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14:1)

 

 

David Martyn Lloyd-Jones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14:1)

 

이 위대한 구절을 상고함에 있어, 나는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다음과 같은 번역을 더 선호한다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라. 또한 나를 믿으라." 다시 말해서, 후반부의 두 문장 모두를 명령형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 대부분에게 친숙한 내용일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 주님이자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급하신 말씀들 중 가장 친숙하고 자애로운 내용에 속할 것입니다. 따라서, 종종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취하되 그 실제적인 의미를 진정으로 직시하지도 않으며, 또한 응당 시도해야 할 분석마저 생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단순한 문학으로 간주함으로 인해, 성경에서 가장 거룩한 구절들에 담긴 참된 메시지를 간과하는 일이 너무도 흔하다는 사실은 참으로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 말씀의 정확한 의미와 그 엄밀한 취지를 간파하려는 수고를 하는 대신,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일반적인 효과나 영향력으로써 만족합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 말씀 곧 장례식에서 가장 친숙한 내용이라 할 수 있는 이 말씀에 대해서도 그러합니다. 이는 위로와 위안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너무도 자주 일종의 아름다운 음악이나 멋있는 문구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의 의미를 파악하려 하지 않고, 때로는 이토록 훌륭한 내용을 분석하는 것을 신성 모독인 양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14:1-3, 27)

 

우리는 이 말씀을 여러 차례 들은 적이 있지만, 만일 앞에 종이를 놓고서 다음과 같은 물음에 답을 적어보라는 갑작스런 요청을 받는다면 과연 어떻게 적을는지 의아스럽습니다. "이 친숙한 말씀 속에 내포된 교리는 무엇인가? - 이 말씀이 가리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과연 이 말씀은 단지 아름다운 음악이나 아름다운 사상 혹은 문학 구절들에 의해서도 잘 제시될 수 있는 일반적인 위안과 같은 내용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이 말씀으로부터 위로와 위안을 얻는 것이 그 속에서 선포된 교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까?

 

우리 주께서 이 말씀을 언급하신 목적은, 제자들로 하여금 진리를 보다 깊이 알고 이해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가르치며 도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주로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호소하셨는데, 그렇게 하신 방식이 의미심장하다고 중요합니다. 조금 전에 그는 약 3년 동안 그와 동행했던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들을 떠나려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겨우 삼십대 초반의 젊은 나이셨지만 놀랍고도 매우 유감스럽게 그들을 떠나려 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13:31,33). 그러나 그는 이러한 말씀이 제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고 그들을 불행하고 울적한 심정에 빠지게 했음을 즉시 알아차리셨습니다. 그들은 갑자기 직면한 문제로 인해 근심하였고 안절부절못하였으며 또한 마음의 평안을 상실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이 이에 대해 그토록 예민한 반응을 보인 이유를 상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나름대로 흥미롭고 중요한 것이지만, 우리가 이를 설명하느라고 지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아마 그들이 그분을 너무도 의존하였던 사실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와 같은 분을 예전에 결코 만났던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이러저러한 기복과 문제점들을 지니고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었지만 갑자기 그분을 만났으며 그를 따르고 특별한 방식으로 그와 동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었습니다. 그것은 놀랍고도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체험이었습니다. 그의 성품은 매우 특이하고 유일한 어떤 것이었고, 그들은 그러한 분을 예전에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의 인격 속에는 그 무엇이 있었으며, 그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 자체가 그들로서는 결코 알 수 없었던 그 무엇을 시사했습니다.  

 

그의 비범한 교훈, 은혜로운 말씀, 지식, 통찰력 등에 귀기울이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가 이적을 행하고,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며, 절름발이를 걷게 하고, 소경의 시력을 회복시키며, 심지어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광경 역시 그러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전적으로 그분을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추측건대,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자신이 그분께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는 심정에 깊이 빠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분은 자신이 떠나려 한다고 선언하셨고, 그들은 즉시 놀라움과 근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전에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야 함을 의미했을까요? 그들의 소망 없는 삶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했을까요? 그들은 "그분이 계시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만일 그분이 가신다면 우리는 끝장이고 망하고 만다" 우리 주님은 그들의 이 모든 생각을 알고 계셨습니다.

