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앙의 비극( 4:8-10)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언제나 복음을 미워하며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

 

David Martyn Lloyd-Jones

 

( 4:8-10)

8    그 때에 베드로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들에게 말하였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장로 여러분,

9    우리가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과, 또 그가 누구의 힘으로 낫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라면,

10    여러분 모두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말을 살펴보기 전에, 그가 과연 어떤 상황에서 이 말을 했는지를 염두에 두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앞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괄목할 만한 사건에 대해 들은바 있습니다. 어느날 오후 기도시간,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미문으로 들어가다가 날 때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이 앉아 있는 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 앉은뱅이는 매일 친구와 친척들에게 업혀 와서, 미문 앞 길 바닥에 앉아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했습니다. 그는 불쌍한 걸인에 불과했습니다. 세상은 그에게 이무 것도 해 줄수 없어 길바닥에 방치해 두었고, 그는 동전 몇 푼을 벌기 위해 행인들에게 모자를 내밀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본 앉은뱅이는 그들에게도 구걸을 했는데, 그때 무언가 일이 벌어졌습니다. 누가는 그 일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그를 눈여겨 보고 나서, 그에게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 앉은뱅이는 무엇을 얻으려니 하고,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3:4-5).

 

그 앞에서 베드로는 영원히 기억에 남을 말을 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3:6). 그리고 나서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그의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3:7). 그는 펄쩍펄쩍 뛰면서 사도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 을찬미”했습니다(3:8).

 

이런 일이 벌어지자 엄청나게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습니다. 원래 이런 일이 벌어지면 군중이 모여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나 궁금해서 달려왔다가 평소에 늘 보던 앉은뱅이 - 평생 한번도 제 발로 걸은 적이 없었던 앉은뱅이 -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이 일을 행한 사람들을 쳐다보았고,  베드로는 기이히 여기며 놀라서 자신들을 쳐다보는 군중에게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3:10).  우리는 누가가 기록한 그 설교를 이미 살펴본바 있습니다(3:12-26).

 

이제 우리는 그 사건의 속편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는 설교를 통해 방금 벌어진 일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사두개인과 성전 맡은 자들은 기적도 보고 설교도 들었으면서도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 재판에 회부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4:1-12까지에서 그들이 두사도에게 어떤 짓을 했으며 무슨 말을 했는지, 또 사도들은 어떤 대답을 했는지 보게 됩니다. 여기에는 당국자들이 복음의 메시지를 거부할 때 일어나는 박해, 이후에 교회가 계속해서 겪어야 했던 박해의 효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관점에서만 보아도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제가 앞으로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고자 하는 내용, 즉 이후 계속되어 온 모든 박해의 특징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 첫번째 박해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 사건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박해는 언제나 불신앙의 결과로 일어납니다. 우리는 여기 사도행전 4장에서 도 복음을 거부하는 태도 즉 불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불신앙의 요소와 특징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제가 이 이야기에 주목하는 것도 이 이야기가 현대를 특징짓는 불신앙을 정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 국민의 10%만이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데, 그 중에서 어떤 식으로든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은 그나마 절반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교회에 출석한다는 것은 영국 국민의 5%만 하는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95%는 왜 교회 밖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오늘 이야기에서 그 답을 얻습니다. 특히 성령께서 교회에 임하신 오순절 직후에 베드로와 요한이 이런 식의 공격을 받았다는 정황을 고려하면, 여기에는 무언가 경악할 만한 요소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건들을 목격하고서도 이들처럼 반응할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 즉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이렇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거의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이것은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입니다.

 

물론 또 다른 의미에서 보면, 이런 불신앙이 나타나는 것도 크게 놀랄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사도들이 겪은 일은 복되신 주님께서도 이미 겪으신 일입니다. 사복음서를 읽어보면 사람들이 주님께도 똑같이 경악할만한 반응을 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복음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나 그가 하신 일, 그가 하신 말씀만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에게 느낀 반감과 반발, 적의와 거부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지도자들과 군중이 합세하여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라고 외치는 일로 끝을 맺었습니다(19:15). 주님은 자신이 친히 이런 대접을 받으셨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 또한 같은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언하셨습니다. 그 예언이 지금 사도들에게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 일은 아주 초창기부터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복음 전파의 역사 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날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현대의 특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뭔가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불신앙은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불신앙은 정말로 역사가 오래된 것입니다!

