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의 장애물(26:17-18)

 (여기에 첫 번째 진리가 있습니다. 그 진리는 역사하시고 간섭하시며 교회 역사를 주관하시고 개인의 삶의 과정을 주장하시는 주권적이고 초월적인 살아 계신 하나님에 관한 진리입니다. 그들은 영감을 믿지 않습니다.  성난 하나님 앞에 엎드러지기까지는 어떠한 부흥도 기대할 수 없다는 깊은 확신 때문입니다)

 

 

David Martyn Lloyd-Jones

 

“이삭이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26:17-18)

 

블레셋 사람들의 행동을 숙고해 나가면서, 교회사 자체가 제가 지난 강론에서 전제한 이 원리를 확증함을 여러분에게 다시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교회사는 의심의 여지도 없이, 고통의 문제는 언제나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막은 일, 물이 필요한 사람들이 그 우물 밑바닥에 있는 물을 먹지 못하도록 오물을 던져 넣었다는 사실 때문에 일어난 것임을 입증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그 증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이 국면에 대한 교회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교회 역사에서 이른바 하향세를 취하는 시대마다 나타나는 가장 주요한 특징은, 어떤 진리들을 감추거나 기독교 진리의 어떤 면들을 막아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말씀드리는 첫 번째 요점입니다. 교회가 생명력을 잃고 전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던 침체의 시기를 교회사를 통해 살펴보면, 예외 없이 그런 시대의 교회생활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기독교의 가장 중대한 진리를 부인했거나, 감추었거나, 아니면 소홀히 여긴 것임을 발견할 것입니다.

 

저는 이 점을 좀 더 상세하게 예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실례를 들겠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 이전의 암흑시대를 생각해 봅시다. 그 당시 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이었습니까? 정확히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구원에 관한 생사를 좌우하는 진리를 볼 수 없었고, 완전히 자취를 감췄거나, 사라졌거나, 아니면 그 당시 로마 교회를 특징짓던 이른바 “모든 유”의 교훈으로 그 진리가 가려졌습니다. 이때 교회 사람들은 영적인 생명을 전혀 지니지 못했고, 어두움 가운데 빠져 있었으며, 무지로 인해 복음과 구원에 속한 위대한 진리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른 것들로 그것들을 덮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8세기로 나아가 봅시다. 18세기의 위대한 복음주의적 각성, 특히 휘트필드나 웨슬리의 이름을 들어 말하는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전도 역시 똑같은 양상이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 위대한 부흥이 있기 전, 교회 상태는 제가 여러분에게 묘사해 온 바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교회는 생명력을 잃었고 쓸모가 없었으며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이러한 양상이 존재하게 되었습니까? 그 당시 교회의 전체 상태는 또다시 종교개혁 이전의 양상을 되풀이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형태는 약간 달랐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대 중추인 교리들을 설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교리들을 사람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이신론이 분위기를 장악했었습니다. 이신론은 하나님이 우주를 만드신 이후로는 관여하지 않으시고 뒤로 물러서 계신다는 식의 체계였습니다. 이신론과 합리주의가 판을 쳤습니다. 이에 대해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유명한 “종교의 유추“를 쓴 버틀러 감독이라는 위대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가 이 책을 쓴 것은 이신론과 합리주의가 생명을 지니고 있지 못함을 지적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알다시피 교회의 상태는 죽어 있었습니다. 구원의 생명수가 감추어졌고, 모든 합리주의와 철학에 의해서 더럽혀 졌습니다.

 