 

혹은 그들이 그분에게서, 애매하고 희미하긴 하지만, 분명히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을 발견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어떤 분이며 그가 세우실 나라가 어떤 것인지에 관한 유대교적 개념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것은 주로 정치적인 의미를 띠었습니다. 그가 스스로를 왕으로 내세우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들은 근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들 중에는 그분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시도록 강권하려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머지 않은 어느 시점에 그가 스스로를 왕으로 선포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그분의 시중을 들기로 결심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왕으로 내세우고 로마인들에게 큰 타력을 가하며 또한 제자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고서 멋진 나라를 세우실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곧 떠나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는 그 나라를 도래케 하는 일을 전혀 행하지 않으셨고, 따라서 그들은 낙심했으며 잘못 인도되어 속았다는 느낌마저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들이 생각했던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주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이 모든 생각을 감지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는 그들이 불안해하고 낙심하는 것을 보셨으며, 무엇보다도 그 근심이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셨습니다. 그들은 "근심했으며,"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근심을 매우 특징적인 방식으로 다루셨고 그들에게 이 영광스러운 위안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또한 이 시점에서 예비적으로 언급해야 할 다른 한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께서 생애의 어느 시기에 이렇게 하셨는지를 기억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 처형 전날 밤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일이 닥치고 있는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얼마 전에 그는 변화산에 계셨으며, 거기서 모세와 엘리야가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관해 그에게 말했습니다(9:31). 그는 십자가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인류를 위해 죄인으로 여겨질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실 때, 그것이 하나님의 면전으로부터 분리 당하는 무시무시한 순간을 의미할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으며, 후에 그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말씀하셨을 때 그의 영혼은 "심히 고민하셨습니다"(26:38)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따르는 이 불쌍한 제자들을 위로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임박한 문제보다도 그들의 불행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셨으며,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 처형 바로 전날 밤에 우리 주께서 다른 이들을 위로하고 위안하기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전형적이고도 특징적인 그분의 모습입니까! 그는 십자가상에서도 동일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 손과 발에 끔찍한 못이 박힌 이후에도 그러하셨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십자가상에서 죽음을 맞으면서도, 옆에서 죽어 가는 강도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할 틈을 할애하셨습니다. 자신의 몸에 세상 죄를 지우고서 자신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비참한 자에게 마음을 돌리실 정도로, 그분은 동정심과 사랑과 연민 그리고 이해심이 풍부하셨습니다.  

 

내가 서두에서 이 모든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 구절을 상고하면서 다른 그 무엇을 배울 수 잇든지 없든지간에, 우리가 관심을 표명하며 언급하는 분이 바로 그러한 분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파하는 예수, 구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그는 신약 성경의 메시지와 복음의 핵심이 되십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있는 바로 그곳에서 우리를 기꺼이 만날 준비를 하고 계시며 또한 만나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심지어 그는 우리가 물음을 제시하기도 전에 그것에 답하기 위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헤아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시며 또한 우리의 필요와 불행을 표현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위안을 베푸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가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을 때 그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모든 연령의 사람들에게, 단번에, 이와 동일한 마음의 근심을 지닌 다른 모든 이들에게 말씀하신 셈입니다. 요한복음 14-16장에서, 우리는 생명과 존재의 문제들에 압도되어 방황하는 모든 이들에게 최종적인 위로와 위안을 제시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나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소위 "마음의 평안" 곧 여유 있고 한적한 마음이라는 사실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진실 되게 지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는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를 평강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그것은 정신의 평화, 마음의 평강, 평온 등과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는 불안하며 들떠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이러한 불행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것은 여러 가지 원인들에 의해 조성됩니다.

 

우리 마음을 불안하고 들뜨게 만들며 또 모든 사람들에게서 평강을 빼앗는 한 가지는 바로 죽음에 대한 생각입니다. 이는 중요하고 분명한 사실입니다. 드고아 여인의 말을 빌자면,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모으지 못함 같을 것"(삼하14:14)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불안하게 하고 근심을 자아내게 하는 생각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르기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까지 우리 모두는 "죽기를 무서워하므로"(2:15)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인간의 마음을 잘 알았던 셰익스피어는 햄릿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미지의 영역이요 그 어떤 여행가도 되돌아온 적이 없는 ... 죽음 이후의 그 무엇에 대한 공포 ... "

 

그는 "양심이 우리 모두를 겁쟁이로 만든다"고 덧붙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일을 행하지만, "미지의 영역"에 대한 생각은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그것은 불안을 야기시키며, 번잡스럽고 들뜬 마음의 원인이 됩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의 삶에 우발적으로 닥치는 문제점들이나 거의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는 재난들도 있습니다. , 다음과 같이 조만간 닥치게 되는 곤경들이 있습니다. 질병, 사고, 낙심, 재정적인 손실, 사업상의 문제, 자녀나 사랑하는 이의 심각한 질병, 누군가의 죽음 등. 이것들은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를 시험하는 것들이며 우리는 이거들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과 삶을 위한 계획을 저마다 세우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완벽한 계획을 세웠다고 생각할 때, 갑작스럽게 무슨 일이 발생하며 우리의 세상은 흔들리고 진동하기 시작합니다. 피할 수 없는 재난들이 있으며, 반드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인생의 비극들이 존재합니다.