 

복음을 전했는데도 사람들이 믿지 않을 때 좌절감을 느끼는 것, 나한테 무슨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은 전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의 호감을 살 수 있는 메시지가 틀림없다는 것도 완전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언제나 복음을 미워하며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그렇 게 함으로써 오히려 주님의 예언과 복음이 참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합니다. 이 메시지를 거부하는 것은 결국자신들이 구원받을수 있는 유일한 길을 거부하는  것이라는 사실 또한 깨닫지 못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의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무더운 주일 밤(저도 여러분만큼 덥습니다) 제가 이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강단에 서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두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렀고, 작금의 국제상황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런 상 황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길은 전혀 없습니까? 제가 말하려는 바는, 이러한 인류의 여러 문제에 손댈 수 있는 길이 단 한 가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복음에 전투적으로 반발하고 있으며, 이 복음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문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국제 정치뿐아니라 개인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무슨 걱정거리가 있습니까? 나는 완전히 끝장났고 앞날의 희망도 사라져 버렸다는 생각이 듭니까? 인생을 망친 낙오자가된 느낌입니까? 그렇다면 강력히 권하건대, 여러분의 몸과 마음을 다해 복음을 숙고하십시오. 그 어느때보다 집중해서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성령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여기에 여러분 자신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자신들이 똑똑해서 기독교를 거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가장 큰비극은 핵폭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복음을 거부하는데 있습니다. 복음만 믿는다면 폭탄같은 것들은 전부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독하고 기독교를 폐기 처분한 사람들 중 하나입니까?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대답은 “저희가 연고없이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입니다(15:25). 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하신 말씀처럼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23:34).

 

제가 이처럼 예루살렘 사람들이 사도들을 박해한 사례, 기나긴 교회사 가운데 최초의 박해로 기록된 이 사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여러 분이 자기의 문제를 밝히 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객관적인 관찰은 상황을 좀더 선명하게 파악하도록 도와준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저는 지금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사용한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끔찍한 죄를 저질렀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단은 상황은 다르지만 다윗과 똑같은 죄를 저지른 사람의 이야기를 지어냈습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 문제를 판단해 주십시오”라고 청하자, 다윗은 의분에 휩싸여 그 끔찍한 짓을 저지른 사람을 정죄했습니다.

 

그러자 나단이 다윗을 보며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사람이라"(삼하12:7). 결국 다윗은 자기 자신을 정죄한 셈이 된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죄는 보았으면서도 똑같은 짓을 저지른자신의 죄는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성경에 세세하게 역사를 기록해 주신 것에 감사해야 할 이유가 여기있습니다.

 

여러분이 저와 함께 이 예루살렘의 관원들을 살펴본다면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인이 아닌 분들은 자기 자신이 이 관원들과 똑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중요하기 이를 데 없는 구절에는 현대인의 문제와 기독교를 거부하는 현대인의 태도를 이해하게 해주는 열쇠가 들어 있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우리를 위해 상황 전체를 분석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때, 우리 자신 속에 무엇이 들어 있으며, 모든 세대에 나타나는바 불신앙의 무서운 본질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불신앙이 과연 무엇을 거부히는지 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왜 거부하는지에 대해서도 나중에 생각해 보겠지만, 일단은 이 문제를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세상 기독교를 거부하는 것을 그토록 자랑스러워하고 있는 이 세상은 지금 무서운 곤경에 빠져 있습니다. 이제 이 세상이 과연 무엇을 거부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여기 우리 앞에 있는 이 놀라운 복음을 잠시라도 거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비극적인 일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볼 때 이 주제는 세 가지 항목으로 자연스럽게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관원들이 복음의  사자(使者)들을 거부한 것입니다.