다시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1859년에 일어난 위대한 부흥, 특히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부흥 이전의 역사를 읽어보면 역시 똑같은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부흥이 있기 이전 시기의 특징은, 역시 생명이 없고 무서울 정도로 죽어 있었으며 특별한 형태를 띠었습니다. 부흥이 일어나기 전 몇 해 동안(특히 20-30년간의 기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북아일랜드의 장로교회는 교리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아리우스주의라 불리우는 교리를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이 아리우스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과 영원성을 부인하는 교리입니다. 아리우스는 주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이며, 아버지와 동등하거나 영원히 공존하는 이가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아리우스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완전히 생명력을 잃고 쓸모 없게 된 원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잘못이 교정되고, 불식되며, 교회가 참된 교리를 회복했을 때 비로소 부흥이 사람들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제가 제시하는 첫 번째 증거입니다. 교회가 죽어있고 침체되어 있을 때, 교회 생활을 특징짓는 가장 주요한 사실은, 교회가 생명을 좌우하는 어떤 중대한 진리를 가리거나 무시하는 일이 언제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어떤 본질적인 진리를 부인하거나 무시한 시대에는 어떠한 부흥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점을 엄청나게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기독교 신앙의 대 중추요 근본적인 조목들을 부인한 교회에서, 부흥이 일어났다는 소리를 전혀 들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유니테리언(하나님의 단일적 인격성을 주장하고, 삼위일체성에 대한 정통적 교리를 거부한다)가운데 부흥이 일어났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곳에서 부흥이 일어난 적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것을 들어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순전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대면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로, 교회사를 보면 그러한 교회들은 부흥을 맞고 있는 자들을 반대하고, 언제나 핍박했다는 것을 분명히 발견할 것입니다. 이것은 제 의견이 아니라 역사입니다. 100년 전에 위대한 부흥이 일어났을 때, 유니테리언들은 미국이나 북아일랜드나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부흥을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부흥을 반대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그러한 자세를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합리론자들이기 때문에 부흥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북아일랜드의 역사를 보면, 그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는 수백 년 전부터 내려온 관습대로, 소위 성수라는 것을 실제로 판매하고 있었고, 사람들에게 그 성수를 뿌리거나 마심으로써 부흥을 피하고 빠져나가라고 강권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것들을 언급하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것이 즐거워서가 아니라, 만일 우리가 부흥에 관심을 갖는다면, 부흥을 저해하는 것들을 알아야 한다는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가장 중대한 진리와 교리들을 막아 버린 것이 언제나 부흥을 저해했습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원리는, 예외 없이 이러한 중추적인 교리들을 발견한 것이 궁극적으로 부흥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언제나 부흥 이전의 예비적인 조짐이 있기 마련입니다. 갑작스럽게 부흥이 오는 것같이 보입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조용하게 진행되는 예비적인 단계,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한 준비단계가 있음을 언제나 발견할 것입니다. 그 준비 단계는 어김없이 이 장엄하고 영광스러우며 중추적인 진리들을 재발견하는 일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종교개혁의 역사를 생각해 봅시다. 프로테스탄트 부흥이 임한 것은 마르틴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장엄한 진리를 깨달은 후의 일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통해 그 진리를 따라감으로써 성령을 물 붓듯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길을 예비한 것입니다. 이 일이 종교 개혁이 파급된 영국과 다른 모든 나라에서도 일어났습니다. 17세기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정도는 다르지만, 이러한 진리에 대한 강조는 청교도 시대에 체험했던 위대한 축복을 불러왔습니다.

 

우리 모두는 분명히 18세기에 바로 이러한 일이 일어났음을 알아야 합니다. 18세기의 교회는 죽어 있었음을 여러분은 발견할 것입니다. 버틀러 감독은 그의 책 “종교의 유추”를 썼고, “보일 강좌”를 개설하여 이러한 합리주의에 대항하려고 애를 섰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부흥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휘트필드와 웨슬리와 그와 같은 다른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부흥이 이러한 사람들을 통해서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이 이야기는 매우 잘 알려져 있습니다. 존 웨슬리가 알더스게이트 스트리트에서 그 마음이 성령으로 “이상하게 뜨거워진” 것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2개월 전의 일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1738 5 24일 알더스게이트 스트리트에서 그 체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1738 3월에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진리에 눈을 떴습니다. 런던과 옥스퍼드 사이를 오가며 피터 뷜로우와 웨슬리가 나눈 유명한 대화는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진리에 대한 것뿐이었습니다. 그것을 알고 그 진리를 포착하게 된 후에야 비로소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시고 그를 사용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웨슬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휘트필드에게도 동일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분명히 여러분이 웨일즈로 시선을 돌리면 똑같은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 당시 거기에는 가장 위대한 설교자중 하나인 다니엘 로랜드가 있었습니다. 라일 감독은 그는 사도 시대 이후 가장 위대한 설교자였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로랜드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의 경우와 똑같았습니다. 그는 부목사였고 설교가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무익하고, 죽어있었으며, 그의 사역을 통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그리피스 존스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진리를 알고 나서 몇 개월 동안은 아직 그 진리의 능력을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찬 예식에 참여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여, 그를 충만케 했고 그로부터 웨일즈 내에서 18세기의 위대한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부흥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미 상기시켜 드린바와 같이 100년 전, 특히 북아일랜드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장로교회 사람들이 이 아리우스주의를 제거하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에 관한 온전한 진리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을 때, 힘있는 복락이 임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흥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어떤 진리들이 있다고 강조하는 바입니다. 이 진리들을 부인하거나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면, 부흥의 축복을 기대할 아무런 자격도 없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계속해서 흙과 잡동사니로 그 우물을 메워버려 생명수는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가 솔직히 고백하는데, 만일 저 자신의 성향을 따른다면 이러한 것들을 언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것들을 언급하면 비판적인 기질을 소유했다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비평하기 좋아하고, 분리주의적이며, 개인주의적이고, 전혀 협력하지 않는 성벽을 가지고 있다는 비난을 받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든지 자신의 느낌과 자신의 평판 때문에 자신이 믿는 진리를 전파하는 데 주저한다면 그는 사실 말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 기초하여 이러한 진리들을 무시하거나 부인하거나 심지어 소홀히 여기면 부흥을 만날 수 없다는 깊은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제가 여러분에게 보여드렸듯이 교회사가 이 점을 충분히 지지합니다.)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블레셋 사람들의 이 소행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자”고 말해 보았자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한일을 불식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삭이 한 일입니다.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삭의 종들은 잡동사니와 쓰레기와 그 우물을 메우고 있던 모든 흙을 다 걷어냈습니다. 그랬더니 그전과 같이 물이 있었습니다. 모든 부흥은 항상 그전에 예비적인 일이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제가 여러분 앞에 제시해야 하는 어떤 것들, 곡 믿어야 하는 어떤 진리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들을 부인할 때 부흥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진리들을 살펴보아야 하고 그 진리들을 바른 순서를 따라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면 블레셋 사람들의 극악한 소행으로 인해 부인되고 감추어진 진리들은 무엇입니까? 여기에 첫 번째 진리가 있습니다. 그 진리는 역사하시고 간섭하시며 교회 역사를 주관하시고 개인의 삶의 과정을 주장하시는 주권적이고 초월적인 살아 계신 하나님에 관한 진리입니다.