 

진정 우리에게 이러한 마음의 평안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불안한 마음을 해소시켜 주는 것이 단지 기독교 복음뿐만이 아니라고 하는 현실적인 논리를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그런 식으로 설득하려는 방식들은 매우 다양하며, 따라서 나는 그러한 부정적인 논리들로부터 언급하고자 합니다. 진실에 도달하기 전에 거짓부터 다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부정적인 일들에 집착하고서도 만족을 발견하지 못한 후에야 비로소 돌아와 복음에 귀기울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다른 그 무엇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물론 오늘날 사람들은 그런 주장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주장을 가리켜 "도량이 좁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항상 "우리는 모든 종교들의 세계적인 협의체를 원한다. 따라서 이 모두를 함께 결합시키되 각각으로부터 가장 좋은 점만을 골라내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써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은 배타적이며 복음만이 진정 우리에게 평강을 줄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줄 수 있다고 하는 다른 방법들을 구체적으로 상기해 보기로 합시다. 그중 하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가장 먼저 언급하는 이유는 이것이 가장 흔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분명히 드러나는 철학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 세상에서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면, 당신이 불행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며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납니다. 그들은 이르기를, 사람들의 문제점은 줄곧 생각하기를 고집하는데 있다고 합니다. 만일 그들이 생각하기를 멈추고서 동물적인 삶을 살아가기만 하면 모든 것은 좋아지리라고 합니다. 인간은 두뇌의 보다 고차적인 부분을 너무 과도하게 개발하였지만 만일 그가 보다 낮은 유형의 삶으로 되돌아간다면 더욱 행복해질 것이라고 말했던 로렌스(D.H.Lawrence)의 철학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처럼 철학적인 방식은 아니더라도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이르기를, "만일 당신이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단순하게 고민에서 벗어나 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의 삶의 비망록은 다른 이들과의 만남이나 여흥 혹은 이와 같은 다른 모든 일들 - 다시 말해서, 현실도피적인 일들 - 로 가능한 한 많이 채워집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들 말하는 또 다른 방법은 소위 낙관주의 철학을 신봉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직도 이 철학을 따르는 자들이 많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은 다양한 형태를 띱니다. 더 나은 삶으로의 진보가 불가피하다는 신념을 줄기차게 견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이르기를, 인류 전체가 보다 차원 높은 상태로 그리고 우리의 곤경과 문제들이 뒷켠으로 밀려나게 될 보다 온전한 상황으로 점차 진보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그들은 과거 한 세기 동안 발생했던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처럼 정확히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괜찮다. 이러한 일시적인 퇴보도 있지만 상황은 점차 나아질 것이다"라는 말속에 그들의 낙관주의가 나타나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그렇게들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히틀러가 분별력을 얻게 되리라고 마지막 순간까지 확신했습니다. 이는 낙관적이 되기 위하여 낙관주의를 믿는 격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줄곧 밝은 측면만 보려 하며, 어떤 일이 생기든지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것을 의무인 양 믿고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숙명주의 철학이라 지칭되는 조금 더 높은 단계를 지적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입장이 점점 더 흔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과 같은 언급 속에 그것이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생각하고 염려하고 또한 계산한다고 할지라도 영향을 미칠 수 없다. 물론, 사람들의 염려는 끊임없이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만일 그들이 그렇게 해보았자 근심만 가중시킨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만 한다면, 그들은 생각을 멈출 것이며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을 그만둘 것이다. 그들이 그토록 근심하는 이유는, 스스로 근심을 찾아 나서고 또한 그것을 예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숙명론적인 원칙에 의해 철저하게 정해진 듯이 보인다. 그러므로 생각하지 말고, 다만 일이 되어지기까지 기다리라. 그리하면 어쨌든, 일종의 일시적 평강이나마 얻을 거이며 근심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참된 평강을 그런 식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진정시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심리학적 방법을 언급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 상태와 마음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취급한다는 측면에서 약간 다를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속이도록 훈련시키기 위해 고안된 방식일 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우리가 당면한 문제점들에는 관심이 없으며 그러한 문제점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관심이 있습니다. 심리학자는 우리에게 마음의 평강을 주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목표입니다. 여러 가지 유형의 심리 요법들은 한결같이 "왜 염려하느냐?"는 식으로 접근합니다. ,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염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고자 애쓰며 우리에게 아름답고 즐거운 일들만 생각하려고 노력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생각을 가라앉히고 다른 일들로 생각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이 흔들릴 때 심리학자에게로 달려갑니다.  