‘저희(베드로와 요한〕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4:3). 우리는 이들이 다음날 ‘지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반대 심문을 시작했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교회에 대한 박해이자 교회에서 특별히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두 사도, 곧 이번 사건을 촉발시킨 장본인인 베드로와 요한에 대한 박해였습니다. 여러분이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이 이것입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군중이 운집하여 복음을 설명하는 베드로의 설교를 놀라움으로 경청했습니다. 그래서 당국자들이 두 사람을 불쾌히 여긴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 점을 밝히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 즉 오늘날 기독교 메시지와 신앙을 거부하고 있는 사람은 메시지와 신앙만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등장했던 복음의 사자들 또한 거부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13절 때문입니다.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바로 이 지점에서 불신앙의 맹목성과 자기 모순이 드러납니다. 왜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집아 가두었습니까? 왜 자신들이 느낀 경이감과 놀라움을 선명하고 필연적이며 논리적인 사고로 연결시키지 못했습니까? 무엇이 이 사람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라고 왜 묻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불신앙에 늘 나타나는 문제입니다. 불신앙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앞으로 보여 드리겠지만, 이것은 편견이 불러온 결과입니다. 지금 평범치 않은 현실이 일어났습니다. 평생 한번도 걸어 본적이 없는 앉은뱅이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여기 있는 두사람이 이 일을 한 것이 분명한데, 그 중 한 사람은 바로 전날 성전 뜰 솔로몬의 행각에서 아주 놀라운 설교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당국자들은 전체 요점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들은 어부에 불과했습니다. 무식하고 평범하고 하찮은 범인(凡人)들이었습니다(4:13). 물론 3년 간 나사렛 예수를 따라 다녔으니,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사람도 아주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그들과 다른 사람이었습니까? 그 또한 목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전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당시 관원들과 당국자들이 연설에서 중시하던 치밀함이나 세련된 기교없이 투박하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처럼 큰 동요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성경은 관원들이 일종의 권세를 감지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하는 모습에서 그것을 감지했습니다(4:13). 그런데도 왜 “이들의 설교를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라고 자문하지 않았을까요? 성경은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4:8). 한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다른 이들이 그 것을 느끼는 법입니다. 설교자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도 그 말에 권세가 있음을 알고, 그 말의 사실성과 능력과 힘을 느끼며, 거기에 자신과 관련된 무엇인가가 있음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여기 나오는 관원들도 확실히 그것을 느끼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문제에 끝까지 매 달리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배우지 못한 이 무식한 자들로 하여금 이런 설교를 할 수 있게 만들었을까? 이들은 어디에서 성경에 대한 지각을 얻었을까? 어디서 이처럼 성경을 해설하고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을까? 어디에서 이런 확신을 얻었을까?’ 이렇게 자문하지 없았습니다.

 

오순절 날 베드로의 첫 설교에 3천 명이 회심하여 교회에 들어왔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설교 후에 “영접할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라’고 초청하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그런 방법은 아예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저 3천 명이 실제로 변화되는 일이 일어났고, 모두에게 그 일이 알려졌을 뿐입니다. 당시 사회는 그리스도인 되는 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되면 박해를 받을 수도 있었고, 집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으며, 족보에서 제명될수 도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 메시지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도 3천 명이 회심하여 교회에 합류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2:42). 그들은 날마다 모였으 며, 이 모든 일에 헌신했습니다.

 

게다가 회심지는 더욱 늘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성전 행각, 치유받은 앉은뱅이 옆에서 설교했을 때 2천명이 더 회심했습니다. 이제 도합 5천 명이 블어난 것입니다! 이만하면 당국자들도 “도대체 무엇이 이 배우지 못한, 이 무식한자들로 하여금 이처럼 새로운 생명력과 지각으로 수천 명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말을 할 수 있게 했을까? 기쁨에 넘쳐 하나님을 찬미하 며 온 백성에게 칭송받는 사람들로 변화시키는 말을 할수 있게 했을까?’하고 물을 만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들은 그렇게 묻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보인 반응은 ‘감옥에 가두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이 관원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기적에 대해서도 이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았을까요? 기적이 명백한 사실인 만큼 자신들도 외면하려야 외면할 수가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4:14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꼬투리만 잡을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의 장본인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명백한 증거, 명백한 사실이 눈앞에 있었습니다. 제자들을 감옥에 가둔다고 해서 이미 일어난 일을 변경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신앙은 사실을 직면하지 않습니다. 불신앙은 사실을 무시해 버립니다. “기독교에는 별게 없어. 내버려. 감옥에 가둬 버려. 뒷문으로 내던져 버려. 그러면 끝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왜 그렇게 하는지 설명하지도, 대답하지도, 이유를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복음의 사자들은 제거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실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으며 진리 자체를 제거할 수도 없습니다.