먼저 이것부터 시작해야겠습니다. 이것은 모든 교리의 기초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디모데가 처한 상황은 난처했습니다. 그는 고통스러웠고 소망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또 장래가 어떻게 될지 몰라 마음을 졸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나이가 많았고 죽음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 때 디모데는 두려워했고 소심해졌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네가 말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진리를 부인하면서 운운하는 이 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다”고 편지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딤후2:19)

 

모든 것의 기초는 영원하시고 영광스러운 자유 가운데서 행하시며 교회전체와 개인의 삶을 간섭하시고 주권적이고 초월적인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오늘날 교회에 다른 그 무엇보다 더 분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것에서부터 시작하지 못하고 그 진리를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날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철학자들의 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철학자들의 신은 주권적이거나 초월적이거나 살아 계신 신이 아닙니다. 그러한 신은 하나의 추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원인 없는 원인”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얼마나 우습습니까! 하나님은 추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철학적인 개념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홀로 존재하십니다. 그분은 생명이시오, 모든 생명과 존재의 주이십니다. 철학자들은 입에 파이프를 물고 하나님에 관해서 논합니다. 마치 자기들이 그 하나님을 조종할 수 있고, 자기들 마음대로 운운할 수 있는 존재인 것처럼 떠들어댑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조건하에서는 결코 부흥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하나의 추상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은 논쟁의 대상이 될 만한 분도 아니요, 우리의 생각에 들어맞는 분도 아닙니다. 철학은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언제나 저줏거리였습니다. 오늘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이 영광스러운 진리가 감추어지는 또 다른 방식은, 사람들이 소위 “내재성의 철학”이라 부르는 것에 서 비롯됩니다.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 아니라, 모든 만물에 내재하시는 분이라는 식으로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 속에 있고 자연 전체 속에 들어 있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이것은 정확히 말해서 범신론이라 할 수는 없지만 범신론에 아주 가까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하나님은 모든 만물 속에 내재해 계시므로, 그가 외적으로 행동하기를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서나 모든 것 속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거룩합니다. 그래서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을 그들은 싫어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주권적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초월성을 부인하는 또 다른 방식입니다. 이신론에 관해서 제가 언급했던 또 다른 신조가 있습니다. 지금은 그 명칭이 그렇게 자주 언급되지는 않지만 매우 일반화된 것입니다. 200년 전에는 그 신조의 명칭이 불려 졌습니다. 그때처럼 오늘날도 그렇게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그저 창조주로만 믿는 신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이후에는 그 창조하신 세상에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이신론은 하나님의 섭리 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영역에서 뿐 아니라 모든 도덕적인 영역과 영적인 영역에서도 하나님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자기가 지으신 우주에 대해 눈을 감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마치 위대한 시계공이 시계를 만들어 작동하게 해놓고는 내버려두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생각하느라 오래 머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의 생각을 시험해 보고,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는 사상들이 무엇인지를 인식하라고 촉구하는 바입니다. 그들의 신개념은 하나님은 간섭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역사하지 않는 하나님, 언제나 사람들이 다가가 만나야 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처럼 멀리 계시고, 감정도 없으며, 움직이지 않으시는 분인데도, 사람들은 언제나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은 멀리 떨어진 하나님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부흥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흥이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임하시고, 나타나심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그러한 신, 이신론자들이나 합리론자들이 생각하는 신을 믿고 있다면, 결코 부흥을 체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본들 소용없고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 되어 버립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면서 그러한 자세를 보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한 기도는 형식적이고 기계적입니다. 거기에는 살아있는 접촉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원세계로 사라지고 사람이 무대의 중심을 차지하는 격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에 관한 사람의 생각이지, 사람에 관한 하나님의 생각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주권적이고 초월적이며 영원하신 우주의 하나님, 살아서 역사하시는 그런 하나님을 믿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 하시니 나도 일 한다”(5:17)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만물 속에 내재되어 계신 분이거나, 아니면 우주를 떠나 그저 초연한 자세로 계신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높이 계시면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역사하시고, 간섭하시며, 자기 백성들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권적이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분명하고 바르지 못하다면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알다시피, 블레셋 사람들이 행한 일은 그것을 흐려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을 다시 얻으려면 먼저 그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첫째 되는 진리가 가려지면, 둘째 되는 진리도 역시 가려집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의 권위에 대한 문제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소행은 필연적으로 이러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편적인 관점에서 생각해야 하는데, 이는 블레셋 사람들 가운데도 여러 그룹과 여러 지류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계시를 부인합니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관점이 제가 앞에서 묘사한 것과 같다면 계시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영감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전제나 진술을 통해서 자신에 관한 진리를 계시했음을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어떻게 진리에 이르게 됩니까? 그들의 대답은, 진리를 탐구함으로써 얻고, 이치적으로 따져 보며 자기들의 총명과 사변을 통해서 진리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간단하게 진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모든 강조점을 하나님을 찾는 인간의 탐구에 두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전혀 계시하지 않으시는 분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으시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근본적인 전제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것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모든 것은 철학자들이나 사상가들에 의해서 주도되고 통제 받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자신들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을 만듭니다. 그들이 만든 신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 신은 거짓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논지는 이러합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우리가 부흥에 대해 말할 권리도, 부흥을 기대할 권리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부흥을 소망할 이유는 더욱 더 없습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에 있어서 우리의 최종적인 권위는 무엇입니까?