 

그 다음 단계로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일종의 체념의 태도 혹은 스토아 철학입니다. 오늘날에는 이를 "과학적인 태도" 혹은 "심리학적 평온"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태도를 지지합니다. 그들은 이르기를, 우리가 주목해야 할 유일한 대상은 바로 우리의 감정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문제점은 감정에 의해 지배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감정에 압도당하면 초조하고 불행해집니다. 그래서 그 해결책은, 이와 같은 특별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물러서서 심리학적 평온을 유지해야 하며, 과학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오래 전에 이미 이 모두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감정과 정서를 항상 주의 깊게 절제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것들에 의해 해를 입게 된다는 사실이 바로 그들 철학의 본질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를 통제해야 하며 자신의 감정을 조절해야 합니다. 또한 나아가 자신에게 "이제 나는 객관적이어야 하며, 과학적이어야 하며, 그리고 나 자신을 이러한 것들에 휩쓸리도록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제 마지막 철학을 언급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교(邪敎)들과 크리스챤 사이언스와 같은 다른 종교들에 의해 제시되는 철학입니다. 특히 후자는 사람들에게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하는, 곧 어떤 상황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완벽한 평온을 유지하게 하는 방법을 신중하게 제시합니다. 다른 사교들도 이와 동일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내가 "사교들과 다른 종교들"이라고 언급하는 이유는, 오늘날 그러한 종교들의 수효가 현저하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주로 동양에서 유래하며, 근심으로부터 벗어나는 법과 마음의 평안에 이르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불교와 힌두교 및 그러한 부류들도 새로운 관심의 대상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불교나 동양 종교들 혹은 여러 가지 유형의 신비주의 등으로 전향하는 자들 중에 지성인을 자칭하는 자들이 더러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문제들에 정면으로 맞서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일한 구원이 신비주의에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며, 우주의 중심으로 들어가 만물의 배후에 있는 정신 가운데서 스스로를 망각하고자 합니다.) 그런 방법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추구하며 근심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 모든 사항들을 다룰 수는 없지만, 이들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사항을 개략적으로 설명해 볼 수는 있습니다. 먼저, 그것들 모두는 결국 염세적이고 절망적인 듯합니다.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매우 염세적이 됨을 의미합니다. 내가 "쾌활한 젊은이들"에 대해 항상 안타깝게 생각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들은 쾌락을 위해 살며 "너희 불쌍한 그리스도인들과 대조해 볼 때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실대로 말하자면 그들은 인생을 너무도 두려워하는 까닭에 감히 그것에 관해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것은 내가 아는 한 가장 심오한 염세주의입니다.

 

감상적인 낙관주의 역시, 20세기에 우리 앞에 현실로서 대두한 사실들을 직면하기를 거부합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진보하며 발전하고 있다는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절망적이라 할 수 있는 숙명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숙명론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일을 행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일들은 정해진 대로 되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위해 굳이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며, 심지어 생각조차 하지 말라."

 

또한 체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체념하는 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은 결국 이처럼 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단지 그것을 참아야 할뿐이다" - 이 역시 절망적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심리학은 문제와 직면조차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속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둠 속에서 휘파람을 부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사교들과 다른 여러 종교들에 대해서도 적용됩니다. 사람은 여러 차례 환생해야 될 수도 있지만, 그의 소망은 결국 우주 속에 흡수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 이 역시 심오한 염세주의입니다. 이 모든 견해들은, 그 최선의 그리고 최고의 형태라 할지라도, 단지 우리로 하여금 문제점들을 그냥 지나치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혹은 단지 문제 해결을 지연시키도록 도와주기 위해 고안되었을 뿐이며, 그것들을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들 중 우리에게 참된 기쁨이나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들에 대한 가장 큰 비판은 이들이, 어떤 면에서 이들 모두가 문제를 그대로 남겨둔다는 점입니다. 동양 종교들에 대해서도 이는 너무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그 종교인들이 여러분에게 문제를 그대로 남겨둠을 발견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서운 시련을 통과해야 할 것이며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자신의 모든 n분을 단련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것들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어떤 유형으로든 스스로를 구원하라고 요청할 것이며 따라서 우리에게 문제를 그대로 남겨둡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불교로 전향하는 사람들이 소위 "지성인들"이라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그러한 일들과 맞닥뜨리기 전에 여러분은 지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여러분에게 문제를 그대로 남겨두며, 또한 이런 식으로 평안을 얻는 데에는 생각할 시간이 많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범인으로서는 그러한 방법들을 도무지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직업, 가족, 가정, 그리고 다른 여러 일들로 인해 혹사당함으로 말미암아 이 근사한 철학적 개념들을 파악할 수 없는 자들로서는 그것들을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평범한 사람은 이토록 긴 훈련과 기도의 과정들을 감당할 시간이 없습니다. 동양 종교들은 그러한 사람에게 아무 것도 제공하지 못합니다.