 

오래 전 예루살렘 관원들처럼 오늘날의 사람들도 사실을 회피하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무시하는 것이 정말 똑똑한 짓입니까? 사람들은 말합니다. ‘뭐? 아직도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고? 설마! 이 모든 현대적인 지식과 과학의 조명을 받고서도 기독교를 믿는단 말이야? 우습군. 지성인들이나 배운 사람들은 더 이상 그런 걸 믿지 않는다고.” 이처럼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무시합니다. ”감옥에 가둬 버려. 증인들을 없애 버려. 사자들을 없애 버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손사래를 치며 기독교를 무시할 때, 사실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지금껏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 가장 위대한 이들, 가장 고귀한 영혼들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사도들만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박해를 무릅쓰고 신앙을 고백한사람들과 순교한 사람들까지 무시하는 것입니다. 3세기까지 복음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내 놓았던 초기의 수많은 증인들까지 무시하는 것입니다. 고대 세계를 뒤엎었던 사람들, 로마제국을 뒤흔들어 황제 본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아예 나라 전체를 기독교 국가로 만들게 했던 사람들까지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무시하고 있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이 문제를 분석해 본적이 있습니까? 그들은 배우지 못한 무식한 자들이었습니다. 위대한 로마제국 안에서 그리스와 그리스 철학에 배척당하고 로마와 유대인들에게도 배척당하던 한줌의 무리에 불과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 한줌의 무리를 변화시켜 로마제국을 뒤엎고 세계를 살리는 주도적인 세력으로 만들었습니까? 그런 변화를 일으킨 것을 그처럼 쉽게 무시해 버릴 수 있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무지하게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무시하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십시오. 강력한 인물인 히포의 어거스틴 (Augustine of Hippo)을 보십시오. 제가 그를 거론하는 것은, 오늘날 사상가들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역사의 문제요 시대의 문제요 우주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거스턴의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이야말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는 단 하나의 위대한 논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오래 전에 이미 이 주제를 전부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책은 여러 세기 동안 살아남아 오늘날에도 여전히 연구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세상에 살았던 철학자들 중에서도 가장 깊이 있는 철학자에 속합니다. 그는 역사와 그 의미라는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교도 철학자였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사도들이 믿던 예수와 똑같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사고의 혁명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고, 이 위대한 작품을 쓸 수 있는 지각을 얻게 되었습니다. 현대의 사상가들이 그에게로 회귀하여 점점 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보면 흥미롭습니다. 그들은 그 옛날 4 세기에 살았던 어거스틴의 저서들을 다시 출간 해내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기독교 신앙을 거부할 경우, 동시에 거부하게 되는 인물들을 얼마든지 더 열거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은 15세기에 맞서 변화를 일으키고 전환점을 제공했던 강력한 인물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조명을 받아 진리의 다리 역할을 함으로써 미래로 끝없이 펼쳐지는 사고의 전망을 열었던 위대 한 건축가적 지성 존 칼빈(John Calvin)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시하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또 다른 위인으로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을 들 수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그에 관한 글을 다시 읽을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대영제국의 토대를 놓은 인물 - 이 점을 잊지 맙시다 -로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에 그런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에 별게 없다고 말하는 것은, 교회에 연이어 등장했던 이 강력한 인물들과 성인들과 순교자들과 변증가들, 박해를 무릅쓰고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과 복음의 사자들을 전부 하찮은 사람들로 무시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선임 목회자 한 분이 즐겨 말씀하던 일화 한 토막을 반복함으로써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제가 말하려는 분은 존 허튼 (John A. Hutton) 목사님으로, 그분은 학창시절 때 모시던 교수님 이야기를 종종했습니다. 