내 생각과 의지로 성경에서 바르고 악한 것을 선별해 내거나, 아니면 내가 찬동하는 것만 붙잡으면 된다고 제가 외치고 있습니까? 이렇게 되면 나를 권위로 삼는 것이지 성경을 권위로 삼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내 이성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지, 하나님의 계시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모든 부흥의 역사를 읽어보면, 그 부흥의 세기는 사람들이 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을 때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글자 그대로 성경을 믿었습니다. 또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하나님에 관한 진리이며,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나, 그에 수반되는 모든 것에 대한 진리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성경은 하나님께 영감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쓰여졌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에 자신들을 복종시켰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판단하는 재판장으로서 성경보다 위에 서려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스스로 옳고 그른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자들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은 무섭게도 지난 150여 년 동안 무서운 활동을 자행했습니다.

 

오늘날의 상태가 바로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전혀 어떠한 권위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경의 권위를 부인합니다. 자기들의 의견과 철학과 과학과 학식을 내세웁니다. 초자연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이적을 믿지 않으며, 과학이야말로 자기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로 진리가 가려졌습니다. 하나님 편에서의 직접적인 행위는 무조건 일축해 버립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철학자들의 체계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매우 긴박한 것들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간청하는데, 과거의 역사를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보다 자기들의 생각과 의견을 앞세울 때, 부흥을 만났던 적이 전혀 없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무시당하는 크고 중추적인 믿음의 조항은, 사람이 죄에 빠져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교리야말로 육에 속한 사람이 혐오하는 교리입니다. 이 교리는 자기를 모독한다고 느낍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언제나 이와 같은 태도를 견지해 왔습니다. 역사로 돌아가서 다시 한 번 역사를 읽어보십시오. 교회가 생명력을 잃고 침체되었던 모든 시기에 사람들은 죄를 그런 식으로 믿지 않았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믿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신앙과 관련하여 오늘날 죄의 교리와 하나님의 진로의 교리처럼 미움을 받는 것이 또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심리학의 차원에서 설명하려 듭니다. 사람들에게 죄에 빠졌다고 하는 것은 인류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그런 하나님은 전혀 하나님일 수 없다. 그것은 벌주기를 잘하시는 구약의 하나님일 뿐이다.