 

내가 심리학에서 발견한 문제점은, 그것이 단지 여러분의 신경을 안정시켜 줄 뿐 마음의 평안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심리학에 대해 공정하기를 원합니다. 심리학이 우리의 신경을 어느 정도까지 안정시킬 수는 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필히 요구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마음의 평안을 필요로 합니다. 어느 정도까지나마 우리의 신경을 안정시켜 줄 수 있는, 그 무엇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하지만 과연 여러분은 피상적인데에 머무르고 싶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깊고도 핵심적인 존재 상태에 거하기를 원합니까? 복음이, 그리고 그것만이, 우리의 가장 깊은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은 바로 그러한 사실과 연관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복음이 그렇게 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이제 나는 이 주제를 단지 소개만 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이를 상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지만, 여기서는 단지 그 개요만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권위 있는 그 무엇이 있으며, 역사의 여명 이래로 줄곧 우리에게 진리를 제공해 오신 누군가로부터 주어진 그 무엇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던 이 특정한 제자들 가운데서 역사했던 그 무엇이 있습니다. 이들은 복음을 경청하고 그들의 삶을 통해 그것을 입증하였으며, 그리하여 로마 제국의 모든 힘과 압제 그리고 그 잔혹한 핍박에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정복자들보다 더 위대한 업적을 남겼으며 승리를 거두고 즐거워했습니다 - 사도들과 순교자들 그리고 최초의 신앙 고백자들에 관한 위대한 이야기를 읽어보십시오. 복음은 줄곧 역사해 왔고 지금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급해야 할 또 다른 일반적인 사항들도 있습니다. 복음에서 처음부터 철저히 나타나는 차별성은, 그것이 항상 사실들에 정면으로 대처하며, 항상 실제적이며, 또한 결코 아무 것도 감추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의 해당 본문들을 읽어보면, 여러분은 우리 주께서 이 사람들로 하여금 최악의 상황에 정면으로 맞부딪히게 하심을 발견할 것입니다. 반면에, 다른 모든 가르침들과 철학들은 최악의 상황을 내게서 감추려 합니다. 내가 최악의 상황에 관해 듣고 그것에 정면으로 맞서며 또한 그러고 나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기 전까지는 내 마음이 진정으로 평안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단순히 나를 속이는 가르침은 신뢰할 바가 못됩니다. 문제시되는 일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래서 엄연히 고통이 존재함을 알고 있는데도 아무런 고통이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내게 고통이 닥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철학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아는 바로는 그것이 심리학적으로 작용할 수는 있고, 일시적으로 나의 관심을 끌 수도 있으며, 또한 내가 그 거짓말을 믿고 안도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바는 단순히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 질병과 마주하여 대항하기를 원합니다.

 

복음이 나의 마음을 끄는 것은 그 진리 때문이며, 또한 그것이 단순히 ", 이제 우리의 근심거리들을 잊어버리고 무엇인가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자"고만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16:33)라고 말합니다. 또한 사탄에 의해 지배되는 이와 같은 세상에서는 "난리와 난리 소문"(24:6)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단지 우리로 당분간 근심거리들을 잊게 만들려고만 애쓰는 것은 심리학이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필시 특정한 사람들을 괴롭게 만듭니다. 아름다운 일들만 듣게 하는 장소만이 예배 장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따라서 거기에 앉아 있는 동안에는 자신의 문제와 세상의 문제들을 잊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 이들은 분명 복음 앞에서 괴로움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사실들과 직면하게 합니다. 그것은 모두 한 사람에게 기초를 두며, 역사적으로 일어난 특정한 일들을 기초로 합니다. 그 복음은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겟세마네 동산, 재판, 잔혹한 십자가 처형, 찢긴 몸, 장사, 그리고 전적인 낙심과 절망 등을 거쳐 임합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부활과 승천의 영광 그리고 성령을 보내실 등에 관해 언급하는데, 이는 우리를 전혀 다른 위치로 옮겨줍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사실들과 맞서게 하며 우리를 어둠의 터널을 통과시켜 반대편 끝에서 비취는 여명으로 데려다 줍니다.