그 교수님은 자신들의 엄청난 지식 때문에 복음을 믿지 못하는 학생들을 만나면 이런 말로 수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나는 여러분들에게 바울, 어거스틴, 루터, 칼빈, 녹스(John Knox) 같은 인물들을 비롯하여 위대한 청교도들과 올리버 크롬웰, 횟필드(George Whitefield), 웨슬리 (John Wesley), 글래드스턴(William Ewart Gladstone), 뉴먼(John Newman)등을 배출한 가르침, 즉 복음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이런 복음이라면 어찌 되었든 정중하게 고려해 볼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복음의 사자들을 거부한 예루살렘 관원들은 복음의 메시지도 거부해 버렸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메시지를 거부해 버린 것입니다! 기독교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복음이 무엇입니까? 저는 일종의 입문에 해당하는 설교를 하고 있기 때문에 포괄적인 용어로 설명할 수 밖에 없습니다만, 베드로는 여기에서 복음 전체를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4:10). 실제로 누가는 사도행전4:2에서 관원들은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큰 주제가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거부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오만불손하게 조롱하며 무시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현대의 식자층’에 대한 모욕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여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로 묘사되어 있는 인물에 관한 평범치 않은 메시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기독교란 누가 가인의 아내가 되었으며. 어떤 이상한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느냐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해.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질문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질문에서 출발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주변적인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똑똑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 사실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 아닙니까? 그들은 말합니다. 기독교? 그건 이미 과학이 검증을 끝내지 않았나? 기독교엔 아무 것도 없어.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종교라고. 대체 누가 가인의 아내가 됐겠어? ’ 우리는 이런 식으로 계속 앞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제는 세상도 이 메시지를 숙고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세상이 숙고해야 할 메시지는 바로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이 메시지는 죄로 가득한 우리들의 오래되고 불행한 세상에 한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 아기의 이름은 예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도시의 한 마구간에서 태어났습니다. 왜 하필이면 마구간에서 태어났을까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2:7). 그의 어머니는 인구조사 때문에 사람들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녀는 임신중이었고 첫아이의 출산이 임박했습니다. 하지만 사관에는 머물 방이 없었습니다. 그녀를 위해 방을 마련해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렬 이유가 뭐가 있었겠습니까? 그방들은 자기들이 쓰려고 몇 달전부터 예약 해 둔 것인데 말입니다. ‘난 아무 잘못 없네, . 저 여자가 임신했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이건 내 방일세, 내가 예약한 내 방.” 세상은 항상 이런 태도를 고수해 왔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아기는 가축들이 울어 대는 마구간 짚 틈에서 태어나 구유에 누워야했습니다.

