝 벌리고 아들을 맞아주었습니다. 십대들은 자신의 행동이 거절되었을 뿐이지, 본인들이 거절되거나 거부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십대의 시기는 발전의 시기입니다. 인생의 한 시기일 뿐입니다! 대부분의 십대는 수년이 지난 후에야 안정의 시기에 들어섭니다. 이 말이 반항하는 문제의 십대를 둔 부모에게 많은 위로가 되지는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만, 어쩌면 약간의 소망의 빛을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 또 다른 특별한 필요가 있습니다. 반항하는 십대라고 하는 특별한 스트레스 말고도 매일의 삶 자체로 모진 시련을 겪고 있는 편부모들이 있습니다. 편부모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가능한 모든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시간과 힘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며, 때로는 결과가 좋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25:4)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수년 동안 집나간 탕자가 집에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짐이 너무 무거워 감당하지 못할 때, 우리는 다만 주님만이 도우실 수 있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61:2)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우리 사랑하는 자녀들의 삶 속에서 계속해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모든 피조물이 다 주님의 지키시는 눈 아래 있습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냥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라도, 하나님께서는 잊어버리시지 않는다"( 12:6). 주님은 모든 영혼의 구원을 위해, 그리고 방황하는 모든 신자들의 행복을 위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우리는 주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독특하게 역사해오셨듯이 우리 자녀들의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독특하게 일하실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십대의 시기는 인생에 있어서 종종 가장 험난한 시기이지만, 폭풍 이는 바다를 잠잠케 하고 두려워 떠는 제자들의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준 바로 그분께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일을 해주실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