 

얼마 전에 아주 뛰어난 한 설교자가 자기는 “시내산 꼭대기에 앉아서 진노와 정죄를 외치던 구약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자기는 예수님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개념은 사람이신 하나님의 교리와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러한 점들이야말로 블레셋 사람들이 행한 일과 같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모든 부흥의 역사가 그 점을 단번에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흥을 체험하는 사람들은 먼저 다른 무엇보다도 두 가지를 의식하게 됩니다. 하나는 자기들은 전적으로 쓸모 없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부흥이 일어날 때 남자든 여자든 죄의식으로 애통하며 신음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쓸모 없고, 비열함을 뼈저리게 느낀 나머지, 도저히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을 갖습니다. 자신들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그들은 모릅니다. 그들은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영혼의 고뇌에 빠집니다. 역사를 읽어보면, 이러한 일이 두드러지게 나타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사실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이를 알리요”입니다.(17:9)

 

사도 바울 말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18,24)

 

부흥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바울이 느꼈던 것처럼 느낍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죄인임을 알고 무서워하며 구원을 위해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그런 후에는 거룩한 하나님의 진노를 직면하게 되고, 이것으로 인해 그들은 가장 깊은 고뇌를 느끼게 됩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하며, 하나님은 자신의 신적 본성과 존재를 걸고 죄를 미워하심이 마땅함을 압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렇게 죄를 미워하신다는 것도 압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 속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약과 구약 모두 이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구약성경과 대치되는 분으로 생각하는데,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는 지옥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 하느니라”(9:48)

 

이러한 사상들을 말씀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구약에서뿐만 아니라, 신약 어디서든 이러한 유의 진술이 나타납니다. 성경 전체에서 요한계시록 6장에 있는 진술처럼 무서운 것이 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은 종말을 맞을 때 사람들의 상태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볼 때, 산들과 바위를 향해 자기들을 가리워 달라고 외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보지 않으려고 그렇게 합니까? 하나님의 어린양, 하나님의 사람의 화신이었던 그 어린양의 진노로부터 자신들을 가리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것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어린양의 진노입니다. 부흥이나 재 각성 운동이 일어나는 시기마다 이것을 깨닫는 일이 있게 됩니다. 사람들은 살아 계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소스라쳐 놀라게 됩니다. 자기들의 무가치함을 알고 나서는 어찌해야 할지, 어디에 머리를 두어야 할지 모르게 됩니다. 그들은 고뇌하며 여러 날 동안 고통 당하게 됩니다.

 

부흥을 맞이하게 되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부인되고 혐오 받는 진리가 바로 이것이 아닙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흙이나 쓰레기로 덮어 버린 것이 다름 아닌 이것이 아닙니까? 저는 단지 교리를 위해서 논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논쟁을 벌이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제가 이 점을 이처럼 절박하게 강조하는 것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저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겸손해지고, 낮아지며, 이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 앞에서 땅에 엎드러지기까지, 아니 조나단 에드워즈의 말을 빌리면, 성난 하나님 앞에 엎드러지기까지는 어떠한 부흥도 기대할 수 없다는 깊은 확신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와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 사이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만일 우리가 이러한 기초를 가지지 못한다면 더 이상 진행해 나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그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교리를 우리는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참으로 존재하고 역사하며 주권적이고 초월적인 거룩한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면 진실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에 여러분 자신을 온전히 복종시키지 않는다면, 또한 여러분 자신의 마음의 부패를 의식하고 아담으로부터 본원적으로 물려받은 본성의 비열함을 알지 못한다면, 또한 죄를 미워하시는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은 무력하고 철저한 절망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부흥에 대해서 말할 권리도 없고 부흥을 위해 기도할 자격도 없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부흥이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 죄 가운데 빠진 사람의 불의와 소망 없음과 무력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사 이러한 것들을 묵상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갑니까?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이 가지는 태도는 무엇입니까? 우리 자신에서부터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생각할 문제입니다. 부흥이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그 이름을 들어 본적이 없는 무명의 사람들, 소위 교회에서 하찮은 지체들을 들어 쓰십니다. 하나님은 자주 그러한 사람들을 통해서 가장 강력한 역사를 행하십니다.

 

한 번도 이름을 들어 본적이 없는 사람이 우리가 갈망하는 부흥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가 될지 알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과 마음속에 블레셋 사람들이 행한 일의 증거가 있습니까? 있다면 그것을 제거하십시오. 그리고 기초적인 교리들로 돌아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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