 

여러분은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 세상은 지금 곤경에 처해 있고, 저는

요즘의 베트남 상황 때문에 전쟁이 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저도 걱정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려는 바는, 지금 이 순간 그 어떤 것보다 여러분과 더욱 상관 있는 사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 아기가 베들레헴에 태어났습니다. 그 아기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염려해 아들을 보내셨다는 이 사실입니다. 이것이 사도들이 설교한 내용이며, 당국자들이 거부한 내용입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천하게 태어난 이 아기를 거부했습니다. 거의 18 년 동안이나 자기 손으로 목수 일을 하다가 갑자기 공적인 사역으로 뛰어든 이 청년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설교자이자 치유자였던 이 사람을 거부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설교한 것이 무엇입니까? 불신앙과 관련해서 제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점이 여기 있습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세상이 알아야 할 가르침 아닙니까?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6:27-28). 그는 여러분을 악의로 대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여러분은 이 가르침을 알고 있었습니까? 오늘날 세상 모든 사람이 이같은 산상 설교의 말씀대로만 산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해결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메시지였고, 그가 살았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설교했습니다. 이것을 명령했고, 이것을 실천했으며, 이것을 설명했고, 이대로 살 것을 간절히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가르침을 거부했습니다. 기독교에 등을 돌리는 것은 바로 이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간음과 살인과 악의와 원한과 증오를 정죄하는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와 긍흘과 인자와 상호존중과 도움의 손길을 명령하는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은 이 가르침을 거부했습니다. 주님 자신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라고 소리쳤습니다. 사도들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메시지를 거부했습니다. 이렇게 거부한 것이 왜 문제가 됩니까? 그것은 세상에 기장 필요한 바로 그것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거부한 사람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습니다(7:34). 그는 바리새인과 달랐습니다. 만일 바리새인과 똑같았다면 저 또한 그를 거부할 만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부심과 자기 의로 꽉 차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한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들은 의인으로 자처했습니다. 소유의 십일조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으며, 일주일에 두번씩 금식했고, 간음이나 살인 같은 죄는 저지른 적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덕의 귀감이 되었던 바리새인은 세리만 보면 옷자락을 부여잡고 가능한한 멀찌감치 피해 버렸습니다. 세리 같은 사람들, 도적과 사기꾼들은 문둥병자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오히려 바리새인들을 정죄하셨습니다. 그는 세리와 죄인들과 자리를 함께하셨습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들과 먹고 마셨으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정죄하던 비열한 바리새인들에 맞서 항상 그들을옹 호해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루살렘 당국자들은 우리 주님의 기적과 인자하신 행동, 고통받는 자들에 대한공감, 긍흘과 자비의 눈길을 거부했습니다. 주님은 슬픈 일 당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신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싫어 하는데도 굳이 가던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필요가 있는 사람을 보시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바로 이런 인물, 예수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한번이라도 진심을 다해 그를 바라본 적이 있습니까? 그의 이름을 맹세에 사용한 적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복음서에 나오는 그의 모습을 진지하게 바라본 적이 있습니까? 가만히 멈추어 그에 대해 참으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그렇게 해보십시오. 여러분이 거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분이며, 이분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더 할 이야기가 남아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체포당해 못박혔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는 아무에게도 고발당할 일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증거를 날조하고 고발거리를 꾸며 내려고 애를 썼지만 거짓임이 금방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증거를 찾지 못했습니다(14:55-56). 그는 아무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를 정죄해서, 갈보리라는 작은 언덕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들은 얼마동안 그에게 십자가를 지웠지만 십자가는 그가 감당하기에 너무 무거웠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무게에 눌려 비틀거렸고, 결국 다른 사람이 대신 지고 을라가야 했습니다. 마침내 골고다 언덕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는 극심한 괴로움과 고통 속에 죽었습니다.

 

이것이 그 메시지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친 적이 없었던 사람, 언제나 선을 행했던 사람, 제가 앞서 말한 것들을 가르치고 설교했던 사람 이 말할 수 없는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수치스러운 방식으로 나무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가 숨을 거둔 후에, 사람들은 시신을 내려 무덤에 안치했습니다. 그리고는 돌을 굴려 무덤 앞을 막고 인봉한 다음 군병 몇 명을 두어 지키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만약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나 버렸다면, 앉은뱅이는 여전히 미문 앞 길 바닥에 무력하게 앉아 있었을 것이고, 베드로도 그런 설교를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예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 그는 사망의 줄을 끊어 버렸습니다. 무덤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와 또 몸의 부활!(17:18) 이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이 사실이 없었다면 사도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교회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솔직한 기록은 그의 죽음을 목격한 추종자들이 완전히 희망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할수 없는 비탄에 빠졌습니다. 마치 세상의 종말이 온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 복음이라는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일어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사명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을라가셨고, 약속한 대로 오순절 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렇게 기적은 일어났고, 그들은 성령과 능력으로 설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거부하고 있는 것이 이것입니다. 당신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찮은 범인이요 배우지 못한 무식한 자들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나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 할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저 이 일을 증거할 뿐입니다. 단순히 사실을 보고할 뿐입니다.

 