 

더욱이 그것이 내 마음을 끄는 이유는, 소상하게 설명해 주며 또한 내 마음을 만족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이와 같은 역사 철학을 제시해 왔습니다. 그것은 내게 사실들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설명하고 논리 정연하게 결합된 전체로서 나타냅니다. 성경에는 인생에 관한 위대한 견해가 담겨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다룰 것입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말은 나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괜찮다. 그것에 관해 생각하지 말라. 당신은 죽을 것이며 또한 다른 어떤 모습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당신은 이러한 일련의 환생 과정을 거듭할 수도 있으며 마침내 광대한 우주 속에 자취를 감출 것이다." 나는 모든 근심이 물질적인 육체에 있다고 믿지 않으며, 그것이 내 영혼 속에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마음을 만족시켜 줄 그 무엇을 얻어야 합니다. 나는 인생에 직면하기를 원합니다. 나는 현재와 같은 상태로 되어진 원인에 대한 설명을 원하며 여기서 그리고 여기서만 그 설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가장 내 마음을 끄는 사실은 그것이 모두를 내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그 모두를 하나님의 능력과 결부시킨다는 점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앞에서 분주한 매일의 삶 가운데서 길고도 고달픈 시간들을 보내는 자들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들은 "신비한 방법"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무엇을 제시해야 할까요? 만일 내가 그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줄 수 있는 복음을 갖지 못했다면, 나는 복음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가치 있는 것을 전혀 소유하지 못한 셈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그들을 위한 복음이 있기에,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내가 소유한 복음은, 이 세상을 통과하여 극복하고 심지어 사망과 무덤마저 이기신 분이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20)고 말씀하신 사실을 그들에게 일러줍니다. 그리하여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한 그들의 심령 속에 사망과 무덤을 정복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힘과 권능이 임합니다. 그분을 대항하면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결국 쓰러지고 맙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그렇습니다. 이분은 구약의 하나님, 약속들의 하나님, 언약들의 하나님, 그리고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27:10)라고 칭송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분은 처음부터 인류에게 이르시기를, 자신의 바람은 그들을 축복하며 그들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고 또 그들을 자신의 자녀로 삼는 것이었다고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경우가 너무도 흔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모든 어려움이 요한복음 14장 이곳에 나타납니다. 제자들 중 빌립은 우리 주님께 사실상 이렇게 말한 셈입니다."만일 우리가 아버지를 알았더라면 그것으로 족했을 것이지만, 난점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우리 주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9).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왜냐하면 "나를 믿지 않으면 결코 아버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도마 역시 문제점을 느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5). 이에 대한 우리 주님의 위대한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 그리고 기도에 관해 -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 말씀하시면서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14)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우리는 너무 연약합니다. 이와 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그분은 "내가 너희를 쓸쓸하게 버려두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18) 또 다른 보혜사를 주시리라는(16) 것입니다. 이는 성령의 은사에 관한 복된 교리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임하사 우리 안에 거하시며 모든 일들을 계시하고 설명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격려하고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요한복음의 이 부분에 그러한 진리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이를 요약해 보기로 합시다.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분이 이 세상에 계셨으며, 그가 여러분에게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인즉 이러합니다."내게로 와서 네 근심거리들을 내게 고하라. 하나님에 관한, 기도에 관한, 그리고 네 연약한 의지와 실패 등에 관한 모든 어려움을 내게 고하라."

 

나는 그 어려움이 무엇인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불안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그 무엇입니다 - 그것은 전쟁 가능성일 수 있으며, 질병일 수도 있고, 사업상의 곤경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도덕적 의지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연약함일 수도 있습니다 -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그것이 아무리 여러분을 근심케 하고 불행하게 만든다고 해도, 그분께 가서 아뢰십시오. 그는 여러분을 위해 목숨을 버릴 정도로 여러분을 너무도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가 이르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불행해지거나 불안해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문제로부터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은 모든 장벽을 제거하셨으며, 또한 지금 여기에서 여러분에게 안식과 평안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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