이 모든 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메시지의 핵심 부분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사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19,21). 여기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이것이 이 모든 일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전 우주를 만드시고 남자와 여자를 자기의 형상대로 만드신 위대하고 영원하신 분입니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 계시는 분, 만유 위에 계신 분, 만유를 심판하실 분, 반역하여 죄를 지은 사람들을 대적하여 결국에는 비참하고 부끄럽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모습을 본래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남자를 올바르고 완벽하게 만드셨습니다. 여자도 남자를 돕는 자로 똑같이 올바르고 완벽하게 만드셨습니다. 아담과 하와 안에는 죄도, 탐욕도, 악한 정욕도, 증오도, 악의도, 원한도 없었습니다. 추하고 부정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완벽하고 의로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 어디에서 나온 사람들일까요? ,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결과물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불행과 비참하고 가슴 아픈 일들, 부부관계와 가정의 파탄 - 부모의 결별 앞에 가슴이 찢어지는 아이들 -과 죄와 악이 몰고 오는 인생의 괴로운 일들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할 힘이 전혀 없습니다. 교육으로 이런 문제를 다룰 수 없습 니다. 정치가들도 이런 문제를 바로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은, 우리 모두가 영원하신 하나님께 반역하고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메시지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3:36).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4:4-5).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내어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53:6). 여러분의 죄를 그에게 전가시키시고, 이들 안에 전가된 죄를 벌하심으로써 여러분을 값없이 용서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이런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와 요한이 설교한 내용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 사람들이 거부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의 비극 아닙니까? 우리는 사람들이 로맨스에는 흥미를 느끼고 소설이나 영화는 쉽게 믿으며 삶의 진실과 거리가 먼 단순한 판타지에는 흥분하면서도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 - 성육신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와 구원하신 일 십자가의 영광과 구원의  길과 하나님과의 화해,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 예수 그리스도(딤후1:10) - 은 거부하는 것을 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인류의 모든 원수인  마귀와 죄와 악을 정복하신 분입니다. 그는 맨 나중 원수인 죽음까지 정복하셨습니다. “예수와 또 몸의 부활! ” 메시지를 전한 사자들뿐 아니라 이런 메시지까지 거부하는 불신앙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겠습니까?

 

셋째로, 불신앙은 메시지를 전하는 사자들과 그 메시지를 거부할뿐 아니라 그 메시지에서  나온 결과물도 거부합니다.

베드로가 이 점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 보십시오.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 무엇을 질문한다는 것입니까?-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질문한다는 것입니다(4:8-9). 이것은 무엇보다 놀라고 경악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컨대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 것과 같습니다. ‘당신들은 우리를 감옥에 가두고 재판에 회부했는데, 우리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합니까? 왜 우리가 옥에서 지난 밤을 보내야 했습니까? 왜 우리가 지금 이렇게 법정에 서 있어야 합니까? 우리가 대체 무슨 짓을 했습니까? 술주정을 했습니까? 살인을 저질렀습니까? 불경죄를 지었습니까? 소동을 일으켰습니까? 예루살렘에서 폭동을 일으켰습니까? 우리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지금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은 착한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불신앙이 어떤 것인지 이제 알겠습니까? 불신앙은 착한 일을 거부합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고넬료의 집에 갔을 때 예수께서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셨다고 말했습니다(10:38). 군중은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라고 소리쳤습니다. 그가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것입니까? 착한 일 밖에 한 것이 없었습니다. 세상에 그런 혜택을 준 사람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착한 일을 하며 사셨습니다. 사람들의 고통과 곤란을 덜어 주셨습니다. 그는 긍휼과 동정심이 넘치는 분이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나 자신을 의지 하는 사람을 못본척 지나치신 적이 한번도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착한 일이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불신앙에 대해 경악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옥에 갇히고 재판에 회부된 것은,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일으켜 세워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하며 하나님을 찬미하게 만든 탓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복되신 구주께서 세상에 가져다 주신 모든 축복을 어렴풋하게 보여주는 그림인 동시에 세상의 무모함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예수께서 설교하고 가르치실 때 감옥에 갇혀 있던 세례 요한은 의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 셨습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하라’(11:3-5). 그것은 착한 일이었습니다. 그 착한 일들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를거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복된 복음을 믿는 모든 이가 누릴 축복 , 그리스도인의 삶에 주어지는 축복의 한 면을 보여주는 그림도 됩니다. 복음을 믿지 않을 때 무엇을 거부하게 되는지 아십니까? 마음의 쉼을 거부하게 됩니다.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고 말씀하십니다. 즉 그리스도를 떠나 헛되게 진리를 찾아 헤매는 일에서 놓여나 쉬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지적인 혼동에서 벗어나 쉬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의로워지고 거룩해지고 깨끗해지고 순결해지려는 노력에서 놓여나 쉬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기운데 쉬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쉬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빛이라는 말로 다시 표현해 보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8:12). 이것은 착한 일입니다. 주님은 이 일을 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으며, 이 빛을 주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는 빛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비추는 빛, 우리 자신을 비추는 빛, 세상을 비추는 빛.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을 비추는 빛을 주십니다.

 

그는 쉼과 빛뿐 아니라 생명을 주십니다. 이것은 세상 어느 것보다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그 옛날 예루살렘의 관원들처럼 이 복음을 거부할 때, 사실은 죄사함까지 거부하게 된다는 사실을 이제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죄를 사해 주며 용서해 주겠다는 제안이 여러분 앞에 주어져 있음을 아시겠습니까? 지금 여러분 은 죄 때문에 지옥문턱까지 가 있는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관없습니다. 지금 회개하고 이 위대한 메시지를 믿기만 하면 즉시 용서받을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다른 것은 필요없습니다.

 

믿기만 하면 보게 되리라.

그리스도가 너의 전부이심을.

-몬셀 (J. S. B. Monsell)

 

세상은 이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 양심에 거리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삶도 무서워하고 죽음도 무서워하고 영원한 세계도 무서워합니다. 모든 사람이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 사람들이 그토록 부활의 메시지를 싫어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사람이 부활하게 되었다고 설교했습니다. 그들은 부활사건을 목격했지만 그것을 인정하기가 싫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부활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 여러분의 죄가 깨끗해질 수 있으며 값없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복된 메시지가 찾아옵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 요”(1:18). 지금 죄를 지어 인생의 수령과 진창과 하수구에 빠져 있는 사람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기만 하면 모든 죄가 먹구름 개이듯 사라지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됩니다. 그 즉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됩니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런 말을 담대히 할 수 있는 복음이 여기 있습니다. 탕자를 위한 복음이 여기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게 하는 복음, 다시 살아나게 하는 복음, 다시 새로워지게 하는 복음이 여기 있습니다. 참된 복음 이 여기 있습니다.

 

이 메시지, 이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복음이 말하는 모든 것 -용서와 화해뿐 아니라 새 생명과 새 능력과 새 출발 - 또한 거부하게 됩니다. 바울은 그 점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사는 현대세계에도 적절한 말입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그들도 과거에는 그런 사람들이었다는 뜻입니다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9-11). 구원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이 지금우리 앞에 있습니다. 사람을 깨끗게 하여 하나님 나라의 성도로 만들며, 그들이 바라볼 영원한 소망을주는 복음이 지금우리 앞에 있습니다.

 

요컨대 베드로는 “만일 이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해 알고싶다면, 이것이 그 답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복음을 거부하면 이 모든 것도 함께 거부하게 됩니다. 복음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용서와 양심의 평화, 정신과 마음의 평화, 평온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자, 새 생명, 새 능력, 새 활력,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예전에 여러분이 주저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가 보십시오. 이 앉은뱅이처럼 벌떡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렇게 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입은 가장 큰 혜택들은 다 복음을 통해 온 것들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착한 일들이었습니다! 병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습니까? 교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교육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습니까? 교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선교활동을 보십시오. 이 땅의 어두운 곳들로 빛이 흘러 들어간 것을 보십시오. 영국의 자유는 어디에 토대를 두고 었습니까? 마그나 카르타 (the Magna Carta) 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가장 훌륭한 역사가들에 따르면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우리가 현대에 누리고 있는 이 자유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저는 그 답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자유는 올리버 크롬웰을 비롯한 17 세기 청교도들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또 미국의 자유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우리와 똑같이 청교도 선조들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노동조합 역시 200 년 전 부흥의 직접적인 소산이리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도덕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습니까? 영국 역사상 가장 고상한 시대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습니까? 그것은 모두 부흥의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똑똑한 체 하며 이 메시지와 이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을 외면하면 할 수록, 현대 작가 두 사람이 유연함의 예찬’ (the cult of softness)이라고 적절히 명명한 부도덕과 악덕과 부정직함으로 점점 더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가장 훌륭하고 가장 고상하며 가장 위대한 것 들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1900년 전 예루살렘에 살았던 관원들을 살펴보는 동안,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해주셨으리라 믿습니다. 불신앙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보십시오. 불신앙이 얼마나 맹목적인 것인지 보십시오. 불신앙이 얼마나 큰 비극인지 보십시오. 불신앙이 얼마나 희망 없는 것인지 보십시오. 바로 지금 용서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 깨달았습니까? , 그렇다면 지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이‘착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 복되신 아들 나사렛 예수를 통해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을 위해 이 놀라운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을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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